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마음에게 묻다
(33인 고승들이 들려주는 행복의 법칙)
문윤정 글· 사진
눈이 깨달았으면 손도 깨달아야 한다
금정산 입구에 들어서자 한여름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산마루에 금빛을 띤 우물이 있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그 우물은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물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물고기와 황금 우물의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있는 범어사. 불이문을 지나 삼층석탑이 있는 보제루 앞마당에 들어섰다. 한낮의 절 마당은 너무나 고요해서 나뭇잎이 두런거리는 소리, 잠자리가 허공을 낮게 비행하는 소리, 나비의 날갯짓까지 들이는 듯했다.
무비 스님의 거처에 들어서자‘염화실’이라는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댓돌에는 잘 닦인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 있고, 넓지 않은 정원 한 켠에는 능소화가 꿈꾸듯 피어 있었다. 스님의 거처인 염화실은 인터넷 전법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스님은 2004년에는 인터넷 카페‘염화실’을 개설했는데, 현재 회원 수가 1만 5천 명이 넘고 하루 이용자가 600~700명 정도 된다. 카페 염화실에 들어가면 《법화경》,《금강경》,《유마경》,《화엄경》,《임제록》,《신심명》,《증도가》등 불교의 주요 경전에 관한 정보가 모두 올려져 있다. 또 스님이 직접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데 전 세계에서 접속이 가능하다고 하니 이곳이 바로 한국 불교의 염화실이요 세계 불교의 염화실이 아닌가 싶다.
“카페 염화실에 내가 평생 공부해온 것을 다 모아놓았어요.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둔 것이지요. 인터넷 방송을 듣고 그 반응을 곧바로 올리는데, 참 재미있어요. 인터넷이 바로 화장 세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백 가지 풀로 만들었다는 귀한 차를 마시며 계속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스님은 병을 앓기 전 불교TV에서 《법화경》강의를 했는데, 이야기는 그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스님은 지금 5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데 병이 불교와 인생에 대한 안목을 바꾸어 놓았을 정도로 큰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통증이 너무 심해서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하루에는 수차례 반복했어요. 나는 이것을 두고 농담처럼 부처님의 6년 고행과 달마대사의 9년 면벽하고 맞먹는다고 말해요. 병원에서 대수술을 하고 6개월 정도 입원을 했어요. 반년이 훨씬 넘는 고통의 시간은 평생을 두고 공부해온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침내 퇴원을 했지만 극심한 통증은 계속되었고, 그런 고통 속에서 회향을 생각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불교에 관한 지식과 공부를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 회향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카페 염화실이었다. 카페 운영에 매달리다보면 정해진 시간 없이 아무 때고 찾아오는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스님은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인불(人佛)사상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자긍심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존중하게 되고 세상은 일체 평등임을 절감하게 된다.
“인불사상이란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사상입니다. 사람이 곧 부처님이며,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자는 것이지요.《화엄경》에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中生 是三無差別)’ 이라는 말이 있어요. 사람의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차별이 없고 모두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사람이 곧 부처님이요. 중생이 또한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중생이요, 부처님의 또한 사람이며,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이란 것도 마음이요, 마음이란 것도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스님의 인불사상을 통해서 상대방을 부처님처럼 공경하며 찬탄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문득 휘트먼의 시 <보다 감명 깊은 가르침>이 떠올랐다.
당신은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에게 공손하고 당신에게 길을 비켜 주는 그런 사람들의 가르침을 배웠습니까?
당신은 당신을 멀리하고 당신에게 거만하여 당신을 무시하며 당신과 길을 차지하려는 싸우는 사람들의 위대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했습니까?
평등을 주장했던 휘트먼은 오늘은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공경받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우리는 과연 자타(自他)를 공경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스님은 “인불사상을 자신 있게 주장하는 근거는 주로《화엄경》과 《법화경》과 조사어록에 찾는다”고 했다. 특히 스님은 《임제록》에 서 큰 득력을 한 셈이라면서 임제 스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이다.
스님은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보살임을 알아야한다”면서 인용한 구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불자라면 당연히 성인을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천불(千佛), 만불(萬佛)을 찾고 천 보살, 만 보살을 부릅니다. 그리고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면서 천배, 만 배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측은하게도 보입니다. 성인이라고 해서 그토록 좋아하면 악을 싫어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과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그렇게 들끓고 있으면 도(道)와는 멀어지지요. 무착 스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가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거나 몇 년에 거쳐 일보일배(一步一拜)의 고행을 하면서 찾아갑니다. 하지만 임제 스님은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으며, 이런 별난 행위는 벌써 틀린 짓이라 합니다. 부처를 찾고 보살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다. 임제 스님은 정말 문수보살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눈앞에서 지금 활용하고 있는 그것을 보라고 했어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너무도 구체적으로 분명한 그것, 그대가 참으로 살아 있는 문수보살이라 했습니다. 임제 스님은 수천 년의 인류사에 떠오른 천 개의 태양과 같아요.”
무비 스님은 《임제록》을 ‘인간 해방의 대선언서’ 이며 수억만 가지의 방편을 다 걷어치우고 진실만 드러낸 말씀이라고 했다.
스님은 허리가 아파서 30분 이상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힘들고 실내에서도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등 병고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을 향한 법문과 경전 연구는 더욱 열정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스님은 천상 타고난 대강백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편안함을 원하는 육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강인한 의지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불법(佛法)을 만난 것이며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한다. 스님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통감》등을 다 떼었다. 그리고 열네댓 살 때 이웃 마을에 있는 덕흥사에 갔다가 동자승이 읽은 《초발심자경문》한 구절을 읽고 발심했다. 반출가승처럼 덕흥사를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공부하다보니 불교의 깊이 빠져들었고, 큰스님 밑에서 정식으로 공부하고 싶어 출가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스님은 “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불국사로 출가하여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한 주 정도 있다가 사미계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제대로 된 경전 공부를 위해서 범어사로 왔다. 기초반이라 할 수 있는 치문반에 들어가야 하는데, 치문반이 없어 서장반에 들아갔다.
월반을 한 셈이다. 서장반에서 함께 공부한 도반으로는 통광 스님과 무진장 스님이 있다.
“치문을 다 뗀 스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힘들어서 은사인 여환 스님께 강원 생활을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중이 결제를 했으면 해제를 하고 나가야지. 결제 때는 부모가 죽어도 나가는 아니다’라고 하시데요. 그 말씀을 듣고 힘들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더니 도반들과 실력이 비슷해지더군요.”
범어사 강원에서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은해사에서 각성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고, 졸업은 해인사에서 했다. 이것은 스님의 뜻이 아니라 그때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어서 학인으로 차출되어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관응 스님, 탄허 스님, 운허 스님등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로부터 경전을 배우고 전강 스님, 효봉 스님, 성철 스님 등 제방의 훌륭한 선지식들로부터 선을 배웠으니 스승 복이 참으로 많은 분이다. 스님은 이렇게 여러 스승들에게서 배운 지식을 1976년 통도사 강주를 시작으로 수십 년간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스님은 경학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선(禪)에도 혜(慧)가 밝은 분이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일주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곧바로 선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그때부터 10년의 세월 동안 걸망 지고 당대의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했다. 스님은 “참선과 경전 공부하는 것을 나누어 생각한 적이 없다. 지금도 내 마음에서는 선방 생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다.
스님은 화두 참선이 좋긴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렵다고 했다.
“수천수만 가지의 정보가 넘치고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산만한 이 시대에는 산만함을 몰아내는 방편이 필요해요. 내가 보기에는 듣고 감동할 수 있는 불조(佛祖)의 말씀이 지름길이에요. 화두 의심이 저절로 되어야 하는데, 안 되니까 염불처럼 외워버리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선도 염불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경을 읽어나간다면 맛도 느끼고 감동하면 마음이 움직여서 행으로 실천하고 그러면 깨달음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설하신 것을 반복해서 합송하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했어요. 불교에서는 듣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문사수(聞思修)가 기본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다보면 지혜가 생기고 그러다보면 스스로 해답을 얻게 되지요.”
사람들이 공부가 된다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인생에 불교 공부가 무엇보다 가치가 있고, 화두 공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공부가 된다고 했다.
스님이 불교적 가치관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화엄경》의《보현행원품》이란다. 훌륭한 꿈과 희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줄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삶이 빛나게 될 것이라면서 <보현행원품>은 불교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 중 불자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몇가지 서원의 의미를 여쭈었다.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미혹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미혹으로 업을 짓고 업장 때문에 고통이 따르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말하는 죄업이란 독립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 또한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만 알면 죄없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없을 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입니다.”
스님은 <보현행원품> 중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라’ 는 덕목 또한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으로서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이 잘하고 훌륭한 점을 깎아내리거나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속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불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의 공덕을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은 아름다워요. 남이 한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찬탄하고 기뻐하는 습관을 기르고 생활화해야 합니다. 남의 잘한 일을 찾아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진심으로 기뻐한다면 순간순간이 기쁜 순간이며 매일 매일이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스님은 《화엄경》의 결론이자 불교의 결론인 <보현행원품>은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쉽다면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를 권했다. 눈이 깨달았으면 손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철학이다.
무비 스님은 《화엄경》,《법화경》,《유마경》,《금강경》,《금강경 오가해》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스님의 손을 거치면 아무리 어려운 경전도 뜻이 정확하면서도 평이한 문체로 탈바꿈하여 대중에게 다가온다. 구마라집 스님은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면서 “잘 조율된 현악기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번역이란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구마라집 스님의 말씀처럼 무비 스님의 번역은 문체가 유리하여 경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평생을 존경받는 학자이자 강백으로서 살아왔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여쭈었다. 스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수연무작(隨緣無作)이라, 세상사 모든 것을 물 흐르듯이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인연을 성숙시켜 산다면 세상과 크게 다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인연을 따를 줄 알아야 해요.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 연기의 도리 아닙니까? 제가 강단에 서게 된 것도 마치 송곳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삐죽이 나오듯이 저절로 그리 되었지요. 인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왔을 뿐 달리 비결은 없어요.” 스님은 흐르는 물처럼 살라고 강조한다. 그 말에는 ‘인연 따라 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물의 본성을 배우라’ 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물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을뿐더러 깨끗하다 더럽다는 분별없이 모두 품어 안고 흘러간다. 스님은 물처럼 분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부처로 알고 대하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내 눈에는 나쁘게 비칠지라도 모두가 부처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묵묵한 열정이 불가(佛家)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우리 모두는 ‘사람이 곧 부처’라는 인불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감염되는 일만이 남아 있다. 매일 밤 부처님을 안고 자고 매일 아침 부처님과 함께 일어나는 그 짜릿함을 경험하고 싶은가? 답은 인불사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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