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5. 퍼지는 가르침 ① 쉬라바스티
‘사위성 기적’으로 이교도 제압
‘대화’·‘설득’이라는 무기를 들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님이 직접 다닌 지역을 지금 그릴 수 있을까. 초기불전에 나타난 지명들을 연결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맛지마 니까야〉 등에 의하면 부처님 활동은 앙가·마가다·밧지·말라·코살라·카시(바라나시)·밤사 등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멀리 쿠루·판차라까지 미쳤다. 설법은 사밧티(코살라국 수도)·라자가하(마가다국 수도)·베살리(현재의 바이샬리. 밧지국 수도)·카필라바스투(석가족 수도)·코삼비(밤사국 수도) 등에서 주로 했다.
대화·설득으로 전도
물론 쉬라바스티(사위성)·라자가하(현재의 라즈기르)에서 부처님은 특히 많은 전도를 했는데, 부처님이 정력적 활동을 했던 지역을 아울러 ‘불교중국(佛敎中國)’으로 학자들은 표현한다. “수계할 때 필요한 10명의 스승을 얻을 수 있는 중앙지역”이란 뜻의 ‘불교중국’은 바로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교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진 라자가하·쉬라바스티에서도 초기엔 반발이 심했다. 라자가하는 세력을 뻗치고 있던 자이나교 중심지였고, 바라문 세력과 자이나교·아지비카교도 들도 쉬라바스티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설중본기경〉·〈출라박가〉·〈잡아함경〉 등에 따르면 라자가하에서 성취를 거둔 부처님은 아나타핀디카(수닷타) 장자의 요청에 따라 쉬라바스티에 설법하러 갔다. 쉬라바스티는 그러나 라자가하 보다 다른 교파의 힘이 훨씬 셌다.
2002년 3월17일 서서히 따가워지는 햇살을 뚫고 기원정사로 향했다. 기원정사 앞에는 각 나라가 경쟁하듯 사찰을 건립하고 있었고, 이미 건립돼 자태를 뽐내는 사찰도 적지 않았다. 사찰들이 즐비한 지역에서 약간 떨어진 들판에,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었고, 표지판 앞에 작은 동산 같은 것이 보였다. 스투파인 것 같은데, 세월이 지나 흙무덤으로 변한 듯했다. 곧장 올라갔다. 앞에서 볼 때는 낮았는데, 막상 올라가니 상당히 높았다. 헐떡거리며 정상에 도착했다. 사방은 온통 들판이었다. 넓디넓은 평원이 동서남북 사방에 쫙 퍼져 있었다. 한 군데 숲이 무성한 곳이 있기에 안내인에게 물으니 “기원정사 유적지”라 했다.
하루 만에 망고나무 성장시켜
스투파 유적지는 마침 발굴 중이었다. 발굴하는 사람에게 “무슨 스투파냐”고 물었다. “쉬라바스티 기적을 기념해 건립한 스투파로 추정된다.”는 답이 날아왔다. 세월이 흘러 스투파가 흙더미처럼 변한 것이다. 쉬라바스티에서 망고나무를 하루 만에 성장시키고, 천 명의 부처님을 출현시킨 것이 ‘쉬라바스티의 기적’. 다른 수행자 교단을 집단적으로 개종시키거나, 기존 수행자 집단이 조직적으로 방해할 때 부처님은 방편으로 기적을 사용했다.
부처님이 쉬라바스티에 도착할 당시 그곳엔 이미 자이나교·바라문교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당서역기〉 등에 보이는, 둥근 박을 배에 넣고 임신한 것처럼 가장해 부처님에게 달려든 ‘친차 여인의 이야기’ 등을 통해, 기성 교단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서 살인마 앙굴리마라도 교화했다.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있을 때, 앙굴리마라라는 흉악한 도둑이 쉬라바스티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처님은 탁발하러 사위성에 들어가 앙굴리마라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말렸지만 부처님은 계속 갔다. 앙굴리마라는 걸어오는 부처님을 죽이려 했으나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의 자비에 굴복, 흉기를 버리고 출가했다.
강한 햇살을 받으며 쉬라바스티의 기적을 기념해 건립한 스투파에서 내려왔다. 기원정사 뒤편에 있는 앙굴리마라 스투파로 향했다. 앙굴리마라 스투파 옆엔 수닷타 장자 집터에 세워진 스투파가 있다고 〈대당서역기〉에 기록돼 있는데, 지금도 있는지 궁금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과연 두 기의 스투파가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현지인들이 “앙굴리마라 스투파와 수닷타 장자 스투파”라고 설명했다.
앙굴리마라 스투파는 상당히 높았다. 오래 전 조성된 스투파가 아직 남아있다니. 붉은 벽돌로 쌓은 벽은 여전히 튼튼해 보였다. 스투파 밑 부분에 들어갔다. 휴지가 가득했지만, 한 사람이 들어갈 통로가 있고, 바람도 잘 들어왔다. 한 참을 그렇게 있다, 수닷타 스투파로 갔다. 주변에 있던 인도 어린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따라다녔다.
천 명의 부처님 출현
시선을 받으며 수닷타 스투파에 올라갔다. 넓은 평원이 동쪽으로 펼쳐져 있고, 서남쪽으론 잡목이 무성했다. 넓은 평원이 사위성터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코살라왕 프라세나지트와 왕비 말리카 부인이 떠올랐다. 벌써 2500년 전의 인물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까지 인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했다. 사위성의 장엄을 상상하며 성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위성은 마침 발굴 중이었다. 사위성 터를 지나 최초의 비구니 사원 왕원정사(라자카라마 비하라) 유적지로 갔다. 아무 것도 없었다. 벽돌조각과 깨진 그릇 조각들만 즐비했다. “여기까지 온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안내인이 말했다. 사위성 동쪽에 있었던, 사위성의 므리가라 마트리(녹자모) 부인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해 지었던 ‘동원녹자모강당’에도 가보았다. 왕원정사 유적지보다 훨씬 컸다. 역시 벽돌로 쌓은 담, 깨진 그릇 조각들만 즐비했다.
‘유적’은 있어도 ‘불교’는 없어
한때 성(盛)의 극(極)을 달렸던 사위성도 사라지고, 불교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부처님과 관련된 유적만 파편처럼 남아, 찾아오는 순례객을 반길 뿐이었다. 한낮이 가까이 오는지 햇살은 한층 따가웠다. 동원녹자모강당 옆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설법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수닷타장자, 앙굴리마라, 므리가라 마트리 등등. 지금은 아무도 없고, 오직 유적만 남아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니, ‘세월 무상’에 순례 객의 발걸음은 절로 무거워졌다. 인간 세상에 ‘괴로움’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망했을까. ‘괴로움의 멸(滅)’을 가르친 부처님 교법이 왜 인도에서는 없어지고, 인도 밖에서는 세계종교로 성장했을까. 사위성 위 하늘에 핀 흰 구름처럼 상념은 끝없이 가지를 쳤다. 상념이 무슨 소용 있으랴. 현실은 ‘불교’도 ‘인걸(人傑)’도 없는데….
● 부처님 전도의 秘法
“해·달이나 불의 광명이 조그맣게 시작하여 점점 넓어지는 것처럼” 부처님 가르침도 녹야원의 첫 설법이래 인도 대지에 그렇게 퍼져 나갔다.
부처님의 ‘45년 전도’와 이어진 제자들의 전법(傳法)은 다른 종교의 그것과 달랐다. 항상 중생 속에서, 무력과 유혈(流血)이 아닌 오직 대화와 설득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 했다.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지친 몸을 이끈 채 고군분투하며, 태어난 사람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괴로움’을 멸하는 방법(가르침)을 전파했다.
물론 사람의 심리를 통찰하고 듣는 사람의 능력에 맞는 설법을 한 것도 부처님만의 독특한 교화법이었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 혹은 환자의 병에 따라 의사가 약을 주는 것에 비유해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하는데 ‘키사고타미의 예’가 대표적이다.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키사고타미에게 부처님은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의 겨자씨를 구해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했다.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키사고타미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가르침을 부처님은 자연스레 각인시키고, 키사고타미를 출가시켜 ‘괴로움’을 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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