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4. 수닷타장자와 기원정사 건립
“억만금 깔면 동산을 내 놓으리”
죽림정사는 불교에 있어 참으로 의미 깊은 곳이다. 최초의 사찰이고, 부처님의 왼팔·오른팔 격인 사리풋타·목갈라나가 여기서 부처님께 귀의했기 때문이다. “둘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제자가 될 것”(마하박가)이라고 부처님이 지적한 것처럼, 이들이 없었다면 인도불교의 발전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수닷타장자와 제타태자는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했다. “기수급고독원이라 하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불설중본기경〉
2002년 3월28일 죽림정사를 처음 본 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죽림정사에 불교가 없다”는 점이 순례객을 수수(愁愁)로움에 빠지게 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죽림정사를 다시 찾았다. 매표소 문이 잠겨있었지만, 담을 넘어 들어갔다. 연못에는 어제처럼 많은 물고기들이 파닥거리고 있었고, 이른 아침이라 덥지는 않았다. 대나무 숲 길을 돌며 사리풋타·목갈라나가 부처님께 귀의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찾은 죽림정사
〈마하박가〉 〈니다나가타〉 〈불설중본기경〉 〈불설보요경〉 등에 의하면 부처님이 라자가하(오늘날의 라즈기르)에 머물 당시, 산자야라는 행각사문이 200(250명이라는 경전도 있음)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산자야와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둘은 “불사(不死)의 경지에 먼저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알려 주어야 한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어느 날 아침 앗사지 비구가 발우를 들고 라자가하 거리에서 걸식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훌륭한 몸가짐 그 자체였다.
앗사지와 대화를 나눈 사리풋타는 목갈라나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둘은 200여명의 행각사문을 데리고 부처님께 귀의했다. 둘이 합류함으로서 제자들 숫자는 1,260명으로 늘어났다. 바라나시에서 귀의한 60명, 카사파 3형제 무리 1000명, 사리풋타·목갈라나 무리 200명이 바로 그들. 수많은 한역 경전 첫머리에 나오는 “어느 때 부처님은 (어디에서) 큰 비구 무리 1,250명과 함께 계셨다…”는 표현은 이 숫자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초기불교 토대 마련에 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는 지적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후일 교단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칼란다카 연못을 돌며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부처님께 귀의해 오던 정경을 상상해 보았다. 상수제자를 맞이하는 부처님의 환한 모습, 힘껏 달려와 부처님께 귀의하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그때도 죽림정사엔 밝은 태양이 비치고 있었을 것이다. 두 명의 상수제자가 일으킨 불교는 그러나 인도에서 거의 소멸된 상태. 다른 곳은 고사하고 죽림정사에도 남아 있지 않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지만….
부처님 당시 죽림정사는 쉬라바스티(사위성)의 기원정사 창건과도 연결된다. 〈출라박가〉(율장 소품) 〈불설중본기경〉 등에 따르면 코살라국 쉬라바스티의 부호 수닷타 장자는 사업상 라자가하에 들렀다. 부처님이 출세한 소식을 친구 칼란다 장자에게 들은 수닷타는 부처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듣고 귀의했다. 그리곤 “오직 원하옵나니. 부처님께서는 쉬라바스티에 왕림하시어 한 때나마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부처님의 허락을 받은 그는 쉬라바스티로 돌아온 즉시 정사 건립에 적합한 곳을 물색했다. 쉬라바스티 서남쪽 1km 지점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코살라국 프라세나지트 왕의 아들 제타 태자의 땅 ‘제타바나’가 바로 그곳. 장자가 땅을 살려고 했으나 태자는 팔지않았다.
쉬라바스티로 간 부처님
밀고 당기는 긴 대화 끝에 태자는 “억만 금을 가져다 동산에 깐다면 비로소 내놓으리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동산을 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는데, 그것이 제타바나의 가격이 되고 말았다. 수닷타 장자가 황금을 가져다 동산 전체에 깔기 시작한 것. 이를 본 제타 태자는 감동해 황금을 깔다가 채 못 깐 부분은 태자 자신이 부처님에게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수닷타 장자와 제타태자 는 정사를 지어 승단에 바쳤다.
부처님이 가장 많이 머무른 장소 중 한 곳인, 제타(한역 祈陀) 태자의 원림(園林)에 있는 정사란 뜻의 기원정사는 이렇게 해 탄생됐다. “한 때 부처님은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로 시작되는 경전들은 모두 여기서 설해진 것들이다.
죽림정사에 오기 전인 2002년 3월15일 오전10시 럭나우 기차역에서 내려 곧장 쉬라바스티로 출발했다. 럭나우 역에서 다시 5시간 동안이나 차를 탔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불교미술의 좋은 소재가 됐고, 제타태자와 수닷타 장자의 원력이 깃든 기원정사를 꼭 보기 싶었기 때문에. 오후 3시경 마침내 기원정사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100루피.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제타바나 비하라(기원정사)에 들어갔다. 첫 인상은 무척이나 상큼했다. 주변의 드넓은 평원엔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조차 없는데, 기원정사엔 거대한 나무들이 무성했다. 수행자가 거주하기엔 최적의 장소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경내엔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이 1863년 발굴한 유적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을 위해 건립한, 최초의 거실 간다쿠티가 저 멀리 보였다. 마침 태국에서 온 스님들이 예배 드리고 있었다. 낭랑한 독경소리를 음미하며 간다쿠티에 도달했다. 벽돌로 복원한 조그마한 방이 있고, 방 앞에는 원추형의 탑이 놓여 있었다.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온 한 무리의 신도들이, 부처님이 주석하셨다는 방에 신발 벗고 들어가 정중하게 삼배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들어가 경건하게 삼배했다. 부처님이 앉아 계신 듯 했다.
간다쿠티에 있는 향로에 향을 피웠다. 가느다란 연기가 실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상념(想念)도 피어올랐다.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이 404년경 방문할 당시 “기원정사를 둘러싸고 98개의 승원이 세워져 있다”(〈불국기〉)고 할 만큼 이곳은 번성했다. 그러나 630년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 기원정사는 이미 황폐한 상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의정스님이 방문한 7세기 말엔 다시 부흥되고 있었다.
부처님 거실 간다쿠티 등 복원
그러다 12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침공하자 인도 내 다른 불교유적처럼 기원정사도 파괴돼 폐허로 변했다. 이름도 이슬람식인 사헤트로 바뀌었다. 수백년 뒤인 1863년 커닝햄의 발굴로 남북 350m, 동서 230m에 달하는 현재의 기원정사 유적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꾀죄죄한 몰골을 한 어린이가 다가와 “루피! 루피”! 하는 바람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찬찬히 기원정사를 둘러보았다. 그때까지도 어린이는 따라오고 있었다. 손에 루피를 쥐어주자 그제야 사라졌다. 기원정사에 들어온 지 3시간. 따가운 태양이 서서히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붉은 구름이 인도 대지에 어둠을 만드는 것을 보며 기원정사를 빠져나왔다. “유적만 있을 뿐 ‘불교’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기원정사의 첫 인상은 ‘상큼함’에서 어느 새 ‘아쉬움’으로 변해 있었다.
● 사리풋타·목갈라나 귀의
행각사문 200명과 함께
라자가하에서 탁발하던 앗사지 비구를 본 사리풋타가 물었다. “벗이여, 당신은 누구에게 출가하였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나는 부처님에게 출가하였으며,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사리풋타는 계속해 “그대의 스승은 무엇을 설하십니까”며 물었다.
앗사지는 대답 대신 게송을 읊었다.
“모든 법은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니/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네./
모든 법의 소멸 또한/ 그와 같다고 위대한 사문은 설하셨네.”
게송을 들은 사리풋타는 “먼지와 때를 여읜” 법안(法眼)을 얻었다. 즉시 목갈라나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리풋타의 환한 모습을 본 목갈라나는 전후사정을 듣고 “벗이여, 우리 부처님 곁으로 갑시다. 부처님만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벗이여, 200명의 행각 사문들이 우리를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정을 알려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합시다”고 이야기했다. 행각 사문들에게 말하자 그들도 두 사람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산자야에게도 사정을 설명했다. 산자야는 “안 된다. 가지 마라. 우리 셋이 함께 이 무리를 보살피도록 하자”며 오히려 둘을 설득하려 했다. 결국 200명과 함께 둘이 떠나자 산자야는 뜨거운 피를 토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200명의 사문들과 오는 것은 본 부처님은 말했다.
“비구들아, 저기에 오고 있는 두 명은 콜리타(목갈라나의 속명)와 우파팃사(사리풋타의 속명)다.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나의 한 쌍의 제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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