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 2부 가려 뽑은《중론》
1.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
《中論》은 다음과 같은 歸敬偈로 시작한다.
발생하는 것도 없고[不生]1) 소멸하는 것도 없으며[不滅] 不生亦不滅
서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不常] 서로 끊어진 것도 아니며[不斷] 不常亦不斷
서로 같지도 않고[不一] 서로 다르지도 않으며[不異] 不一亦不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不來] 어디론가 가는 것도 아니며[不去]2) 不來亦不出
온갖 망상을 잠재우며[戱論寂滅] 상서로운[吉祥] 能說是因緣
'緣起의 진리' 를 가르쳐 주신 부처님, 善滅諸戱論
최고의 스승이신 그분께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 MK.3) 1-1, 1-2
이 게송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緣起' 이다. 연기란 쉽게말해 '얽혀서 발생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35세에 보리수 아래에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禪4)의 경지에 들어가 '세상만사가 모두 얽혀서 발생한다' 는 연기의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셨다. 그리고 80세에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45년 간, 자신이 깨달은 연기의 지혜와 그런 지혜를 얻기위한 수행방법을 가르치셨다. 그 후 500여 년이 지나 용수는 연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위와 같이 열가지 수식어로 묘사한 후 이를 가르치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
《中論》에 대한 전통 해설서에서는 연기에 대한 열가지 수식어중, 부정적으로 표현된 앞의 여덟가지 수식어, 즉 八不의 의미에 대해 '원인인 씨앗과 그 결과인 싹' 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ㆍ不生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ㆍ不滅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ㆍ不常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이 싹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ㆍ不斷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과 싹이 단절된 것이 아니다.
ㆍ不一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과 싹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다.
ㆍ不異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과 싹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ㆍ不來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싹이 다른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ㆍ不去 :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이 그대로 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연기'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세상만사는 모두 다른것과 얽혀서 발생한다. 홀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 싹은 반드시 그 씨앗이 있어야 발생할수 있다. 다시말해 싹은 씨앗 등에 의존하여, 얽혀서 발생한다. 그런데 얽혀서 발생한다는 것, 즉 연기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묘사할수 없다. 우리의 '생각' 은 흑백논리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놈' 은 있음[有]을 부정하면 없음[無]을 떠올리고, 같음[一]을 부정하면 다름[異]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싹의 발생' 이 생각의 대상이 될 경우, 씨앗에 '없던' 싹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지, 씨앗에 '있던' 싹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앞에서5) 소개한 바 있지만, 中觀論理에서는 부정표현인 전자를 제2句 판단, 긍정표현인 후자를 제1句 판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논리의 오류를 범한다.
첫째, 싹이 씨앗속에 미리 존재했다면 싹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리 존재하는 것을 다시 만들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리 존재하는데도 굳이 다시 만들어 낸다면 싹이 두 개가 되는 오류에 빠진다. '애초에 싹을 만들기 위해 씨앗속에 존재하던 싹' 과 '나중에 만들어져 발생한 싹' 이라는 두가지 싹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싹을 '발생케 하는 싹' 이고 뒤의 것은 그렇게 해서 '발생된 싹' 이다. 그러나 하나는 두 개가 될수 없다.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해 제1구의 방식으로 이해하면 이렇게 하나의 싹이 두개로 분열되는 오류가 발생한다[제1구 비판].
둘째, 그와 반대로 어떤 싹이 애초의 씨앗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류에 빠진다. 애초의 씨앗은 싹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초의 씨앗이 거기서 나올 싹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어떤 싹이 발생한다면, 그 싹과 관계가 없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 싹이 나올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감자 싹이 그 와 무관한 사과 씨에서 나올수 있어야 하고 조약돌을 심어도 사과싹이 나올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제2구적 이해 역시 이렇게 오류에 빠진다[제2구 비판].
씨앗과 싹의 관계에 대한 흑백논리적인 생각, 즉 '씨앗속에 존재하던 싹이 발생한다' 거나 '씨앗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싹이 발생한다' 는 상반된 두가지 이론이 모두 논리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어떤사람은 '싹 전체' 가 아니라 '싹의 요소' 가 씨앗속에 있는 것이라는 제3의 이론을 제시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싹의 요소가 씨앗속에 있다' 는 판단은 '싹의 일부는 씨앗속에 있고, 다른 일부는 씨앗속에 없다' 는 판단으로 재해석되며, 중관논리로 풀면 이는 결국 '싹이 씨앗속에 있으면서 없다' 는 제3구의 판단이 될 뿐이다. 무언가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것은 모순된다. 마치 빛과 어둠이 공존할수 없듯이 있음과 없음은 공존할수 없기 때문이다[제3구 비판].
다른사람은 그와 반대로 싹이 씨앗속에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라는 제4의 대안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중관논리에서 볼때 이는 제4구 판단인데, 있음도 부정하고 없음도 부정하는 제4구 판단은 '흑백논리로 작동하는 우리의 사유' 의 세계에 들어올수 없는 무의미한 판단이기에 비판된다[제4구 비판].
위에 인용한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歸敬偈]' 에서 '緣起' 를 수식하는 여덟가지 부정표현[八不] 가운데 첫번째 것인 '不生' 은 이상과 같이 논증되며, 나머지 일곱가지 부정표현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논증된다.
그런데 이들 여덟가지 부정표현은 '不生不滅 · 不常不斷 · 不一不異 · 不來不去' 라는 네쌍의 對句로 정리되며, 이중 '生· 常· 一· 去' 와 '滅· 斷·異· 來' 가 각각 동일한 조망으로 함께 묶인다.
'무엇이 발생한다[生]' 는 것은 '존재하던 것이 발생한다' 는 조망으로 풀수있기에 '원래 존재하던 것' 이 '나중에 발생할 것' 에 그대로 이어진다[常]는 조망이며, 존재하던 것과 발생된 것이 동일하다[一]는 조망이고, 존재하던 것이 그대로 발생된 것으로 진행한다[去]는 조망이다. 이와 반대로 '무엇이 소멸한다[滅]' 는 것은 처음에는 존재하던 것이 나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에 처음과 나중은 단절되어 있다[斷]는 조망이고, 처음에 존재하던 것과 나중에 존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異]는 조망이며, 나중의 것은 처음의 것과는 무관한 다른 곳에서 온 것[來]이라는 조망이다. 다시말해 네 쌍의 부정표현 각 쌍들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흑백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生· 常· 一· 去' 라는 앞의 네가지 조망이 白의 측면에 해당한다면 '滅· 斷·異· 來' 라는 뒤의 네가지 조망은 黑의 측면에 해당한다. 세상만사가 다종다양하기 때문에 그를 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네 쌍으로 분류했을 뿐이다. 우리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흑과 백, 즉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극단을 오가며 작동한다. 《아함경》과 같은 初期佛典에서는 이런 사유의 양극을 二邊이라고 불렀다.6)
우리의 사유는 흑백논리에 의해 작동하면서 인간과 세계,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등에 대해 갖가지 이론을 축조해 낸다. 죽으면 끝이라든지 그렇지 않다든지, 영혼과 육체가 같다든지 다르다든지, 우주에 끝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철학적· 종교적 질문을 부처님께 제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질문들을 '어려운 질문' 이라는 의미에서 難問이라고 부른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런 상반된 이론들 중 어느 한 편도 인정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가 연기의 가르침7)을 베푸셨다. 부처님의 이러한 대응은 '침묵의 답변' 이라는 의미에서 無記答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대답없이 방치한다' 는 의미에서 置答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무기답의 근본취지는 '의문 자체가 잘못 구성되었다' 는 점을 가르치는데 있다.
위에 예시한 철학적· 종교적 의문과 이론들은 모두 흑백논리에 의해 축조된 것들이다. 아니 다른 모든 철학적· 종교적 명제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 모두가 흑백논리를 통해 구성된다.8) 우리의 사유는 본질적으로 흑백논리에서 벗어날수 없다. 모든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은 지극히 궁금한 의문들이긴 하지만, 흑백논리에 의해 구성된 의문들이기에 모두 사상누각과 같다.
그런 의문들은 그에 대한 답을 냄으로써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문들을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허구성을 자각함으로써 '해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유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연기의 진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종교적· 철학적 질문에 대한 침묵이후 연기의 진리를 가르치셨고, 용수는 이런 맥락 위에서 '不生不滅 · 不常不斷 · 不一不異 · 不來不去' 인 연기는 온갖 망상을 잠재우며 상서로운 것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戱論으로 한역된 '온갖 망상' 이란 '生· 滅· 常· 斷' 와 '一· 異· 去· 來' 라는 흑백논리적 사고방식과 이런 사고방식이 초래한 갖가지 종교적· 철학적 판단들을 의미한다. 인간과 세계, 시간과 공간 모두를 지배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인 연기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될 경우, 그 전까지 우리를 괴롭혔던 갖가지 희론들, 즉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이 모두 우리의 분별의 가위로 오려낸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든 허구의 의문들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 결과 눈을 훤히 뜨고 살아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갖가지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이 해소된다.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하지 않을수 없다. 용수가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歸敬偈]' 에서 표현하듯이 상서롭고 상서로운 것이 연기의 진리이다.
부처님께서 발견하고 가르치신 연기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이렇게 모든 종교적· 철학적 의문에서 벗어날수 있다. 부처님의 은혜는 궁극의 진리, 이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인 이런 연기의 진리를 발견하고 가르치신 은혜다. 그래서 용수는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 의 마지막에서 "최고의 스승이신 그분께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 라고 노래하며 부처님께 믿음과 존경을 나타낸다.
'歸敬偈' 라고 불리는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 는 《中論》의 첫머리에도 실려 있지만, 마지막에도 실려 있다.《中論》의 제일 마지막장인 제27 <觀邪見品(: 잘못된 견해에 대한 분석)>에 실린 게송 역시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 이다.
잘못된 세계관[견해]을 瞿曇大聖主
모두 제거해 주시기 위해 憐愍說是法
자비의 마음으로 오묘한 진리를 가르치신 悉斷一切見
가우따마9)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我今稽首禮 - MK. 27-30
지극히 논리적인《中論》이지만, 처음과 마지막을 모두 이렇게 믿음의 노래로 장식하고 있다. 이 게송에서 말하는 '잘못된 세계관' 은 앞의 귀경게에 등장하는 '망상[戱論]' 에 해당하며, '오묘한 진리[妙法, saddharma]' 란 '상서로운 연기의 진리' 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가르치신 연기의 진리는 우리의 사유가 축조해 낸 갖가지 세계관· 종교관· 인생관들이 모두 허구임을 자각케하며, 갖가지 철학적· 종교적 의문들을 해소해 준다. 우리가 살이 쉼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낸 종교적· 철학적 분별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 주해 :
1) 또는 無生이나 非生. 'There is not a boy' 와 'He is not a boy' 와 'He is not happy' 라는 문장에서 '없다' 와 '아니다' 와 '않다' 가 모두 'is not' 으로 표기되는 데서 볼수 있듯이, 인도-유럽語族에서는 '無(없다)' 와 '非(아니다)' 와 '不(않다)' 을 구분하지 못한다. 같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산스끄리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不生' 으로 번역된 산스끄리뜨 語 'anutpa da' 에서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an' 은 無나 非나 不로 모두 번역될수 있다.
2) 구마라습의 漢譯文에서는 이를 不出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의미는 不去와 다르지 않다. 산스끄리뜨 어 'a-nir-gamam' 에 사용된 'nir(away)' 의 의미를 살려 번역할 경우 불출이 되지만, 'nir' 는 Sloka 詩형식의 음절수를 맞추기 위해서 삽압된 조음사로 볼수 있기에 굳이 그 의미를 살려 이해할 필요가 없다.
3) 여기서 MK. 는 중론송(Madhyamaka Karika)을 의미하며 이어지는 숫자는 품(品)장의 수와 게송이 실린 순서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총 25수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제2<관거래품> 가운데 세번째 게송은 'MK. 2-3' 으로 표기된다.《中論》의 산스끄리뜨 문과 구마라습의 한역문, 그리고 그에 대한 청목의 해설에 대한 번역은 '김성철 역,《中論》(경서원 간)' 을 참조하기 바람.
4) 禪那의 준말. 산스끄리뜨 語 dhyana, 또는 빠알리 語 jhana의 音譯語. 思惟修, 또는 靜慮라고 意譯하는데서 알수있듯이, '마음을 가라앉힘[止]' 과 '세상을 관찰함[觀]' 이 함께하는 수행이다. 일상속에서 '곰곰이[止] 생각하는[觀] 행위' 를 수행법으로 체계화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5) 이 책 1부 '4.《中論》 의 내용과 특징' 가운데 四句에 대한 설명 참조.
6) 서양 철학자 칸트(Kant)가《순수이성비판》에서 거론하는 이성(Reason)의 이율배반(antinomy)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갖는다.
7) 삼법인· 사성제· 십이연기 등의 교설.
8) 중관논리, 중관학 역시 우리의 흑백논리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흑백논리를 통해 다른 흑백논리의 축조물을 해체시킨다는 점에 중관학의 진리성이 있다. 이를 중국의 吉藏은 '破邪顯正' 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파사後 현정이 아니라 파사卽 현정을 의미한다. 즉 잘못된 세계관을 비판한 후 올바른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破邪] 그 자체가[卽] 궁극을 드러냄[顯正] 이라는 의미이다.
9) Gautama Siddhartha로 부처님의 兒名이다.
김성철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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