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無生)의 이치>
‘무생(無生)’이란 모든 현상은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생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고정된 실체가 존재해야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이 성립되겠는데, 연기법이 적용되는 무아(無我)의 세계에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면 생길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이라니 어떠한 존재도 새로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생(無生)’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다.
깨달으면 다른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무생이다.
따라서 무생이란 ‘무생의 이치’, ‘남[生]이 없는 진리’, ‘불변의 진리’ 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상황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포함한다.
연기적으로 생성된 모든 사물은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조건의 이합집산이요, 형상과 현상[相]의 변화에 불과하다.
사물의 실체가 공한 것은 연기적으로 화합한 것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일시적인 가합(假合)이므로 생겨나도 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했을 뿐이다.
중생이 사물의 상(相)에 집착해서 실체성과 영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사견[生滅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생에는 이치[理]로서의 무생과 행위[行]로서의 무생이 있다.
이치로서의 무생은 무생법(無生法)을 이름이다. ‘무생(無生)의 법’은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결국 공(空)의 이치를 뜻한다.
그리고 ‘무생행(無生行)’이란 일체법이 무아(無我)라는 근거를 통해 ‘분별’에서 벗어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말한다.
무생행은 또한 시비 분별과 조작 관념이 없는 무념으로서, 무생의 실천으로서, 무공용(無功用-無爲)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생의 행위는 그 성품과 특성이 모두 공적(空寂)해서 형상으로 볼 수 없고 언설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취해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
원효(元曉) 대사는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무생법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허공에 형상과 위상이 없듯이 마음 역시 형상과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갓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허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듯이 마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허공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허공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지된다.
마음 역시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니 무생법(無生法)이란 모든 법의 본래 생겨남이 없는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자성 또한 없고, 그것을 얻게 하는 인행(因行)의 상 또한 없다. 깨달음 또한 간직할 만한 자성이 없고, 없애야할 망상도 본래 없다.
그래서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는 것이다.
분별하는 주체도 없고 분별되는 대상도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나 앎이란 주객이 나뉜 상태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如如함]이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성을 깨달아 분별한 사람은 마음의 성품이 여여함을 아니, 이 자성이 또한 여여한 것이 무생의 행(行)이다.
‘머물 곳이 없는 마음[무주심(無住心)]’은 집착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조용히 앉아 집착이 없는 마음만 챙기면 어떤 망념도 일어나지 않으니 좋거나 나쁘다는 생각 자체가 일어나거나 사라질 것이 조금도 없다. 이것이 생멸이 없는 마음인 무생심(無生心)이다.
다음은 대주 혜해(大珠慧海, 8~9세기) 선사의 저서 <돈오입도요문론>에 나오는 무생심(無生心)에 관한 글이다.
『다만 공한 생각을 지으면 곧 집착할 곳이 없으니, 네가 만약 머물 바 없는 마음을 분명하고 밝게 알고자 할진댄 바로 좌선할 때에 다만 마음만 알고, 모든 사물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며, 모든 선악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해 헤아리지 아니하면 과거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뿐이니, 집착함이 없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하느니라. 삼세를 거두어 모을 수 없음이 또한 삼세가 없다고 말하느니라.
마음이 만약 일어날 때에 따라가지 아니하면 가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 없어짐이요, 만약 마음이 머물 때에 또한 머묾에 따르지 아니하면 머무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머무는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이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느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머묾이 머묾에 있을 때에는 다만 사물이 머물 뿐이요, 또한 머무는 곳이 없으면 머무는 곳 없음도 없느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마음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면, 곧 본래 마음[本心]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성품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느니라.
만약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마음이란 곧 부처님 마음[佛心]이며, 또한 해탈심(解脫心)이며, 또한 보리심(菩提心)이며, 또한 무생심(無生心)이며, 또한 색의 성품이 공함이라 이름 하나니, 경에 이르기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했다'고 함이 이것이니라.
너희들이 만약 이와 같이 아직 체득하지 못했을 때는 노력하고 노력해 부지런히 공력을 더해 공부를 성취하면 스스로 알 수 있으니,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일체처에 무심함이 곧 아는 것이니라. 무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되어 참되지 않음이 없으니, 거짓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것이며, 참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라.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란 자연 해탈이니라.』
※무생법인(無生法忍)---불생불멸의 경지를 말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이 공이므로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음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어난 바가 없다는 무생법(無生法)의 깨달음을 확신해야 한다는 불교교리이다. 생하되 생함이 없는 이치를 말한다. 즉, 불생불멸하는 모든 상대적 모습을 떠난 마음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인(忍)’은 ‘참을 인’이 아니라 ‘인(印)’과 같은 의미라서 인가⋅인허의 뜻이고, 진리를 확실히 이해해서 정확히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당나라 때 방 거사(龐居士)란 분이 있었다. 본명은 방온(龐蘊), 자는 도현(道玄)으로, 대대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불교에 귀의해 수행을 해오다가 석두 희운(石頭希遷, 700-790) 선사를 참예해 여래선(如來禪)을 깨닫고, 후에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를 찾아가 조사선(祖師禪)을 깨달았다.
이후 재산을 모두 강에 넣어버리고 오로지 선학(禪學)에 집중하니, 인도 유마 거사(維摩居士)의 화신이라 불리었다.
유마 거사 그리고 신라의 부설 거사(浮雪居士)와 더불어 역사상 3대 거사로 칭송받는다. 그는 가는 곳마다 노장들과 번갈아 문답했는데, 마주한 이들의 근기에 맞추어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 응대할 만큼 뛰어난 선사가 됐다.
방 거사는 선(禪)의 깨달음이 펼쳐지는 장이 특별한 곳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석두 선사가 어느 날 거사에게 일상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묻자, 거사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열 곳이 없지만 굳이 말한다면, ‘특별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마조 선사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같은 맥락이다. 즉, 진리는 우리가 마주한 일상에서 구현되는 것이므로, 이를 떠나 따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한 것이다.
방 거사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선의 진리를 몸소 깨닫고 실천했다고 전한다. 그가 입적하기 직전 거사의 딸인 영조(靈照)가 그보다 먼저 자재한 모습으로 좌탈(坐脫)해버린 얘기는 아주 유명하다. 그로 인해 거사는 자신의 입적 시기를 일주일 늦추었고, 자신의 마지막을 지키던 주(州)의 목사에게 “있는 것은 텅 비우시고, 없는 것은 진실이라 여기지 마시오.”라는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중국 오대(五代)~송(宋) 시기의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종경록(宗鏡錄)>에서는 방 거사의 마지막 여정을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고, 무생(無生)의 종지를 묘하게 얻었다.’고 평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김없이 열어 보였던 인물이 바로 방 거사였다.
즉, 모든 법(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법이 공성(空性)인 불생불멸하는 진여당체(眞如當體)는 생기는 것이 없는 마음 곧 무생심(無生心)을 말한다. 결국 삼라만상이 모두 연기된 것이므로 공한 것이고, 무생이라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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