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7.환응탄영
세상은 무상하니 자네들도 ‘묘한 진리’ 찾아라
일제강점기 조선불교 교정(敎正)으로 불자들을 불문(佛門)으로 인도한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스님. 경허(鏡虛, 1846~1912)스님과 동일한 시기에 태어나 침몰 직전의 조선불교를 구한 환응스님은 장성 백양사와 고창 선운사에 주석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환응스님의 수행과 행장을 선운사에 있는 비문과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불교(佛敎)>를 참고해 정리했다.
“세상은 무상하니 자네들도 ‘묘한 진리’ 찾아라”
25년간 백양사 운문암서 두문불출
선.교.율 겸비 평생 ‘일종식’ 수행
○…율사(律師)이며 강사(講師)였던 환응스님은 계율을 지키는데 엄정하고 빈틈이 없었다. 어찌나 엄격하게 계율을 호지하는지 다른 스님들이 쉽게 본받을 수 없었다. 환응스님은 변소(便所,지금의 해우소)에 갈 때면 반드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배울 때 입은 옷 그대로 변소까지 가지 않았던 것이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에는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다른 일을 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수행했던 환응스님의 철두철미한 계율 호지는 후학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세속과 인연을 끊은 출가자라도 바깥출입을 전혀 안할 수는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25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산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환응스님은 백양사 운문암에 강석(講席)을 연후 외부 출입을 삼가고, 25년간 도제양성에 전념했다. 또한 스님은 30본말사법 시행직후 첫 백양사 주지 소임을 맡았는데, 세수 64세의 노구였다. 이때도 스님은 공무(公務)로 장성군청에 한차례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중생에게 의식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범부들이 의식주에 끄달려 헛된 집착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사바세계의 모습이다. 이에 비해 바른 수행자라면 의식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율장(律藏)에 엄격했던 환응스님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수행에 몰두했다. 평생 일종식(一種食)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스님에게 음식은 주린 배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수행하는 몸을 지탱하는 약(藥)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고, 백양사 주지 소임을 볼 때는 신도들이 스님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스님은 절대로 당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남 앞에 서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언제나 말을 아끼며 수행에 몰두했을 뿐이다. 더구나 스님은 평생을 지내면서 남에게 모진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자비보살이었다.
○…세상과의 인연을 놓아야 할 즈음. 고창 선운사에 머물던 환응스님은 백양산(白羊山, 지금의 백암산)에 이별을 알리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나섰다. 장성 사거리역(지금의 백양사역)에서 자동차를 대절한 환응스님은 1929년 3월10일(음력)부터 5일간 백양사와 운문암을 순례했다. 전각마다 들려 불보살께 정례(頂禮)를 하고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고(告)했다. 평생 수행자로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준 불은(佛恩)에 고마움을 표했던 것이다. 환응스님은 그로부터 20여일 후 원적에 들었다.
○…입적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환응스님은 당신을 시봉하는 손상좌 현학(玄鶴)을 찾았다. “네가 며칠 동안 어디를 다녀온다고 했지.” “네 스님, 군산에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3일 내로 꼭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너에게 부탁한 것을 (네가)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공무 때문에 부득이 외출해야 하는 손상좌에게 환응스님의 신신당부가 이어졌다.
환응스님은 원적에 들기 전인 무진년(1928년) 2월15일 부처님 열반절 때 시봉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나도 이제 세상을 떠날 날이 수년 내 있을 것이다. 한번 왔다 한번 감은 감인계(堪忍界, 사바세계.인간세상)에 상사(常事, 보통일)가 아니냐.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언제든지 환망진구(幻妄塵垢)에 쌓인 몸을 일분일초라도 지체 말고 네 손으로 꾹꾹 묶어 얼른 태워 버리게 하여라. 나의 본원(本願)이 있는바 화장(火葬)도 속히 될 것이다.”
○…시적(示寂) 당일 환응스님은 군산에 다녀온 시봉에게 “너 잘 왔다”라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한참 말문을 닫고 조용히 있던 스님은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하하. 우습구나. 참 묘(妙)하고 묘하구나”라며 문도들을 돌아본 후 유훈을 남겼다. “세상은 무상이다. 자네들도 백사(百事, 여러 가지 일, 모든 일)를 수연(隨緣, 인연에 따라서 현상을 일으킴)하면서 묘한 진리를 제각기 한번 찾아보아야 하느니…….”
○…부안 개암사 주지 안주봉(安舟峰) 스님은 <불교> 68호에 환응스님의 입적을 안타까워하는 애사(哀辭)를 게재했다. “禪師(선사)는 佛日(불일)이 暮(침모)한 근대에 현세(現世) 하시와 早年(조년)부터 三藏(삼장)의 敎海(교해)에 심원한 涉閱(섭열)을 다하시고 轉法(전법)이 軌輪(궤륜)을 持(지)하시와 扶宗樹敎(부종수교)의 主義(주의)에 육십년간을 自强(자강)하야 百千(백천)의 徒衆(도중)을 度化(도화)하시더니 今年初夏(금년초하)에 사바세계의 衆緣(중연)을 여의시니 全鮮佛門(전선불문)의 不運(불운)을 당함은 물론이어니와 湖南釋苑(호남석원)의 불행이 더욱 莫甚(막심)하도다. 先敎正(선교정)께서는 入寂(입적)과 出寂(출적)에 자재로하섯건만 우리의 凡根(범근)으로는 泥蓮河側(니련하측)과 領途中(총령도중)의 景光(경광)을 당한 것과 無異(무이)하도다. 우리는 이로부터 어데서 종지를 詳考(상고)하며 학업을 問修(문수) 하오릿가.”
○…추사 김정희는 평소 존경하던 백파(白坡, 1767~1852)스님에게 5가지 호를 지어 보냈다. 추사는 이 편지에서 “뒷날 스님의 후학 가운데 식도리자(識道理者, 깨달음을 얻은 도인)가 나오거든 이 호를 하나씩 나누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추사가 지은 호는 깊이 감추어져 대를 이어 내려왔다. 그 결과 설두(雪竇)는 유형스님, 다륜(茶輪)은 대흥사의 다륜 스님, 환응(幻應)은 탄영스님, 석전(石顚)은 구암사의 박한영 스님, 만암(曼庵)은 백양사 종헌 스님에게 돌아갔다. 추사와 백파스님의 뜻대로 당대의 선지식들에게 호가 전해졌던 것이다.
■ 행장 ■
도제 양성 ‘최선’
석전ㆍ만암ㆍ장조
스님 등 후학 배출
환응스님은 1847년 4월 전북 고창(당시는 무장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기우(金基愚) 선생이고, 모친은 박씨(朴氏). 14세 되던 해 고창 도솔산 선운사에서 성일(性鎰)스님 상좌로 출가해 탄영(坦泳)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어 보월(寶月)선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16세부터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하던 경담(鏡潭)스님에게 내전(內典)을 두루 배웠다. 1865년(19세)에는 경담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선.교.율을 고루 갖춘 경담스님은 화재로 소실된 운문암을 중창했다.
환응스님은 순창 구암사(龜岩寺) 설두(雪竇)스님과 순천 송광사 우담(優曇)스님 회상에서 교학을 깊이 공부했다. 31세에 경담스님에게 입실(入室)하여 환응(幻應)이라는 법호를 받은 후 운문암에서 25년간 강석(講席)을 열었다. 백양사와 산내 암자인 청류암(淸流庵)에서도 후학을 지도했고, 노년에는 운문암 곁에 우은난야(愚隱蘭若)를 짓고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청류암에 신식교육기관 광성의숙을 건립한 것도 스님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1912년 64세에 백양사 제1세 주지를 맡았다. 후임 주지는 환응스님의 전강제자인 만암스님이다. 1915년에는 광성의숙 숙장겸 강사로 도제 양성에 힘썼다.
1921년 제자 호명(浩溟)스님이 고창 선운사(禪雲寺) 주지가 된후 동운암(東雲庵)에 주석했다. 1929년 1월 7일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선임됐다. 교정은 지금의 종정(宗正)으로 조선불교에서 차지한 환응스님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함께 교정으로 추대된 스님은 다음과 같다. 한암(寒岩, 漢岩).해담(海曇).동선(東宣).한영(漢永).용허(龍虛).경운(敬雲)스님.
환응스님은 1929년 4월7일(음력) 오전 11시 고창 선운사에서 시적(示寂)했다. 세수 82세, 법납 64세. 다비후 수습된 사리가 사흘이나 방광하는 신이(神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후학으로는 호명(浩溟).영호(映湖, 朴漢永).만암(曼庵) 종래(鐘來).장조(長照) 스님 등이 있으며, 1942년 6월 선운사에 비가 모셔졌다.
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00호/ 2009년 2월14일자]
'큰스님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9.제산정원 - 도솔천을 묻는다면 주장자 들어 보여 주리라 (0) | 2023.04.02 |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8.동암성수 - 법신 성취했으니 변함없이 삼보에 귀의하노라 (0) | 2023.02.19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6.도봉본연 - 한바탕 웃고 가노니 지옥과 천당을 가릴소냐 (0) | 2023.01.15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5.원허효선 - 일에 끄달려 목숨 줄어드는 걸 알지 못하네 (0) | 2023.01.01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4.몽초인홍 - 어려움 만나면 정성껏 기도하며 헤쳐가라 (0) | 2022.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