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록(達磨錄)

'달마 혈맥론血脈論 5'

수선님 2022. 7. 3. 12:19

달마 혈맥론血脈論 5

"부처는 계율 따위를 범할 것도, 지킬 것도 없다. 심성心性은 본래 비었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한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다. 부처는 계를 지닐 것도 없고, 닦을 선도 없고, 지을 악도 없고, 정진할 것도 없고, 게으름도 없다. 부처는 조작造作함이 없는 사람이므로 만약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부처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라 하면 이는 부처가 아니므로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모두 본 마음을 알 수 없다.

만약 성품을 보지 못했으면서 항상 조작함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큰 죄인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는 아무 분별이 없는 공空에 빠진 것으로 캄캄한 것이 마치 취한 사람 같아서 좋고 나쁨을 분간조차 못한다. 만약 조작됨이 없는 법을 닦으려 한다면 먼저 견성한 뒤에 모든 반연하는 생각을 쉬어야 한다. 견성하지 못하고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인과를 무시하고 분주히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망령되이 ‘본래 비었으므로 악한 짓을 해도 허물이 없다.’ 하며 헛소리를 한다면 이런 이는 무간지옥, 흑암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견해를 내지 않는다.”

어떤 이가 물었다.

“만일 분별하고 행위하는 온갖 시간이 모두 본심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육신이 죽을 때엔 어째서 그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본심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으나 그대가 보지 못할 뿐이다."

“마음이 있어 볼 수 있다면 어째서 보이지 않습니까?”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꿈을 꾼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꿈 꾼 것이 그대의 육신인가?”

“예. 저의 육신입니다.”

“그대가 말하고 분별하고 활동하는 것이 그대와 다른가, 다르지 않는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다르지 않다면 이 몸 그대로가 그대의 근본 법신이며, 이 법신이 곧 그대의 근본 마음이다. 이 마음이란 끝없는 옛적부터 지금과 전혀 다른 것이 없어서 생사라는 것이 없다. 따라서 생멸生滅도 없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더럽지도 않고 깨끗함도 없으며, 좋거나 나쁜 것도 없으며, 오거나 가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남자, 여자의 모습도 없으며, 승속僧俗이나 노소老少도 없으며, 성인도 범부도 없으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인과도 없으며, 함도 없고 모양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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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는 오직 '성품을 봄, 곧 견성見性'만을 외친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품이 곧 부처요, 부처는 곧 성품이라서, 자신의 성품性稟, 곧 본심本心, 또는 본성本性만 잡아채면 저절로 부처가 되기에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앞편에서 성품은 무엇이고, 어디서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 도리를 간략히 설명했지만 실제로 성품을 보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아니, 사실로는 너무 간단한데, 선가禪家에서 간단히 볼 수 없다는 선입견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갖고 있는 자기 성품이고, 본다, 안 본다고 말할 성격의 일도 아닌데, 이것을 알기 어렵다고 하는 자체가 우습다. 나중에는 성품을 보는 것도 결국 중도中道의 길이라서 간단한 것도, 간단치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날 것이다.

달마대사가 전한 선종禪宗은 여타 불교 수행방법과는 유달리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선禪은 그 수준에 따라 소승선, 중승선, 대승선과 최상승선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수행방법의 우열을 다투는 것은 아니다. 만약 참으로 깨달으면 불조와 중생이 모두 평등하고, 그 근본 바탕은 다 똑같으니, 진리는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 최상승의 도라고 하는 선禪은 근성이 크고 넓은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번 뛰어넘자마자 부처 자리로 들어가는一超直入如來地' 길, 또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제자가 스승의 한 마디 말을 듣고, 또는 한 동작을 보고 곧바로 부처가 된다는, 보통 사람이 들으면 얼토당토 않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생각되는 법을 말하기 때문에 사실 일반인은 이를 믿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以心傳心',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直指人心' 등의 아주 애매하고 알기 어려운 말도 하고, 한 스승에게서 최상의 근기를 갖춘 1-2명의 제자에게만 법이 전해져 내려오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보통 근기의 사람은 단번에 선법禪法을 꿰뚫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중국 송나라때 달마의 후손인 대혜 종고선사가 새로운 방편을 개발한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이 간화선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이전의 불조佛祖들이 직지인심으로 마음을 곧바로 찌르면서 설파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마디, 곧 화두話頭를 지속적으로 의심하여 그 알 수 없는 것을 꿰뚫어냄으로써 깨닫는 방법을 일컫는다.

간화선이든, 달마의 선법禪法이든, 사실 이 선禪은 굳건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깨닫기가 아주 어렵다. 말 한 마디에 즉시 중생에서 부처로 탈바꿈한다는 게 보통 사람에게 어찌 잘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깨달을 준비가 어느 정도 잘된 사람만이 시절인연 따라 이렇게 단번에 마음의 눈을 뜨지, 아무 노력도 없이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禪이 수천년의 세월에 걸쳐 전해지고 지금도 이것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요즘 세상에 남의 말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증명되는 사례를 여럿 접하다 보니 지금도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상의 근기를 갖춘 사람이 공부한다는 이 선禪은 그 장점이 아주 큰 반면에 단점도 매우 큰 것같다. 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화두를 깨치고, 이것을 다시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다 보니, 깨치기는 깨쳐도 자신이 어떻게 깨쳤는지 그 세부과정을 잘 알지 못하는 선지식도 있고, 그저 전통 방식대로만 공부하라고 강요하다시피 하니, 시대 발전에 따른 요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선禪은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짐을 모토로 한다. 달마의 직지인심이나 간화선이나 염불삼매나 모두 말과 생각이 끊어지고 본성적인, 분별 없는 지혜, 곧 무분별지의 자리인 본심을 일깨우는 노릇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오식五識에다 제6식인 의식, 제7식인 자의식, 제8식인 잠재 또는 무의식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보통 사람은 제6식인 의식까지만 이해하고, '나'에 애착하는 자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의 시조로 불리는 독일인 프로이드가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무의식의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면서, 그동안 겉껍데기表皮의 의식세계만 더듬어 왔던 전통적인 서양철학이 전부 붕괴되었는데, 동양에서는 이미 이 무의식의 세계를 정복했음을 몰랐다고 할 것이다. 프로이드는 환자들의 상태 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어렴풋이 알았을뿐 그 세계 너머의 소식을 알지는 못했다. 깨달음은 전혀 이해, 실험, 분석, 판단으로 체험해 볼 성격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무, 주객,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 있는, 무의식 이전의 소식, 곧 절대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의식세계에서 맴돌던 그동안의 습관을 당연히 탈피해야 할 것이다. 의식세계를 지나 에고ego 의식을 무너뜨리고, 무의식의 세계까지 꿰뚫어 절대성의 성품을 볼 수 있도록 수행자의 분별심이 끊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역할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송곳처럼 콕 찔러서 한 구멍이 펑!뚫리게 만든다. 마치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 행동이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콕 쏘는 것과 비슷하다. 말벌 같은 것에 쏘이면 그 아픔은 엄청나다. 이렇게 마음에 큰 충격을 받으면 향상向上의 한 구멍이 나게 마련이다. 격외구格外句, 경절문徑截門이라 부르는 화두를 침식을 잃을 정도로 열심히 의심하면 이처럼 스스로 마음을 두드리고, 찔러서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해야 분별망상심이 저절로 달아난다.

이 블로그에서 글쓴이의 경험을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해할 수 없고, 분별이 끊어진 말 한마디가 마음에 깊이 박히는 송곳, 깊숙이 찌르는 벌침의 역할을 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크게 한번 죽어서 다시 크게 살아난다'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대못으로 깊숙이 찌르면 찌를수록 더욱 크게 깨친다. 일반인이 하루종일 화두를 의심하기에는 시간상 어렵고, 무미건조한 말마디를 지속 의심해도 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화두는 결국 나중에 의심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가야 하는데, 자신의 믿음과 간절함, 용맹심, 분투심, 끈질김과 우직스런 성향, 곧 의지와 노력 정도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린다고 할 것이다.

화두를 의심하여 의정, 의단이라는 의심덩어리가 생겨서 저절로 굴러갈 정도가 되면 며칠내, 또는 몇주내 어떤 계기를 통해 앞편에서 말한 성품 보는 경우를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대학생 수준의 공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이 잘 걸리지 않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으니, 이 글이나 선어록 등을 읽으면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말씀과 마주칠 때마다 10-20번 깊이 의심해 보고 건너가면 이 과정이 며칠만 쌓이더라도 점점 나를 잃어버리는 지경을 맞게 된다. 결국 깨달음은 나도 잊고, 경계도 잊고, 몸과 마음조차 잊어버리는 경지에 도달할때 불쑥 체험하기 때문에 이처럼 공부해 나간다면 적어도 한달 내에는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고등학생 수준의 마음공부로서 바로 글쓴이의 체험담이다. 평범한 근기의 사람에게는 이 공부방법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깨달음의 가장 확실한 효과는 본래 삶과 죽음이 없다는 것과 모든 중생에게 다 부처가 하나씩 들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너도 나도, 심지어 짐승들도 하나의 부처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육도를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스스로 괴로움을 겪고 있으니, 선지식은 모든 중생이 안타깝고 가련하다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계속 가르치지만 어찌 보면 이 선 도리禪道理는 보통 사람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와 거의 비슷하다. 선을 모르다 보니 불교계를 욕하는 스님들도 많고, 불자들도 서로 비방하고, 도道와 전혀 관계없는 권력다툼으로 난장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불교계의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그래도 선지식이다. 방금 조금 넋두리를 늘어 놓았지만 글쓴이의 경험으로 봐서 성품을 보는 법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즉각 부처되는 법'에 대한 믿음을 갖고서 가리키는 대로 따라와 준다면 끊임없는 생사의 고락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성품에 대하여 앞편에서 간략히 설명했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본심本心, 성품은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는 불멸不滅의 몸이다. 본심, 성품은 형상이 없는 몸身이라서, 영원성의 진리의 몸, 곧 법신法身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의 육신은 결국 썩어서 사라지지만 이 절대적 정신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못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의학적으로 약 60-100개조의 세포로 구성된 사람 몸뚱이는 찰나 찰나 수천, 수만 개씩 죽었다가 다시 생겨남을 반복한다고 한다. 몸의 세포는 지금 이 순간도 죽어나가고 또 새로 태어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우리의 어릴 때 몸 다르고, 젊을 때, 늙을 때 몸 다른데, 어느 몸에 애착을 가져서 이것을 '나'라고 볼 것인가? 하물며 양자물리학에서 증명했다시피, 이 세포는 입자도 파장도 아닌, 허공성의 쿼크quark가 거의 무한하게 뭉쳐진 것인데, 여기에 어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인가? 허공성일 뿐인 몸뚱이가 없다고 여기면 남는 것은 또 하나의 허공뿐이다. 이 허공의 법신이 말을 하고, 생각하고, 온갖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성품이 부처, 곧 법신法身이라고 했지만, 황벽선사가 전심법요에서 말했다시피 허공이 바로 법신이고, 법신은 곧 허공이다. 우리 모두는 아침에 눈만 뜨면 허공을 본다. 아침부터 생활하는 낮 동안에도 하루종일 허공을 보며 산다. 곧 하루종일 자기 법신을 보면서 사는데도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치솔부터 밥알까지, 거리의 신호등부터 회사 사무실 책걸상, 컴퓨터까지 온갖 사물을 보면서 생활하지만 이 모든 것은 허공을 거쳐, 허공을 통과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허공을 통과해서 천지만물을 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허공을 통해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해보라.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허공이 바로 여러분의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최상승의 근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정신나간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글쓴이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은 곧바로 여래자리로 뛰어들 사람들이라고 믿고서 이런 말을 한다.

허공을 통과해서 사물을 본다는 생각으로 지속적으로 삼라만상을 대한다면 어느땐가 모습도, 빛깔도, 맛도, 냄새도 없는 허공을 보고 있음을 실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물을 보지 말고 눈앞의 허공을 거머잡으라는 소리이다. 이것을 허공관虛空觀이라고 부르면, 삼라만상을 보는 대신 눈앞의 허공을 잘 살피다 보면 어느날 문득 그대의 성품이 드러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성품을 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성품은 바로 허공이고, 허공은 바로 법신불이고, 법신불은 바로 우리 육신이고, 육신은 바로 우리 성품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이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이기 때문에 허공을 포함하여 삼라만상이 모두 한덩어리가 될 때 그때가 바로 구경각을 이루는 시점이다. 이것은 지금의 한 생각을 벗어나 있지 않다. 허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성품을 봄見性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것은 대학원생 수준의 마음공부라고 할 것이다.

이 앞편에서 우리는 사람이 마음을 쓰는 곳에는 어디든지 성품이 있어 그 작용을 함을 알았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을 느끼고, 인지하고, 분별하고, 알고, 깨닫고, 손으로 잡고, 쥐고, 흔들고, 휘두르고, 내뻗고, 발로 차고, 걷고, 뛰고, 도구를 사용하여 땅을 파고, 일구고, 심고, 가꾸고,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씹고, 침을 내뱉고, 눈을 깜박이고 눈썹을 올렸다가 내리고, 귀를 쫑긋 세우고, 두뇌로 생각하고, 몽둥이로 때리고, 고함을 지르고, 쪽박으로 샘물을 떠먹는 곳에서 성품을 보아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공부방법도 또한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 수준이라고 해두자.

지금까지 글쓴이의 판단으로서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수준의 공부방법을 제시해 봤는데, 자신의 성향과 의지, 근성에 맞는 한 가지, 혹은 두, 세 가지 방편 모두를 활용하여 공부를 해 나가면 이 일이 간단한지,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 알게 되리라 믿는다. 나머지 유치원생 ~ 중학생 수준의 마음공부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을 기약하자.

혈맥론 본문으로 돌아와서, 철저히 깨달은 부처는 하는 게 없고, 할 일도 없고, 중생 깨닫게 하는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지계, 인욕, 선정, 지혜 등 육바라밀 따위도 자기 살림살이로 보지 않는다. 만약 부처니, 중생이니, 어떠한 작은 모양相이라도 있다고 하면 모두 상대성이요, 그림자와 같은 헛것으로 봐서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고, 닦을 것도 닦지 않을 것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고, 선도 악도 없고, 게으름도 부지런함도 없다. '필경 공畢竟空'이라서, 모든 것이 허공성임을 보아 집착하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부처도 중생도 없고, 생사도 열반도 없고, 사람도 축생도 없고, 남자, 여자도 없고, 세속, 출세간도 없고, 늙고 병듦도 없고, 천당 지옥도 없다. 이것은 허공의 절대성 자리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부처가 절대성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무정물인 나무나 돌이랑 다름이 없다. 모든 것이 평등한 이 절대 자리에서 온갖 차별, 분별상, 곧 상대성을 드러낼 줄 모르면 그런 부처는 있으나마나이다. 깨닫기 전에는 분별심을 끊으라고 했지만, 깨닫고 나서는 반야의 지혜로 온갖 이치를 잘 분별하고, 판단하여 잘 처리해 나가야 한다. 부처는 이 와중에도 항상 절대성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유마경에서 말하길, '세상 온갖 것을 잘 분별하면서도 가장 으뜸되는 뜻第一意에 있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제일의第一意란 곧 절대성 자리, 본래 부처인 여러분의 성품, 본심을 가리킨다.

그래서 본래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지만, 또한 부처는 부처이고, 중생은 중생이다. 산도 물도 없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본래 깨달음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지만, 깨달음을 증득함도 있고 어리석음을 내버림도 있다. 불잡을 것도 버릴 것도 없지만,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붙잡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중도는 가운데를 뜻하는 게 아니라,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치 호리병이 물 위에서 내키는대로 이리저리 누었다 일어섰다 하는 것과 같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본래 부처, 곧 성품, 본심을 발견하지 못하면 육신이 죽을 때는 백번, 천번이고 통곡해야 마땅하다. 자기 부처가 그 끝없는 세월 동안 '너를 구원하리라' 하며 손꼽으며 감옥에서 탈출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을 까마득히 모른 채 육도를 유령처럼 돌고 돌아야 한다면 훗날 스스로를 어떻게 쳐다볼 것인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출처] '달마 혈맥론血脈論 5'|작성자 Sug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