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녹취(문수경전)

법화경 대강좌 5강 - 3 (비유품 120~141)

수선님 2023. 3. 12. 13:08

법화경 대강좌 5강 - 3

 

 

  불교의 교설이 많고 경전도 대단히 많은데, 이 법화경은 “경전의 완성이다.” “부처님 교설의 완성이다.”  제가 늘 그런 표현을 합니다. 

법화경은 공부하면 할수록 그런 믿음이 더 갑니다.

정말 “부처님 교설의 완성이고 경전의 완성이다.” 이 이상 더 덮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무수히 듭니다. 그래서 옛 부터 법화경 영험록만 하더라도 법화경 몇 배될 정도로 기록이 남아있고, 우리 어릴 때 치문에도 보면 법화경을 외우는데 꿩이 와서 옆에서 듣고는, 그 말도 못 알이 듣는 미물인 꿩이 듣고는 나중에 죽어서 인도환생 해가지고 법화경을 아주 횡 하게 외우는 그런 영험록 같은 것을 다 익히 들으셨을 줄 압니다.

 

  또 어떤 영험도, 저는 영험록 보기는 해도 크게 이야기는 잘 아니하는 입장인데,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해서 법화경 사경 하려고, 그것도 본인이 직접 하지 않고 옛날에는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이 몇이 없으니까 쓰는 사람에게 갖다 줘서 놉을 들여서 사경 하는데, 그런 일이라도 하려고 시장에 가서 종이를 샀는데 그날 저녁에 어머니가 천도 되었다는 등등 법화경의 영험록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현대인들은 잘 안 믿으려고 하는데 크게 과장은 아니지 않는가? 법화경 공부하면 할수록 그런 믿음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하루에 한, 두~세 시간씩 법화경에 매일 매달려서 평생을 공부해도 충분히 그런 가치가 있고, 참 좋은 경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이 하게 됩니다.

 

  10使煩惱는 앞에서 말씀드렸고 다음에 大車12德을 말하는데 큰 수레의 12가지 덕을 이야기를 합니다.  

 

120.  長者大富 庫藏衆多 金銀琉璃 硨거瑪瑙 以衆寶物 造諸大車

       장자대부 고장중다 금은유리 자거마노 이중보물 조제대거

       莊校嚴飾 周匝欄楯 四面懸鈴 金繩交絡 眞珠羅網 張施其上

       장교엄식 주잡난순 사면현령 금승교락 진주라망 장시기상

       金華諸瓔 處處垂下 衆綵雜飾 周匝圍繞 柔軟繒纊 以爲茵褥

       금화제영 처처수하 중채잡식 주잡위요 유연증광 이위인욕

       上妙細氈 價値千億(상묘세전 가치천억)

      

  장자가 크게 부자가 되기 때문에 고향에서 衆多. 창고마다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이런 등등 여러 가지 보물로서 큰 수레를 만들었다. 그랬어요. 산문을 잠깐 봅시다. 80쪽 63번(4강-4) 그 수레가 高廣하다 그랬습니다.

높고 넓다. ←이것이 大車12德 가운데 첫째 덕입니다.

높고 넓다는 것은 뭐냐? 인간의 큰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큰마음을 부처님은 다 개발해 내신 분이지요. 우리는 넓고 큰마음을 또 개발해야할 과제에 있습니다. 다음에 12가지 덕 가운데서

 

  衆寶莊校(중보장교)라고 그랬지요. 여러 가지 보물로서 꾸몄다고 그랬어요. 이것은 뭡니까? 우리의 선한 행. 선한 마음. 선한 일. 이런 것에 비유합니다. 衆寶. 여러 가지 보배로서 꾸몄다. 그렇지요. 사람이 사람답고 “하, 그 사람 좋은 사람”하면 물질로 따진다면 보배스러운 사람이 이런 것 아니겠어요? 마음 잘 쓰는 사람. 남에게 덕 되는 사람. 세상에 이익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보물이거든요. 참 이 법화경이 수레. 큰 수레. “으리으리하게 보물로서 장엄했다” 그렇게 표현하면 간단한데 그 보물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요. 그 다음에 12가지 덕 가운데서

 

  周帀欄楯(주잡난순). 난간이 빙 둘러져 있다는 이 말은 뭡니까?

난간은 사람들이 떨어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누각의 난간도 그렇고 수레의 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착한 것을 가지고, 악한 것을 막는다는 막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欄楯. 난간의 역할입니다. 그 다음에

 

  四面懸鈴(사면현령). 사면에 방울을 달았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좋은 말씀. 진리의 가르침. 懸鈴. 방울은 소리가 나니까요.

방울은 소리가 나니까 아름답고 청아한 소리가 나니까 그것은 결국 법문에다 비유를 한 것이지요.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의도를 가지고 수레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한 것이지요. 사바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5강-2)과 그 속에 사는 우리들의 심리현상들을 아주 리얼하게 표현한 것이, 여러 가지 짐승들. 날것. 그것을 五鈍使와 五利使의 그렇게 배대해서 표현한 것 하며,

사면에 방울을 달았다는 것 까지도... 이런 것은 생략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부처님은 설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張設幰蓋(장설헌개). 휘장을 펴서 덮개를 했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중생을 보호한다는 작용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덮개는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상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경전을 읽는 것도 좋지요. 그렇지만, 무턱대고 읽지만 말고 그 속에 담겨있는 부처님 설법의 치밀성까지 세세하게 눈여겨본다면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또

 

  亦以珍奇雜寶(역이진기잡보)로서 而嚴飾之(이엄식지)라고 했어요.

여러 가지 진귀한 雜寶로서 꾸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좋은 행동. 좋은 선행. 상황에 맞는 선행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일방적인 선행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근기에 맞는 그런 것을 珍奇雜寶로서 꾸몄다고 표현했습니다.

 

  寶繩交絡(보승교락). 보배 줄로 얽고. 그 다음에

垂諸華瓔(수제화영)이라. 꽃과 구슬로서 드리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四弘誓願에다 비유했다고 했습니다. 왜냐? 사방으로 드리웠다는 것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寶繩. 보배 줄로 걸쳐놓고 꽃과 구슬로서 드리웠다. 사방을 아름답게 꾸몄다고 해서 사홍서원을 뜻하는 것이라고 까지 표현을 하고요. 그 다음에

 

  重敷婉筵(중부완연)이라. 아주 부드러운 고급 카펫 같은 것을 거듭거듭 펼쳐놓고 安置丹枕(안치단침)이라. 붉은 베개 같은, 가로놓이는 의지할 것을 라고 합니다. 붉은 丹枕을 安置했다.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했겠습니까? 丹枕라고 하면, 붉은 베개라고 했지만 고급요정 집에 가면 긴 것 의지하는 것 있지요. 그런 것을 丹枕라고 합니다. 아주 아름답게 꾸몄다. 이것은 마음의 禪定을 얻은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역시 부처님이 禪定을 얻은 마음이지요. 보료라고 하지요?

보료 옆에 기대기 좋은 긴 베개인데 얼마나 편안합니까? 禪定을 그렇게 상징했습니다. 법화경의 오묘함이 여기까지 미칩니다. 그 다음에

 

  駕以白牛(가이백우)로서 흰 소로서 멍에를 했고, 그 흰 소의 피부색은 充潔(충결)라고 그랬어요. 아주 충실하고 토실토실하고 그리고 아주 맑고, 형체는 姝好(주호)라. 아주 예쁘고 아름답게 생겼더라. 그렇게 했는데 흰 소가 뭡니까? 흰 소라고 하는 것은 희다는 색깔이 중요하거든요.

이것은 邪見을 말끔히 제거한 마음 상태에다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正法. 바른 생각. 바른 의지. 바른 사고 이것이 도대체 뭔가 틈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말도 그럴 수가 있고 소도 그럴 수가 있겠지만, 살이 아주 토실토실하게 쪄가지고 다른 잡것이 도저히 붙을 수 없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지요. 그 다음에

 

  大筋力(대근력).  筋力이 있다 그랬어요. 큰 기운이 있다. 이것은 수레를 끄는데 아주 힘이 넘쳐나서 거뜬히 끌고 가는 이것이 미혹을 깨트리는데 거뜬히 끌고 가는 것. 힘이 넘쳐서 수레를 거뜬히 끌고 간다.

부처님이나 부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미혹을 완전히 없애고, 정말 당당하게 힘차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그런 모습에 큰 기운과 힘이 넘친다고 표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行步平正(행보평정)이라고 그랬지요? 걸어 다니는 걸음걸이가 평탄하고 바르다. 그리고 그 빠른 것이 바람처럼 빠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비유한 것인데, 불법을 믿거나 아니면 부처님의 어떤 정신 상태를 이야기하면, 어떤 차별에 치우치거나 미혹에 빠지지 않고, 있음과 없음에 평등하고, 유와 공에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그런 철학으로서 중도적인 삶을 당당하게 표현하면서 걸어가는 것을 行 步 平 正 其 疾 如 風. ←참 멋지게 표현했잖아요.

정말 그 정신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변견과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그런 중도적인 정신이 무장이 탁 되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러면서 다 수용하면서 사는 ←이런 삶을 큰 소가 힘이 넘치고, 아주 아름다운 수레를 끌고 가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고, 걸음걸이가 平正한 그 모습.

평정이라는 것이 기울지 않는다. 中道라고 표현했는데 참 멋지지요.

알고 보면 정말 멋진 표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

 

  又多僕從(우다복종)하여 而侍衛之(이시위지)라. 거기에 종이 많아서 주변에 호위를 하면서 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법화경의 가르침. 또는 부처님의 어떤 정신세계. 거기에는 예를 들어서 외로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경지가 어찌 외로울 수가 있습니까?

300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야말로 이억 만리 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처님의 그 은덕과 그 감화와 그 지혜와 그 능력에 감동이 되어서 오늘도 이렇게 살고 있는 그것. 바로 그런 표현들이지요. 又多僕從이라. 從이라는 것이, 물론 타 종교에서는 종이라는 표현을 합니다만, 여기는 비유니까요. 불교에서 종이라는 소리를 쓰는 것은 從이아닙니다. 수레를 끄는데 侍從者들이지요.

 

   순서대로 안 되었고, 대개 이것을 연구하는 분들이 大車12德만은 산문이 더 제대로 되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120~121은 63과 내용이 같아서 스님이 생략하심)

 

120. 長者大富 庫藏衆多 金銀琉璃 硨거瑪瑙 以衆寶物 造諸大車

      장자대부 고장중다 금은유리 차거마노 이중보물 조제대거

      莊校嚴飾 周匝欄楯 四面懸鈴 金繩交絡 眞珠羅網 張施其上     

      장교엄식 주잡난순 사면현령 금승교락 진주라망 장시기상     

      金華諸瓔 處處垂下 衆綵雜飾 周匝圍繞 柔軟繒纊 以爲茵褥      

      금화제영 처처수하 중채잡식 주잡위요 유연증광 이위인욕     

      上妙細氈 價値千億(상묘세첩 가치천억)      

 

121. 鮮白淨潔 以覆其上 有大白牛 肥壯多力 形體姝好 以駕寶車

      선백정결 이부기상 유대백우 비장다력 형체주호 이가보거

      多諸儐從 而侍衛之 以是妙車 等賜諸子

      다제빈종 이시위지 이시묘거 등사제자

 

122. 諸子是時 歡喜踊躍 乘是寶車 遊於四方 嬉戲快樂 自在無礙

      제자시시 환희용약 승시보거 유어사방 희희쾌락 자재무애

諸子是時에 여러 아들들이 그때에 歡喜踊躍해서 이 보배의 수레를 타고

遊於四方하고 사방에 노닐며 嬉戲快樂이라. 아주 즐겁게 놀고 있더라. 그리고 自在無礙. 아무 것도 걸릴 것이 없이 자유자재라.

 

123. 告舍利弗 我亦如是 衆聖中尊 世間之父

      고사리불 아역여시 중성중존 세간지부

사리불에게 하노니, 我亦如是하여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衆聖中尊이라. 여러 성인 가운데도 으뜸이다. 세간의 아버지라.

 

124. 一切衆生 皆是吾子 深著世樂 無有慧心 三界無安 猶如火宅

      일체중생 개시오자 심착세락 무유혜심 삼계무안 유여화택

      衆苦充滿 甚可怖畏(중고충만 심가포외)

일체 중생은 나의 아들이다. 세간 사람들이 深著世樂. 세상 낙에 집착을 해서 無有慧心이라. 지혜의 마음이 없으며, 三界無安이 猶如火宅이라.

우리가 아주 익숙한 말이 여기 나오네요. 三界無安이 猶如火宅이라.

衆苦充滿이니 여러 가지 고통이 충만하니 甚可怖畏라. 너무너무 두렵고 두렵다.

 

125. 常有生老 病死憂患 如是等火 熾然不息

      상유생로 병사우환 여시등화 치연불식

常有生老 病死憂患하야 如是等火가 이와 같은 불이 熾然不息이라.

끊임없이 타고 있다.

 

126. 如來已離 三界火宅 寂然閑居 安處林野 今此三界 皆是我有

      여래이리 삼계화택 적연한거 안처임야 금차삼계 개시아유

      其中衆生 悉是吾子 而今此處 多諸患難 唯我一人 能爲救護

      기중중생 실시오자 이금차처 다제환란 유아일인 능위구호

如來已離 三界火宅하고, 여래는 삼계화택을 이미 떠났고,

寂然閑居라. 고요하고 한가하게 해서 安處林野하니 숲속에 편안하게 했으니 今此三界가 皆是我有이며, 그랬습니다. 여기서부터 줄그어야 돼요. 여기 유명한 말이 主 師 親 三 德. 주사친삼덕章이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主 = 今此三界가 皆是我有라. 내 소유다 이 겁니다. 부처님 것으로 등기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주덕입니다. 

親 = 其中衆生은 悉是吾子라. 전부 내 자식이다. ←이것이 친덕입니다.

師 = 而今此處에 多諸患難이라. 그런데 여기에 患難이 많다.

唯我一人이 能爲救護라. 오직 내 한 사람이 그들을 능히 구호한다. 이것이 스승노릇을 한다 이겁니다. ←이것이 사덕입니다. 주인의 덕. 어버이 덕. 스승의 덕. 3덕이라고 해서 법화경에서는 중요시 여깁니다.

主師親. 三德章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순서가 主 親 師인데, 불교에는 이런 것이 더러 있지요.

 

  主 師 親. ←이렇게 불러요. 우리가 空 假 中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순서대로 하면 가 공 중입니다. 假觀. 空觀. 中道觀.

그런데 空 假 中이라고 말하고, 都序에도 相 空 成 이러잖아요.

그런데 공 성 상 3종. 그것이 부르기 편리한대로 그렇게 부르는지 그래도 거기에 크게 혼동은 없으니까요. 순서대로 하면 상 공 성이거든요. 그런데 공 성 상 3종이라고 말하고, 주사친도 그렇고 그러나 아무 문제는 없는 것이지요. 어쨌든 3德을 여기서 밝혔다는 것이 다른 경전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이야기할 때 주사친 3덕을 가지고 이야기해도 좋은 소재가 되지 않겠나 그렇게 봅니다.

     

127. 雖復敎詔 而不信受 於諸欲染 貪著深故

      수부교소 이불신수 어제욕염 탐착심고

비록 다시 가르치나 不信受는 그러나 능히 信受 하지 아니하는 것은 於諸欲染에 여러 욕망의 물듦에 탐착함이 깊었음이라. 그래서

  

128. 以是方便 爲說三乘 令諸衆生 知三界苦 開示演說 出世間道

      이시방편 위설삼승 영제중생 지삼계고 개시연설 출세간도

방편으로서 3승을 위하여 설해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의 고통을 알게 하고 開示演說 出世間道어든, 출세간도를 개시해서 연설하거든,

 

129. 是諸子等 若心決定 具足三明 及六神通 有得緣覺 不退菩薩

      시제자등 약심결정 구족삼명 급육신통 유득연각 불퇴보살

모든 아들들이 若心決定하면, 만약 마음을 결정하면 三明과 六神通을 具足해서 有得緣覺과 연각과 그리고 不退菩薩을 얻게 되리라.

 

130. 汝舍利弗 我爲衆生 以此譬喩 說一佛乘 汝等若能 信受是語

      여사리불 아위중생 이차비유 설일불승 여등약능 신수시어

      一切皆當 成得佛道(일체개당 성득불도)

사리불아, 내가 중생들을 위해서 이러한 비유로서 일불승을 설하노라.

너희들은 만약 능히 내 말을 믿고 받아가지면 일체 모든 이들이 다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131. 是乘微妙 淸淨第一(시승미묘 청정제일)

是乘은 微妙하야, 이 일불승은 미묘해서 淸淨第一이라.

 

132. 於諸世間 爲無有上 佛所悅可 一切衆生 所應稱讚 供養禮拜

      어제세간 위무유상 불소열가 일체중생 소응칭찬 공양예배

      無量億千 諸力解脫 禪定智慧 及佛餘法 得如是乘 令諸子等

      무량억천 제력해탈 선정지혜 급불여법 득여시승 영제자등

      日夜劫數 常得遊戱 與諸菩薩 及聲聞衆 乘此寶乘 直至道場

      일야겁수 상득유희 여제보살 급성문중 승차보승 직지도량

     

  모든 세간에 無有上일새. 이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없을 세.

佛所悅可며 부처님이 悅可. 기뻐하는 바며, 一切衆生이 응당히 稱讚하는 바며, 供養禮拜하는 바며, 無量億千의 諸力解脫과 禪定과 智慧와 그리고 佛餘法. 나머지 부처님의 여러 가지 법이며, 得如是乘이라. 이와 같은 가르침을 얻으며, 令諸子等으로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日夜劫數에 밤낮 세월에 常得遊戱하며 항상 戱遊함을 얻으며 모든 보살과 그리고 聲聞衆이 이 보배의 수레를 탈것 같으면, 일불승의 수레를 만약에 탈것 같으면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 道場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른다.”부처님 깨달은 곳이 도량이니까요.

 

133. 以是因緣 十方諦求 更無餘乘 除佛方便 告舍利弗 汝諸人等

      이시인연 시방제구 갱무여승 제불방편 고사리불 여제인등

      皆是吾子 我則是父 汝等累劫 衆苦所燒 我皆濟拔 令出三界

      개시오자 아즉시부 여등누겁 중고소소 아개제발 영출삼계

이 인연으로서 十方諦求하여도 시방에 자세히 구한다 하여도,

更無餘乘이니 다시 더 이상 가르침이 없음이니 除佛方便이라.

부처님의 방편만 제외한다. 사리불에게 하사대 汝諸人等은 皆是吾子요, 다 나의 자식이요, 나는 곧 아버지라. 汝等累劫에 衆苦所燒어늘. 여러 겁 동안에 여러 가지 고통으로 타는 바가 되었거늘 我皆濟拔하여 내가 다 건지고 건져서 삼계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134. 我雖先說 汝等滅度 但盡生死 而實不滅 今所應作 唯佛智慧

      아수선설 여등멸도 단진생사 이실불멸 금소응작 유불지혜

      若有菩薩 於是衆中 能一心聽 諸佛實法 諸佛世尊 雖以方便

      약유보살 어시중중 능일심청 제불실법 제불세존 수이방편

      所化衆生 皆是菩薩(소화중생 개시보살)

 

  我雖先說 汝等滅度나 내가 앞서 너희들의 제도. 너희들의 滅度. 열반이지요. 그것을 이야기 하긴 했어. 그런데 그 내용은 但盡生死요 而實不滅이라. 그것은 生死의 고통만 면했을 뿐이지 진짜 멸도는 아니다. 진짜 제도는 아니다 이것이지요. 而實不滅이니 今所應作은 唯佛智慧니라. 지금은 그럼 뭐냐? 열반 말고 그 외에 무엇을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있느냐? 今所應作은, 지금 마땅히 꼭 해야 할 것은 부처님의 지혜다. 부처가 깨달은 바의 지혜를 너희들도 증득 하는 것. 깨닫는 것. ←이것이 불교 궁극의 목표이고, 또 모든 사람이 그런 소지를, 그리고 또 씨앗을 다 가지고 있는 것. ←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앞서 열반을 이야기하고 별별 이야기를, 성문 연각 보살들에게 이야기 했지만 그것은 진짜 아니야. 生死의 고통은 면했을지 몰라. 그렇지만 그것은 진짜의 불교의 목표는 아니다. 今所應作은 唯佛智慧니라 그랬습니다.

 

  若有菩薩이 대중 가운데서 能一心聽 諸佛實法이니 제불의 실법을 일심으로 들음이니 諸佛世尊은 雖以方便이나, 비록 방편으로 하지만, 所化衆生은 교화할 바 중생은 皆是菩薩이니라. 여러 가지 방편으로 하지만 사실은 보살 수준에 이른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所化衆生은 皆是菩薩이다 그랬으니까요. 전부 보살로 보고 설하는 겁니다.

그래서 敎菩薩法 · 佛所護念. 법화경은 의례히 그 말이 따라다니지요.

보살을 교화하는 가르침이고 부처님이 護念하는바이다. 부처님이 보호하고 아끼는 가르침이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했지요?

 

135. 若人小智 深著愛欲 爲此等故 說於苦諦 衆生心喜 得未曾有

      약인소지 심착애욕 위차등고 설어고제 중생심희 득미증유

      佛說苦諦 眞實無異(불설고제 진실무이)

若人小智하여 만약 어떤 사람이 지혜가 적어서 深著愛欲일새. 애욕에 깊이 집착했을 세. 爲此等故로 이러한 이들을 위한 까닭으로 說於苦諦하나니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너무 집착을 해서 고통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모르니까, 그 사람에게 급한 것은 지금 그 일이니까요. 그래서 衆生心喜하여 得未曾有하니, 열반을 얻게 하니 마음이 기뻐서 미증유를 얻었다 이겁니다.

佛說苦諦는 眞實無異니라. 부처님이 苦諦를 설한 것은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진실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136. 若有衆生 不知苦本 深著苦因 不能暫捨 爲是等故 方便說道

      약유중생 부지고본 심착고인 불능잠사 위시등고 방편설도

      諸苦所因 貪欲爲本 若滅貪欲 無所依止 滅盡諸苦 名第三諦

      제고소인 탐욕위본 약멸탐욕 무소의지 멸진제고 명제삼제

      爲滅諦故 修行於道 離諸苦縛 名得解脫

      위멸제고 수행어도 이제고박 명득해탈

     

  若有衆生이 不知苦本하옵고 고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深著苦因하여 고의 원인에 깊이 집착해서 不能暫捨어든 능히 잠깐도 버리지 못하는 이러한 까닭으로 方便說道하니 방편으로서 도를 설하니, 그러니까 버리는 길을 설한 것이지요. 그래 우리가 “八正道” 그러지요? 苦集滅道를 해결하는 데는 팔정도의 수행이 있어야한다. 方便說道라고 하는 것이 그런 말입니다.

諸苦所因은 모든 고통의 원인은 貪欲爲本이라. 탐욕이 근본이 된다.

그러니까 팔정도를 실천함으로 해서 탐욕에서 벗어난다.

팔정도는 중도를 말하는 것이지, 그것을 전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고 바르게 업을 짓는다. 그것이 뭐냐?

전부 방생만 하고 살생을 안 하는 것이 正命이고 正業이냐?

우리가 흔히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죽여야 할 경우는 죽이는 그것이 정명이고 정업이라고요.

그것이 中道입니다. 중도적인 팔정도지, 正見도 치우치지 않게 보는 것.

있음과 없음에 치우치지 않게 보는 것. 善과 惡을 치우치지 않게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正자를 그렇게 해야 답이 나오지, 안 그러면 답이 안 나옵니다.

 

  正業.“올바른 직업을 가져라.”←이렇게 해석을 하잖아요?

正命.“바르게 생명을 유지해야 된다.”←이것이 아닙니다. 정명에 직업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업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바른 직업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데 바른 직업이 뭐냐?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상황 따라서, 상황 따라서 죽이는 직업도 정말 가능한 것이 정명입니다. 正命이고 正業입니다. 그렇다고 짐짓 아무렇게나 하고 이것이 정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지만, 상황 따라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야 스님들 기본적인 것이지만 어쨌든 八正道의 正은 중도라고 해석해야합니다. 앞에서 行步가 平正하다고 그랬지요?

행보가 평탄하고 바르다. 그것이 중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큰 수레가 어디에 기울면, 펑크가 안 난 다음에야 기울 리가 없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도 우리가 정확하게 챙겨야할 일이지요.

 

  若滅貪欲하면 만약 탐욕을 소멸할 것 같으면 無所依止니 苦가 의지할 데가 없다는 말입니다. 탐욕 없으면 고가 없지요.

의지하는 바가 없음이니 滅盡諸苦라. 모든 苦를 滅盡하여야 名第三諦니라.

苦 盡 滅. 三諦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爲滅諦故는 도제입니다.

135 = 苦. 136 = 集. 136 若滅貪欲부터 = 滅. 136 爲滅諦故부터 = 道諦입니다. 왜냐? “수행을 얻으니”그랬잖아요.

離諸苦縛하면 모든 고의 속박을 떠날 것 같으면 名得解脫이니라. 그것이 해탈이 된다. 3승 해탈이지요.

 

137. 是人於何 而得解脫 但離虛妄 名爲解脫 其實未得 一切解脫

      시인어하 이득해탈 단리허망 명위해탈 기실미득 일체해탈

      佛說是人 未實滅度 斯人未得 無上道故 我意不欲 令至滅度

      불설시인 미실멸도 사인미득 무상도고 아의불욕 영지멸도

是人於何에 이 사람이 어디에서 해탈을 얻을 것인가? 

但離虛妄이 名爲解脫이니라. 다만 허망을 떠난 것이 이름이 해탈이나,

其實未得 一切解脫이니 허망을 떠난 것이 해탈이지만, 그 사실은 一切解脫을 얻은 것은 못 된다 이 말입니다. 3승 해탈은 그래요.

부처님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未實滅度라. 실다운 멸도가 아직 못 된다.

 

  斯人未得 無上道故로 이 사람은 아직 無上道를 최상의 도를 얻지 못한 까닭에 我意不欲 令至滅度호라. 나는 생각에 그들을 멸도에 이르게 하고자 하지 않았노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3승 이야기입니다. 小智人들. 지혜가 작은 사람들에게...

 

138. 我爲法王 於法自在 安穩衆生 故現於世 汝舍利弗 我此法印

      아위법왕 어법자재 안온중생 고현어세 여사리불 아차법인

      爲欲利益 世間故說(위욕이익 세간고설)

이제부터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我爲法王하야 나는 법왕이 되어서, 於法自在라. 安穩衆生호려하야 중생들을 安穩하게 하려고 故現於世니라. 세상에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사리불아, 我此法印은 나의 진리의 도장은 爲欲利益 世間故說이니라.

세간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설한다.

 

139. 在所遊方 勿妄宣傳 若有聞者 隨喜頂受 當知是人

      재소유방 물망선전 약유문자 수희정수 당지시인

      阿毘跋致(아비발치)

在所遊方에 모든 내가 노니는 바에 또 그대가 노니는 바에도 勿妄宣傳이니망령되게 宣傳하지 말지니 若有聞者 隨喜頂受하면 만약에 어떤 듣는 사람이 隨喜. 기뻐해서 이마에 받들어 가질 것 같으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阿毘跋致니라.“不退轉이다.”이 말입니다.

 

140. 若有信受 此經法者 是人已曾 見過去佛 恭敬供養 亦聞是法

      약유신수 차경법자 시인이증 견과거불 공경공양 역문시법

若有信受 此經法者는 만약에  經法을 信受하는 사람이면 是人은 已曾. 見過去佛이라. 이미 일찍이 과거 부처님을 친견한 사람이다.

그리고 恭敬供養 亦聞是法이니 공경공양하고 또한 이 법을 들은 것이니,

 

141. 若人有能 信汝所說 則爲見我 亦見於汝 及比丘僧 幷諸菩薩

      약인유능 신여소설 즉위견아 역견어여 급비구승 병제보살

若人이 有能 信汝所說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그대의 말한 바, 자는 법화경 설한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법화경 설하는 사람을 믿을 것 같으면 則爲見我. 곧 나를 보는 것이다.

亦見於汝라. 또 너를 보는 것이다. 법화경 설하는 사리불 너를 보는 것이거니와 及比丘僧과 아울러 보살을 보는 것이다. 그대를 보는 것이고, 比丘僧을 보는 것이고, 보살을 보는 것이다. 참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대목이지요.

 

  바로 이 경법. 若有信受 此經法者는 그랬습니다. 이 법화경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가지는 사람은 과거 부처님을 친견한 것이고, 공양공경 하는 것이고, 이 법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을 누가 대신 설하는 사람. 사리불이 설하든지, 제가 설하든지, 또 여러분들이 설하든지, 그 설하는 것을 누가 또 딴 사람이 믿고 받아가지면 그것은 곧 부처를, 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와 비구승과 보살을 친견하는 것이다. 이랬습니다.

 

  바카리비구경 생각나시지요? 바카리비구가 병이 나서 다 죽어갈 때, 신도님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데, 신도님보고 “얼른 부처님한테 전해라. 내가 몸이 아파서 부처님 못 본다. 부처님한테 마지막 예배하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그런 배려를 좀 해 달라.”고 해서 신도가 부처님한테 가서 아뢰고 부처님이 왔습니다. 와서는 죽은 먹었느냐? 물이라도 마셨느냐? 견딜만하냐 어쩌냐? 아주 부드럽고 자비스런 말로 다독거려요.

그러니까 이  바카리비구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마지막 절을 하려고, 절하고 눈을 감으려고 아등바등 일어나서 예배를 하려고 하니까 그때 부처님이 냉정하게 “네 썩어가는 몸으로, 내 썩어가는 육신에게 예배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무 의미 없다. 육신과 육신의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천고에 아주 유명한 금쪽같은 말씀을 바카리비구 경에 남기지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참 기가 막히잖아요. 그것이 불교의 장점이고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 바카리비구는 그때야 비로소 눈을 뜨는 겁니다. 형상으로 생긴 부처님에게, 일어나서 아등바등 썩어가는 몸뚱일 가지고 절을 한 번 더 한들 그것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에 눈을 떠야 그것이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지요. 천리만리 떨어져 있다한들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것이지요.

여기에도 그 표현이 참 좋잖아요.

 

  이 경법을. 이 법화경 信受하는 사람은 그대로 과거 부처님. 무수한 과거 부처님을 이미 친견한 것이다. 供養恭敬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도 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140. 141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지요.

 

   - 5강 4로 이어집니다. -

 

 

 

 

 

 

 

 

 

법화경 대강좌 5강 - 3 (비유품 120~141)

법화경 대강좌 5강 - 3 불교의 교설이 많고 경전도 대단히 많은데, 이 법화경은 “경전의 완성이다.” “부처님 교설의 완성이다.” 제가 늘 그런 표현을 합니다. 법화경은 공부하면 할수록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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