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 지음
2564. 2. 26.
제 6 장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 교화 사례
아픔 있는 중생을 찾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의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 인의 성중(聖衆)과 함께 계셨다. 공양하샤 때가 되자
부처님께서는 자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손에 드시고 슈라바스티 성으로 들어가셔서 차례로 탁발을 하셨다. 탁발을 끝낸 부처님께서는 기수급고독원으로
돌아와 공양을 마치신 뒤 발우와 옷을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금강경>
<금강경>은 이와 같이 시작됩니다. 부처님은 맨발로 성에 들어가 일곱 집을 돌아 탁발을 하시고 공양을 드신 뒤 발우를 씻어 제자리에 놓고
손을 닦고 물로 입을 혱구어 그 음식찌꺼기를 작은 생물들에게 보시하고 발을 씻은 다음 다시 자리에 앉으십니다.
최고의 지혜를 성취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같이 구체적인 일상의 삶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평생을 길거리에서 살다 가신 부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감동적인 교훈을 전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신 뒤 팔십의 노구를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 누이실 때까지 가사 한 벌과 발우 하나만을 가지고 맨발로 북인도 전역을
돌면서 중생의 고통을 함께하셨습니다. 팔만사전법문은 부처님이 이렇게 수많은 중생과 만나 그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 문제의 해답을 중생
스스로가 찾아 해결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신 이야기들입니다.
부저님의 가르침은 모두 풍부한 사례와 비유와 인연담으로 친절하게 설해져 우리의 삶에 각성과 활력을 줍니다. 또 교화 사례를 통해 우리는
부처님의 인격을 엿볼 수 있고, 부처님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화 사례는 너무도 방대해 한꺼번에 다 볼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전도 선언 이후 교단의 기반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교화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라
부처님은 60명의 제자를 전도의 길로 떠나보낸 후 우루벨라를 향해 교화의 길을 떠나십니다. 우루벨라로 가던 도중에 부처님은 숲속 나무 밑에
앉아 잠시 쉬고 계셨습니다.
그때 30명의 청년들이 한 유녀를 찾아 정신없이 그 숲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유녀란 우리나라 기생과 같은 신분입니다. 그 젊은이들은 유녀들을
불러 쾌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환락에 몸을 맡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고
놀이에 빠져 있을 때 한 유녀가 그들의 옷과 재물을 훔쳐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간 유녀를 찾아 숲을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을 만나자 유녀를 보지 못했는지 묻습니다.
부저님은 유녀의 뒤를 정신없이 쫓고 있던 젊은이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달아냐 여자를 찾는 일과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수승하다고 생가하는가?"
부처님은 그들에게 유녀를 찾는 것, 즉 쾌락과 재물을 좇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자기 자사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길, 자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후 그들을 교화했습니다.
2. 삼독의 불을 끄고 열반에 들라
부처님은 마가다국의 우루벨라에 이르렀습니다. 마가다국은 빔비사라 왕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종교와 사상이 크게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불을 섬기는 사화외도(事火外道)인 카샤파 3형제는 빔비사라 왕을 비롯해 마가다국 사람들에게 숭앙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쪽에 이웃한 앙가국까지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이란자나 강가에 수행처를 두고 있었습니다. 맏형인 우루벨라 카샤파는 가장 상류 부근에서 500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고,
둘째 나디 카샤파와 셋째 가야 카샤파도 각각 나이란자나 강가에서 300명과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들의 수행처 근처에 계시면서 먼저 맏형 우루벨라 카샤파와 그의 제자들을 위의와 설법으로 교화하셨습니다. 이후 둘째와 셋째 카샤파와
그들의 제자들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카샤파 형제와 그의 제자들을 교화하시고자 3,500가지의 신통력을 행사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부처님께서 카샤파 형제를
조복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으며 꽤 오랜 시일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불교 교단이 저절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타 교단과의
치열한 종교적 논쟁 등을 통해 사상적 우월성을 증명함으로써 기반을 형성해 갔음을 보여줍니다.
부처심은 우루벌라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카샤파 3형제를 설복해 1,0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린 거대한 교단을 형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화
활동을 펴는 데 필요한 교두보를 마련하십니다. 부처님은 이들 천 명의 제자를 위해 이른바 '타오르는 불의 설법'을 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그 접촉에 의한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있다. 삼독의 거센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육근(六根)은 육식(六識)을 나혼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여섯 가지 근원을 말하며, 육경(육경)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합니다. 육식은 육근에 의하여 대상을 깨닫는 여섯 가지 작용인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시(鼻식)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그들이 불을 섬기는 도구는 모두 버렸지만 아직도 그들 내부에서 타오르는 있는 탐ㆍ진ㆍ치 삼독의 불꽃을 속히 끄고 열반에 들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불의 법문'을 설하시자 천 명의 비구들의 번뇌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불의 성질을 잘 아는 사화외도였던
그들에게 불을 비유로 설법하사 것은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 적절하게 설법하사 대기설법(對機說法)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기증하다.
120살의 카샤파가 젊은 사문에게 귀의했다는 소식은 마가다국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카샤파를 숭앙했던 빔비사라 왕과 마가다국의 백성들은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라자그리하 부근 숲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에 의심이 남아 있는 빔비사라 왕과 백성들을 위해 카샤파에게
직접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기 전까지는 불을 반드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불을 섬기는 것이 윤회의
씨를 뿌리는 것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불을 받드는 것은 내상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브라만의 제사는 하늘과 땅에 사람으로 태어날 공덕은
있으나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모두 생존의 집착이며 구자함인 줄을 알아 제사도 공희도 버리게
되었읍니다. 세존은 실로 하늘과 땅 모든 것의 스승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계십니다. 이 나이에 세존을 만나 제자의 무리에
들어간 것을 무상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세돈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세존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입니다."
카샤파의 말이 끝나자 부처님은 비로소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셨습니다. 빔비사라 왕과 그의 권속과 신하 그리고 마가다국의 많은 백성이 부처님의
설법에 감화를 받고 귀의했습니다. 이후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승단을 위해 사원을 지어 기증했습니다. 이 사원이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입니다.
부처님은 이후 죽림정사가 있는 라자그리하 성을 포교의 거점으로 삼아 마가다국 전역을 교화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교화 생활 동안 라자그리하에
가장 오래 머무셨습니다.
4. 1,250비구 대중
부처님은 죽림정사를 기증받으시고 얼마 되지 않아 45년 교화 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귀의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 존자입니다. 이들은 브라만 출신이었으나 산자야 벨라티풋타 밑에서 출가해 함께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자야는 50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중 200여 명은 목갈라나와 사리푸트라가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수행 경지가 높았던 두
수행자는 샤자야의 가르침이 기존의 사문 사상보다는 분명 수승한 것 같았으나 뭔가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 수행자는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늘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두사람은 새로운 사상 체계와 가치관을 찾아 여기저기 유행하다가 지쳐서 다시 산자야 승단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때 사리푸트라는 부처님의
제자인 아슈바지트 존자에게 간청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모든 것은 인연이 있어 생겨나는 것,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신다.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소면되는 것.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신다."
사리푸트라는 해결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매듭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리푸트라는 목갈라나와 함께 산자야에게 가서 부처님께 귀의하자고
청했으나 산자야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는 그들을 따르는 제자 200명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고, 이들의 스승이었던
산자야는 큰 제자들을 잃고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는 불교 교단을 운영하고 지도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리푸트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비구 대중과 재가 신자들에게 치밀한 체계로 다시 설법하는 걸 잘했다고 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부처님말씀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법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통속력 또한 탁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지혜제일'로 꼽힙니다. 사리푸트라는 대승불교 사상의 근간이 되는 반야 사상의 핵심을 정리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의 설법
대상으로 등장하는 등 그의 뛰어난 지혜는 후대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심의 제자 중에 '신통제일'이라고 불리는 목갈라나는 부처님과 신통의 힘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른 부처님의 40대 제자로 지혜(知慧)제일 사리푸트라, 신통(神通)제일 목갈라나, 두타(頭陀)제일 마하카샤파, 천안(天眼)제일
아니룻다, 해공(解空)제일 수부티, 설법(說法)제안 푸르나, 논의(論議)제일 카트야나, 지계(持戒)제일 우팔리, 밀행(密行)제야 라훌라,
다문(多聞)제일 아난다를 말합니다.
부처심의 교단은 이제 야사와 그의 친구들 50명, 카샤파 3형제와 1,000명의 비구 대중,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귀의햐 200명의 제자를 합해 1,250여 명의 비구 대중을 형성했습니다. <금강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의 첫머리에 '이때 부처님께서는
1,250 비구 대중과 함께 계셨다'라는 서술이 나오는데, 그 1,250인이 바로 이때 형성된 대중을 말햐ㅡㄴ 것입니다. 이들은 수행력이
깊었으며, 그동안 자신들이 가장 숭앙했던 스승을 귀의시킨 부처님께 귀의한 것이기에 신앙심도 돈독해 이후 승단의 골간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를 교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제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승단을
이끌고 제1결집을 주도한 카샤파, 즉 마하카샤파입니다. 그는 항상 청빈하고 철저하게 소욕(少慾)생활을 해 부처님께 '두타제일' 즉 최고의 고행
걸사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후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지트 왕과 그의 부인 말리카 왕비도 부처님께 귀의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당시 최대 강대국인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의 왕이
부처님의 재가 신자가 되었고, 각각의 나라에 기원정사(祈園精舍)와 죽림정사가 세워집니다. 이를 중심으로 불교의 교세는 인도 전역으로 급속히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5. 석가족의 교화
이렇게 기반을 잡으신 부처님은 석가족을 교화하고자 카필라바스투로 가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바스투로 가신 시기는 죽림정사에 계시다가 가셨는지, 기원정사에 계시대가 가셨는지에 따라 다르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죽림정사에
계시다가 카필라바스투로 가셨으면 성도 후 3년이 지난 때로 기원정사가 마련되기 전이고, 기원정사가 마련된 후라면 그 시기는 성도 후 약 6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러나 전후 사정으로 보아 성도 후 6년이 지난 때에 카필라바스투로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슈도다나 왕의 간곡한 청에 따라 카필라바스투에 가신 부처님은 곧장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숲에 머물면서 걸식을 하셨습니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 놓고 부처님을 기다리던 슈도다나 왕은 부처님께서 걸식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같이 노해 부처님께 달려옵니다. 이때
섭섭함과 노여움으로 질책하는 슈도다나 왕에게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내 아들아, 왜 우리 가문을 창피하게 만드는가? 무엇 때문에 걸식을 하며 왕궁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냐?"
"이것은 우리 가문의 전통이며 우리 집야의 법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가?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예 있는 왕족이다. 우리 가문에서 걸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느니라."
"제가 말하는 가문이란 세속의 왕통이 아니라, 과거 모든 부처님의 불통(佛統)을 말합니다. 여러 부처님과 다른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걸식을
하셨고 또 걸식으로 생명을 보존하셨기에, 저 또는 그분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후 성으로 들어가서 슈도다나 왕을 교화하셨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이때 부처님께 엎드려 예배함으로써 부처님이 탄생하셨을 때와
잠부나무 아래서 예배한 것을 합해 세 번째 예배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슈도다나 왕뿐만 아니라 마하프라자파티와 수많우 석가족을 교화하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습니다. 그리고 배다른 동생이며 왕위를 이을
난다를 출가시키고 이후 아버지 세 형제의 아들, 즉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아니룻다, 바드리카, 데바닷타, 아난다 등을 출가시킵니다.
이들 중 나이가 어려 사미로 출가한 아들 라훌라는 정진해 '밀행제일'이라고 불렸으며, 아니룻다는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다가 실명했으나 더욱
정진해 천안(天眼)을 얻어 '천안제일'이라고 불렸습니다. 반면에 데바닷타는 후에 부처님께 반기를 들고 분파를 형성했으므로 후대까지 '부처님
최대의 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쉰다섯 되시던 해부터 시자(侍者)가 되어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필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많이 들었으므로 '다문제일'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결집 과정에서 마하카샤파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6. 세계 최초의 여성 출가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에서 가장 처별받은 집단은 천민이라 불리는 최하층계급인 수드라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차별받은 사람은
여성이었습니다. 여성들은 사회 제도상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했고 독립된 인격으로 대우받지도 못했습니다.
인도에서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인정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딸로, 결혼하면 남편의 아내로,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어머니로서 존재했을 뿐입니다. 여성은 독립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해탈이나 출가라는 말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수행자 혹은 사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불교에서 여성 수행자 문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마하프라자파티부인이 남편인 슈도다나 왕이 세상을 떠나자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면서 시적됩니다.
이때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를 포함해 남편이 출가해 혼자 남은 500명의 여인들이 함께 출가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 번도 출가를 거절한 적이 없던 부처님께서 이 여인들의 출가를 거절하셨습니다. 여아들이 재차 출가를 청했지만 부처님은 다시
거절하고는 바이샬리로 떠나버리십니다.
그러자 500명의 여인들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카필라바스투에서 바이샬리까지 멀고도 험한 길을 맨발로 부처님을 따라왔습니다. 바이샬리에
온 마하프라자파띠 부인 일행은 아난다 존자에게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부처님께 다시 요청해 달라고 말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아, 또 자신의 누이와 친척들인 그 여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 부처님께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이 갓난아기였을때부터 온갖 정성으로 키우셨습니다. 또 마하프라자파티 부아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부지런히 정진해 수행 정도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깊습니다. 이런 분을 출가시키지 않는다면 여성은 수행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여성도 법에 귀의해서 바르게 수행하면 능히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
"부처님, 마하프라자파티 부인보다 더 훌륭한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침내 부처님은 교단 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난다 존자에게 그 여인들을 출가시키라고 허락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여성 출가를 세 번이나 거절하셨던 사실을 놓고 사람들은 불교의 평등사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거나 비구와 비구니 간의 차별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성 출가 자체를 부정하셨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인도 상황에 비추어 여성 출가자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고려해 그 시기를 늦추신 것입니다.
당시는 여성 차별이 심했고, 여성 출가는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설령 카필라바스투에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해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서 여성 출가를 허락하신 것은 이 도시의 진보된 사상과 개방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가 적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역량이 있다고 보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여인들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당시 수행자는 길이나 숲에서 자고 옷이라고는 몸을 겨우 가릴 만한 누더기를 걸치고 걸식을 했습니다. 쾌락주의가 만연해 성적 타락이 극을
치닫던 인도에서 여성 출가자의 수행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 통념으로는 숲속에서 홀로 정진하는 여성 출가자들은 남자에게 버려진 여인, 주인 없는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유녀나 기생처넘
아무나 이들을 취하거나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경전에 보면 비구니 스님들이 폭행을 당한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그너니 부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우려해 여성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비구니는 비구보다 타의적으로 계를 파하게 될 상황이 많았으므로 비구니 교단은 비구 교단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생겨난 것이고,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가 많아지는 것도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에 보면 뛰어난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며, 때로는 비구
스님들을 지도한 내용도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구니 스심이 비구 스님에게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공경법인 팔경계(八敬戒) 등은 상당 부분은 부처님
입멸 후 교단이 비구 중심이 되면서 생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여성 출가에 대한 우리의 시작은 계율의 세부적인 사항보다는 시대적 배경에서의 여성 출가 자체와 비구니 승단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심께서 열반에 드시고 500년이 못 되어 비구니제도는 사라지고 맙니다. 인도 전통 사상에 의하면 여자는
전륜성왕ㆍ부처ㆍ제적천왕ㆍ마왕ㆍ범천왕이 될 수 없다는 오불가론이 제기되면서 여성 교단이 폐지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비구니제도와 함께 여성성불론(女性成佛論)이 제기된 것은 대승불교가 일어난 다음입니다. 한국 불교는 다행히 대승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여성성불론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고 비구니제도도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남방불교 나라의 여성들은 불교를 여성
차별 종교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야말로 계급 해방의 선구자요, 여성 해방의 선구자였습니다. 비구니가 된다는 것은 여성이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구와 비구니는 겉모습의 차이일 뿐 법에 귀의해서 해탈의 길을 가는 데에는 아무 차이도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해탈의 길에서는 남녀가 따로 있지 않고 승속이 따로 있지 않음을 부처님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불교 교단은 부처님을 교조로 한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완성되었습니다.
7. 교세의 신장과 외도의 방해
기존의 출가수행자나 새로운 사문은 물론이고 국왼ㅇㆍ귀족ㆍ평민ㆍ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 없이 교화되면서 부처님의 위의와
불교의 명성은 북인도 전역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지칠 줄 모르는 자비와 불제자들의 구도적 교화 열정으로 교세는 급속히
확대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교세 신장은 간혹 이교도들과 격렬한 대립을 낳았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부저님께 기원정사를 지어 기증하려고 할 때 이교도들이 방해를 해
목갈라나 존자가 신통력으로 이를 절복시킨 일이나, 부처님께서 슈라바스티 거리에서 망고나무를 하루 만에 성장시키고 일천의 부처를 출현시켰던
'슈라바스티의 기적' 등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교세를 펼치던 자이나교나 아지비카 교단과의 대립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경전에는 간혹 외도와 신통력을 겨루는 내용이 전해지는데, 이 역시 기존에 세를 형성하던 외도 세력들과의 대립 과정에서 그들을
설복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에 있던 여러 사상의 한계를 비판하고 극복해서 대중의 지지 기반을 확장해가는 부처님의 교세를
외도들우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외도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의 수행이 뛰어나고 청정해 저연으로 대결할 수 없자 모략과 음모로써 부처님을 위해하고 불교 교단을 모함하려고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친차와 순다리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슈라바스티의 사람들이 부처님께만 공양을 올리자 브라만과 사문들은 걸식을 하고 보시를 받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러자 그즐은 친차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곱게 단장시켜 기원정사에서 설법을 듣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후 옷 속에 물건을 넣어 배를 부풀게 해 부처님께서
설법하고 계신 자리에 나아가 여러 사람앞에서 부처님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져 망신만 당했습니다.
또 순다리라는 여인에게 여러 날 부처님 처소에 가서 설법을 듣게 해 그녀가 부처님의 신도임을 알게 했습니다. 그 후 그 여인을 죽이고 시체를
기원정사 근처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불륜을 저지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순다리를 죽여서 묻었다고 헛소문을 냈습니닺 그런데 어느 날
그녀를 죽인 자들이 술에 취해 저희끼리 싸우다가 순다리를 자기들이 죽였다고 발설해 버렸습니다.
외도들의 이러한 모략과 비방은 번번이 실패했으며 그때마다 부처님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외도의 공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이겨내는
부처님의 위력과 불교 교세는 더욱 깊숙이 대중 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부처님의 교화가 그만큼 광범위하게 일반 대중에게
깊이 파고들었으며, 외도들에게 위협적인 만큼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갔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교화와 유행은 북인도 전역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처님이 유행하신 길을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강 이남을 따라가 보면, 앙가국에서부터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 우루벨라,
가야와 파탈리푸트라, 카시국의 바라나시를 거쳐 야무나 강과 만나는 코삼비에 이르게 됩니다. 또 강 이북의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칸타키 강을
따라가 보면, 밧지 연합의 바이샬리와 릿차비족의 영토로부터 쿠시나가라를 거쳐 카필라바스투에 이르고 북서쪽에서 슈라바스티를 중심으로 햐
코살라국에까지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전파는 부처님께서 직접 유행하사 이런 교화 여정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 교화를 받은 많은 스님과 재가 신도들의
자발적인 전법 활동으로 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져갑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부처님 재세 시에 이미 동쪽으로 갠지스 강 하류에까지 전해졌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봄베이 북방인 아라비아 해 연안까지 전파되었습니다.
7. 교화의 특징, 섭수와 절복
수많은 사람을 교화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문제가 다 다르고, 사람마다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은 언제나 각각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합햐 방법을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나이나 성별, 계급과 사회적 지위,
심리 상태나 지식 정도 등에 따라 그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합리적으로 말씀하시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상태,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주신다고 해서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이라고 합니다.
또한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해 치료하는 것에 비유해 응병여약(應炳與藥)이라고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안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냥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부저님은 그의 병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병이 회복된 상태를 보여준 다음 그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약을 지어주십니다.
부처님은 자신을 명의나 길 안내자로 비유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부처님은 일방적인 교설로 중생을 가르치지 않고 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고되를
경청하고 상담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셨습니다. 항상 제자들을
벗이라 부르고 그들과 똑같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셨습니다. 부처님이 평생 동야 지닌 것이라고는 가사 한 벌과 발우 한 개 뿐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매일매일 중생의 문간에서 걸식하며, 중생이 있는 곳에 가서 중생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중생의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그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 스스로 고통을 여의고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해 갠지스 강 유역의 5천 리 길을 45년 동안 맨발로
유행하며 교화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왕에서부터 천민까지, 최고의 사상가에서부터 바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만나고 대화해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셨습니다. 한없는
자비로써 잘못된 인생의 길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모든 악률의(惡律儀) 모든 범계(犯戒)를 보면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힘을 얻었을 때 어느 곳에서나 그러한 중생을 마땅히 섭수할
자는 섭수하겠나이다. 왜냐하면 절복하고 섭수함으로써 법으로 하여금 오래 머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승만경(勝蠻經)>에 나오는 말로, 승만 부인이 정토 세계를 이루기 위해 세유 서원입니다. 섭수란 부처가 중생을 자비심으로 돌보고
보호하는 것으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절복은 세상의 불의와 악을 꺽ㄱᆢ 굴복시켜
바른 길로 인도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섭수와 절복은 상대에 따라서 자비를 표현하는 두 거지 방법으로 그 형식은 비록
반대일지라도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의미에서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은 절복과 섭수를 함께 사용하셨습니다. 거짓된 연설로 민중을 잘몬 인도하는 삿된 무리에겐 지혜의 광명과 파사현정의 단호한 어조로
사자후를 설했지만, 민중의 어리석음과 고통에 대해서는 끝없는 자비와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들을 일깨우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셨습니다.
8. 우팔리에게 마땅히 경배하라
부처님은 계급 관계에 대한 문제가 거론될 경우에는 단호하고 엄하게 질타를 하시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바스투에서 부모와 권속들을 모두 교화하고 돌아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 일곱 명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과
설법에 감화되어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왕가의 시종이자 이발사인 우팔리에게 머리를 깎안습니다.
머리를 깎은 왕자들은 온몸의 보석과 장신구를 모두 떼어 우팔리에게 주었습니다. 보석을 받은 우팔리는 도대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기에 이 모든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걸식하는 수행자가 되려고 하는가를 왕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가장 뛰어난 분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신 분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값지고 훌륭한
것이므로 우리른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려 한다."
왕다들의 답변을 들은 우팔리는 자신은 바랸 수조차 없는 부귀를 모두 버리고 출가해 부귀보다 더 훌륭한 것을 구하러 가는 왕자들의 뒷모습을
존경과 부러움에 차서 바라보았습니다. 우팔리는 혼자 남아 고민하다가 자신도 출가를 할 수 이쏜지 알아보려고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우팔리는 왕자들보다 먼저 부처님을 찾아가 뵙게 되었습니다. 우파리가 출가의 뜻을 여쭙자 부처님은 이를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 뒤 일주일이 지나 일곱 왕자들은 부처님을 뵙고 출가를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교댜의 법도에 따라 선배들에게 차례로 절을 하다가, 맨
나중에 이르러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머리를 깎아준 시종 우팔리가 가사를 걸치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세족의
가치관이 아직 남아 있던 그들로서는 일주안 전만 해도 자신들의 노예였던 우팔리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멈추어 선 왕다들에게 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왜 주저하는가. 세속의 귀천을 떠나고 아만아만을 꺾은 자만이 승단의 형제가 될 수 있느니라. 너희보다 먼저 출가한 우팔리에게
마땅히 경배하라."
당시에는 인간의 신분이나 인격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급 구조로 현실적인 고통을 받는 것은
피지배계급이었지만, 지배계급 사람들도 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은 인간 이하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비인간화되어
갔고,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귀족계급들은 다른 계급의 인간을 인간 이하로 억압하고 구속함으로써 자신들도 인간의 심성을 잃고 비인간화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비인간화되어 가는 지배계급에게 연민과 자비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배계급일지라도 자신의 문제를 참회하고 호소해 올
때에는 따뜻하게 위로하고 섭수해 주셨지만, 기존의 잘못된 가치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복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브라한이 인간의 신분이나 인격은 태어나는 카스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하자 부처님은 그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에 따라 성인이 되고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브라만이나 수드라라고 ㅅ내서 자신ㄱ들이 성인이나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그의 성품이 결정된다. 아무리 훌륭한 브라만 혈통의 자식이더라도 부정햐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한다면 그는 천민이 되는 것이요. 아무리 수드라의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도 세상을 올바로 보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계급적 차별을 부정하신 부처님께서 하물 며 기존의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승가에서 절대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일곱 왕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우팔리에게 선배에 대한 예를 올리자 부처님은 여러 대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강이 있어서 갠지스 강, 야무나 강, 아지라파디 강, 사라푸강, 마히이 강이라고 불리지만 그 강들이 바다에 이르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바다라고만 일컬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크샤트리아, 브라만, 바이샤, 수드라 네 계급도 일단 법과 율에 따라 발심하고 출가해
불법에 이르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중(衆)이라고 불린다."
부처님은 이처럼 인간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카스트제도에 대해 인간의 귀천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계급은
태어난 후 그렇게 길들여진 결과일 뿐 출생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지 않음을 인과론으로 설파하여 카스트를 부정하시고 사회구조를 흔들어놓았습니다.
9. 가난한 여인의 작은 등불
부처님은 왕을 대할 때에도 그들의 세속적인 권위나 힘에 위촉됨없이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한번은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지트 왕이 부처님과 승단을 위해 큰 연등법회를 열 때의 일입니다. 프라세나지트 왕은 슈라바스티 성의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과 스님들이 안거에 드는 석 달 동안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공양했고, 안거가 끝나는 날에는 수만 개의 등불을 켜서 연등회를 베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슈라바스티 성은 물론 온 코살라국이 축제를 맞은 듯이 북적거렸습니다.
이 슈라바스티 성에는 성실하지만 매우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너무 가난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품을 팔아 밥을
얻어먹으며 겨우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살 그 여인은 온 성안이 떠들썩한 것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프라세나지트 왕이 부처님과 스님들을
위해 연등회를 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듣고 그 여인은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왕은 큰 복을 짓는구나. 저렇게 복을 지으니 내생에도 큰 복을 받겠구나. 나는 이생에도 반복해 가난하고, 또 복을 지을 수도 없으니
내생에도 박복하겠지. 나도 등불을 하나 켜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구나.'
이렇게 생각한 여인은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받은 동전 두닢으로 기름집으로 가서 기름을 샀습니다. 기름집 주인이 기름을 무엇에
쓰려느냐고 묻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부처님을 뵙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나는 가난해서 부처님께 공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등불이라도 하나 공양할까 합니다."
기름집 주인은 여인의 말에 감동해서 기름을 곱절이나 주었고, 여인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 기름으로 작은 등불을 만들어 부처님 처소로
갔습니다. 부처님 처소에는 수많은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휘황찬란한 불빛에 기가 죽어 부처님이 다니시는 길목의 구석진
곳에 등불을 걸어놓고 기도했습니다.
"보살 것 없는 등불이지먀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나도 부처가 되어지이다."
밤이 깊어지자 휘황찬란하던 등불들이 하나 둘 꺼져갔습니다.
그런데 워낙 보잘것없어 있는 둥 마는 둥 달 보이지도 않던 그 여인의 작은 등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시자인
아난다 존자는 등불이 모두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불을 끄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등불은 손으로 바람을 내
끄려 해도 꺼지지 않고 가사 자락으로도 부채로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것은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자 것이기에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여인은 그 등불의 공덕으로 오는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거지나 다름없는 여인이 초라한 등불 하나를 공양했다고 해서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삽시간에
온 슈라바스티 성으로 퍼져나가 프라세나지트 왕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대왕은 급히 수레를 몰아 부처님 처소로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그 여인은 작은 등불 하나를 켠 공덕으로 부처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저는 석 달 동안이나 부처님과 스님들께 보시하고 수천 개의
등불을 켰습니다. 저에게도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왕에게 차분하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이르셨습니다.
"대왕이여, 불도란 쉽고도 어려운 것이오.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도 얻을 수 있지만, 수천의 보시로도 얻지 못하기도 하오. 불도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시오.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선행을 쌓으며 스스로 겸손해 남을 존경해야 하오. 그러나 절대로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되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닦으면 뒷날에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오."
프라세나지트 왕은 불교의 번성을 위해 경제적 지원과 외호 등 많은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가 승단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의 그릇된 생각에 대해서는 준엄한 가르침을 주실 뿐이었습니다.
왕은 연등회를 연 것을 자신의 공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신의 공덕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에게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공야을 많이 올리면 공덕을 크지만 소위 생색을 내면 공덕이 감해진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왕은 그 여인보다 공덕이 작습니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왕이 자신이 공덕을 쌓고자 부처님과 승단에 공양 올린 음식과 옷등은 모두
백성들의 노력이며 백성들의 공덕인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인은 있어 동전 두 닢 어치의 등불을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 여인에게 있어 동전 두 닢이란 자신이 밥을 굶으면서 올린 전
재산이었습니다. 더구나 가냐에 쪼들려 당장 먹을거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왕은 백성들이 생산한 재물을 과다하게 축적하고 낭비하면서 그중 일부를 부처님께 공양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것도 아닌 것을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므로 그 공덕이 가난한 여아보다 훨씬 작은 것입니다. 그나마 부처님께 공양할 마음을 낸 것으로 조그마한 공덕이 생길까 말까 했는데
그것마저도 생색을 내는 바람에 줄어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에게 백성을 위해 공양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백성에게 회향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스스로
겸손하고 겸손한 남을 공경하며,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지 않고 오랫동안 수행할 때 비로소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백성 앞에서 가난한 여인보다 공덕이 스승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은 왕은 부끄러워하며 크게 깨우쳤습니다.
9. 니다이여, 내 손을 잡아라
부처님은 타인을 고통에 빠뜨리는 지배계급에게는 엄한 아버지와 같은 절복으로 교화하셨지만, 대부분의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움으로 섭수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슈라바스티 성에 계산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슈라바스티 성에 사는 니다이가 인분이 가득 든 똥통을 메고 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우 아난다 존자와 함께 걸식을 하고
계셨으며 거리에는 많은 많은 사람이 부처님을 뵙고자 나와 있었습니다. 니다이 또한 부처님을 뵙고 싶었으나 초라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자사이
부처님께 폐가 될까 하여 길모퉁이에 숨어 부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부처님은 니다이의 착한 마음을 알고 니다이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부처님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시는 것을 본 니다이는 당황해서
달아나려다가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똥통이 벽에 부딪쳐 깨어져 더러운 똥이 사방으로 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오물을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고
부처님의 옷까지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니다아는 부처님께 폐가 된 것이 두려워 똥이 쏟아진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사죄했습니다.
다히에 니다이와 같은 일을 할 정도면 노예보다도 못한 불가촉천마이었을 것입니다. 불가촉천민은 브라만은 물론이고 다른 계급의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옷이나 몸이 다른 계급의 사람에게 닿으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우러러보는 부처님께 똥물을 튀게 했으니 그때 니다이의 공포는 마치 사형당하기 직전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비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니다이여, 내 손을 잡고 일어나거라."
니다이는 너무도 놀라서 손을 감추며 황망히 뒤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손수 니다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셨습니다.
"니다이여, 이리 오너라. 나와 함께 강물로 가서 씻자."
"저같이 천햐 자가 어찌 감히 부처님과 함께 가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온몸에 오물이 묻어 있습니다.
"염려 말거나, 니다이여, 나의 법은 청정한 물과 같으니 일체를 받아들여 더러움으로부터 정화해 해탈케 하나니, 빈부귀천이 나의 법안에서는
모두 하나가 되느니라."
니다이는 브라만이나 귀족의 몸에 산수로 닿기만 해도 손발이 자려는 불가촉천마으로 부처님께 도저히 접근조차도 할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물을 뒤집어쓴 니다이를 잡아 일으켜 손수 몸을 씻겨주셨습니다. 이것은 불가촉천민아 니다이의 사회적인 신분과 그로 말미암아
천대받는 고통을 불법으로써 정화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신분이 낮고 천대받아도 불법은 청정하고 평등해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0. 부처님, 살인자를 구제해 주십시오
어느 날 부처님은 살아마 앙굴리말라를 교화하셨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마니바드라 브라만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 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마니바드라의 부인이 나이 많은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고
앙굴리말라를 유혹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그녀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스승의 부인은 앙심을 품고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자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해치고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고 놀라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그녀는
앙굴리말라가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스승은 앙굴리말라를 파멸시키기 위해 100명의 사람을 죽여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오면 성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스승의 말을 믿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슈라바스티 성은 삽시간에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자신을 말리려고 쫓아온 어머니에게까지 달려들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소식을 듣고 앙굴리말라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처님을 잡으러 쫓아가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자 부처님께 욕을 하며 멈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앙굴리말라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머무르는데 그대는 머물지 못하는구나. 나는 언제나 머물러서 모든 생명의 은혜를 입고 있는데 너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을 피우며 잠시도 머무르지를 못하는구나."
그제야 앙굴리말라는 제정신을 찾고 부처님의 발밑에 엎드려서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살인자를 구제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피로 얼굴진 앙굴리말라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윤리적으로는 그 누구도 앙굴리말라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앙굴리말라는 피해자였습니다. 스승 부인의 사음과 탐욕, 그리고 스승의 어리석음과 분노로 앙굴리말라는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처님은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이미 그는 새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국법에 의해서 버림을 받고 모두가 저주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부처님의 법에서는 모든 것을 용서받고 죄업에히 벗어나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1.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출라판타카라는 바보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뛰어난 여러 제자들에게 그의 학습을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가
너무나 바보여서 가르칠 수 없다고 포기하자 출라판타카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를 본 부처님은 그를 불러 물어보십니다.
"마당을 쓸고 방을 닦는 일은 할 수 있느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출라판타카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앞으로 마당을 쓸고 방을 닦으며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하고 외거라."
출라판타카는 사실 이렇게 간단한 글귀도 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출라판타카를 만날 때마다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는 말을 외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글귀조차 제대로 외지 못했으나 스님들의 도움으로 점차 그 글귀를 외울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는 말의 내용을 꿰뚫어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의 마음은 청정한데 먼지나 때가 끼듯이 업장에 가려져 있다. 먼지를 털고 때를 닦듯이 업장을 없애면 우리의 본래 불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출라판타카는 청소를 하듯이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모두가 포기한 출라판타카였으나 부처님은 그를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업장으로 무지한 우리의 때를 자상한 자비로 닦아주고 지혜를
찾아주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몇 가지 교화 사례에서 보듯이, 부처님의 삶은 완벽하고 위대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세속적 가치른 지닌 지도자의
모습도 아니었고, 세속을 떠난 초월주의나 신비주의자의 모습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이끌고 지도한다는 생각보다는 중생ㅈ과 함께 살아간다는 자세로 45년 동안 시종여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는날까지
부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자 좋은 안내자로 계시는 것입니다.
묘상(妙祥) 사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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