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9.제산정원
도솔천을 묻는다면 주장자 들어 보여 주리라
엄정한 계행과 철저한 화두 참구로 ‘수행제일’이란 평을 들었던 제산정원(霽山淨圓,1862∼1930) 스님. 경허스님 회상에서 정진한 제산스님은 근대의 대표적 선승으로 황악산을 중심으로 탄옹.전강.고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선풍을 진작시켰다. 제산스님의 삶을 비문과 각종 자료, 성웅스님(제8교구 본사 직지사 주지)의 증언으로 재조명했다.
“도솔천을 묻는다면 주장자 들어 보여 주리라”
경허스님 회상서 정진…‘수행제일’로 유명
직지사 천불선원 조실 역임…‘17년 장좌불와’
○…근대 최고의 선지식인 경허스님 회상에서 정진한 제산스님은 합천 해인사 원주(院主) 소임을 보았다. 대중이 정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살림을 보고 후원하는 원주로서 제산스님은 그 역할을 다 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마을의 장에 다녀오려면 해인사 백련암을 거쳐 고령.성주를 오가는 산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제산스님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산길과 계곡을 지나 장을 봐왔다고 한다. 걸망을 지고 산길을 묵묵히 걸었던 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당시 경허스님은 가야산 홍류동 입구 물레방아 집에서 나병환자를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제산스님은 이따금 수탉을 사가지고 물레방아 집에 들려 병자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닭을 고아주는 자비행을 실천했다.
○…사중(寺中)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곤란한 일을 겪은 도우(道友)들이 있으면, 제산스님은 누구보다 앞장서 해결했다. 그런 이유로 수좌들 사이에서 제산스님은 “보살행이 뛰어난 스님”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수행과 하심을 병행하는 스님을 대중들이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율사이며 선사였던 제산스님은 주력(呪力) 정진도 병행했다. 어떤 내용의 주력을 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염주를 돌리며 주력을 염송했다고 한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 제산스님이 여느 날처럼 고령에서 시장을 본 후 해인사로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고 말았다. 어두운 산길을 걸으며 주력을 하다 그만 염주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염주 알이 떨어져 계곡으로 굴렀고, 제산스님은 절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다른 스님이 염주 알이 떨어진 근처의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 동자들이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제산스님 제자인 고암스님이 생전에 회고했던 내용이다.
○…제산스님은 출가 전부터 ‘막걸리’를 즐겼다고 한다. 때문에 ‘탁백이 수좌’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불혹을 넘긴 뒤에는 일체 곡차를 끊고 오로지 참선수행에 전념하며 깨달음을 궁구(窮究)했다. 계행을 엄격히 지키면서 오직 화두 참구하는 것을 공부의 방법으로 삼았다.
○…직지사 천불선원에 수좌들이 한두명씩 모여들면서 대중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수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어른 스님이 필요했는데, 제산스님을 조실로 모시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下)소임인 원주로 대중을 시봉 하고, 공부의 깊이가 있던 제산스님이 적격이었다. 해인사 조실로 있으면서 제산스님을 지도했던 경허스님은 “그대는 어디를 가든지 50~60명의 수좌를 거느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직지사 천불선원에 30~40명의 대중이 모여 제산스님 회상에서 정진했을 때의 일이다. 모두 열심히 정진하는데 비해 수좌 한명이 말썽이었다. 정진 시간을 놓치는 것은 물론, 지대방에서 남몰래 혼자 누룽지를 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 보다 못한 수좌 여러 명이 제산스님을 찾아가 이 같은 일을 알렸다.
“스님, 아무개 수좌는 정진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부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러하니 아무개 수좌를 내 보내주세요.” 그러나 제산스님은 묵묵부답.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다음 안거 때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했고, 여러 스님들이 제산스님에게 같은 건의를 했지만, 역시 묵묵부답. 그렇게 몇 철이 지났다. 참다못한 대중들이 걸망을 싸서 짊어진채 제산스님을 찾아가 “큰스님 아무개 수좌를 내보내지 않으면, 저희들이 떠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제산스님이 한 마디 했다. “잘들 가시게. 이 사람은 나하고 살아야할 사람이고, 이 자리에 온 스님들은 모두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니, 어디를 가더라도 잘 정진할 수 있지 않겠소”
그제야 제산스님의 뜻을 알게 된 스님들은 걸망을 내려놓고 참회했다고 한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다른 이를 탓하지 않고 잘 정진하겠습니다.” 둥근 돌은 둥근 대로 쓸모가 있고, 모난 돌은 모난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을 잘 이끌어 가르치는 조어장부(調御丈夫)의 모습을 지녔던 제산스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다.
○…<한국불교계율전통>에는 제산스님이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스님에게 율맥을 전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불교>에는 ‘초의(草衣) → 범해(梵海) → 제산 → 호은(虎隱)→ 금해(錦海)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제산스님은 대련(大蓮).보담(寶潭).구성(龜城).응해(應海).남전(南泉) 스님외 40여명에게 의 전계(傳戒)했다.
○…<남전선사문집>에는 제산스님 생신을 맞이해 남전스님이 쓴 시가 한편 실려 있다. 한문으로 쓴 이 시에서 남전스님은 “큰 법이란 원래 아무 손상 없거니, 높은 사람 늙어감이 참으로 시름이다”면서 “지금부터 몇 천 년 도를 전하리”라고 했다. 또한 남전스님은 “오늘의 수연(壽宴)에는 법 자리가 그윽하다. 이 세상에 인연이 중하다는 것 스승에게 들었나니, 천년만년 사시라고 스스로 말하는구나”라고 했다. <삼소굴 소식>에는 제산스님이 입적 1년 전에 경봉스님에게 보낸 서신이 수록돼 있다.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1930년 가을. 스님도 세월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질서이다. 가벼운 병세가 나타나자 스님은 그해 8월 24일(음력)에 문도들을 불러 들였다.
“생이란 무엇입니까”라는 문도들의 질문에 제산스님은
“본래 불생이거늘,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북이 서로 치고 바다 밑에 불이 나서 모두 태워버리니
천고만고에 다만 이러할 뿐이로다”라고 답한 후 원적에 들었다.
비문에 기록된 문답의 원문은 이렇다.
“來生事作生(내생사작마생)”
“本不生焉有死風鼓相擊火燒海底 千古萬古只這詩
(본불생언유사 풍고상격화소해저 천고만고지저시)”
■ 제산스님이 남긴 시 ■
黃岳五十年(황악오십년) 황악산에 들어온 지 오십년
今朝時出山(금조시출산)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산을 떠나네
兜率何處在(두솔하처재) 도솔천이 어딘지 묻는 다면
拈起杖子(염기주장자) 주장자를 번쩍 들어 보여 주리라
■ 행장 ■
사명대사 법맥 계승
납자 지도 불교중흥
조선후기인 1862년(임술년, 철종 13년) 3월1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 씨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법명은 정원이고, 법호는 제산이다.
세속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다. 열네 살 되던 해에 마을 인근의 해인사로 출가해 신해서장(信海瑞章) 스님에게 체도(剃度,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됨)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15년간 수행에 몰두하던 스님은 이립(而立, 서른 살)이 되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수월(水月.의성 고운사).천원(天圓)스님과 함께 당대의 선지식인 경허(鏡虛, 1849∼1912) 스님 문하에서 정진했다. 경허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추대된 것이 1899년으로, 제산스님은 이때 경허스님과 인연이 닿으면서 참선수행의 공부를 깊이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스님은 사명대사 법맥을 계승한 우송(友松)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제산이란 법호도 우송스님에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제산스님은 1913년 봄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주석처를 옮기고, 천불선원을 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 만들었다. 직지사가 선찰로 본격적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이때부터 제산스님은 원적에 든 1930년까지 천불선원 조실로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탄옹.경봉.만봉.남전.전강.고암.동산 스님 등이 천불선원에서 제산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제산스님은 천불선원 벽안당(碧眼堂)에서 장좌불와하며 산문밖 출입을 일체하지 않아 ‘수행제일 선지식’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스님은 1930년(경오년) 8월24일(음력) 관음재일에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 69세, 법납 56세. 1943년 3월 김천 직지사 경내에 건립한 제산스님 비명(碑銘)은 한암스님이 썼다. 직지사는 매년 기일에 맞춰 추모재를 거행하고 있다.
직지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06호/ 2009년 3월0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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