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일종불통(一種不通) 양처실공(兩處失功) : 일종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으리라. 즉 상대적인 일들이 한 종자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쪽에서 다 그 공덕을 잃는다.
여기에서 일종불통이라 함은 앞에서 공부한 간택(가려내고 택하는 것), 증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순역(순리대로 가는 것과 역으로 가는 것) 등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같은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한쪽에만 치우치면 반드시 양쪽에서 얻을 덕을 다 놓친다는 말이다.
자꾸 밉다고 하다 보면 미움도 사랑도 다 잃어버린다는 말이며, 사랑만 한다고 해도 사랑도 잃고 미움도 잃는다는 뜻이 된다. 미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한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일종유통이요, 미워할 줄만 알거나, 사랑할 줄만 아는 것은 일종불통이다.
그리고 일종불통이면 미움과 사랑 양쪽 다 잃는다고 했다. 사랑한다고만 하다 보면 권태가 올 수도 있고, 또 그러한 때에 그 해결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반드시 치우친 쪽과 그 반대쪽, 양쪽에서 다 손해를 본다는 교훈이고, 수행도 한 수행법에 너무 치우치면 양쪽에서 수행 공덕을 잃게 된다는 말씀으로도 생각된다.
일종의 반대가 양변인데, 양변에 치우지 않는 것을 일종에 통한다고 하고, 치우치는 것을 일종에 불통한다고 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매사에 중심이 되는 곳을 바르게 찾아, 그 중심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양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공덕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이렇게 꼭 되어야 하는데”, “저렇게 되면 안되는데..”
이렇게 원하면 저렇게 원하지 않는 것이 생기고, 잘 되어야지 하면, 잘 되지 않는 것이 생기고, 고락 시비의 분별은 생사가 계속 윤회하니, 이것과 저것의 분별을 떠나야 한숨 쉬지 않게 된다.
일종불통 양처실공, 일종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으리라. 일종이란 한결 같음을 뜻한다고 했다. 한결 같음이란 분별하지 않는 중도의 마음이다.
“비가 와서 좋다, 비가 와서 싫다”는 마음은 분별의 마음으로서 한결 같은 마음이 아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구나, 눈이 오면 눈이 오는구나.” 하고, 좋고 싫은 양변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을 한곁 같다하고, 분별하지 않음으로 중도의 마음이라 한다.
이같이 일종의 한결 같은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좋은 것을 구하는 과보로 인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 함에 괴롭고 수고로운 마음이 생기니, 이같이 양쪽의 공들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고, 마음만 번거로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하려 함에 잃는 과보를 낳게 되고, 잃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힘을 쓰게 되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도돌이표와 같이, 이 얼마나 수고로움이 계속 될 것인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모든 인연 현상은 좋거나 나쁘거나, 옳고 그름이 본래는 없는 것이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분별의 업식으로 말미암아, 고락 시비의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이니, 이로써 모든 인연 현상이 양변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감정 역시 고락의 인과로 말미암아 즐거움과 괴로움이 번갈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결같은 중도의 마음으로 고락의 분별을 하지 않아야 인과의 과보를 받지 않고, 영원히 생사에서 해탈하게 되니, 더 없는 안온적정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선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하는 분별의 마음을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어도 인과의 과보를 받고, 저렇게 되지 않아도 인과의 과보는 받게 되니, 잘되면 잘 되지 않는 과보를 받게 되고, 잘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과보로 인해 업이 쌓이게 되므로, 다음에 또 똑 같은 현상이 반복하여 생기게 된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기분이 좋아지게 되면, 인과의 과보로 인해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은 현상이 벌어지게 되니, 잘되어야 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 분별하지 않는 일종의 한결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느니, 매사를 좋고 나쁜, 옳고 그른 고락의 분별심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만 보고 듣고 받아들이면 된다.
우선 당장 가져야 될 마음은 “잘 되어야 되는데”,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을 곧장 내려놓고 방하착해야 하느니, 집착과 미련, 걱정과 근심을 당장 내려놓고, 감정을 쏙 뺀 상태에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음은, 생각이 가는 대로, 몸이 가는 대로, 그저 움직이면 될지니, 설사 그렇게 해서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쫓겨나서 기분이 나빠지거나, 속이 상하거나, 싫은 감정이 생기는 것마저 놓아버려야 한다. 이 또한 인과에 의한 인연 현상이기 때문이니, 어떤 불리한 현상이 벌어지더라도 불리하다는 생각마저 방하착으로 놓아야 한다.
그러나 놓고 싶어도 도저히 놓지 못하는 것이 마음인 것이니, 워낙 업이 두터워 깊숙하게 몸에 배어있으므로, 잠시라도 걱정 근심을 놓아 버리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도 더욱 힘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없는 마음으로 일종의 한결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 생겨나도 인과의 과보로 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럴 땐 반드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함께 노력하며 겸해야 한다.
절언절려絶言絶慮
- 말 끊어지고 생각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일종불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라. 견유몰유遣有沒有요 종공배공從空背空이라.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양쪽에서 다 공덕을 잃으리니,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견유몰유遣有沒有요, 종공배공從空背空이라”하는 대목으로 들어갑니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하는 말씀입니다. 있음의 세계 즉, 세상 삶이 어렵다고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나겠다는 그 마음이 더 큰 문제가 되고 공적함을 추구하면 구하는 그 마음이 이미 공을 그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이 육신이 있는 한 결코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내 몸이 곧 세상이라면 어디로 벗어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세상을 벗어나려는 목적이 내 몸 하나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그건 벗어나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 몸에 대한 집착입니다. 공空함의 대자유 마저 이 몸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업業의 작용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고 있는 거지요. 다만 자기 자신이 속는 줄을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있음을 버리려고 할수록 오히려 있음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는 겁니다. 더구나 공空이란 이 몸을 떠나서는 알도리가 없습니다. 이 몸이 세상이라면 세상법 떠나서 공을 알려면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법 떠나서 공을 찾는다면 이미 양변에 떨어진 거죠. 그래서 상相 속에서 상을 떠나야 되고 공空 속에서 공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사 귀찮다고 안보고 살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보기 싫은 꼴 안 보려고 눈감고 살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보기 싫다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고 싶은 대상입니까? 보고 싶은 꼴 안보고 시각장애로서 살지 않으려면 오만 꼴 다보고 살아야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보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느 선까지를 봐야할지, 어느 것을 안 봐야할지 하루 종일 그것을 분별하느라 아무 일도 못할 겁니다. 있음의 세계란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림자인데 어떻게 환영의 그림자를 실체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있음을 버리려면 오히려 있음에 빠진다”고 하신 겁니다. 반대로 공空 함을 따르면 모양도 빛깔도 없는 공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공空을 좋아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공을 등지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공空이란 공을 추구하는 그 생각이 끊어진 상태, 시비분별 끊어진 곳, 내가 없어진 자리입니다. 내가 없어진다면 죽거나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이 몸이 바로 이 자리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고 양변을 벗어나 완전한 행복,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에 드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나 아닌 존재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니 따라야 할 공空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대자유인 겁니다. 그래서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소중한 가르침입니까?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요,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상응치 못하고,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다음은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하게 된다. 이런 뜻이죠. 말로서는 감정의 전달밖에 안됩니다. 고요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는 결코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의 세계는커녕 말로는 음식맛 하나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된장맛 하나, 김치맛 하나도 말로 설명하려면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된장을 먹어본 사람이야 말이 필요 없겠지만 평생 된장 구경을 못해본 외국인에게 된장맛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은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된장을 직접 먹어보게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방울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길은 바다에 떨어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게 생각의 표현이거든요, 생각이라는 게 어디서 만들어지는 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생각을 일으키는지 생각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생각 몹시 억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렸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몹시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가 손을 대거나 접촉한 일이 없이 한 생각 일으킴에 따라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미소가 나오기도 하는걸 보면 생각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한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 걸 모른다면 꼭두각시나 허깨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생각이 존재한다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몸 어디에도 ‘고정된 생각 저장고’는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생각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할 때 거기에서의 모든 상相은 모양 있는 모양만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는 생각도 꼭 같은 상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모양이 변하듯이 생각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생각이야말로 변하는 과정이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끝없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합니다. 바다에서 물거품이 수없이 일어나고 멸해도 바닷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연기공성緣起空性이니까요.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라.” 그러한 말의 세계가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이 끊어지기를 바라거나 생각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동안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요원한 얘기입니다. 말이 끊어졌다는 얘기는 생각자체가 무념이 되었다는 얘기지 끊어질 생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무념위종無念爲宗하고 무상위체無相爲體하고 무주위본無住爲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념無念이란 유有니, 무無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일체 상대되는 두 모양이 일체 진로를 영원히 떠난 자리입니다. 바로 진여眞如 정념正念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거듭 밝히기를 없다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이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의 씀이니라, 진여의 자성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듣고 보고 느끼고 알지만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물질과 모양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라고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말길이 끊어진 길, 생각이 끊어진 길을 무념위종이라고 하고 그 길로 직접 행하는 길이 화두참구 즉, 화두참선입니다.
고봉 스님께서는 “오직 본참공안 화두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에 간절하게 참구하라. 궁구하고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화두를 타파하여 벗어나면 바야흐로 성불한지 이미 오래임을 알 것이다. 이 한 도리는 기왕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생사를 요달 하고 죽음의 벗어남에 이렇게 역력하게 시험하신 묘방 중에 묘방이다. 오직 귀한 것은 실답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뿐이니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깨닫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 태고 스님은 “사람의 마음이란 지극히 미묘하여 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얻을 수가 없으며 침묵으로도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일만 오직 화두 참구에만 마음을 두어 어둡지 않기만 하면 반드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대장부의 평생 사업이다”라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귀근득지歸根得旨하고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却前空이니라. 근원에 돌아가면 본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나니, 잠깐 사이에 반조返照하면 앞의 공空보다 뛰어나리라.”
그 다음은 “귀근득지歸根得旨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나니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마음을 따르면 바로 깨달음이요, 망상번뇌를 따르면 자연 근본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이런 말씀이겠죠.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돌아갈 자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 가고 오는 시간도 없거니와 공간도 또한 없습니다. 본래 없는 마음인데 없는 마음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공을 깨닫는 길입니다. 근본에서 보면 육상원융六相圓融이거든요.
여기에서 육상六相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총總, 별別, 동同, 이異, 성成, 괴壞 이 여섯 가지를 육상이라고 합니다. 현수 스님의 ‘오교장’에 보면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법당 한 채를 지으려면, 즉 한옥집 한 채를 지으려면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기와 모든 재료가 모여서 이뤄지게 됩니다. 그 재료가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볼 때는 기둥이요, 대들보라고 하지만 각자 법당이라는 자리에 모여 인연이 되어 법당이라는 한 채의 집이 세워지게 되면 그냥 법당일 뿐입니다. 전체적인 총總으로 볼 때는 기둥도 아니요, 대들보도 아니요, 그냥 법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기둥 하나만 없어도 법당은 허물어 져서 법당이라는 총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기둥하나에 대들보도 들어있고 기와도 들어있고 서까래도 들어있고 법당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합니다. 즉 육상원융이라는 세계가 이뤄집니다. 대들보도 그렇고 지붕도 그렇고 모두가 별이면서 총이고 총이면서 별인 겁니다. 법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자연 너나 할 것 없이 존재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무진연기無盡緣起가 펼쳐지는 겁니다. 총과 별이 하나요, 동과 이가 하나요, 성과 괴가 하나입니다. 물론 하나도 이름뿐인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공空에는 육상六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명도잠 스님이 법안문익 선사를 참방하자 스승이 묻기를 “자네는 무슨 공부를 하다 왔는가”하고 물으니 제자가 “예, <화엄경>을 배우다가 왔습니다”하니, “그렇다면 육상이 <화엄경> 어느 품에 있는가?”라고 재차 묻자 “예, 십지품에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육상원융이라 세간과 출세간 모두가 육상이 갖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이 그 말을 듣고 하시는 말씀이 “응, 그런데 공에는 육상이 없지”하자 영명도잠 스님이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스승이 다시 자비를 베풉니다. “자네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양구, 즉 침묵했을 텐데….” 이렇게 일러주는데도 제자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가 다시 묻기를 “스승님, 상相이 없는 공空에 육상六相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하니 말이 끝나자마자 스승은 “공空이지” 이렇게 끊어 줍니다. 여기에서 제자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생각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는다고 이렇게 하신 겁니다.
[출처] 신심명13/이렇게 원하면 저렇게 원하지 않는 것이 생기고|작성자 도로아미타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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