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가섭(摩訶迦葉, skt. Mahā-kāśyapa) 존자 이야기>
마하가섭 존자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 제일인자이다.
마하카샤파(Mahā-kāśyapa)가 본명이고 한역해 마하가섭 외에 가섭파(迦葉波), 대가섭(大迦葉), 대음광(大飮光), 음광승존(飮光勝尊)이라고도 부른다.
불멸 후 부처님 제자들을 이끈 영도자 역할을 했으며, 제1차 불전결집을 주도했고, 부처님 법을 이은 제1대 조사(祖師)이기도 했다.
‘가섭(迦葉)’이란 이름은 당시 인도에서는 고귀한 이름이라서 부처님 생존 시에도 ‘가섭’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 많았는데, 부처님 제자 가운데에도 유명한 ‘가섭(迦葉)’이란 분이 셋 있었다.
① 첫째는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바로 전해 받은, 여기 말하려는 가섭 존자이다. 특별히 위대하신 분이라고 해서 마하가섭(摩訶迦葉)이라 했다.
② 둘째는 삼가섭이라고 하는 가섭 삼형제가 있었다. 삼형제 가섭은 가야성(迦倻城)이라는 지방에서 천명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들은 불(火)을 숭상하는 외도(外道)였으나 부처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했다. 이들의 귀의로 불교 승단이 큰 승단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③ 초전법륜 당시 녹야원에서 부처님 제자가 된 다섯 비구 중에 십력가섭(十力迦葉)이란 분이 있었다. 와빠(Vappa, 바파)를 말한다.
그 외에 가섭불(迦葉佛)이 있었다. 선가에서는 음역인 가섭불보다 의역인 음광불(飮光佛)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카샤파붓다(Kaśyapa-buddha)’라 한다. 석가모니가 출세하기 전, 인간의 수명이 2만 세였을 때, 바라내성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로 전 부처님으로 과거칠불 가운데 제6불에 해당하는 분이다.
지금 말하려고 하는 마하가섭은 부처님 당시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라하(왕사성/王舍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하띠라(Mahātittha)라고 하는 바라문 마을 출신이다.
거기 마을에 국왕보다 재산이 많은 니구율다(尼俱律陀. 니그로다) 장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겐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애타게 자식을 원하던 장자는 집 부근에 있던 핍팔라나무(pippala-보리수)에 빌었고, 그래서 자식을 얻었다. 그가 가섭인데, 이런 연고로 가섭의 어릴 때 이름은 핍팔라(Pippali)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비심이 많아 보시하기를 좋아했다. 어린 그를 본 관상가는,
“아이가 세상일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출가해 무착과[無着果-무탐무착(無貪無着)하는 경지]를 얻으리라[승려가 될 것이란 말임]”고 말했다.
겨우 하나 얻은 자식이 출가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던 부모가, 핍팔라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결혼하기를 강권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으나 버티던 그도 마침내 한 가지 타협안을 내 놓았다.
핍팔라는 순금으로 예쁜 여인상을 만들어 가지고, 그 황금의 여인상을 드리며,
「이와 같은 이상적인 여인이 있다면 결혼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출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운이지, 불행인지 그와 꼭 닮은 여성이 비야리성(지금의 바이샬리) 부근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금상 그 자체를 약혼 선물로 해서, 핍팔라의 부모는 서둘러 결혼을 시키려고 청혼을 했다. 처녀의 부모들도 기꺼이 승낙을 했다.
아들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열성에 의해 핍팔라는 결국 황금상을 닮은 여인과 결혼 했다. 핍팔라는 20세였고, 아리따운 아내는 16세의 바들러(혹은 발타라, 한역 金珠女)였다.
무슨 인연의 힘인지 결혼한 여인도 출가의 뜻을 갖고 있었다. 서로의 뜻이 같은 것을 파악한 부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출가할 때까지 잠자리를 따로 하는 등 순결한 생활을 지켰다.
12년간 이런 생활을 하는 사이 부모들이 잇따라 타계했다. 청년 핍팔라는 그의 나이 32세가 됐다.
어느 날 핍팔라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쟁기로 파 젖혀놓은 흙더미 속에서 한 마리의 작은 벌레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 순간, 공중으로부터 작은 새가 내려와 그 벌레를 탁 쪼아 가지고 날아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핍팔라는, 순간 자신이 간접적으로 살생의 죄를 범했음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확고히 출가할 결심을 굳혔다.
아내인 바들러도 뜰에다 참깨를 널어 말리고 있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작은 새가 날아와서는 참깨 위에 기어가고 있는 벌레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살생의 죄를 범한 것을 알고, 출가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같은 결심을 이야기하고 나서, 모든 재산을 이웃에 나누어주고, 함께 집을 나선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바들러는 왼쪽 길로 가고, 핍팔라는 오른쪽 길로 갔다.
부부가 이렇게 출가하던 순간에 대지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핍팔라 부부의 출가를 알고, 핍팔라가 오는 길목에 미리 가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며 기다리고 계셨다.
핍팔라는 거기서 부처님을 만났다. 당시 그곳에 있던 부처님이 먼저 ‘출가자 핍팔라’를 불렀다고 한다. 핍팔라도 나무 아래 좌선을 하고 있던 부처님을 본 순간 “이 분을 젖혀두고 달리 내가 귀의할만한 스승은 없다”고 깨달았다.
핍팔라가 가까이 다가가자 부처님은 핍팔라를 위해 여러 가지를 설법했다.
부처님께 귀의한 핍팔라는 스승의 교설을 금방 이해했다고 한다.
흰 모포가 쉽게 물들듯 핍팔라는 그 자리에서 아라한과를 얻어 성자가 됐다.
그리고 그의 아내 바들러는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이후 부처님은 수시로 마하카샤파를 다른 제자들 앞에서 칭찬했다. 핍팔라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는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나와 있다.
<불본행집경>에는 핍팔라가 15살에 결혼하고 12년 뒤 부모님이 타계, 27살에 출가한 것으로 나오지만, 경전들을 종합하면 나이 더 들어 출가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다른 경전들도 마하카샤파의 출가 나이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부처님께 출가 후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된 것으로 봐서, 나이 들어 출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불국사 대웅전에 있는 마하카샤파상, 화순 쌍봉사 대웅전의 마하카샤파상, 돈황석굴에 봉안된 마하카샤파상, 불화에 그려진 마하카샤파 등 현존하는 조각과 그림들이 마하카샤파를 모두 ‘노비구(老比丘)’로 표현하는 것에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마하카샤파 존자를 중시하는 것은 ‘부법(付法) 제1조사(第一祖師)’이고, ‘제1차 불전결집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의식주에 대한 집착의 마음을 떨쳐내는 두타행에 철저했다는 점도 이유다.
가섭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출가한 후 거친 옷과 거처에 상관없이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고, 진리를 깨치기 위해 용맹정진을 해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일컬어졌다.
※부법(付法)---교법을 부촉함. 스승(부처님)이 제자에게 교를 권해 이 교법을 장차 흥왕하게 전해가는 책임을 지게 하는 것. 법의 계승자를 지명하는 일.
가섭은 한곳에 삼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자리는 내 자리, 이곳은 내 자리로 정해진 곳” 이렇게 해서, 한곳에 오래 머물면 소유개념이 형성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가섭 존자, 그 다음에 아난 존자가 이어 받았다고 본다.
가섭 존자는 말로써 못 다한 부처님의 비밀스런 진리인 마음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이를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는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주인공이 바로 가섭 존자라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빛을 마시는 뛰어난 존자란 뜻으로 음광승존(飮光勝尊)이라고도 한다.
그는 또 부처님의 의발을 물려받은 인물이다. 즉 후계자가 된 것이다.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법을 세 번 전한 소식이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삼처전심의 세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회상(會上)은 대중이 모인 법회를 말한다.
영축산(靈鷲山)에서의 <법화경> 설법 모임을 영산회상 또는 영산회라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기 위해 영축산에서 제자들 앞에 계셨을 때, 범왕(梵王)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부처님이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손으로 집어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곧 염화시중(拈華示衆)임].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는데,
가섭 존자만은 그 참뜻을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염화미소(拈華微笑)].
이것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진리를 전했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선 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즉, 이로써 선종(禪宗)이 시작됐고, 이 말이 선종의 종지(宗旨)가 됐다. 그리고 부처님은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등 불교진리를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정법안장(正法眼藏) - 모든 것을 바로 꿰뚫어 보고, 간직하는, 깨달음을 뜻함.
열반묘심(涅槃妙心) -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 생멸 경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 진리를 깨닫는 마음(법문).
따라서 염화미소(拈華微笑)도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이고, 염화시중(拈華示衆) 역시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됐다. 여기서 염(拈) 자는 집다, ‘집어 들다’는 뜻이다.
영축산(靈鷲山)은 그리 높지 않는 산이다. 지금도 산 정상엔 옛날 부처님이 머물던 정사 터가 있다고 한다.
2500년 전, 부처님은 여기서 꽃을 집어 들어 보였다[염화시중(拈華示衆)].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어떤 이는 “부처님이 들었던 꽃은 연꽃”이라고 강조한다. ‘진흙을 뚫고서 올라오는 연꽃’의 메시지를 가섭이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웃었다고도 한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는, 부처님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을 때, 마하가섭이 홀로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일에 대해 경에 적혀있기를,
“나에게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는 비법이 있다. 이 비법은 형상이 없어 나타낼 수 없으나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문자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전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비법의 열쇠를 마하가섭에게 전한다.”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부처님이 <법화경> 시설 당시 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인가 받는 장면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무언(無言)으로 연꽃을 들어 보임은 모든 가식을 떨어내고 물아(物我)가 하나인 본원의 모습을 보인 것이며, 가섭이 미소 지은 것은 진공(眞空)에서 벌어진 묘유(妙有)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 장면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서 선법문(禪法門)의 기원이 됐다는 것이다.
중국 선문의 초조 달마(達磨) 대사는 이 일에 대해 불교의 진수는 문자나 말이 아닌 내밀한 비법으로서 별도로 전해졌다고 한 것이다[교외별전(敎外別傳)].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기록은 의심스럽다. 평소의 부처님답지 않은 말씀이다.
평소 부처님은 대기설법을 하셨으므로 대중 앞에서 이런 알쏭달쏭한 법문을 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이 일이 기록된 경전인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고 한다. 달마 대사가 이 위경의 구절을 들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했을 리도 없다. 인도 불교가 중국 불교화 하는 과정에 중국에서 창작된 이야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집어 들었다는 것은 꽃이 아니라 다만 꽃을 상징하는 말 뿐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은 꽃의 모양이 아니라 이 꽃의 바탕(본질)을 보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꽃의 모양이 아니었으니 연꽃이든 국화꽃이든 상관이 없다.
다만 그 꽃의 본질, 공(空)의 자리, 그걸 말하는 것이고, 그걸 보라고 한 것이며, 가섭은 그걸 꿰뚫어봤고, 그래서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2)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
다자탑(多子塔, Pahuputraka)은 중인도 바이살리(Vaishali, 베살리, 비야리성) 서쪽에 있던 탑 이름이다. 바이살리는 빠알리어로 웨살리(Vesali)라는 곳으로 뒷날 제2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 어떤 장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재산이 한량없고, 아들과 딸이 각 30인이 있었다. 그 장자는 수행이 뛰어난 분으로 나중에 벽지불(辟支佛)을 증득했다. 그리고 입적한 후 그 자손들이 아버지를 위해 탑을 세웠다. 따라서 여러 자손들이 함께 세운 탑이므로 다자탑이라 했다.
뒷날 부처님께서 이 다자탑 앞에서 인간과 하늘의 무리들에게 설법을 하시는데, 마하가섭 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도착했다.
이런 그의 용모는 그가 두타행(頭陀行)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멀리서 보고 찬탄하셨다. “잘 왔구나. 가섭아.” 그러면서 앉아있던 자리를 나누어 가섭을 불러 함께 앉게 하시니, 가섭은 나아가 땅에 엎드려 예배하고 물러나 꿇고서 말했다.
“저는 바로 여래의 끝줄의 제자이온데 감히 그 뜻을 받잡지 못하겠나이다.”
가섭은 자신이 그 자리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앉게 하시자, 대중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늙은 도사가 무슨 기이한 덕이 있기에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며 앉게까지 하실까? 이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분일까? 오직 부처님만이 밝히시리라. 이것이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이야기이다.
3) 니련하반곽시쌍부(泥蓮河畔槨示雙趺)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성 밖에 니련하(泥蓮河) 강가의 사라수 여덟 그루가 둘씩 마주 서 있는 그 아래에 자리를 깔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해 학이 앉아 있는 듯했다고 해서 그 곳을 “학의 숲”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라수가 둘씩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沙羅雙樹라고도 한다.
※니련하(尼連河)---나이란자나(Nairañjanā)강을 음역해 니련선하라 한다.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 동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으로, 항하(恒河, 간지스강)의 한 지류이다. 석가모니가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한 뒤, 니련선하 강물에서 목욕을 하시고 우루벨라 촌장 딸 수자타(Sujata)가 바친 영양이 풍부한 우유죽(유미죽/乳米粥) 한 그릇을 공양 받고 기운을 차려서 니련하강가 보리수 아래 앉아서 정각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니련하 부근 사라(Salā, 沙羅)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현재 파트나(Patna) 지역의 팔구(Phalgu)강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이 사라쌍수 밑에서 대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몸을 제자들이 비단으로 싸고 예를 갖춰 입관하는 등 모든 장례 준비를 마치고, 이제 다비(茶毘)를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이 붙지 않았다.
그 이유를 장자들이 아난에게 묻자, 아난은 마하가섭 존자가 올 때까지 부처님께서 불이 붙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때 뒤늦게 먼 곳에서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마하가섭은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급히 달려온 것이다.
갓 출가한 가섭을 부처님이 상수제자로 인정한 것에 대해 교단 안에서는 적지 않은 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섭 존자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뒤 부처님 곁을 떠나 기사굴산(영취산) 핍팔라(賓鉢羅)굴에 가서 수행하며 대중들을 교화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곁을 지키지 못했다. 입멸 소식을 듣고 500 제자들과 달려왔지만 불신(佛身)은 이미 입관된 상태였다.
가섭 존자는 장의를 주관하는 아난에게 “열반하신 모습을 보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으나,
“이미 입관된 상태이므로 불가능하다”는 답만 듣는다.
가섭 존자와 아난 사이의 이런 미묘한 갈등이 교단체제를 정비하는 결집과정에서 마찰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한다.
그래서 가섭 존자는 다비하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 모셔놓은 관 앞에 나가 오른 쪽으로 세 번 돌고 난 뒤 부처님의 발 앞에 세 번 절하고 엎드려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빨리 열반에 드셨나이까?”하고 슬피 울며 비통해 했다.
이때 관 밖으로 세존의 두 다리가 뻗어 나오니, 무상한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법신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다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다.
가섭 존자가 이것을 깨닫고 부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게송을 노래했고 이어서 천인, 귀신, 용, 국왕, 백성들이 모두 부처님께 마지막 예를 올렸다. 대중이 예를 마치자 부처님의 발이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가섭이 불을 붙이니, 비로소 다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순간에도 부처님의 제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왜 가섭 존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듯이 다비를 붙이려고 해도 붙지 않다가 두 다리가 관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가섭이 불을 붙이니까 붙고, 참으로 신기한 일인데, 어째 그랬을까?
이렇게 의심을 하니 이것이 세 번째의 화두가 됐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부처님과 가섭만의 서로 통하는 세 장소에서 전한 마음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한다.
---제1차 불전결집과 마하가섭 존자---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교외 사라나무 아래에서 입멸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기사굴산(영취산) 핍팔라(賓鉢羅)굴에서 수행하던 마하카사파 존자는 부처님보다 좀 늦게 같은 길을 따라 부처님이 계신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내려오던 한 외도로부터 부처님의 부음(열반)을 들었다.
그 때 많은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해 했지만 그 가운데 한 늙은 비구 스바닷다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벗들이여 슬퍼하지 마라. 상심하지도 마라. 우리는 이제야 대사문(부처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대사문은 그동안 ‘이것은 허용한다.’ ‘이것은 적당치 않다.’ 하면서 우리들을 잔소리로 무척 고통스럽게 속박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같은 폭언을 들은 마하가섭은,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 부처님 가르침이 다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불전결집을 절실하게 구상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제1회 결집은 부처님 열반 후 맞이하게 된 첫 우기(雨期) 안거(安居-하안거)를 마치고, 마가다국의 아사세왕(阿闍世王) 후원으로 라자그리하(Rājagaha-王舍城) 부근의 바이바라산(毘婆羅山, 비파라산) 중턱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해졌다.
결집을 위해 장로비구 5백여 명이 선출됐으며, 상수제자(上首弟子) 마하가섭이 총 책임자가 돼 모임을 주관했다.
그런데 경에는 아난이 가섭 존자로부터 핀잔을 듣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제1차 불전 결집에는 아라한들만 모이도록 한 즉, 아난은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기에 참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라한과를 얻고 난 뒤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아난이 아라한이 아니므로 참석하지 못하다가 아라한과를 획득한 후 참석한 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난 존자 이야기> 속에 전한다.
아난 존자가 경전편찬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비로소 부처님 말씀을 들은 대로 다 외니 하나도 틀림없음을 대중이 증명해 경의 결집(結集)이 완성됐다. 그리고 그 후 아난 존자는 가섭 존자로부터 법통(法統)을 이어받아 제2조가 됐다.
사실 마하가섭 존자의 가르침과 아난 존자의 승복으로 화합승단은 탄생될 수 있었고, 불교는 민족종교의 틀을 넘어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불교가 석가족의 종교를 넘어 범인도적인 종교로 확고하게 체제를 굳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제1차 불전결집이었고, 아난 존자가 마하가섭 존자에게 승복함으로써 결집이 이뤄졌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마하가섭 존자와 아난 존자는 부처님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자였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도움이 됐다. 부처님 입적 후 흔들리는 교단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두 제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존자는 부처님 가르침의 계승자이자, 불교발전의 기틀을 확립한 아름다운 수행자였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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