달마록(達磨錄)

'달마 혈맥론血脈論 4'

수선님 2022. 6. 5. 14:19

달마 혈맥론血脈論 4

"만약 견성見性하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부처라 일컫는다면 이런 중생은 큰 죄인이라, 일체 중생을 속여서 마군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만약 견성하지 못하면 12부경을 모두 연설한다 해도 다 악마의 말이요, 악마의 권속이지 부처의 제자는 아니다. 이렇듯 검고 흰 것을 분간할 줄 모르는데 무엇에 의지해 생사를 면하겠는가. 만약 견성하면 곧 부처요, 견성하지 못하면 곧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성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라, 성품 밖에 부처가 없으니 부처가 바로 이 성품이다. 그러므로 이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부처를 떠나서 성품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물었다.

“만약 견성을 못해도 염불하고, 경을 읽고, 보시하고, 계행을 지키고, 정진하며 널리 복을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될 수 없다.”

“어째서 안됩니까.”

“작은 것이라도 얻을 법이 있으면 이는 유위법이요, 인과법이고, 과보를 받는 법이며, 윤회하는 법이라서 생사를 면치 못하는데 언제 부처를 이루겠는가?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견성해야 한다. 만약 견성하지 못하면 인과 등의 말은 모두 외도의 법이 된다.

만약 부처라면 외도의 법을 익히지 않는다. 부처는 업業도 없고 인과도 없다. 조금이라도 얻을 법이 있다고 한다면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짓이니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마음이라든가, 기능, 견해, 소견 따위에 조금이라도 집착함이 있다면 부처는 이 모두를 허용하지 않는다."

see :

달마는 중국에 건너와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만을 말한다.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등 여러 방편을 들기도 하지만 그가 입을 여는 목적은 오직 '성품을 봄見性'에 있다.

위 글에서도 '만약 견성見性하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부처라 일컫는다면 이런 중생은 큰 죄인이다', '견성하지 못하면 12부경을 모두 연설한다 해도 다 악마의 말이요, 악마의 권속이지 부처의 제자는 아니다', '만약 견성하면 곧 부처요, 견성하지 못하면 곧 중생이다',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견성해야 한다' 등 오직 '성품 봄見性' 타령 일색이다.

그러면 성품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데, 진실로 이 '성품'은 무엇이며, 또한 성품이 있다면 어디에 있으며, 또 어떻게 성품을 봐서 부처가 되는지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라면 오직 이 성품 하나를 알고, 이것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고, 이것을 보는 방법을 알아채서 마음에 통하기만 하면 마음공부를 끝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설명할 수도 없으며 모든 개념, 관념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세속적인 관념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고, 말과 문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말, 글자 없이는 그 뜻을 펼칠 수도 없다. 이 뜻을 잘 알고서 한번 읽고는 마음에 담아둔 채 잊어버리는 게 좋다.

먼저 '성품'이란 무엇인가?

성품은 사전적으로 사람의 성질과 됨됨이, 곧 품성과 인격을 뜻하는데, 모두 추상적인 어휘라서 그 개념을 잡기가 어렵다. 성품을 다른 말로 본성本性, 본심本心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이름은 사람이 임의로 지어서 쓰는 것이므로 무엇이라 불러도 좋지만, 아무튼 모든 생명체가 본래 갖추고 있는 성질, 마음을 가리킨다. 이 성질에는 석가가 깨달은 후 맨 처음에 말한 '모든 중생이 다 여래의 지혜知慧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구나'고 탄식한 그 지혜, 복덕, 능력 등을 모두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물에는 젖는 성질, 불에는 태우는 성질, 흙은 딱딱한 성질 등 사물에도 개별적인 성품이 있지만, 이것들은 차치하고, 우선 모든 중생이 고유하게 갖추고 있는 성질, 능력을 열거해 보자면, 개나 고양이도 보고, 듣고, 짖어대고, 발을 움직이고, 걷고 뛸 수 있는 근본적인 능력과 사람 말을 따르고 이해하여 행동할 줄도 아는 낮은 지혜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생도 이렇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는 겉으로 보기에는 보다 더 큰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하겠지만 석가가 말했듯이 모든 중생의 근본 성품은 다 평등하여 하나로 똑같다는 것이 바로 불성佛性의 뜻이다. 여기서 불성佛性의 의미는 중생의 성품, 곧 본성에 지혜, 복덕, 능력과 함께 깨달음의 성질도 포함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품', 곧 '본성'은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지혜, 덕성, 온갖 능력과 깨달음 등의 성질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오감五感과 지각을 활용하여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을 느끼고, 인지, 분별하여 알고 깨닫는 능력과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서 손으로 잡고, 쥐고, 흔들고, 휘두르고, 내뻗고, 발로 차고, 걷고, 뛰는 모든 행동과 삽, 호미 등 도구를 이용하여 땅을 파고, 일구고, 심고, 가꾸고 하는 능력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두번째 명제로서 이 '성품'은 어디에 있는지 아주 뻔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성품, 곧 본성은 추상적인 이름으로서 무형무색무미무취無形無色無味無臭한 것이라서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음은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성품이 어디에 있다고 지적하는 게 가당치도 않은데, 그래서 중생들은 이것을 전혀 믿으려고도 하지 않지만, 석가 등 깨친 자들이 잘 살펴보니 성품은 위에서 말한 능력들이 작용하는 곳에 있음을 깨달아 본 것이다.

진실로 성품을 볼 수는 없지만 철저히 깨닫고 보면 성품이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남을 실감하니, 이래서 불가사의 해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깨달은 자는 사람이 오감을 활용하여 행위하는 모든 곳에 성품이 작용함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품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을 느끼고, 인지하고, 분별하고, 알고, 깨닫고, 손으로 잡고, 쥐고, 흔들고, 휘두르고, 내뻗고, 발로 차고, 걷고, 뛰고, 도구를 사용하여 땅을 파고, 일구고, 심고, 가꾸고, 입으로 말하고, 씹고, 침을 내뱉고, 눈을 깜박이고 눈썹을 올리고, 내리고, 귀를 쫑긋 세우고, 두뇌로 생각하고 하는 모든 곳에 작용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을 쓰는 곳에는 어디든지 성품이 있어 그 작용을 한다. 이것을 깨달으면 곧바로 견성見性한다.

그러면 세번째 명제로서, 이 '성품'을 도대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위에서 말했다시피, 아무 모습, 색깔, 냄새, 맛도 없는 성품을 사람의 육안으로 보는 것은 진실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가사의 해탈을 맛봐야 보이지 않는 성품이 눈앞에 분명히 드러남을 스스로 체감하는데, 깨닫기 전에는 이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성품을 보는 방법은 위 두번째 명제에서 열거한, 우리가 마음을 쓰는 곳, 온갖 작용하는 곳에서 이것을 보는 것인데, 성품은 본래 자타自他, 곧 나와 남이 없기 때문에 만약 자신의 마음 쓰는 곳에서 보지 못하면 다른 생명체가 마음을 쓰고 작용하는 곳에서 이것을 깨달아 볼 수도 있다. 가령 새가 짹짹! 지저귀는 곳도, 닭이 꼬꼬댁! 우는 곳도, 소, 돼지가 욕심스레 여물을 먹는 곳도 모두 성품이 작용하는 곳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성품 없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러므로 깨달음, 곧 성품을 볼 수 있는 모티브는 온 천지에 가득찼다.

성품을 봄은 이와 같으니, '도인道人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도道다' 라고도 하고, '온 누리가 사문의 눈이다' 라는 말도 있다. 서산 휴정대사는 닭이 우는 곳에서 깨달았고, 경허선사는 '콧구멍 없는 소'라는 한 마디에서, 영운선사는 복사꽃을 보고서, 향엄선사는 기와조각이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서, 고정선사는 부채를 흔드는 것을 보고, 수료선사는 마조대사에게 한번 짖밟힘으로써 마음의 눈을 떴다. 청원선사는 '작은 도끼 한 자루 달라'는 석두의 요구에 한 쪽 발을 내밀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기연들은 수없이 많으니 성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성품을 볼 기회가 이렇게도 많은데 어째서 보통 사람들은 그 기회를 스스로 포착하지 못하는가?

사실상 모든 사람이 온갖 곳에서 성품을 보고 있는데도, 선지식이 그것을 가리켜줘도 알지 못하는 것은 석가가 말한 대로 허망한 생각과 집착이 마음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릴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기도 한데, 잠시 어린애 시절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그때에는 배고프거나 아프면 그냥 울고, 먹을 게 주어지면 그냥 헤헤 웃기만 했다. 지금 아이들도 잘 관찰해보면 울고 웃는 등 그들의 행위에는 생각이 개입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애들이 지금 깨달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생각은 우리가 이미 배운 이름과 말, 글자, 개념, 관념, 지식 등에서 저절로 파생되어 나온다. 다만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문명의 발달을 위하여 만들어 쓰는 온갖 이름, 문자, 지식, 학문 가운데, 대표적으로 이름과 모습名相에 속고 집착하여 그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즉각 반사적으로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모두가 헛된 생각妄念이다. 그래서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져봐야 깨달을 분수라도 있다고 말한다.

허망한 생각, 곧 분별망상은 소년소녀시절 이후로부터는 이미 습관화되어 한 생각 돌이켜서 간단히 없애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석가를 비롯하여 그동안의 선지식들이 허망한 생각을 끊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수단방법을 강구하여 가르쳐온 것인데, 사람에 따라 그 효과가 빠르고 느림이 있고, 또한 자신의 노력 나름으로 지름길을 찾아서 이것을 빨리 극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명이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 중단하지만, 결론적으로 성품을 보고 깨닫는 것은 한순간에 정신적인 변혁이 일어남으로써 가능하다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성품, 곧 본성을 떠나서는 한시라도 살 수 없고, 우리 자신이라고 할 것은 이 성품밖에 없다. 여러번 얘기했지만, 몸뚱이는 우리 본성이 사용하는 도구로서 몸 자체는 아무것도 인식하고 알아 깨닫지 못한다. 눈, 귀, 코, 혀, 피부 등을 따로 떼어서 놓아두면 제 노릇을 할 것 같은가? 모두 자성이 없는 돌이나 나무 같은 무정물일뿐이다. 이것들을 도구로서 마음대로 부리고 굴리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 성품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절대성 자리(성품)가 온갖 상대성, 차별상을 굴린다 라고도 말한다.

성품은 허공과 같아서 그 바탕이 없기 때문에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작용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그 없는 바탕이 곧 작용이다. 이것은 바탕體과 작용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요, 바탕이 곧 작용이요, 작용이 곧 바탕이라는 말인데, 깨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이나 경전, 선어록, 화두 등을 통해서든, 선지식을 통해서든, 마음에 사무쳐서 도가 통하기 전에는 이것을 실감해 보기는 아주 어렵다. 이것도 사람의 근본적인 기질,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마음을 한번 뒤집어서, 제 팔식의 아뢰야식을 꿰뚫고 나가야 이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계속 두드려주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선정에 들든,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경전을 암송하든, 이 모든 방편이 알고 보면 마음을 계속 두드려 의식의 세계에서 잠재,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빠름과 느림이 있겠지만 깨달은 이는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그러므로 문자를 그냥 이해하는 수준에서는 천년을 공부하더라도 어렵다는 말을 한다.

위에서 말한 내용을 모두 다 이해하고 알아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해오解悟는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말과 글로써 깨달음을 이해하여 깨달음의 수준으로 올라갔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초견성初見性, 또는 지견知見이 나는 경지까지는 간다. 이러한 해오解悟의 깨달음과 믿음을 발판으로 계속 선禪 도리로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면 조만간 증오證悟하는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증오證悟는 위 두, 세번째 명제에서 설명했듯이 자신과 모든 생명체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모두 성품의 드러남이요, 도道임을 직접 확인하고 묵묵히 통하는 것이므로, 다시 두말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것은 말과 생각을 떠난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므로 경전이나 해설 논문에 기대지 말고, 분별할 수 없는 곳에서 곧바로 알아차리는 게 좋을 것이다.

세존이 꽃을 들고,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든 곳이 바로 이 자리이니, 스스로 손을 들고 흔들며, 다리를 내뻗고 걷어차다가 졸지에 통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글쓴이도 더 이상 입을 다물을까 한다.

'마음공부라는 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곧 Nothing이 되는 법을 배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나면

이것이 곧 유일하고 모든 것임을 알게 된다.

석가가 600권 반야경에서 가장 강조한 것

바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반야바라밀을 닦으라는 소리이다.

마음도, 부처도, 생사도, 열반도 없으니

그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곧 신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