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5.원허효선 - 일에 끄달려 목숨 줄어드는 걸 알지 못하네

수선님 2023. 1. 1. 15:41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5.원허효선

일에 끄달려 목숨 줄어드는 걸 알지 못하네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표훈사에 40년간 머물며 눈 밝은 납자들이 정진할 수 있도록 외호했던 원허(圓虛, 1889~1966)스님.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남 돕는 것을 좋아해 ‘관음보살의 화신’이란 별칭을 지녔던 스님의 삶을 상좌 인환스님(동국대 명예교수)의 회고와 일제강점기 발간됐던 <금강산> 을 참고해 정리했다.

 


“일에 끄달려 목숨 줄어드는 걸 알지 못하네” 
  금강산 표훈사에 머물며 납자들 ‘뒷바라지’
  원불ㆍ나무상자ㆍ.헤진 승복이 ‘소유의 전부’

 

○…1950년대 중반. 조선시대 상궁을 지낸 70~80대의 할머니들이 원허스님을 찾아와 깍듯한 예로 3배를 올렸다. ‘상궁 보살’들은 일제강점기 원허스님 은사인 관허스님과 인연이 깊었다. 나라가 망하고 왕실이 퇴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상궁보살’들에게 불법(佛法)을 전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관허스님은 궁궐에 들어가 상궁들에게 법문을 하기도 했다. ‘상궁보살’들은 “우리들은 큰스님의 가르침을 잘 모시는 것이니, 어려움에 굴하지 말고 뜻을 성취하시라”며 정화불사에 나섰던 원허스님을 후원했다.

 

<사진>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불릴 정도로 자비로웠던 원허스님.

○…금강산의 대가람 표훈사에 40년간 주석하면서 한때는 주지까지 지냈지만 그 어떤 재물도 당신 것으로 삼지 않았다. 스님이 남긴 유품은 평생 원불(願佛)로 모셨던 불상과 나무상자, 승복 한 벌이 전부였다. 떨어지고 헤어진 부분을 손수 꿰매 누더기가 된 승복과 책상겸 수납장으로 사용한 나무상자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스님의 모습을 대신 보여준다. 생전에 스님은 후학들에게 재물을 아끼라며 이렇게 당부했다.


“예로부터 출가자들이 재물을 탐하다 죽으면, 능구렁이가 된다고 했다. 삼보정재를 부처님 대하듯 소중하게 여기고, 재물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나눠 주었지만, 원허스님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했다. 신도나 다른 스님뿐 아니라 상좌들의 시봉도 마다했다. 상좌가 스님의 옷을 빨려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아니다. 내가 입은 것은 내가 빨아 입어야지. 너들에게 맡겨서야 되겠느냐. 너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진하여 다른 사람을 불법으로 인도해라.”


○…스님은 대중울력에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1955년 8월 양양 낙산사 주지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은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아 마을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와야 했다. 스님은 60 중반의 노구를 무릅쓰고 손수 물을 길어왔다. 상좌와 신도들이 만류하자, 그 후에는 몰래 다녀왔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이 “물은 저희들이 길어올테니, 스님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원허스님의 답은 이러했다. “울력이라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중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淸水)이고, 대중이 함께 사용하는 물을 길어오는 것인데, 어찌 가릴 수 있게는가.”


○…1950년대 중반 정화불사로 전국 사찰에서는 분쟁이 계속됐다. 물리력이 동원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구측 5인 대표로 참여할 만큼 정화불사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스님은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낙산사를 정화할 때도 “굳이 그들(대처승과 그 가족)을 내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낙산사에서 물러난 대처승과 가족들은 사하촌에서 낙산사 소유 전답을 농사지으며 살 수 있었다.


○…1935년 표훈사 주지로 금강산불교회장을 맡은 원허스님은 근대불교 잡지 <금강산>을 발간했다. 창간호 ‘서원의 말씀’을 통해 <금강산>을 펴내는 뜻을 밝히고 있다. “… 소승은 일찍이 입산하여 금강산 표훈사에서 주석해온지 이미 30년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원래 범위가 넓고 이치가 깊어 경문으로나 참선으로나 그 밖에 절간수호 사무정리의 사업 등 여러 가지 길로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머리털이 반백 되어 살날이 얼마 없는 오늘을 당해서 불교가 조선에 대한 것과 금강산으로서 조선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본즉 불교의 주인인 일분자(一分子)로서 또는 금강산의 주인인 일분자로서 내어놓을 것이 없을 만큼 한 것이 없고, 지은 것이 없음으로 뉘우치는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서 흐를 따름입니다.”


○…원허스님이 주도한 금강산불교회는 1935년 9월7일 경성부 수송동 82번지 각황사에서 발회식(發會式, 새로 만들어진 회의 첫 모임)을 거행했다. 금강산불교회는 사업으로 △불교 연구및 발표 △경전 번역및 해석 △포교서적 편찬및 출판 △잡지 간행 △심전(心田)개발및 농촌진흥 지도사업 △기타 일반사회에 공헌할만한 문화 사업으로 정했다. 고문에는 만공(滿空).종헌(宗憲,만암).경봉(鏡峯).한영(漢永,석전).한암(寒巖) 스님 등 당대의 고승 45명이 위촉됐다.


○…금강산 온정리 온정천 다리 건너 숲에 여여원(如如院)이 있었다. 석두스님과 효봉스님도 한때 정진한 수행처였다고 한다. 당시 여여원에 있던 한분이 금강산불교회를 조직하고 <금강산>을 발행하려고 바쁘게 다니는 원허스님을 본 소감을 이렇게 밝힌바 있다.


“원허가 절에서 공부하지 않고, 무엇하러 서울만 오르내리고 있는가 했더니, 나는 이번에 서울 가서 만들어왔다는 법기보살 책을 읽고 대단히 감심(感心, 감사한 마음)한바 있었소. 내가 이것을 보고 감심이 될 때에야 다른 사람인들 아니 그럴리 있겠소. 불교 사업이라면 절이나 고치고 개금불사나 하고 기도나 하는 것으로 알았더니, 참으로 불교 사업을 하려면 이렇게 책 만드는 사업을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경성에 머물던 신도의 회고이다.


“원허스님이 이번에 큰일을 했습니다 그려, 법기보살 책을 만들어 돌려서 신도마다 스님 말씀을 하고 또 명선행 마님의 말을 하며 모두 부러워하고 돈만 있으면 이러한 사업을 해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원허스님은 문집이나 법어집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 사진이나 유품도 전하는 것이 극히 일부이다. 평생 검소하게 지냈던 스님의 일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금강산불교회장을 맡아 발간했던 <금강산>에는 원허스님의 글 몇 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글 두 편을 소개한다. 하나는 중국 수당시대의 고승 선도대사(善導大師, 613~681)가 지은 시로 다음과 같다. 원허스님의 한글풀이를 시대에 맞게 약간 수정했다.


“人間營衆務(인간총총영중무) / 不覺年命日夜去(불각년명일야거) /
如燈風中滅難期(여등풍중멸난기) / 忙忙六道無定趣(망망육도무정취)”


“인간이 바쁘게 일에 끄달려 / 목숨이 줄어드는 걸 알지 못하네 /
바람 앞 등불이 위태하구나 / 육도에 바빠 정처가 없네”


원허스님은 “모든 사람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설치나 그러는 동안에 낮과 밤에 목숨이 줄어 들어감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사진> 원허스님은 표훈사 주지로 있으면서 납자들의 공부를 도왔다. 사진은 표훈사 산내 암자인 마하연.

○…또 다른 글은 <백유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今日營此事(금일영차사) / 明日造彼事(명일조피사) /
樂着不覺苦(낙착불각고) / 不覺死賊至(불각사적지)”


“오늘은 이 일하고 / 내일은 저 일하며 /
질기게 살다가 / 덧없이 죽는구나.”


1936년 새해를 맞아 <금강산>에 게재한 ‘새해에 대한 희망과 감상’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우리는 세월이 가고 오는 이러한 송구영신의 때를 만나서 한번 무상을 깨치고 무슨 사업을 이루어 보도록 각성하여 깨치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고 믿습니다. 예로부터 ‘기러기는 하늘 끝에 날아가매, 자취를 모래위에 머무르고, 사람은 황천으로 돌아가매 이름만 세상에 남아있느니라’ 이러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산천도 변하고 바다도 변하고 사람도 죽고 짐승도 죽고, 생명은 죽고 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이렇게 변하고 죽는 가운데도 말(言語)과 생각(思想)과 사업(事業)은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로 표현한 그 자리에서는 당장 없어지고 마는 것이나, 그 언행이 누구의 귀에든지 들어가기만 하면 악한 것은 악한대로 착한 것은 착한대로 여러 만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가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도 생각한 그 자리에서는 곧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이 생각이 한번 발표만 되면 여러 사람의 생각을 통해서 선악간에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생은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언행을 후세에 남기며 좋은 생각을 만대에 전하도록 힘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 행장 ■

 

금강산불교회 조직
잡지 ‘금강산’ 발간


1889년 10월 경기도 안성군(지금은 안성시) 양성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崔氏). 어린 시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09년 20세가 되던 해 금강산 표훈사에서 전관허(全貫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 당시 표훈사에는 만해(卍海) 한용운 스님이 강사 소임을 맡고 있었다. 행자생활 3년을 마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는데, 이때가 1912년 2월이다. 이후 스님은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스님은 늦은 나이에 안변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강원을 졸업한 직후인 1935년 10월 표훈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주지 취임 후 금강산 지역 스님과 함께 전국의 선지식들을 고문으로 위촉하고 ‘금강산불교회’를 만들었으며 불교잡지 <금강산>을 발간했다.


한국전쟁 당시 표훈사를 떠나지 않았던 스님은 1951년 남쪽으로 내려왔다. 원허스님이 부산으로 피난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표훈사에서 스님 신세를 졌던 많은 수행자들이 찾아왔다. 스님은 범어사를 거쳐 부산 선암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서옹.지월.석암.월산.성철.향곡스님 등 40여명의 대중과 정진했다.


정화불사 당시 비구측 5인 대표를 맡으며 한국불교 정통성 수호를 위해 노력한 스님은 월정사.건봉사.신흥사.낙산사 등 강원도 사찰의 정화를 책임졌다. 1955년 8월 양양 낙산사 주지를 맡은 것도 이 무렵. 1962년 4월 효봉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추천으로 불교재건비상종회 임시의장을 맡았다.


서울 적조암에 머물던 스님은 바깥출입을 삼가며 말년을 보내던 1966년 12월29일 오전 5시30분 평소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 원적에 들었다. 이때 세수 78세, 법납 60세였다. 영결식은 1967년 1월2일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 원허당 대선사 총무원장(葬)’으로 엄수됐으며, 스님의 법구는 다비후 적조암 근처에 뿌려졌다. 상좌 대부분은 북쪽에 남았고, 남쪽에서 들인 상좌가 동국대 명예교수 인환(印幻)스님이다.

 

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495호/ 2009년 1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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