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 싯다르타 태자는 왜 출가했을까

수선님 2022. 7. 31. 11:47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 싯다르타 태자는 왜 출가했을까

"無常을 극복하고, 善함을 찾기 위해"



 

부귀영화 버리고
수행자 된 것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수타니파타>


스물 아홉의 왕성한 젊음에
집 나와 출가하니 수밧다여!
이유는 오로지
善함을 위함이었네. <마하파리닛바나 숫탄타>

 

<간와리야 유적.>사진설명: 인도측이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곳.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 때문에 출가했을까. 어째서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처자의 경계를 뚫으면서까지 출가자가 됐을까. '한국불교 원류를 찾기 위해' 간 룸비니·카필라바스투·사르나트·보드가야·코삼비 등지에서, "인도불교는 왜 쇠망했나"와 함께 줄곧 떠오르는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싯다르타 태자 탄생'보다 불교에 더 중요한 것은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나'가 아닐까. 출가와 철저한 고행, 마침내 성취한 깨달음으로 불교라는 종교가 태어났음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하다.


특히 지금도 그 깨달음에 의해 불교가 유지·전승되고 있기에 '출가 사유'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출가동기는 무엇일까


<니다나 가타> 등 불전에 보이듯 잠자는 미희들의 추태를 보고, 동·서·남·북 네 성문에서 만난 늙음·병듦·죽음(사문유관)에 충격 받고 출가했을까. 숨쉬는 공기가 많아 고마움을 못 느끼듯, 생·노·병·사의 괴로움은 너무 일상적이고 흔한 것이어서 도리어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아니면 어린 시절 농경제 행사 도중 본 '새에게 잡아먹히는 벌레의 죽음' 때문일까. 한 여인의 남편이자 한 아들의 아버지인 그가, 아니 한 왕국의 태자인 그가 고작 '벌레의 죽음' '미녀들의 추한 모습'을 보고 세속에 환멸을 느껴 출세간으로 향했을까.


만약 사문유관(四門遊觀)이 출가 동기라면 싯다르타 태자는 대단히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 있다. 20대 후반에 이르도록 늙음·병듦·죽음도 '모르고 자란' 청년이 어떻게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런 남자가 어떻게 일들을 정확히 판단하고 백성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방향을 잡아 줄 수 있겠는가. 국가는 고사하고, 가정이나마 제대로 건사할 수 있었겠는가.


싯다르타 태자가 유년기·청년기를 보낸 카필라바스투가 설사 대단히 넓었다해도 성년이 된 그가 생·노·병·사를 모르기는 힘들다. 카필라바스투 성안에도 늙음·병듦·죽음은 있기 때문이다. 네팔 측이 카필라바스투라고 주장하는 틸라우라코트, 인도 측이 그곳이라고 주장하는 피프라흐와·간와리야에 가보니, '세상 밖'을 알 수 없을 만큼 넓어 보이지는 않았다.


인생의 중대 고비인 노·병·사를 "전혀 모르다 이를 만나 출가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드라마틱할 수 있지만, 출가 동기로 선택하기엔 어딘지 미약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태어난 직후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싯다르타가 아니었던가. 죽음을 아무리 숨긴다 한들 20대 후반이 될 동안까지 태자에게 완벽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감추기는 힘들 것이다.


때문에 늙음·병듦·죽음을 네 성문에서 만나 충격 받고 출가했다기보다, 삶이나 인생의 근본속성 가운데 하나인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무상'(無常)을 농경제·미희들의 모습 속에서 '감지·관찰'하고, '무상함에 굽히지 않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출가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어머니 죽음에 無常 자각"


'어머니 죽음'과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한 순간 더러운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남달리 예민한 태자의 관찰력과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것이 씨앗이 돼 종교적 심성이 점차 형성된 것은 아닐까. '어머니 마야데비의 죽음'은 틀림없이 태자에게 깊은 '생각의 씨앗'이 됐을 것이며, 출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죽어야 하고 죽음을 초월할 수 없는 내가, 다른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당황하고 놀라워하며 싫어한다면, 그것은 나답지 못하다. 내가 이와 같이 관찰했을 때 삶에 대한 교만한 마음은 일순간 완연히 사라져갔다"(<앙굿타라 니카야>)고 부처님도 고백한 적이 있지 않은가.

 

<피르라흐와 유적.>사진설명: "석가족 출신인 부처님의 유골"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된 스투파. 이를 근거로 인도측은 이 일대(간와리야 포함)가 카필라바스투 궁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인생의 영원한 문제인 늙음·병듦·죽음을 '처음 보고' 출가하지는 않았다 해도, 결국 노·병·사 같은 인생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출가의 근본적·기본적 동기가 됐음은 틀림없다.

 


<불본행집경>에 있는 "다만 내가(태자) 크게 두려워하고 겁내고 놀라는 것은, 모든 생사 가운데 나고 죽는 괴로움을 받음이며, 오늘 해탈하는 법을 구하고자 하기에 친족을 버리고 떠나려 한다"고 싯다르타가 마부 찬다카에게 한 말에서 '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소국 운명 인식…더욱 고뇌


그러나 이것만이 출가 이유의 전부였을까. 싯다르타 태자에게 존재  무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느끼고 자각하도록 강요한 것은 없었을까. 늙음·죽음·병듦이라는 인생의 궁극적 문제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파악했을 수도 있지만, 약소국 카필라바스투가 처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싯다르타가 세상사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게 아닐까.


당시 히말라야 기슭에 있는 '공화국'들은 인도 갠지즈강 계곡의 '군주국'들에 정복당하고 있었고, 지배층들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싯다르타 태자가 누리던 호화로운 생활도 사실은 매우 불안한 정치적 토대 위에 서있었다. 독일 불교학자 폴커 초츠의 지적처럼 "공화국들은 군주국들의 팽창 노력에 차례로 희생됐고, 이는 존재의 불안으로, 더 이상 얻을 것 없이 모든 것을 상실할 수 있다는 감정으로 침전됐을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 즈음 인도는 16대국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카필라바스투가 속했던 코살라국은 오늘날 바라나시를 수도로 하는 카시국을 합병했고, 마가다국은 앙가국을 점령했으며, 아반티국 또한 아사카국을 정복한 상태였다. 코살라·마가다 같은 강대국들이 점차 주변국을 병합하고, 국가 사이의 정복은 기원 전 4세기 인도 최초의 대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으로 귀결된다.


'부족국가'의 해체가 '왕권국가' 재편성으로 이어지고, 봉건제가 확립되던 격동의 시기에 싯다르타 태자는 태어나 성장했다. 어쩔 수 없이 약소국의 정치적 운명에 눈떴을 것이다. 실제 부처님 재세 중 카필라바스투는 결국 코살라국의 비두다바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카필라바스투 멸망은 싯다르타 출가 이후의 일이지만, 출가 전 석가족·카필라바스투 분위기는 상당히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음이 틀림없다. 총명하고 민감한 싯다르타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싯다르타 이후 많은 석가족들이 출가를 택한 것만 봐도, 정치적 상황이 석가족에게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태자로서 자신이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이 사실은 '불안한 기반' 위에 있는 '무상'한 것임을 싯다르타는 깨달았고, 더욱 출가를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석가족의 정치적 비운이 출가의 뚜렷한 동기는 아니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은 미쳤다고 생각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당시 사상계 변화도 태자 자극


물론 당시 사상계 변화 또한 싯다르타 출가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왕권국가(군주제)가 신장되자 국가 장벽을 넘는 통상·경제행위가 발전했고, 화폐경제가 일반화됐으며, 도시에는 상공업자들이 활보했다.


그들은 바라문이 주장하는, 오늘날도 인도 구석구석을 여전히 옭아매고 있는 카스트 즉 사성계급제도(바라문·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에 구속되지 않았다. 경제적 신장과 함께 사상계도 변화·발전했다. 제식(祭式)만능주의에 빠진 바라문 교학을 비판·부정하는 새로운 사상가들, 육사외도(六師外道)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쉬라마나(沙門)'로 불리는 이들은 대개 집을 버리고, 숲 속에서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며, 도(道)를 구하는 출가수행자들이었다. 바라문의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바라문의 규율을 무시했다. 세속 생활을 버리고 출가한 싯다르타도 사문의 한 사람이었다. 사문은 사실 '사문유관'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카필라성 북문에서 사문을 만난 싯다르타 태자의 얼굴은 갑자기 환해졌다. "좋도다! 이 도는 바르고 참되어 길이 번뇌를 여의고 미묘하고 또 맑고 허(虛)하였으니 오직 이것이 참으로 쾌한 것이로다"고 외치며 수레를 돌려 사문에게 다가갔다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사문을 통해 싯다르타는 새 세계를 접했고, '무상'을 벗어날 길을 찾았을 것이다. 뜻 깊은 청년들이 집을 나가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추구했던 것은 인도의 전통, 싯다르타 역시 고뇌하는 젊은이였다. <마하 파리닛바나>에 나오는 "나 스물 아홉의 왕성한 젊음에/ 집을 나와 출가하니/ 오로지 선(善)함을 위함이었네/ …(중략)… 추구하여 노니는 진리의 영역/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출가의 길/ 이것 떠나면 사문 아니리"는 바로 출가 당시 싯다르타의 심정을 읊은 것 아닐까.

 


** 육사외도 **


부처님 당시 풍미했던 자유사상가들을 대표하는 6명을 말하는데, 팔리어로 기록된 <범망경> <사문과경> 등에 설명이 나온다. 이들은 대개 바라문의 권위, 제사(祭式)와 수반되는 공양(供養)·공희(供犧) 등을 거부했다. 업인업과(業因業果)를 부정하는 '물질 중심의 인간관'과 '감각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육사(六師)'란 팔리어 전승에서 보통 푸라나 캇사파, 막칼리 고살라, 아지타 케사캄발린, 파쿠다 캇차야나, 니간타 나타풋타, 산자야 벨랏티풋타 등 여섯 사람을 가리킨다. '외도(外道)'는 이단(異端)·사설(邪說)을 말하는 사람 및 집단을 지칭하는 말인데, 불교도가 붙인 이름으로 불교 입장에서 부처님 교설을 긍정하고 다른 설을 부정하는 경전상의 표현이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 싯다르타 태자는 왜 출가했을까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 싯다르타 태자는 왜 출가했을까 "無常을 극복하고, 善함을 찾기 위해" 부귀영화 버리고수행자 된 것은욕망을 충족시키고자함이 결코 아니다. 수타니파타 스물

caf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