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경 해설

원각경 문수보살장과 인지법행

수선님 2022. 11. 13. 12:27

원각경 문수보살장과 인지법행

 

명문을 주옥같다고 말한다. 이 원각경의 문수보살장이 그러하다. 한 글자마다 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의미가 무한대로 확장한다. 정독을 권하며, 번역하고 해설한다.

원각경은 난해하다. 어렵다고 말하지 않고, 어째서 난해하다고 말하는가? 어렵다는 말을 더 어렵게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어째서 난해한가? 우리 범부의 인식 범위를 완벽하게 벗어나기 때문이다. 범부를 벗어나 삼현십성 또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수행의 입문에 들어서면, 첫째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최후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이다. 부처의 과위, 곧 불과이다. 바로 원각경 문수보살장이 그 불과를 보여준다.

 

나는 논문을 한권 번역했을 뿐이고, 어떤 경문의 전권을 번역한 일은 없다. 기본방침은 직역이고, 의역은 고려한 사실이 없다. 그런데 지난 화엄경 여래출현품 중에 성정각 편을 번역할 때 부득이 일부를 의역했다. 지금 이 문수보살장도 의역을 피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 어째서 그러할까?

번역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이 하는 것이 원칙이다. 가령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번역할 때, 영미인이 한국어를 배워 한글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고 나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휘의 취사선택이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불경은 대부분 천축의 삼장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물론 구마라집 삼장의 경우 뛰어난 제자들의 조력을 받았지만, 현장법사의 번역과 비교하면 정확한 의미의 전달에 많은 차이가 있다. 유마힐소설경과 설무구칭경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글은 원각경 문수보살장을 번역하고, 함허스님의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설의’와 감산스님의 ‘원각경직해’를 의거하여 해설했다. 문수보살장의 핵심은 인지법행이다. 이 때문에 제명을 ‘원각경 문수보살장과 인지법행’이라 호칭한 것이다. 이 글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원각경 서분

2. 문수보살의 질문과 부처님의 찬탄

3. 일체 여래의 인지법행

4. 무명과 공화의 기멸

5. 정각수순과 인지법행

6. 게송

7. 원각보살장 삼관

8. 결어

 

1. 원각경 서분

경은 서분과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서분은 그 경의 유래와 인연을 서술한다. 원각경 서분은 아래와 같다.

 

경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가고, 삼매를 바로 수용하시니, 일체 여래도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신심과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다.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 대보살마하살로 더불어 십만 보살이 함께하시니, 그 이름은 문수사리보살과 보현보살 보안보살 금강장보살 미륵보살 청정혜보살 위덕자재보살 변음보살 정제업장보살 보각보살 원각보살 현선수보살 등이라 일컬으며, 상수보살이 되어 모든 권속들로 더불어 다 삼매에 들어가 여래의 평등한 법회에 함께 머무셨느니라.”(如是我聞 一時婆伽婆入於神通大光明藏三昧正受 一切如來光嚴住持 是諸衆生清淨覺地 身心寂滅平等本際 圓滿十方不二隨順 於不二境現諸淨土 與大菩薩摩訶薩十萬人俱 其名曰 文殊師利菩薩 普賢菩薩 普眼菩薩 金剛藏菩薩 彌勒菩薩 清淨慧菩薩 威德自在菩薩 辯音菩薩 淨諸業障菩薩 普覺菩薩 圓覺菩薩 賢善首菩薩等 而爲上首 與諸眷屬皆入三昧 同住如來平等法會)

 

해설: 범부가 갖고 있는 눈과 귀 등 육근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미세먼지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아침이나 저녁에 동쪽이나 서쪽의 창문에 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통하여 일렁거리는 먼지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경도 또한 그러하다. 고인의 주석을 의거하여 그 대의를 파악할 수 있다. 이에 함허스님의 원각경설의와 감산스님의 원각경직지를 의거하여 해설하고자 한다.

 

함허설의: 만물을 축양畜養함을 장藏이라 이른다. 이 장은 포섭의 뜻이 있고, 출생의 뜻이 있으니, 곧 각체를 가리킨다. 각체를 가리킨다고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무엇인가? 이 각체는 모든 공덕이 온축한 곳이고, 갖가지 광명이 뒤좇아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삼매정수란 것은 곧 이 각체가 외연을 상대하지 않고 허명하게 홀로 원조하는 때이다. 이른바 장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이 허명하게 홀로 원조하는 각체와 함께 수순하고 안주함을 말한다. 이 허명하게 홀로 원조하는 장 가운데는, 유독 여래만 수순하고 안주할 뿐만 아니라, 일체여래도 광명을 주고받아 서로 장엄하며, 함께 주지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직 일체제불이 함께 주지할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도 또한 분수 밖에 일이 아니다. 단지 신심身心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장 가운데 수순하고 안주할 수 없을 뿐이다. 이 장 가운데 있는 신심은 본래 저절로 적멸하다. 신심의 행적行迹으로 이를 바라보면 곧 성인과 범부가 다른 듯하나, 적멸의 체상으로 이를 바라보면 바로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다. 이는 평등본제이니, 곧 주변함용하고 원융무이하는 경계이다. 제불도 이 가운데 수순안주하고, 적정을 여의지 않으며, 인연에 수응하여 정토를 나타낸다. 십만 보살은 반려가 된다. 이 십만이 각기 권속과 함께 모두 삼매에 들어가고, 제불의 묘경을 함께하는 것이다.(物所畜曰藏 有含攝義 有出生義 卽指覺體也 指覺體而言此者 而此覺體衆德之所蘊 而通光之所從現故也 三昧正受者 卽此覺體不對外緣 虛明自照之時也 所謂入者 與此虛明自照之體 隨順安住之謂也 而此虛明自照之藏中 非獨如來隨順安住 一切如來交光互嚴 所同住持之處也 非獨佛佛所同住持 一切衆生亦非分外 只爲身心之所碍 不能於中隨順安住 於此藏中所有身心本自寂滅 以身心之迹而觀之 則聖凡似異 以寂滅之體而觀之 則生佛平等 而此平等本際 卽周遍含容圓融無二之境也 佛於此中隨順安住 不離寂定應緣現土 菩薩十萬而以爲伴 而此十萬各與眷屬 皆入三昧同佛妙境也)

 

경문: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가고 삼매를 바로 수용하시니, 일체 여래도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니라.”(入於神通大光明藏三昧正受 一切如來光嚴住持)

 

감산직지: 이는 경을 설한 곳이다. 부처는 삼신이 있으니, 이른바 법신과 보신 화신이다. 의지하는 정토도 또한 삼토가 있으니, 이른바 적광토와 실보장엄토 그리고 방편유여토이다. 법신불은 적광토에 의지하고, 보신불은 실보토에 의지하니, 곧 노사나불이 화장토에 주지하고, 지상보살과 함께 화엄경을 설했다. 화신은 바로 서가불이다. 인간이 의지하는 영산이나 사위성의 정사 등 처소이고, 인천 등을 위하여 삼승법을 설했다. 지금 이 경을 설한 곳을 대신통광명장이라 말한 것은 바로 상적광토이고, 법신이 의지하는 곳이다. 삼매라 말한 것은 여기 말로 정정이라 이르고, 정수란 것은 바로 정정 가운데 수용하는 것이다. 그 뜻은 이 경이 바로 법신과 보신이 동체인 법보불이 설하신 바이고, 정정정수는 바로 법락을 자수하는 곳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일체 여래도 광명으로 장엄하고 주지한 것은 법성토를 말하는 것이니, 바로 제불이 증득한 상적광토이며, 광명으로 장엄하고 여타 보물로 장엄한 것이 아니다. 이 적광토가 바로 법신불의 안택이고, 이 때문에 주지한다고 이르며, 곧 이 설법한 처소는 진토를 의지한 것이다. 바로 타불의 여타 처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니, 법을 드러냄이 최고로 수승하기 때문이다.(此說經處也 佛有三身 謂法報化 所依土亦有三 謂寂光實報莊嚴及方便有餘 法身佛依寂光土 報身佛依實報土 即盧舍那佛住華藏土 與地上菩薩說華嚴經 化身乃釋迦佛 依人間靈山舍衛精舍等處 爲人天等說三乘法 今說經處言大神通光明藏者 乃常寂光土 是法身所依 言三昧此云正定 正受者乃正定中受用 意顯此經乃法報同體之佛所說 正定正受乃自受法樂之處也 一切如來光嚴住持者 言法性土 乃諸佛所證常寂光土 以光爲嚴 非餘寶物莊嚴也 以此寂光乃法身之安宅 故云住持 即此說處依眞 便非他佛餘處可比 顯法最殊勝也)

 

경문: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고, 신심과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며,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니라.”(是諸衆生清淨覺地 身心寂滅平等本際 圓滿十方不二隨順)

 

감산직지: 이는 적광토를 말하니, 바로 중생과 부처가 평등한 실제이다. 이른바 제불의 안택이니, 바로 중생이 본래 있는 미혹하지 않은 각지覺地이다. 이는 진망불이眞妄不二의 진경을 드러낸 것이고, 이는 적광토의 진경을 말한 것이니, 바로 제불과 중생의 이러한 몸과 이러한 마음이 모두 적멸평등의 실제와 동일하다. 이는 체상이 심원하기 때문이다. 시방세계에 원만하다는 것은 이른바 체상용의 용이고 대방광의 광이니, 그 묘용의 원만함을 말하면, 시방세계를 안에 넣어서 에워싸고, 광대하여 밖이 없다. 불이수순不二隨順은 글이 도치되었다. 응당 수순불이隨順不二라 해야 한다. 이른바 일체 성인과 범부는 모두 이 가운데로 돌아가면 평등한 일제이니, 이 때문에 불이에 수순하신다고 한 것이다.(此言寂光 乃生佛平等之實際 謂諸佛之安宅 即是衆生本有不迷之覺地 此顯眞妄不二之眞境也 此言寂光眞境 乃諸佛衆生 若身若心 皆同寂滅平等之實際 此體深也 圓滿十方 謂用廣 言其用圓滿 含褁十方 廣大無外也 不二隨順文倒 應云隨順不二 謂一切聖凡 皆歸此中平等一際 故云隨順不二)

 

해설: 고어에서 자루 또는 주머니 척褁은 과裹와 그 뜻이 같다. 위 글에는 함척시방含褁十方이라 하고, 보안보살장에는 원과삼세圓裹三世라 쓰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모두 쓰고 있다. 함척시방을 직역하면 “시방세계를 자루 안에 넣어둔다.”라고 할 수 있고, 함과시방이라면, “시방세계를 안에 넣어서 에워싼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시방세계를 안에 넣어서 에워싸고, 광대하여 밖이 없다.” 후구에 의하면 전구는 미세한 세계를 말한다. 곧 하나의 미진 안에 넣어서 에워싼다는 뜻이다. 원과삼세도 또한 그러하다. 일념 안에 삼세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선남자여, 한 세계가 청정하기 때문에 많은 세계가 청정하고, 많은 세계가 청정하기 때문에 이와 같으며, 더 나아가서 허공에 다하고, 삼세를 원만히 에워싸며, 일체가 평등하고, 청정하여 부동하니라.(善男子 一世界清淨故 多世界清淨 多世界清淨故 如是乃至 盡於虛空 圓裹三世 一切平等 清淨不動)

 

경문: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於不二境現諸淨土)

 

감산직지: 위의 불이경계는 바로 제불이 법락을 자수하는 곳이니,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는데, 어떻게 주반의 구분이 있는가? 만일 주반이 없다면 설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으니, 곧 설법할 일도 없다. 지금 ‘불이의 경계를 좇아서 모든 정토를 나투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자수용토에서 타수용토를 나툼을 현시한 것이니, 바로 지상보살을 위하여 자성법의 보토를 설한 것이니, 이 가운데 바로 설자와 청자가 있다. 그러나 이 보토 중에 비록 설자와 청자가 있겠지만, 여래는 오히려 삼매에 있고, 일찍이 출정하지 않았거늘, 어찌 설자가 있으랴.

그 뜻은 이 경이 바로 법신여래가 설한 법임을 현시하고, 심의의식心意意識의 경계를 여읜 체상을 현시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는 바로 여래의 최고 수승한 청정선이니, 전혀 다른 경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능가경 중에 법신이 설법하여 바로 법으로 증불하고, 이 경은 처소로 증불한 것이다. 두 경을 합쳐서 자세히 보면 진실로 심원한 지취가 있다. 이는 여태껏 이르지 못한 것이니, 청컨대 이를 깊이 살펴보시라.(上不二境 乃諸佛自受法樂之地也 以無身心之相 何有主伴之分 若無主伴 無說無示 則無說法之事矣 今言從不二境現諸淨土者 正顯從自受用現他受用土 乃爲地上菩薩 說自性法之報土 此中乃有說聽 然此土中 雖有說聽 而如來尚在三昧 未曾出定 何以有說 意顯此經乃法身如來所說之法 顯示離心意意識境界相 此正如來最勝清淨禪 殊非他經可比也 楞伽經中 法身說法 乃以法證佛 此經以處證佛 二經合觀 良有深旨 此從來所未達者 請深觀之)

 

경문: “다 삼매에 들어가 여래의 평등한 법회에 함께 머무셨느니라.”(皆入三昧 同住如來 平等法會)

 

감산직지: 모두 삼매에 들어갔다고 말한 것은 부처는 곧 법신을 여의지 않는 보상報相이고, 토土도 바로 적광을 여의지 않는 보토이다. 하물며 법신불이 스스로 삼매에 들어가 자성을 설하신 법이랴. 어찌 청중이 산심으로 들어갈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반드시 삼매에 들어가고, 연후에 이 평등법회에 동주할 수 있다.(言皆入三昧者 以佛乃即法身之報相 土乃即寂光之報土 況佛自入三昧 說自性法 豈有聽衆散心而可入耶 故必入三昧 然後可同住此平等法會也)

 

해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에 들어가시니라,”(如是我聞 一時婆伽婆入於神通大光明藏三昧正受) 바가바는 법신불이다. 법신불의 일체삼매 중에 근본삼매가 바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이니 곧 광명삼매이다. 함허스님과 감산스님은 들어가는 대상을 신통대광명장으로 한정하고 삼매정수를 따로 해석했다. 그런데 나는 붙여서 해석고자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첫째 신통대광명장은 삼매의 이름이고 정수가 바로 삼매이기 때문이며, 둘째 들어가는 당체도 삼매이기 때문이다. 곧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신통대광명장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수는 어떻게 해석하야 옳은가? 만일 정수가 없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신통대광명장삼매가 된다. 그런데 삼매 다음 정수가 있어서 문제이다. 어떻든 삼매정수도 또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법신불은 체용이 모두 광명이다. 그러므로 광명삼매는 체용을 겸유한 삼매 중에 삼매이기 때문에 삼매정수라 한 것이다. 둘은 사언으로 맞추기 위하여 중복한 것이다.

일체여래의 법신불도 또한 오로지 광명 한가지로 장엄할 뿐이다. 이 경사에 어찌 중생이 빠질 수 있는가? 이곳이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기도 하다. 이 근본각지根本覺地는 보광명지이고 보광명근본지이다. 바가바와 일체여래 그리고 일체중생 셋 중에 하나도 광명을 여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중생의 신심과 일체여래의 적멸이 평등본제이고, 또는 평등한 본제이다. 이 평등을 형용사로 쓸 수도 있고, 명사로 쓸 수도 있다. 평등이 바로 본제이기 때문이다. 이 평등과 본제 또는 평등본제가 바로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는 주체이며, 일체 정토를 나투시는 불이의 경계도 또한 평등본제이다. 불이가 곧 평등이다.

“신심과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다.” 또는 “신심이 적멸하여 평등한 본제이다.”(身心寂滅平等本際)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전자를 취하고, 위에서 “일체중생의 신심과 일체여래의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다.”라고 해석하여 평등한 본제의 주체를 중생과 여래로 보았다. 만일 후자를 취하면, 평등한 본제의 주체를 몸과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문수보살의 질문과 부처님의 찬탄

문수보살의 질문과 부처님의 찬탄은 그 대의가 동일하다. 아래 함허스님의 글은 문수보살장 전체에 대한 개설槪說이다.

 

함허설의: 측량할 수 없는 것을 묘妙라 말하고, 회중會衆의 으뜸을 수首라 말한다. 이른바 묘수妙首란 중덕을 온축하고 드러내지 않으니, 그 신위神威를 측량하지 못하고, 만 가지 변이變異에 처하여 굽히지 않으니, 그 고덕高德을 쳐다볼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십만 보살 중에 유독 문수로 하여금 교법을 일으키게 한 것은 무엇인가? 문수는 지혜를 법위에 맡기는 분이시다. 무릇 지혜는 만행의 선봉이고, 구경에 이르는 묘법이다. 만행은 이 지혜가 없으면 모두 유루를 이루고, 구경도 이 지혜가 없으면 모두 마군의 종자를 이룬다. 그래서 이르기를, “만행 중에 낱낱 행마다 이 군왕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이 견해를 짓지 않으면 선경계라 일컫고, 만일 이 견해를 지으면 곧 군사群邪를 받는다.”라고 한 것이다. 견해를 짓지 않는 이유는 지혜의 위력 때문이다. 부처님이 원각을 닦는 이들로 하여금 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먼저 지혜를 의지하여 인행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문수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고, 먼저 여래의 인지법행을 천명한 것이니, 이 인지법행은 바로 이른바 신해이다. 먼저 반드시 신해한 연후에 바야흐로 인행을 일으켜 수행하고, 증각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수가 가장 먼저 질문을 일으킨 자가 된 이유이다. 이에 게송으로 이른다.

 

여래의 인지법행을 알고자 하는가?

문수장의 문답을 취하여 살펴보시라.

법공을 명백히 깨달고 법공도 또한 잊으라.

이로부터 우치를 바꿔서 각황을 이루리라.(不測曰妙 衆元曰首 所謂妙首者 蘊衆德而不露 神不可測 處萬變而不屈 高不可仰之謂也 菩薩十萬特令文殊起敎者 文殊以智寄位者也 夫智萬行之先鋒而畢竟所造之妙也 萬行非此皆成有漏 畢竟非此皆成魔種 所以云 萬行中一一 不可無此君 又云不作此解名善境界 若作此解則受群邪 所以不作解者 由智之力也 佛欲令修圓覺者 先依智而起行故 令文殊發問 先明如來因地法行 因地法行卽所謂信解也 先須信解然後 方能起修趣證也 文殊所以最先發問者 以此頌曰 欲識如來因地行 看取文殊所問章 了悟法空空亦忘 從此轉愚成覺皇)

 

해설: 문수를 묘수라 말하고, 묘길상이라 말하며, 묘덕이라 말하기도 한다. 묘수를 빌려서 문수를 해석한 것이다. 기교起敎나 기위寄位는 경을 해석할 대 쓰는 술어이다. 필경은 구경과 같고, 여기서는 구경각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진실로 단 하루도 이 사군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이를 만하다.”(眞可謂一日不可無此君也) 여기서 차군은 대나무를 의미하지만, “만행 중에 낱낱 행마다 이 군왕이 없어서는 안 된다.”(萬行中一一 不可無此君) 이 차군은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군왕이라 해석했다.

“이 견해를 짓지 않으면 선경계라 일컫고, 만일 이 견해를 지으면 곧 군사群邪를 받는다.”(不作此解名善境界 若作此解則受群邪)라는 구절의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능엄경에 “성인의 마음이란 생각을 내지 않으면 선경계라 일컫고, 만일 성인이란 견해가 있으면 바로 군사를 받느니라.”(不作聖心名善境界 若作聖解即受群邪)라는 구절은 있다.

 

경문: 이때 문수사리보살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양발에 정례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며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원컨대 이 회상에 청법하러 온 모든 대중을 위하여 여래께서 본기의 청정과 인지의 법행을 설하시고, 그리고 보살들이 대승 중에 청정심을 일으키고 모든 병을 멀리 여의는 법을 설하시며, 미래의 말세 중생 중에 대승을 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주소서.” 이러한 말씀을 올리고 나서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세 차례나 간청하였으며, 마치자마자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於是 文殊師利菩薩 在大衆中 即從座起 頂禮佛足 右遶三匝 長跪叉手 而白佛言 大悲世尊 願爲此會 諸來法衆 說於如來 本起清淨 因地法行 及說菩薩 於大乘中 發清淨心 遠離諸病 能使未來 末世衆生 求大乘者 不墮邪見 作是語已 五體投地 如是三請 終而復始)

 

함허설의: 제불의 출세는 본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홍원은 본래 대비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무릇 법요를 청시하고자 함에 반드시 먼저 대비라 호칭한다. 필경에 대대하여 본기라 말하고, 염습에 대대하여 청정이라 말하며, 과위에 마주 대하여 인지라 말하고, 진로업용에 대대하여 법행이라 말한다. 대개 원조하여 신해하면 곧 본기인지本起因地가 이미 이루어지고, 필경에 응당 과위를 증득하는 것이니, 또한 반드시 염습을 등져야 청정하고, 업용을 뒤집어야 법행이 된다. 청정심을 일으킨 이는 본래 있는 각이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지만, 단지 망상으로 인하여 증득하지 못할 따름이다. 이미 이와 같은 줄을 알면 또한 마땅히 염원하기를, “내가 부처님과 다른 이유는 다만 망상의 허물 때문이다. 반드시 습기를 등지고, 잡염을 다스리며, 혁고종신革故從新하여 청정한 근원을 회복하리라.”라고 하라. 이와 같이 염원을 내면 청정심을 일으켰다고 일컫는다. 모든 병을 멀리 여읜다고 한 것은 법신을 손상하는 병이 한 가지가 아니니, 그래서 수많은 처방으로 대치하라 이른 것이고, 끝없이 벗어나서 남음이 없기 때문에 멀리 여읜다고 이른 것이다. “미래 말세중생 중에 대승을 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주소서.”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만일 남을 제도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제도해야 한다. 스스로 피안에 이르지 못하면 어찌 타인을 건너 줄 수 있으랴. 그래서 먼저 보살을 위하여 인지법행을 설해주시기를 청하고, 다음에 자기도 제도하고 타인도 제도하는 방법을 청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 차례나 간청하였으며, 마치자마자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라는 것은 말씀을 마치고 다시 간절히 바라는 것이니, 법을 중시함을 표한 것이다.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고, 감응이 지극하면 신속히 수응하느니라.(諸佛出世本爲度生 度生洪願本由大悲故 凡欲請示法要 必先稱大悲 對畢竟言本起 對染習言淸淨 望果位言因地 對塵勞業用言法行 蓋圓照而信解 則本因已成 畢當證果 亦必背染習而淸淨 飜業用爲法行也 發淸淨心者 本有之覺與佛無殊 但以妄想而不證得 旣知如是亦當作念 我所以異於佛者 但以妄想之垢也 必須背習治染革故從新 以復淸淨之源也 如是作念 名發淸淨心也 遠離諸病者 戕害法身 病非一種 所以云諸多方對治 脫盡無餘故云遠離 能使等者 若欲度人必先自度 自未得度焉能度人 所以先爲菩薩 請說因地法行 次請自度度人之方也 作是語已等者 語已是勤 以表重法 水澄月現 感極應速)

 

감산직해: 이는 바로 진청하는 말씀이다. 질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질문이다. “여래의 인지발심은 어떤 법에 의지하고, 어떤 행을 닦아야 성불할 수 있습니까?” 둘째 질문이다. “현재 보살이 대승 중에 이미 청정한 원으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단지 어떻게 용심하고 수행해야 정지견을 얻으며, 사견의 병에 떨어지지 않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개시를 받으면 곧 미래 말세의 중생 중에 대승심을 일으킴이 있는 이들로 하여금 바로 현재 설한 법문을 의지하여 수행하게 하면 곧 사견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비록 현재 회중을 위하여 질문한 것이지만, 실제는 다분히 미래의 근기를 위한 것이니, 이는 비원의 마음 때문이다.(此正陳請辭也 問有二意 一問 如來因地發心 依何等法 修何等行 而得成佛 二問 現在菩薩 於大乘中 已發清淨願成佛度生之心 但不知如何用心修行 得正知見 不墮偏邪之病 若蒙開示 則使未來末世衆生有發大乘心者 即依今日所說而修 則不墮於邪見矣 此雖爲現在而問 其實多爲未來之機 此悲願之心也)

 

해설: 일승 경전은 어렵다. 그러나 문장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 용어가 어렵다. 용어만 정확히 안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력으로도 모든 경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 위 질문 중에 본기청정과 인지법행이 난해하다.

위 설의를 인용한다. “필경에 대대하여 본기라 말하고, 염습에 대대하여 청정이라 말하며, 과위에 마주 대하여 인지라 말하고, 진로업용에 대대하여 법행이라 말한다.”(對畢竟言本起 對染習言淸淨 望果位言因地 對塵勞業用言法行)

필경과 본기, 과위와 인지가 한 짝이 되고, 그리고 염습과 청정, 진로업용과 법행이 한 짝이 된다. 이 중에 본기나 인지 진로업용 법행 등은 매우 낯설다. 먼저 법행은 원각경의 전용어이다. 이를 화엄경은 여법수행(如法修行) 의법수행(依法修行) 칭법수행(稱法修行) 전법수행(傳法修行) 문법수행(聞法修行) 득법수행(得法修行) 수법수행(隨法修行) 등 4언으로 표현한다. 3언으로 표기하면 여법행(如法行) 의법행(依法行) 칭법행(稱法行) 등이 될 것이다. 인지법행은 인행시의 여법행 또는 칭법행이다. 달마대사의 사행론 중에 마지막이 칭법행이다. 진로업용은 번뇌악업煩惱惡業을 말한다.

필경과 과위는 동일한 경계이고 보면 본기와 인지도 또한 동일한 경계로 볼 수 있다. 특히 본기청정은 본기무명과 대비하여 구명할 수 있다. 원각경 정제업장보살장과 이에 대한 직지의 해설을 인용한다.

 

경문: “무엇 때문인가? 무시이래로 있는 본기무명이 자기의 주재자가 됨으로 인하여 일체중생은 태어날 때부터 지혜안이 없으니, 몸과 마음 등의 체성이 모두 무명인 것이다.”(何以故 由有無始本起無明爲己主宰 一切衆生生無慧目 身心等性皆是無明)

 

감산직지: 이는 미민의 근본을 징석한 것이다. 본기무명은 이른바 최초일념의 불각인 생상무명이다. 법신은 아상이 없는데, 일념무명을 인하여 본지법신本地法身을 미혹하고 아타나식을 이루므로 아상의 근본이 된다. 이로부터 모두 무명이 용사하며, 이 때문에 “자기의 주재자가 된다.”라고 이른 것이다. 나란 것은 주재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무시이래로 지금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모두 무명이 주재하니, 이것이 아상이다. 설령 등각위에 이미 돌아왔을지라도 여전히 생상무명을 타파하지 못하면 이숙식이 아직 공적하지 못한 것이니, 모두 아상에 속한다.(此徵釋迷悶之根本也 本起無明 謂最初一念不覺生相無明也 法身無我 由一念無明 迷本法身 成陀那識 爲我相根本 自此皆是無明用事 故云爲己主宰 我者主宰義 謂從無始至今 一向皆是無明主宰 是爲我相 自等覺已還 未破生相無明 異熟未空 皆屬我相)

 

해설: 징석은 선징후석先徵後釋이니, 먼저 추궁하고 다음 해석한다. 자문자답의 형식을 취한 선문후답先問後答을 말한다. 주로 “무엇 때문인가?”(何以故) 이하의 형식을 취한다.

본기무명은 곧 근본무명 중에 최초일념을 말한다. 감산스님은 이를 생상무명이라 호칭한다. 생주이멸 사상 중에 첫째가 생상이다. 이를 취하여 생상무명이란 용어를 감산스님이 창작한 것이다. “무성無性과 요연了緣 그리고 진지眞智”란 제명의 글에서 생상무명을 자세히 설명했다.

본기무명과 대대하는 본기청정은 무엇인가? 본기청정은 바로 청정법신 중에 최초일념을 말한다. 다시 해석한다. 본기청정의 본기는 처음 일으킨다는 뜻이고, 청정은 청정심이다. 청정심을 처음 일으키니, 곧 정각을 성취하는 초발심이다. 본기청정을 알지 못하면 인지법행을 할 수 없다. 처음 청정심을 일으킨 이후 수행하는 것을 인지법행이라 한다. 십이유지 중에 순행하는 유전문을 따르면 중생이 되고, 역행하는 환멸문을 따르면 성불한다. 본기청정 인지법행은 환멸문에 배대할 수 있고, 본기무명은 유전문에 배대할 수도 있다. 이 인지법행은 문수보살장의 핵심이다.

 

경문: 그때 세존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옳고 옳도다. 선남자여, 그대가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여래 인지의 법행을 잘 묻고,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대승 중에 청정심을 내게 하며, 그리고 말세의 일체중생 중에 대승을 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바로 주지하게 하고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구나.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을지니라.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설하겠노라.” 그때 문수사리보살이 성교를 받들고 기뻐하며, 모든 대중들과 잠자코 경청하니라.(爾時 世尊告文殊師利菩薩言 善哉善哉 善男子 汝等乃能爲諸菩薩 諮詢如來因地法行 [令諸菩薩於大乘中發淸淨心] 及爲末世[及令末世]一切衆生求大乘者 得正住持不墮邪見 汝今諦聽當爲汝說 時文殊師利菩薩 奉教歡喜 及諸大衆默然而聽)

 

해설: 원문 중에 []의 글은 함허스님의 견해를 따라서 보완하거나 수정한 것이다. 이를 의거하면 앞과 뒤의 문맥이 매끄럽다.

 

함허설의: 바로 주지하게 한다는 것은 원각체 중에 체성과 체상이 함께 잠기어 보이지 않고, 백비百非가 모두 끊어지며, 성상이나 유무 등의 변견에 장애가 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각성을 수순하니, 바로 주지하게 하는 이유이다. 이에 반하면 곧 사견의 구렁텅이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한다.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을지니라. 등의 이하는 현재는 이 회상을 위하지만 멀리는 말세를 위하여 인행을 개시하고 인행의 근본을 삼도록 한 것이다. 위로는 세존의 뜻에 맞고, 아래로는 중생의 기의機宜에 합하니, 옳다고 칭찬하고 설법을 허락하신 이유이다. 달은 사사로이 비춰줌이 없지만 정수에 외곬으로 나타나고, 부처님의 법음은 지극히 공정하지만 난심에는 들어가지 않으니, 경계하고 자세히 듣게 하는 이유이다. 환희는 그 법희를 말하고, 묵연은 그 선열을 말하니, 안으로 법희선열을 품고, 부처님의 미묘한 설법을 들으니, 환희하고, 잠자코 경청한다고 말한 것이다.(得正住持者 圓覺體中 性相俱沈 百非斯絶 不爲性相有無等見所障 一向隨順覺性 所以得正住持也 反是則未免墮於邪見坑也 汝今諦聽等者 現爲當會 懸爲末世 開示因行 令爲行本 上稱尊懷 下合機宜 所以稱善許說 月無私照 淨水偏現 法音至公 不入亂心 所以誡令諦聽 歡喜言其法喜 黙然言其禪悅 內懷法喜禪悅 聽佛微言 所以云 歡喜黙聽)

 

해설: 청법자의 질문 요지를 설법자가 거듭 거론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청법대중을 각성시키고, 다음 청법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방편이며, 또한 이미 제기한 선문과 곧이어 드러날 후답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형식상 문답에 선후가 있지만, 실제는 문답에 선후가 없다. 선문과 후답이 계합하면, 또는 선문과 후답에 청법자가 계합하면 평등하여 일제이기 때문이다.

 

3. 일체 여래의 인지법행

경문: “선남자여, 무상법왕은 대다라니문이 있으니 이름이 원각이며, 일체 청정한 진여와 보리 열반과 바라밀을 밖으로 드러내 보살을 가르쳐 주시니라.”(善男子 無上法王有大陀羅尼門 名爲圓覺 流出一切清淨眞如 菩提涅槃及波羅密 教授菩薩)

 

함허설의: 대大는 곧 체상용 삼대의 대이다. 다라니는 바로 이른바 상대이니, 대방광 중에 방方의 뜻을 포함한다. “일체 청정한 진여와 보리 열반과 바라밀을 밖으로 드러내 보살을 가르쳐 주시니라.” 이는 곧 이른바 용대이니, 대방광 중에 광의 뜻을 포함한다.

“다라니는 어째서 체상용의 상이라 일컫고, 어째서 대방광의 방이라 일컫는가?”

“다라니라는 말에는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범어를 그대로 두고 번역하지 않았다. 굳이 이를 번역하면 여기 말로 총지라 이르니, 진사塵沙의 덕용을 총섭總攝하고 억지憶持함을 일컫는다. 또한 능지라 이르고, 다시 능차라 이르기도 하니, 능지는 곧 일체 선법을 호지하고, 능차는 바로 일체 악법을 차폐한다. 진사의 덕용을 총지하니, 이는 상대이고, 중선을 호지하고 제악을 차폐하니, 이는 대방광의 방이 되는 이유이다.”(大卽體相用三大之大也 陀羅尼卽所謂相大也 而含方義 流出一切淸淨眞如菩提涅槃 及波羅密 敎授菩薩 卽所謂用大也 而含廣義 陀羅尼 何名爲相 何名爲方 陀羅尼 言含多義故 存梵不譯 强飜之則此云摠持 塵沙德用 摠而持之之謂也 亦云能持 亦云能遮 持則持一切善法 遮則遮一切惡法 摠持塵沙德用 此相之大也 持善遮惡 此所以方也)

 

해설: 글을 많이 읽은 선비도 갈지之자에 막히는 수가 있다고 한다. 위 지지之之가 그러하다. 모두 대명사인데, 앞은 진사덕용을 말하고, 뒤는 진사덕용 총이지지(塵沙德用 摠而持之)전체를 말한다. 지위之謂는 위지謂之가 도치되었다. “진사의 덕용을 총섭하고 억지함을 일컫는다.”(塵沙德用 摠之而持之謂之也)

 

함허설의: “일체 청정한 진여 등의 법을 유출하여 보살을 가르친다고 하니, 어째서 이름을 체상용의 용이라 하고, 어째서 이름을 대방광의 광이라 하는가?”(流出一切淸淨眞如等法 敎授菩薩 何名爲用 何名爲廣)

“위망에 대비하여 진실이라 말하고, 변이에 대비하여 여여라 말하니, 진여는 위망을 버리고 변이를 융회하는 지남이다. 번뇌에 대비하여 보리라 말하고, 생사에 대비하여 열반이라 말하니, 보리와 열반은 번뇌를 돌이키고 생사를 여의는 과법이다. 번뇌 곧 다스릴 진로는 그 수가 8만4천에 이르고, 바라밀은 바로 그 잡염을 전변시키는 묘방이다. 이는 모두 지악지선止惡持善과 사사귀정捨邪歸正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이와 같은 등 무량한 묘용을 유출하니, 이는 체상용의 용대用大이다. 이로써 보살을 가르치면 근기마다 포섭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대방광의 광이 되는 이유이다.”(對僞言眞 對變言如 眞如 是去僞妄融變異之指南也 對煩惱言菩提 對生死言涅槃 菩提涅槃 是轉煩惱離生死之果法也 煩惱所統之塵勞 數盈八萬四千 波羅密是轉彼雜染之妙方也 此皆不出止惡持善舍邪歸正之義也 流出如是等無量妙用 此用之大也 以此敎授菩薩 無機不攝 此所以廣也)

이와 같은 무량한 덕상과 이와 같은 무량한 묘용은 모두 체상을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이는 체상용의 체와 대방광의 대가 되는 이유이다.(如是無量德相 如是無量妙用 皆依體而有 此所以體大也)

각覺이 각이라 하는 이유이니, 이와 같은 삼대를 구족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원각이라 한다. 이 원각은 바로 출전出纏한 최청정각이니, 오직 부처님만이 이를 감당하며, 이 때문에 이르기를, “무상법왕은 대다라니문이 있으니 이름이 원각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알라. 오수증화悟修證化를 뛰어넘어 궁극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분이시니, 이는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원각이다.(覺之所以爲覺 具如是三大故 名爲圓覺 此覺乃出纏最淸淨覺也 唯佛當之 故云無上法王 有大陀羅尼門 名爲圓覺 故知歷悟修證化而無所不極者 是佛所有之圓覺也)

무릇 이른바 문이란 것은 천리를 마주 대하고 말하는 문이 있고, 당실을 마주 대하고 말하는 문도 있다. 당실을 마주 대하고 말하는 문은 종천지심從淺至深을 이른 것이고, 천리를 마주 대하고 말하는 문은 종본지말從本至末을 이르는 것이다. 무릇 만경의 파도는 대해를 기인하고, 천차만별의 샛길은 일문을 기인한다. 그러하면 지금 이른바 문이란 것은 종본지말을 이른 것이니, 원각이 중덕의 본원이 되고 만행의 근원이 됨을 비유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 수증하는 방편과 교수하는 법문이 이 원각을 말미암지 않고 건립된 것은 없다. 이는 원각이 문이라 하는 이유이다. 이 문은 몰량절애沒量絶涯하기 때문에 대大라 말하고, 삼대를 구족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말하며, 허명적조하기 때문에 각覺이라 말한 것이다.(凡所謂門者 有望千里而言者 有望堂室而言者 望堂室而言者 從淺至深之謂也 望千里而言者 從本至末之謂也 夫萬頃之波本於大海 千差之路根於一門 則今所謂門者 從本至末之謂也 喩圓覺爲衆德之本 萬行之元也 故一切修證方便 敎授法門 莫不由是而建立也 此圓覺之所以爲門也 此門沒量絶涯故曰大 具足三大故曰圓 虛明寂照故曰覺)

 

감산직해: 이는 본기인지를 바로 현시한 것이다. 여래의 인지는 오로지 원각 일법을 표기하여 인행의 근본을 삼고, 이에 이를 원각이라 호칭한다. 다라니문이라 한 것은 무엇인가? 범어 다라니는 여기서 총지라 이르니, 이른바 일체법을 총섭하고 무량한 뜻을 억지하는 것이다. 이 원각을 십법계 대총상법문체로 삼고, 일체 성인과 범부, 의보와 정보, 미혹과 대오, 원인과 결과는 모두 이 원각일심을 의지하여 건립하는 것이다. 한 법도 구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총總이라 말하고, 인과가 털끝만큼도 벗어나지 않고 손괴되지 않기 때문에 지持라 말한다. 일체 성인과 범부는 이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호칭을 문이라 한다.(此直示本起因地也 如來因地 獨標圓覺一法 而爲行本 然稱此圓覺 爲陀羅尼門者 梵語陀羅尼 此云總持 謂總一切法 持無量義 以此圓覺 爲十法界大總相法門體 一切聖凡依正迷悟因果 皆依此圓覺一心 而爲建立 以無一法而不具故曰總 因果纖毫不失不壞故曰持 一切聖凡無不由之故稱爲門)

유출이란 곧 이를 인하여 건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각체는 제불의 법신이고, 중생 본각의 심지이다. 비록 물들여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청정이라 말하고, 종래로 허망하지 않고 전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여라 호칭한다. 단지 무명으로 장폐되어 나타나지 않을 따름이다. 제불여래는 인지에서 이 본각의 진심을 의지하고, 시각의 지혜를 일으켜 무명을 남음이 없이 끊으며, 시각과 본각이 합일하여 이름을 구경각이라 한다. 보리의 과위를 얻기 위하여 적멸일심에 환귀하니 이름을 원적이라고 하고, 바로 열반이라 호칭하며. 제불의 과덕을 아는 것이니, 모두 이 원각일심을 의지하여 건립하기 때문에 유출한다고 이른 것이다. 그러나 불과뿐만이 아니고, 바로 보살 인지의 모든 바라밀도 또한 이 원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바리밀과(及波羅密)의 과(及)라 이른 것이다. 제불의 인지를 보살 인행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가르친다고 이른 것이다.(流出者 即由此建立之義 然此覺體 爲諸佛之法身 爲衆生本覺之心地 雖染而不染故曰清淨 從來不妄不變故稱眞如 但以無明障蔽而不現 諸佛如來於因地 依此本覺眞心 發始覺之智斷盡無明 始本合一名究竟覺 爲得菩提之果 還歸寂滅一心 名爲圓寂 是稱涅槃 是知諸佛果德 皆依此圓覺一心建立故云流出 然不獨佛果 即菩薩因地諸波羅蜜 亦從此出故云及也 以諸佛之因地爲菩薩之行本故云教授)

 

경문: “일체 여래의 본기인지도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셨느니라.”(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方成佛道)

해설: 본기인지는 본기청정 인지법행을 말한다.

 

함허설의: 초심으로 관조하는 각도 체용을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각체가 정량을 벗어나고 묘용도 범심凡心에 은장하고 있을 뿐이다. 초심은 심식이 밝지 못하여 관조가 각체에 미치지 못하고, 묘용도 궁극을 얻지 못한다. 오로지 부처님만이 그 각체를 철증하시고, 그 묘용을 남음이 없이 펼쳐내시기 때문이다. 초심의 학인이 관조하는 각은 오로지 재전의 각성이 청정한 각상뿐이다. 이 때문에 청정각상을 원조한다고 한 것이다. 이른바 믿는 경계는 바로 재전의 각성청정법계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각상도 또한 무변하고 중덕을 함섭하기 때문에 관조를 원조라 말한 것이다. 단지 청정각상을 원조할 수 있기만 하면 충분히 무명을 번파하고 정각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 여래는 모두 원조하는 공력을 의거하여 미혹을 끊고 대도를 성취한다. 이 때문에 알라. 만행을 펼쳐서 증각證覺에 이르고, 대각을 증득하여 중생을 제도하니, 모두 원조하는 공력을 의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 여래의 인지법행이라 가리켜 말한 것이다.(初心所照之覺 非不具體用也 但體出情量 用隱凡心 初心識昧 照不及體 用不得盡 唯佛徹證其體 展盡其用故 初心之人所照之覺 唯是在纏覺性淸淨之相而已 故云照淸淨覺相 如所謂所信境 是在纏性淨法界者是也 然相亦無邊含攝衆德故照曰圓照 但能圓照淸淨覺相 足以飜破無明而成正覺故 一切如來皆依圓照之功 斷惑而成道也 故知張萬行而趣證 證大覺而度生 皆依圓照之功也 故指云一切如來因地法行)

 

감산직지: 제불의 인지를 보살 인행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가르친다고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 여래가 성불하는 본기의 인지는 다시 별법이 없으니, 모두 이 원각자성의 광명을 의거하여 여전히 적멸청정한 각체를 원조하는 것이다. 각상覺相의 상은 곧 성체이다. 이로써 원만하게 조철하여 남음이 없으면 곧 무명이 영원히 끊어져 법신을 원만하게 증득하는 것이니, 오직 청정각상을 원조하는 이 하나의 법뿐이다. 이 때문에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셨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에 원조는 곧 일심삼관의 지혜이고, 청정각상은 바로 일심삼제의 체상이다. 전체 경은 단지 이 일구를 발명하였을 따름이다.(以諸佛之因地爲菩薩之行本故云教授 是故一切如來成佛本起之因地 更無別法 皆依此圓覺自性之光明 還照寂滅清淨之覺體 相即性體也 以此圓滿照徹無遺 則無明永斷圓證法身 唯此一法而已 故曰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 方成佛道也 然圓照即一心三觀之智 清淨覺相即一心三諦之體 全經但發明此一句而已)

 

해설: 여래의 본기인지는 본기청정 인지법행을 간략히 말한 것이고, 모두는 인지의 법행을 이어받은 것이다. 아래는 인지법행과 원조청정각상을 문답의 형식을 빌려 부연한 것이다.

 

감산직지: 문는다. “부처님께서 ‘원각 다라니문은 여래 본기의 인지가 된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청정진여는 곧 중생의 미혹함이 없는 불성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또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지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곧 본래 끊어야할 만한 무명이 없습니다. 갑자기 ‘영원히 무명을 끊고서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 곧 그 뜻이 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감히 그 성지를 묻습니다.”(問曰 佛言圓覺陀羅尼門 爲如來本起之因地 又曰 清淨眞如則爲衆生不迷之佛性 又曰 皆依圓照清淨覺相 則本無無明可斷也 忽曰 永斷無明方成佛道 則義不相蒙 敢問其旨)

답한다. “이 뜻이 심원하여 거친 마음으로 헤아릴 바는 아니다. 원컨대 시험삼아 이 뜻을 말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원각묘심은 바로 제불과 중생이 평등하여 동일한 법신이며, 법신이 오도에 유전하면 이름을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정진여는 바로 제불의 법신이고 중생의 불성이다. 진실로 최초일념을 말미암은 무명 불각이 이 법신을 미혹하고, 오온 환망幻妄의 신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본래 있는 원각은 미혹함이 없는 불성이기 때문에 번뇌가 더럽힐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하며, 본래 허망하지 않고 변천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진여라 말한다. 이 때문에 청정진여란 한마디는 곧바로 중생의 미혹 중에 불성을 가리킨 것이다. 제불도 인지에는 한가지로 중생이다. 그러나 본각의 불성을 의지하여 시각의 지혜를 일으킬 수 있고, 무명을 끊어서 다 없애고 시각과 본각이 합일하면 보리를 증득했다고 일컬으며, 또한 적멸일심을 증득했기 때문에 열반이라 말한다. 이는 곧 제불의 보리와 열반의 과덕이니, 모두 미혹에서 돌이켜 대오하고 수행한 연후에 증득했기 때문에 ‘영원히 무명을 끊고서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한 것이다.’라고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수행하여 무명을 끊는 방법은 모두 원각자성의 지혜광명에 의지하고, 또한 적멸청정한 심체心體를 원조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청정각상을 원조한다고 이른 것이다. 자성광명으로 한번 비춰주면 곧 무명을 몰록 타파하며, 이 때문에 영원히 끊는다고 이른 것이다. 이는 진실로 성불하는 비결이고, 돈오하고 돈증하는 묘문이며, 여래의 인지법행이다. 이 경은 곧바로 일심원돈의 성지를 가리킨다. 이 때문에 첫머리에 이를 게양하니, 일경의 종취이다. 어의가 심원하여 천식으로 알 바가 아니지만, 짐짓 일부러 마음을 내본 것이다.”(答曰 此義幽深 非麤心可擬 請試言之 然圓覺妙心乃諸佛衆生平等無二之法身也 以法身流轉五道名曰衆生 然清淨眞如乃諸佛之法身衆生之佛性 良由最初一念無明不覺 迷此法身 而成五蘊幻妄之身心 則本有圓覺而爲不迷之佛性 以煩惱不能染 故曰清淨 本來不妄不變 故曰眞如 故清淨眞如一語 直指衆生迷中之佛性也 以諸佛因地同是衆生 但能依本覺之佛性發起始覺之智 斷盡無明始本合一名得菩提 還證寂滅一心故曰涅槃 是則諸佛菩提涅槃之果德 皆從迷返悟 修而後得故 曰永斷無明方成佛道 然修斷之方 皆依圓覺自性之智光 還照寂滅清淨之心體 故曰圓照清淨覺相 以自性光明一照 則無明頓破 故曰永斷 此實成佛之祕訣 頓悟頓證之妙門 爲如來因地之法行 此經直指一心圓頓之旨 故首揭於此 爲一經之宗趣 語義幽深 非淺識可了 故特發之)

 

해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고 나면, 다시 손가락을 볼 필요가 없다. 해설문을 의지하여 경의 뜻을 알고 나면, 또한 해설문도 손가락과 같다. 어찌 해설문에 다시 해설이 필요하랴. 오직 정확한 번역만을 요구할 뿐이다.

 

4. 무명과 공화의 기멸

경문: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무시이래 갖가지로 전도하였느니라. 마치 미혹한 사람이 네 방위에 위치를 바꿔 아는 것과 같으니,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법상法相이라 인정하고, 육진의 연영을 자기 마음의 진상眞相이라 하느니라. 비유하면 병든 눈이 허공의 꽃이나 둘째 달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눈병 있는 자가 무턱대고 고집하느니라. 무턱대고 고집하기 때문에 이 허공의 자성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저 실제의 꽃이 생기는 곳도 미혹하느니라. 이로써 터무니없이 윤회하는 생사가 있으며, 그러므로 무명이라 일컫느니라.”(云何無明 善男子 一切衆生從無始來種種顚倒 猶如迷人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見空中花及第二月 善男子 空實無花病者妄執 由妄執故非唯惑此虛空自性 亦復迷彼實花生處 由此妄有輪轉生死 故名無明)

 

함허설의: 밝을 명明은 이 묘명妙明하고 명정明正하다는 뜻이고, 무명無明은 밝음을 등지고 어둠으로 향하며, 정도를 잃고 사도에 빠져든다는 뜻이다. 무릇 정도를 등지고 사도에 투신하면 모두 전도라 말하고, 사견이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갖가지라 이른 것이다. 묘성이 본래 정명하면 무엇 때문에 무명인가? 무릇 허명한 체성에서 홀연히 미혹을 일으키자마자 즉시 진명한 정혜를 잃고 어둠을 향하여 사견에 빠져드니, 마치 사람이 홀연히 혼미하여 남쪽을 헷갈려 북쪽이라 하고, 동쪽을 헷갈려 서쪽이라 하는 것과 같다. 대체로 묘명진심은 적조가 동시이니, 조감照鑑을 여의지 않는 적정寂靜은 이름을 법신이라 하고, 적정을 여의지 않는 조감은 이름을 진지眞智라 한다. 진지는 연려緣慮가 끊어지고, 법신은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는 몸이 바로 법신이기 때문에 색신을 자기 몸이라 아는 것이고, 연려가 끊어진 진지가 바로 진심이기 때문에 연려를 자기 마음이라 아는 것이다.(明是妙明明正之義也 無明是背明向暗 失正投邪之義也 凡有背正投邪皆曰顚倒 邪非一種故云種種 性本精明因何無明 夫虛明體上忽然起惑 遂失眞明正慧向暗投邪 如人忽迷惑南爲北惑東爲西也 蓋妙明眞心寂照同時 卽照而寂名爲法身 卽寂而照名爲眞智 眞智絶慮 法身無相 無相之身是眞身也 認色身爲自身 絶慮之智是眞心也 認緣慮爲自心)

연려를 자기 마음이라 알기 때문에 진지를 미혹하고, 색신을 자기 몸이라 알기 때문에 법신을 미혹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오로지 저 법신과 진지를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색신과 연려가 허망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최초불각을 말미암아 이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병든 눈으로 허공을 보면 허공중에 꽃을 보고, 눈을 누르고 달을 보면 달 옆에 다시 달을 보는 것과 같다. 법신은 이 비유에 대비하면 곧 허공와 같고, 색신은 이에 대비하면 바로 저 공화와 같다. 진지는 이에 대비하면 곧 저 진월과 같고, 연려심은 이에 대비하면 바로 둘째 달과 같다. 진신은 형상이 없지만 색신을 몸으로 삼고, 진심은 연려가 끊어졌지만 연려를 마음으로 삼는 것이니, 이는 마치 공중에 공화를 보고, 달 옆에 달을 보는 것과 같다.(認緣慮爲自心故迷眞智也 認色身爲自身故迷法身也 此則非唯迷彼法身眞智 亦復不知色身緣慮之爲非眞也 此因最初不覺而致之也 如病眼見空而空中見花 捏目見月而月邊更見月也 法身比之則如彼大虛 色身比之則如彼空華 眞智比之則如彼眞月 緣心比之則如第二月也 眞身無相而以色身爲身 眞心絶慮而以緣慮爲心 如空中見花月邊見月也)

색신은 형상이 있지만 마침내 흩어져 없어지고, 연심은 정말로 허망하지만 경계를 따라 기멸한다. 생멸하는 체상을 집착하여 실상이라 여기기 때문에 무턱대고 생사에 윤회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바로 불각의 허물이고, 곧 무명의 허상이다. 만일 묘명의 체상을 지키면, 곧 상각常覺은 법신을 자기 몸으로 삼고, 진지를 자기 마음으로 삼으며, 바로 법신과 진지는 본래 생멸하는 체상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생사에 윤회함을 보지 않는다. 여래의 본기인지에서 청정각상을 원조하니, 바로 이 때문이다.(色身有相而終歸散滅 緣心是妄而隨塵起滅 由執生滅之體而以爲實故 妄見輪轉生死 此是不覺之過也 卽無明之相也 若守妙明之體 而常覺以法身爲自身 眞智爲自心 則法身眞智 本無生滅之相故 必不見輪轉生死也 如來本起因地圓照淸淨覺相 正爲此也)

해설: 상각은 묘명의 체상이고, 상주불변하는 청정각상이며, 상주부동하는 청정법신이다. 원각경 청정혜보살장에 상각부주常覺不住란 말이 있다. “선남자여, 비춰지는 경계가 있고, 비춰주는 각성이 있는데, 모두 장애라 일컫는다. 이 때문에 보살이 상각에 머무르지 않으면, 비춰지는 경계와 비춰주는 각성이 동시에 적멸하느니라.”(善男子 有照有覺 俱名障礙 是故菩薩 常覺不住 照與照者 同時寂滅)

 

경문: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무시이래 갖가지로 전도하였느니라. 마치 미혹한 사람이 네 방위에 위치를 바꿔 아는 것과 같으니,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법상法相이라 인정하고, 육진의 연영을 자기 마음의 진상眞相이라 하느니라. 비유하면 병든 눈이 허공의 꽃이나 둘째 달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감산직해: 이는 무명의 체상을 징석하여 원조하는 공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에 힐문하고 다음에 해석했다. 이는 무명의 근원을 해석한 것이다. 이른바 중생에 본래 있는 법신은 원래 생사가 없다. 지금 최초일념 불각의 무명을 인하여 본래의 불성을 미혹하고, 탐진치를 일으켜 갖가지 업을 지었으며, 마구 육취의 생사를 취했기 때문에 갖가지로 전도한다고 한 것이다. 비록 생사를 왕래하는 중에 있어도 법신은 담연하고 부동하며, 이 때문에 마치 사람이 방위를 미혹해도 방위는 실제로 전변하지 않은 것과 같다. 미혹한 이유는 법신을 등진 것이니, 단지 사대로 가합한 환신을 헷갈려 자기 몸이라 인식하고, 마구 육진의 그림자를 반연한 망상 연려의 마음을 헷갈려 자기 마음이라 인식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공중의 꽃과 둘째 달을 보는 것과 같다. 병든 눈은 무명에 비유하고, 공화는 허망한 몸에 비유하며, 둘째 달은 허망한 마음에 비유한 것이다. 허망한 것을 헷갈려 진실을 잃기 때문에 전도라 이른 것이다.(此徵釋無明之體 將顯圓照之功也 此徵下釋 此釋無明之元也 謂衆生本有法身元無生死 今因最初一念不覺之無明 迷本來之佛性 起貪嗔癡造種種業 妄取六趣之生死故 云種種顚倒 雖在往來生死之中 而法身湛然不動 故如人迷方而方實不轉也 所以迷者 以背法身 但認四大假合之幻身爲己身 妄認攀緣六塵影子妄想緣慮之心爲眞心 譬如病目見空中華及第二月 病目喻無明 空華喻妄身 二月喻妄心 認妄失眞 故云顚倒)

 

경문: 선남자여,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눈병 있는 자가 무턱대고 고집하느니라. 무턱대고 고집하기 때문에 이 허공의 자성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저 실제의 꽃이 생기는 곳도 미혹하느니라. 이로써 터무니없이 윤회하는 생사가 있으며, 그러므로 무명이라 일컫느니라.”

 

감산직해: 이는 무명의 체상을 비유로 알려준 것이다. 이른바 법신은 본래 몸과 마음이 없는 체상이니, 마치 허공은 본래 공화가 없는 것과 같다. 지금 마구 사대를 헷갈려 몸이라 하니, 마치 공화를 집착하여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허망한 집착 때문에 오로지 본지법신을 미혹할 뿐만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 허공자성을 미혹한다고 이르고, 또한 다시 허망한 몸이 무명을 좇아서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저 실화의 생처도 미혹한다고 이른 것이다. 이 전도를 말미암기 때문에 생사윤회가 있다. 이는 바로 무명의 체상이다.(此喻示無明之體也 謂法身本無身心之相 如空本無華 今妄認四大爲身 如執空華爲實有 由妄執故 不唯迷本法身 故云惑此虛空自性 亦復不知妄身從無明有 故云迷彼實華生處 由此顚倒故 有輪轉生死 此乃無明之體也)

 

해설: 신상身相과 심상心相의 상相은 진상 실상 법상 체상 등을 말한다. 법신과 진심을 의거하여 법상 또는 진상이라 해석한 것이다.

 

경문: “선남자여, 이 무명이란 것은 실제로 체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꿈속에 사람이 꿈을 꿀 때는 없지 않지만 잠에서 깨어난 뒤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얻은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마치 수많은 허공 꽃이 허공에서 없어지는데 반드시 없어지는 곳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생겨난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은 생멸이 없는 가운데 망심으로 생멸을 보니, 이 때문에 이름을 생사윤회라 설하셨느니라.”(善男子 此無明者非實有體 如夢中人夢時非無 及至於醒了無所得 如衆空花滅於虛空 不可說言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於無生中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함허설의: 미혹을 인하여 생사에 윤회하고 있음을 보지만, 그 각상을 원조함에 이르러 도리어 살고 죽는 이유와 미혹을 일으키는 이유을 궁구하면, 곧 오로지 생사에 자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혹도 또한 체상이 없다. 마치 사람이 꿈꿀 적에 갖가지 만물을 보지만, 잠을 깨어남에 이르러서는 만물을 얻을 수 없고, 꿈도 또한 없는 것이니, 꿈과 만물이 모두 생겨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병든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면 공중에 공화가 일어나지만, 병이 만일 쾌차하면 공화가 또한 없어짐을 보는 것과 같다. 비록 공화가 기멸함을 보지만, 저 공중의 꽃은 본래 생겨난 곳이 없고, 또한 갈 곳도 없다. 생사윤회가 바로 꿈속의 경계와 같고, 또한 공화와 같다. 만일 그 근원을 궁구하면 실로 생겨난 곳이 없다. 다만 망계로 생멸을 볼 따름이다. 이 때문에 이름을 생사윤회라 설한 것이다.(因迷 見有輪轉生死 及其圓照覺相 而反推其所以生死所以起迷 則非唯生死無蹤 迷亦無體 如人作夢見種種物 及至於醒物不可得 夢亦無 夢與物皆無生處故也 亦如病眼望空空中花起 病若得差見花還滅 雖於空花見起見滅 彼空中花本無生處 亦無去處 生死輪轉正如夢境 亦如空花 若推其原實無生處 但以妄計見生見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감산직해: 이는 무명의 체상이 공적함을 해석하고, 생사가 본래 있지 않음을 천명한 것이다. 생사는 바로 미혹한 가운데서 전도한 것이니, 마치 꿈속의 일이 잠에서 깨어난 뒤에 곧 없는 것과 같다. 꿈속 일이 생겨도 본래 생긴 것이 없기 때문이고, 없어져도 또한 없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공화가 반드시 없어진 곳이 없는 것과 같다.(此釋無明體空 以明生死本來不有也 以生死乃迷中之顚倒 如夢中事覺後即空 以生本無生故 滅亦無滅故 如空華無定滅處)

 

5. 정각수순과 인지법행

경문: “선남자여, 여래는 인지에서 원각을 닦는 분이라,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 알면 곧 윤화가 없고, 또한 몸과 마음이 저 생사를 받음도 없으리니, 조작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고, 본래 체성이 없기 때문이니라.”(善男子 如來因地 修圓覺者 知是空花 即無輪轉 亦無身心 受彼生死 非作故無 本性無故)

 

함허설의: 각상을 원조하여 진지가 본래 있는 줄을 알고, 저 무명을 관조하여 망경妄境에 체상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안다. 이 때문에 감응하는 생사가 없고, 또한 감응할 수 있는 신심도 없다. 이는 작위하여 없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체성이 본래 공적하기 때문이다.(圓照覺相知眞本有 觀彼無明了妄無體 故無所感之生死 亦無能感之身心 此非作爲而令無 性本空寂故也)

 

감산직지: 이는 돈오의 묘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원조하는 공력을 드러낸 것이니, 오직 하나의 알지知자일 뿐이다. 이른바 제불의 인지수행은 오직 원각의 자성광명으로 자기 마음의 적멸한 체상을 원조하는 것뿐이다. 일념에 몸과 마음의 세계가 허공중에 꽃과 같아서 본래 있지 않음을 명백히 알면 곧 생사가 당장 끊어진다. 몸과 마음이 본래 공적하기 때문에 생사를 받을 만한 이도 없다. 이는 조작한 이후에 없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래자성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此的示頓悟妙門 以顯圓照之功 唯一知字也 謂諸佛因地修行 唯以圓覺自性光明圓照自心寂滅之體 一念了知身心世界如空中華本來不有 則生死當下頓斷 以身心本空故 無可受生死者 此非造作而後無 特以本來自性元無故也)

 

경문: “저 본각을 아는 것도 또한 허공과 같고, 허공과 같은 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니, 또한 본각을 아는 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느니라. 유무를 함께 차견하니, 이는 곧 이름이 청정각상을 수순하는 것이니라.”(彼知覺者猶如虛空 知虛空者即空花相 亦不可說無知覺性 有無俱遣 是則名爲淨覺隨順)

 

해설: 금강장보살장 게송에 이르기를, “생사와 열반, 범부와 제불은 함께 공화상이니, 사유도 또한 공화상이다.”(生死與涅槃 凡夫及諸佛 同爲空花相 思惟猶幻化)라고 하니, 공화와 공화상은 같다. 능가경에 이르기를, “이 가운데 상이란 것은 이른바 눈으로 보는 색상 등의 형상이 각기 다른 것이니, 이를 상이라 일컫는다.”(此中相者 謂所見色等形狀各別 是名爲相)라고 하니, 상은 형상을 말한다. 공화상의 상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위 경문을 감산스님의 직지에 의거하여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 본각을 원조하는 청정각상은 또한 허공 곧 청정법신과 같고, 허공 곧 청정법신과 같은 줄을 아는 능히 비춰주는 지혜도 바로 공화상이니, 또한 본각을 아는 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있고 없는 주체와 대상을 함께 차견하면, 이는 곧 이름이 정각수순이다.”

 

함허설의: “비록 진성이 본래 있는 줄을 알고 망경妄境이 원래 없는 줄을 분명히 알지라도, 이는 분명히 아는 각상이고, 또한 본래 무생이다. 또 비록 저 각상의 무생을 알지라도, 이는 또한 신심 생사와 동일한 무생이니, 또한 공화와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유무에 함께 분별이 없으면 진원에 계합할 수 있는데, 어찌 완전히 아는 것이 없으랴. 만일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또한 단멸과 같은 변견이다. 묘명은 본래 있는 진성이니, 현재 대치하는 각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치하는 각상은 다하지만 곧 본명은 항상 있는 것이니, 이는 곧 이름을 수순각성이라고 한다.”(雖知眞本有了妄元無 此了知之覺亦本無生 又雖知彼覺之無生 此知還同身心生死之無生 亦如空花也 然但於有無俱無分別得契眞源 豈全無知 若謂無知 還同斷滅之見也 妙明本有之眞性 不同今日對治之覺故也 對治覺盡 則本明常存 是則名爲隨順覺性)

 

해설: “대치하는 각상은 다하지만 곧 본명은 항상 있는 것이니,” 이 본명을 상각이라 한다.

 

감산직지: 이는 주체와 대상이 대대하는 자취를 쓸어버리고, 평등 적멸한 구경의 일심정각一心淨覺을 원조하는 지혜를 드러낸 것이다. 저 본각을 아는 것(彼知覺者)이라 이른 것은 바로 위에서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을 안다고(知是空華) 하는 알지知자를 가리키니, 곧 이른바 원조이며, 바로 자성에 본래 있는 지혜광명으로 능히 비춰주는 지혜(能照之智)를 삼은 것이다. 본각을 아는 것(知覺者)의 것자者는 비춰지는 경계(所照之境)를 가리키니, 곧 청정한 각상이다. 허공과 같다는 것은 바로 비춰지는 각체를 비유한 것이니, 이른바 청정법신이 또한 허공과 같다. 이른바 이 각체는 비록 본래 있는 것이지만, 무명에 가로막힌 때로부터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 이제 지혜광명이 한번 원조함에 의지하여 바로 무명을 단박에 타파하면, 본체가 즉각 현전하여 바로 영겁의 생사가 일시에 몰록 끊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을 알면 곧 윤회가 없다고 한 것이니, 이는 특별히 지혜로 원조함에 공력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此拂能所對待之跡 以顯圓照平等寂滅究竟一心淨覺之智也 云彼知覺者 乃指上知是空華之知 即所謂圓照 乃自性本有之智光爲能照之智 者字指所照之境即清淨之覺相 如虛空乃喻所照之覺體 所謂清淨法身猶若虛空 謂此覺體雖是本有 向被無明障蔽從來不覺 今仗智光一照則無明頓破 本體當下現前則歷劫生死一時頓斷 是所謂知是空華即無輪轉 此特顯智照有功也)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것(知虛空者)의 이 것자者자는 바로 위에 능히 비춰주는 지혜(能照之智)를 가리킨다. 그 뜻은 이른바 처음 지혜로 미혹을 비춰주고, 미혹이 없어지면 곧 지혜도 또한 존립하지 않으며, 그러하면 비춰지는 경계도 이미 적적하다. 만일 능히 비춰주는 앎이 존립한다면 여전히 무명이니, 이 때문에 반드시 이를 차견해야 하며, 이 때문에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라(知虛空者 即空華相) 한 것이다. 이러하면 곧 주체와 대상이 함께 다하여 적조가 다름이 없다. 이 경지에 이르면 오직 여여지만 있을 뿐이라 원조하는 각체만 홀로 존립한다. 이 때문에 또한 본각을 아는 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亦不可說無知覺性) 한 것이다. 곧바로 심경이 모두 다하여 주체와 대상이 함께 없어지니, 이 때문에 유무를 함께 차견한다고(有無俱遣) 한 것이다. 이와 같으면 바로 적멸일심에 계합하며, 이 때문에 이는 곧 이름이 정각수순이라(是則名爲淨覺隨順) 한 것이다.(知虛空者 此者字乃指上能照之智 意謂初以智照惑 惑滅則智亦不存 然所照既寂 若存能照之知猶是無明 故須遣之 故云知虛空者即空華相 此則能所雙忘寂照不二 到此唯有如智照體獨立 故云亦不可說無知覺性 直至心境兩忘能所俱泯 故云有無俱遣 如此乃合寂滅一心 故云是則名爲淨覺隨順)

 

해설: “이 경지에 이르면 오직 여여지만 있을 뿐이라 원조하는 각체만 홀로 존립한다.” 원조하는 각체 곧 여여지를 상각이라 한다.

 

함허설의: 묻는다. “신심은 확실히 있고, 생사는 틀림없이 동전動轉하지만, 공화는 곧 있는 듯하나 있는 것이 아니고, 동전하는 듯하나 동전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신심과 생사를 가리켜 공화와 같다고 말하는가?’”(身心是有 生死是動 空花則似有而非有 似動而非動 何故 指身心生死 言同空花)

답: “대저 ‘신심과 생사를 가리켜 공화와 같다고 말한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심이 비록 있는 듯하지만, 단지 횡계橫計로 그러한 신심이 있는 것처럼 볼 따름이다. 그 당체는 허공과 같아서 있는 것이 곧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도 비록 동전하는 듯하지만, 단지 횡계로 그러한 생사가 동전하는 것처럼 볼 따름이다. 동전하지만 동전하는 체상이 없고, 동전하지만 항상 동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심과 생사를 가리켜 공화와 같다고 말한다.’라는 것이다.”(夫指身心生死 而言同空花者 身心雖然似有 但以橫計而見其有 當體如空 有卽非有 生死雖然似動 但以橫計而見其動 動無動性 動常不動 所以指身心生死言同空華)

 

문: “또한 저 공화가 없어짐을 보는 견분은 저 공화가 생기함을 보는 견분과 같지 않지만, 저 신심과 생사가 무생임을 알고, 이렇게 아는 것은 신심이 있다고 아는 망지妄知나 생사가 있다고 보는 망견妄見과는 같지 않다. 어째서 다시 저 본각을 아는 것은 또한 허공과 같다고 하는가? 또 진성은 저절로 신묘하게 알고, 본래 스스로 앎이 있다. 어째서 이미 허공과 같다고 말하고, 다시 곧 공화상이라 말했는가?”(又見彼花滅之見 不同見彼花起之見也 知彼身心生死之無生 此知不同認身心之妄知 見生死之妄見 何故 復云彼知覺者猶如虛空 又性自神解 本自有知 何故旣言如空 復言卽空花相)

답: “신심과 생사가 공화와 같은 줄을 아니, 이렇게 아는 것이 다시 허공과 같다고 말하고, 아는 것이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것이니, 이는 아는 것을 다시 말한 것이다. 곧 공화상이란 것은 단지 횡계로 신심과 생사가 있음을 볼 따름이니, 마치 병든 눈으로 공화가 일어남을 보는 것과 같다. 횡계를 여의면 신심과 생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니, 마치 병이 나으면 공화가 없어짐을 보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공화의 기멸을 보는 지견은 본래 신심 생사를 말미암아 이른 것이고, 아는 것이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지견도 또한 공화의 기멸을 보는 지견을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모두 지견의 허물이 됨을 면치 못한다. 여래장 가운데는 본래 신심 생사의 기멸이 없고, 또한 기멸을 보는 지견도 없으며, 다시 아는 것이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지견도 없다. 그래서 저 본각을 아는 것은 또한 허공과 같고,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라 이른 것이다.”(身心生死知如空花 此知復言如空 知知如空 此知更言 卽空華相者 但以橫計見有身心生死 如病目之見花起也 離橫計而不見有身心生死 如病除而見花滅也 由是見起見滅之知見 本由身心生死而致之 知知如空之知見 亦由見起見滅之知見而有之 皆未免爲知見之垢也 如來藏中本無身心生死之起滅 亦無見起見滅之知見 亦無知知如空之知見 所以云 彼知覺者猶如虛空 知虛空者卽空華相)

 

문: “또 이미 지견을 털고 털며 다시 털어서 없앴다. 어째서 다시 본각을 아는 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는가?”(又旣於知見拂拂而拂盡 何故復言不可說言無知覺性)

답: “이미 지견을 털고 털며 다시 털어서 없애고, 다시 본각을 아는 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이른 것은 무엇인가?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을 아는 지견은 본래 신심 생사를 인하여 있고, 아는 것이 허공과 같은 줄을 아는 지견도 또한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을 아는 지견을 인하여 있다. 이는 모두 인연을 대대하여 있으니, 대치하는 지견이고, 본래 있는 지견이 아니다. 만일 본래 있는 지견이면 곧 대치함을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인연을 좇아서 얻는 것도 아니며, 바로 여래장의 묘명한 원진상진의 지견이다. 그 계량界量이 광대함이 마치 법성과 같고, 구경이 원만하며 시방세계에 두루하니, 대치하는 지견으로는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본각을 아는 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이른 것이다.”(旣於知見拂拂而拂盡 復云不可說言無知覺性者 知是空花之知見 本因身心生死而有之 知知如空之知見 亦因知是空華之知見而有之 此皆對緣而有 對治之知見也 非本有之知見也 若本有之知見 則非因對治而有也 亦非從緣而得也 是如來藏妙圓眞常眞知見也 其量廣大猶如法性 究竟圓滿遍周十方 非對治之知見所能及也 所以云不可說言無知覺性)

 

경문: “무엇 때문인가? 허공성이기 때문이고, 상주하여 부동하기 때문이며, 여래장 가운데는 기멸이 없기 때문이고, 지견이 없기 때문이며, 법계성과 같아서 구경이 원만하여 시방세계에 두루하기 때문이니라. 이는 곧 이름을 인지법행이라 하느니라.”(何以故 虛空性故 常不動故 如來藏中 無起滅故 無知見故 如法界性究竟圓滿遍十方故 是則名爲因地法行)

 

함허설의: 그 신심 생사를 인식하는 지견과 저 인연을 좇아서 대치하는 지견을 함께 차견하면 바로 본래 있는 청정각상이 현전한다. 이는 본기인지법행이라 일컫는다.(夫執認身心生死之知見 與夫從緣對治之知見 俱遣則本有淸淨覺相現前 此名本起因地法行)

 

감산직지: 이는 비춰지는 경계 적멸심체를 징석하여 절대 진심을 거듭 드러내고 청정각상을 현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잇달아 주체와 대상을 차견해야만 하는가? 적멸심체는 본래 허공성과 같고 상주부동한다. 이는 공관을 드러낸 것이다. 이른바 지금은 비록 신심의 생사가 있지만 본래 허공화와 같다. 여래장 가운데는 기멸이 없기 때문이고, 지견이 있음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가관을 드러낸 것이다. 법계성과 같다고(如法界性) 하는 같을여如자는 칭합이다. 이른바 법계성에 칭합하여 구경이 원만하고 시방세계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관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진실로 묘각명심의 실제이며, 여래의 인지는 오직 이것일 따름이다.(此徵釋所照寂滅心體 重顯絕待眞心 以示清淨覺相也 何故要重重遣拂能所耶 以寂滅心體本來如虛空性 常住不動 此顯空也 謂今雖有身心生死 本來如空中華 以如來藏中無起滅故 不容有知見故 此顯假也 如者稱也 謂稱法界性 究竟圓滿 周遍十方故 此顯中也 此實妙覺明心之實際 如來因地唯此而已)

 

해설: “이는 곧 이름을 인지법행이라 하느니라.”(是則名爲 因地法行) 여기서 이는 무엇을 이어받는가? 곧 무엇이 인지법행인가? “이는 곧 이름이 청정각상을 수순하는 것이니라.”(是則名爲 淨覺隨順) 바로 청정각상을 수순하는 정각수순이 인지법행이다. “정각수순은 곧 이름을 인지법행이라 하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이하 다섯 가지 까닭은 정각수순의 종속문이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까닭은 인지법행이 아닌 것이다.

 

경문: “보살이 이 인지법행을 인유하여 대승 중에 청정심을 일으키고, 말세중생도 이 인지법행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느니라.”(菩薩因此 於大乘中發清淨心 末世衆生依此修行不墮邪見)

 

함허설의: 보살이 이 인지법행을 말미암아 염원하면 본래 부처와 동일하지만, 습기로 인하여 바로 다르다. 모름지기 습기를 다스리면 구경이 청정하다. 이는 청정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중생도 또한 이 인지법행을 의지하여 발심하고 청정행을 닦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견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아니한다.(菩薩因此作念 本同於佛 因習乃異 要須治習究竟淸淨 是爲發淸淨心也 衆生亦依此發心 修淸淨行 所以不墮邪見坑也)

 

감산직지: 보살이 발심하되, 응당 이 인지법행을 인하여 일으키면 곧 진인眞因이고, 중생도 이 인지법행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바로 정행正行이다. 이 때문에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문답의 대의를 끝맺는 것이다.(菩薩發心 當因此而發 則爲眞因 衆生依此而修 則爲正行 故不墮邪見 此結問答意也)

 

6. 게송

경문: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爾時世尊 欲重宣此義 而說偈言)

 

문수여, 그대는 마땅히 아시라.

일체 모든 여래는 본기 인지를 따르고,

모두 지혜의 청정각으로

무명을 통달하셨느니라.

文殊汝當知 一切諸如來 從於本因地 皆以智慧覺 了達於無明

 

그 몸과 마음이 공화와 같은 줄 알면

바로 유전을 면할 수 있느니라.

또 꿈을 꾸는 사람과 같으니

잠을 깨고 나면 얻을 수 없느니라.

知彼如空花 即能免流轉 又如夢中人 醒時不可得

 

청정각은 허공과 같고,

평등하여 동전하지 않느니라.

청정각이 시방에 두루하나니,

바로 불도를 성취할 수 있느니라.

覺者如虛空 平等不動轉 覺遍十方界 即得成佛道

 

뭇 허깨비가 없어져도

없어진 처소가 없느니라.

불도의 성취도 얻는 곳이 없으니,

본성이 원만하기 때문이니라.

衆幻滅無處 成道亦無得 本性圓滿故

 

보살은 이 가운데서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느니라.

말세 모든 중생들도

이 인지법행를 닦으면 사견을 면하느니라.

菩薩於此中 能發菩提心 末世諸衆生 修此免邪見

 

해설: 경의 게송은 사구게가 정형이다. 그러나 뜻을 취하고 보면 때로는 삼구게도 되고, 오구게도 된다. 일정한 틀 안에 한 편의 전체 요지를 축약하고 보면 어쩔 수 없기도 할 것이다. 위는 뜻을 취했다.

 

7. 원각보살장 삼관

경문: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이 사마타를 닦고자 하면 먼저 지극한 적정을 취하고 사념을 일으키지 말라. 적정이 지극하면 바로 깨닫느니라. 이와 같이 최초 적정이 일신에서부터 일세계에 이르나니, 청정각도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일 청정각이 일세계에 편만한 이는 일세계 중에 어떤 중생이 한 생각 일으킴이 있는 것을 모두 알 수 있고, 백천 세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들은 그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諸衆生修奢摩他 先取至靜不起思念 靜極便覺 如是初靜從於一身至一世界 覺亦如是 善男子 若覺遍滿一世界者 一世界中有一衆生起一念者 皆悉能知 百千世界亦復如是 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이 삼마발제를 닦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시방여래와 시방세계의 일체보살이 갖가지 문에 의지함을 회상하고, 점차 수행하고 삼매를 부지런히 애쓰며, 대원을 널리 일으키고 스스로 훈습해서 부처종자를 이룰지니라. 들은 그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諸衆生 修三摩鉢提 先當憶想 十方如來 十方世界 一切菩薩 依種種門 漸次修行 勤苦三昧 廣發大願 自熏成種 非彼所聞 一切境界 終不可取)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이 선나를 닦고자 하면 먼저 수문數門을 취하고, 심중에 생주이멸하는 사념의 분제두수를 분명히 알지니라. 이와 같이 두루 미치면, 사위의 중에 분별하는 생각의 수를 분명히 알지 않음이 없느니라. 점차 증진시켜 더 나아가면 백천 세계의 한 물방울의 비까지 알 수 있고, 또한 수용하는 만물을 눈으로 보는 것 같으니라. 들은 그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諸衆生 修於禪那 先取數門 心中了知 生住滅念 分齊頭數 如是周遍 四威儀中 分別念數 無不了知 漸次增進 乃至得知 百千世界 一滴之雨 猶如目覩 所受用物 非彼所聞 一切境界 終不可取)

이는 삼관의 초수방편이니라. 만일 모든 중생이 세 가지 지관을 두루 닦고 부지런히 정진하면 곧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일컫느니라. 만일 이후 말세에 둔근중생이 심중에 불도를 구하고자 해도 성취할 수 없다면 전생의 업장 때문이니라. 마땅히 부지런히 참회하고, 항상 희망을 일으키며, 먼저 증애와 질투 아첨을 끊고, 무상최승無上最勝의 마음을 구하여야 하느니라. 세 가지 정관에서 일사만 따라서 배우고, 이 관에서 얻지 못하면 다시 저 관을 익히며, 마음에 놓아버리지 말고 점차 증각을 구할지니라.(是名三觀 初首方便 若諸衆生 遍修三種 勤行精進 即名如來 出現于世 若後末世 鈍根衆生 心欲求道 不得成就 由昔業障 當勤懺悔 常起希望 先斷憎愛 嫉妬諂曲 求勝上心 三種淨觀 隨學一事 此觀不得 復習彼觀 心不放捨 漸次求證)

 

해설: 삼관은 위덕자재보살장에 있고, 변음보살장에도 있으며, 이 원각보살장에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원각보살장을 취했는가? 위덕자재보살장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자 하면 청정한 각심으로 적정을 취하고 수행할지니라.”(善男子 若諸菩薩 悟淨圓覺 以淨覺心 取靜爲行)라고 하니, 이는 보살의 분상이고, 중생은 그림의 떡이다. 중생은 청정한 각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원각보살장의 삼관은 중생만 있고, 보살은 없다. 이 때문에 범부중생은 문수보살장을 의지하여 신문信門을 성취하고, 이 원각보살장의 삼관을 의지하여 수행하는 법이다.

먼저 사마타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사마타를 닦고자 하면 먼저 지극한 적정을 취하고 사념을 일으키지 말라.” 첫째 어떻게 지극한 적정을 취할 수 있는가? 둘째 어떻게 사념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

다음 삼마발제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삼마발제를 닦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시방여래와 시방세계의 일체보살이 갖가지 문에 의지함을 회상하라.” 가능한가?

마지막 선나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선나를 닦고자 하면 먼저 수문數門을 취하라.” 이에 대하여 감산스님이 자비를 베푸셨다. 아래와 같다.

 

감산직해: 이는 적관寂觀의 초수방편을 현시한 것이다. 선나는 그 뜻이 중도일심에 상당하니, 이름을 적관이라 한다. 먼저 수문을 취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입선하는 최초 공부이기 때문이다. 수선하는 사람이 한결같이 마음에 잡란이 많으면 적정을 얻기가 어려우며, 이 때문에 먼저 수문으로 초수방편을 삼는다. 이른바 처음 마음을 섭수하고, 먼저 한숨에 돌아가며, 숨의 출입에 의지하고, 헤아려 숨의 수를 세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에 이르고, 또 열에서 하나에 이르는 것이니, 이와 같이 왕복하라. 숨과 숨이 끊어짐이 없고, 마음 마음이 어둡지 않는다. 생멸하는 숨의 수가 낱낱이 분명하고, 소수에서 다수에 이르기까지 선정력의 심천을 증험한다. 만일 구구하여 순숙하면 숨의 수가 일념불생에 이르고, 그러면 그 숨이 저절로 끊어지며, 적연한 일심이 담연히 안주하니, 이는 정상定相이다. 이와 같이 두루 미치면 사위의 중에 염념을 분명히 알고, 구구하면 백천 세계가 오직 마음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나아가 한 물방울의 비까지 분명히 알 수 있으니, 마치 눈으로 만물을 보는 것과 같다. 이는 적정관이 공력을 성취한 것이다. 저 기신론에서 말한 바, “지관을 닦는 자는 기식을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그 기신론은 안으로 몸과 마음을 벗어남을 관건으로 삼은 것이고, 여기서 숨을 의지한다는 것은 초기가 마음을 섭수함을 방편으로 삼는 것이니, 구경이 숨을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숨을 증득으로 삼는다면 곧 사도에 떨어지니, 그 들은 바가 아니다.(此示寂觀方便初首也 禪那義當中道一心 名爲寂觀 言先取數門者 正入禪最初工夫也 以修禪人一向心多雜亂 難得寂靜故 先以數門爲首 謂初攝心 先歸一息 依息出入 爲度數之 從一至十 又從十至一 如此往復 息息不斷 心心不昧 生滅頭數 一一分明 自少至多 以驗定力淺深 若久久純熟 數到一念不生 則其息自斷 寂然一心 湛然安住 是爲定相 如此周遍 四威儀中 念念了知 久則百千世界唯心所現 乃至一滴之雨分明了知 如目覩物 此寂靜觀之成功也 如起信所說 修止觀者 不依氣息 彼以內脫身心爲要 此依之者 以初機攝心爲方便 非究竟依之也 若以息爲得 則墮邪道 非彼所聞也)

 

초수방편은 초학자가 수행문에 처음 들어가는 방법을 말한다. 호흡법 중에 수식관이 있다. 하나에서 열에 이르고, 또 열에서 하나에 이르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나서 조금 멈추고, 다시 천천히 내쉬면서 하나를 세고, 같은 절차를 반복하며 둘을 세며, 차례로 열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아홉을 세고, 차례로 하나에 이른다.

감산스님은 기신론을 골라서 인용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만일 지관을 닦는 자라면 정처에 머무르고, 단정히 앉아 그 뜻을 바르게 하며, 기식에 의지하지 않고, 형색에 의지하지 않으며, 허공에 의지하지 않고, 지수화풍에 의지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각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일체 모든 생각을 일념에 따라 모두 제거하고, 또한 제거한다는 생각도 차견한다. 일체법이 본래 체상이 없기 때문에 염념이 불생이고, 염념이 불멸이다. 또한 일심을 따르는 일 밖에 경계를 생각한 후에는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하지 못한다.”(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 以心除心)

 

8. 결어

순치황제 출가시에, “백년의 세간사는 삼경의 꿈과 같고, 만리 강산의 천하사는 한판의 바둑과 같구나.”(百年世事三更夢 萬里江山一局棋)라는 명구가 있다. 일국一國의 정치를 일국一局의 바둑에 비유한다. 글도 또한 그러하다. 바둑에 맥점이 있는 것처럼 글에도 문맥이 있다. 그 문맥이 훤히 보여야 전체 문장의 대의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원각경은 내가 번역하거나 해설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이는 마치 봉사가 코끼리를 만지고 그 형상에 대하여, “코를 만진 자는 쟁기처럼 생겼다. 다리를 만진 자는 기둥처럼 생겼다. 엉덩이를 만진 자는 넓은 바위처럼 생겼다. 꼬리를 만진 자는 긴 동아줄처럼 생겼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우화는 원래 부정적으로 쓰였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내가 원각경을 번역하고 해설한 것이다.

공안 하나를 타파하면 1천7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한다고 말한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눈을 뜬 사람은 코끼리 전체를 볼 것이고, 봉사는 그 일부만 볼 것이다. 달마선을 상전한 조사도 또한 결코 예외는 아니다.

가령 하택스님은 선가에서 지해종사라 폄하하지만, 청량국사는 오히려 수남선지식水南善知識이라 호칭했고,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론을 써서 마조가풍을 드날렸다고 지금도 찬탄하고 있다. 그러나 하택스님과 대주스님도 또한 원각경의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성취한다.”(有性無性 齊成佛道)라는 여래의 수순각성隨順覺性 경계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 경계를 혜충국사는 “이는 어쩌면 보현이나 문수와 같은 대인의 경계일 것이다.”(此蓋是普賢文殊大人之境界)라고 감파하셨다. 참으로 탁월한 안목이다.

청량국사(738 - 839)와 동시대인의 선사는 부지기수이다. 선학의 황금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석두(700 - 790) 마조스님(709 - 788) 등 달마8세부터 약산(745 - 828) 남전(748 - 834) 백장(749∼814) 위산(771 - 853) 조주(778 - 897) 운암스님(781 - 841) 등과 제11세 덕산 앙산 동산 임제스님 등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조사문중의 어떤 조사도 조사선의 도리로 청량국사를 대면하여 여래선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진상을 정확히 보는 안목을 정안이라 한다. 대혜스님을 그 문손이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칠지보살이라 추앙했다. 능가경에 이르기를, “남천축국 가운데 대명덕 비구는 그 당호가 용수이니라. 능히 유무종을 타파하고, 세간 중에 몸소 무상 대승법을 드러내리라. 초지 환희지를 얻고, 안락국에 왕생할 것이니라.”(南天竺國中 大名德比丘 厥號爲龍樹 能破有無宗 世間中顯我 無上大乘法 得初歡喜地 往生安樂國)라고 하니, 이를 의거하면 용수보살은 초지 환희지보살이다. 대혜스님의 역량이 용수보살을 능가할까? 그런데 역대전등조사를 초지나 칠지도 아닌 불지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또 화두를 타파하면 일초직입여래지한다고 말한다. 과연 가능할까? 꿈을 깰 때는 이미 자나갔다. 지금처럼 대명천지가 또 어디 있었던가?

 

각설하고, 문수보살은 일체여래의 스승이기도 하고, 일체중생의 스승이기도 한다. 불문에 들어서고자 하면 먼저 스승을 찾아야 한다. 내가 두고 쓰는 문자가 있다. 천리 길을 가고자 함에 첫걸음을 올바르게 옮겨야 한다.(千里行程 一步要正) 어째서 문수보살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해야 옳은가? 이 문수보살장의 핵심이 인지법행이다. 법행은 칭법행이고, 정행이다. 정사를 무엇으로 판별하는가? 지혜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표법한다. 이 때문에 일체여래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일체중생의 스승이 될 수도 있다. 이 지혜광명으로 정사를 판별하고, 첫걸음을 올바르게 옮겨갈 수 있다. 걸음마다 그러하다. 원각경의 이 문수보살장은 횃불이고, 등대이다. 가는 길을 밝혀줄 것이다.

 

2022년 5월 21일 소만초하길일 74세 길상묘덕 씀

 

 

 

 

 

 

 

 

원각경 문수보살장과 인지법행

 원각경 문수보살장과 인지법행 명문을 주옥같다고 말한다. 이 원각경의 문수보살장이 그러하다. 한 글자마다 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의미가 무한대로 확장한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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