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
끝없는 구도·고행
지혜로운 이는
왕사성으로 갔다.
기품도 늠름한 그분은
고행을 위해 그곳에 갔다. <수타니파타>
보살은 그때
한 톨의 참깨·쌀알로만
지내거나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 <나다나 가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득한 싯다르타는 '무상(無常)함에 굽히지 않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결국 성벽을 뛰어넘었다. 출가 후 카필라바스투 남쪽 아노마 강가의 아누피아 망고 숲에서 기쁨에 젖어 7일을 보낸 사문 싯다르타는 하루에 30요자나(10∼15km)씩 걸어 라자가하(왕사성. 오늘날 라즈기르)에 들어갔다. 라자가하는 당시 최강국이던 마가다의 수도이자 문화·사상의 중심지, 국왕은 빔비사라였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가고 싶었던 라즈기르에 2002년 3월28일 마침내 도착했다. 사문 싯다르타가 아노마 강가에서 며칠 걸어 도착한 곳, 최초 사찰인 죽림정사가 있었던 성지.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이 만났고, 위대한 제자 사리푸트라와 목갈라야나가 교단에 들어온 곳. 데바닷타와 아자타사트루의 반역, 빔비사라 왕의 비참한 최후, 싯다르타가 본격적인 수행을 전개한 장소이자 부처님이 아난존자를 데리고 '최후 여행'을 내딛은 곳. 불교와 라즈기르는 그만큼 인연이 깊다.
인도 대지에 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따가운 열기를 뚫고 찾아갔지만 빔비사라 왕이 탁발하는 싯다르타를 보았다는 왕사성(王舍城)은 없었다. 부처님과 관련된 유적지는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반면 왕성(王城)으로 추정되는 곳엔 잡목이 무성했고, 보드가야로 향하는 길목 산비탈에 성벽 유적만 조금 남아 있었다. 성문도 없으며, 사람도 '그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옛 왕사성 한복판에 있는, 북쪽(나란다 대학)에서 남쪽(보드가야 방면)으로 통하는 큰길만이 과거의 영화(榮華)를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었다.
회상(回想)에 잠기려 왕사성 대로(大路)를 걸어도 2500년 전 마가다국의 왕도에 왔다는 감흥(感興)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 양쪽 잡목이 만든 그늘이 나그네를 반겨주었지만, 길은 너무나 한적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따가운 햇살과 잡목, 간간이 보이는 유적지 푯말이 거의 전부였다. "밤이 되면 이곳은 무법천지가 됩니다. 강도들이 출몰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는 안내인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늘에 앉아 뜨거운 열기를 식히며, 머리 속의 시간을 서서히 2500년 전으로 돌렸다.
<니다나 가타>·<수타니파타> 등에 의하면 왕사성에 도착한 사문 싯다르타는 집집마다 차례로 탁발하며 돌았다. 탁발하는 사이 성안에서는 갑작스런 소란이 일어났다. 사문 싯다르타의 탁발 모습을 보기 위해 "아수라 왕이 천궁에 싸움을 걸어왔을 때처럼" 큰 혼란이 발생했다.
소동은 빔비사라 왕에게도 보고 됐다. "왕이시여! 어떤 자가 성에서 탁발하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자는 천인인지, 인간인지, 용인지, 금시조 인지, 무얼 하는 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나이다."
왕은 누각에 올라 탁발하는 사문 싯다르타를 보았다. 보는 순간 참으로 불가사의한, 경탄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여! 저 사람을 보라. 멋지고 장엄하고 수려한 사람이, 모습도 당당하게 앞만 보며 가고 있다. 그는 오직 아래만을 보면서 걸어가고 있구나. 저 사람은 필시 비천한 가문 출신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이여! 저 사람의 뒤를 따라가 보라. 어디로 가는지 잘 살펴 보라."
사자(使者)는 "수행자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디쯤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사문을 뒤쫓아갔다. 앞서가던 사문은 "몸을 잘 절제하면서, 깊이 생각에 잠겨 흩어지지 않는 자세로, 이 집 저 집 밥을 얻으러 다녔다." 그리곤 "내가 목숨을 지탱하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시가지를 빠져 판다바 산으로 올라갔다. 판다바 산 동쪽에 있는 한 동굴 속에서 호랑이처럼, 황소처럼, 사자처럼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먹자마자 사문 싯다르타의 장이 뒤틀리며 음식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 했다. 지금까지 이런 조악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싯다르타여! 그대는 손쉽게 음식을 얻을 수 있는 집안에서 3모작의 향긋한 쌀밥과 온갖 으뜸가는 맛을 갖춘 반찬을 곁들여 먹는 곳에 태어났으면서, 누더기 옷 걸친 사람을 보고 '대체 언제나 나는 저런 모습으로 탁발하여 먹을 수 있을까. 또 내게는 과연 저런 때가 오기나 할까'라고 생각하며 출가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어찌 된 일인가!"
스스로 꾸짖은 사문 싯다르타는 마음을 담담하게 가다듬고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신하들은 그 일을 왕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빔비사라 왕은 장엄한 수레를 타고 급히 판다바 산으로 갔다.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수레를 타고 가다, 내려 걸어간 왕은 사문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왕은 말했다. "수행자여! 그대는 아직 젊음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제 막 인생의 문에 들어선 젊은이여, 용모가 단정한 것으로 보아 필시 어느 고귀한 왕족임이 분명합니다." 왕은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군의 총사령관 직을 주겠습니다. 많은 재물도 주겠습니다. 내 선물을 기꺼이 받아주십시오. 어느 가문에서 태어났습니까."
"대왕이여! 저 히말라야 산 밑에 정직한 한 민족이 살고 있으니, 이 민족은 예로부터 부와 용기와 이름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 민족의 성은 '태양의 후예'이며 석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행자 된 것은 결코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욕망에는 필경 불행이 뒤따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욕망의 세상을 거부해 버린 행복을 만끽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그지없는 마음의 평안 속에서 말입니다."
대답을 듣고도 빔비사라 왕은 뜻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다.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 안 왕은 깨끗이 단념하고 말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 부처님이 된다면 제일 먼저 저의 나라에 임하여 주십시오." 후일 부처님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던 빔비사라 왕과 사문 싯다르타는 서로 이렇게 말하곤 헤어졌다.
대화는 이렇게 끝났지만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문 싯다르타는 무엇 때문에 문화의 또 다른 중심지였던 코살라국의 수도 '쉬라바스티(사위성)'를 마다하고, 훨씬 먼 '라자가하'까지 갔을까. 카필라바스투가 코살라국의 속국이었다는 점이 얼른 짚인다. 수도에 전념하기엔 아무래도 왕사성에 비해 좋은 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카필라바스투에서 찾아온다든지, 코살라국 왕이 부른다든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왕사성이 수도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물론 라자가하가 당시 인도의 문화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게 작용했다. 당대를 대표할 뛰어난 사상가들이 그곳에 운집해 있었고, 거기에 가야만 자신의 고민·번뇌를 해결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싯다르타는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라자가하에 도착한 싯다르타는 여러 수행자들과 학자들을 만났다.
라자가하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수행자였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고 판단, "천인을 포함한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힘과 정진을 나타내기 위해, 위대한 정진에 힘쓰고자" 우루벨라로 갔다. 가야 근방 나이란자나 강변, 현재의 '보드가야'가 바로 그곳이다.
보드가야. 사문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된 곳. 카필라바스투에서 시작된 싯다르타의 고행의 길은 라자가하로, 라자가하에서 다시 보드가야로 이어진다. 보드가야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영취산에 올라가 내려다 본 왕사성은 숲이 우거져 있는 등 수행하기에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왜 보드가야로 갔을까. 의문은 보드가야에 도착한 2002년 3월30일 즉시 풀렸다. 라자가하의 자연적 환경은 보드가야에 미치지 못했다. 수자타 마을·전정각산·고행림(苦行林)·나이란자나강·가야쉬르사(상두산), 그리고 물과 나무가 풍부한 보드가야는 최적의 수도처로 보였다.
뭔지 모를 '활기'·'생동감'이 보드가야 주변엔 넘치고 있었다. 하늘의 공기는 라자가하 보다 훨씬 청량했고, 도로 가장자리에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과 나이란자나 강변의 쭉쭉 뻗은 나무들은 시원한 녹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인도의 다른 곳에선 거의 보지 못했던 산들도 보드가야에선 쉽게 볼 수 있었다.
평야가 아닌 산지에 자라 그런지, 산들이 보이니 마음도 왠지 푸근해졌다. 여행에 지친 몸에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처럼 보드가야 주변은 인도의 다른 곳과 달랐다. 몸에는 힘이 올랐고,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싯다르타도 이곳에 왔을 때 아마 비슷한 기분이었으리라.
싯다르타가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많은 수도자가 있었다. 카샤파 3형제로 대표되는, 불을 숭배하는 사회외도(事火外道)들이 1,000명씩이나 무리 지어 연마하고 있었다. 보드가야는 수도자들에게 이상적인 장소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훨씬 많고 문명의 때가 깊게 배인 오늘날 가 보아도 보드가야는 여전히 활기찬 데, 싯다르타가 도착할 당시의 보드가야 주변은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다이나믹'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루벨라에 도착한 사문 싯다르타는 "여기는 참으로 수행하기 적절한 곳"이라 판단,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맹렬한 고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톨의 참깨와 쌀알로만 지낸다거나, 전혀 음식을 먹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싯다르타의 피부는 극도로 검어졌고, 몸은 뼈만 남은 채 앙상하게 변했다. 소량의 콩 즙만 마실 뿐 단식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신체는 80세 노인과 같아졌으며, 등뼈가 굽어 일어서려면 네 발로 기어야 했고, 앉으려면 벌렁 자빠질 정도였다. 눈은 움푹 패이고, 가슴뼈나 혈관이 피부 위로 솟아올랐다. 호흡을 멈추고 정신집중을 도모하는 '지식선(止息禪)'을 닦은 까닭에, 때로는 대단히 큰 고통을 겪다 의식을 잃고 수행처 부근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말할 수 없는 6년 간의 정진 끝에 싯다르타는 고행을 포기했다. 육체를 괴롭혀 마음의 정화에 이를 수 있다는 극단적 고행주의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갖가지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고행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향한 길이 아니다. 저속한 고행은 어떤 것이든 아무런 이익이 없다. 마치 배의 노나 키가 숲 속에선 전혀 유용하지 않듯, 맹목적인 고행은 아무 가치가 없다. 허공에 매듭을 묶으려는 것처럼 의미가 없다"(<상응부경전>)고 생각했다. 그리곤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아 원기를 회복한 뒤, 전(前) 정각산에 올랐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 前정각산 상두산 나이란자나江 수자타마을 (0) | 2022.09.11 |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 위없는 깨달음, 보드가야의 새벽별 (0) | 2022.08.28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 싯다르타 태자는 왜 출가했을까 (0) | 2022.07.31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 마침내 출가하는 태자 (0) | 2022.07.17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 태자의 고뇌는 깊어가고 (0) | 2022.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