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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

수선님 2022. 10. 30. 12:31

유교와 분리된 대한민국을 상상하는 건  마치 기독교를 떠난 유럽과 미국 , 힌두교를 떠난 인도를  상상하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어른이 밥 숟가락을 들기전에 나이 어린 사람이 먼저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윗분들의 윤허가

필요한 사회,

연장자 앞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는 건 상상하기 힘든 사회,  술잔에 잔을 부딪힐때는

항상 연장자 보다 밑에 그리고 술을 마실때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시선을 뒤로 하고 먹어야 예의가 있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통성명과 함께 은근 슬쩍 나이로 서열을 가리는 사회 , 그렇게 나이에 따라 형이되고 동생이 되고 누나가 되고 오빠가 되는  급 친족사회는 아마도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일무이 할 것이다.

이렇게 유교는 좋든 싫든 관계없이 우리생활 깊숙히 세세한 행동 하나 하나까지 각자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이렇듯 종교적 토양은 한 민족과 사회의 특성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럼 도대체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유교의 가치관에 함몰되기 시작했을까 ?

유교는 사회사상인가 아니면 철학인가 그것도 아니면 종교인가 ...

절대신 개념도 없고 내세에는 관심도 없으며 인류구원 이라는 거창한 목표도 없이 현실 질서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 다루는 유교는 서양식 잣대에 비추어 볼때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 포함 시키기 무척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유교는 철학이고 사상이고 또 종교이다.

유교가 한자문명권에 미친 영향은 기독교가 서양 사회에 미친 영향력 만큼이나 절대적이다.

이러한 유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불교가 전래된 시기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한국 유교의 역사도 1600여년이 된다.

하지만  유교가 한반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 시절이다.

조선을 세운 지배층들은  조선을 가장 유교적인 국가로 만들려 했다.

그 결과 조선은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인 국가가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유교적인 국가로 간주 된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들이 개신교의 종주국인 미국보다 더 열렬하게 개신교를 신봉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유교의 가부장제는 단순히 가족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하나의 통치 이념이었다.

나라에 왕이라는 권력의  정점이 있다면 각 가정에는 가부장이라는 정점이 있어 왕이 갖는  절대 권력을 집에서는 가부장이 갖게함으로써 간접통치를 하는 것이다.

가부장의 핵심개념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와 제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기 가족만을 우선시하는  가부정적인 집단주의 문화와 서열을 중시하는 권위주의 문화가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한국인들은 강한 가족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여러 공동체를 가족의 연장으로 생각해 부른다.

국가, 관가, 전문가, 화가, 실업가...등 한자의 집가자가 거의 모든 공동체에 쓰인다.

일상적인 용어를 보면 타인과 가까워지면 "한가족이 되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직원을 채용하는 광고문구에도 "함께 일할 가족" 을 찾는다는 문구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강한 가족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우리주의" 의 형성이다.

"우리주의" 란 한국인이 유난히 우리를 밝히고 남을 배척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단어이다.

한국인은 우리라는 단어속 내집단과 남(외집단)을  너무 강하게 나눈다.

그래서 한국인은 우리 그룹안에서는 매우 정이 많고 착한 인간이 되지만 모르는 타인이나 외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냉정하며 때로는 공격적 증오심 마저 갖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정치적 지역감정과 이념적 대결로 악용되어 그마나 작은 나라를  갈기 갈기 찢어 발리고 있다.

"우리가 남인가"  라는 어느 정치인의 표심전략은 이러한 한국인의 우리주의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발언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족은 아버지나 남편 계통의 남성 혈족의 가족만을 지칭한다.

여성은 철저히 여기서도 배제된다.

종치회라는 조직에서 족보를 만들고 조상들 시제를 드리는 민족은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유교가 처음부터 조선에 정착된 것은 아니다.

어떤사상이든  외래사조가 그 나라에 이식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법이다.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긴 하지만 대략 유교가 조선에 완전히 정착된 시기는 조선왕조가 개국한지 200년이 흐른 17세기 즈음으로 판단하는데 일치한다.

정착의 증거로 장례법의 변화를 들 수 있는데 17세기 이후로는 불교식의 화장법이 민간에서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18세기 초부터는 장남의 제사권 독점과 재산권 그리고 재산상속권이 장자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던 시기 이기도 하다.

제사권을 장남이 독점함으로써 조상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권위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초까지만 해도 제사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 봉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조선 중기 이후처럼 양자를 들여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시집 간 딸이 직접 친정 부모를 위해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조선에 유교가 완전히 정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조선조 이전의 여성들은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고  일생동안  가지고 있다가 자기가 원하는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었고 조선초 분재기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아들딸 구별없이 자녀를 출생 순위로 적고 그에 따라 재산이 분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와서는 여성들이 재산을 일절 가질 수 없는 구조로 바뀌어 버린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여성에게 할당된  재산은 없었다.

이렇게 여성이 주류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증거도 조선에 유교가 완전히 정착된 증거라 불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유교적인 가부장 국가로 조선이 태어난 것은 건국후 3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선의 가부장제가 성립된 것은 우리시대로 부터 불과 300년 전의 일로 수천 년의 한국 역사에 비한다면  그 역사가 매우 짦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비교적 빠르게 붕괴되고 있는 것도 이 제도가 생긴 지 300년밖에 안된 비교적 새로운 제도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현대의 가족의 구조는 대가족 중심에서 핵가족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친사촌 간에 교류가 줄어들어 할아버지를 제사 지내기 위해 혈족이 모이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집안의 제사는 이전에는 4대봉사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이제 점차 그 대상이 줄어 2대 봉사 내지 1대 봉사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또한 여권이 신장되면서 여성이 과거처럼 가부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평등한 부부관계를 강력히 원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갈등구조 역시 새롭게 변화게 되는데 며느라와 시아버지 , 장모와 사위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국 가족제도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아 부계의 가통을 잊는 다는 의식도 매우 약해지고 있다.

한국인의 가족제도가 유교의식의 약화와 함께 이전 과는 비교도 안되게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 상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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