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3.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

수선님 2022. 11. 6. 14:23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3.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

"竹林의 숲을 승단에 바칩니다"



 

빔비사라 왕은 생각했다.
"부처님은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지나치게 붐비지 않으며,
좌선하기 적절한 곳에
머물러야 하실텐 데."  <마하박가>

 

<죽림정사 대숲 길>

부처님과 불교가 출세(出世)한 녹야원을 전날에 이어 2002년 4월3일 다시 밟았다. 모든 것은 어제와 똑 같았다. 거대한 다메크 대탑도, 첫 설법이 이뤄진 곳에 있는 다르마라지카 탑 유적도, 아쇼카 석주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녹야원을 돌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석물(石物)을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으며 넓디넓은 유적지를 순례했다.

 


인도 사람들이 나무 그늘 아래 무리 지어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2600여 년 전 부처님의 첫 설법도 저런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다섯 비구가 둘러앉아 법담(法談)을 주고받는 모습이 연상됐다.


첫 설법을 위해, 붓다가야에서 600리나 멀리 떨어진 녹야원까지 혼자 맨발로 걸어간 부처님이었다. "어떻게 설명할까" 내심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녹야원의 첫 설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범천 사함파티의 청(請)을 받고 어렵게 시작했지만 모든 일들이 자연스레 진행됐다.


바라나시 장자의 아들 야사의 출가, 야사 부모의 귀의, 야사 친구들의 출가, 승단의 출범과 전도선언 등등. 그런 후 부처님은 붓다가야의 우루벨라로 돌아갔다. 왜 다시 거기로 갔을까. 성도하기 전 "깨달으면 돌아와 설법하겠다"고 빔비사라왕에게 약속했는데, 라즈기르로 가지 않고 왜 우루벨라로 갔을까.


당시 붓다가야의 종교적 분위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붓다가야는 많은 수행자들이 있던 일대 수행처였다. 녹야원의 첫 설법과 승단 출범에 자신을 얻은 부처님이 "붓다가야의 수행자들을 교화해야겠다"는 평소 생각을 실현하러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붓다가야 상두산 주변의 카사파 3형제를 출가시킨 뒤, 부처님이 라즈기르로 간 것에서 저간의 사정을 유추할 수 있다.


<마하박가>에 의하면 붓다가야로 가던 중 부처님은 향락에 빠진 '지체 높은 30명의 무리들'을 교화했다. 30명이 모두 부인을 데리고 유흥에 빠져있는데, 한 명만 부인이 없어 기녀를 데리고 놀았다. 그들이 술에 취한 사이 기녀가 재물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 30명은 기녀를 찾던 중 부처님을 만났다.

 

"부처님이시여, 한 여인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대들은 그 여인과 무슨 일이 있었느냐."

"재물을 잃어버린 친구를 위해 기녀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들에게 어떤 것이 더 중요하냐.

그대들이 찾고 있는 여인이냐, 아니면 그대들이 찾아야 할 자아(自我)냐."

"부처님이시여, 자아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겠다."

설법을 들은 30명은 "마치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 깨닫고, 구족계를 받았다.


부처님은 다시 유행을 계속해 우루벨라에 도착했다. 당시 우루벨라엔 결발외도(結髮外道)가 살고 있었다. 3형제인 우루벨라 카사파, 나디 카사파, 가야 카사파가 바로 그들. 그들은 각각 500명, 300명, 200명의 결발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부처님은 먼저 우루벨라 카사파의 암자로 갔다.


"카사파야,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는 오늘 하룻밤을 그대의 화옥(火屋)에서 지내고자 한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만, 그곳에 살고 있는 맹렬한 독을 뿜는 흉악하고 신통한 용왕이 당신을 해칠까 걱정됩니다."


부처님이 화옥(火屋)에 들어가자 용은 괴롭고 쓰라린 심정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부처님 역시 신통력으로 연기를 내 뿜었다. 화옥은 금새 마치 이글대며 불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부처님은 용의 불을 소멸시키고, 용을 발우에 담아 우루벨라 카사파에게 보여주었다. "카사파야, 이것이 그대의 용이다. 용의 불은 나의 불로 소멸되었다."


우루벨라 카사파는 "사문의 위력은 진정으로 훌륭하지만,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몇 번의 신통을 경험하곤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 등을 모두 물에 떠내려보내고" 출가해 구족계를 받았다. 강물에 떠내려 오는 제사도구를 본 동생 나디 카사파와 가야 카사파도 전후사정을 듣고 부처님께 출가했다.


결국, 부처님은 카사파 3형제로 대표되는 붓다가야의 수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600리 길을 걸어 되돌아갔다고 생각된다. 나이란자나 강변에 수행할 당시 부처님은 카사파 3형제에 대한 명성을 들었고, 정각을 이루면 이들을 설복 시키리라 마음먹었으리라. 녹야원의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해 어느 정도 '감'을 익힌 부처님은 붓다가야로 돌아와 마침내 카사파 3형제를 출가시켰을 것이다. 3형제와 무리 1000명을 교화시킨 부처님은 상두산에 올라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는 '불의 설법'을 폈다.


부처님이 '불의 설법'을 펼친 상두산엔 녹야원에 오기 전인 지난 3월31일 올라가 보았다. 코끼리 머리를 닮은 상두산 입구엔 작은 연못이 있고, 정산엔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카사파 3형제 중 막내 가야 카사파가 살았던 상두산엔 지금 불교의 '불(佛)'자도 없다. 아니 흔적도 없다. 세상은 여전히 욕망에 불타고 있지만, 상두산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불교를 모르고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없어진 듯했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사라져 버린 인도불교를 찾기 위해 상두산에 간 것은 아니었는데….


상두산에 어느 정도 머문 뒤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라자가하(라즈기르)로 떠났다. 마가다 왕 빔비사라도 부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가다국에 살고 있는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을 찾았다. 가르침을 베풀자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바라문과 장자들은 깨달았다.


귀의한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께서는 어떤 장소에서 지내셔야 할까.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에 바로 그런 곳에 머물러야 하실텐데"(마하박가)라고 생각했다.


궁리 끝에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시여, 벨루 숲(죽림공원이란 뜻)을 부처님이 지도자이신 승단에 승원(僧院)으로 사용하도록 바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아, 나는 승원을 받기로 했다"며 승락했다. 불교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는 이런 인연으로 생겼다.

 

부처님과 빔비사라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 출가해 라자가하에 온 사문 싯다르타를 본 빔비사라 왕이 "나는 그대에게 군의 총사령관 직을 주겠습니다. 많은 재물도 주겠습니다. 내 선물을 기꺼이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행자 된 것은 결코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욕망에는 필경 불행이 뒤따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욕망의 세상을 거부해 버린 행복을 만끽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그지없는 마음의 평안 속에서 말입니다"라며 거절했다.

 

사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 안 왕은 깨끗이 단념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 부처님이 된다면 제일 먼저 저의 나라에 임하여 주십시오." 이때부터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 인연이 마침내 불교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의 보시로 이어진 것이다.

 

<칼란다카 연못> 사진설명: 죽림정사에 있는 연못. 옛날 수행자들은 이 연못의 물을 애용했다. 1956년 복원됐다.

죽림정사. 최초의 사찰인 그곳에 2002년 3월28일 도착했다.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의 깊은 인연이 밴 곳.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200여 명의 행각사문들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 한 곳이자, 부처님이 머물면서 수많은 가르침을 펼친 장소가 바로 죽림정사다. "부처님은 라자가하 칼란다카 죽림원에 계셨다"로 시작되는 많은 경전들은 모두 이곳을 무대로 한 것이다.

 


5세기 초 이곳을 방문한 법현스님이 "옛 왕사성 북쪽을 나가 3백여 보 되는 길 서쪽에 가란타 죽림정사가 있는데, 지금도 존재해 있으며, 스님들이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다"고 묘사해 놓았던 그 죽림정사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땀으로 목욕한 온 몸에 서늘한 기운이 다가왔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서늘한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만들어진 길을 따라 서서히 안으로 들어갔다.

 

<죽림정사에 있는 부처님 상>

깔끔하게 정돈된 칼란다카 연못이 보였다. 사각형으로 조성된 연못 속에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엄청나게 컸다. 밥을 던져 주자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물 속에서 파닥거리는 고기들을 뒤로하고, 죽림정사를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부처님 흔적은 없어 보였다. 대나무 숲길, 설법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부처님, 걸어가는 작은 부처님 상 등이 있을 뿐이었다. 설법인(說法印)을 한 부처님 앞엔 향로가 있었는데, 누가 향을 피운 듯 가느다란 향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간단히 예배하고 대나무 숲길로 향했다. 그곳을 지나 죽림정사 유적지로 추정되는 곳에 올라갔다.


죽림정사 유적지엔 무덤과 잡초만 있었다. 이슬람교도의 무덤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최초의 사찰 자리에 이슬람교 무덤이 있다니…. 일순 마음이 '착찹'해 졌다. 인도 불교유적지를 순례하며 항상 느끼는 마음이 '착찹함'과 '무상감'이지만, 죽림정사 유적에 무덤이 있는 것을 보곤 화가 날 정도였다. "인도불교는 왜 쇠망했을까"가 다시 머리 속에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덤을 감싸고 있는, 흰 페인트가 칠해진 사각형 시멘트를 보며 '화가 난 가슴'만 안고 죽림정사 유적지를 빠져 나왔다. 지혜의 사리풋타와 신통력의 목갈라나가 부처님께 귀의 한 곳이지만, 그곳엔 더 이상 불교가 없었다. 관광객들이 둘러보는 카란다카 연못과 무덤 터로 변한 죽림정사만이 순례객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3.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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