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대강좌 3강 - 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일심정례 진시방삼세 일체제불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일체존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일체현성승)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아제자등 강론삼장 유원삼보 위작증명
南無本師釋迦牟尼佛(나무본사석가모니불)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드디어 좋은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양력으로 3월이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놀기 좋은 계절이고, 공부하고 정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부하고 정진하기에 아주 딱 좋은 계절입니다.
앞서 동철스님이 어린이 포교에 중요한 책 두 가지를 스님들께 공양하고, 간단하게 설명도 올렸습니다만, 여기 어린이 포교에 진력하고 계시는 지현스님도 계시지만, 특히 비구니스님들께서는 어린이 포교에 비구스님들보다 훨씬 더 열중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는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 포교. 새싹 포교에 소홀히 하면, 지금 현 정부에서나 그동안 우리가 정부에서 푸대접 받아온 것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대접 받자고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과 포교. 이것은 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히 그중에서도 어린이 포교. 청년 포교에 우리가 힘을 기울여야 그들이 성장을 해서 나라에 동량도 되고, 불교도 짊어지고 나갈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사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선해서 포교에 힘을 기울여야 할 분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일선에서 열심히 잘 하고 계시지만, 이런 기회에 한번쯤 더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책 공양이 또 한 가지가 스님들에게 드린,
“보살계를 받는 길.” 이 책을 잠깐 소개드리면, 또 보살계 계절이 돌아 왔어요.
3월 4월 5월 이 때가 우리 불교의 “보살계 산림” 계절입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법회가 행해지는 법회로서는 보살계법회처럼 많은 숫자가 동참하고, 또 여러 곳에서 행해지는 것이 없지 않나? 최고로 많이 행해지는 것이 보살계 산림 법회입니다. 지금 조계사에서는 벌써 지난 일요일부터 법망경 산림이 시작 되었습니다.
유수한 사찰에서 봄으로 가을로 이 법망경을 근거로한 보살계 산림이 행해지는데, 스님들은 작은 사찰에서 신도님들을 이끌고 큰절에 가서 동참도 하는 그런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관례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살계의 정신. 또 보살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미타불의 후신이라고 까지 칭송을 받는 영명연수선사.
법안종 3대 조사이기도한 그런 분이 매일 보살계를 설했습니다.
하루에 108가지를 불사를 했는데 그 중에 보살계 설하는 것이 하나로 들어있기도 합니다. 또 일반 설법도 매일 하시고요. 특히 보살계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 분이 受菩薩戒法序라고 하는 글을 통해서 보살계의 宗旨가 무엇인지, 안목이 어떻게 되어야 우리가 보살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제대로 받는 것인지 그것을 밝힌 책이 단행본으로 처음 나왔습니다.
이것을 간간이 조금씩 인용하는 면은 많았지만, 이것을 제가 옛날에 보고는 너무도 감동을 해서 언젠가 이것을 한 번 ‘세상에 내놓아야 되겠다.’ 했습니다.
제 손을 기다렸는지 여태 단행본으로 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올 겨울에 마침 이것을 강의할 기회도 있었고, 그러면서 번역도 하고 저의 좁은 소견으로 해설도 친절하게 붙인다고 붙여서 오늘 2008년 3월3일에 출판이 되었습니다. 오늘 스님들께 공양 처음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저로서는 큰 영광이고, 기쁨이고 그렇습니다.
가져 가셔서 잘 읽어서 숙지하셔서 보살계를 안내하거나 설하거나 보살계와 관계될 때는 꼭 이 영명연수선사의 가르침에 의해서 보살계를 알려드리면 이 보다 더 좋은 지침은 없지 않은가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드리게 되었고, 꼭 필요한 곳이 있다면 저에게라도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필요한 만치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책은 지금 막 찍어서 한 권도 안 나갔으니까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책이고 세상에 단행본으로 처음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보살계에 관한 것도 그렇지만, 법화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고, 모르는 것 가운데서 하나하나 알게 될 때, 그 기쁨과 법희선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리불 이야기를 할 때보면 “佛口所生子(31)” 라는 말이 있었지요? “부처님 입으로 태어난 사람.” ←이런 표현이 있었는데, 그것을 액면 그대로 라면 “부처님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그날 제가 “부처님 설법 듣고 출가한 제자.” 또는 “부처님 설법 듣고 발심한 제자.” 이렇게 해석을 해버리니까 그냥 간단하게 이해가 되잖습니까?
그런 것도 우리가 액면대로 해석하면 그냥 “부처님 입에서 태어난 제자.”입니다. 참 곤란하다고요. 그런데 경전을 설하시는 부처님으로서는 그런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하고 하신 말씀인데, 우리에게 오면 그것이 그만 큰 화두가 되고 아주 문제가 되고 난관이 되고 숙제가 됩니다.
저도 어릴 때 부처님이 右脇(우협)으로 탄생했다는 말을 듣고 곧이곧대로 믿었지요. 그러면서도 참 신기하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 옆구리 정도는 인체 상으로 봐서 태어 날만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렇게 믿었어요.
그런데 좀 성장하면서 이것저것 불교공부도 하고 책도 많이 보니까 인도의 그 소위 4성 계급 따라서, 태어나는 부위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치 상징적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바라문족은 “이마에서 태어났다.”
어떻게 사람이 이마에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옆구리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가 되겠는데요.
그런데도 순진한 제 마음으로는 옆구리로 태어난 것으로 여러 해를 믿었어요. 철이 들고 이것저것 경전을 많이 보고 하면서 아, 그런 표현이 그냥 그쪽 사람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냥 쉬운 표현으로 그렇게 해도 다 알아듣는데 몇 발 건너뛰다 보니까,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까지 건너뛰다 보니까,
그리고 시대적으로 2000년 3000년이 흐르다 보니까 이것이 제대로 소화가 안 되는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것이 그냥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옆구리라고 하는 것은 소위 4성 계급 중에 왕족 내지 武士 계급. 그 계급이라는, 번역을 “왕족으로 태어났다.”해버리면 간단한 것을 가지고, “우협 탄생하시다.” ←이렇게 해놨다고요.
그 말이나, 이 말이나 그 당시 인도 사람들에게는 똑 같은 것인데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화두가 되어 버리지요.
“왕족으로 출생하시다.”보다는 “우협 탄생하시다.” ←이것이 훨씬 상징적이고 의미가 있고 씹을 맛이 있거든요.
바라문들은 “정수리에서 태어났다.” “이마에서 태어났다.”하면 알아듣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멋있잖아요.
禪門學이라는 것이 사실 대개 그런 표현 아닙니까?
그런 표현이 더 비밀스럽고, 또는 깊은 뜻을 상징하기 위한 표현도 있지만,
법화경 안에도 대단히 많습니다.
전번에 “5000 퇴석(43)”이라는 희대의 불교사에 둘도 없는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도 우리가 경전에서 보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5000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듣기 싫으면 앉아서 졸면 되고, 또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면 될 텐데 어디가 있으나, 앉아 있는 것이 그리 힘 드는 일도 아닐 텐데, 엇잡히 앉아 있을 바에는 부처님 있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텐데, 왜 5000명이 일어나서 나갔다고 했는가? 이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그렇게 법화경이 비밀스럽고 어려운 것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 쉽게 이해 됐을지 모르지만,
右脇誕生이라든지 佛口所生子. 이런 말들이 너무 쉽고 재미있는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어려운 표현이잖습니까? 스님들은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대승불교 운동이 부처님 열반 후 500년경에서부터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500년이라는 세월동안 그야말로 승단 중심의 불교도들이 자기의 어떤 기득권만 가지고,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고 그러면서 권리 행사만하고 기득권행사만 그렇게 했던 그런 사람들의 배타적인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금강경은 우리가 법회청중이 1250명해서 성문뿐이지요. 딱 성문뿐입니다.
그리고 空의 이치만 설하는 것이 금강경 아닙니까? 그것이 솔직하게 성문들에게나 해당되는 가르침이라고요. 세상은 전부 공한 것으로만 보고, 무상한 것으로... 無相爲宗이니까요. 相이없는 것으로 보면, 얼핏 보기에 성문 중심의 가르침입니다. 청중이 전부 성문입니다.
1250명이 전부 성문인데 법화경에 청중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雜衆이라고 제가 그런 표현을 했지만, 천태지자선사도 거의 잡중이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 비인 용 야차 건달바. 이런 이들까지 다 포함해서 법회 청중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럼 이것도 벌써 법화경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라는 것을 상징하거든요.
一乘의 도리. 불교 궁극의 도리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깨달으신 궁극의 경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진리의 가르침이다.’ ←이 뜻을 그렇게 법회 청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금강경에다 적용시키면 금강경의 도리는 모든 생명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성문 대중들에게는 잘 맞는 교설인데, 여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잘 통하지 않는 교설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법화경의 입장에서 보면요.
법화경에는 법화경의 진리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에게 다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諸法實相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고 적용되고 활용되고 전부 우리에게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전부 연관 지어져 있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아수라 노릇을 하든, 지옥 노릇을 하든, 아귀 노릇을 하든, 때로는 우리가 아수라도 되고 아귀도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설사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법화경의 諸法實相의 가르침은 다 적용된다. 해당된다.
제법실상의 이치에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던 제바달다까지도 전부 감쌉니다. 우리 불교도의 원수가 제바달다 아닙니까?
저도 어릴 때 그전에 어떤 스님하고 싸우다가 “저~ 조달이 같은 놈.” 저는 그 욕을 평생 못 잊어요. 어떤 심한 욕보다도 그 욕이 그 당시만 해도 제일듣기 싫었어요.
우리 불자들에게 제일 큰 욕이 “제바달다 같은 놈.” “조달이 같은 놈.” 그 욕이거든요. 그 만치 불교에 철천지한이 서려있는 최고의 원수인데, 그 원수까지도 이 법화경에서는 전부 제법실상의 이치에는 해당되니까 포함시키지 않을 수가 없고, 감싸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끝내는 부처님과의 원결. 우리 모든 불자들 3000년간의 모든 불자들과의 원결을 법화경이 풀어줍니다.
석가모니 스승입니다. 석가모니가 부처된 까닭도 제바달다를 통해서 성불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우리의 은인이다. ←이렇게 해결했다고요.
진정 조달이 하고 “해원결 진언”을 한 것은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이 원결을 다 풀어준 겁니다. 법화경보고 나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된다고요.
그래서 “조달이 같은 놈.” 이라고 해도 욕이 아닙니다.
법화경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결코 욕이 아니라고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 담겨있는 무궁무진한 뜻을 우리가 열심히 受 持 讀 誦 書寫 하면서 개발해내고, 알아내는 것. 이것이 참 우리에게 큰 과제이고 즐거움이기도 한데, “5000 퇴석”이라는 것도 저는 그렇습니다.
불멸 500년부터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서 결국 제바달다 같은 사람도 대승심으로 보살심으로 다 감싸안을 수 있는 길이 비로소 500년 이후부터 열렸고 500년까지는 만고의 원수였었고, 도저히 제바달다 같은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소승적이고 아주 꽉 막힌 생각으로 살았는데, 법화경一乘의 가르침을 통해서 비로소 그 모든 장애물이 다 해소 돼버리고 빙속 와해되어 버리는 가르침이라고 5000 퇴석을 제 나름대로 이해를 해봅니다.
꼭 그렇게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속단하기가 어려운 것이고요.
참고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공부는 科目에 근거하면 五佛章에서 諸佛章에 해당이 되지요.
모든 부처님이 이렇게 가르쳤다. 5불장이 등장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5불장도 결국은 말하자면 제불 · 과거불 · 현재불 · 미래불 · 석가불. ←이렇게 모든 부처님이라는 부처님은 깨달았다고 하면 공히 수용하고 또 인용할 그런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5불장이 법화경에만 있게 된 것이지요.
그래 지금 제불장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중입니다.
53. 舍利弗 是爲諸佛 唯以 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사리불 시위제불 유이 일대사인연고 출현어세
사리불아,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 오직 一大事因緣을 위하는 까닭으로 세상에 출현하시니라.
54. 佛告舍利弗 諸佛如來 但 敎化菩薩 諸有所作 常爲一事
불고사리불 제불여래 단 교화보살 제유소작 상위일사
唯以佛之知見 示悟衆生(유이불지지견 시오중생)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고하사대, 諸佛如來가 다만 보살을 교화하사 모든 有所作.
짓는 바 일은 항상 한 가지 일이다. 唯以佛之知見으로서 示悟衆生.
오직 부처의 지견으로서 중생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55. 舍利弗 如來 但以 一佛乘故 爲衆生說法 無有餘乘 若二若三
사리불 여래 단이 일불승고 위중생설법 무유여승 약이약삼
사리불아, 여래는 다만 一佛乘故로서, 일불승으로서 일체 중생들을 위해서 설법하시고, 無有餘乘 若二若三이니라. 나머지乘인 2승 3승은 없나니라.
無有餘乘 若二若三. 餘乘. 다른 승인, 2승이나 3승은 있을 수 없다.
오직 一佛乘뿐이다. 얼핏 들으면 3승을 배척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되어 있으나, 배척이 아니라 會三歸一이지요. 3승을 모두 융합해서 1승으로 귀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 “바른 수단”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바른 수단 이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가 소기의 목적을 향해서 갈 수만 있다면, 그 방편은 용납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방편을 쓰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방편을 통해서 소기의 목적으로 가지를 않고, 방편이 방편에 그쳐 버린다면 그것은 방편이 아니고 사기지요. 그것은 비불교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실천을 하든 안하든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56. 舍利弗 一切十方諸佛 法 亦如是
사리불 일체시방제불 법 역여시
사리불아, 一切十方 부처님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오로지 인간의 실상. “제법실상” 하니까 조금 한 다리 멀게 느껴지지요. 인간의 실상은 뭐냐? “부처다.”라고 하는 사실. 이것이 일불승 아닙니까?
그 외에 성문 · 연각 ·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 ←이런 별의별 지위 점차를 나열하지만, 그것은 불 승 이라고 하는, 부처의 경지라고 하는 것에 나아가기 위한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고, 방편으로 가설. 예를 들어서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거푸집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가건물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일단 세우는 것이지요.
탑을 세우는데 발받침을 세우고 그 다음에 실다운 탑을 세우는데 탑이 다 완성이 되면, 그 발받침이라든지 가건물은 다 허물어 버린다.
방편이란 그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2승이니 3승이니 하는 것은 그야말로 발받침과 같은 것이지요. 일불승을 드러내기까지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지요. 일불승을 드러내지 않는 방편은 그것은 방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5불장에서 제불장의 이야기가 끝났고,
그 다음에는 제2 過去佛章이 되는 것이지요.
57. 舍利弗 過去諸佛 以 無量無數方便 種種因緣
사리불 과거제불 이 무량무수방편 종종인연
譬喩言辭 而爲衆生 演說諸法 是法 皆爲一佛乘故
비유언사 이위중생 연설제법 시법 개위일불승고
是諸衆生 從諸佛 聞法 究竟 皆得 一切種智
시제중생 종제불 문법 구경 개득 일체종지
사리불아, 過去諸佛이 無量無數方便과 種種因緣과 譬喩와 言辭로서 중생을 위해서 여러 가지 법을 연설하시니, 이 법은 皆爲一佛乘故니라. 다 일불승을 위한 까닭이니라. (제불이 그랬고 과거불도 역시 그렇다.)
이 모든 중생이 諸佛을 쫓아서 법을 듣고 究竟에는 一切種智를 얻느니라.
일체종지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를, 그냥 “지혜” 이렇게 해도 좋습니다. “깨달으신 지혜” ←이렇게 해도 좋은데 그것을 좀 더 세분화해서 이야기할 때 一切智. 또는 一切種智. ←이런 표현을 합니다.
一切智라면 포괄적입니다. 전체적이고요.
예를 들어서 여기에 대중들이 150명 와서 공부하신다면 이것은 一切智가 됩니다.
일체를 한꺼번에 통관해서 보는, 통틀어서 보는 그런 안목이라면 一切種智는 모든 것이 낱낱이 어떻게 존재한다는 것을 그 개별적인 특성까지도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그럼 여기에 150명이 와서 공부한다는 것을 누구누구 와서 공부하느냐? 이것을 환하게 알 수 있으면 그것을 一切種智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가 공하다고 하면 낱낱이 꽃만 공한 것이 아니라, 꽃줄기도 공하고 뿌리도 공하고 꽃을 꽂아놓은 컵도 공하고 꽃을 보는 우리도 공하고, 이 모든 것이 평등하게 공한 것으로 한꺼번에 통틀어서 봐 버리면 一切智입니다.
그런데 꽃마다 다 특성이 있어서 이것이 그 피는 계절도 다르고 꽃피는 형식도 다르고 전부가 다 달라요.
그 개체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개체마다의 특성까지도 꿰뚫어 보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물론 공하고 연기의 입장에 의해서 존재하고, 존재하다가 연기가 마치게 되면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함부로 그렇게 공으로 취급하지 말라 이겁니다. 다 달라요. 그 개별적으로 다른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一切種智입니다.
부처님은 그 두 가지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알면 됩니다.
뒤에 또 나오니까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5불장 중에서 未來佛입니다.
58. 舍利弗 未來諸佛 當出於世 亦以無量無數方便
사리불 미래제불 당출어세 역이무량무수방편
種種因緣 譬喩言辭 而爲衆生 演說諸法 是法
종종인연 비유언사 이위중생 연설제법 시법
皆爲一佛乘故 是諸衆生 從佛聞法 究竟 皆得 一切種智
개위일불승고 시제중생 종불문법 구경 개득 일체종지
사리불아, 未來諸佛이 마땅히 세상에 출현하여 또한 無量無數方便과 種種因緣과 譬喩와 言辭로서 중생들을 위하여 諸法을 演說하시니라.
이 법은 다 一佛乘을 위한 까닭으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究竟에는 一切種智를 다 얻는다.
과거불장이나 미래불장이나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진리와 비 진리를 지난 시간에 조금 언급했지만 깨달음의 경지라고 하면, 석가모니이전이나 석가모니당시나 석가모니이후 지금 3000년 이후 이 순간 이 자리에 누가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의 경지. 또 깨달은 안목으로서 인생과 세상을 보는 것은 동일하다 이겁니다.
그것이 틀리다면, 틀리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지요.
제대로 못 깨달았거나요. 제대로 깨달았다면 그것이 동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이 諸法實相. 인간의 실상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어느 경전에도 없는 五佛章이 등장을 하게 되었지요. 그 다음에 제4 現在佛입니다.
59. 舍利弗 現在十方無量百千萬億佛土中 諸佛世尊
사리불 현재시방무량백천만억불토중 제불세존
多所饒益 安樂衆生是諸佛 亦以無量無數方便 種種因緣
다소요익 안락중생시제불 역이무량무수방편 종종인연
譬喩言辭 而爲衆生 演說諸法 是法 皆爲一佛乘故
비유언사 이위중생 연설제법 시법 개위일불승고
是諸衆生 從佛聞法 究竟 皆得 一切種智
시제중생 종불문법 구경 개득 일체종지
사리불아, 現在十方無量百千萬億佛土中에 諸佛世尊이 多所饒益하야,
많이 이익을 베풀어서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나니, 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無量無數方便과 種種因緣과 譬喩와 言辭로서 중생을 위해서 諸法을 演說하시나니, 이 법은 다 一佛乘을 위한 까닭이니라. (늘 같은 말이지요.)
이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究竟에는 一切種智를 다 얻느니라. 과거불이 그렇고 미래불이 그렇고 현재불이 역시 똑 같습니다.
60. 舍利弗 是諸佛 但敎化菩薩 欲以佛之知見 示衆生故
사리불 시제불 단교화보살 욕이불지지견 시중생고
欲以佛之知見 悟衆生故 欲令衆生 入佛之知見故
욕이불지지견 오중생고 욕령중생 입불지지견고
사리불아, 이 모든 부처님이 다만 보살을 교화하사 佛知見으로서 중생들에게 보이고자하며, 佛知見으로서 중생들을 깨닫게 고자하며, 欲令衆生으로. 또 중생으로 하여금 佛知見에 들어가게 하니, 그래 결국은 開示悟入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開가 생략이 됐습니다만, “示悟入”이렇게만 했지요?
구체적으로 하면 “開示悟入佛知見” 또는 “佛之知見” 佛之知見이라고 갈 之자를 넣으면 글자 숫자가 딱 맞아요. 여기 갈 之자를 다 넣었지 않습니까?
佛之知見 이렇게 했지요? 이것이 법화경의 주된 정신이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보통 이야기도 이 사람에게 이 말하고, 저 사람에게 가서 같은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말이 다르면 실없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당장에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까 저 사람에게는 저 이야기하더니,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당장에... 보통 우리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도 장소 따라서. 날짜 따라서 말이 달라지면 실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물며 만고에 진리를 깨달은 깨달음의 가르침이, 과거 깨달은 사람이 다르고, 현재 깨달은 사람이 다르고, 또 미래에 깨달을 사람들이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말도 아닌 것이지요.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 법화경이 크게 우리의 보통 사람들의 사량과 사고를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5불장이 빛을 보는 것이 또 그런 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제5 釋迦佛입니다.
61. 舍利弗 我今 亦復如是 知諸衆生 有 種種欲 深心所著
사리불 아금 역부여시 지제중생 유 종종욕 심심소착
隨其本性 以 種種因緣 譬喩言辭 方便力 而爲說法
수기본성 이 종종인연 비유언사 방편력 이위설법
사리불아, 我今에, 我라는 것이 석가모니 아닙니까?
내가 지금에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知諸衆生에 有 種種欲과 모든 중생들에게 가지가지 욕망이 있고, 또 深心所著. 겉으로는 중이니까 번듯하고 아주 점잖고, 염불이나 잘하고 참선도 잘하고 그래서 잘 모르지요.
다 도인인 것 같고 어지간히 욕심도 없는 것 같고 그렇지요.
그런데 深心所著은 아무도 몰라요. 저~ 깊은 마음. 深心.
저~ 깊은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의 어떤 用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겁니다.
深心所著을 가지고 있을새 이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그것을 나는 다 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지금에 또한 중생들의 욕망과 深心所著을 알새.
그 本性을 따라 가지고서 種種因緣과 譬喩와 言辭와 方便力으로 而爲說法하노니, 그냥 넘어가도 좋을 텐데, 석가불 입장에 와서는 그만 중생들의 아픈 데를 이렇게 살짝 건드리고 넘어가네요. 이것도 법화경의 妙입니다.
다른 과거부처님. 미래부처님. 현재부처님 다 잘 나가다가 석가모니부처님한테 와 가지고 이렇게 우리 아픈 데를 살짝 건드리고 넘어가는 이것이 참 법화경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어떤 배려라고 할까?
우리를 위한 배려라고 봐야지요. 그러면서 種種因緣 譬喩言辭. 다 같이 언급했습니다.
62. 舍利弗 如此皆爲 得 一佛乘 一切種智故
사리불 여차개위 득 일불승 일체종지고
사리불아, 如此皆爲. 이와 같은 것들이 다 一佛乘과 一切種智를 얻기 위함이다. 一佛乘을 얻고 一切種智를 얻기 위함이다. 무명이 약간 달라서 그렇지, 一佛乘. 一切種智. 이쯤 와서 우리가 정리할 때가 된 것이 一佛乘은 뭐냐? “부처의 삶이다.” 부처의 삶을 제대로 구축을 하면, 경전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가 제대로 성취 했다고 하면 一切種智. 一切智와 一切種智를 체득했을 때, 또 이것은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인데, 갖추고 있는 일체지와 일체종지인데 그것을 아직 꽃을 못 피우고 작용을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약점이랄까?
- 3강-2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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