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기본성을 보면, 즉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참나]을 깨쳐서 알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중국 선종(禪宗) 개조 달마(菩提達摩, ~528) 대사의 가르침으로,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 ‘견성성불’은 자기 마음을 바르게 가져, 자기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쳐야 한다는 선종(禪宗)의 이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견(見)’이란 눈으로 본다 돌이켜 본다 터득한다 생각 변별 견해라고 하는 뜻이 담겨있다. 즉, 보는 것과 깨쳐 아는 것이라는 뜻이 함께 함축된 글자이다. 그리고 견성(見性)의 ‘성(性)’은 본심(本心), 본성(本性)을 말한다. 마음의 본질, 마음의 주체, 마음의 실체로서 소위 ‘마음 속의 마음’, ‘마음의 마음’이다. 선문에서는 불성(佛性), 자성(自性) 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한다.
‘견성(見性)’이란 ‘견불성(見佛性)’의 준말로 “불성을 본다 - 깨친다”는 뜻인데, 불성은 곧 ‘중도(中道)’를 의미하며, 견성은 ‘중도의 자각’이다. 여기서 중도는 ‘탈이분법(脫二分法)’으로서, 이분법에서 벗어난 불이(不二)의 마음,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따라서 견성은 중도를 자각해 자기본성(본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밝고 바르게 보아 앎으로써 정각(正覺)을 이루면 성불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본래의 자기면목(自己面目), 즉 본시 그대로의 자기본성을 깨치면 성불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리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 된다는 말이다.
견성을 하려면 텅 빈 마음과 밝은 지혜로 천지만물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고 하는 근본 마음자리를 알아야 한다. 즉 밖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작게는 나의 성품, 나의 마음을 보고 아는 것을 뜻하고, 크게는 천지만물의 시종본말(始終本末)과 생로병사의 이치와 인과응보의 이치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견성해야 한다는 말 자체에 끄달려 다녀서는 참 공부는 그르칠 것이라는 점 유의해야 한다.
선종(禪宗)은 연꽃을 내 보인 부처님의 뜻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아내고 슬며시 웃었다는 가섭(마하가섭/摩訶迦葉)의 염화미소(拈華微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서 부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 교종(敎宗)이라면, 선종은 부처의 마음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이나 계율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교종과는 달리, 선종에서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단번에 깨쳐서 - 돈오(頓悟)하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즉, 문득 깨쳐서 자기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면, 그렇게 해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찾으면, 즉 견성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본래 자기 안에 부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중국 선종의 6조 혜능(慧能, 638~713)을 시조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에서 강조했다.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중국 양(梁)나라시대 보량(寶亮, 444~509)이 지은 <대반열반경집해((大般涅槃經集解)>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확립된 것은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부터이다.
<육조단경> ‘반야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 본래 스스로의 성품이 청정하니 만약 자신의 이 마음을 알면 그대로 견성이라, 모두 도를 이루리라(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래 성품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本性是佛 離性無別佛)”.
이러한 생각은 부처는 하나가 아니라 ‘모든 중생이 스스로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의 불성설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을 선불교에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며, ‘자성이 부처(自性是佛)’라는 심성(心性) 이해로 받아들여 성립시킨 사상이 곧 견성성불설이다.
인간의 본성은 불성(佛性) 그대로이나 경계에 따라 본성이 흐려지는 것이므로, 그 흐림을 걷어내고 본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는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自性)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불성과 자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바탕 위에 성립한다. 여기서 본성(本性)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따라서 견성 즉 성불이고, 성불 즉 견성이다. 중국 당나라시대 서역 출신인 화엄종 제3조(三祖) 현수(賢首, 643~712) 국사나 우리나라의 원효(元曉) 대사 같은 대논사들도 견성이 성불이라고 말했다.
이 자각적인 불성은 부처님과 똑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써 일체의 모든 존재를 비추어 관찰하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분별심을 일으켜 취하거나 버리는 차별심의 작용도 없고, 어떤 일이나 생각(개념)에 끄달리어 집착됨도 없이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자기를 전개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성이 청정하고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구족하고 있는 자기본성을 깨닫고, 자기불성에 구족된 반야의 지혜로서 일체의 모든 경계나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공(空)의 실천으로 자기를 전개하는 것이 선불교의 실천정신이다.
그러므로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성품을 보아 성불한다고 할 때, 이 성품이라는 것은 마음의 성품[심성(心性)]을 말하는 것으로, 결코 우리들의 의식으로 인지(認知)할 수 있는 관찰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지해(知解)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을 봤다고 깨달음은 아니다. 마음을 봤다고 하는 것은 가능성을 열었다고 하는 것이지, 무한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뜻일 뿐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견성을 했다는 것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깨쳤다는 말인데, 진여본성이란 억지로 말하려고 하니까 진여(眞如)라 하는 것이지 말로서 세울 수 없다. 오직 스스로 증(證)해서 깨쳐야만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른다. 진여(眞如) ? 법계(法界) ? 심지(心地)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는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름이 있다고 무슨 물건이 있는 듯이 알면 큰 오해다. 말로서는 진여라고 하지만 뜻은 오직 깨쳐야 알지 말로서 표현할 수 없고 형용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심오한 원리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목전에 진리가 있지만 못 보는 것은 진리를 진리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으로 길들여진 훈습(薰習)에 의해 사리분별하기 때문이다. 사리분별심은 계속적으로 연기(緣起)하고 윤회(輪廻)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선가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마음을 직접 보고 닦는 직지인심의 견성성불을 주장한다. 그러나 본래 구족된 진실한 자아(自我)를 닦는다 해도 부처님의 근본교설 공부도 충실히 해야 한다. 견성성불은 지혜가 바르게 서있는가를 끊임없이 경전이나 큰스님을 통해서 묻고 되묻는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파괴할 수 없는 불성(佛性)이 들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량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 그러나 한번 오온(五蘊)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항아리 안의 빛처럼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 <십지경(十地經)>. 성불은 중생이 수행을 통해 미혹이나 망상을 없애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중생의 성품(性品)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성품이며, 일체중생과 일체 제불의 본성이며, 근원적인 자성(自性)이다. 이 성품은 원래 고요하고 청정하며 보편 타당한 진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마음을 닦으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그 자리에서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선종(禪宗)은 중국에서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했다. 후한(後漢)시대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지나치게 경전의 해석과 번역에 치우침으로써 본래의 목적인 깨침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의 결과 중국다운 불교로서 선종이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달마 이후 육조(六祖)를 배출하면서 선불교는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루었고, 이것이 동북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까지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불교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 발생한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중국에 와서 불성사상으로 발전했다. 이에서 선종이 중국 고유의 불교이듯이 불성사상이야말로 중국에서 생성 발전한 중국 고유의 불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견성성불설은 중국 전통의 성명(性命)사상과 불성(佛性)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견성성불설은 불성사상 바탕 위에 성립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불성이라고 하는 것에 굉장히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중국 전통적인 성명사상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이다. 이 본성은 천명(天命)으로부터 온 것이다. 천명이란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즉,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라는 것이 성명(性命)사상이다.
이렇게 해서 성립한 중국 선종불교의 4대 종지(宗旨)가 견성성불(見性成佛) ? 직지인심(直旨人心) ? 불립문자(不立文字) ?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그런데 이 4대 종지는 각기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돼 있는 언구이다. 즉,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해야 견성성불 할 수 있다. 앞의 세 구절은 모두 견성성불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며, 꼭 실천해야 하는 선 수행의 단계이다. 이를 무시하고서는 선의 근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공중에다 견성성불이라는 누각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見性成佛)”이란,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어 교리를 공부하거나 계행을 떠나서 직접 마음을 교화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선종의 2대조사 혜가(慧可, 486~593)와 그의 스승 달마 대사와의 문답에서 유래했다.
혜가가 달마 대사에게 불도를 얻는 법을 묻자 달마 대사는 한 마디로 “마음을 보라”고 답했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行)을 다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해 밖에서 도(道)를 구한다면 많은 세월을 수행으로 보내고, 애써 경전을 쓰며, 끼니를 잊고 경을 외우더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곧바로 알면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므로 성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쉬운 일이라 했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門)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얕은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을 건너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마음(6識 따위)과는 어느 정도 다른 것이다. 보통 말하는 마음은 마음의 본질이나 본체의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견성은 마음의 본질로서의 자기 본심, 자기 본성, 자기 불성을 투철히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때의 견성은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견성 그대로 마음이자 본성이자 불성인 것이다. 자신이 지닌 마음의 불성(佛性), 마음의 부처와 같은 성품을 봄으로써 스스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따라서 견성성불을 표방하는 선가(禪家)에서는 인간의 근원적 정신을 추구해 나가는 데는 문자나 언설은 한낱 수단에 불과하다고 해서 경전에서 말하는 교설을 방편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선종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타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독경(讀經), 좌선(坐禪), 예불(禮佛), 계율(戒律)과 같은 수행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단지 마음을 닦아서 자기의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룰 것을 주장한다. 즉, 부처님의 종지(宗旨)는 경전의 언어적 표현을 뛰어넘은 절대주체의 자아(自我)인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성품에서만 볼 수 있는 경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문에서는 단박에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는 - 돈오성불(頓悟成佛)이라고 해서 단계적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깨달아 정각(正覺)을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다. 다만 선가에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표방한 것은 사리 분별하는 차원을 넘어 원래 청정한 성품의 진면목(眞面目)을 보라는 의미이지 부처님 말씀을 서술한 경전 자체를 부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 지식은 견해(見解)라고 말하는데 비해,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할 때는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지식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형상에는 변함이 없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인식(認識), 다시 말해서 안식(眼識)의 허망함을 알고, 안식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무상(無相)의 상태가 견성이다.
불교에 있어서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하는데 비해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한다. 상(相)은 사물의 겉모습을 모방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성(性)은 사물의 속내인 본질을 말이고, 겉으로 들어나는 상(相)은 윤리적인 가치를 분별하는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성(性)은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를 초월한다. 이러한 성(性)은 허공과 같은 청정한 진면목을 일컫는다.
그러니 견성(見性)이란 본연의 자기를 봄이요 깨달음이다. 그런데 본연의 자기는 항상 존재하는데 어째서 중생은 보지 못할까, 생각이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구름을 계속 피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생각이 멈추어진 순간 이따금 하늘이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돼 지나치고 놓쳐버리므로 본연의 자기를 보지 못한다. 본연의 자기를 보려면 감각을 활짝 열어 한 생각도 없는 순간을 맞이해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나타나 이윽고 자기를 보게 된다. 감각을 계발하는 것이 견성의 필수조건이다.
달마 대사가 견성성불을 주장한 후 육조 혜능 역시 오로지 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룬 것과 같다는 가르침을 주어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조사(祖師)들이 주장한 것처럼 중생에게 변하지 않는 영원한 성품인 불성(佛性)이 있다면, 굳이 수행이 필요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부처의 성품이 있는 것과, 부처의 성품을 발견한 것과, 부처의 성품을 완전히 드러낸 것에는 차이가 있다. 부처의 성품을 한번 힐끗 봤다고 부처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다. 불성을 보면 그냥 바로 부처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부처란 존재는 그렇게 쉽게 자주 오는 분이 아니니까. 대개 처음 이 부처의 성품을 본다는 것은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을 말한다. 저 멀리에 있는 피안을 그냥 한번 눈으로 본 것이다. 그 한번 힐끗 보는 것으로 피안에 완전히 도착한 게 아니다. 그런데 착각하는 수행자들이 종종 있다. 그거 한번 일별하고 나서 난 이제 도 닦는 거 끝났다고 하지만 대단한 착각이다.
중생에겐 불성이 있지만 가려져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져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져 있느냐의 차이다. 가리는 것은 바로 번뇌에 휩싸인 내 마음이 가리고 있다. 그러니 이런 마음으로 죽어라고 불성을 찾아봐야 더더욱 가려질 뿐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이 마음이 그 부처의 성품을 가린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악마란 바로 ‘나’ 자신이다. 왜냐면 이 ‘나’란 놈이 탐(貪) 진(瞋) 치(痴)로 온갖 죄를 끊임없이 지으며 살아가고 있으므로 계속 윤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를 육적마(六賊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것이 육적마이니까, 마(魔)란 바로 ‘나’ 즉 내 마음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마음을 항복 받으라는 내용이 나온다. 수행을 방해하는 게 바로 ‘나’,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천방지축이다. 그래서 가부좌 틀고 앉아 있어도 온갖 망상이 일어날 뿐이다. ‘나’란 놈은 즉 마음인데, 고요하게 있지 않으려고 한다. 고요하게 있으면 불성(佛性)이 드러난다. 불성이 드러나면 번뇌 망상에 물든 ‘나’라는 놈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와 나(마음)는 상극이다. 진리가 드러나면, ‘나’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나’라는 놈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해를 한다. 그게 망상(妄想)이다. 저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이 마음을 ‘나’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아(無我)의 뜻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부처님 법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겨우 이론 정도밖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해탈의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걸 깨닫지 못하면,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마음을 ‘나’로 알고 도(道)를 닦고 있으니까 윤회(輪廻)의 주체를 갈고 닦고 앉아 있는 꼴이다. 움직이는 이 마음, 이걸 ‘나’로 알고 도를 닦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해탈이 아예 불가능하다.
일상적으로 쓰는 이 마음, 움직이는 이 마음은 허상이고, ‘나’가 아니다. 그냥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각의 파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 파편들이 계속 이어지니까, ‘나’가 항상 있는 줄 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인다. 마치 하늘의 구름과 같다. 항상 구름이 끼여 있어서 하늘의 태양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거기에서 빛나고 있다. 그 구름을 치워버려야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 수행을 하면서 조금씩 치워버리는 게 돈오점수(頓悟漸修)이고, 한방에 확 치워버리는 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그렇다면 과연 내 속에 불생불멸의 불성이 정말로 있을까. 불성을 발견한다고 끝이 아니고, 그게 겨우 시작이다. 불성을 발견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수행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아니다. 마음도 사실 전혀 변하지 않게 된다. 자아에 대한 아집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어렵다. 이 아상(我相)을 깬다는 것, 습관을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리고 선문에서 추구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은 ‘곧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문자나 언어를 빌리거나 외적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마음을 잘 응시해서 직접 단번에 마음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마음 깊숙이 내재하는 순수한 본심, 순수한 본성에 투철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자기를 구명(究明)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에 투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본마음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직지인심이라 한다.
여기서 직지(直指)의 대상은 자기의 밖이 아니라 자기 속에 존재한다. 때문에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구해야 한다. 마음 밖에서 찾는다면 외적 대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결과 망상과 미혹된 마음이 일어나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파악하라는 말이다. 이는 달마 대사의 가르침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알게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된다.
그래서 혜능(慧能) 선사나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 등 여러 조사들은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莫覓外求)고 경계한 것이다. 중생은 본래 부처이다. 마치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다. 물을 떠난 얼음이 없듯이 중생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 바로 중생에게서 부처를 구해야지 멀리 찾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마음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곧바로 본심, 본성에 투철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더구나 망념(妄念)의 구름이 덮여 있으면 진여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열심히 수행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또 끊어졌다는 생각까지도 끊어져서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微細妄念)까지 다 끊어지면 무명업상(無明業相)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게 되니 이것이 진여를 깨친 것이며 무념(無念)을 성취한 것이다.
결국 자성을 깨친다고 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제8 아뢰야식의 무기무념(無記無念)도 아닌 진여무념(眞如無念)을 깨친 것이 견성이고 성불이다. 진여무념을 깨치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고 성불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생멸심(生滅心) 기멸심(起滅心) 망상(妄想)이 그대로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견성성불이 이루어질 수 없다. 불법에서 공인된 견성과 성불은 제8 아뢰야식 무기무념까지도 뽑아버린 - 근본 미세념(微細念)까지도 뽑아버린 무념이라야 견성이고 성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념(無念)---무념은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무념에서 ‘무’는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이 없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즉, 여기서 ‘념(念)’은 잡념 혹은 번뇌를 뜻한다. 여기서 무념(無念)은 제8아뢰야식의 망념까지도 다 떨어진 구경의 진여무념을 말한다.
※무기(無記)---무기란 선(善) 또는 불선(不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며, 이에 대해 선 불선의 어느 쪽인가에 속하는 것을 유기(有記)라 한다.
혜능 스님이 5조 홍인 대사(弘忍大師, 601∼674)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아니함을 크게 깨치고 아뢰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알았으며(何期自性 本自淸淨),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며(何期自性 本不生滅),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한 줄 알았으며(何期自性 本自具足),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 알았으며(何期自性 本無動搖),
어찌 자성이 일체만법을 능히 내는 줄 알겠습니까(何期自性 能生萬法).”
이에 홍인 대사는 혜능 스님이 본성을 깨친 것을 아시고 혜능 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본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를 배워도 이익이 없으며, 본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를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부처라 한다고 하시며, 밤 깊은 삼경에 혜능에게 법을 전하니 다른 사람들이 다 알지 못했다. - <육조단경(六祖壇經)>
즉, 혜능 스님이 5조 홍인 대사의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서 건립돼 있어 일체만법 이대로가 자성이고, 자성 이대로가 일체만법임을 확철히 깨치고 감탄했던 것이다.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자성이 본래 청정(淸淨)한 것을 몰랐는데 자성을 깨치고 나니 자성이 청정하더라는 놀라움과 감탄을 표현했다.
이러한 경지를 자성(自性)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런데 하물며 객진 번뇌가 왔다 갔다 하고, 번뇌 망상이 아른거리는 이런 경지를 어떻게 자성청정이니 견성이니 할 수가 있겠는가. 일체망념이 다 떨어지면 자성청정이 안 될 수 없으며 자성청정은 곧 무념(無念)이다.
궁극적 진리의 길은 책조차도, 경전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리는 언어나 철학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어의 차원 너머에 있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고 했다. 이는 곧 본질적인 체험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경전도, 어떤 언어도, 어떤 상징물도 아닌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체증(體證)만이 부처란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출처] 견성성불(見性成佛)|작성자 보각 송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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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좋은 시 모음 (0) | 2022.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