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녹취(문수경전)

법화경 대강좌 6강 - 1 (신해품 1 ~ 10)

수선님 2023. 4. 16. 13:02

법화경 대강좌 6강 - 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妙法蓮華經 第二卷 信解品 第四

 

  信解라는 말, 우리 불교인들은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信解行證 이라고 해서 불교 수행의 4가지 단계를 이야기할 때도 믿음ㆍ이해ㆍ실천ㆍ성취 = 증득. 신해행증은 불교 수행을 이야기할 때도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 화할 때도 이러한 단계가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또 사람을 아는데도 믿고 이해하고 함께 행동하고 그래서 혼연일체되는 이런 단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믿음이 첫째 밑받침이 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믿음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 하지요.

제일 중요 하지요. 그래서 옛사람들이 흔히 비유하기를 믿음은 大地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대지는 무심한 것 같지만 그 대지에서 건물도 세울 수가 있고, 거기서 온갖 식물. 또 곡식. 이런 것들이 자라고 또 우리가 대지를 밟고 걸어 다닐 수도 있고, 인간의 온갖 행위가 대지에서부터 이뤄진다는 뜻에서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일체 것이 다 이뤄진다는 것이지요.

 

  불교 역사의 아주 위대한 업적. 훌륭한 예술품. 미술. 조각 등 그런 모든 것들이 신심이 없으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지요.

석굴암불상. 찬란한 불국사의 사찰. 역사적인 훌륭한 문화재. 그 외에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있는 모든... 물론 신앙의 한 표현으로 했습니다만 오늘 날에 있어서는 정말 세계문화 유산으로 높이 받드는 그런 것들도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 없이는 그런 것이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또 어떻게 믿음을 비유하는가 하니, 모두들 일선에서 포교하시고 또 주지로서 신도들에게 늘 강조도 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계신 스님들이니까

두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믿음은 “手와 같다.”는 표현도 합니다.

손이라는 것이 가만히 있으면 기껏해야 사물이나 만지고, 밥이나 떠먹고 옷이나 입고 목욕이나 하고 그런 정도의 역할을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아주 훌륭한 물건들이 전부 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다고요. 저 달나라 가는 인공위성이라든지 컴퓨터라든지 자동차라든지 비행기라든지 일체 것이 전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손이 들어서 하지 손 안 들고는 안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있어서, 종교에 있어서 이 믿음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돈 들고 시간 들고 여러 가지 복잡하고 바쁘고 한데 여기 까지 와서 이렇게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순전히 믿음이 들어서 이러한 회상을 우리가 이룩해 내는 것이지요. 참 믿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니지만, 믿음의 중요성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그런 아주 훌륭한 부분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우리가 “믿음” 하면 의례히 떠올리는 말이 있지요.

信爲道源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信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일체의 모든 善法을 전부 믿음이 들어서 다 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믿음이 싹 터야 비로소 거기에 보다 나은 인간관계가 펼쳐지는 것이지요. 믿음은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믿음은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은 지팡이의 용도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나이 들거나 걸음걸이가 불편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지팡이 하나 짚어보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지팡이 없이 걷다가 지팡이 하나 짚어보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그런 역할도 해줍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를 받쳐줍니다.

우리를 지탱 시켜줍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어렵고 슬프고 괴롭고 이럴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받혀주고 지탱시켜주고 그래서 그 어려운 순간을 잘 견뎌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신앙인이니까 신앙이라는 바다 속에 늘 살면서 바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살듯이, 믿음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이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 결국은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생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차원 높은 화엄경 같은 데서도 믿음을 얼마나 강조 했습니까?

그리고 52위 地位漸次도 결국은 十信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들을 절에 이제 막 왔거나, 아직 불교에 대한 초보 신도들에게 믿음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좀 더 널리. 또 일상생활과 더 연관 시켜서 부연해서 설명해 주면, 신심이 부쩍부쩍 나지요. 그래서 그 다음 부터는 “불교가 이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이해를 시켜야 되지요. 믿음이 있고 이해가 없으면 그것은 아주 맹신이 되어 버리지요. 큰일 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 이해만 있는 사람.

지식만 있는 사람은 정말 깡마른 해골과 같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것의 조화를 잘 이뤘을 때 그것은 아주 저절로 실천 행으로 나가게 되어 있고, 실천 행은 틀림없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信解行證. ←이런 순서를 옛 부터 정해놓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간다는 그런 의미로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해품 이라고 하는 것은 꼭 그런 기본적이고 지극히 기초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저 앞에서 신해품을 이끌어 오는 글의 안배를 아주 멋지게 했다고 제가 그런 표현을 했는데요.

“이와 같은 사람들은 則能信解하리니 곧 능히 믿고 이해하리니 너희들은 마땅히 妙法蓮華經을 설할 지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해품을 척 이끌어 오는, 유도하는 낱말이 되고 있지요.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수기를 받습니다. 최초 수기입니다.

법화경에서도 사리불의 수기가 최초의 수기지만, 전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아마 최초의 수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禪宗史로 보면 법맥을 가섭. 아난으로 치지만 대개 정말 경전상에 나타난 제자들을 볼 때 사리불이 법화경에서는 제일 제자로 봤는데, 사실 그렇게 칠만 합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다른 종교를 믿다가 같이 출가한 분이지만, 그래도 법화경에서는 사리불을 성문 중에서는 최고 성문으로 봅니다. 그것을 “상근기” 그렇게 봤고, 그 다음에 “중간 근기” 라고 해서,

 

1. 爾時 慧命須菩提 摩訶迦旃延 摩訶迦葉 摩訶目犍連 從佛所聞

    이시 혜명수보리 마하가전연 마하가섭 마하목건련 종불소문

未曾有法 世尊 授 舍利弗 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 發希有心 歡喜踊躍

미증유법 세존 수 사리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 발희유심 환희용약

 

  그 때에 慧命須菩提와 摩訶迦旃延 摩訶迦葉 摩訶目犍連 ←이 네 분을 중간 근기로 쳤어요. 그래서 이 네 분이 從佛所聞 未曾有法과 世尊 授 舍利弗 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하사옵고, 發希有心하야 歡喜踊躍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네 사람들이, 물론 딴 사람들도 주변에 무수히 있었습니다만, 특히 이 장의 주인공들은 이 네 사람이니까 이 네 사람이, 사리불에게 수기를 준다. 평소에 친구이고 같이 출가했고 같이 공부했고 너 나 하는 사이이고 사실 별로 딱 부러지게 나은 점도 없는데, 그만치 수준이 다 높은 분들이지요.

 

  그런데 사리불에게 “그대가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부처님의 참, 너무나도 그 동안 듣지 못했던 상상도 못했던 그런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사리불에게 하는 것을 듣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뭡니까? 최상의 깨달음. 無上正覺을 이루리라는 기별을 주는 것을 듣고는 希有한 마음을 내어서는 歡喜踊躍이라. 자기가 마치 수기를 받은 듯이, 그렇지요. 사리불이 수기를 받은 것이, 내가 수기를 받은 듯이, 그리고 곧 ‘나에게도 수기가 떨어질 것이다.’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이런 것을 몸소 느끼고는 歡喜踊躍이라. 그냥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지요.

사실 ‘뛸 듯이’가 아니라 기뻐 날뛰는 것이지요.

 

  정말 즐거우면 점잖고 말고 할 것 없이 펄쩍펄쩍 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실 뛸 듯이가 아닙니다. 歡喜해서 기뻐 날뛴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그것이 점잖지 못해 보이니까 ‘점잖은 부처님의 상수 제자들이 뭐 기뻐 날뛰었겠나?’ 이래 가지고 중간에 번역하는 분들이 아주 묘하게 “뛸 듯이 기뻐했다.” ←이렇게 의미를 조금 감소 시켰지만 좀 점잖 하게 표현을 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歡喜 하면서 기뻐 날뛰었다.” 이렇게 봐야합니다. 날뛰다 보니까 옷이 흩으러 졌겠지요?

 

2. 卽從座起 整衣服 偏袒右肩 右膝著地 一心合掌 曲躬恭敬 瞻仰尊顔

   즉종좌기 정의복 편단우견 우슬착지 일심합장 곡궁공경 첨앙존안

   而白佛言 我等 居 僧之首 年竝朽邁 自謂 已得涅槃 無所堪任

   이백불언 아등 거 승지수 연병후매 자위 이득열반 무소감임

   不復進求 阿耨多羅三藐三菩提(불부진구아뇩다라삼먁삼보리)

 

  卽從座起해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整衣服이라. 옷을 정돈하고 가사를,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偏袒右肩하고 오른쪽 어깨를 벗어 내렸지요. 왼쪽 어깨는 가려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이것이 진실을 표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옷을 兩肩. 그러니까 양쪽 어깨를 다 가린 부처불상도 있고, 불상 중에서도 오른쪽 어깨를 내놓은 불상도 있거든요. 그것은 불교 미술사적인 입장에서 아주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어쨌든 그렇습니다. 불상도 양쪽 어깨를 다 가린 것이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것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 본래 옷을 입었을 때는 양쪽 어깨를 다 가렸어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것은 뭐냐? 가리고 있다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것은 진실을 표하는 인도 고유의 관례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광장설” 할 때, “부처님의 넓고 넓은 설법.” 할 때, 말할 說자를 쓰는 것이 아니고, 혀 舌자를 씁니다. 이 혀 설자는 무슨 뜻인가 하면, 혀를 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진실을 표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진실을 말하노라.’ 하는 의미에서 혀를 내미는 것입니다.

溪聲便是廣長舌 할 때 말할 설자가 아니거든요. ‘진실을 말하겠다.’ 이 뜻입니다. ‘진리만을 말하겠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것이나 혀를 낸 것이나,

우리 상식으로는 혀를 낸 것은 모양이 좀 그렇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그 당시 인도 사회에서 상대와 말을 할 때, ‘나는 정말 진심으로, 진리만을 말하겠다.’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그런 곳이 있지요.

저~기 뉴질랜드나 어디 원주민들은 혀를 내고 날름거리고 하는 춤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기는 진실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표현입니다.

 

  인도에도 역시 그랬었어요.

혀 설자를 썼기에, 저는 왜 ‘혀 설자를 썼는가?’ 몰랐어요. 상당히 세월이 지난 뒤에야 그것은 ‘진실을 말하겠다.’ 고 하는 것을 알았고, 또 오른쪽 어깨를 왜 드러내는가? 금강경에도 偏袒右肩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것이 인도 사회에서 그 당시 진실을 말할 때 의례히 옷을 양쪽 어깨를 덮고 있다가 오른쪽 어깨를 벗어낸답니다. 딱 드러내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 보다 더 확실한 증명이 없고, 그 보다 더 도장 찍고 싸인 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겁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놓고 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생명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노라’ 하는 그런 의미가 있답니다.

혀를 내는 것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나 그런 뜻입니다.

 

  右膝著地하며 一心合해서 曲躬恭敬이라. 몸을 구부려서 공경하며 瞻仰尊顔하와 부처님의 존안을 우러러보면서 而白佛言하사대 我等거 居 僧之首로서 승려들 중에서 우두머리다 이겁니다. 승려들 중에서 首長격이지요.

선배 격으로서 年竝朽邁하며 나이로 아울러서, 중 된지도 물론 오래되었고, 또 나이도 많다 이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도 많이 했고 나이도 많고 세월도 많이 갔지요. 自謂.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열반을 얻었다.’ 라고 해가지고 無所堪任이라. 더 할 일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런 뜻입니다. 無所堪任. 이것을 제가 번역을 하다가 이래저래 연구를 해보니까, 원오스님 번역은 “더 할 일이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고, 그 유명한 이원섭씨 있지요. 시인이면서 사회인사로서 불교서적 번역을 제일 많이 하신 분인데, 그 분은 법화경에서 “감당할 수가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더라고요.

 

  無所堪任이라고 하는 글 뜻으로 보면 이원섭씨가 맞고, 無所堪任 = 감당할 바가 없다. 그런데 원오스님 번역은 전체적인 글 흐름으로 봐서는 “더 할 일이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이것이 맞아요. 그러니까 ‘나는 열반을 증득 했으니까’ 소승은 대개 그렇거든요.

소승들이 ‘열반을 증득 했으니까 더 공부할 것이 있나?’ 그래서 不復進求.

더 이상 나아가 구하지 아니한다. 무엇을? “최상의 깨달음” 알지도 못 했고,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3. 世尊 往昔 說法旣久 我時在座 身體疲懈 但念空 無相 無作

   세존 왕석 설법기구 아시재좌 신체피해 단념공 무상 무작

   於菩薩法 遊戱神通 淨佛國土 成就衆生 心不喜樂

   어보살법 유희신통 정불국토 성취중생 심불희락

 

  세존이 往昔에 說法旣久일새. 설법 하신 지가 이미 오래됐음 일세.

我時在座호대, 우리가 그 때부터 늘자리에 있었으되, 身體疲懈하야 이 몸은 이미 피곤하고 게을러 나른해서 더 이상 들을 기분도 안 나고, 들을 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但念. 다만 생각하기를 ‘인생은 이야.’ ‘인생은 無相이야.’ 인생무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은 다 무너져 없어지는 것이고, 금강경에 無相爲宗 이잖습니까? 그 다음에 ‘할 것도 없다. 無作이야’

소승불교가 지향하는 바가 空. 無相. 無作입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 복잡하게 해석하는 법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菩薩法인 遊戱神通과 이것은 줄을 그어야 할 곳이지요.

 

  遊戱神通과 淨佛國土와 成就衆生에는 心不喜樂호이다. 그랬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관심이 없었다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즐거운 마음을 한 번도 낸 적이 없고, 信心 한 번도 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보살의 道理이다. 보살이 할 일. 菩薩의 法.

보살이 할 일인 왕성한 교화활동을 遊戱神通이라고 했습니다. 신통을 유희하는 것.

 

  淨佛國土. 세상을 정화하는 것. 세상을 맑게 하는 것. 이것은 사회운동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정말 불교적인 사상에 입각한 사회운동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적인 사상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 우리 승려가 나가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사회 인사들에 편승을 해서 하는 것은 그것은 좀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淨國土라고 하는 것은 사회정화입니다. 사실은 이 불교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간다면 이 세상을 불교 화해야 됩니다.

세상을 불교 화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거든요. 그것이 淨佛國土입니다.

세상을 정화하는 것. ←이런 일과 成就衆生 했는데 참 좋은 입니다. “중생을 성취시킨다.”

 

  중생을 돕고 중생을 행복하게하고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이 모든 의미가

成就衆生이라고 하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전법내지 포교. 불법을 전하는 것을 최상급으로 생각을 하고, 그 외에 다양한 복지활동. 급식문제 · 병원문제 · 요양원문제 · 간병문제 · 유아 · 노인 · 장애. 이런 이들을 돕는 일에 활동하는 이들도 역시 成就衆生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가능 하면 제가 늘 이야기하듯이 포교 · 전법. 이것이 우리가 급하니까요. 그것이 우리가 급하니까 그것이 우선적으로 되고, 그 다음에 우리 불교 안에 들어왔다면 요양원문제 · 간병문제 · 병원문제. 이런 것들도 곁들여서 보살펴 줘야 되겠지요. 그것이 결국 보살이 할 일.

菩薩法이지요. 그런데 그런 일에는, 왕성한 전법활동. 교화활동 · 보살 활동에 대해서는 心不喜樂이라. 마음에 크게 기뻐하거나 좋아하지를 아니했다는 고백을 합니다.

 

4. 所以者何 世尊 令我等 出於三界 得 涅槃證 又今我等 年已朽邁

   소이자하 세존 영아등 출어삼계 득 열반증 우금아등 연이후매

   於佛敎化菩薩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不生一念好樂之心

   어불교화보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불생일념호락지심

 

  所以者何오, 왜냐? 世尊이 令我等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삼계에서 벗어나서 열반증을 얻었다. 涅槃證이 있는가 봐요. 저는 이런 證은 처음 봤어요. “열반증을 얻었다.” 제가 달리 해석을 하다가 자꾸 보고보고 또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證이라고 하는 그대로 표현하는 제일 좋겠다 싶었어요. 승려 되면 승려증이 있잖아요. 운전면허 따면 운전면허증이 있고요.

다 證이있어요. 열반을 증득하면 涅槃證이 있어요.

三界를 벗어나서 涅槃證을 얻었다. “열반 경지”겠지요. “열반 경지를 얻었다.” 라고 했으며, 또 지금 우리들이 年已朽邁일새. 나이가 이미 朽邁했다. 늙어서 형편없다는 입니다. 그래서

 

  於佛敎化菩薩이신 부처님이 보살을 교화하시는 최상의 깨달음.

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不生一念好樂之心이라. 한 생각도 좋아하거나 즐겨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제가 “법화경은 대승불교 운동의 선언서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들여다보면 이분들은 지금까지는 상좌부 불교 내지 소승불교의 관념에 젖어 있었는데, 거기서 회심하는 것이지요. 사리불과 4대 성문이 모두 마음을 돌이켜서 보살불교. 대승불교. 여기의 宗旨가 回三歸一이니까요.

3승을 모아서 1승으로 돌아가는 종지이니까요. 그래서 이와 같은 부처님의 큰 제자들까지도 아직도 소승적인 관념에 젖어 있다가 이제 비로소 겨우 대승으로 마음이 향한다는 표현이잖습니까? 이것이 그야말로 대승불교를 아주 강하게 표현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5. 我等 今於佛前 聞授聲聞 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 心甚歡喜 得 未曾有

   아등 금어불전 문수성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 심심환희 득 미증유

   不謂於今 忽然得聞希有之法 深自慶幸 獲 大善利 無量珍寶 不求自得

   불위어금 홀연득문희유지법 심자경행 획 대선리 무량진보 불구자득

 

  我等이 지금 부처님 앞에서 聲聞으로서 無上正等覺에 대한 수기 주는 것을 듣고, 心甚歡喜하야 마음이 너무너무 환희해서 未曾有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不謂於今에 忽然히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했습니다 이 말이지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는데, 생각도 아니했는데, 지금에 忽然히 希有한 法을 얻어듣고 深自慶幸해서 깊이 스스로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겨져서 大善利를 얻었으며 아주 큰 좋은 이익한 것을 얻었으며 無量珍寶를 不求自得호이다. “한량이 없는 보배를 구하지도 아니했는데 저절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말입니다. 구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얻은 것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것이 아니라 無量珍寶를 한량없는 보배를 내가 구하지도 아니했는데 저절로 얻은 것이 되었습니다.

 

사리불이 수기 받는 것을 보고, 사리불의 수기는 곧 4 대 성문의 수기도 같은 것으로 보아지기 때문에 그래서 4 대 성문이 똑 같이 일심으로 이런 표현을 부처님께 합니다.

이 신해품은 거의 4 대 성문이 그 동안의 비유품까지의 법문을 듣고 다시 정리하는 입장이 됩니다. 자기가 이 시간까지 법화경의 내용을 들은 것과, 그리고 평생 공부한 것을 총 정리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이것을 한번 정리하면 이와 같이 이야기가 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 소위 유명한 궁자유지요. 앞에서 火宅喩가 있었지요?

그 다음에 여기 두 번째 窮子喩가 다 유명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藥草喩. 법화 七喩중에 그렇게 나가는데, 이 비유도 아주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것이 성경에도 蕩子譬喩와 같은 것이다. 탕자비유가 법화경의 궁자비유에서 나온 것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너무 닮았기 때문에 그렇지요.

이 내용은 잘 아시듯이 窮子驚愕華嚴時. 除糞定價阿含時. 出入自在方等時.

令知寶物般若時. 傳付家業法華時라고 하는 8만대장경의 차원을 순차적으로 매기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 바로 이 궁자유. 4 대 성문이 자기들 평생 공부한 것을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한 이 속에 그것이 다 들어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천태지자 선사는 이 궁자유와 五時敎를 딱 배대 시키니까 너무 잘 맞는 겁니다. 그것 하고 연관이 있는 비유입니다.

이야기는 다 잘 아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 이야기구석구석에 우리와 연관 시켜서 생각해보고, 또 우리가 부처님의 불교를 만난 것과 연관 시켜서 생각을 해보면 참 이 비유가 재미가 있어요.

 

6. 世尊 我等 今者 樂說譬喩 以明斯義 譬若有人 年旣幼稚 捨父逃逝

   세존 아등 금자 요설비유 이명사의 비약유인 연기유치 사부도서

   久住他國 或十二十 至 五十歲(구주타국 혹십이십 지 오십세)

 

  세존이시여, 우리들이 지금에 樂說譬喩하야 비유를 잘 설해서 이 뜻을 밝히겠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지금까지 공부해온, 이 순간까지의 어떤 차등들을 하나의 비유로서 밝히겠다. 비유하건대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이가 幼稚. 아주 어려서 捨父逃逝하야,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갔어요.

久住他國호대,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 머물러서 10년, 20년, 50년이라는 세월이 갔어요.

 

7. 年旣長大 加復窮困 馳騁四方 以求衣食 漸漸遊行 遇向本國

   연기장대 가부궁곤 치빙사방 이구의식 점점유행 우향본국

나이가 이미 長大해. 그런데 거기다 더하여 困窮해. 이것은 뭐 객지생활 했으면 장가도 가고, 살림도 꾸리고 해서 돈도 좀 벌어가지고, 50년 세월이 흘렀으면 회사도 하나 차려서 금의환향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렇지 못하고 너무 곤궁해서 지금도 품팔이 하는 겁니다.

馳騁四方하야 사방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나며 以求衣食이라. 옷과 밥을 구걸 한다 이겁니다. 漸漸遊行을해서 遇向本國이라.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우연히 본래 자기가 살던 나라를 향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지금 그런 처지입니다. 본래 내가 살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자기 나라인지 어쩐지도 모르고 이 사람은 그냥 돌아다니는 겁니다.

 

8. 其父先來 求子不得 中止一城 其家大富 財寶無量 金銀琉璃

   기부선래 구자부득 중지일성 기가대부 재보무량 금은유리

   珊瑚琥珀 玻瓈珠等 其諸倉庫 悉皆盈溢 多有僮僕 臣佐吏民

   산호호박 파려주등 기제창고 실개영일 다유동복 신좌이민

   象馬車乘 牛羊 無數 出入息利 乃徧他國 商估賈客 亦甚衆多

   상마거승 우양 무수 출입식리 내편타국 상고고객 역심중다

 

  그 아버지가 일찍부터 求子不得이라. 아들이라고 해야 기껏해야 하나인데, 아들이 어려서 도망을 나왔는데 도대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구하려고, 구하려고 찾으려고, 찾으려고 했지만 도대체 찾을 길이 없어요. 찾아다니다가 中止一城이라. 한 성에, 한 도시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는 其家大富라. 큰 부자가 되었어요.

財寶無量이라. 금 · 은 · 유리 · 산호 · 호박 · 파려 · 진주등이 여러 창고에 悉皆盈溢이며, 꽉꽉 가득차서 넘쳐나서 도저히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의 창고가 여러 수 10개, 수 100개가 있는 겁니다. 그 뿐인가요?

 

  僮 · 僕 · 臣佐 · 吏民. 이것이 뭔가 하면 직원도 많고 하인들도 많고 일꾼들도 많고 관리인들도 많다. 재산이 많으니까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象馬車乘과 牛羊이 無數하며 出入息利가 乃徧他國하고, 出入息利라고 하는 것은 곡식을 빌려주고 돈을 빌려주고 해서 계속 이자를 갚고, 또 빌려가고 이자를 갚고 받고 하는 것이 息利입니다. 그런 것이 乃徧他國하고 이것을 요즘 표현으로 하면 글로벌 기업이 되어서 전 세계 어디 안 간 데가 없어요. 삼성이나 현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 10개쯤 포함해 놓은 정도의 大 국제화 세계화된 기업과 같다는 입니다.

商估賈客도 亦甚衆多라. 장사하는 사람들. 상인들. 거래하는 사람들. 와서 공사를 따 가든지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드나든다는 입니다.

 

9. 時 貧窮子 遊諸聚落 經歷國邑 遂到其父 所止之城

   시 빈궁자 유제취락 경력국읍 수도기부 소지지성

그 때에 貧窮子. 못나고 못난 窮子가 遊諸聚落이라. 여러 마을들을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하면서 經歷國邑하야 나라와 읍을 經歷하다가 遂到其父 所止之城이라.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도시에 드디어 이르게 되었다.

아~, 감동적이지요. 우리들처럼, 우리가 지금 부처님이 계시는 그 도시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대목을 보니까 눈물겨운 겁니다.

 

  그 수많은 생애를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이생에 부처님하고 인연이 되어서 드디어 부처님 사는 도시에, 부처님이 사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부처님 사는 도시에 이르게 되었다는 입니다.

부처님하고 같은 도시에 사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도감이 들잖아요. 마음이 아주 놓이지 않습니까? 아~, 대단한 겁니다. 아~, 참 감동적이잖아요. 세세생생 우리가 하~~ 온갖 축생으로 다 돌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으로 되어서 또 부처님하고 인연이 되어서 부처님이 사는 城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지요. 그런데

 

10. 父每念子 與子離別 五十餘年 而 未曾向人 說 如此事 但自思惟

     부매념자 여자이별 오십여년 이 미증향인 설 여차사 단자사유

     心懷悔恨(심회회한)

父每念子라. 아버지는 매양매양 자식을 생각호대 與子離別이 아들로부터 이별한지가 五十年이라. 그러나 未曾向人하야 說 如此事라.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아들을 50년 전에 잃어버렸고 나는 이와 같이 부자이고... 그것을 함부로 발설 했다가는 어느 사기꾼이 와서 엉터리 아들을 만들어 와서 아들이라고 해서 돈 빼갈지도 알 수 없는 것이고요. 그래서 일찍이 한 번도 이 사실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 속을 알 수가 있겠지요?

 

  但自思惟하대 心懷悔恨이라. 다만 혼자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에다 悔恨만 품고 있어요. 뉘우치고 한이 나는 지금 늙고 병들어서 곧 열반에 들어야할 그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재산이 없으면 또 괜찮아요.

재산이 없어도 죽는 것은 한스럽지요. 그런데 재산이 저렇게도 많아요.

그런데 이것을 누구에게 물려주고 내가 눈을 감느냐 이 겁니다.

 

    - 6강 - 2로 이어집니다. -

 

 

 

 

 

 

 

법화경 대강좌 6강 - 1 (신해품 1 ~ 10)

법화경 대강좌 6강 - 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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