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녹취(문수경전)

법화경 대강좌 2강 - 3 (방편품1~20)

수선님 2022. 8. 28. 12:14

법화경 대강좌 2강 - 3
 

 

  드디어 법화경 本論에 들어갑니다.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迹門과 本門으로 나눈다고 했지요? 각 14품씩.

적문의 正宗分에 해당됩니다.

序分=서론. 正宗分=본론. 流通分=결론. ←이렇게 표현하지요.

 

  正宗分=본론에 들어가는데, 이것의 이름이 方便品입니다.

아시는 대로 會三歸一. 三乘을 모두 모아서 一乘으로 귀결 시키는 것이 법화경의 宗旨지요.

법화경의 목적은 일승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一佛乘. 사람이 모두가 부처님이다. 그러니 부처님으로 살라는 것을 법화경의 종지로 삼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방편품은 적문에 있어서의 안목이고, 저 뒤에 가면  如來壽量品이 있는데 그 여래수량품은 본문의 안목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품이 방편품과 여래수량품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대로 “방편”하면 우리 느낌에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을 않는데, 법화경의 안목이라고 할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이름을 왜  “방편품” 이라고 했는가? 이것이 저도 평소에 조금 의문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방편을 제목으로 하면서, 그 제목 안에는 일승이 들어 있다. 이 방편에 대한 말을 너무 잘 쓰는데 정확하게 하면 方자는 바른, 우등상 같은 것을 타면 행동이 “방정하다.”그러지요? 方자는 바르다는 뜻입니다. 便자는 수단이라는 뜻이거든요. 

정확하게 하면 바른 수단입니다.

 

  바른 수단이 되어야 이것을 방편이라고 할 수 있지, 거짓 수단이나 아니면 어떤 저의가 숨어있는 수단이면 이것은 방편이 아니지요. 사실 방편은 엄격한 것입니다. 아무 것이나 방편이다 해서 막 써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방편은 반드시 實法. 진실을 목적으로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지 방편이 방편에 그치면 그것은 사기가 됩니다.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방편을 비유로 하면 건물을 짓는데 거푸집과 같습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시멘트를 채워서 나중에 거푸집을 뜯어버리면 건물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실제의 건물이 나타나는 겁니다.

 

  겉에는 방편으로 싸여 있지만, 그것을 뜯어버리면 실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큰 탑을 쌓는데 발 받이를 가지고 겉에다 가건물을 얼마나 크게 짓습니까?

발 받이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하거든요. 그 안에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겁니다.

하나하나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겉에서 보면 가건물만 보이는 겁니다. 잔뜩 발 받이만 보이는데 나중에 다 쌓고 나면 그것을 다 철거해 버리지요. 주변이 있는 가건물 싸악 다 철거해 버리면 큰 탑만 딱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방편의 용도는 그와 같은 겁니다. 또 방편은 그렇게 쓰였을 때 방편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함부로 방편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별의별 비불교적인 요소. 무당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행해져서 참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법화경이 세상에 출현한 까닭도 그래서, 그래서 정법 불교를 선양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이 법화경이고, 부처님의 자비가 거기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달과 손가락”그러지요?  손가락은 방편이지 않습니까? 달은 실법입니다. 실법을 우리가 터득하기 위해서 방편을 필요로 한 것이지요.

 

  금강경에서 知我說法을 如筏喩者하라. 내 설법을 모두뗏목의 비유처럼 알라. 부처님이 그랬거든요. 방편을 뗏목으로 비유를 하지요. 그 뗏목은 뭡니까? 뗏목의 목표는 피안에 있습니다. 저 언덕에 이르는 것. 그것이 실법이거든요. 피안이 실법입니다. 뗏목은 방편이라고요.

방편과 실법을 정확하게 나눠놓고 그 다음에 필요에 따라서 약간 요령을 좀 부리든지 말든지 그것은 각자의 몫입니다만, 방편이라는 뜻이 그렇습니다. 

말은 방편이라고 했지만, 방편을 통해서 실법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묘법연화경에서 정말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그리고 깨닫게 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게 하고자 하는 제법실상의 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에서 보면 탑을 만드는데 아직은, 드러나지 아니 했으니까 그야말로 우리 눈에 가건물만 보이지요. 그래서 여기를 방편품 이라고 했습니다. 건사하지요? 제목을 이렇게 참 멋지게 달았잖아요.

사실은 “진실품”이라고 해야 옳지요. 방편품 보다는 진실품 이라고 했으면 더욱 좋지만, 그것은 뭔가 은근한 맛이 없잖아요. 슬쩍 감춘 듯하면서 생각하게 하고, 여운을 남기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 따라서요? 경전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그런 심오한 뜻은 참... 글쎄요. 저도 공부 하느라고 하지만, 100분의 1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정도로 이것이 참 심오하고 넓이가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참 천금과도 같은 이런 보물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으면서 깊이 공부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니까, 불자로서, 또는 승려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약한 것이지요. 제대로 알면 긍지와 자부심이 아주 하늘을 찌를 듯 할 텐데 제대로 모르니까 자부심이 부족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妙法蓮華經 第一卷

 

          方便品 第 二

 

1. 爾時世尊 從三昧安詳而起(이시세존 종삼매안상이기)

그 때 세존이 삼매로부터 安詳히 일어났다. 安詳. 이것도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초발심자경문에 執放要須安詳(집방요수안상). 발우를 잡고 놓을 때 모름지기 안상히 하라. 安詳 = 찬찬히 그리고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찬찬히 하는 그런 것을 “安詳”이라. ←이렇게 해석을 해도 그래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三昧에서 부처님이 척 깨었는데, 미동도 없이 삼매에서 나오지, 무슨 옷깃 하나 흔들렸겠습니까? 눈썹하나 흔들렸겠습니까? 전혀 흔들림이 없이 정말 아주...

 

  그래서 安詳”이라고 밖에 표현을 못해요. 찬찬히니 편안하게니 자세하게 해봐야 맞지가 않습니다. 아주 섬세하고 미세한 동작.

어쨌든 三昧로부터 그렇게 일어났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면 방선했다고 그냥 후닥닥, 바람을 일으키면서 후닥닥 일어나는 것은 사실은 얼토당토 않는 짓이지요. 그러다 보면 실컷 챙겨놓은 화두 다 떨어져나가 버리게 후닥닥 일어나고요. 그런 것들도 우리가 이런데서 살필 수 있지 않겠나? 스님들이 참선 지도를 하는데 이런 말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법화경은 경전의 완성입니다.

아주 중요한 표현인데 법화경은 경전의 완성입니다.

또 부처님교설의 완성입니다. “부처님교설의 완성이고 경전의 완성이다.” 뜻은 같습니다만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만치 법화경은 경전으로서 궁극에 이른 경전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제발 방편은 바른 수단이라고 기억해주시고요.

 

2. 告 舍利弗 諸佛智慧 甚深無量 其 智慧門 難解難入

   고 사리불 제불지혜 심심무량 기 지혜문 난해난입

一切聲聞辟支佛 所不能知(일체성문벽지불 소불능지)

사리불에게 고 하사대. 이것이 제일성입니다. 뭐라고 하셨는가?

첫 마디가 諸佛智慧는 甚深無量하니라.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어 한량이 없으며, 其 智慧門도 難解難入이라. 난해하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알기도 아주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래서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들이 능히 알 바가 아니니라. 성문이나 벽지불 따위가 여기에 올 수가 없다. 이 자리에 올 수가 없고 또 모른다. 그래서 뭐라고요? 敎菩薩法. “최고 수준에 이른, 마음이 턱 열린 그런 사람들을 가르치는 법이다.” 그랬어요.

 諸佛智慧. 이것을 우리가 평생의 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諸佛智慧는 甚深無量이라. 其 智慧門도 難解難入이라.

 

3. 所以者何 佛曾親近 百千萬億 無數諸佛 盡行諸佛無量道法 勇猛精進

   소이자하 불증친근 백천만억 무수제불 진행제불무량도법 용맹정진

名稱 普聞 成就甚深 未曾有法 隨宜所說 意趣難解

명칭 보문 성취심심 미증유법 수의소설 의취난해

 

무슨 까닭인가 하면 왜 그렇게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어마어마해서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것인가? 부처님은 일찍이 百千萬億 無數諸佛을 親近했다. 여기 친근하면 뭐라고 했지요? 공경. 공양. 존중. 찬탄. 親近이라하는 말 속에는 그 네 가지 단어가 다 포함되지요. 보기만 하면 뭐 하겠습니까? 그래 저는 그 전에 큰 스님 찾아다닐 때, 한 번씩 아무 준비 없이 찾아가서 영 멋쩍고 미안하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노트를 딱 준비해서 ‘내가 어느 스님 찾아가면 이점, 이점, 이점을 물어야지’하고 딱 준비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절대 빈손으로 안 가고요.

 

  친근할 때는 그 네 단어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盡行諸佛無量道法이라. 제불무량도법을 모두 다 행해서,

勇猛精進하여 名稱이 普聞입니다. 온 동네방네 그 소문이 자자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成就甚深 未曾有法이라. 甚深한 未曾有法을 성취했다. 

그러면서 隨宜所說입니다. 그래서 意趣가 難解다.

 

  隨宜所說. ←이것 참 중요한 말입니다. 편의를 따라서 마땅함을 따라서 설한바다. 그래서 뜻을 알기 어렵다. 그것이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은 하셨는데 그 말씀의 본뜻이 정말 ‘어디에 있는가?’ ‘내 수준에 맞춰서 저렇게 말씀하시는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가 울면 단풍든 낙엽을 가지고 “야~ 이거 돈이다.” 이렇게 해서 울음 그치게 하고. 안 되면 “호랑이 왔다.”이렇게 해서 울음 그치게도 하고요. 그것도 안 되면 두들겨 패서라도 울음 그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부모의 마음은 아니잖아요. 그 호랑이 왔다고 하는 것이나 낙엽을 주고 돈이라고 속이는 것이나 두들겨 패는 것이나 이것은 전부 부모 마음은 아닙니다. 그것이 隨宜所說입니다. 편의를 따라서 설한 것입니다. 거기에 맞춰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우리가 말만 쫓아가면 안 되는 겁니다. 意趣가 難解다. 그래서 그 속뜻은 난해하다. 이해하기 어렵다.

 

4. 舍利弗 吾從成佛已來 種種因緣 種種譬喩 廣演言敎 無數方便 引導衆生

   사리불 오종성불이래 종종인연 종종비유 광연언교 무수방편 인도중생

令離諸著 所以者何 如來 方便知見波羅密 皆已具足

영이제착 소이자하 여래 방편지견바라밀 개이구족

 

  사리불아, 吾從成佛已來이래로 내가 성불한데서부터 種種因緣과 種種譬喩로서 言敎를 廣演하고, 널리 말하고, 또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해서 그래서 어떻게요? 令離諸著이다. 온갖 집착에서부터 떠나도록 했다.

온갖 집착으로부터 떠나도록 했다. 중생들의 병통은 첫째 집착이니까요.

무엇에 집착하는가? 차별에 집착합니다. 차별을 보는 겁니다. 차별을요.

그래 뭐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뭐 어떻다. 저떻다. 전부 차별된 것을 가지고 차별에 집착을 해서, 거기서 스스로 갈등을 야기 시키지요. 갈등이 생기면 괴롭지요.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고요.

 

  그러면 온갖 시기 질투가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별을 집착하면서부터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차별을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뭐라고요? 無位眞人. 차별 없는 참 사람에 눈 떠라. 거기에 초점을 맞춰라. 무위진인에 초점을 맞춰야지 현상적인차별에 초점을 맞추면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원 가지고 있으면 십 만원 가진 사람이 있고, 십 만원 갖고 보니 백만 원 가진 사람이 있고, 백만 원 갖고 보니 천만 원 가진 사람이 있고 끝도 없는 겁니다. 이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갖춰져 있는 완전무결한 無位眞人. “차별 없는 참 사람에 눈을 떠라.” 조사스님들 이것 참 기가 막힌 법문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諸著을 떠나게 했다. 부처님이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표현을 했습니다.

所以者何오 如來는 方便知見波羅密. 방편과 지견바라밀. “방편바라밀.” “지견바라밀.” ←이렇게 합니다. 이것 皆已具足. 이미 다 구족했느니라.

 

5. 舍利弗 如來知見 廣大深遠 無量無礙 力無所畏

    사리불 여래지견 광대심원 무량무애 력무소외

禪定解脫三昧 深入無際 成就一切 未曾有法

선정해탈삼매 심입무제 성취일체 미증유법

사리불아, 如來知見 廣大深遠하니, 廣大하고 深遠하다 如來知見.

지견 = 지혜. 이것은 같은 뜻이라고 했습니다.

 

 법화경 제2강 유인물→ 법화경강좌 영상 14번.

2. 方便品 科目.

略開三顯一(약개삼현일). 간략하게 3승을 열어서 1승을 드러냈다.

廣開三顯一(광개삼현일). 아주 자세하게 널리 3승을 열어서 1승을 나타냈다. ←이 두 가지로 표현 되었는데 그래도 결국은 한 가지입니다.

開三顯一. 3승을 열어서 1승을 드러냈다. 3승을 연 것은 방편이고, 1승을 나타낸 것은 진실입니다. 제가 아까 방편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無量無礙 力無所畏 禪定解脫三昧

              

 

  사무량심(四無量心): 범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넓은 마음

(1) 자(慈)무량심. 자신의 인생으로서 남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염원하는 마음.

(2) 비(悲)무량심.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도록 염원하는 마음.

(3) 희(喜)무량심. 타인의 행복을 같이 기뻐하려는 마음.

(4) 사(捨)무량심. 타인으로부터 받은 해악은 잊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버리며, 자신이 좋은 일을 해 주더라도 보답을 원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이 네 가지 마음은 무량한 중생을 반연하여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것이므로 무량심이라 한다.

 

  사무애변(四無碍辯): 마음의 방면으로는 지(智) 또는 해(解)라 하고 입의 방면으로는 변(辯)이라 함.

(1) 법무애(法無碍)는 온갖 교법에 통달한 것.

(2) 의무애(義無碍)는 온갖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것.

(3) 사무애(辭無碍)는 여러 가지 말을 알아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

(4) 요설무애(樂說無碍)는 온갖 교법을 알아 기류(機類)가 듣기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데 자재로운 것.

 

  십력(十力): 세상의 모든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꿰뚫어 보는 지혜.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의 힘이니

(1) 옳고 그른 것을 아는 지혜의 힘.

(2) 중생들의 三세 업보(業報)를 아는 것.

(3) 여러 선정과 八해탈 三삼매를 아는 것.

(4) 중생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아는 것.

(5)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境界)를 아는 것.

(7)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 가서 나게 되는 것을 아는 것.

(8) 천안통으로 걸림 없이 보는 것.

(9) 숙명통으로 중생의 숙명을 아는 것.

(10) 온갖 번뇌의 습기를 영원히 끊는 지혜의 힘.

 

  팔해탈(八解脫): 三계의 번뇌를 여의고 그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

(1) 안에 색상(色想)의 탐심이 있는 것을 밖의 색을 관하여 해탈하는 것.

(2) 안에 색상의 탐심이 없으나 밖의 색을 관하여 해탈하는 것. 

(3) 깨끗한 해탈을 몸에 증득하여 구족하게 머무는 것.

(4) 空無邊處(공무변처)에서 해탈하는 것.

(5) 識無邊處(식무변처)에서 해탈하는 것.

(6) 無所有處(무소유처)에서 해탈하는 것.

(7) 非想非非想處(비상비비상처)에서 해탈하는 것.

(8) 滅受想定(멸수상정)을 몸에 증득하여 해탈하는 것.

 

삼삼매(三三昧):

(1) 공삼매(空三昧):

온갖 것은 모두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이므로 아(我)와 아소(我所)등이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삼매.

 

(2) 무상삼매(無相三昧):

열반은 상(相)이 없는 것이라고 관하는 행과 함께 일어나는 정심(定心).

 

(3) 무원삼매(無願三昧):

무작삼매(無作三昧) 모든 법을 관하고서 바랄 것이 없는 관혜(觀慧)와 함께 일어나는 정심(定心).

 

  사무외(四無畏) :

(1)부처님의 四무외는,

  ①나는 일체지를 가진 사람이라 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②나는 온갖 번뇌를 끊었노라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③불도를 장애하는 법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④고통을 없애는 도를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이요.

 

(2) 보살의 四무외는

  ①경법과 뜻을 기억하고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②법약(法藥)과 중생의 성품을 알고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③문답을 잘 하면서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④중생의 의혹을 잘 끊어 주면서 법문을 잘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선정(禪定) : 마음이 언제나 평온하여 동요하는 일이 없음.

  해탈(解脫) : 모든 미혹으로부터 벗어남. 

  삼매(三妹) : 하나의 좋은 생각에 정신을 통일시켜 옆길로 빠지는 일이 없음. ←이런 데에 深入無際하사. 깊이 들어가서 끝이 없으시어 未曾有法을 成就하였느니라.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이것이 경전에서 표현한 부처님입니다. 如來知見이라고 했지요. 廣大深遠해서 4무량심. 4무애변. 10력. 4무소외. 선정 해탈 삼매 ←이런 식으로, 이것 보다 물론 더 많지요. 훨씬 더 많지만 간략하게 표현하면경전상의 부처님. 경전상의 여래는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처님을 우리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경전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으니까 우리 입장에서는‘부처님이 이런가 보다.’ 라고 할 정도입니다. 솔직하게 우리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지요. 경전에서는 이렇게 밖에 말을 안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바가 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한 것입니다. 경전에서 이야기 했지만 이런 부처님이 있지도 않고, 보지도 못했고요. 그래서 조사스님들은 깨닫고 나서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을 함축해서 한 마디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하면 방망이로 후려쳐서 보여주고, 때리는 그 놈이 바로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맞는 그 놈.

  맞고 아플 줄 아는 사람.

  아픈 그 사실. 아프다고 하는 그 사실이 바로 4무량심과 4무애변과 10력. 4무소외. 선정 해탈 지혜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 상에서 표현한 여래와, 어록 상에서 표현한 여래의 차이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어록이 아주 간단명료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지요.

“경전은 활처럼 설명 했다면 어록은 활줄처럼 직선으로 설명했다.” 이런 이야기가 아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바로 그냥 활로 보여주는 것이고,

棒(방)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一句(일구)로 보여주는 것이고, 손가락 들어서

보여주는 것이고, 부처님도 간혹 꽃을 들어서 보여줬다든지 그것이 바로 그 겁니다.

 

  그것을 부연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간단명료하게 우리 눈앞에 환히 펼쳐져 있잖아요.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 부처다.” 이래 버렸으니까요. 석굴암의 부처님. 그 잘 생긴 부처님도 울 줄 몰라요. 더 이상 웃을 줄도 몰라요. 화낼 줄 모릅니다. 울 줄 알고 웃을 줄 알고 화낼 줄 아는 그 신통. 그 능력. 그 사람 놔두고 달리 어디서 부처 찾느냐 이 겁니다.

좋은 것 보면 탐낼 줄 알고 신기하잖아요.

석굴암 부처님 가 보세요. 좋은 것 보면 탐낼 줄 아는가? 몰라요.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선 최고가는 부처님 아닙니까? 그렇다고 등상불을 가지고 자꾸

 “부처” “부처”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인정 할 수 있는, 우리 깜냥으로 검증이 가능한 부처.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멀리 있는 부처. 우리하고 별 상관없습니다. 사실 경전 상에 뭐라고 설명해 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나와 바로 어떤 관계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경전의 여래와 어록 상에서 표현한 여래를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정. 해탈” 해탈이라는 말이 참 좋지요. 다른 낱말은 다 두더라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해탈인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차이를 비교하는 데서부터 우리가 해탈하는 것. 비교하는 데서부터 갈등이 생기고, 갈등에서부터 고통이 생기니까 그 차이를 비교하는 것으로부터 해탈하자. 뭐 생사해탈은 놔두고요. 차이를 비교하는 것.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나와 다른 것의 차이를 비교합니다. 그것만 해탈해도 됩니다. 그것만 해탈해도 편안합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누가 해인사 같은 절을 100개쯤 설사 혼자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전혀 동요할 까닭이 없는 겁니다.

 

  나는 나로서 지고한 가치를 이해하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으면 끝입니다. 사실 조금 눈을 깊이 보면 그 외의 여타 조건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낱말 중에서 너무나도 참 좋은 낱말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대주화상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하니까

 “누가 너를 묶었더냐?” 누가 너를 장애하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 겁니다. 없잖아요. 아무리 오랏줄로 묶어 놨다 하더라도 진정 그 사람은 마음껏 날개를 펴고 훨훨 날고 있는데, 거기에 눈을 뜨면 육체의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6. 舍利弗 如來-能種種分別 巧說諸法 言辭柔軟 悅可衆心

   사리불 여래  능종종분별 교설제법 언사유연 열가중심

사리불아, 여래는 능히 種種으로 分別하여 모든 법을 巧說. 아주 능숙하게 설명하신다. 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아요. 능숙하게 설명하시니, 言辭가 柔軟해요. 그리고 대중들의 마음을 아주 즐겁게 한다. 들으니 아주 기쁘고 편안하게 들린다.

 

7. 舍利弗 取要言之 無量無邊 未曾有法 佛悉成就

   사리불 취요언지 무량무변 미증유법 불실성취

사리불아, 요점만 취해서 말하자면, 無量無邊의 未曾有法을 佛悉成就니라. 량무변 미증유 법을 부처님은 다 성취했다. 요점만 가지고 말하자면 그렇다 이 겁니다.

앞에서 설명하고, 딱 간추려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에 대한 찬탄입니다. 불 지견에 대한 찬탄을 한껏 해놓고는 “에이 그만 두자. 내가 부처님에 대한 불 지견. 부처의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은 했지만, 이쯤에서 그만두자. 止하라. 그만두자는 말입니다.

 

8. 止 舍利弗 不須復說 所以者何 佛所成就第一希有

   지 사리불 불수부설 소이자하 불소성취제일희유

難解之法 唯佛與佛 乃能究盡 諸法實相

난해지법 유불여불 내능구진 제법실상

그만두어라. 사리불아, 不須復說.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실컷 이야기 해놓고 부처님이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썩 뒤로 물러서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부터 三止三請해서 “三止三請章”이라고 합니다. 세 번 그만두자는 말이 나오고, 그러니까 사리불도 그냥 있을 수 없다 해서, 계속 법을 세 번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三止三請章”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또 十如是라고 하는 諸佛實相에 대해서 설명하는 십여시가 나오기 때문에 여기를  “十如是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만두자 사리불아,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 왜냐 하면 佛所成就一切希有 難解之法은 부처가 성취한 제일 희유하고 그리고 난해한 이 법은 唯佛與佛.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乃能究盡 諸法實相하니라. 제법실상의 도리를 이에 능히 다 알 수가 있다. 부처 이외에는 모르는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법화경은 부처님교설의 완성이기 때문에 부처를 드러내는 경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諸法實相의 도리를 다 알 수 있다. ←이렇게 슬쩍 말을 던졌는데, 諸法實相의 말을 아니 할 수가 없지요. 이것이 말해가는 순서가 그래서 그런 것이지요.

 

9. 所謂諸法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等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여시본말구경등

  所謂諸法은 그랬습니다. 이것이 제일 어려운 대목이고, 어찌 보면 법화경의 눈이라고 하는 것이, 이 十如是. 여시가 열 번 나온다고 해서 十如是章”이러는데 여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如是相 : 와 같은, 이러한 모습. 여러분들 각자 갑은 갑. 을은 을. 사람은 사람. 동물은 동물. 꽃은 꽃. 마이크는 마이크. 책상은 책상. 책은 책. 노트는 노트. 그 나름대로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如是相입니다. 그것을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게 “이와 같은 모습”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如是”라고 하면 모든 모양에 다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이 如是라는 말은 육통 자재한 겁니다. “이와 같이 들었다.”하면 뭡니까? 모든 들은 것이 다 속에 포함 되거든요.

 

  如是性 : 모든 존재는 전부 그 나름의 독특한 성질을 기지고 있습니다. 독특한 모양. 60억의 인구가 얼굴이 다 다르듯이, 60억 인구의 성품이 다 달라요. 그것이 如是性입니다. 이와 같은 성품.

 

  如是體 : 이것은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본체라고 하는 것 하고, 성이라고 하는 것 하고 좀 애매하지요? 그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붓글씨 쓸 때, “체 받는다.”그러지요. 그 체 받는다는 말로만 표현이 되지 더 이상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스승이 써준 글씨를 100번이고 1000번이고 제가 길 영자를 한 달을 쓴 적이 있거든요. 하루에 수 백자씩 한 달을 썼는데 그것이 체 받는 겁니다. 쓰다보면 그것이 그대로 내 정신 속에 그것이 담고 있는 어떤 본체가 나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그와 같이 본체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질하고는 다릅니다. 性하고 體하고는 다릅니다. 얼른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이렇게 들어두고요.

 

  如是力 : 이와 같은 힘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연필은 연필의 능력이 있고, 여러분들은 개개인의 능력이 있고, 책은 책대로의 능력이 있고, 노트는 노트대로 능력이 있고, 그 나름대로 다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如是作 : 작용입니다. 그 나름대로 작용을 합니다.

“힘이 있다.”는 것 하고 작용을 하는 것 하고는 다르잖아요. 힘하고 작용 하고는 다릅니다. 힘은 있되 작용을 아니 할 수도 있습니다.

 

  如是因 : 거기에는 모두가 원인이 있습니다. 일체에 원인 없는 것이 없지요.

 

  如是緣 : 조건. 어떤 것도 조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연이라는 말 잘 아시니까요.

 

  如是果 : 거기에는 전부 그 나름의 결과가 있습니다. 인 · 연 · 과.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지요?

 

  如是報 : 구체적으로 하면 인 · 연 · 과 · 보. ←이렇게 하는데 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따른 후속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라고 그러잖아요. 우리가 “그 사람 과보야” ←이렇게 말하잖아요.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가 있고, 결과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뒤에 뭐가 따라요. 그림자같이 뭐가 따라오는 그것이 입니다. “사과”하면 사과 딱 맺혔지요? 그것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과가 끼치는 영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라고요. 사람이 먹는 데에도 끼칠 수가 있고, 그것을 던져서 새를 쫓을 수도 있고, 거름으로 쓸 수도 있고, 사과하나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 못합니다. 그래서 “如是”라고 붙인 겁니다.

 

  如是本末究竟等 : 이것이 本과 末이 究竟에 가서는 동등하다. 이 자가 十如是를 설명하는 것이 아주 구구한데 이것이 평등한 것이다.

본래 이 相 · 性 · 體 · 力 · 作 · 因 · 緣 · 果 · 報. ←이 아홉 가지의 처음과 끝이 궁극에 가서는 究竟. 처음과 끝이. 本과 末이 궁극에 가서는 동등한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자가 동등하다. 하나로 통일 되어있다는 뜻인데 어떤 이들은 空이다. 똑 같이 空이다. 평등한 것이 공밖에 더 평등한 것이 어디 있느냐? 어느 것 공 아닌 것이 있느냐? ←이렇게 해석을 해서 공이라고 좀 지나친 해석을 하는 이도 있는데, 동일하다. 하나로 맺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이 本과 末이 궁극에 가서는. 究竟에 가서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等 = 하나로 통일되어 평등하다. 일단 그쯤으로 이해해두고요.

 

  諸法實相을 부연해서 설명하면 이렇게 十如是로 표현 된다. 이래서 十如是만 가지고 박사논문이 한편이 되기도 하고 그래요. 과거에 법화경을 해석한 이들은 이 十如是에 제일 공을 쏟아서 해석해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태종에서는 一念三千. 인간의 한순간의 생각 속에 3000가지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로 까지 발전합니다. 천태학의 천태지자 선사가 법화경을 아주 제일 많이 연구를 했는데, 1000가지면 1000가지가 다 옳다고는 보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제일 깊이 연구한분이 천태지자 선사입니다. 그래 천태종이 성립이 된 것이지요.

 一念三千이라는 것도 이 十如是를 같이 포함해서 표현한 것인데, 인간의 한순간 속에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그리고 성문 연각 보살 불. ←이런 요소들이 다 포함 되어있다는 부연 설명까지 장황하게 하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쯤으로 이해하고 사전에서나 어디 다른데서 좀 깊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諸法實相이 이런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諸法實相이고, 부연하면 十如是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10. 爾時世尊 欲 重宣此義 而說偈言

    이시세존 욕 중선차의 이설게언

그 때 세존이 欲 重宣此義하사 而說偈言하사대,

 

11. 世雄不可量 諸天及世人 一切衆生類 無能知佛者

    세웅불가량 제천급세인 일체중생류 무능지불자

    佛力無所畏 解脫諸三昧 及佛諸餘法 無能測量者

    불력무소외 해탈제삼매 급불제여법 무능측량자

世雄不可量이라. 세상의 영웅은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과 一切衆生의 類는 無能知佛者니라. 능히 부처님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부처님의 힘과 無所畏의 解脫과 여러 가지 삼매와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나머지 법들을 無能測量者니라. 능히 측량할 사람이 없느니라. 

 

12. 本從無數佛 具足行諸道 甚深微妙法 難見難可了

     본종무수불 구족행제도 심심미묘법 난견난가료

     於無量億劫 行此諸道已 道場得成果 我已悉知見

     어무량억겁 행차제도이 도량득성과 아이실지견

 

  本從無數佛로, 본래 無數佛로부터 구족하게 모든 도를 具足히 行한 甚深微妙法은 難見難可了니 보기도 어렵고 가히 알기도 어려우니라. 한량없는 억겁에 行此諸道已하시고, 이 모든 도를 다 행해 마치시고 道場에서 果를 이루신 것을 我已悉知見이라. 내가 지금 다 知見한다. 도량에서 불과를 이룬 것. 道場은 뭐지요? “부다가야”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을 언제나 道場이라고 합니다. “도량”하면 언제든지 부처님이 성도하신 장소. 그리고 부처님의 성도 그 자체. 그것을 도량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절 도량” 우리가 여기 공부하는 곳도 “도량” 전부 도량이잖아요. 전부 성불장입니다.

 

  전부 부처되기 위한 것이지, 그 외에 아무 다른 의미가 없는 겁니다.

불교는 오직 그 목적이 하나. 나도 너도 다 같이 自他一時成佛道. ←이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데나 “도량” “도량” 도량이라고 붙이지 않습니까?

절이나 아무 것도 없으면 선이라도 그은다든지, 줄이라도 친다든지,

인도나 중국 같은 광야에서는 처음에 그랬어요. 그것을 “결계”라고 그럽니다. 결계라는 말을 잘 쓰지요. 경계를 만드는 겁니다. 사방 100m씩 한다든지,

사방 1Km씩 한다든지 해서 줄을 친다든지, 말뚝을 박는다든지, 선을 긋는다든지 해서 “우리가 이 안에서 수행한다.”하고 바깥과 안의 분별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없어도 절이 없어도 도량이 됩니다. 결계하면요.

 

13. 如是大果報 種種性相義 我及十方佛 乃能知是事

      여시대과보 종종성상의 아급시방불 내능지시사

     是法不可示 言辭相寂滅 諸餘衆生類 無有能得解

     시법불가시 언사상적멸 제여중생류 무유능득해

 

  이와 같은 大果報와 가지가지 性相의 뜻을, 性相은 十如是입니다.

십여시의 뜻을 我及十方佛이 나와 시방세계 부처님만이 乃能知是事니라.

이에 능히 이 일을 아느니라. 여기에 벌써 十方佛 이라고 은근히 써 말씀을 하고 있네요. 是法不可示라. 이법은 가히 보이기 어려움이라.

言辭相寂滅이라. 言語道斷(언어도단)하고 心行處滅(심행처멸)이라.

우리 그런 말 잘 쓰지요? 

諸餘衆生類는 無有能得解요. 모든 다른 중생들은 아무 아는 사람이 없고,

 

    除諸菩薩衆 信力堅固者 諸佛弟子衆 曾供養諸佛

    제제보살중 신력견고자 제불제자중 증공양제불

    一切漏已盡 住是最後身 如是諸人等 其力所不堪

    일체루이진 주시최후신 여시제인등 기력소불감

 

  除諸菩薩衆의 信力堅固者하고, 모든 보살대중의 믿음의  힘이 견고한 사람만 제한다. 그 사람들은 가능하다.

모든 부처님의 제자 대중이 曾供養諸佛. 일찍이 부처님께 공양한 사람도 여기에 포함된다. 열어 두었지요. 성문 벽지불 따위는 어림도 없다 해놓고 그리고는 이렇게 열어 두었습니다.

一切漏已盡하여 일체의 번뇌가 이미 다 해서 最後身에 머문 사람. 이와 같은 사람들도 그 힘이 능히 감당하지 못 할 바니라. 最後身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수행의 단계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중생 몸을 받지 않고 이제 마지막 받은 중생 몸이라는 표현인데, 수행이 최고조에 달한 사람이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14. 假使滿世間 皆如舍利弗 盡思共度量 不能測佛智

     가사만세간 개여사리불 진사공탁량 불능측불지

     正使滿十方 皆如舍利弗 及餘諸弟子 亦滿十方刹

     정사만시방 개여사리불 급여제제자 역만시방찰

    盡思共度量 亦復不能知(진사공탁량 역부불능지)

 

  假使滿世間이, 이런 말이 또 재미있어요. 이 세상에 가득한 사리불과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盡思共度量.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사리불처럼 그렇게 지혜가 출중한 사람도 不能測佛智라. 부처님의 지혜는 알 수가 없다. 성문은 모른다 이 말입니다.

正使滿十方이 皆如舍利弗하여, 시방에 사리불 같은 사람이 가득차 가지고서 모든 제자들이 十方刹에 가득해서 다 같이 부처님의 지혜를 度量한다 하더라도, 다 같이 그 일만 계산하고 의논해본다 하더라도, 亦復不能知니라. 또한 다시 알기 어렵다.

 

  초등학생 한 1만 명쯤 모였다 합시다. 초등학생 1만 명모이면 얼른 생각에 중학생 한 사람 공부가 될 것 같지요? 안됩니다. 초등학생이 10만 명이 모여도 중학생 한 사람공부가 안 된다고요. 왜냐? 차원이 다르니까요. 차원이 다른데 많이 모인다고 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리불 같은 성문이 온 세상에 가득 찼다 하더라도, 안됩니다. 보살 한 사람만 못하는 겁니다.

亦復不能知 라는 것이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연각도 모른다고 그랬어요.

 

15. 辟支佛利智 無漏最後身 亦滿十方界 其數如竹林

    벽지불이지 무루최후신 역만시방계 기수여죽림

    斯等共一心 於億無量劫 欲思佛實智 莫能知少分

    사등공일심 어억무량겁 욕사불실지 막능지소분

 

  辟支佛利智. 벽지불의 날카로운 지혜. 無漏最後身이 시방세계에 가득해서 其數如竹林이라. 그 숫자가 대 수풀과 같이 그렇게 많거든, 이러한 이들이 함께 한마음으로서 億無量劫에 欲思佛實智. 부처님의 실다운 지혜를 생각하고자 한다 하여도 莫能知少分하며, 능히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앞에서는 성문이 모른다고 했고, 그 다음에 벽지불도 모른다. 그 다음에는 보살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16. 新發意菩薩 供養無數佛 了達諸義趣 又能善說法

     신발의보살 공양무수불 요달제의취 우능선설법

     如稻麻竹葦 充滿十方刹 一心以妙智 於恒河沙劫

     여도마죽위 충만시방찰 일심이묘지 어항하사겁

     咸皆共思量 不能知佛智(함개공사량 불능지불지)

 

  新發意菩薩이 供養無數佛하고 了達諸義趣. 諸義趣를 了達하며, 또 능히 법을 잘 설명하되 如稻麻竹葦. 稻麻竹葦와 같이 하며 시방찰해 가득히 해서 一心으로 妙智로서 恒河沙劫에,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劫에 咸皆共思量한다 하더라도, 다 같이 함께 생각한다 하더라도 不能知佛智라. 부처님의 지혜는 또한 능히 알지를 못한다. 여기 新發意菩薩가지고는, 보살, 보살해도 新發意菩薩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이 겁니다. 성문도 안 되고 연각도 안 되고,

新發意菩薩도 안 된다.

 

17. 不退諸菩薩 其數如恒沙 一心共思求 亦復不能知

     불퇴제보살 기수여항사 일심공사구 역부불능지

不退菩薩이 其數如恒沙하야 불퇴지에 오른 菩薩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아서 一心으로 共思求. 일심으로 같이 생각하여 구한다 하더라도 亦復不能知라. 또한 능히 알지 못함이라. 그 다음에 부처님은 안다고 그랬습니다.

 

18. 又告舍利弗 無漏不思議 甚深微妙法 我今已具得

     우고사리불 무루부사의 심심미묘법 아금이구득

     唯我知是相 十方佛亦然(유아지시상 시방불역연)

又告舍利弗하노니 無漏不思議인 甚深微妙法을 我今已具得이니, 나는 지금 이미 모두 갖추어서 얻었다.

“부처님은 안다” 이 뜻입니다. 唯我知是相이라. 오직 나만이 이 모습을 十方佛亦然이라. 시방에 부처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지혜가 위대하다는 것을 한껏 이야기합니다.

 

19. 舍利弗當知 諸佛語無異 於佛所說法 當生大信力

     사리불당지 제불어무이 어불소설법 당생대신력

    世尊法久後 要當說眞實(세존법구후 요당설진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諸佛語無異니, 모든 부처님의 말은 다름이 없으니, 佛所說法에 부처님이 설법한 바에  마땅히 큰 믿음의 힘을 내어라. 세존의 법이 오랜 후에, 70년입니다. 70세 이후지요. 要當說眞實이니라. 부처님법이, 이것이 開三顯一이거든요. 3승을 열어서 1불승을 나타내는데 그 세월이 “49년 설법”이라고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 한다면, 40년이 3승법을 설한 것이 되고, 그 다음에 나머지 10년이, 말하자면 8년이지요. 8년이 비로소  진실한 법을 설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世尊法久後에 세존의 법이 오랜 뒤에, 70세가 된 이후에 요컨대 마땅히 진실을 설한 것이다. 법화경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화경만이 진실이라는 뜻에서요.

 

20. 告諸聲聞衆 及求緣覺乘 我令脫苦縛 逮得涅槃者

    고제성문중 급구연각승 아령탈고박 체득열반자

    佛以方便力 示以三乘敎 衆生處處著 引之令得出

    불이방편력 시이삼승교 중생처처착 인지령득출

 

  告諸聲聞衆과 여러 성문대중과 緣覺乘을 구하는 사람과 내가 苦縛에서 고통의 속박에서부터 하여금 해탈케 해서 逮得涅槃者하노니 열반을 얻게 하리니 佛以方便力으로 부처님의 방편의 힘으로서 三乘敎로서 보였거늘, 衆生이 處處著일새. 곳곳에 집착한다. 衆生處處著입니다.
조사스님들 이런 말도 잘 인용하지요. 
引之令得出하노라. 곳곳에 집착하니까 내가 그 사람들을 잘 이끌어서 거기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것이 3승을 열어서 1승을 드러내는 내용을 간략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부처님이 당신의 지혜. 깨달음의 지혜는 너무 위대하고 깊고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그만두자.” “에이, 그만두자. 이야기 해봐야 되겠나?”라고 하면서 살짝 맛만 보이는 것이 10여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어렵다는 이것을 게송으로서 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 2강-4로 이어집니다. -

 

 

 

 

 

 

 

 

 

 

법화경 대강좌 2강 - 3 (방편품1~20)

법화경 대강좌 2강 -3 드디어 법화경 本論에 들어갑니다.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迹門과 本門으로 나눈다고 했지요? 각 14품씩. 적문의 正宗分에 해당됩니다. 序分=서론. 正宗分=본론. 流通分=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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