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
위없는 깨달음, 보드가야의 새벽별
악마를 항복 받은 뒤
보살은 더욱 굳건해져
第一義 구하기 위해
깊고 묘한 선정에 들어갔네. <붓다차리타>
윤회의 집 짓는 목수여!
집의 골조·대들보는 사라졌다.
마음은 생성을 떠났고,
나는 갈애의 멸진에 도달했다. <니다나 가타>
인도 대지(大地)는 2월말 3월초부터 서서히 달아오른다. 4월이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진다. 사람들도 덩달아 열기(熱氣)에 휩싸인다. 잠시만 걸어도 온 몸이 땀에 젖는다. 연신 물도 찾게 된다.
라즈기르에서 보드가야로 출발한 2002년 3월30일의 날씨가 그랬다. 오전에 나란다 대학, 오후에 영취산에 잠깐 올랐다 출발한 길이었다. 더위에 체념하고 가는데, 도로가 괴롭혔다. "불교유적이 많은 비하르 주(州) 도로가 특히 엉망"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인도에서 가장 못사는 주의 하나란다. 포장 안한 도로가 오히려 그리울 정도. 도로 군데군데 움푹 패인 곳을 피하느라 차는 흔들리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온 몸이 들썩거렸다. 심지어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다.
그렇게 달리길 몇 시간. 사진에서 많이 보던 가야쉬르사, 상두산(象豆山)이 저 멀리 나타났다. 가운데 볼록 솟은 봉우리는 코끼리 머리 같고, 좌우의 작은 봉우리는 코끼리 큰 귀를 닮은 산. 그래서 '코끼리 머리 산'으로 명명됐나 보다. "보드가야에 정말 다 왔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들판만 있던 풍광이 어느 새 산이 듬성듬성 낀 곳으로 변해있었다.
도로 변엔 나무들도 많았고, 나이란자나 강과 모하나 강변에는 키 큰 나무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대보리사(大菩提寺) 대탑의 우뚝 솟은 끝머리도 성큼 다가왔다. 인도 비하르주 가야시(市) 남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보드가야 대보리사. 사문 싯다르타가 새벽별을 보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된 땅에 세워진 사찰. 그리고 그리던 대보리사에 마침내 도착했다. 문득 상념(想念)이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6년 간의 수도 끝에 '고행의 무익함'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수자타가 주는 우유죽 공양에 원기를 회복했다. 우유죽 공양을 받는 것을 옆에서 본, 수도(修道)를 돕던 다섯 비구들(카운디냐·아스바지트·바스파·마하나마·바드라지트)은 가차없이 싯다르타를 비판했다.
"이 사람은 6년 고행을 해도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으며, 공양을 받아먹는 등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다. 이 같은 자가 어찌 일체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사치스럽게도 노력하기를 저버리고 말았다. 마치 머리 감으려는 자가 이슬방울을 기다리듯 우리가 이 사람에게서 남다른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대체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니다나 가타)" 그리곤 의발(衣鉢)을 들고 18요자나(1요자나 10∼15km)를 걸어 이쉬파타나(녹야원)로 가버렸다.
공양을 먹고 힘을 얻은 사문 싯다르타는 나이란자나(尼連禪河) 강에 목욕하고, 수도를 계속하기 위해 전정각산에 올랐다. 순간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산꼭대기가 기울었다. 전정각산 산신과 천신이 두려움에 떨며 "고행림 근방 우루벨라 마을의 핍팔라수(정각 후 보리수로 개칭) 아래로 가주실 것"을 간청했다. 반면 전정각산 용은 싯다르타에게 자신이 사는 동굴에 가 성도(成道)해 주기를 부탁했다. 기특하게 여긴 싯다르타는 그림자를 동굴에 남기고 떠났다. 동굴은 자연스레 '그림자를 남긴 굴' 유영굴(留影窟)이 됐다.
하산한 싯다르타는 나이란자나 강변 우루벨라 마을 핍팔라수 밑에 자리잡았다. 그 때 '솟티야'라는 풀 베는 남자가 부드럽고 연한 풀을 베, 싯다르타에게 주었다. 핍팔라수 줄기를 등에 두고 동쪽을 향해 앉았다. "설령 살갗과 근육과 뼈가 닳아지고 몸의 피와 살이 말라 없어진다 해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이 결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수많은 우뢰가 한꺼번에 내리쳐도 흐트러지지 않을 결가부좌였다.
순간 위기를 느낀 마왕이 마군(魔軍)들에게 소리쳤다. "싯다르타가 나의 영역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는데, 그에게 뒤지고도 어찌 가만 있는가." 마왕·마군들의 방해가 지리할 정도로 계속됐지만,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전에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물리쳤다. 초저녁에 과거세의 일을 환히 알게 됐고, 한 밤중에 천안(天眼)을 맑히더니, 새벽 무렵 연기(緣起)의 지혜를 얻었다.
그리곤 감흥을 시로 읊었다. "윤회의 집 지을 목수 찾아다니며, 나는 덧없이 무수한 생의 윤회 거쳤네. 생을 반복하는 일은 모두가 괴로움. 윤회의 집 짓는 목수여! 그대 이제 깨우쳤으리. 더 이상 집 지어선 안 된다. 그대 집의 골조는 모두 부러졌고, 대들보 또한 전부 사라졌다. 마음은 생성을 떠났고, 나는 갈애(渴愛)의 멸진(滅盡)에 도달했다.(니다나 가타)" 깨달음의 자리에서 싯다르타는 마침내 '일체지'를 증득(證得). 부처님이 됐다. 그것을 기념해 기원전 254년 바로 그 자리에 대보리사가 세워졌다.
차가 대보리사 근처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주저 없이 곧바로 들어갔다. 마침 일몰 중인 해가 대보리사 큰 탑 맨 위에 걸려있었다. 장관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탑을 보고 크게 삼배했다. 대탑은 탑이라기보다, 부처님과 금강보좌(부처님이 앉아 깨달은 곳)를 수용한 사당에 가까웠다. 누각을 겹친 형태로 높이 50m, 한 면의 길이 27m 정도. 밑바닥 넓이는 200평이지만, 법당은 15평도 안된다. 높이를 지탱하도록 벽을 두껍게 만든 것이다.
합장한 채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탑을 세 바퀴 돌고, 부처님이 봉안된 법당으로 내려갔다. 크고 작은 무수한 봉헌(奉獻)탑들이 대탑 주변을 에워싸고, 법당 바로 앞엔 '불족적(佛足跡)'이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그대로였다. 법당은 두 개였다. 바깥과 안쪽, 바깥 법당은 5∼6평, 안쪽 법당은 7평정도. 안쪽 법당 서벽(西壁)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왼손은 배꼽 부근에 두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자세)을 한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마구니들을 항복시키고 정각을 이룬 바로 그 부처님이 거기 계셨다.
9∼10세기 팔라왕조 시대의 불상으로, 불멸 2500(서기 1956)년을 기념해 열린 대제(大祭) 때 미얀마의 한 신도가 도금했다고 한다. 물론 이 부처님은 637년 보드가야를 방문한 당나라 현장스님이 본 부처님(높이 3.5m)은 아니다. 그 부처님은 현재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길래 보니 문이 잠겨 있다. 스리랑카 스님이 관리하는데, 사정을 설명하니 열어준다. 계단 중간에도 관을 쓴 부처님이 있고, 2층 법당 안에도 관을 쓴 도금한 부처님이 계셨다. 보관은 본래 보살들만 썼는데, 보관 쓴 부처님의 등장은 "불교가 힌두화 되는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대보리사 창건 당시 봉안된 부처님은 아닌 것 같았다.
참배를 마치고 부처님이 성도한 자리인 금강보좌(金剛寶座)를 찾았다. 대 탑의 서쪽 2m 지점에 위치한 큰 보리수 아래 있는데, 입구엔 역시 큰 불족적이 안치돼 있다. 보리수와 대탑 사이에 직사각형의 반석이 보였다. 금강보좌임을 직감하고, 정중하게 인사드렸다.
길상초를 깔고 정각을 이루신 곳이자, 부처님 성도의 상징물. 부처님이 그 자리에 지금도 여전히 앉아 계신 것 같았다. 3월5일 인도에 도착한 이래 자나깨나 참배하고 싶었던 장소. 한국불교의 탄생지, 아니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 퍼진 불교라는 종교가 태어난 곳. 보고 또 보았다.
가슴에 커다란 감동을 안은 채 금강보좌에 그림자를 드리운 보리수를 만졌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살. 주위에 판자 모양의 돌로 울타리가 쳐져 있는데, 길게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 따라 참배 객들이 점점(點點)이 앉아 있다. 합장하고 인사하니 그들 또한 합장으로 답례할 뿐. 일체 말은 없다. 성스런 곳이 혹 '말(話)' 때문에 오염될까봐 그런지 눈웃음과 합장으로만 대답한다.
떨어진 보리수 한 잎 주워 대 탑 북쪽으로 돌아가니 경행처(經行處)가 반겨준다. 부처님이 성도 한 후 장소를 북편으로 옮겨 산책한 곳. 걸을 때마다 발바닥 밑에서 연꽃이 피어올라 부처님 발을 받쳐주었다. 북벽 바로 곁에 있는, 높이 1m·길이 17m 단에 조각된 19송이 연꽃은 이를 상징화한 것. 옛날에 조성된 연꽃 조각도 단 옆에 진열해 놓았다. 정성스레 보는데, 2층 법당 문 열어준 스리랑카 스님이 어느새 따라와 설명해 준다.
주변 길을 통해 대탑을 한 바퀴 돌고 처음 참배한 법당 앞에 다시 섰다. 합장하고 계단을 올라와 대탑 남쪽 50m지점에 있는 무찰린다 연못으로 갔다. 연못 앞에 '아쇼카 석주'와 비슷한 석주가 있길래, 기쁜 마음에 가까이 가보니 '아쇼카 석주'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연못엔 연꽃이 가득 심어져 있고, 한 가운데 코브라처럼 생긴 무찰린다 용왕이 선정에 든 부처님을 보호하는 조각이 있다. 성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님은 연못 부근에서 입정(入定)에 들었는데 무찰린다 용왕이 또아리 틀어, 달려드는 모기·파리·비·바람 등으로부터 부처님을 보호했다고 한다.
법당·금강보좌·보리수나무·경행처·무찰린다 연못·봉헌탑 등을 다시 돌아보며, "나가달라"는 대보리사운영위원회 관계자의 말을 뒤로한 채 사찰을 나왔다. '바깥'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대보리사를 참배하는 사이 어둠이 내린 것이다. '정각의 땅' 보드가야에서 맞이한 '어둠'. 무척이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미망(迷妄)의 어둠'을 뚫은 부처님에게 정각이 찾아왔듯, 어둠이 끝날 내일 새벽쯤이면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와 있을까.
** 대보리사에서
입장료 없고 카메라費 10루피
신발 벗어야만 들어갈 수있어
대보리사 들어가는 데 입장료는 없다. 받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 촬영할 사람은 요금을 내야한다. 인도 돈으로 10루피. 많지 않은 액수다. 입장료 관리는 대보리사운영위원회(Buddhagaya Temple Management Committee)가 맡아하는데,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 성스러운 곳에 신발 신고 들어가는 것은 불경(不敬)이기 때문. 신발 보관하는 곳도 있지만, 나올 때 얼마간의 팁을 요구받는다.
들어가 있으면 자연스레 경건한 마음이 생긴다. 엄숙한 분위기, 구석구석에서 온 몸을 던져 절하는 불자·스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신심도 배양된다. 대보리사는 저녁 9시면 문을 닫는다. 그동안 "종교적 성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 안 된다"는 대보리사 주변 스님들 의견에 따라 세계유산 등록이 안됐으나, 인도 정부는 최근 입장을 바꿨다 한다.
대보리사 입구에는 많은 상인들이 북적거린다. 불족적, 작은 불상, 보리수 염주 등을 판다. 염주 하나에 50루피(1달러=47루피), 부처님이 그려진 보리수 잎 하나에 10루피, 불족적 탁본도 하나에 30루피면 충분하다. "참배하러온 사람들이 시간에 쫓겨 한 다발을 100달러나 주고 사는 경우가 흔하다"고 안내인이 일러준다. 인도의 괜찮은 호텔에서 한끼 식사(4인 기준)가 500∼600루피. 100달러면 4,700루피, 인도에선 엄청나게 큰돈이다. 살펴보고 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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