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 죽었다
우리가 처음 만날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책의 1부 머리말에서부터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10년간 고독을 즐기던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해 주기 위해서 산을 내려오기로 결심합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와 처음 만난 이는 어느 성자였습니다. 그는 성자에게 산을 내려온 이유를 설명하고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노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야기하고, 성자는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숲속으로, 그리고 광야로 갔더란 말이냐?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제 신을 사랑하노라. 사람은 사랑하지 않노라. 사람, 그것은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다.”라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자께서 숲속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하자 성자는 “노래를 지어 부르지. 또 노래를 지으면서 웃고 울며 중얼거리지.”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처음 만난 인간인 성자에게 ‘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관해 말하지요. 즉, 이 책에 처음으로 나오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바로 ‘신의 죽음’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에게 알려 준 첫 소식이니만큼 ‘신의 죽음’은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여러분도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무턱대고 니체를 사악한 악마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먼저 ‘신의 죽음’이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본 뒤에 니체를 비난해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다음 그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자, 그럼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에게 전한 첫 소식인 ‘신의 죽음’을 통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봤던 차라투스트라와 성자의 대화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어디까지 말했지요?
‘예전엔 사람을 사랑했으나, 지금은 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럼 왜 인간을 사랑했던 성자가 인간을 혐오하고 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에 대해 뭐라고 했었지요?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했습니다.
성자가 신을 찬양하게 된 이유는 신이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성자가 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수긍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삶 전체를 보면 비난받을 만한 일들이 몇 가지씩은 발견되니까요. 역사 이래로 인간은 언제나 완전한 존재를 동경해 왔습니다. 그러한 동경이 한편으론 인간의 문화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인간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낳아 부정적으로 작용했지요. (‘왜 나는 신처럼 오래 살지 못하는 거냐고!’ 처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완전한 존재라는 관념이 인간에 대한 혐오와 불신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변화가 많고 예측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덩어리인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완전한 존재와 완전한 세계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신(神)’과 ‘천국(天國)’이라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니체가 분석한 신(神)이라는 관념의 역사이고, 니체는 그러한 신의 관념을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라고.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모두 늙고 병들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야생동물들과 비교할 때 힘도 약하며, 전쟁을 통해 자신의 종족을 죽이기도 하는 등 비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 존재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런 인간을 긍정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그러한 까닭으로, 인간인 우리가 신의 존재를 꿈꾸었다고 해서 그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또 우리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완전한 존재인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하고. 그런 신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 아닐까? 등의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고.
“‘신을 생각해낸 것은 참으로 비열한 생각이었어. 왜냐하면 그건 용기 없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지.”, “인간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대지를 부정하고 증오하면서 눈을 하늘로만 향했다. 사실 하늘에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이 하늘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냈는가? 인간은 대지 위에서 가질 수 없었던 것들, 꿈에서나 보았던 것들을 온통 하늘에 그려 넣었고 그것이 하늘에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라고 말이죠.
니체가 폭로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나약함입니다. “삶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충만한 의미를 새겨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체는 니체의 생각과는 달랐어요. 왜냐하면 그건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또 인간에겐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지요. 마치 외모가 못생긴 사람이 콤플렉스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혐오하게 되듯이, 인간은 스스로와 그 삶을 혐오하게 된 거지요. 니체가 본 인간의 역사는 그런 콤플렉스의 역사였습니다.
바로 그때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긴급뉴스를 전해요. ‘신은 죽었다’라는 엄청난 소식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신의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사망’이 아니에요. 차라투스트라가 전한 신의 죽음은 이제 인간에게 신의 가치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전만큼 신이 인간의 삶 속에서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 존재감을 잃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신이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원인은, 신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에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악마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신 또한 자신의 지옥을 갖고 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의 지옥이다”라고. 그리고 악마는 이런 말도 했다. “신은 죽었다.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신은 죽고만 것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고 그래서 인간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죽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연민이란 기독교의 덕목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아름답다고 말하지요. 나약한 사람은 삶의 부정적인 면들, 즉 추하고 고통스러운 면을 피하려 해요. 그런 상황에 처한 이에겐 위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니체는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통과 추함도 삶의 일부이고, 그것을 회피한다면 우리는 삶을 회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고통이나 추함 때문에 누군가를 연민한다면 더더욱 잘못이지요.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연민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삶의 주인으로 사는 길을 방해하고, 결국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떨어뜨리니까요. 니체는 진정한 사랑이란 삶의 부정적인 면도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삶 전체를 긍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인간을 연민해선 안 되었던 거지요.
그렇다면 신은 살해당했다고 하는 데 신은 왜 죽었을까? 그 살해범은 충격적이게도 신이 그토록 불쌍히 여긴 인간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죽인 인간을 이렇게 부릅니다. “더없이 추악한 자!”라고.
그 더없이 추악한 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을 죽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을 목격한 바 있는 그런 눈으로 사람들의 깊은 속내와 바탕, 은폐된 치욕과 추함을 남김없이 보고 말았으니, 그의 연민은 수치심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나의 더없이 추악한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왔던 것이다. 호기심 많고 주제넘은 자, 연민의 정이 너무나도 깊었던 자는 죽어 마땅하다.”
인간이 신을 죽인 이유는 신의 연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연민했던 인간은 자신의 삶을 경멸하고 부정하는 이들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웠고, 그런 모습을 낱낱이 보고 있는 신을 견딜 수 없었던 거지요. 신의 연민은 더없이 추악한 자의 수치심을 더욱 증가시켰고, 인간은 자신을 불쌍히 여긴 신을 증오하게 되었지요.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누군가 나를 동정하는 것만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죽였던 거지요.
하지만 더없이 추악한 인간에 의한 신의 죽음은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신이 죽었다고 해서 인간의 추함이 사라지진 않거든요. 인간이 어떻게 신이란 관념을 만들어냈는지 기억해 봐요. ‘자기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추한 것으로 부정할 때 신을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다. 맞아요. 결국 신을 죽인 인간은 다시 신을 살려내고 말아요. 이 책의 4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나귀를 신으로 받드는 ‘나귀의 축제’에서 더없이 추악한 자가 새로운 신앙을 부활시키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러면 신을 완전하게 죽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없이 추악한 자가 썼던 증오와 앙갚음 말고~) 니체는 ‘웃음’만이 신을 완전하게 죽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의 죽음은 신의 의미와 가치의 몰락입니다. 웃음은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삶을 긍정하는 자가 가지는 삶에 대한 태도(긍정적 자세)를 의미하지요. 삶을 긍정하는 자에겐 신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웃음으로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책을 읽을 때 유의할 점을 말하자면 니체는 이 책에서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예술적으로 그려냈지요. 차라투스트라를, 그리고 니체를 이해하려면 예술작품을 감상하듯이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예술작품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요. 그래서 음악을 듣듯이 천천히 이 책을 감상해야 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신이 죽은 두 번째 원인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신을 죽인 두 번째 살해자는 바로 교회(敎會)와 사제(司祭)들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볼까요? [오오~ 사제들이 지은 이 오두막을 보라! 저들은 감미로운 향으로 가득한 저들의 동굴을 교회라 부른다. 저들은 자신들을 거부하고 괴롭힌 존재를 신이라고 불러왔다. 실로 저들이 하는 경배 속에는 영웅적인 것이 많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말고는 달리 사랑할 줄 몰랐다! 저들이 말하는 구세주의 영혼은 갈라진 틈새 투성이다. 저들은 틈새 하나하나에 저들의 망상을, 저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대용품을 채워 넣었던 것이다.]
니체가 교회와 사제들을 신의 살해자로 지목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를 너무나 위대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의 사제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가르침을 왜곡하고 오히려 예수가 그토록 비판했던 가치들로 무장해 있었어요. 그래서 니체는 교회를 예수의 무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니체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니체는 자신의 저서인 《반(反)그리스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예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책입니다.)
니체가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수의 복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는 그동안 사제들과 교회가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신의 벌’이라는 구조(그런 얘기한 적 없다면서)를 강조한 탓에 신과 인간의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해요. 둘째, 예수는 신앙의 삶을 강조하지 않았어요. 평화, 적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도록 가르쳤지요. 셋째, 예수가 말하는 구원이란, 앞서 말했듯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요. 넷째, 예수의 천국이란 저 피안(彼岸)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깃든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이르는 것이고 그 실천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상에서 찾지 말고 현실에서 찾으라는 것이지요. 다섯째, 마음의 천국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은 것이며,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평등하지요. 예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자신이 특별한 신적 존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니체는 예수야말로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 신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예수야말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유일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제직에 있던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교회를 위협한 예수를 (위협적이니 없애야지 하면서) 죽이고 말았던 거지요.
그런데 사실 그 이후의 교회도 예수를 죽인 율법학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니체의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 이후 중세유럽의 교회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사제들은 삶에 대한 사랑과 천국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 본래의 가르침이 아닌 유일신과 그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 그리고 사랑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통한 구원, 또 부활과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교리만을 가르쳐 왔으니까. (신의 아들이자 불멸의 존재이니 무조건 믿어! 예수 안 믿으면 어떻게 된다고? 지옥가요! 라고.)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교회와 사제들이 신을 죽인 것과 같다는 게 니체의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차라투스트라가 전한 엄청난 소식, 즉 ‘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두 가지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가지 원인에서 보듯 신은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 신의 연민을 못 견뎌 신을 죽인 더없이 추악한 자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교회의 사제들에게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부정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동경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이런 인간들이 바로 왜곡된 신의 관념을 만들어냈고 결국엔 자신이 만들어낸 신을 다시 죽이는 끔찍한 짓을 벌인 거지요. 그러니 니체가 단지 기독교에 악한 감정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지요.
니체는 목사집안의 아들이었고 누구보다 기독교적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기독교를 비판하게 되었고, 점차 기독교로부터 멀어졌지만 예수에 대한 그의 연구를 볼 때 그는 누구보다도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던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야스퍼스란 철학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지요. “니체는 기독교 비판을 통해서 오히려 종교적으로는 더욱 성숙하였다.”
그리고 니체는 단지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신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유럽문명의 병듦과 그 결과로서의 신의 죽음을 선언하려고 했지요. 니체가 보기에 서양문명은 항상 삶의 현장인 대지의 가치를 부정해 왔고, 피안의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두었거든요.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모두 허상이고 진정한 세계는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 플라톤은 그 진정한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말했어요. 기독교 중심의 중세시대에는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고 깎아내렸지요(지옥). 그리고 인간이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어 영원히 살 수 있는 세계, 곧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하는 세계는 ‘천국’이라고 강조했지요.
근대에 들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칸트 같은 철학자는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다”고 말했어요. “인간은 항상 하나의 틀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틀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으니 마치 특정한 색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알 수 없다”는 설명이지요. 좀 더 정교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는 플라톤과 기독교의 설명을 칸트 역시 그대로 이어받고 있지요.
이렇게 서양의 문명은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중세의 기독교적 신(神), 그리고 근대철학자들의 ‘물자체’(인간 인식의 유한성 때문에 알 수 없는 사물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 달리했을 뿐, ‘저 세계’란 관념을 추구해 왔지요. 이렇듯 서양문명은 한결같이 우리의 삶을 부정하고 혐오해 왔지요. 니체는 살아가면서 삶을 혐오하는 것이야말로 서양문명의 병(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니체가 살았던 당시 신의 죽음이란 보편적인 현상이었어요. 19세기는 과학의 발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이미 신에 대한 신앙을 넘어서고 있었지요. 그래서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바라볼 때 허점투성이였던 기독교는 처량할 정도로 그 위치와 권위가 떨어져 있었지요. 무신론자들도 굉장히 많았고 말이지요.
하지만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서양문명의 병폐는 그가 살았던 시대 역시 비켜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과학적 진리나 이성에 대한 맹신 역시 신앙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게 없거든요. 겉모양만 바뀌었을 뿐 과학자와 철학자가 교회 사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지요. 그들은 여전히 완전한 것을 꿈꾸었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부정했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도 또 다른 모습을 한 사제가 존재하는지 몰라요. 그들이 가르치는 신앙은 국가(國家)일 수도 있고, 자본(資本)일 수도 있지요.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한 차라투스트라의 선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소식인 셈이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신앙의 태도가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말할 겁니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다. ‘신은 죽었다.’” 그렇다면 니체와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이라고 전할까요? ‘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줄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은 죽었고 저 세계에 대한 신앙도 사라져야합니다. 우리 스스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지요. 이때 또다시 우리의 삶을 부정하고 또 하나의 저 세계를 설정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것은 또 다른 신의 부활을 의미하니까요.
앞에서 신을 완벽하게 죽이는 니체식 방법이 ‘웃음’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제 대지 위에서 웃을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대지라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웃음 지으며 긍정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겁니다. 니체가 우리에게 전한 기쁜 소식은 바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야할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前)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상을 니체는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overman, superman이라고 부르지요.
♣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힘에의 의지
앞에서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전한 새로운 소식을 살펴봤습니다. 그 소식은 분명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했나요? 더 이상 이상을 동경하지 않고 지금 이 세계, 즉 대지(大地)를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위버멘쉬라는 설명도 잠깐 했습니다. 위버멘쉬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에서 살펴볼 내용은 ‘힘에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예전엔 이를 ‘권력 의지’라고 번역했지요. 권력 의지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권위주의적 분위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힘에의 의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니체의 사상에서 디딤돌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니체는 서양문명이 가진 총체적 문제점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했던 사람이고, 서양문명 전체를 뒤집으려 했던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면 니체가 파악한 서양문명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앞에 나온 내용을 잘 읽었다면 니체가 생각했던 서양문명의 병폐에 대해 잘 알 것입니다. 인간이 신과 같은 저 피안(彼岸)의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대지 위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힘에의 의지란, 대지 위에서의 삶이 결백함을 입증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서양문명의 그러한 병폐는 아주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힘에의 의지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니체는 “서양문명 네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그래.”라고 말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세계를 일단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보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본다는 이야기이지요.
형이상학은 영어로 metaphysics라고 합니다. physics란 형상, 물체 등을 의미하고 meta는 ‘~의 뒤에’ ‘~의 너머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이란 말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등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세계 너머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뉴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해 내지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 즉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본 뉴턴이 그 너머에 있는 형이상학적 현상인 중력의 법칙을 알아낸 겁니다.
그리고 이분법이란 무엇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바라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세계를 생성과 존재의 두 틀로 나누어 바라봅니다.
이렇게 세계를 두 가지의 틀로 나누어 바라본 역사는 고대 철학자 플라톤에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불멸성에 관해 논하며, 진리는 육체적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理性)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성만이 오로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파악한다는 거지요. 따라서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되는 것만이 실재이며 그 외에는 거짓이라는 주장이지요. 우리의 눈이 보는 것, 귀가 듣는 것, 손이 만지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너머에 있어서 오직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말을 쉽게 설명하자면, 만약 플라톤에게 둥근 쟁반을 가지고 가서 이것이 ‘원이다’라고 말하면 플라톤은 고개를 저을 겁니다. 왜냐하면 ‘원’의 정의와 완벽하게 맞지 않으니까요. 콤파스로 정확하게 원을 그린다면 어떨까요? 비슷할 뿐이라면서, 이데아의 세계에 진짜 존재하는 원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데아는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어서 보여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플라톤이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세계를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이성으로 파악하는 세계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항상 변하고, 따라서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어제 만난 철수와 오늘 만난 철수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철수는 어제보다 조금 늙고, 키가 더 컸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가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철수를 실재하는 ‘철수’라고 말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변하는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을 ‘생성(生成)’이라 이름 붙이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우습지만, 이렇게 우스운 이야기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 온 것이 바로 서양 문명입니다.
서양 문명은 이렇듯 세계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存在)’와,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 속에 있는 무수한 사물들인 ‘생성(生成)’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존재의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반면 ‘생성의 세계’는 폄하하고 쓸모없이 여겼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모든 것은 되어 간다. 영원한 사실이란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듯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니체에게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면, 그리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 비인간화된 그리하여 비인간적인 그 세계는 사람들로부터 잘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존재는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정녕코, 존재를 증명하고 그 존재들로 하여금 입을 열도록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렵다.’ 형제들이여, 말하라. 모든 사물 가운데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가장 명백하게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차라투스트라는 ‘저 세계’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양 우리를 속인 사기임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왜 생겨났을까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말하길, 인간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변화하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발전해 변화와 행복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형이상학적인 세계, 즉 변화 너머에 있는 참된 존재의 세계를 구상해 냈고, 그 세계야말로 인간의 고통에 답을 줄 수 있는 진리의 세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를 형이상학자의 심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니체가 분석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발생원인을 정리해볼까요?
생성, 즉 변화의 세계는 모순투성이이며 인간의 인식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 불확실과 불안만을 가질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행복을 바라기에 생성과 반대되는 세계를 상상해냈지요. 그것을 ‘존재’라 칭한 인간은 자신을 그에 일치시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인간의 무능력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허상뿐인 세계와 내가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존재의 세계는 우리가 겪는 고통에 여러 가지 답을 줄 수 있습니다. 플라톤과 교회, 사제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언젠가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고 천국에 가면 고통이 없는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반론을 들어볼까요? [저편의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은 고통과 무능력, 그리고 더없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자가 꾸며낸 덧없는 행복의 망상이다.]
존재라는 것도 결국 고통을 회피하고 견디기 위해 우리의 이성이 교묘히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야말로 가상임을 폭로한 거지요.
자, 그럼 니체의 다음 작업은 무엇일까요? 헛된 가상의 세계를 폭로했으니 실재하는 것을 밝혀야 하겠지요. 이는 곧 생성의 세계에 존재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고, 의욕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이며 그렇게 계속 변화해 감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존재는 변화하는 것이지, 자기동일성(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변화야말로 존재에 대한 근본적 확실성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 그곳에만 의지가 있다.’, ‘생명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그것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숨을 쉬며 움직이는 것이고, 또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 숨을 쉬는 것처럼 무언가를 바라고, 뭔가에 힘을 작용시키는 거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처럼 존재란 항상 힘에의 의지를 작동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더 많은 힘을 얻기 원하는,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동적인 상태이지요.
힘에의 의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의지에 대항하는 반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즉, 힘에의 의지가 존재하려면 여럿의 힘에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뉴턴의 작용-반작용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힘을 가하는 곳에는 반드시 반작용하는 또 다른 의지가 있고 이러한 의지들 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쪽이 어떤 구체적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 때 나무는 그대로 서 있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태풍은 나무를 쓰러트리려는 의지를 가진다고 해봅시다. 두 힘에의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원하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본성을 바탕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태풍의 힘에의 의지가 나무의 힘에의 의지에 이긴다면, 태풍은 나무를 쓰러트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 하나가 쓰러졌다고 해서 태풍의 힘에의 의지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힘에의 의지가 지닌 본성, 즉 ‘더 많은 힘을 원하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태풍의 힘에의 의지는 또 다른 힘에의 의지와 충돌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돌일 수도 있고, 전신주일 수도 있지요.
어쨌건 힘에의 의지들 간에 일어나는 힘겨루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물은 계속 변화하지요. 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새 나무가 자라듯, 여러 힘에의 의지들이 벌이는 힘겨루기가 끊임없이 계속되니까요. 따라서 모든 힘에의 의지도 계속 자기의 본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힘에의 의지가 복종하는 대상은 오로지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기 원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본성뿐입니다.
여기서 잠깐 쇼펜하우어에 대해 살펴봅시다. 니체가 그의 책을 읽고 큰 영향을 받은 이야기는 이미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도 자신의 저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우리의 행동, 움직임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 있는 실체를 의미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에서도 우리는 형이상학적 이분법(겉으로 드러난 현상 vs 실체로서 현상을 일으키는 본질적인 것, 즉 의지)을 볼 수 있어요. 단지 다른 형이상학자들과는 다르게 그 본질적인 존재를 의지라고 설명했을 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니체도 역시 힘에의 의지만이 실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서로 다릅니다. 쇼펜하우어의 실체로서의 의지는 우리의 행동, 사물의 작용, 힘과는 독립적으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항상 존재하는 의지(즉, ‘더 많은 힘을 원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강하게 되고자 하는’)를 뜻하며, 우리의 행동, 사물의 작용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즉, 허상을 밝히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란 이 세계 너머에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리의 삶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라는 실체가 계속 우리에게 헛된 욕망을 갖게 하고,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역시 무엇인가에 계속 의지하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예뻐지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고 말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욕망의 원천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의지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의지는 계속 욕망을 낳고, 그 때문에 우리가 힘겹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욕망이 충족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태희처럼 예뻐지는 것도, 빌 게이츠처럼 부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계속 그것을 욕망하게 되니까요. 만약 엄청난 노력을 해서 욕망을 이룬다 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의지는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명령하고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태희 역시 더 예뻐지려고 욕망할 것이고, 빌 게이츠 역시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했지요. “우리는 비눗방울을 계속 불면 터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되도록 오랫동안 크게 비눗방울을 분다.”라고.
그러면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는 삶은 뭘까요? 의지를 아예 없애버리면 좋겠지만, 의지란 영원한 실체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란 불가능하며, 그저 끝없는 욕망이 낳는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 고통을 겨우겨우 견디며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지요.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깊이 공감했지만, 점차 쇼펜하우어에게서 빠져나왔습니다. 쇼펜하우어 역시 변형된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세계를 해석하여 삶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본 거지요. 니체는 쇼펜하우어와는 반대로 삶을 긍정하고 싶었고,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부터 의지를 구원하기 위해 힘에의 의지란 개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게 니체는 쇼펜하우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제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려 했던 작업을 이해하겠는지요?
정리하면, 니체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병든 서양문명을 고치려 했어요. “끊임없이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세요!”라고. 그리하여 초월적 세계(즉, ‘저 세계’)에 치우쳤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대지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지요. 저편의 세계에 따로 있는 영원불변의 존재를 부정하고, 살아 숨 쉬며 항상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존재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며 힘에의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란 세 가지 본성(즉 ‘더 많이 원하며, 주인이 되고자 하며,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힘에의 의지들은 항상 지배할 대상이 필요하기에 여럿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요. 힘에의 의지들 간의 끝없는 경쟁과 싸움이 우리의 삶 그 자체이며, 그것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더 많은 것을 정복하며 자기 자신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힘에의 의지’의 본성에 충실한 삶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삶’이라고 니체는 주장하지요.
니체는 그의 책(「선악의 저편」)에서 ‘고귀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람들의 일이었다.”라고.
니체는 고귀한 인물들이 인류를 향상시키고 문화를 만들어 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귀족은 세습된 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귀족이란 오디세우스나 아킬레스 같은 ‘바실레우스’를 의미합니다. 바실레우스란 그리스어로 ‘자기의 힘으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을 가리키지요.
니체는 그들의 덕이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도덕적인 덕과는 달리 고귀함과 탁월함을 의미하며 이는 곧 용기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으며, 세계를 정복하고 자신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었던 진정한 귀족이었다는 거지요. 저들의 용기가 곧 힘에의 의지라는 거지요.
그러면 그러한 귀족들에게 패한 자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노예들입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나 가치 차이를 믿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이런 말 때문에 니체는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계급을 옹호하고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위계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사농공상, 양반과 상민 등과 같은 위계가 아니라 일대(對)일로 투쟁을 해서 승부를 가렸을 때 나타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위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예는 힘에의 의지 간 충돌에서 패한 자들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만약 패한 자들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계속 충실히 따랐다면 계속 투쟁하고 있는 상태이거나 아니면 승부가 확실히 결정되어 죽고 말았어야 합니다. 살아있으면서 싸우고 있지 않다면 그는 항복한 존재일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힘에의 의지의 본성을 어긴 채 비굴하게 말이지요. 왜일까요? 답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노예가 귀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귀족은 고귀한 용기를 가지고 있고, 힘에의 의지에 충실했지만 노예는 용기, 즉 힘에의 의지를 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니체는 이와 같은 바실레우스들의 용기가 고귀한 것으로 찬양받던 시대가 가고 절제, 관용, 용서 등을 덕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구문명이 병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절제는 힘에의 의지를 억제하고, 관용은 상대방의 힘에의 의지를 모욕하기 때문이지요. 즉, 서구문명은 힘에의 의지를 충실하게 실현하던 문화에서 힘에의 의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거지요. 자연스럽게 귀족의 덕이 아닌 노예의 덕이 칭송받게 되었지요. 약한 자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들에 대한 희생적인 사람 같은 것은 힘에의 의지를 거스르는 노예의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폐단을 부추긴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니체는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 바로 ‘순종적인 어린 양’이거든요.
그렇다면 니체는 전쟁이나 약육강식을 찬양하는 입장일까요?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니체는 전쟁광이나 강자의 편을 드는 사람으로 오해하면 곤란하지요. 니체는 삶이 냉혹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문명이든지 그 시작은 전쟁과 정복, 그리고 살해로 점철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플라톤적 기독교의 도덕은 그러한 현실을 은밀히 덮어버리고 아름다운 것들만 말하려 한다고 합니다. 이는 세상을 도덕이라는 장식으로 치장하는 것에 불과하며 폭력적인 현실보다 오히려 더 나쁘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도덕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더욱 치밀하고 무자비한 억압과 폭력을 휘두르거든요.
폭력, 정복, 착취와 같은 것들은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이 힘에의 의지(즉 ‘더 많이 원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를 갖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비슷하지요.
니체는 그런 투쟁이 현실이라면 비겁하게 감추기보다 용기 있게 맞서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다수의 인간들과 달리 항상 새로운 시대와 문화를 만들어 내며 인류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인식에 대하여
서양 근대철학의 주된 논의는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앎(즉, 지식)을 어떻게 얻는가 였습니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론자들은 이성(理性)이, 베이컨 같은 경험론자들은 경험(經驗)이 세계에 대한 정확한 앎을 보장한다고 주장했지요. 예를 들어 합리론자들은 ‘삼각형’에 대한 지식을 ‘내각의 합이 180도로 이루어진 도형’, 이렇게 설명하고, 경험론자들은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관찰해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란 걸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어떻게 올바른 앎을 가지는가?’에 관한 논의를 인식론이라고 부릅니다.
인식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관점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전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니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없으며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지식이 만들어지는데, 이때 인식자에게 이익이 되는 실용적인 측면이 반영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니체가 힘에의 의지만이 모든 존재의 유일한 본성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니체의 관점주의적 인식론도 바로 이러한 힘에의 의지라는 존재론에서 출발합니다.
인식의 주체는 힘에의 의지를 본성(즉 ‘더 많이 원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으로 하는 존재로서, 힘에의 의지에 따라 특정한 관점을 가지지요. 따라서 인식에 있어 힘에의 의지는 곧 관점을 설정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즉, 인식은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으면서 일어날 테고, 인식 주체의 힘과 삶을 ‘상승’시키고 ‘강화’하려는 목적에 따라 사물이나 사태를 판단할 거라는 말이지요. 니체는 이러한 인식을 해석(解析)이라고 부릅니다.
해석은 항상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이해하므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니체는 ‘해석’이라는 개념을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믿었던 객관적인 지식과 앎을 부정했지요.
잠깐 해석의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화가라면 화폭에 어떻게 표현할까를 생각하면서 그 사과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니 사과의 모양과 빛깔 같은 것을 중시하겠지요. 만약 식물학자가 그 사과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사과의 생장, 사과와 나무와의 관계, 주변 환경과 기후와의 관계 등을 살피겠지요. 과일 상인이라면 ‘언제 수확을 할까? 값은 얼마를 받으면 적당할까?’ 이런 걸 살피겠지요.
이렇듯 하나의 사과는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관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인식됩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사과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합니다.
해석이란, 무언가를 해석하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평가하는 행위입니다. 평가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대상에서 특정한 성질을 추려내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취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니체의 해석은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이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이런 형식이지요. 즉, 해석이란 그 대상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대상에 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해석은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어!”라고 했습니다. 해석은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다고 하니 좀 의아하고 이해가 안 되나요? 니체의 말을 좀 더 들어보도록 하지요.
니체는 모든 존재가 생성(生成)이라는 변화 상태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해석하려면 변화하고 있는 대상에 일정한 형식과 형태를 부여하고, 한정시키고, 다른 것과 비교도 하고, 범주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사물의 다른 측면은 부정하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 내가 봤던 사과와 오늘 내가 보는 사과는 똑같은 사과가 아니고, 화가는 과일 상인이 보는 사과의 상품적 가치에 대해선 전혀 해석해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화가는 그것을 같은 사과라고 인식해야만 다음 날에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겠지요. 또 과일 상인에게 자신이 본 사과의 모습이 진정한 사과의 본질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화가는 사과를 해석함으로써 그렇게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어요. 어제 내가 그린 사과를 여전히 오늘도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사과의 또 다른 측면인 상품적 가치는 무시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해석이 필연적으로 오류를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전통적인 인식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해 온 인식의 한계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그동안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한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어딘가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니체는 해석의 필연적 오류를 과감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니체는 해석이 갖는 필연적인 오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창조활동이기 때문이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사람이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너희에게 있어 진리를 향한 의지이기를 바라노라! 너희는 너희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세계라고 불러온 것, 그것도 너희에 의해 먼저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가 너희의 이성, 너희의 이미지, 너희의 의지, 너희의 사랑 안에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너희가 행복을 누리도록,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자들이여!]
해석이 오류인 이유는, 해석이 해석자의 목적과 의지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진리를 향한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삼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해석하되, 그 해석을 통해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너희는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신체는 앎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앎에 힘입어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한 자에게는 모든 충동이 신성하며, 고양된 자의 영혼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욕구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추구 혹은 도덕적인 의무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해석된 지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고양시킬 것이며 자신의 힘을 어떻게 더 강화할 것이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지배하는 주인이 될지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은 오류를 낳을 뿐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절대적인 지식만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에게 니체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무 심각해지 말라고. 그럼 사는 게 따분하고 재미도 없잖아!’라고.
차라투스트라에게, 그리고 니체에게는 우리의 지식이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니체는 우리에게 반문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닐까”하구요.
니체에게 지식(知識)이란 힘에의 의지의 도구(삶을 더욱 고양시키고 존재를 향상시켜주는 도구)에 불과하거든요. 그러니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 따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나의 삶을 더욱 기쁘게 하고, 더 많은 힘을 가지게 하며, 많은 것을 지배할 수 있도록 지식은 충실한 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의 행복과 유용성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지식은 삶이 가지고 노는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식을 얻어가는 해석행위는 유쾌한 놀이와도 같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의욕를 갖고 있는 자에게는 기쁨이다! 그러나 지쳐 있는 자는 다만 ‘의욕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온갖 파도가 이러한 자를 노리개로 삼아 희롱한다.]
자,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공부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을 한번 돌아봅시다. 세계를 보는 커다란 눈을 갖기 위해서, 더욱 커다란 힘을 지니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공부를 즐거운 놀이처럼 즐기며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봅시다. 차라투스트라는 여러분이 즐겁게 공부하기를 진정으로 바랄 것입니다. 니체는 해석이란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創造) 행위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가장 큰 걸림돌은 뭘까요? 기존의 해석에 안주하는 자신이 아닐까요.
다시 화가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화가가 사과를 작품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창조했다고 합시다. 만약 그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만족한다면 더 이상 창조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화가는 예술가로서 힘에의 의지에 더 이상 충실하지 않는 셈이지요. 사실 화가는 안주하는 것이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자신의 작품은 이미 인정을 받았으니까요. 그러한 평가에 만족하며 지내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어떻든 이 화가는 니체에게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힘에의 의지가 한번 작용하고 나면 다시 본성으로 돌아와 더 많은 힘을 원하듯이, 진리를 향한 의지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기존의 해석된 지식에 불만족하고 또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창조행위가 발생하니까요.
따라서 해석자는 기존의 해석을 끊임없이 극복하고 새롭게 창조해야 합니다. 즉, 예전에 그렸던 자신의 그림을 보고 만족스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전 그림을 통해 한층 더 높은 예술관을 갖게 되었다면 이미 그 그림은 불충분한 예술적 가치를 지닐 테니까 오늘날 또 다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사과 그림을 그려야 하겠지요.
이렇듯 해석(解釋)은 해석자의 끊임없는 자기극복의 의지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이고, 해석자에게 사물은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무한한 세계입니다. 그렇게 진리는 무수히 많고 다양합니다. 우리에게 열려있는 창조의 지평도 그만큼 무한하지요.
자, 그렇다면 니체의 관점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니체는 우리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이란 관점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왜 우리의 인식이 관점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을까요? ‘세계는 힘에의 의지들 간의 갈등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해석은 항상 그 힘에의 의지를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식은 힘에의 의지가 명령하는 대로 특정한 목적과 관심을 가지고 수행된다고 했습니다. 화가, 식물학자, 과일 상인의 사과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관점을 가지고 인식하는 것은 니체는 해석이라 불렀지요. 또한 하나의 해석을 낳은 관점을 초월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해석과 관점은 존재하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철학자들이 헛수고를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니체가 이 철학자들과 공유했던 생각이 있습니다. 인간의 해석이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즉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면 해석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그러한 지식을 억견이라고 불렀고, 데카르트는 그와 같은 주관적인 해석은 참된 지식이 아니므로 모두 의심해 보아야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그러한 의심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니체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 다른 점은 그러한 오류를 긍정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에게 해석을 명령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이고, 지식은 삶의 수단, 삶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했지요. 해석은 삶이 벌이는 유희와 같아요. 더 큰 행복과 유용함을 위한 놀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 니체는 해석행위가 쉼이 없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기존의 해석을 부수고 새로운 해석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기존의 해석에 안주한다면 더 이상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며, 그저 죽어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힘에의 의지는 본성상 더 큰 힘을 원하고 따라서 해석행위 역시 끝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 봉사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한 해석이 곧 창조행위라고 했습니다. 끝없이 자기를 극복하면서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세계를 창조해 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니체의 이러한 관점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니체를 읽었다면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의미와 가치는 쓸모가 없습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결국 인간 존재와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인 셈이지요. 앞에서 우리는 니체가 인간과 인간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힘에의 의지란 개념을 만들어낸 것을 보았지요? 관점주의 역시 결국에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우선 다양(多樣)한 주관적 인식을 인정합니다. 결국 지식은 (각자의 목적이 다르니까) 상대적(相對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지식의 상대성이 우리 존재의 특성인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지식이 우리의 존재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지식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렇게 지식에서 존재를 구원해 냈습니다.
니체는 그동안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 아래 인간의 삶이 종속되어 왔음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버린 과학과 과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지요.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삶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본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인간의 삶을 종속시키려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예를 들어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육아 및 아동심리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지식의 홍수 속에서 부모들은 무엇부터 알아나가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생기면 당황해 전문가를 찾지요. 그러면 전문가들은 각종 이론을 들먹이며 아이의 심리상태를 분석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부모들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정신병원들을 생각해보세요. 정신과 의사들은 계속해서 수많은 병명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장애에 속하는지 걱정할 뿐이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지식의 하인이 되어버렸지요.
우리의 삶을 위해 봉사해야할 지식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편협하게 만들고, 지식에 봉사하도록 우리의 삶에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교육은 많은 사람들에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계속 쌓일 것이고,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지식을 머리에 입력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고,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시간도 없겠지요. 그렇게 교육은 성실하고 순한 양들만을 무한히 만들어낼 뿐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바로 창의성의 부재잖아요?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부터 행해온 교육의 틀에 갇혀 있고, 창의성마저 교육을 통해 기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현재 우리의 교육은 다양한 개성을 무시하고 획일화하는 체계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과연 창의성을 주입할 수 있을까요? 니체는 아마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우리 시대와 문화도 니체의 눈에는 여전히 엉망진창이라 또 다른 차라투스트라를 내려보내야 할 판이라 생각하겠지요.
여전히 우리의 삶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우리의 문화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고 있어요. 옛것의 소중함에 대해서만 역설하며 옛것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니체는 “옛날의 해석들은 지금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과감하게 말할 겁니다. 또 지난 해석은 전혀 새롭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정해진 진리란 없어!” 니체가 여러분에게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유일한 진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해석은 특정한 관점에 따라 나온 특정한 해석일 뿐입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진리도 바로 그런 해석 중 하나일 뿐이지요. 절대적 진리는 없어요. 심지어 수백 년 전의 지식이 시시각각 변화해 온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함께 변화한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겠어요? 모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대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역시 그러한 관점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세계를 해석해 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니체가 관점주의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적극적이고 새로운 해석’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그리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나에 대한, 나의 삶에 대한 사랑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로 끝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정해진 진리 따윈 없으니까요. 세계는 무한한 의미와 가치의 가능성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설레고 흥분되지 않습니까? 무한한 세계와 내 존재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 신체는 커다란 이성
지금은 바야흐로 ‘신체의 시대’ ‘몸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V 역시 몸매 좋고 얼굴이 예쁜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지요. 기상 캐스터도 몸매가 좋고 예쁘면 주목받은 시대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상황은 그렇지 않았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체보다는 정신이나 영혼의 가치를 더 중시했지요. 물론 지금도 그러한 생각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예로 만화 슈렉을 들어보겠습니다. 슈렉은 외모는 못생겼지만 선량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요.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는 슈렉의 마음 때문에 슈렉을 사랑하게 되고, 슈렉 역시 공주가 흉한 모습으로 바뀐 뒤에도 공주를 사랑합니다. 한마디로 신체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신체는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신체 대신 정신과 영혼만을 찬미하며 식욕(食慾)이나 성욕(性慾) 같은 몸의 욕망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욕망을 억누른 채 학문에만 정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승려들 역시 육식도, 결혼도 포기하며 몸의 욕망을 넘어서려고 했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성적인 욕망을 죄악시하여 매주 사람들에게 성적인 욕망을 회개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선비들, 불교의 승려들,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모두 그렇게 신체를 경멸했습니다.
니체는 인간을 정신, 이성 Vs 신체로 나누는 것이 커다란 착각이라고 비판합니다. 신체의 일부인 정신과 이성을 (신체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니 허황된 신체 경멸자들의 논리라고 말하면서.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의 생각을 실천하려면 오로지 신체를 벗어나 죽는 길밖에는 없지요. 즉, 그들의 생각을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은 입을 다물고 죽는 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입으로 열렬히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한다면서, “산 입으로 죽음을 강요하지 마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해 보세요. ‘그렇게 고귀한 영혼에 대한 찬미를 입과 몸짓을 통하지 않고 표현할 방법이 있나요?’, ‘왜 영혼에 대한 찬미에 추악한 신체를 사용하는 거예요?’라고. 그러면 그들은 신체를 경멸하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그동안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럼 서구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체 경멸자들 세 명을 살펴봅시다.
그 첫 번째는 플라톤입니다. 저서 《파이드로스》에 마부(理性)와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사나운 ‘욕망(慾望)’과 기품 있는 ‘용기(勇氣)’)에 관한 이야기를 썼지요. 이성은 ‘용기’와 ‘욕망’을 잘 다루어야 하는데, 특히 ‘욕망’을 잘 억제해야 한다고.
두 번째로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그는 정신과 육체를 더 엄격하게 구분했어요.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실체는 오로지 정신과 이성 밖에 없다고 주장했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 데카르트의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성을 사용해 정신활동을 하는 자체가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는 무엇일까요?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독교의 성직자들입니다. 가장 심각한 신체 경멸자들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빚은 반죽에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신의 숨결은 곧 영혼을 상징하고, 숨결이 없는 몸은 그저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아요. 기독교는 창세 신화에서부터 인간의 신체를 보잘 것 없다며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신체에 죄(罪)의 개념의 도입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멀쩡한 사람은 이쪽!(선, 구원), 위나 심장이 안 좋거나 불쾌하거나 쇠약한 사람은 저쪽!(악, 지옥)> ‘이런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장 장애가 있으면 죄와 악마의 냄새가 난다는 식이었어요. 프로테스탄트들은 한술 더 떠서 육체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충동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온갖 생활지침들로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했어요.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을 장려하고, 냉수마찰과 채식을 강조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자기 몸을 채찍질하기도 했습니다. 성생활은 오로지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허용된다는 규제까지 있었지요.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신체 역시 배려했던 동양의 입장과는 크게 다르지요. 동양의 경우 영양, 위생 등 신체의 건강을 중시했지만, 서양은 ‘죄로 가득한 신체를 위한다’면서 전혀 그렇지 않았지요. 불교 역시 신체와 욕망을 경멸하고 벗어나려했으나 신체를 선과 악의 틀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는 오히려 안식과 선한 기분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불교도들은 정신적인 해탈 못지않게 신체의 건강과 위생을 중시하지요.
반대로 기독교도들은 오로지 영혼만을 중시했고 그 결과 신체를 증오하고 죄악시했어요. 니체는 기독교도들의 신체에 대한 증오의 예로 카타콤을 들었습니다. [‘카타콤을 떠올려 보자. 은밀하고 어두운, 기독교적인 방이다. 여기서는 신체를 업신여기고 위생조차 신체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배격된다.’ ‘교회는 청결을 거부하기조차 한다.’ ‘무어인들을 추방한 후 기독교도들이 첫 번째로 한 일도 공중목욕탕을 폐쇄한 것이었다.’ ‘당시 코르도바에만 270여 개가 있었던 목욕탕을 모두 폐쇄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체야말로 우리의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도 같아. 인간은 곧 신체일 뿐이야.’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이나 정신은? 신체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체를 ‘커다란 이성’, 우리가 이성,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작은 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작은 이성은 커다란 이성인 신체에 속하는 것이지 따로 이성 혹은 정신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체는 신체 경멸자들이 바라보았던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적 신체를 모두 포괄하는 커다란 제3의 어떤 것이라는 얘기이지요. 커다란 이성 역시 신체 경멸자들이 말하는 순수한 이성,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및 신체의 욕망과 분리되지 않고 작용하는 커다란 이성을 의미합니다.
조금 복잡한 것 같으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다고 가정하죠. 여러분은 그 문제를 분석하고 그에 적합한 수학의 원리와 공식들을 떠올리겠지요. 그리고 원리와 공식에 맞추어 수식을 만들고 숫자를 대입해 문제를 풀어나갈 겁니다. 이때 여러분은 순수하게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활동만을 할까요? 그건 아니지요. 문제를 풀면서 낑낑대며 애쓰고, 잘 풀리지 않아서 땀이 나기도 할 겁니다. 처음엔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숨을 죽일 것이고 그러다 잘 안 되면 짜증도 나겠지요. 문제가 풀리면 안심이 되면서 뿌듯한 마음도 들 것이고, 좀 더 감정 표현이 자유분방한 사람이라면 환호성도 지르겠지요. 또한 신체적인 감정 외에 의지도 개입되어 있어요.
여러분에겐 수학 공부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여러분이 가진 어떤 의지를 작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지가 없다면 수학 공부라는 행위가 발생하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면 당연히 수학 문제를 풀 때 일어나는 정신적인 활동도, 그에 따른 감정과 정서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이렇게 순수하게 이성만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학 공부에도 사실은 수많은 신체적 감정과 의지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겠지요?
데카르트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그는 육체와 분리된 순수한 사유를 하려고 시도했고, 그러한 사유의 과정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냈지요. 그 순간 데카르트는 기쁘지 않았을까요? 또한 데카르트가 그렇게 열심히 사유한 것도 ‘확실한 앎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엔 ‘진리’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 욕망이 작용했다고 봐야겠지요. 따라서 데카르트의 이런 말에 니체는 또 이렇게 답하겠지요. ‘우리의 지성은 순수한 이성만을 사용해야 한다.’
여러분도 시도해 보세요. 신체적인 작용 없이, 그리고 의지가 전혀 작용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가 가능할까요? 이제 니체가 말하는 신체, 커다란 이성이란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분법을 넘어서서 이성, 신체, 의지가 모두 함께 작용하는 통합적인 신체를 뜻한다는 것을 이해하겠지요?
니체가 말한 신체에서 뭐 생각나는 것은 없나요? 힘에의 의지나 인식에 대한 니체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나요? 앞에서 우린 모든 존재가 힘에의 의지를 따른다는 니체의 사상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힘에의 의지는 우리가 항상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게 한다는 것도 이해했지요. 그렇다면 신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리 존재는 곧 ‘신체’입니다. 신체는 고깃덩어리로서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육체, 의지를 모두 포함하는 통일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지란 곧 힘에의 의지와 연결되겠지요. 모든 존재에서 힘에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의 신체 역시 힘에의 의지라는 원리에 종속되어 있어요. 또 무엇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 따라 해석하지요. 그렇게 해석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理性)일 것입니다.
해석에는 항상 특정한 관점(觀點)이 바탕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힘에의 의지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힘에의 의지는 더 강해지고자 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항상 목적을 가지며, 그에 따라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을 해석할 때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해석에는 항상 특정한 목적과 의지에 따라 설정된 관점이 앞서기에 이성은 관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는 우리의 신체를 커다란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체는 자신의 목적에 맞는 관점을 설정하고 이성이라고 부르는 작은 이성에게 그 관점에 따라 해석하도록 명령하는 좀 더 커다란 이성이기 때문이지요.
또 니체는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신체 역시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면서 항상 변화합니다. 힘에의 의지는 항상 여럿일 수밖에 없다던 니체의 말이 기억나시나요? 우리의 신체는 여러 힘에의 의지들이 힘을 겨루고 투쟁하는 싸움터입니다. 힘에의 의지만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힘에의 의지들이 신체라는 하나의 터 안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계속 변화하고 만들어져 갑니다.
여러분 안에서도 수많은 힘에의 의지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지 않나요? 피카소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기도 하고, 박지성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기도 하지요. 산책을 하며 고요하게 생각에 잠기고 싶기도 하고,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 앞에서 힘껏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수많은 의지와 정서가 매순간 우리의 신체 안에서 서로 힘을 겨루고 싸우면서 신체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너의 덕 하나하나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를. 그들은 너의 정신을 그들의 전령으로 삼을 생각에서 너의 정신 전부를 원한다. 그들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너의 힘 전부를 원한다.’]
우리의 신체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자 전쟁이고 평화입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다가 갈등이 조정되고 일시적인 평화를 찾을 때 우리의 신체는 하나의 ‘자아(自我)’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아는 특정한 힘에의 의지가 승리한 결과이겠지요.
하지만 하나의 자아가 계속 유지 되지는 않아요. 또 다른 힘에의 의지들이 우리의 신체 안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요. 만약 또 다른 힘에의 의지가 승리하면 또 다른 자아가 형성될 것입니다.
예로 니체의 삶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엔 경건한 목사 집안에 태어나 어머니의 뜻대로 신학을 공부하려 했지요. 하지만 점차 신학에 회의를 품어 문헌학자가 되었고, 다시 문헌학과 결별하고 철학자가 되었어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매료됐으나 그들을 극복한 뒤 결국 자신만의 사상을 형성했지요. 니체는 이렇게 자신의 삶 내내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하며 변화해갔지요. 그러니 정해진 자아란 없다고 봐야 해요.
사람들은 고정된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행동 뒤에 그것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이해하기 쉽게 번개를 예로 들어보지요. 번개는 기상현상 중 하나로, 대기가 불안정해지면 발생하는 번쩍임을 뜻합니다. 즉, 하늘에서 번쩍이는 현상인데, 우리는 이를 ‘번개가 친다’라고 표현하지요. 그 말에 담긴 우리의 사고를 분석해보면 우리는 하늘에서 번쩍인 것과는 별개인 어떤 것을 정하여 그것을 번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번쩍인 현상을 ‘번개가 하늘을 친 것’으로 오해하지요.
니체는 이런 오해가 우리의 언어 습관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항상 주어+술어의 형식을 이룹니다. 항상 고정된 주어를 정하고 그 주어가 어떤 행위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착각은 여기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볼 때 그는 생각하고 있는 행위의 이면에 그 행위를 일으킨 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리고 그것을 고정된 하나의 실체로 정한 거지요.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고정된 하나의 실체와 자아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저 생각하는 행위가 우리의 신체 안에서 일어났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아’란 그렇게 일어난 현상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데카르트의 신체는 생각이라는 활동을 했고, 그런 생각의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종합체가 바로 나라는 자아인 것이지요. 사람들이 가진 자아에 대한 환상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런 환상을 고발하기 위해 니체는 우리의 신체가 여러 힘들의 투쟁 속에서 무언가를 의지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아란 고작 힘들의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자아란 또 다른 힘들 간의 전쟁에 의해, 그리고 또 다른 자아가 형성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힘들이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의 신체는 계속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해 나가지요. 그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가 속한 대지(大地)의 아름다운 숙명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육체적 존재도, 정신적 존재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채 무언가를 욕망하고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지요. 그렇게 해서 원하는 걸 이루면 우리의 정신은 기뻐하고 감각은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모든 작용(기쁨, 욕망, 사랑, 증오 등)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신체입니다. 니체는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우리의 신체를 구원해 냈습니다.
신체는 고정되어 있는 자아가 아니라 무수한 힘들이 경쟁을 벌이면서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지요? 만약 자아가 고정되어 또 다른 자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신체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이 존재하는 땅에는 더 이상 변화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상태에 그저 머물고만 있다면 신체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니체는 그런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장 일어나!”라고. “지금 네 자신이 가진 그 보잘것없는 자아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싸움터로 내보내라고. 네 안에서 끝없이 전쟁을 벌이고 그렇게 계속 새롭고 또 다른 너를 만들어 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니체가 우리의 신체에 바라는 바입니다.
♣ 영원 회귀
영원 회귀는 니체의 철학 중 가장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영원 회귀를 ‘사상 중의 사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원 회귀는 니체의 사상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언제나 우리에게 어린아이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아기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지라는 것입니다. 영원 회귀 사상은 천진난만함을 갖출 때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사상들은 서로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신체, 인식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이론들은 서로 별개가 아닙니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하나의 기계로 본다면 각각의 이론들은 기계를 구성하는 톱니바퀴인 셈이지요. 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가 빠지면 다른 톱니바퀴들도 멈추어 기계가 작동하지 않듯이, 니체의 전체 사상과 이론도 하나가 빠지면 그 의미가 퇴색해버립니다. 영원회귀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회귀는 니체의 다른 사상들을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신체, 인식 등에서 니체는 일관적으로 ‘생성’(生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즉, 모든 것은 변화하며 고정된 ‘존재’의 세계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계의 본질이 생성이다’라는 주장만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니체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걸 것입니다.
앞에서 니체가 19세기 유럽문명은 심각한 병(病)에 걸렸다고 했지요? 그것은 생성의 세계인 이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저 세계에 ‘존재’의 세계를 건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끔찍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부정하고, 저 피안의 세계를 만들어 내 그것이 참되게 존재하는 세계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과 문명의 질병을 진단했습니다.
니체는 종종 자신을 의사에 비유했는데, ‘나의 임무는 진단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단은 병을 고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일 뿐 중요한 것은 병을 치유하는 일이니까요. 영원회귀 사상은 그러한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 혹은 치료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고 모든 치료의 과정이 고통스럽듯이 영원회귀 사상 역시 쓰고 고통스러운 약이자 치료법입니다.
니체는 영원 회귀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상의 가장 끔찍한 형식을 생각해 보자. 현 존재의 모습은 아무런 의미나 목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재의 이 모습은 무(無)로 종결되지 않고 불가피하게 다시 반복된다. 영원회귀, 이것이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이다. 모든 것이 허무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허무가 영원히 반복된다.]
니체의 말에서 우리가 영원 회귀란 것이 무엇이며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원회귀 사상은 이렇게 항상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말합니다. 첫 번째, ‘세계는 이렇다’는 판단을 담고 있고, 두 번째,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니체의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점, 그리고 그런 세계의 모습 탓에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점이지요.
그럼 좀 더 자세하게 영원회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선 첫 번째 문제, 영원회귀가 이 세계에 대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가 원래 살았던 높은 산의 동굴로 돌아갑니다.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은 지혜를 전해주려 했지만 사람들이 전혀 이해를 못하자 다시 산으로 돌아갔던 것이지요. 동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7일 동안 앓았습니다.
다시 깨어난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친구인 동물들과 영원회귀에 관한 대화를 나누지요.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 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모든 것은 가고 다시 되돌아온다....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매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즉, 영원회귀란 ‘세계와 그 세계 속의 모든 사물들이 계속 반복해서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내가 오늘 길에서 철수를 만났다면 내일도 똑같은 장소에서 철수를 만나고, 앞으로도 계속 똑같이 철수를 만나게 될 거란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니체가 이런 이상한 상상을 주장하진 않았겠지요.
그러면 혹시 순환론적 세계관을 말하는 것일까요? 순환론적 세계관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 순환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도 일정한 흐름이 반복된다는 주장입니다. 일정 기간의 평화가 지속되면 반드시 전쟁이 찾아온다는 설명 같은 거지요. 먼 옛날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던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성이 주도권을 잡은 부계사회로 바뀌었지요. 하지만 요즘은 알파걸이란 말이 유행하며 다시 여성상위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흐름이 역사를 통해 계속 반복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란 것도 이렇듯 일정한 흐름이 반복된다는 뜻일까요? 이것 역시 아닙니다.
그러면 뭘까요? 무엇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일까요?
사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아까 동물들이 ‘존재의 바퀴는 계속 돌고 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무한히 계속 반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니체의 영원회귀를 오해하고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니체가 ‘존재는 영원히 똑같이 되돌아 온다’라고 했을 때 ‘존재’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재’라고 하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저기 분명히 서 있는 나무,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회귀라고 하면 저 나무가, 의자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계속 돌고 계속 되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니체가 말하는 존재는 ‘무엇이 있다’라고 할 때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을 의미합니다.
서구문명은 그동안 세계를 존재와 생성의 틀로 나누어 바라봤다고 했지요? 니체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말하는 존재의 세계를 허구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고, 되어 가고 있는 상태, 즉 생성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모든 것이 변화하고, 되어 가고 있는 생성의 상태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고정된 상태로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성의 세계는 곧 힘에의 의지들이 투쟁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니체가 ‘존재의 바퀴는 계속 돌고 돈다’라고 말할 땐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되는 거지요. “존재의 바퀴는 계속 돌고 돈다. ⇒ 힘에의 의지들의 바퀴는 계속 돌고 돈다.”
차라투스트라가 [존재는 영원히 흐르고 이어지며 존재의 집은 영원히 지어진다.] 같이 말할 때는 [생성은 영원히 흐르고, 이어지며, 생성의 집은 영원히 지어진다. 혹은 힘에의 의지는 영원히 흐르고, 이어지며, 힘에의 의지의 집은 영원히 지어진다.]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고요.
자, 그럼 영원회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나요? 생성의 상태, 즉 힘에의 의지들의 힘겨루기 상태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내가 바라는 세상’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계는 수많은 힘에의 의지들이 쉴 새 없이 서로 싸우며 영원히 경쟁하고 있고,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여 또 다른 것으로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한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에 극도로 접근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이, 멸시받던 생성의 세계에 존재의 위치를 되돌려 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생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아 왔지만 니체는 오히려 반대로 생성, 힘에의 의지들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강조하지만, 영원회귀를 생각할 때 고정된 무엇을 떠올리고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영희가 과거에도, 오늘에도 . 미래에도 똑같이 반복될 거라는 식이 아닙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란, 영희는 과거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한 번도 똑같았던 적이 없으며 계속 변화하고 있고, 또 계속 다른 무언가로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영희의 계속된 변화상태, 무엇으로 되어가는 상태만이 존재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지요. 니체의 생각대로라면 영희가 그 자체로 힘에의 의지이고, 생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역시 힘에의 의지이고 생성이며, 고정된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신체에 대해 살펴보면서 인간에게 고정된 자아란 없다고 했지요? 그저 힘에의 의지들이 힘을 겨루는 하나의 전쟁터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니체의 세계관은 엄청난 혁명(革命)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서구사상에서 존재란 동일자(*현실에서 동일하게 있는 사물을 뜻함)를 의미하는 거였습니다.
다시 영희의 예를 들면, 어제 본 영희(A)가 오늘도 여전히 영희(A)라면 (즉 ‘A=A’라면) 우리는 영희가 존재한다고(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존재에 대한 그런 생각은 거의 2,000여 년 동안 당연히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이를 완전히 거부했어요.
니체가 바라본 존재는 오히려 항상 ‘A≠A’의 상태입니다. 어제 본 영희와 오늘 본 영희는 항상 다르다는 것이지요.
니체의 방식에 따르면 영희(A)의 존재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A=A1=A2=A3....An
그러면 어제 봤던 영희(A)가 오늘 똑같은 영희로(A)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조금 다른 영희(A1)이고, 내일도 역시 조금 변화한 상태(A2)로 경험된다는 것이지요. 그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그리고 앞으로 계속 영희를 보면서 우리는 그곳에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A≠A’라는 사실, 즉 고정된 것은 없고 계속 변화하는 생성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희가 계속 변화하는 상태에서 유일하고 동일하게 반복되는 동일자 ‘=’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A=An’이라는 식에서 영희(A)는 변화한 또 다른 영희(An)들 뿐이라는 뜻이니까 ‘=’는 ‘변화’, 또는 ‘생성’을 의미하겠지요.
그래서 니체는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생성’과 ‘힘에의 의지’밖에 없으며 그러한 ‘생성’과 ‘힘에의 의지’만이 영원히 되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가지 영원회귀 사상이 가진 첫 번째 측면인 ‘세계는 어떻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측면인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앞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었지요. 맞습니다. 사실 영원회귀 사상은 허무주의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상태만이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덧없는 신기루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만약 내가 좋아하는 영희가 매순간 또 다른 영희로 변해간다면 내가 영희를 좋아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영원회귀 사상을 갖게 된다면 아무런 의욕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목적도 없겠지요.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노력했지만 오늘 목표를 가졌던 내가 내일은 더 이상 오늘의 내가 아니라면 지금의 어떠한 다짐도 나중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생성의 세계에선 모든 것을 특정한 관점에서만 해석할 뿐 진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앎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도 허무함을 더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갈까요? 삶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어떻게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일단 ‘나’의 존재를 일관되게 유지해야 합니다. 즉 ‘정체성’을 가져야 하지요. 일관된 ‘나’가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미래를 약속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니체는 그렇게 고정된 ‘나’란 없다고 말합니다. ‘나’와 ‘타인’들, 즉 이 세계에는 그저 ‘생성’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라는 거지요.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지요. 삶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니힐리즘입니다. 이러한 허무주의 때문에 니체는 영원회귀가 굉장히 위험한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영원회귀 때문에 엄청난 슬픔에 빠지기도 했지요. [‘네가 지겨워하는 저 왜소한 사람, 그가 돌아오는구나.’, ‘이렇게 나의 비애는 하품을 해 가며 발을 질질 끌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이 동굴로 변해 버리고 그 심장부는 푹 가라앉고 말았다.’, ‘모든 생명체는 인간 곰팡이가 되고 마른 뼈가 되었으며 썩어빠진 과거가 되었다.’, ‘나의 탄식은 인간들의 무덤 위에 걸터앉아 더 이상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의 탄식과 의문은 밤낮으로 두꺼비처럼 투덜대고, 나를 질식시키고 괴롭히고 비통해했다.’]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가르쳐야 할 차라투스트라마저 영원회귀 사상 앞에서 무력해질 만큼 영원회귀 사상은 인간에게 매우 위험한 허무주의를 심어줄 수 있어요. 그러니 이런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영원회귀 사상은 오히려 삶을 부정하도록 만들지 않을까?’라고.
하지만 니체는 결코 삶을 부정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긍정하기 위해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요.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저 무턱대고 삶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이 끔찍하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성의 세계가 계속 변화하고 그로 인해 삶이 영원히 반복될지라도 니체는 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말하지요.
나아가 덧없는 삶의 매순간들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니체는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것을 요구합니다. “계속 빵 점이길 원해?”라고.
니체는 이렇게 매순간 자기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겪고 있는 찰나의 삶에서 그러한 삶이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할 만큼 삶의 매순간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영원히 반복해서 사랑하기를 원할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렇게 매순간을 긍정하며 매순간의 영원회귀를 바랄만큼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의미 없는 삶의 순간이란 없으며 모든 순간이 의미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영원회귀 사상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의 사상일 수도 있어요.
두 가지 기로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여러분은 당연히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할 테지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차라투스트라마저도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서 고통스럽고 침울한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내가 그때 보았던 것, 그와 같은 것을 내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어떤 젊은 양치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입에는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내 일찍이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의 그림자를 본 일이 있던가?]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보았던 환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커멓고 묵직한 뱀이 어떤 사람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는데, 여기서 시커멓고 묵직한 뱀은 바로 영원회귀 사상을 의미합니다. 예로부터 뱀은 영원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뱀이 반복해서 허물을 벗는 모습이 옛날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이미지처럼 보였거든요. 따라서 뱀을 입에 넣고 있던 사람은 영원회귀 사상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영원회귀 사상 때문에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겪는 인간의 모습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때 내 안에서 “물어뜯어라! 대가리를 물어뜯어라!”라고 소리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양치기는 내가 고함친 대로 물어뜯었다. 단숨에 물어뜯었다. 그는 뱀 대가리를 멀리 뱉어 내고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양치기가 아니고, 더 이상 인간도 아닌, 변화된 자, 빛에 둘러싸인 자, 그가 웃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그와 같이 웃은 자가 없었으리라!]
고통스러워하던 양치기는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어 뱉었습니다. 즉 영원회귀 사상이 허무주의를 극복한 거지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지어본 적이 없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사람의 표정이겠지요.
이 이야기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영원 회귀 사상’을 견디는 것, 그리고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시커먼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기 위해선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용기와 결단은 아무리 부정적인 삶이라도 받아들이고, 매순간의 영원회귀를 바랄 만큼 삶을 사랑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최고조로 상승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혐오스럽고 덧없는 삶 전체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전환시킬 정도로 말입니다.
끝없이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 그렇게 끝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 그래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지어본 적이 없는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사람. 이렇게 영원회귀 사상을 허무주의에서 삶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는 사람을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부릅니다.
♣ 선과 악을 넘어서
니체의 철학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뒤집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신(神), 이성(理性), 정신(精神) 등 서구문명이 전통적으로 중시해왔던 가치들을 뒤집으려는 니체의 시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니체는 그때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도덕적 가치에 물음을 던졌습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도덕(道德)은 니체가 보기에 그릇된 인간관과 세계관에 바탕을 두었고, 따라서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부정하고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니체는 당시의 도덕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고 새로운 도덕을 구상해 냈습니다.
그럼 먼저 니체가 기존의 도덕을 어떻게 비판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니체는 도덕이 절대(絶對)화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지금까지 도덕은 그 자체로 ‘선(善)’을 의미했고,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져 왔지요. 따라서 개인이 도덕에 대해 주관적인 판단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어요. 이렇게 도덕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보편적인 기준을 토대로 하는 도덕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보기에 도덕과 선(善)이란 인간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이란 사람들의 삶이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 변화에 따라 같이 변해야 합니다. 따라서 니체는 도덕이 상대적(相對的)인 것이라고 말했지요. 도덕이 절대적이고, 선(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으며, 삶의 현장을 초월해 있다는 생각은 불합리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절대적인 도덕은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했지요. [‘민족의 이름 위에는 저마다의 가치를 기록한 서판이 걸려 있다.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극복해 낸 바를 말하고 있으니.’,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지닌 힘에의 의지의 목소리니, 실로 이렇듯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일체의 선과 악을 부여해 왔다. 선과 악, 실로 그것은 저들이 어느 누구로부터 받아들인 것도, 스스로 찾아낸 것도 아니며, 하늘의 음성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선(善)이란 각 민족이 사물에 부여한 저마다의 가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사물에 부여된 선(善)의 가치가 삶을 고양시키고 위대하게 만든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렇게 선(善)과 악(惡)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도덕이 형성된 것이지요. 이와 같은 과정을 주도한 주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힘에의 의지’겠지요? 그러면 ‘힘에의 의지’가 자신이 목적에 따라서 ‘가치’마저도 창조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체는 선과 악, 그리고 도덕은 힘에의 의지가 사람들의 삶을 더욱 강하게 하고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낸 것으로 본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힘에의 의지가 선과 악의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임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일종으로서 너희들 의지의 전부다. 너희가 선과 악에 대해, 그리고 가치 평가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렇다. 진정, 너희에게 말하건대 불변의 선과 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힘에의 의지는 어떠한 상태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계속 더 강해지려 하고 더 많은 것을 정복하려 하는 본성에 충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힘에의 의지가 사물들에 부여하는 ‘가치들’, 즉 선과 악이란 것도 끊임없이 변하면서 삶에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불변하는 선과 악이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선과 악은 삶에 봉사하고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이란 고정된 절대적인 것이 아니지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선과 악을 고정되고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삶의 다양한 국면과 조건들을 무시하곤 했지요. 그건 선과 악이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벌인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서로 다른 선과 악에 대한 가치의 충돌이었습니다. 즉, 서로 다른 두 정치체제의 충돌이었지요. 아테네는 자유분방함, 진취성 등을 선한 것으로 여겼고, 스파르타는 절제, 인내, 질서 등을 선한 것이라 여겼지요. 이렇게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선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각각이 처했던 삶의 조건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테네는 주로 해상무역을 했고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자유분방함과 진취성을 중시했지요. 반면 스파르타는 내륙에 위치했고 농업 중심이었지요. 또한 전체 인구에서 스파르타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았어요.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다수의 노예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력과 질서 잡힌 조직 등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는 군사적 가치인 절제, 인내, 질서 등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의 가치는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정해진 선과 악이란 기준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죠.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 이전에 존재한 도덕이란 없어요. 단지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힘에의 의지가 세계를 해석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지요.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이 이렇게 해석을 달리하듯 말입니다.
또 니체는 서구식 도덕의 선과 악에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세계관이 배어 있음을 폭로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세계를 존재와 생성으로 나누어 바라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인 생성의 세계를 깎아내리고 모든 삶의 가치를 허구인 존재의 세계에 두는 문제점이 있었지요. 서구의 도덕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을 것입니다.
당연히 존재의 세계를 선한 것으로, 생성의 세계를 악한 것으로 평가해 왔어요. 그러면서 선은 추앙해야 할 것으로, 악은 혐오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선과 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妄想)일 뿐입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과 악이라 불리는 진부한 망상이 있다. 지금까지 예언가들과 점성술사들의 둘레를 맴돈 것도 이 망상의 바퀴였다. 형제들이여, 지금까지의 별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망상이었을 뿐 실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도 망상일 뿐 실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과 악이 진부한 망상인 이유는 뭘까요? 절대적인 도덕의 토대가 되는 초월 세계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왜곡과 경멸, 그리고 삶의 세계에 대한 폄하가 만들어낸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허구적인 절대 도덕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극복해 나가는 용기가 사람들에게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보다 더 나은 허구의 세계를 상상해 내었고 그곳의 삶을 지상에서 자신을 극복해 나가며 사는 삶보다 더 진실하고 선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었지요.
니체는 선과 악이라는 도덕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정결하지 못한 정신을 지닌 자들!’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일 뿐이라고 말하련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떨구고 있는 광신자와 위선자들이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오물더미”라고 설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들 모두가 정결하지 못한 정신을 갖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이 세계를 그 배후에서 보지 않고서는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자들, 즉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자들이 그러하다!’]
현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용기가 없는, 이 세계를 거대한 오물더미라고 부르는 그들이야말로 정결하지 못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들이야말로 대지를 오염시키는 ‘대지의 피부병’이라고 했습니다. 니체는 서양문명을 지배해 온 선과 악이라는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집고 싶어 했어요.
또 절대적인 도덕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비방해 왔고,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는지 폭로하기 시작했지요. 니체는 자신의 그러한 작업을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고 불렀어요. 모든 가치의 재평가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멸하고 저주했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볼까요? [이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아온 세 가지, 그것은 어떤 것들인가? 나 이제 그것들을 저울에 달 참이다. 감각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이 가장 고약하게 비방 받고 왜곡되어 왔던 것들이다. 나 이 셋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저울질해 볼 참이다.]
니체는 절대적인 도덕이 가장 저주했던 세 가지의 가치를 재평가합니다. 이들의 가치가 다시 인정받을 때 절대적인 도덕은 무너지고 말테니까 말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평가}
니체는 절대적인 도덕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특성으로 금욕(禁慾)주의를 지적합니다. 서구문명에서 감각적 쾌락(快樂)은 무조건 억압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절대적인 도덕은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이분화하고 정신적인 것을 선으로, 육체적인 것을 악으로 여겼지요. 그래서 육체가 가지는 감각적 쾌락은 무조건 나쁘고 억압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육체는 자유로워야할 정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으로 묘사되었지요. 육체가 가진 감각적인 쾌락을 멀리해야만 영혼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니체 이전까지 서구의 도덕은 감각적인 쾌락을 죄악시하는 금욕주의와 다를 바 없었어요.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다음 같이 감각적 쾌락을 재평가합니다. [감각적 쾌락이란 속물들에게는 자신을 태우는,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벌레 먹은 일체의 나무와 악취나는 일체의 누더기에게는 여차하면 욕정에 불을 지를, 그리하여 김을 무럭무럭 낼 채비가 되어 있는 화덕이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 그것은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는 천진난만하고 자유로운 것이며, 지상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이자 미래가 온통 현재에 바치는 넘칠 듯한 고마움이다. ]
니체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함께하는 커다란 하나의 신체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그 육체가 누리는 감각적 쾌락을 부정한다면 인간 존재 전부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겠지요. 그래서 육체와 육체의 감각적 쾌락을 억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자학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저런 자학이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고 말하지요. 무엇보다 신체 그 자체인 인간에게 육체를 벗어나라는 절대적 도덕의 명령은 니체에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이기심에 대한 재평가}
기존의 절대적 도덕(道德)은 이기(利己)적인 행위를 악(惡)으로, 이타(利他)적인 행위를 선(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기적인 행위와 이타적인 행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애(自己愛)’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 행위란 없다는 거지요. 그렇게 볼 때 이타적인 행위도 큰 틀에서 보면 결국 이기적인 행위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를 도와드렸을 때, 분명 순수하게 돕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고 나서 전혀 뿌듯하지 않다면 다음에도 할머니를 도와드릴까요? 니체는 이 경우 여러분이 할머니를 도운 이타적인 행위도 결국 여러분이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한 이기적인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행위는 이렇듯 자기애를 벗어날 수 없어요. 따라서 모든 행위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는 이기적인 것을 악으로 평가하는 도덕이야 말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기적인 것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라고.
니체의 말대로 우리가 힘에의 의지를 따라야 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야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일 테니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이기심은 건강한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차라투스트라는 건강한 이기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때, 그가 입을 열고 이기심을, 힘찬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건전하며 건강한 이기심을 복된 것으로 찬양하는 일이 일어났다. 진정 처음으로! 고상한 신체, 아름답고 막강하며 생기 있는 신체가 속해 있는,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이 되어 다시 비추고 있는, 그 힘찬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저 건강하며 건전한 이기심을 말이다.’]
고상한 신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기심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의 잇속만 챙기는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려 하고 세상과 투쟁하면서 더 많은 가치를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려는 사람의 이기심이지요.
기존의 도덕은 자기애를 버리고 남에게 헌신하는 것만을 고귀하게 여겼습니다. 고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당하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이는 절대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지배욕에 대한 재평가}
지배욕에 대한 니체의 평가는 이기심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그 본성상 더 많은 힘을 얻으려 하고 더 많은 것을 지배하고 싶어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배욕이란 힘에의 의지의 본성(本性)에 따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절대적인 도덕은 지배욕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레 지배자는 악한 존재로, 피지배자는 선한 존재로 여겼지요. 특히 기독교는 그러한 선과 악의 도식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어요. 성경에서도 로마인들은 악한 존재로, 유대인들은 선한 어린 양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에게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나쁘다, 좋다라고 평가하기 이전의, 우리의 삶이 가진 조건 혹은 기반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열망할 때 누가 그것을 두고 병적 탐욕이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그 같은 열망과 하강에는 병적(病的)인 것도 없거늘!’]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를 말할 때, 파시즘에서 보이는 그러한 지배구조를 떠올려선 안 됩니다. 니체가 강자와 약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란 ‘힘에의 의지’ 관점에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강자와 약자는 모두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서로 투쟁합니다. 즉, 강자와 약자 모두 더 많이 지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니체는 그러한 힘 경쟁이 계속 일어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본성에 충실한 모습이니까요. 만약 약자가 강자의 지위를 빼앗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극복하며 끊임없이 투쟁해서 결국 강자가 되었다면 니체는 그 사람에게 경탄할 것입니다.
니체는 결국 그러한 힘에의 의지들이 강자가 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경쟁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의 강자와 약자의 논리를 독재자의 억압적 지배구조나 나치가 주장한 나치즘과 연관시킨다면 잘못 이해한 것이지요. 니체는 오히려 그러한 맹목적인 지배-복종 구조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맹목적인 지배-복종은 힘에의 의지들이 더 이상 경쟁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배자인 강자는 약자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켜서 자신과 경쟁하기를 바랍니다. 마치 무술의 고수가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기뻐하듯이 말이지요.
자, 지금까지 우리는 니체가 기존의 절대적인 도덕이 억제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가치인 감각적 쾌락, 이기심, 지배욕을 어떻게 재평가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기존의 절대적인 도덕은 그러한 가치들을 깎아내리고 경멸해왔습니다. 이는 동시에 삶을 깎아내리고 경멸하는 결과를 낳았지요. 하지만 우리의 삶은 신체와 분리될 수 없고, 자기애에서 출발하며, 힘에의 의지의 본성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기존의 도덕을 ‘데카당스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데카당스란 원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예술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면 데카당스 도덕이란 삶을 부정하는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도덕을 의미하겠지요?
니체가 기존의 절대적 도덕을 ‘데카당스 도덕’이라고 부른 것은 기존의 절대적 도덕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세계를 바라보며 삶을 부정하고 가상의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데카당스 도덕을 없애고 새로운 도덕을 세우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입니다.
주인 도덕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자의 도덕을 의미합니다. 노예 도덕은 반대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지 못해서 다른 존재에 자기 자신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자의 도덕을 의미하지요.
즉, 주인도덕이 삶을 긍정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상승시키려고 노력하는 도덕이라면, 노예도덕은 삶을 혐오하고, 그래서 다른 존재에게 자기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도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에 관해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때 주인도덕을 갖고 살아갔다 하더라도 어느덧 그러한 삶에 만족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즉시 노예도덕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귀족이나 왕들이 가진 도덕이나 노예, 피지배층이 갖는 도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니체가 말한 강자가 귀족이나 왕과 같은 권력자를 의미하지 않고 약자가 노예와 같은 피지배층을 뜻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왕이나 귀족 같은 권력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현재에 만족하고 그저 자신의 지위를 현 상태로 유지하기만 바란다면 그들은 노예도덕을 지니고 있으며 더 이상 강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와 같은 피지배 계층이라도 권력자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려는 용기를 갖는다면 그들은 주인도덕을 지닌 자들이며 더 이상 약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니체는 ‘선과 악’을 넘어 삶의 주인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긍정하고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해 나갈 때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선과 악’이란 그저 자신의 삶을 넓히고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지금까지 우리가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너무 심각한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엔 분위기를 좀 바꾸어볼까 합니다. 춤과 웃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참이거든요. 그렇다고 춤과 웃음이란 주제를 만만히 보면 안 됩니다. 어쩌면 니체는 우리에게 즐겁게 웃으며 춤추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철학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고작 춤과 웃음이라니 조금 이상하기도 할 것입니다. 니체는 왜 춤과 웃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일까요? 춤과 웃음이 뭔지 이해하려면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비행술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자는 모든 경계석을 옮겨 놓고 말 것이다. 모든 경계석이 스스로 그의 눈앞에서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그는 이 대지에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이다.’]
세상을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세례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을 무거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세상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세상과 삶을 무겁게 인식하는 자를 니체는 ‘중력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중력의 영은 항상 투덜대기만 하며, 중력의 영은 세상과 삶을 저주하게 만들지요. 온갖 규율과 도덕으로 우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옭아매는 자가 바로 중력의 영입니다. 그렇게 중력의 영은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 사람들을 날지 못하게 하지요. 그래서 나는 법을 가르치려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중력의 영은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을 불구대천의 적(敵)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그것이 창조한 모든 것(강제, 율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뛰어넘고자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비행술, 즉 높이 나는 법은 지상의 세계를 떠나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니체의 사상과 정반대가 되어 버리겠지요.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은 니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긍정의 한 방식입니다.
니체는 높이 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삶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말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킨다고 하지요.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좀 더 높이 날아오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은 현재 가지고 있는 선입관, 관습, 낡은 도덕과 같은 틀을 깨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생성해 내라는 뜻입니다. 즉, 중력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그러한 가르침을 듣고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의문이 들겠지요. 모든 관습과 도덕을 거부한다면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오랫동안 유지된 관습이나 도덕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계속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면 피곤하지 않을까? 혹은 어차피 기쁨보다 고통이 많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그냥 편하게 살면 안 되나? 등등. 수많은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한다면 더 이상 새로운 삶은 주어지지 않아요. 그저 주어진 대로 적응하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현 상태에 만족하는 무사안일주의를 니체는 가장 혐오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 인간은 극복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비행술이야말로 힘에의 의지에 충실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차라투스트라의 훌륭한 비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날기 위해선 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지요.
중력의 영이 지닌 공포스러움은 그것이 우리에게 강제로 힘을 행사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중력의 영은 쉽게 포기하려는 마음, 새로운 도전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기존의 편안한 일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력의 영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편하지요. 하지만 그 달콤한 유혹에 굴복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새로워지지 못한 채 고여서 썩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온통 썩어서 시궁창이 되어버린 삶에서 쉽게 벗어나지도 못할 테지요. 파리에게 시궁창이 더 안락하고 편하듯이 우리에게는 오래된 도덕과 관습이 지배하는 세계가 안락하고 편안한 집일 테니 말입니다. 중력의 영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지 알겠지요? 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말아요.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비행술은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비행술의 비밀은 춤과 웃음에 있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비행술만이 중력의 영을 이길 수 있지요.
자, 그러면 춤과 웃음을 동력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술에 대해 알아봅시다.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의 첫 번째 원칙은 바로 이겁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을 무조건 기존의 편협한 세계를 벗어난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려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삶을 부정하고 자신이 사는 세계를 증오하면서 그 세계 밖으로 나가는 자는 마음 속에 복수심과 원한을 품게 돼지요. 복수와 원한의 감정은 자신이 맞이할 새로운 삶마저 복수와 원한으로 오염시킵니다. 저렇게 삶을 부정하는 것이 중력의 영이 가진 속성입니다. 따라서 삶을 부정하며 중력의 영으로부터 벗어나기란 불가능합니다. 부정을 통해 날아가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여 우리를 추락시키고 말 것입니다.
니체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라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날아오를 때 어떠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도 남기지 않고 훌훌 떨어버리지요. 자신의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높은 곳의 새로운 대기를 아름답게 수놓을 줄 알지요. 삶을 새롭게 하려는 자는 당연히 아름다운 삶을 만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중력의 영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즐겁게 비상하라고 합니다. [우리(하늘과 나)는 온갖 것을 함께 배웠다.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 상승하는 법과 해맑게 미소 짓는 법을 함께 배웠다. 우리의 발아래서 강제와 목적, 그리고 죄과라는 것이 마치 비처럼 자욱한 김을 내뿜을 때, 밝은 눈을 하고 먼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해맑게 미소 짓는 법을 배웠다.]
즐겁게 비상할 때 우리는 서로 웃으면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떠한 원한과 복수심도 없는, 삶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없는, 중력의 영을 떨구어낸 만남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의 두 번째 원칙은 이것입니다. [심각해지 말 것!]
우리는 웃고 춤추며 즐거워하는 행동을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에 대한 지혜를 가르치는 철학자가 웃고 춤추라고 말한다면 더 이해할 수가 없겠지요. 깊은 고민의 표정을 지은 철학자의 얼굴은 쉽게 상상이 가지요, 반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철학자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고민만 일삼는 철학자들도 사실 차라투스트라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철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삶을 좀 더 진지하게 대하라고 역설하겠지요.
여러분들도 좀 헷갈리지요? 사실 차라투스트라가 조금 경박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마에 깊은 고민의 주름을 가진 철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말할 테지요. “그대는 너무 경박하지 않소?”, “삶을 사랑한다면 삶을 진지하게 대해야 하지 않겠소?”, “중력의 영의 원한과 증오, 낡은 도덕들로부터 삶을 구원해야지! 그러려면 우리는 삶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철학자들을 심히 불쾌해할 것입니다. 심각한 동물들한테서는 고약한 냄새가나는 법이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여기서 그 ‘심각한 동물’들에 대한 니체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대다수 인간의 지성은 잘못 움직이고 둔중하고 음울하며 삐걱거리는 기계다. 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열심히 사고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들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사랑스런 ‘인간 동물’은 생각하는 것을 기분이 음울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서의 사고를 무익하다고 말한다. 이는 ‘즐거운 지식’에 대한 심각한 동물들의 편견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심각한 철학자들을 기계라고 비유한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사고가 경직되고 생명력이 없음을 비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작 얼굴에 짙은 고민의 표정을 만들기 위해 사는 것일까요? 니체는 저 심각한 동물들이 우리의 삶에 그늘을 만들고 우리의 생명 의지를 감소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여러분이 좋아하는 친구와 심각한 대화만 나눈다면 어떨까요? 만약 여러분이 부모님과 늘 진지하고 심각하게만 지낸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을 따분하고 숨 막히게 하는 게 분명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또 어떤 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최대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가져야 하지요. 사랑은 상대방의 얼굴에 고민의 주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표정을 새겨 넣는 것이니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처음부터 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춤추는 법, 그리고 웃는 법을 배워야 하지요. 심각하거나 우울해하지 말고 경쾌하고 즐거워하며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중력의 영을 죽이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악마가 엄숙하고 심오하며 장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중력의 영이다. 그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는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중력의 영을 죽인다.]
언젠가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과 숲속을 가다가 숲속에서 춤추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소녀들은 차라투스트라와 그의 제자들을 보고 놀라 춤을 멈췄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소녀들에게 계속 춤을 춰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리고 그 춤에 노래를 지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의 강력한 악마 중력의 영에게 바치는 춤, 노래이자 조롱의 노래’를.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에게 가장 강력한 무공인 춤과 웃음의 신공을 선보였던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심각한 얼굴로 자유와 사랑을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춤출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그래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처음부터 그렇게 춤과 웃음의 달인이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우리는 이 책(「차라투스타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읽으며 차라투스트라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민 그리고 번민을 가졌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중력의 영에게 얼굴을 찡그렸고, 세계를 오염시키는 수많은 사람들을 역겨워했으며, 그러다 그들이 가여워 비통하게 울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산으로 다시 올라가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가 춤과 웃음을 배워가는 이야기, ‘차라투스트라의 쉘 위 댄스’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춤과 웃음은 영원회귀의 끔찍한 사상을 극복한 자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엄청난 고통의 사상인 영원회귀는 인간의 삶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입니다. 차라투스트라도 영원회귀 사상 앞에서 어찌할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는 영원회귀 사상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춤과 웃음으로 삶을 가볍게 할 수 있었지요. 차라투스트라의 춤과 웃음은 바로 그렇게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가진 몸짓입니다.
우리는 춤과 웃음을 통해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기술이자 삶을 유쾌하게 긍정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춤과 웃음은 비행술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럼 이번엔 변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니체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위버멘쉬에 대해서 살펴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신의 죽음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위버멘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위버멘쉬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기초적인 기술을 연습해 왔다고 보면 됩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바로 필드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 전에 기본적인 기술들을 배워야지요. 그렇듯 우리는 위버멘쉬가 되기 위한 연습(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선과 악을 넘어서,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다)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의 앞부분에서 비행술에 관해 살펴보았지요. 비행술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는 위버멘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운동 원리입니다. 그리고 비행술은 변신술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뛰어 넘을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변신하지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변신 이야기는 새로운 존재인 위버멘쉬의 또 다른 이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변신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처음에는 낙타가 되고, 낙타에서 사자, 마침내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의 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낙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낙타는 아무리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쫴도,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싣더라도 꿋꿋이 참고 견뎌 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타는 주인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타의 그런 성실함과 헌신에 감탄하지만, 사실 낙타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 인간들 중에도 낙타와 같은 정신을 진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그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 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노예정신을 지닌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나귀라는 동물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나귀는 ‘이-아’(I-a)라고 우는데 그 소리는 독일어로 ‘Ja’ 우리말로는 ‘예’와 비슷합니다. 나귀 역시 주인의 명령에 항상 ‘예’라고 답하는 동물입니다. 니체는 낙타나 나귀와 같은 정신을 지닌 자들은 자신의 삶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노예적 삶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동물은 사자입니다. 사자는 낙타와 반대로 남의 말을 죽어도 듣지 않는 동물입니다. 무엇이든 명령하면 으르렁거리며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하지요. 사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가진 동물입니다. 만약 낙타가 사자로 변신한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떠한 주인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사자의 자유정신을 ‘황금빛 비늘’을 가진 용과 사자의 대결을 통해 설명합니다.
자신의 모든 주인을 물리친 사자는 용으로 변신한 ‘신’과 대적하는데, 용은 사자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고 의무와 당위를 강요합니다.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은 “너는 이것만을 꼭 지켜야 한다”, “너는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와 같은 도덕과 법의 원칙을 대표하는 말이지요. 황금빛 비늘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빛내는 신의 절대적 위치를 뜻하지요.
그러나 사자는 그러한 신의 명령과 황금빛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즉,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욕망을 신뢰하겠다는 것이지요.
니체는 자유를 이루고자 한다면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옮겨가는 변신을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자는 모든 권위, 가장 절대적이며 신성한 신의 권위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동물이지요. 우리는 그런 사자의 ‘아니오’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자의 정신을 지니려면 우리는 수많은 위협과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욕망에 따른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을 세상에 당당히 내세운다는 것은 분명 어렵고 힘든 일이지요. 하지만 사자의 정신은 신과 함께하며 안락하기보다는 기꺼이 고독과 굶주림을 선택하지요. 용의 명령과 유혹을 거부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지만 과연 사자가 용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사자는 낙타처럼 비굴한 노예는 아니지만 그의 삶이 유쾌하고 즐거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승리를 이루었다면 사자의 얼굴에 그토록 많은 고민과 고통의 흔적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싫어하는 것만을, 즉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법만을 알고 있을 뿐,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우리는 춤을 출 수도, 웃을 수도 없지요. 춤과 웃음이 없는 자는 비행술을 익힐 수 없고, 하늘을 나는 용을 절대로 이길 수도 없지요.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낙타에서 사자로의 변신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낙타는 먼저 사자로 변신을 해야 한다고. 그러나 사자는 긍정할 줄 모르기에 진정한 승자가 되지 못했지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의 세 번째 단계가 바로 ‘어린아이의 정신’입니다.
니체는 참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니고 있지요.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을까요? 용맹한 사자로의 변신을 이루었는데... 왜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는 것일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의 의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사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욕망에 충실합니다. 도덕과 법에 관심도 없고 그저 웃기만 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란 것도 없지요. 그저 재미와 놀이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비도덕적 존재입니다. 니체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본 것은 이처럼 욕망에 충실하고 도덕적 선과 악을 넘어선 비도덕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가진 웃음입니다. 사자가 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지 이제 알겠는지요?
어린아이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지 않습니다. 그저 웃을 뿐이지. 어린아이는 용을 보고도 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사자에게 용이 커다란 부정의 대상이요 적이었다면, 어린아이에게 용은 그저 웃음거리, 놀잇감일 뿐이지요. 사자는 힘겹게 싸우지만 어린아이에게 사자의 전투는 재미있는 놀이이지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변신 이야기는 결국 우리에게 ‘긍정’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우화입니다. 춤과 웃음, 그리고 변신의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삶에 대한 긍정의 얼굴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차라투스트라의 여행은 바로 그러한 긍정의 얼굴을 갖기 위한 변신술과 비행술을 터득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변신술과 비행술을 통해 긍정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칠 때, 그는 이미 위버멘쉬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 위버멘쉬
지금까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거의 다 배웠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말한 신의 죽음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낡은 도덕과 형이상학, 신앙, 가치 등과 같이 삶을 부정해 왔던 모든 것에 대한 사망선고 임을 알고 있겠지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일까요?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부정해 왔고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세계를 꿈꾸게 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가 그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온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요? 만약 모든 것을 부정해버린다면 우린 허공 위에 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어디서 왔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상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 찾아낸 답이 바로 신이나 도덕이었지요.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없앤다면 커다란 혼란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니체야말로 이 점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니체는 바로 신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니체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우리는 대체로 상황의 일부만을 보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이 이사를 가서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친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물론 무척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이사를 가면 또 다른 친구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사는 한편으론 친했던 이들과의 이별을 가져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만남을 가져오지요. 니체가 생각했던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던 신이 죽었다면 삶의 이유가 사라진 셈이지만 그건 신의 죽음이란 사건의 한 면만을 본 것이지요. 니체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또 다른 면을 보라고 권유합니다. 니체는 신의 죽음에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희망합니다. 그 새로운 존재가 바로 위버멘쉬입니다.
위버멘쉬는 독일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superman이나 overman 정도이지요.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위버멘쉬를 ‘초인’이라고 변역해 왔지만, 초인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학자들이 의견에 따라 원어인 ‘위버멘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동안 사람들은 니체의 위버멘쉬를 오해해 왔습니다. 물론 번역 탓도 있지요. 초인이라고 하면 공중 부양을 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특별한 사람을 생각하기 쉽잖아요? 하지만 니체는 절대로 그런 의미로 위버멘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신이 죽은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존재, 위버멘쉬는 무엇일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위버멘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지요.
차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이 위버멘쉬를 정의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이 짧은 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정의는 이미 위버멘쉬란 글자에도 드러나 있지요. 독일어로 ‘über’는 영어의 ‘over’와 같은 말로 ‘~을 넘어서’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mensch’는 영어로 하면 ‘man’ 즉, 인간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곧 ‘인간을 넘어섬’, ‘인간을 극복함’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을 극복한 존재는 결국 신이 아닐까요? 신은 아니더라도 초능력을 지닌 초능력자나 스파이더맨 정도는 되어야 인간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는 초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도 아니며 신은 더더욱 아니라고 앞서 얘기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니체와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위버멘쉬란 어떤 존재일까요?
위버멘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을 넘어선다’는 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을 넘어선다는 의미는 다윈의 진화론처럼 인간 종의 생물학적 진화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할 때 니체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적이라는 건 더 이상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니체에게 이 세계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곧 ‘대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대지의 본성이지요. 니체가 말하는 대지란 인간이 만들어낸 ‘천상의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와 같은 가상의 세계에 대립하여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걷고 보고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대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끊임없이 변하니까)
대지는 그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고 우리가 태어난 곳이며 죽을 곳이지요. 니체에게 유일하게 인정받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곧 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대지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헛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냈지요. 그리곤 가상세계의 주인인 신까지 만들어 냈어요. 그렇게 인간은 대지의 건강함을 해치고 오히려 대지를 병들게 했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한다.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한다고! 나의 형제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이 의식적으로 행하든 무의식적으로 행하든 그들은 독을 타는 자들이다.]
위버멘쉬는 곧 대지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대지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대지의 본성인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기 위해 인간은 ‘인간적인 것’을 극복해야만 하지요. 힘에의 의지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를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신체는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야 하지요. 그래서 대지에 충실하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그저 현 상태를 평온하고 안일하게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니체는 이런 인간을 경멸해야 할 인간상으로 제시했지요. 그리고 그런 인간의 모습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곧 위버멘쉬와 정반대에 놓인 인간형입니다. 이런 인간형을 극복해야 우리는 위버멘쉬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 차라투스트라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우선 첫째로 ‘창조’나 ‘신’, ‘별’과 같은 것들을 동경하고 찬미하는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과 별이 있는 하늘만 바라보느라 그들을 낳고 길러낸 어머니와 같은 대지를 왜소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니까요. 한마디로 ‘대지’와 ‘대지에서의 삶’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거지요.
둘째로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이웃 사랑이나 형제애 그리고 동정이나 관용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현대사회에서도 올바른 것으로 여겨지지요. 그러나 니체의 관점에서 이러한 덕목들은 개인의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요소입니다.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한 니체의 생각에서 살펴보았듯이, 전통적으로 중시되었던 도덕법칙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사랑인 건강한 이기심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만들지요. 니체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찬미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를 회복할 때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자기 보존을 중시합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기 보존의 욕구는 끝없이 변화하는 대지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살아야 하는 대지에서의 삶을 고통으로 여깁니다. 위버멘쉬가 되려면 자기 자신과 끝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자기 보존의 유혹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끝없이 상승시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로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평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평등이란 약자가 강자에게 가지는 복수심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복수심은 질투에서 비롯되지요. 니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생각을 잔인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적인 삶이란 끝없는 자기 극복과 자기 상승을 추구하는 투쟁의 삶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모두가 더 높은 인간이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싸움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만약 평등을 추구한다면 자기 극복과 자기 상승을 위한 싸움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그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 보존의 게으름, 건강한 이기심과 자기애를 나쁘게 보는 이웃 사랑의 가치, 자기 극복의 끝없는 투쟁과 힘에의 의지들 간의 건강한 경쟁을 포기하게 만드는 평등의 원리 등을 중시합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모든 것을 작게 만들고 대지 역시 작게 만드는 인간]의 ‘작게 만든다’의 의미는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상승하지 않고 정체하게 만든다.”고.
혹시 뉴질랜드에 사는 키위라는 새를 아시나요? 키위의 서식지는 화산지대라서 뱀과 같은 천적이 없고 먹이가 풍부합니다. 그러니 키위는 날아다닐 필요도, 멀리 봐야할 필요도 없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키위의 날개와 눈은 퇴화해 버렸습니다. 한때 창공을 날아다니며 먼 곳을 내다보았던 새가 이제는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주둥이를 땅에 박고 다니는, 새 아닌 새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키위가 바로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키위가 드높은 창공을 날면서 바라보았던 넓은 세계를 포기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 고작 코앞의 땅만큼의 세계를 택했듯이,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모든 것을 작게 만들어 버리는 아주 옹졸하고 무능력한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한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무기력하고 옹졸한 현재의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우물 속의 개구리마냥 자신들의 좁은 세계를 절대화하고 더 높은 인간의 위상과 그런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물속의 개구리에게 아무리 우물 밖의 드넓은 세계에 대해 알려준다 해도 개구리는 우물을 벗어나려 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개구리 같은 군중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인간형이 얼마나 추악하지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군중은 오히려 환호성을 지르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그러면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 다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를 종말의 인간으로 만들어 다오! 그러면 우리는 그대를 위버멘쉬라고 부르리라.”
이렇게 우매한 개구리 같은 인간들은 오히려 누군가가 더 좁고 더 깊은 우물로 인도해 주길 바라지요.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위버멘쉬의 길을 깨달을 수 없음을 알고 그 우매한 무리를 떠나지요.
차라투스트라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우매한 군중의 가장 큰 문제점이 스스로를 경멸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경멸할 수 없기에 자신의 문제점을 고민하고 반성할 수도 없지요. 문제점을 인식하지도 못하는데 그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우매한 군중에게는 변화와 자기극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그저 자기만족에 빠진 채 수많은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우매한 군중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리 속에서는 사람들 간의 차이, 즉 개성이 말살되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해 내기보다는 집단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집단적인 가치나 강한 힘을 가진 지도자를 숭배하거든요.
니체는 그가 살던 당시 유럽에서 일어났던 파시즘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지요. 특히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던 나치즘을 굉장히 혐오했지요. 나치야말로 히틀러라는 한 명의 지도자를 숭배하면서 유럽의 제패와 반(反)유대주의를 부르짖는 집단주의였으니까요.
그러나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은 그동안 나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오해가 만들어진 데는 니체의 여동생이었던 엘리자베트 니체의 탓이 컸지요. 그녀는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가 히틀러를 의미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지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야하며 열등한 존재는 당연히 도태된다고 말한 니체의 사상은 나치의 인종주의와 잘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강자란 인종이나 권력, 부(富)에 따른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가 우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면서 좀 더 강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정신적으로 항상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인종적 편견에 휩싸였던 것이지 좀 더 높은 정신을 가지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당시 독일국민에게 히틀러와 나치는 마치 교주와 교회당 같은 존재였지요. 니체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지요. 특정한 이념에 자신의 개성을 빼앗긴 채 순종하라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니체는 집단주의에 대항하여 ‘거리의 파토스’를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거리의 파토스란 집단과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기만의 개성적인 자아를 만들어 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벗어나 직접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평가하며 창조해 내는 자, 즉 자유정신을 지닌 사람을 의미합니다.
허나 위버멘쉬의 길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니체와 차라투스트라도 자기 자신을 위버멘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버멘쉬는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후반부엔 ‘지체 높은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우매한 집단과 그 집단적 가치를 비판하고 홀로 더 높은 인간의 길을 찾아 나선 자들이지요. 민중의 지배에 싫증을 느낀 왕, 신앙을 잃은 교황, 홀로 진리를 찾아 떠도는 방랑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위해 만찬까지 열어 주었지만 그들은 결국 인간적인 모습을 극복하지 못했지요. 그 명백한 증거는 그들이 벌인 ‘나귀제’였습니다.
그들은 나귀를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어 나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문을 외웠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신의 죽음을 이해했던 그들이 나귀를 신으로 숭배하고 위버멘쉬로의 여정을 포기한 채 또다시 (나귀교를 믿는) 우매한 인간집단을 이루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왜 그들은 위버멘쉬가 되지 못하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을까요? 그들이 ‘인간적인 것’을 비판하고 비웃었지만 막상 ‘인간적인 것’을 과감히 내던지진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죽었다면 이제 신이 없는 대지 위에 홀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신이 없는 대지는 너무나 황량하고 가혹한 곳입니다. 인간이 의존할 그 어떤 포근한 품도 없이 오직 대지의 원리인 힘에의 의지들 간의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니까요.
그러니 지체 높은 인간들마저도 대지의 삶을 요구받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신의 품이 그리웠고, ‘나귀제’를 벌이며 신을 부활시켜 ‘인간적’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야말로 자기극복을 방해하고 기존의 낡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지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인간은 이처럼 새로운 삶을 두려워하고 고독을 겁내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봅시다. [너에게는 너 자신을 잃고 몰락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너는 결코 새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늘 날개, 색, 옷, 그리고 힘이었던 것이 내일은 단지 재가 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극복에는 반드시 몰락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내가 새로워지려면 어제의 나를 남김없이 버려야 하고, 내일의 내가 새로워지려면 오늘 새로워진 나 역시 깨끗이 죽여 버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는 항상 기꺼이 몰락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차라투스트라의 삶도 사실 몰락의 역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산을 오르내리며 정신의 기쁨과 슬픔을 오르내렸고 수많은 정신의 변화단계를 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보존하지 않고 자기극복을 위해 수많은 기존의 자기를 버리는 몰락을 기꺼이 단행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로의 궁극적 변화를 예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정신의 변화단계 중 마지막 단계, 즉 어린아이에 대한 예감입니다.
[나의 고통과 나의 연민,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행복을 열망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작품을 열망하고 있을 뿐이다. 좋다! 사자는 왔으며 내 아이들도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투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다시 어린아이로의 변신 단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마지막 단계인 천진난만함으로 삶을 긍정하는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가까이 왔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실현했을까요? 글쎄...결론을 확실히 말하진 않았지만 희망적으로 끝나고 있긴 하지요. 하지만 이건 명심해야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도 지체 높은 인간들처럼 인간적인 것에 굴복할 수 있음을. 설사 위버멘쉬가 되었다 하더라도 차라투스트라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말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마저도 모범답안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정하는 순간 우리는 특정한 범주로 묶여 집단화되고 스스로 ‘차라투스트라 교(敎)’를 만들어 내겠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친구이자 경쟁자일 뿐입니다.
1. 각자 스스로 기꺼이 몰락하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갈 것
2. 그리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지의 삶에 충실할 것
3. 힘에의 의지, 그 자체가 될 것
4. 편협한 이성을 넘어 육체와 정신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하는 신체를 가질 것
5. 절대적 도덕, 즉 선과 악을 넘어서는 가치를 스스로 평가할 것
6. 앞에서 말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놀이하듯 즐길 것
7. 결국 이 모든 차라투스트라의 충고는 ‘삶에 대한 사랑’임을 명심할 것
★★★
지금까지 우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함께 훑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니체와 니체가 창조해낸 인물인 차라투스트라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이 여러분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켰는지 니체도 많이 궁금할 것입니다. 책의 첫 페이지에 니체는 책의 부제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니체의 이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니체의 생각은 도발적이고 위험하지요.
니체는 모든 것을 뒤집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우리가 만들어 온 문화, 모든 가치와 의미들을. 심지어 인간 자체마저도 완전히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니체는 망치를 들어 그 모든 것을 파괴한 뒤,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니체의 도발적이고 위험한 생각을 두려워했고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니체를 오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니체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귀’들이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니체가 살았던 19세기와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요?
니체는 인간의 역사가, 삶을 왜곡하고 실재하지 않는 허상을 만들어 숭배해온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바로 그러한 숭배의 대상이었지요. 물론 니체가 살았던 유럽은 근대과학과 문명이 절정이었던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신(神)이 죽었을 뿐, 인간은 ‘이성(理性)’이라는 새로운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지요. 다시 말해 인간은 그 대상을 바꾸었을 뿐 언제나 신을 숭배해 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신을 숭배한 역사는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대지에서의 삶을 경멸하고 폄하했던 역사와 함께 하지요.
그러니까 니체는 이성이 또 하나의 새로운 신으로 자리매김한 시대에 과감하게 이성 역시 또 다른 허상이라고 폭로했던 것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과학적 진리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성을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거짓 신이라고 폭로한 것이지요. “명백한 단 하나의 진리란 없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사실과 가치란 없어.”라면서.
진리란 해석된 것이고, 그 해석은 항상 어떤 힘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란 해석되는 것이고 해석은 바로 힘에의 의지가 하는 것이기에 오직 힘에의 의지만이 진리일 뿐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 각자의 욕망(欲望)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가진 욕망이 바로 우리의 힘에의 의지이니까요.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욕망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욕망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항상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이성의 가르침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는 니체를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체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모든 삶의 의미와 가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여러분을 가르치려 하는 모든 가치를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항상 “그건 나빠!”, “그건 악해!”,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고,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그 무엇보다 여러분 내면의 욕망을 살피라고 말합니다. 무한히 반복되길 원할 만큼 ‘간절한 욕망’ 말입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 있어서 네가 무한히 그것을 하길 원하는지 자문한다면, 그것은 네게 있어 가장 확고한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길 원할 만큼 바라는 것. 그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 충족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비참한 영원회귀를 기쁨과 긍정의 영원회귀로 바꾸어 놓는 니체의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힘에의 의지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보지 않으려 하고 없애 버리려고 하지요. 우리는 스스로 금욕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삶을 학대합니다. 물론 금욕주의자들이 니체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악한 행위는 그러한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범행들을 보면 그 범행의 동기에 탐욕이 있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니 욕망은 억제하고, 가능하다면 없애 버려야 한다고 금욕주의자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신체는 먹고 마시며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됩니다. 신체가 곧 욕망인데 욕망을 없애라면 우리는 신체를 내버려야 할 것입니다.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중세시대에는 신체를 학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우리의 신체가 없어지지는 않지요. 따라서 우리의 욕망 또한 없앨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밟고 선 대지를 없앨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 욕망에 대한 학대는 삶을 왜곡시킵니다. 결국 우리는 삶을 벗어날 수 없으면서 삶을 혐오하는 상황에 처하지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대지를 딛고 걸을 수밖에 없는데 대지를 혐오한다면? 그런 삶이 과연 옳을까요?
니체의 철학은 이렇듯 우리의 삶을 해방시키려는 거대한 기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도 그렇게 가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도 니체가 말하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하나일 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의 삶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며 더 큰 힘을 가지려 하고 더 많은 것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하지요.
우리의 삶을 벗어난 초월적 진리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삶은 왜 이런 것일까?”, “세계는 왜 이렇게 되어 있나?”, “창조자는 있을까?”
왜냐하면 삶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이유가 따로 있지 않으니까요.
최종적 진리, 그게 바로 삶입니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에게 철학이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면, 니체에게 철학은 삶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만약 안일함에 빠지지 않고 깨어있는 철학적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삶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아모르 파티,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애란 뜻입니다. 즉, 자신 자신의 운명인 삶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왜 우리는 새처럼 날 수 없을까? 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을까? 왜 삶은 고통스러울까? 왜 세상은 평등하지 않을 까? 같은 의문은 무의미합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그저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그 삶에 ‘왜?’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고 그래서 그에 대한 답도 없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물으면서 찾았던 답들. 신, 이성, 도덕, 보편적 진리와 같은 것들은 모두 오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 우리는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긍정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살지요. 어제의 나를 오늘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게으름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대상을 게을리 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신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끝없이 몰락을 경험해야 합니다. 위버멘쉬는 스스로 몰락하면서 항상 새롭고 더 위대한 자아를 창조해 내는 자입니다. 그래서 위버멘쉬는 과감하게 자기 자신을 버리는 몰락의 용기와 더 위대한 자아를 창조해 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진 자입니다.
니체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위버멘쉬란 대지의 삶에 충실한 이를 의미하니까요. 그리고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선 스스로 기꺼이 몰락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을 긍정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의 운명이 비참하고 모순된 현실 속에 있는데 무조건 긍정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니체가 긍정을 말할 때 우리는 그 긍정의 의미를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 인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비참한데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고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일단 현실을 직시해야합니다. 즉, 내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긍정의 첫 번째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실을 대할 때의 태도입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거든요. 니체는 처음엔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에 공감했으나 자신의 철학을 세우면서 ‘나의 철학은 삶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라면서 쇼펜하우어를 극복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의 긍정이 필요합니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란 매순간 다시 태어나는 마법과 같습니다. 마법의 비밀은 바로 즐거움과 놀이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의 고통과 비참함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끝없이 놀이의 계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즉, 세상과 즐겁게 노는 유희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놀이가 즐거운 이유는, 놀이는 ‘해야만 한다’거나 ‘반드시’라는 의무나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만약 게임으로 시험을 본다고 해봅시다. 프로게이머들은 아마추어보다 오히려 게임을 즐기지 못할 것입니다. 게임이 직업이 되어 버렸으니 그들에게 게임은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겠지요. 그러니 삶을 즐거운 놀이로 대하기 위해 우리는 삶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삶을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코 ‘인생 뭐 있어?’ ‘젊어서 놀아야지.’ 이렇게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끝없이 나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나면 우리는 삶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꼭 1등을 해야 해’라며 스스로를 1등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어버리면 여러분은 공부를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매순간 욕망을 새롭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매일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 내는 것이 즐거움의 비밀일 것입니다. 꼭 1등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강박관념이 영원 회귀한다면 삶은 불행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매순간 새롭게 태어난다면 나의 욕망 역시 다양해지고 그 목표도 다양해지겠지요. 그래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란 항상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는 놀이이자 그러한 놀이를 운명으로 만드는 운명애, 즉 아모르 파티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조금 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근대를 넘어선 탈(脫)근대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적 문화와 가치가 여전히 우리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요. 일단 여러분 자신의 삶부터 살펴볼까요? 여러분은 대부분 학교에 다니지요. 학교란 지극히 근대적인 산물입니다. 근대 이전엔 학교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똑같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화(社會化)란 명목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즉, 국가 사회의 건전한 시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시민들이 알아야 할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히 교과지식만이 아닙니다. 이제 학교생활이 조금 달리 보이나요?
만약 니체라면 근대적 산물인 학교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학교 교육은 모든 아이들의 개성을 없애고 단순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듭니다. 근대사회는 모든 인간을 집단으로 묶는 거대한 체제였고, 아직도 건재합니다. 우리가 니체를 배웠다면 이제 세계를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근대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사회체계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지 잘 살피고 그런 체계에 저항해야 합니다.
근대사회가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는 또 다른 방법은 대중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이지요. 근대사회의 발명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것이 바로 신문입니다. 사실 신문은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닌 매체가 아닙니다. 신문은 근대사회의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도시와 도시민들이 형성되면서 생겨났습니다.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문은 정보를 얻고 여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신문을 지나치게 의지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생각만을 하고 있지요. 신문을 읽으면 마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아는 것 같고 많은 지식을 얻은 듯 하지만 사실은 점점 자신만의 생각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모든 아버지는 항상 식탁에서 신문을 보잖아요? 불행하게도 인간의 삶이란 고작 식탁에서 신문을 보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인은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대중매체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개성을 살리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텔레비전에 빠져서 드라마나 대중가요, 쇼 프로그램의 세계 속에서 사는 건 아닌지요. 니체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우매한 집단의 한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진 않았을까요?
근대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나 다름없었고 학교와 직장, 군대 같은 조직들은 관료제를 내세워 인간을 획일화시켜 버렸으며 대중매체 역시 똑같은 생각과 문화를 찍어냈지요. 근대사회의 자본은 과학적 이성과 함께 또 하나의 신으로 군림했지요. 하지만 니체의 주장들은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오지요.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신앙을 완전히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근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신앙은 합리성, 과학, 절대적 보편성, 규범적 도덕주의, 자본과 자본을 합리화하는 프로테스탄트적 윤리, 사회적 합의, 평등의 가치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니체는 ‘모든 것이 또 다른 신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적인 저편의 세계’와 ‘경멸해야 할 현실’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그 모습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니체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는 ‘아모르 파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쩌면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더욱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지도 몰라요. 자아(自我)을 망각하고 관료제의 틀에 갇혀 똑같은 업무를 쳇바퀴 돌 듯 수행하고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신앙을 붙든 채 실상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는 거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의 충고를 마음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삶을 긍정하는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창조해 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자기애와 개성을 회복하고 무리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거리의 파토스’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기쁨의 영원 회귀를,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항상 새롭게 삶을 꾸미고 자기 극복을 하는 위버멘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대지에 충실한 삶이고, 대지에 충실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출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작성자 명신산업안전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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