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1. 다비와 사리분배

수선님 2023. 3. 5. 12:43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1. 다비와 사리분배
유골 8등분 … 곳곳에 스투파 건립해 추모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 평생 길에서 산 부처님은 쿠시나가라 사라 숲에서 열반에 들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라”는 가르침을 남긴 채. 육신(肉身)을 벗고 법신(法身)의 세계로 들어갔다.

 

<바이샬리 스투파 >사진설명: 부처님 유골 중 일부를 받은 바이샬리 릿차비족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스투파 유적지.

아침 일찍 열반당 참배

 

2002년 3월23일. 어제 밤에 참배하지 못한 열반당을 아침 일찍 찾았다.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였다. 입구는 서쪽 벽 중앙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부처님이 누워 계셨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 손을 베개삼아, 두 발을 포개고, 오른쪽 부분을 대좌(臺座)에 댄 부처님이 계셨다. 황색가사가 부처님 몸 위에 덮여 있었다. 향을 피우고, 정중하게 삼배 드리고, 우측으로 세 바퀴 돌았다.

 


다시 부처님 열반상 정면에 앉아 찬찬히 살폈다. 대좌에는 세 사람이 조각돼 있었다. 손을 땅바닥에 대고 머리를 앞으로 구부려 사죄하는 듯한 모습을 한 인물(춘다라는 주장이 있음), 뒷모습 보이며 정좌하고 있는 인물(마지막 제자 수밧다라고 함), 슬픔에 가득 찬 인물(아난다 존자라고 함)이 보였다. 열반상 주변에는 세계 각 국에서 온 스님들이 정진 중이었는데, 30분 정 도 앉아 입정에 든 다음 열반당을 나왔다.


인도의 다른 불교유적지처럼 열반당도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4세기 초 쿠시나가라를 방문한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성의 북쪽 쌍수 사이 희련하(히라냐바티강) 변에 세존께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반니원(般泥洹) 하신 곳 …(중략)… 모두 탑이 세워지고 가람이 있으며, 지금도 모두 존재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200년 뒤 이곳을 찾은 현장스님도 〈대당서역기〉에서 “그곳의 벽돌로 만든 큰 정사 안에 여래의 열반상이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 있다.”고 말했다.


8세기경 쿠시나가라를 방문한 신라의 혜초스님 또한 〈왕오천축국전〉에서 “한 달만에 부처님이 열반한 구시나국에 도착했다. 성은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에는 탑이 있다. 해마다 8월8일이면 하늘에는 번기(幡旗)가 나부끼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 뒤 한때 사람들이 붐볐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쿠시나가라는 황폐한 곳으로 변했던 것이다.


신라 혜초스님 8C 방문


특히 법현스님 방문 당시에는 열반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열반상은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 왕(재위 413∼455)때 조성된 것. 그런데 법현스님이 방문한 시기는 410년 이전. 때문에 법현스님은 열반상에 관한 기술을 남길 수 없었고, 현장스님은 열반상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혜초스님 당시까지 남아있던 쿠시나가라 유적은 13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파괴,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라마바르 스투파>사진설명: 쿠시나가라 열반당 옆 히라냐바티 강변에 있는 스투파. 부처님이 화장된 곳에 세워진 탑이다.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있었다. 그러던 1838년 영국 사람 부캐넌이 처음으로 ‘부처님 열반 유적’에 관심을 가졌다. 부캐넌에 이어 1854년 윌슨이 조사했고, 선배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1861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이 본격적으로 발굴해 유적의 일단이 드러났다. 1912년 칼레일·보겔·샤스트리 등이 다시 4회에 걸쳐 조사·발굴하자, 쿠시나가라는 비로소 전모를 세상에 드러냈다. 특히 칼레일이 히라냐바티 강바닥에서 현재의 열반상(6.1m)을 발견하고, 1956년 불멸 2500년을 맞아 인도 정부가 유적지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함으로써 ‘지금의 열반당’이 됐다.

 


1861년 커닝햄 본격 발굴


열반당 뒤편에 있는 대반열반탑으로 갔다. 높이 55m, 아쇼카왕이 부처님 열반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 한다. 탑은 마침 수리 중이었다. 탑에서 내려 와 열반당 주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무들이 무성했고, 주변에는 각 국에서 세운 사찰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하파리닛바나 숫탄타〉(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입적한 부처님은 7일 뒤 재가자들에 의해 다비됐다. 쿠시나가라 말라족 사람들이 ‘부처님 유해’를 들어올려, 온갖 종류의 향목(香木)을 쌓아만든 화장 나무더미에 안치했다. 불을 붙였지만, 도무지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마하캇사파 존자와 5백명의 비구가 도착했다. 마하캇사파 존자는 곧바로 화장지(火葬地)로 와, 옷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합장한 채, 화장 나무 주이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을 머리에 대고 예배했다. 마하캇사파 존자가 예배하자 저절로 나무에 불이 피어올랐다. 다비가 끝나자, 마가다 국왕 아자타삿투,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바스투의 샤카족(석가족), 알라캇파의 부리족, 라마 마을의 콜리야족, 베타디파에 있는 바라문, 파바 마을의 말라족, 쿠시나가라의 말라족 등이 부처님 사리를 분배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하캇사파 존자가 점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도나 바라문이 사리를 여덟 등분으로 균등하게 나눌 것을 권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은 도나 바라문에게 “바라문이여! 당신이 부처님의 사리를 균등하게 여덟 등분하여 주지 않겠소.”라고 다시 제안했다. 유골 분배가 끝나자 도나 바라문은 “여러분! 부처님 유골을 담았던 이 항아리로 나도 탑을 세우고 공양을 올리고자 하오”하며, ‘항아리’를 가졌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핍팔리바나의 모리야족은 다비할 때의 ‘재’를 가지고 돌아갔다. “결국 10개의 탑이 세워졌으며, 이상이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며 〈마하파리닛바나 숫탄타〉는 끝맺는다.


열반당에서 나와 부처님 최후설법지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갔다. 항마촉지인을 한 굽타시대 불상이 안치돼 있었다. 무슨 근거로 여기가 최후설법지인지 모르겠으나, 봉안된 부처님상 상호(相好)는 아주 뛰어났다. 삼배 드리고, 부처님 유해를 화장한 터에 세웠다는 라마바르 스투파로 갔다. 말라족들이 부처님 유해를 옮겨 화장한 곳. 세워져 있는 스투파는 거대했다. 큰 스투파 주변엔 작은 탑들이 있었고, 잘 정비돼 있었다.

 

한참 서성이며 화장 당시의 정경을 떠올려 보았다. 부처님 유해에 예배하고 점화하는 마하캇사파 존자, 슬퍼하는 아난다 존자, 타오르는 불, 화장 뒤 유골을 분배하는 모습 등등. 그 때나 지금이나 흐르고 있는 히라냐바티 강(熙連禪河)은 모든 것을 보았을 텐데…. 라마바르 스투파 주변에 있는 히라냐바티 강으로 갔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강물에 들어가, 더위에 지친 얼굴·손·발을 씻었다.

<화질나가르 스투파 >사진설명: 부처님 유해 일부를 받은 말라족이 건립한 스투파로 추정된다.

 
히라야바티 강 주변에서 화장

다시 차를 타고 여덟 등분된 사리 중 일부를 묻은 곳으로 추정되는, 춘다 마을 부근의 화질나가르 동편에 있는 스투파로 갔다. 도착해 보니, 마치 큰 동산 같았다. 스투파가 오래돼 흙더미로 변한 것이다. 또 다른 스투파의 정상에는 큰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안내인은 “이곳은 말라족이 차지한 부처님 유해를 안치한 스투파”라고 설명했지만, 근거는 없는 듯했다.

사실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확실한 스투파는 현재까지 2기가 발굴·발견됐다. 한 기는 인도측 카필라바스투로 추정되는 피프라흐와에 있는 큰 스투파고, 다른 한 기는 바이샬리의 아비세카 푸스카루니 연못 근처에 있는 스투파다. 피프라흐와 스투파에서 발견된 사리용기 표면에는 브라흐미 문자로 “이것은 샤카족의 부처인 세존의 유골”이라는 명문이 적혀있다. 반면 바이샬리에서 발견된 사리용기엔 명문은 없다. 하지만 학자들은 “출토상황과 스투파 구조로 봤을 때 부처님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측한다.

라마바르 스투파 등을 보고 열반당으로 되돌아왔다.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석가족 마을 룸비니 촌락에 태어난 보살”은 잠들었는데, 새파란 사라수 잎들은 바람에 맞춰 하늘거리고 있었다. 열반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다시 삼배하고, 다음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