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요점 강설(金剛經 要點講說)
제24장 헤아릴 수 없는 복과 지혜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요점 강설
♣ 헤아릴 수 없는 복과 지혜
하늘을 덮는 복을 갖추었고
사해를 담는 덕이 있다 해도
다함 있는 복으로 영원할 수 없나니
반딧불과 태양에 비교되리라.
그대 만일 한 생각 무념에 들면
하늘과 땅은 그것을 덮지 못하고
겁화가 일어나 온 천하를 태운다 해도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되나니.
일념도 일어나지 않는 그 자리에
헤아릴 수 없는 복과 지혜 있다네.
⊙ 본 장의 대의
헤아릴 수 없는 복과 지혜 이것은 무엇인가요? 무상 무아로 살아가는 청정한 마음에서 얻는 복과 지혜는 그 무엇과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유위복(有爲福)과 무위복(無爲福)의 차이는 반딧불과 태양에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무소득의 종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청정행을 지으면 이 세상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짓는다는 것을 본 장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을 실천 수행하고 전법하는 공덕은 무량무변한 공덕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법을 배우고 남을 위해 설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불전법도중생이면 필경무능보은자(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라." "만약 부처님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마침내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에게 법을 전한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 전하면 오히려 다른 이를 혼란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잘 배워야 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 장은 문맥상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합니다. 즉 금강회상(金剛會上)의 법문도 점점 마칠 때가 되어가므로 부처님께서 조금씩 마무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흔히 유통분에서는 경을 부촉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 경을 널리 펴서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불자라면 금강경뿐 만 아니라 부처님의 모든 법을 잘 전하고 실천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법에 있어서도 본인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양을 바라보고 전법을 한다면 그것은 《금강경》의 정신이 아니므로 불교를 바르게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교화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부처님 가르침대로 잘 실행하지 않으면 역교화가 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포교가 순수성을 갖지 못하므로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포교는 반드시 바른 견해와 순수성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진정한 교화는 신심과 원력과 지혜와 실천력과 정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마장을 받게 되고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 본문
"삼천대천세계를 덮는 복으로 보시한다고 해도 《금강경》 한 구절을 믿고
타인을 위해 연설해 준 공덕이 유위복(有爲福)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느니라."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수보리 약삼천대천세계중 소유제수미산왕 여시등칠보취 유인지용보시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약인 이차반야바라밀경 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타인설
於前福德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어전복덕 백분불급일 백천만억분 내지 산수비유 소불능급
⊙ 강설
혹 어떤 사람은 《금강경》에서 이와 같은 독경 공덕을 설한 것은 《금강경》을 유통 보급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금강경》에서 과찬은 없으며 이 뜻을 잘 살펴보면 우리 자성광명의 공덕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대 큰스님들이 여기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부대사(傅大士)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량없는 보배를 보시했다 해도
상이 있는 보시는 허망하나니
무아를 관하여 실상에 들어감만 하랴.
무생의 이치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탐진치를 떠나야 하나니
주관과 객관에 나 없음을 알면
모든 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리라.
施寶如沙數 唯成有漏因 不如無我觀 了妄乃名眞
시보여사수 유성유루인 불여무아관 요망내명진
欲證無生忍 要假離貪瞋 人法知無我 逍遙出六塵
욕증무생인 요가리탐진 이법지무아 소요출육진
여기 종경대사(宗鏡大師)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수미산만한 보배가 비록 많다고 하나
하늘을 향해 화살 쏘는 것과 같도다.
이치와 현실을 초월하여 자유롭다면
무량한 세월 동안 한 보시보다 수승하리라.
寶聚山王筭莫窮 還如仰箭射虛空 洞明四句超三際 絶勝僧祇萬倍功
보취산왕산막궁 환여앙전사허공 동명사구초삼제 절승승기만배공
이처럼 많은 도인스님들도 물질보다는 정신에서 진정한 가치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생사해탈하는 부처님 법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위대하므로 여기에 최상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을 최상의 가치로 두었다면 더 이상 세속 일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 공부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금강경》에서 최상의 보물을 캐내야 《금강경》을 배운 보람이 있습니다.
⊙ 우리는 어떻게 현실에서 《금강경》 정신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결코 《금강경》을 구경하려고 온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역이 되기 위해 《금강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좋은 가르침도 그림의 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우리가 만일 이 가르침을 듣고 환희심과 믿음을 낸다면 그 공덕은 어떤 세속적인 위대한 공덕과도 비교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설사 하늘을 덮는 복을 갖추고 사해(四海)를 담는 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다함 있는 복입니다. 마치 반딧불이 태양과 비교되듯 《금강경》을 수지하는 복과 지혜는 어디에도 비교가 될 수 없다고 본 장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금강경》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대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로서 우리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처럼 느껴져 처음부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불자들도 실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청중들, "예…")
그러나 이제 《금강경》의 정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말한다면 누구나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곧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이 법 외에 어떤 법도 실제성이 없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금강경》의 정신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지무비(福智無比)라, 이 《금강경》의 정신을 수지하는 복은 삼천대천세계를 덮고도 남는다고 금강회상에서 부처님이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면 우리는 이 법을 멀리하면 할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고 거짓 나에 속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는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실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바른 길을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실적인 모든 생활을 《금강경》의 진리에 입각하여 살아간다면 일상의 모든 삶은 저절로 절대성 존재와 절대성 가치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순간순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속에서 살아가는 절대적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본래 청정(本來淸淨)이요 본래 구족(本來具足)이요 완전무결한 전인적인 삶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 청복(淸福)은 세상에 있는 허망한 유위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태양과 반딧불에 비교될 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태양과 같은 그런 위대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살아가야합니다. 반딧불과 같은 하찮은 존재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실현해야 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반딧불과 같이 살아가라고 강요한 적이 있습니까?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을 뿐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님들은 이제 《금강경》 정신에 입각하여 절대성 존재로 살아가는 거룩한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핵심이고 부처님의 뜻입니다.
자, 오늘 《금강경》 요점 강설은 이것으로 마치고 질문 있는 분은 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법사의 질문
"오늘 이해한 것에 대해서 질문 드린다면, 자연 현상 그대로가 진리이니 물 흐르듯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이런 말씀인가요?"
스님의 답변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자연스럽다'는 것을 먼저 잘 알아야 됩니다. 바로 《금강경》의 정신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의 바탕에서 현실을 살아가면 그것이 중도실상이요, 자연스런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도실상이란 가장 순수한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생들의 업력의 장애를 받기 때문에 이것을 완벽한 이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불자들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치가 그렇구나' 하고 이해한 다음 그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면 그것은 완전하지 못하므로 도리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수행하다 보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가 되고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적 이해가 먼저 되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만이 현실이 바로 절대성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현실을 대하는 마음 자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에 살더라도 정신적으로 높은 차원에서 절대성 가치를 가진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근기가 하열한 사람은 아는 것이 도리어 망상이 되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아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법사님은 현실적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실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즉 바른 안목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줄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우는 것도 바른 안목의 바탕에서 현실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즉 《금강경》의 정신을 현실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금강경》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아ㆍ인사상을 떠나면 자연스런 삶이 이뤄집니다. 즉 세속적 흐름 속에서 거기에 아ㆍ인사상을 두지 않으면 일체행에 무념을 이루게 되고, 세속 이치가 그대로 절대성 진리가 됩니다. 이 바탕에서 세속적 흐름을 고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무위적 흐름이 되어 절대성 가치 속에 영원한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출처 : 큰 마음 카페 원인 스님 강설 <금강경 요점 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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