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대강좌 5강 - 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釋迦牟尼佛 南無釋迦牟尼佛 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부처님의 교화가 절정에 달했을 때를 우리가 흔히 “영산회상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부처님의 세수가 70여세이고, 또 성도 하셔서 교화의 세월도 한 40여년 지난 뒤니까 출가제자들도 대단히 많고, 재가 신도들도 무수히 많은 무렵에 이 경전 중에서 왕이라고 하고, 또 부처님의 일생 설법을 총 결산하는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 “법화경이다.” 그러지요. 영산 회상은 부처님 생에 있어서 가장 빛났던 시기이고, 또 우리 교학적으로 보면 그 교학이 가장 절정에 달한 내용의 한 표현으로서 법화경이 그 자리를 매김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알 수도 없고,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스님들이 이렇게 모여서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여러 가지로 얼마나 일이 많고 바쁩니까?
사람 삶이 발달하면 사실은 좀 더 한가하고, 자유시간이 많고 노력을 적게 해도 살아가는데 어렵지가 않고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세상사나 우리출가인 들의 삶이나, 더 일이 많고 더 복잡하고 더 시간에 쫓기고,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 와 중에서 우리가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값지고 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스님들의 그 마음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책임감도 상당히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람도 크고요.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스님들 오시는데 제가 인사로 “아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고맙다는 뜻도 되지만, 우리불교에 “고맙다” 부처님에게 “고맙다” 또 자신에게 “고맙다” 우리불자들에게 “고맙다” 이런 의미가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늘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생을 중노릇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중노릇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비유품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되고, 아직 그것이 반쯤 진행이 되는 과정인데, 아시는 대로 이 비유품은 부처님이 방편품에서 최고의 내용을 설하시고, 그 내용을 들은 제자들 중에 대표로 사리불이 깨달음을 얻고 환희해서 자신의 기쁨을 피력하고, 부처님은 거기에 따라서 사리불에게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아주 장황하게 내리게 되었지요? 수기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그동안 세상사와 출세간사. 출세간사에 있어서도 부처님이 평생을 가르침을 폈는데, 그 가르침의 내용이 아주 다양하고, 또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는 사정들을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지요.
특히 火宅의 譬喩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데, 그것이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따질 것 없이 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데는 이와 같은 어려움ㆍ번뇌ㆍ고통ㆍ無常의 내용이 우리들을 핍박하고, 또 우리가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짓고 하는 그런 것들이 전부 이 화택비유 안에 다 설명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낱낱이 어떤 명제를 가지고 설명하지는 않지만, 화택의 설명 안에 상징적으로 전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73. 舍利弗 如來 亦復如是 則爲一切世間之父
사리불 여래 역부여시 즉위일체세간지부
사리불아, 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이것은 “법합” 이렇게 해요.
앞에서 법을 설명하지요. 비유는 비유대로만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무엇을 뜻 하는가? 이것을 이야기할 때는 과목 상으로
“법합” 이라고 합니다. 법과 비유를 합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면 의례히 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앞에서 든 비유처럼)
一切世間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화택의 주인. 그 주인은 부처님이고, 불타는 집의 여러 가지 광경은 세상사이고, 또 우리 번뇌의 모습이고, 그 속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들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74. 於諸怖畏 衰惱憂患 無明暗蔽 永盡無餘
어제포외 쇠뇌우환 무명암폐 영진무여
於諸怖畏와 여러 가지 공포와 衰惱憂患과 無明과 暗蔽에 永盡無餘하고,
세상의 아버지이니까 그런 모든 것들을 전부 없앤다. 영원히 없게 하고,
75. 而悉成就 無量知見 力無所畏 有 大神力 及智慧力 具足方便
이실성취 무량지견 역무소외 유 대신력 급지혜력 구족방편
智慧婆羅蜜 大慈大悲 常無懈倦 恒求善事 利益一切
지혜바라밀 대자대비 상무해권 항구선사 이익일체
無量知見과 심력과 4무소외를 다 성취해서 大神力과 智慧力이 있으며,
具足方便智慧婆羅蜜. 방편과 지혜와 바라밀들을 전부 具足을 해가지고서, 大慈大悲로서 常無懈倦이라. 항상 게으름이 없이하고 恒求善事라.
항상 善事를 구하게 해서 利益一切하느니라. 일체를, 중생들을 전부 이익하게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할 일이지요. 부처님이 할 일이고 그렇습니다.
화택에 비유하자면 아버지의 일이고, 이 세상에 비유하자면 부처님의 일이고, 또 이것이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우리들의 일이고, 또 좀 더 대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교에 뜻있는 모든 불자들의 일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직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기도 하고, 또 원력이 첫째 부족해서 그렇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고 또, 특히 출가 승려는 불자 중에서도 프로니까 좋든 싫든 이런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76. 而生三界 朽故火宅 爲度衆生 生老病死 憂悲苦惱 愚癡闇蔽
이생삼계 후고화택 위도중생 생로병사 우비고뇌 우치암폐
三毒之火 敎化令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독지화 교화영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而生三界의 朽故火宅하여 우리가 어쩔 수 없이 三界의 썩고 오래된 화택에 태어나서 중생들의 生老病死와 憂悲苦惱와 愚癡闇蔽인 三毒의 ←이런 불을 끄기 위해서 敎化하고, 그들로 하여금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도록 한다.
77. 見諸衆生 爲 生老病死 憂悲苦惱之所燒煮 亦以五欲財利故 受
견제중생 위 생로병사 우비고뇌지소소자 역이오욕재리고 수
種種苦 又以貪著追求故 現受衆苦 後受地獄畜生餓鬼之苦 若生天上
종종고 우이탐착추구고 현수중고 후수지옥축생아귀지고 약생천상
及在人間 貧窮困苦 愛別離苦 怨憎會苦 如是等 種種諸苦衆生 沒在
급재인간 빈궁곤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여시등 종종제고중생 몰재
其中 歡喜遊戱 不覺不知 不驚不怖 亦不生厭 不求解脫 於此三界
기중 환희유희 불각부지 불경불포 역불생염 불구해탈 어차삼계
火宅 東西馳走 雖遭大苦 不以爲患
화택 동서치주수조대고 불이위환
모든 중생들의 生·老·病·死·憂·悲·苦·惱의 타는 바가 되었으며, 우리가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며 좋든 싫든 生老病死憂悲苦惱.
기본적으로 다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에다가 또, 욕심까지 있으니까 五欲· 財利. 이것을 위해서 또 種種苦를 받으며, 본래 부여된 어쩔 수 없는, 이 몸 가지고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할 生老病死憂悲苦惱가 있는데다가, 또 짐짓 우리가 스스로 저질러서 생기는 고통도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지진 일어나면서 평소에도 늘 생각하는 바인데 천재지변으로 우리가 겪는 그런 고통도 사실은 이것이 불가항력이고, 참 많고, 또 이것을 우리가 헤쳐 나가야할 그 과제만으로도 너무 큰데, 왜 강대국에서 약소국을 침범해서 그 이율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짐짓 고통을 주느냐?
저는 그것이 제일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요. 살다보면 저런 천재지변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재지변으로서 우리가 겪어야할 고통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고통을 짐짓 저지르는 겁니다. 그래서는 사람들에게 전쟁이라고 하는 그런 엄청난 고통을 우리가 부여하고 있잖아요.
참 그것은 정말, 우리가 불교인이라서 꼭 중 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가슴아파해야 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저절로 겪는 고통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미얀마사건하며 중국 지진하며 그래요. 천재지변은 어떻게 할 수도 없고요.
우리가 그런 것을 보고 경각심을 일으켜가지고, 스스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어떤 이익을 위해서 고통을 준다고 하는 것은 정말 삼가야할 일인데, 어떻게 가르쳐야 그런 짓을 못하게 할 수 있을 런지, 참 너무 큰 과제지요.
又以貪著追求한다. 또 다시 탐착하고 추구하는 까닭으로 눈앞에서, 현재에서는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또 그것을 통해서 뒤에, 여기서는 現受. 後受그랬지요. 후에는 地獄·畜生·餓鬼의 고통을 또 받는다.
若生天上커나 만약 천상에 태어나거나 인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貧窮하고 困苦. 그리고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등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은等 種種 모든 고통 중생들이 諸苦衆生들이 沒在其中하여 그 속에 빠져 있다 이겁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
또 내 이 몸을 하나 영위해 가는데 어쩔 수 없이 받아야할 수밖에 없는 고통. 또 인간의 속성이 마음씀씀이가 본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받는 고통. 이것만 하더라도 짐짓 만든 고통은 아니라고요.
그런데 그 위에다가 일부러 만들어서 오는 고통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그 중에 빠져 있을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歡喜遊戱하며 不覺不知한다 이겁니다. 不驚不怖해.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亦不生厭이다. 싫어하는 마음도 내지 아니하고,
不求解脫이다. 거기서 벗어나려고도 생각하지 아니 한다.
於此三界火宅에 이 삼계화택에서 東西로 馳走한다.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이일 하고 저일 하고, 그냥 정신없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그런 걱들을 아주 참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뒤에 게송에 가면 더욱 더 실감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지요.
雖遭大苦나 不以爲患이라. 큰 고통을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크게 근심으로 여기지 않는 겁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 다른 점이, 저도 어릴 때 벌레 같은 것 잡아가지고 다리 찢고, 잠자리 같은 것 잡아가지고 다리 찢고, 메뚜기. 그거 무슨 먹을거리라고 그것을 잡아가지고는 풀줄기에 쭉 꿰어서 가지고가서 구워먹고, 그런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추호의 거리낌도 없이 그런 짓을 하거든요.
물고기 잡아서 패대기치고 하는 것.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떠했느냐?
그 人性이 우리하고는 달랐습니다.
농경사회니까 농사철에 의례히 가서 돌아봐야 되고, 그런 것을 보러 가서 밭을 가는데 쟁기에 벌레가 죽는 모습보고 크~~ 가슴 아파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보고 가슴 아파 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이 아주 여리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여릴 수 있느냐고요.
죽어 자빠졌는데 그것을 새가 와서 탁 쪼아 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픈 겁니다. 싯달태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겁니다.
우리하고는 인성이 그렇게 달라요. 우리는 일부러 그것을 잡고, 찢고, 패대기치고는 그것을 구워먹으면서 좋다고 희희닥거리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천차만별입니다. 저는 그것을 비유하면서 너무 부끄럽고, 석가모니부처님은 선천적으로 종교성이 아주 뛰어난 분이구나. ←이것을 우리는 과거생에 보살로 수행을 많이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과거생에 수행을 한 것은 전생을 잘 아는 깨달은 분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보다는, 선천적으로 종교성이 아주 뛰어난 성품을 타고난 분이 아닌가? 그런 것을 보고는 그만 큰 충격을 받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중생구제에 대한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여기 보십시오. 雖遭大苦나 不以爲患이라. 큰 고통을 받지만 그것을 걱정으로 생각을 아니합니다. 얼마나 무디고 멍청한지 이런 심성을 우리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 자꾸 갈고 닦아서 그런 문제에 민감해야 제대로 된 聖者의 마음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78. 舍利弗 佛見此已 便作是念 我爲衆生之父 應 拔其苦難 與 無量無邊
사리불 불견차이 변작시념 아위중생지부 응 발기고난 여 무량무변
佛智慧樂 令其遊戱(불지혜락 영기유희)
사리불아, 부처님 이러한 것을 보고나서 便作是念호대, 곧 이러한 생각을 하되,‘나는 중생의 아버지다. 응당히 그들의 고난을 뽑아주고, 한량없고 가이없는 佛智慧의 즐거움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즐길 꺼리. 遊戱할 꺼리로 삼게 하겠다.’이런 생각을 한 것이지요.
79. 舍利弗 如來 復作是念 若我但以神力及智慧力 捨於方便 爲諸衆生
사리불 여래 부작시념 약아단이신력급지혜력 사어방편 위제중생
讚如來知見 力無所畏者 衆生 不能以爲得度 所以者何 是諸衆生
찬여래지견 력무소외자 중생 불능이위득도 소이자하 시제중생
未免生老病死 憂悲苦惱 而爲三界 火宅所燒 何由能解 佛之智慧
미면생로병사 우비고뇌 이위삼계 화택소소 하유능해 불지지혜
사리불아, 여래는 또 다시 이런 생각을 하되, 我但以神力과 智慧의 힘으로 方便을 버리고,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如來의 知見과 ←이것을 잘 들어야 됩니다. 방편을 버리고,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여래의 지견과 힘과 無所畏. 아주 최고의 법을 가지고, 그것만을 찬탄을 할 것 같으면 중생들이 어떻게 되느냐? 不能以爲得度하느니라. 제도를 얻지 못 얻는다.
왜냐? 수준이 다르니까요. 저것은 우리하고 관계없는 일이다 이겁니다.
여기에 스님들 근래에 급식 활동도 많이 하시고, 또 여러 가지로 병원 문제라든지,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현상이 불교의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손 치더라도, 그래도 현재의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 어찌 보면 그것입니다. 그것이라고요.
그런데 제가 늘 꼭 권하는 것이 “불교하고 연계시켜라. 부처님의 가르침하고 연계시켜서 봉사활동. 자선활동을 하는 것이 불교적인 자선활동이고 복지활동이다.”이런 표현을 하는데, 사실 어찌 보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에게는 맞는 일이고요. 또 대단히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임에는 틀림없어요.
여기 보면 아주 고급 불법을 가지고 하면 중생제도 못 한다 이겁니다. 所以者何오. 모든 중생이 生老病死와 憂悲苦惱를 면하지 못하고,
三界火宅의 타는바가 됨을 면하지 못하니, 지금 당장에 닥쳐온 이 고통.
고픈 배를 채워야하고, 아픈 몸을 낫게 해야 하는 것. ←이것이 지금 급하잖아요. 무슨 까닭으로, 무슨 까닭으로 能解 佛之智慧리요. 능히 부처의 지혜. 그 차원 높은 부처의 지혜를 능히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했습니다. 부처님도 이러한 사실을 너무 잘 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편이라는 것이 무수히 등장하게 되고, 또 그 방편을 방편으로 알고 거기에서 끝나면 좋은데, 너무 방편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또 문제가 있고요.
이러나저러나 사바세계에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兩面을 우리가 늘 놓쳐서는 안 되지요.
方便과 實法. 實法과 方便. ←이것은 그야말로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항상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고, 그렇게 우리가 불법을 운용을 하고 교화를 해야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부처님도 토로를 다 해 놨잖아요.
아주 高峻한 불법만 가지고 부처님의 지혜가 어떻고 해탈이 어떻고 생사해탈이 어떻고, 그래 놓으면 그것 먹혀드나요? 안 먹혀듭니다.
서로 시간 낭비입니다.
어떤 불교 전혀 모른 사람이 불교에 대해서 뭐라고 물었는데, 그 때 달마스님한테 한참 빠져있던 스님인지 “不識” 이랬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소린지 몰라가지고 그것을 들고는 사방 쫓아다니면서 뭐라고 물었는데 불식이라고 하더라고...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달마스님이 불식이라고 했다고, 양무제에게나 달마스님이 한번 써 먹는 법문이지, 아무데나 써 먹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걸망지고 다닐 때 어떤 시자가 그런 법문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한참 선방의 이야기꺼리가 되고 그랬는데, 그렇게 되면 서로 시간 낭비이고 안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근기에 맞추어서 하되, 거기에 끝나면 또 그것도 아니지요. 그러니까 항상 양면을 늘 겸해서 할 줄 알아야 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80. 舍利弗 如彼長者 雖復身手有力 而不用之 但以慇懃方便 勉濟諸子
사리불 여피장자 수부신수유력 이불용지 단이은근방편 면제제자
火宅之難然後 各與珍寶大車 如來 亦復如是 雖有力無所畏 而不用之
화택지난연후 각여진보대거 여래 역부여시 수유력무소외 이불용지
但以智慧方便 於三界火宅 拔濟衆生 爲說三乘聲聞辟支佛佛乘 而作是言
단이지혜방편 어삼계화택 발제중생 위설삼승성문벽지불불승 이작시언
사리불아, 如彼長者가 雖復身手有力이나, 비록 다시 몸과 손에 힘이 있긴 있지만 그러나 不用之라. 그것을 쓰지 않고 但以慇懃方便으로, 아이들을 방편으로 얼른얼른 들어다가 밖으로 집어 던질 수도 있고 끌어낼 수도 있어. 그런데 500명이 되니까 다 끌어낼 수는 없겠지요. 어쨌든 그렇게 하지를 않고, 다만 慇懃方便으로, 은근한 方便으로서 여러 아들들을 火宅의 難에서 힘써 건진 연후에 각각 珍寶大車. 아주 아름다운 보배로 꾸민 큰 수레를 주었듯이, 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비록 身力과 4無所畏가 있기는 있으나 그것을 쓰지를 않고, 但以智慧方便으로서 三界火宅에서 중생들을 拔濟해서 三乘인 聲聞·辟支佛·佛乘을. 그들을 위해서 설하노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요? 佛乘. 보살승이라고 해야 되는데 여기서 성문 벽지불 불승. 그랬습니다. 여기 佛乘은 두 번 이런 것이 나오는데, 이걸 가지고 고민하는 분들이 옛날부터 많아요.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보살승을 여기서 佛乘이라고 표현했다고 해버리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경전에 혹 그런 것이 있으니까요. 이것은 오류라고 보기도 그렇고, 어쩌다가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그래요. 보살승이라고 하면 더 이상 의문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古來로 경전을 많이 연구한 분들이 그냥 “보살승이라고 봐야 된다.”←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而作是言하대,
81. 汝等 莫得樂住 三界火宅 勿貪麤弊 色聲香味觸也 若 貪著生愛
여등 막득락주 삼계화택 물탐추폐 색성향미촉야 약 탐착생애
則爲所燒(즉위소소)
汝等은 莫得樂住 三界火宅하고, 삼계화택에 즐겨 머물지 말고,
麤弊 = 폐단. 나쁨. 변변찮은. 시원찮은. 더러운.
色·聲·香·味·觸. ←이런 것들을 탐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若 貪著生愛하면, 만약에 색성향미촉을 貪著해서 애착을 낼 것 같으면 곧 불에 타는바가 된다. 불에 탄다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뜨거운 불로 타는 것이 아니라, 색·성·향·미·촉. ←이것이 5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5은 이것입니다. 색성향미촉. 우리가 거기에 집착을 하고, 집착해서 거기에 아주 빠지고, 그래서 거기에 아주 도취하고 이래 버리면 그것이 타는 것이지요.
82. 汝 速出三界 當得三乘 聲聞辟支佛佛乘 我今爲汝 保任此事
여 속출삼계 당득삼승 성문벽지불불승 아금위여 보임차사
終不虛也 汝等 但當 勤修精進 如來 以是方便 誘進衆生
종불허야 여등 단당 근수정진 여래 이시방편 유진중생
汝等은 빨리 삼계에서 벗어나서 마땅히 三乘인 聲聞·辟支佛·佛乘. 여기도 보살승으로 봐야 되겠지요. 보살승을 얻을지니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서 이 일을 保任하노라. 좀 책임지고 보증한다는 이런 뜻입니다. 여기는... 그것을 내가 일단 책임을 진다는 이 말입니다.
終不이 虛也니라.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방편으로 이야기한 것이 물론 실법은 아니야, 그렇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책임을 진다. 여기서 保任이라는 말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보증한다. 경전에서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상당히 고민이 깊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안 그러겠습니까?
이것이 실법은 아닌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게 실법을 바로 “不識” ←이렇게 한다든지 하면, 그 수준에 해당되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방편을 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 진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끌어올려서 부처님의 지혜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의미가 保任이라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終不虛也니라. 삼승방편이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汝等은 다만 마땅히 勤修精進이니 부지런히 精進을 닦을지니,
如來가 이方便으로서 誘進衆生호라. 중생들을 유혹해서 나아가게 한다.
그렇지요.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어떤 일도 그래요. 인등을 켜는 일이라든지 뭘 하는 일이라든지 예를 들어서 齋같은, 우리 예수재 같은걸 지낼 때는 연도 태워가지고 반야용선이다 해서 극락으로 가는 그런 흉내도 내고, 또 49재 같은걸 할 때 종이로 만든 반야용선을 걸어놓지요. 다 상징적인 것이잖아요.
다 전부 상징적인 것이거든요. 그것이 무당 짓거리가 아니라 바로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런 의미. 깊은 의미를 우리가 일깨워 주면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일이 괜찮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왜냐? 그것을 통해서 하나 더 깨우쳐 주면 되니까요.
誘進衆生이라고 했잖아요.
誘자가 뭡니까? 달랜다. 꼬인다. 유혹한다. ←이런 말이잖아요.
심지어 중생을 유혹을 해서라도, 우리 유혹 많이 하잖아요.
하~ 이상하게 생긴 것을 “佛像이다.” 이렇게 꿰어 맞추어서 여기에 기도하면 영험 있다고 해가지고... 그렇게라도 부처님 앞으로 이끌어 올 수 있으면 그것 또한 좋은 방편이다 이것이지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
83. 復作是言 汝等 當知 此 三乘法 皆是聖所稱歎 自在無繫 無所依求
부작시언 여등 당지 차 삼승법 개시성소칭탄 자재무계 무소의구
乘是三乘 以無漏根 力 覺 道 禪定 解脫 三昧等 而自娛樂 便得無量
승시삼승 이무루근 역 각 도 선정 해탈 삼매등 이자오락 변득무량
安穩快樂(안온쾌락)
復作是言호대, 다시 이런 말을 하대, 汝等은 마땅히 알아라.
三乘法은 皆是聖所稱歎이라. 다 성인들이 稱歎하는바다. 아, 이래해 놨잖아요. 방편인데 성인들이 칭탄하는바다. 自在無繫라. 이것은 자유자재하는 것이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無所依求. 의지하거나 구할 바는 없음이니 乘是三乘하야 이 3승을 타서 어떻게 하지요?
3승을 통해서 無漏ㆍ五根·五力·七覺地·八正道·禪定·解脫·三昧. 이러한 등으로서 而自娛樂하면 그것을 가지고 결국 자기 살림살이를 삼아서 그 속에서 즐긴다면 便得無量 安穩快樂이라. 곧 한량없는 安穩快樂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랬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3승 방편이 말하자면 중간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부처님이 말씀하지 아니한 방편도 이 시대에 알맞은 그런 무수한 방편을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있는데, 그것 까지는 좋지요.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게 한걸음,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면 그럼 좋은 것이지요.
여기서 부터는 3승을 해설하는 명문입니다.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84. 舍利弗 若有衆生 內有智性 從佛世尊 聞法信受 慇懃精進 欲
사리불 약유중생 내유지성 종불세존 문법신수 은근정진 욕
速出三界 自求涅槃 是名聲聞乘 如彼諸子 爲求羊車 出於火宅
속출삼계 자구열반 시명성문승 여피제자 위구양거 출어화택
사리불아, 만약 어떤 중생이 안으로 지혜의 성품이 있어서,
從佛世尊하야,부처님 세존으로부터 聞法信受하고, 법을 듣고 믿고 받아가져, 그래서 慇懃精進하며, 또 삼계에서 빨리 벗어나서 스스로 열반을 구하고자하나니, 이것의 이름이 聲聞乘이다. 그렇지요.
열반을 구하면 그것이 성문승입니다. 如彼諸子가 예컨대 저 비유에서 들었던 여러 아들들이 양의 수레. 양이 끄는 수레를 구하기 위해서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음이니라. 양거ㆍ녹거ㆍ우거. 이것을 낱낱이 들지요.
그 다음에 두 번째 연각승이지요.
85. 若有衆生 從佛世尊 聞法信受 慇懃精進 求 自然慧 樂獨善寂
약유중생 종불세존 문법신수 은근정진 구 자연혜 낙독선적
深知諸法因緣 是名辟支佛乘 如彼諸子 爲求鹿車 出於火宅
심지제법인연 시명벽지불승 여피제자 위구녹거 출어화택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 세존으로부터 聞法信受하고 慇懃精進해 가지고서 自然慧를 구해. 自然慧는 본래 있는 지혜입니다. 저절로 자기 속에, 그것을 다른 말로 無師智라고도 합니다. 스승 없이 얻는 지혜.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들 자신 속에 이미 갖추고 있는 것. 기존의 것.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개발해 쓰는 것이지 결코 밖에서 어떻게 만들어 오 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이 불교의 강점입니다.
다른 종교는 꼭 다른 데서 얻고, 가피를 얻고 이것만 자꾸 주장하는데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위대한 것도 이미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
기존의 것을 개발해 내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여기 自然慧 라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무사혜라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樂獨善寂이라. 홀로 있기를 즐기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며,
深知諸法因緣하느니 제법 인연을 깊이 아느니, 인연의 도리. 그래서 緣覺이라고 그러지요. 이것의 이름이 辟支佛乘이니, 예컨대 저 비유에서 말한 저 여러 아들들이 녹거를 구하기 위해서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음이니라. 그러니까 양이 끄는 수레를 얻으려고 뛰쳐나왔든, 사슴이 수레를 가지려고 뛰쳐나왔든, 일단은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면 되는 겁니다.
86. 若有衆生 從佛世尊 聞法信受 勤修精進 求 一切智 佛智 自然智
약유중생 종불세존 문법신수 근수정진 구 일체지 불지 자연지
無師智 如來知見 力無所畏 愍念安樂 無量衆生 利益天人
무사지 여래지견 역무소외 민념안락 무량중생 이익천인
度脫一切 是名大乘菩薩 求此乘故 名爲摩詞薩 如彼諸子 爲求牛車
도탈일체 시명대승보살 구차승고 명위마하살 여피제자 위구우거
出於火宅(출어화택)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 세존으로부터 聞法信受하고 勤修精進해서 一切智· 佛智· 自然智· 無師智. 저 앞에는 자연지 하나만 이야기했는데 여기는 다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如來知見과 力無所畏를 구하기 위해서 愍念安樂 無量衆生하고, 거기다가 무량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天人들을 이익 하게 하고, 일체중생들을 度脫하게 하나니 이것의 이름이 大乘菩薩이다. 그러니까 보살승. 聲聞乘ㆍ 緣覺乘ㆍ 菩薩乘. 이렇게 해놨습니다.
이런 것들이 3승을 설명할 때 정확한 경문이 되는 것이지요.
求此乘故로, 이러한 가르침을 구하는 까닭에 이름을 마하살이라고 한다. 名菩薩摩詞薩. 이쯤 되면 보살마하살. 대보살.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如彼諸子가 예컨대 저 여러 아들들이 牛車. 가운데서 소가 끄는 수레를 구하기 위해서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비유해서 그렇습니다.
- 5강 - 2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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