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是謂玄牝
곡신불사 시위현빈
앞에서 말했지만 노자는 《도덕경》5천 글자를 통틀어 다른 사람들이 쓴 적이 있거나 널리 쓰이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백 프로 노자의 오리지널 창작어들이다. 노자가 지어낸 단어들이어서 이런 고유명사가 뭔지를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해석이 구구하고 중구난방 지멋대로다.
이런 조어(造語)의 능력이 뛰어나기로는 지나인보다는 오히려 고대 인도인이다. 불경을 읽어보면 말을 만들어내는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문학적 가치만으로도 인류의 보고라 할 만하다. 특히 이름을 지어내는 데는 도가 텄다. 부처님한테 놀라는 게 바로 작명력이다. 온갖 대상 온갖 사물에 수천 수만 가지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신들의 이름부터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난해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명칭까지 멋지게 이름들을 척척 만들어 붙이는데, 불경에 등장하는 신과 보살, 신장들의 이름만 해도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다. 거기다가 해탈이니 열반이니, 반야니, 업이니, 보니 하는 것들도 전부 다 지어낸 말들이거든. 깨달음 한 가지를 가지고 만들어 붙인 이름이 수백 가지는 될 거야.
하지만 불교는 이런 이름들에 대한 설명이 그 작명자인 부처님의 설명을 통해서 밝혀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고, 또 그 의미를 놓고 이설이 분분할 이유가 별로 없다. 반면에 노자 할아방의 글은 《도덕경》의 원문만 전할 뿐 노자가 이에 대해 설명해놓은 강의록이 전해지지도 않고 노자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은 제자도 없어서 겨우 왕필이 해놓은 주해가 고작이다. 그런데 왕필의 주해라는 것이 불경처럼 직접 그 원작자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기록한 게 아니고 왕필이 지 멋대로 풀어놓은 것이어서 보다시피 별 신빙성이 없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노자의 창조어들이 이 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 이 문장의 처음에 나오는 ‘곡신(谷神)’을 이런 고유명사로 착각한 나머지 이 장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제대로 풀어지지 못했다. 뒤의 현빈(玄牝)은 노자가 지어낸 고유명사지만 ‘곡신(谷神)’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게 헷갈려서 ‘곡신’이 도대체 뭐냐? 해서 2천 년 동안 별의별 해석이 난무했다. 가장 골 때리는 해석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지금 중국이나 대만의 내로라하는 동양학자들 중에는 ‘곡신’을 단전(丹田)이라고 우기는 놈도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기공 수련의 요체라고 뻗대는 거다. 웃기는 놈들이지. 앞으로도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이상한 글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을 죄다 신선술의 비결로 풀어 젖히는 웃기는 짜장면들이 한둘이 아이다.
바로 뒤에 오는 문장이 뭐야? ‘시위현빈(是謂玄牝)’이다. ‘검을 현’ ‘계곡 빈’이다. 그래서 ‘시위현빈’은 ‘이것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다. 그렇다면 당근 앞 문장의 의미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계곡’에 대한 이야기라야 된다. 이게 문장의 법칙이다.
때문에 이 ‘곡신불사(谷神不死)’의 뜻은 ‘계곡의 신이 죽지 않는다’가 아니고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을 말한다. 띄어쓰기를 해서 읽으면 ‘곡(谷),신불사(神不死)’다.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뭐냐? 바로 신선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고 해탈의 세계이고 부처가 사는 곳이고 노자 할아방이 장자 할아방하고 바둑 두는 무릉도원이고 무극(無極)이고 태허(太虛)의 자리고 내가 죽은 다음에 갈 곳이고,
‘곡신은 안 죽는 신인데 이름이 현빈이다’ 이런 문장은 초등학생 작문에도 안 나와. 이미 곡신이라는 신의 이름이 나왔는데 뭔 이름이 또 나오느냐 말이다. 한문을 이 따위로 읽는 넘들은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를 알기 쉽게 ‘신불사곡(神不死谷)’으로 써놓으면 이번에는 ‘신은 계곡에서 죽지 않는다’로 번역하고 자빠질 넘들이다. 바로 쓰나 거꾸로 쓰나 못 알아멱는 넘들한테는 똑같은 거야.
다음 구절에 ‘현빈’을 옥편만 들고 찾아봐도 ‘검을 현에 계곡 빈’인데 이게 ‘검은 골짜기’나 ‘신비한 골짜기’로밖에 해석이 더 되나? 물론 ‘현빈’은 ‘현빈’이지 ‘검은 골짜기’나 ‘신비한 골짜기’는 아니다. 그냥 이름이 ‘현빈’이다. 그러나 한자의 뜻을 봐야 감이 잡히는 수준이라도 최소한 ‘검은 골짜기’로는 찍어야 된다. 그러면 당연 앞 구절의 의미는 뻔하잖아. 뒷구절에서 ‘이를 일컬어 이름을 뭐라고 한다’고 나왔으면 앞 구절에 있는 것은 당근 이름이 무엇인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이겠지.
‘이름을 현빈이라고 하는 무엇은 바로 신이 불사하는 계곡이다’라야 말이 되지. 이걸 ‘이름을 현빈이라 하는 무엇은 곡신이라고 하는데 이 놈은 죽지 않는다’로 풀어봐, 골이 어지럽지. 도무지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잖아.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곡신불사, 시위현빈’은 ‘신이 영생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곳을 가리켜 현빈이라 하느니라’ 하는 말이다. 고대 지나나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신은 영원히 존재하여 불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부처, 보살, 신장은 인간세의 수명에 비하면 영원한 시간상의 존재지만 그것들도 모두 인연법에 의해 나타난 존재일 뿐이어서 언제나 인연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며 영원불사하는 존재는 없다고 본다. 생자필멸은 불변의 법칙이며 영적인 존재인 신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 시간적 개념이 비록 억겁으로 세는 것이긴 해도 인간세 60년이나 부처의 억만 겁이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찰나지간이긴 마찬가지이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암만 멀어도 무한한 우주 공간적 거리에서 보면 지구상의 개미가 1분 동안 기어가는 거리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적으로 유추하면 그것은 해탈의 경지고 도피안이다. 해탈이란 인연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연법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현상계에 내보내는 세계의 법칙이다. 인연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과의 영원하고 완전한 작별이다. 아디오스 발발탄이다. 부처는 이 세계와 저쪽의 경계를 넘어 가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실제로 부처는 우리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무리 부처님 전에 엎드려 애처롭게 빌어도 부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만약에 그 소리가 들리고 그 간절한 하소연에 부처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부처와 나는 인연에 의해 연결되는 상대자가 된다. 부처 역시도 나와의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부처의 해탈은 뻥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구라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너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존재로 돌아가버린 사람이어서 너희에게는 무용(無用)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은 부처한테 절하고 공양을 하고 염불을 해봤자 기대할 게 없다는 얘기다. 우리한테 소용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부처가 남긴 가르침이고 그 말씀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등불로 삼으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가 저쪽 세계로 아주 가버려서 아무런 영험도 없고 기도빨도 안듣는다면 우리 같은 중생 입장에서는 믿을 이유가 없잖아. 말씀인즉슨 암만 진리라 쳐도 중생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아플 때 낫게 해주는 거고 돈 잘 벌게 신이 도와주는 거고, 애 못 낳는 여자 아들 하나 뽑아내게 해주는 거 아냐? 맞지? 그런데 무슨 영험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인다. 이게 종교다.
그래서 불교에서 영험 없는 부처 대신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게 뭐게? 바로 보살들이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보살들이 피안으로 영영 가버린 부처를 대신해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풀어준다. 이게 보살신앙이다. 보살이란 어떤 존재냐? 부처님처럼 아주 ‘현빈’으로 가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 고해에서 신음하고 인연법에 묶여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가련함과 측은지심 때문에 마지막 한발자국 앞에서 해탈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들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구원해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연법의 세계 속에 자신을 남긴 사람들이 바로 보살들이다.
이런 보살들은 실제로 기도에 응답을 하고 영험도 보여준다. 지장보살은 이 세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제도하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모두 풀려난 다음 지옥불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부처님 뒤를 따라가겠소이다, 하고 부처님께 서웒나 사람이다. 이런 보살들은 겁의 세월을 두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겠지만 그것도 인연이 다하면 부질없이 잊혀질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간에 지금 부처가 가 계신 그런 곳을 노자는 일컬어 ‘현빈’이라 하는 거다.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곳. 그런 곳은 인연에 따라 성주괴공하는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 말로 이 세계가 있게 된 근본이다. 이 세계가 그 곳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다. 그곳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피안이며, 도요, 현빈이다. 바로 노자의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 그 말이다. ‘현빈의 들어가는 입구야말로 천지의 근본이다’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넘어 가버린 그 문이 바로 ‘현빈지문’이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에 뒤돌아보다가 차마 넘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바로 그 자리가 ‘현빈지문’이다.
그 문을 여는 데는 정말로 모질고 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두고 가는 형제들, 자식들, 모든 사랑했던 사람들, 생명의 유혹과 그 본능까지도 다스려 잡지 못하면 넘지 못하는 문이다.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자리이고 영원불사하는 세계이며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없는 곳이며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자리이다. 기독교인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가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그 우편에 베드로가 왼편에 바울이 있으며 천사 미카엘이 그 날개로 이 세계를 덮고 서 있는 그 장소가 바로 ‘현빈’이다.
‘혹불영’,‘채워져 있지 않다’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다. 즉 ‘현빈’이라는 것은 ‘천지의 근원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지만 쓰임(用)에는 게으른 것’이라고 노자는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때문에 ‘약’은 ‘~이지만’ 또는 ‘~일뿐’이라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면면약존 용지불근’을 보기 좋게 옮기면 ‘영원토록 이어져올 뿐 쓰임은 없느니라’가 된다. ‘용지불근’은 곧 ‘이용지혹불영’이고 ‘도무용(道無用)’이다.
부처의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한 개인의 해방이고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곧 이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차안과 피안의 강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피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안의 입장에서 피안은 아무 소용이 없는 땅이다. 그것은 그곳으로 건너 가버린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아직 차안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무용지지(無用之地)다. 오직 한 가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나무 한 그루, 석탄 한 조각, 과일 한 개 그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없음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용지혹불영’ ‘용지불근’이라 말하는 것이다.
바른 번역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하느니라.
그 계곡의 문이야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
[출처] 도덕경/또다른해석3/신이 죽지 않는 계곡|작성자 뜰앞의 잣나무
'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 도덕경 해설 11-20 (1) | 2023.01.22 |
---|---|
노자 도덕경 해설 1-10 (2) | 2023.01.08 |
노자 도덕경의 명언 (0) | 2022.12.11 |
도덕경/또다른해석2/'미치고 환장' 하는 증세가 계속 심해지면 '지랄염병'도 오게 된다 (0) | 2022.11.27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명언 프리미엄 10선選 (0) | 2022.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