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
前정각산 상두산 나이란자나江 수자타마을
정각의 땅 붓다가야(보드가야. 보디가야). 그곳에서 맞이한 첫 날은 '설레임 바로 그것'이었다. 가슴도 마냥 뛰었다. 대보리사 대탑의 아름다우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을 처음 본 2002년 3월30일 밤엔 잠마저 오지 않았다. 숙소에 와서도 머리 속엔 줄곧 대탑의 용자(容姿)만 어른거렸다. 대보리사 쪽으로 머리 두고 누워도 마찬가지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날 새벽 5시 득달같이 대보리사로 갔다. 대탑이 그대로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마침 스리랑카 스님들이 예불 중이었다. 어제 밤에 이어 다시 1층 법당에 들어가 정중히 삼배했다. 마군(魔軍)들을 굴복시키고 정각을 이룬 부처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중생의 번뇌·고통을 없애줄 부처님이 거기 계셨다. 법당을 나와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며 '파란' 많은 대보리사의 역사를 회상했다. 대탑 바로 뒤에서.
<역사 속의 붓다가야(Buddhagaya Through the Ages)> <붓다가야 대보리사의 역사(Buddhagaya Temple, Its history)> 등에 의하면 붓다가야에 사원이 처음 건립된 것은 기원전 254년 아쇼카왕 때. 아쇼카 왕 순례 이후 참배객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다. 당시의 대보리사는 아마도 대탑이 없는 간단한 형태였을 것이다. 5세기 초 이곳을 방문한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399∼412년 순례)도 <불국기>에서 "부처님이 득도하셨든 곳에는 세 개의 승가람이 있는데 스님들이 살고 있다. 공급이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적고 있을 뿐, 대탑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반면 7세기에 대보리사를 방문한 당나라의 현장스님(629∼645년 순례)은 <대당서역기>에서 대탑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리수 동쪽에 정사(精舍)가 있는데 높이 160 - 170여 척이다. 아래 기단의 너비와 면적은 20여 걸음에 달한다. 층 층으로 이뤄진 감실에는 모두 금상(金像)이 있고 사면의 벽은 빼어난 솜씨로 조각돼 있는데 구슬의 형상이 잇따라 새겨져 있거나, 천인과 선인의 상이 있다. 정사 위에는 아마라카과(보물단지)를 놓았다. … (중략) … 본래 이 정사가 있던 땅에는 무우왕(아쇼카왕)이 먼저 작은 정사를 세웠는데, 후에 어떤 바라문이 이것을 더 넓혀지었다 한다." 굽타왕조가 인도를 통치하던 5∼7세기 어느 때, 대탑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다른 불교유적과 마찬가지로 대보리사 대탑도 이슬람의 침입(1158년)으로 버려지고 황폐화되기 시작한다. 파괴된 채 방치되기 수 백 년. 대보리사는 1810년에야 비로소 세인들의 관심을 끈다. 미얀마의 보다우파 왕이 그 해 사절단을 보냈고, 다음해 왕이 직접 대보리사를 방문한 것. 미얀마 사절단은 1819년 다시 대보리사를 예방했고, 1824년에도 참배했다. 미얀마 사절단이 왔다갔다하자 전부터 붓다가야 주변을 관리하던 힌두교도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원활한 식민통치 전술상 영국이 용인하면서, 대보리사 소유·관리는 이 무렵 힌두교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수십 년 뒤인 1880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 등에 의해 대보리사 일대가 발굴되고 대탑이 수리되면서, 붓다가야는 세계적인 성지로 추앙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891년 스리랑카 출신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등장 "불교도가 대보리사를 관리해야 한다"며 투쟁을 전개, 1953년 5월28일 운영권은 결국 힌두교 측에서 대보리사관리위원회로 넘어가게 됐다. 물론 이것은 '절반의 성공'으로 표현해 맞을 것 같다. 대보리사 '관리·운영권'은 지금도 불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해결해야 될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이란자나 강으로 나아갔다. 고행을 포기한 사문 싯다르타가 목욕한 강. 마침 건기(乾期)라 강물은 없고, 넓은 강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강폭은 족히 1km는 넘어 보였다. 다리가 있었지만, 굳이 강바닥으로 걸어갔다. 싯다르타의 체취를 좀 더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간간이 난 풀을 뜯기 위해 한 무리의 소들이 어슬렁거렸고, 강바닥엔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이것저것 살피는데, 강바닥 모래에 반사된 햇살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린다. 맨살이 드러난 곳은 모두 화끈거렸다.
30분 정도 걸어 건너편에 도착하니 거대한 핍팔라수(보리수)가 반겨준다. 바로 옆에 마을이 있다. 목욕하고 올라오는 싯다르타에게 우유 죽을 공양한 수자타가 살았던 '수자타 마을'이란다.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니 거대한 스투파(탑)가 앞에 나타났다. 우유죽 공양을 올린 수자타를 기념해 세운 수자타 스투파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방인이 낯설지 않은 듯 한 무리의 동네 아이들도 다가오며 대뜸 "루피! 루피!"하고 손을 내민다.
못들은 체하며 스투파로 올라가니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열쇠를 갖고 있다 열어주며 "노 포토"라고 다짐받듯 말했다. "발굴중이라 사진촬영은 절대 안된다"는 설명이었다. "어린애가 열쇠를 갖고 있다니. 이상하다"생각하며 수자타 스투파에 올라섰다.
수자타는 무엇 때문에 사문 싯다르타에게 우유 죽을 공양했을까. 목욕하고 나오는 모습이 성스러워 그랬을까, 아니면 고행으로 야윈 모습이 측은해서였을까. 성도를 이루게 한 '수자타의 공양'은 부처님을 열반에 들게 한 '춘다의 공양'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공양 아닌가. <니다나 가타>에 의하면 수자타는 니그로다 나무에 기원하기를, 결혼 후 첫 아들을 낳게 되면 매년 공양을 올리겠다고 맹세했다.
소원대로 사내아이를 낳자, 바이샤카 달 보름날에 우유죽을 만들어 니그로다 나무 아래로 갔다. 마침 싯다르타가 그곳에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나무신인 줄 알고 공양했다고 한다. 수자타의 공양이 없었다면 싯다르타는 어찌 됐을까.
발굴중인 수자타 스투파는 거대했다. 쌓아올린 벽돌도 엄청났다. "겹겹이 쌓아올렸으니 수 백 년 지난 지금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을 수 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피는데 아이들이 따라와 톡톡 치며 "루피! 루피!"하고 외쳐댔다. 눈 부라리고, 스투파 정상에 올라가니 드넓은 인도의 평원과 전정각산이 보였다. 들판은 무척이나 풍요로워 보였고, 전정각산이 장대한 어깨를 드러내고 들판 위에 누워있는 형국.
곳곳에 부지런히 일하는 인도 농부들이 보였다. 이렇게 넓은 평원을 두고 가난하게 살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맨발이고, 옷차림도 형편없다. 어른들의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왜 이다지도 가난할까. 현실의 가난, 가난에서 파생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인도인들은 그렇게 생천(生天)을 기원하는가. 부처님도 가난이 주는 고통을 알았기에 '윤회의 집'을 부수고자 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뒤로한 채 들판 끝의 '전정각산'으로 갔다.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6년 간의 고행을 버리고 공양을 받은 뒤 싯다르타는 정각할 자리를 찾기 위해 동북쪽 언덕으로부터 이 산에 올랐다. 정상에 이르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산신이 놀라 싯다르타에게 말했다. "이 산은 정각을 이룰 만한 복 있는 땅이 아닙니다"고. 서남쪽으로 내려가던 싯다르타는 거대한 동굴을 보았다. 석실에 자리 잡자마자 "여기는 정각을 이루실 곳이 못됩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4-15리 가면 핍팔라수가 있는데, 그 아래에 금강보좌가 있습니다. 과거·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정각을 이루셨습니다"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정각을 이루기 전에 올랐던 산, 그래서 전정각산이 됐다. 한편 싯다르타가 일어나자 굴에 있던 용이 "여기서 정각을 이뤄 달라"고 간청했다. 기특히 여긴 싯다르타는 그림자를 남겼고, 굴 이름은 자연스레 유영굴이 됐다.
차에서 내려 20분쯤 걸어가니 유영굴이 보였다. 굴 앞에는 티벳 사찰이 자리 잡고 있고, 굴속에는 고행하는 싯다르타 상이 안치돼 있다. 간단히 예배한 뒤 전정각산에 올랐다. 유영굴 주변에만 나무가 있고, 다른 곳에는 나무가 전혀 없는 그런 산이었다. 정상에는 풀조차 찾기 힘들었다. 전형적인 돌산이었다. 정상에는 벽돌로 쌓은 스투파 터가 곳곳에 있는데, 꼭대기마다 한 기씩 7기의 스투파가 있었다 한다. 현장스님도 <대당서역기>에서 "아쇼카왕은 싯다르타가 오르내린 전정각산 유적지에 모두 표식을 세워두고, 스투파를 건립했다"고 적고 있다.
전정각산 정상에서 바라본 붓다가야는 정말 평화로웠다. 서남쪽 저 멀리 대보리사 대탑이 보였다. 잠시 앉아있는데, 태양이 사무치게 뜨거웠다. 발걸음이 절로 산 밑으로 옮겨졌다. "싯다르타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해도 과연 정각을 이루기 힘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행환경은 열악했다. 작은 몸조차 가려줄 나무 한 그루 없고, 기초 체력을 유지해 줄 물도 없다. 그저 돌만 있는 산, 그런데 이런 곳에서 정각을 이룬다. 글쎄, 고행처론 적당해도, 정각의 장소론 적합치 않아 보였다. 싯다르타는 자연스레 붓다가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차에 몸을 싣고, 이런 저런 잡념에 빠져 있는데 앞에 문득 코끼리 머리를 닮은 산이 보였다. "아 상두산!"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가운데 높은 산은 코끼리 머리를, 좌우의 낮은 봉우리는 코끼리 귀를 닮은 산. 지금은 힌두교의 전통적인 성지로 간주되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차를 세웠다. 녹야원에서 첫 설법한 부처님은 다시 우루벨라(붓다가야)로 와 카샤파 3형제를 교화했는데, 막내 가야 카샤파가 바로 이 산에서 살았다. 카샤파 3형제와 제자 천명을 교화한 부처님은 후일 이 산에 와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는 유명한 설법을 그들에게 했다.
지금 바로 그 상두산(가야쉬르사)에 온 것이다. 천명을 앉혀놓고 설법하는 부처님, 설법을 듣고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제자들의 모습이 영상처럼 <마하박가>의 기록과 함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서인가. 가운데 봉우리 정상에 힌두교 사원이 있다는 점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세간은 여전히 욕망 속에 불타고 있고, '불의 설법'으로 중생들을 깨우쳐 준 역사적 부처님은 아니 계신데, 상두산 정상엔 힌두교 사원이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현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상두산을 보고 또 보며, '불의 설법' 말미에 부처님이 외쳤던 "나의 괴로운 생존은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다. 실천해야 할 바를 모두 실천했다. 다시는 괴로운 생존을 받지 않는다"는 게송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래도 '쇠잔한 인도불교의 현실'이 자꾸만 마음을 아프게 했고, 가슴을 짓이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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