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승들이여! 이별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게을리 하지 말고 노력하라.」
석존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수 숲속의 그루 나무 사이에 마련한 침상 위에 누우셔서 이 사바세계를 떠나가셨습니다. 그 날을 우리는 열반기(涅槃忌)라고 하며, 음력 2월 15일 입니다. 부처님의 죽음을 <열반에 듦>이라 합니다.
<열반(涅槃), 니르바나 Nirvanan>
이것은 <꺼진 상태> <꺼진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 깨침의 경지>를 가리키기도 하구요. 결국 깨침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번뇌(煩惱)는 무너져 꺼진 상태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소멸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깨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깨침을 얻었던 것도 열반이라고 해야 마땅하지만 보통은 죽음에 당도할 때를 이릅니다. 따라서 육신이 있고서 깨침에 이르른 것과 죽어서 육신이 멸하는 경우를 통틀어 열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 다하여 영영 사라져버리고,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심(三毒心)을 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니르바나, 곧 깨침인 진리의 진각에 드는 것입니다.
입적(入寂)은 바꾸어 말하면 입열반(入涅槃)이라고도 합니다. 어는 스님이 입적하시었다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입적은 이생의 고난(苦難)을 벗어나서 열반의 증과(證果)에 오름을 말합니다. 또한 증과에 들어간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적(示寂)은 적멸(寂滅)의 뜻으로 열반을 번역한 말인데 스님의 죽음을 석존의 입멸에 견주어 만들어낸 듯합니다.
원적(圓寂)은 원만한 적정(寂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뇌와 잡념의 세계를 여의고 청정한 열반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후세에 와서 스님들의 죽음을 귀적(歸寂)이라고도 하며, 입적. 시적이라고 하게 됨은 이러한 데서 시발해서 각각 다르게 부르고, 표현되었을 따름입니다. 이 생은 하룻밤을 쉬어가는 객사(客舍)라는 비유도 있습니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호랑이에게 쫓긴 나그네는 도망을 치다가 우연히 우물을 발견하고 잠시 그곳에 몸을 감추기로 하였습니다. 마침 거기에는 두레박줄처럼 생긴 등넝쿨이 우물 밑바닥으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이 넝쿨을 붙잡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갑작스레 독사 네 마리가 나타나 나그네를 해칠 시늉을 합니다. 다시 위쪽을 보니 꼭대기에는 흰 주 한 마리와 검은쥐 한 마리가 등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물 ꞻ바닥에는 독사가 도시리고 있고..... 그런중에도 넝쿨에 매달린 벌집에서는 단꿀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절벅한 순간에도 그 단꿀맛에 취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설했다는 『열반경』에 나오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인간의 운명을 비유한 적절한 보기입니다.
호랑이는 인생의 덧없음이며, 우물은 나고 죽는 인생의 깊은 늪이며, 등넝쿨은 우리의 목숨이고, 독사는 죽음의 그림자, 단꿀은 애욕과 환락을 상징합니다. 우리 인생이란 이 나그네의 신세와 같은 것입니다.
화장마당에서 다비(茶毘)의 연기가 늦가을 하늘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 순간, 우리는 생사의 갈림길을 절감하게 됩니다. 멀고 험한 인생길, 그 길은 우리 모두가 어김없이 가야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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