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心法要抄 심법요초

수선님 2023. 4. 2. 12:41

心法要抄 심법요초

심법요초서心法要抄序

조계(曺溪)1)께서 말씀하셨다. “문장이란 도(道)를 꿰는 도구이다.”2)

실하구나, 이 말씀이여! 문장을 짓되 도를 꿰지 못한다면, 정교하다고 한

들 무엇을 취한 것인가! 청허노화상께서 하나둘 주워 모으는 틈틈이 도로

들어가는 요령을 기술하고 ‘심법요초’라는 제목을 붙이셨다. 소요대사(逍

遙大師)3)가 기록하여 상자에 보관해 두고 알아보는 자를 기다렸는데, 목

양이(牧羊賾)4) 도인(道人)이 간행하여 유포하고자 하기에 소략하나마 내

가 한마디 말로 그 가치를 평가해 주었다. “내가 그 책을 구하여 읽어보았

는데, 한 글자 한 마디도 도를 꿰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무엇이 이처럼 탁

월할 수 있겠는가! 옛날 노나라 양공(壤公) 때 주조한, 전서체(篆書體)가 새

겨진 솥은 지극한 보배였음에도 사람들 중에 그것(전서체)을 알아보는 자

가 없었는데, 오로지 도안(道安)만이 식별해 낼 수 있었던 것과 같다.5)

양과 같은 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얼마나 근심스러운 일이 되었겠는가!

뛰어난 글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처능(處能)6)이 삼가 쓰다.

曺溪曰, “文者, 貫道之器也.” 誠哉, 是言! 爲文而不貫道, 雖

工, 奚取哉! 淸虛老和尙, 拾掇之暇, 述入道經要, 名之曰心法

要抄. 逍遙大師錄之, 藏篋, 以竢知者, 牧羊賾道人, 將欲刊布,

微余一言辨之,“ 余求其卷而讀之, 隻字片言, 無非貫道也, 何

若是之奇乎! 昔魯壤公之鼎篆, 非不至寶, 而人無知者, 惟道

安能辨之. 唯不得如賾公者, 是惧焉! 上字明也.” 處能謹書.

1) 서산의 법호 중 ‘조계퇴은(曹溪退隱)’을 줄인 호칭.

2) 한유(韓愈 768~ 824)의 제자이자 사위인 이한(李漢)이 『昌黎集』 서문에서 쓴 말

이다. 후대의 많은 문사(文士)들이 이 문장을 인용하였다.

3) 소요태능(逍遙太能 1563~1649). 부휴선수(浮休善修)에게 경전을 배우고 서산 문

하에서 20여 년간 선법을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

다. 서산의 법맥을 이은 4대 문파 중 하나인 소요파를 이루었다.

4) 목양명이(牧羊明賾)로 추정된다. 서산의 4대 제자 중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

1608) 계통의 문인이다.

5) 전서체를 바르게 읽어내는 도안(道安)의 뛰어난 안목에 빗대어 이 글의 가치를

바르게 평가한 목양이를 칭송했다. “(秦나라 王인 苻堅이) 남전(藍田)에서 오래

된 솥을 발견했는데 중심부에 전서체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 중

아는 자가 없어 도안에게 물었더니 (전서체의 글을 풀어서) ‘노나라 양공 때 주조

된 솥입니다’라고 하였다.”(『佛祖統紀』 권36 「孝武帝 4年」 大49 p.341a23.

藍田得古鼎, 腹有篆文. 朝無識之者, 以問安, 安曰, ‘魯襄公所鑄也.’)

6)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서산의 제자인 벽암각성(碧巖覺性)의 문하이다.

심법요초心法要抄

이 일1)은 하늘과 땅으로도 덮거나 실을 수 없고,2) 그 본질은 산과 강으

로도 숨길 수 없다. 그 빛은 안을 들여다보아도 쌓인 것이 없고, 밖을 내

다보아도 남아도는 것이 없다.3) 팔만대장경의 교설로도 거두어들일 수 없

고, 제자백가의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널리 헤아리는 총명함

으로도 알 수 없는 대상이며, 어떤 문장과 구절로도 기록할 수 없는 내용

이다. 말로 표현하면 어그러지고 생각하면 어긋나거늘 하물며 글로써 표

현할 수 있겠는가? 진공(眞空)을 헤아려 알려는 시도는 작은 병에 법이라

는 바닷물을 모두 채우려는 것과 같고, 설령 부처님처럼 꽃을 집어 들거나

달마처럼 면벽을 한다고 해도4) 철로 낯가죽을 감싸서 부끄러움을 전혀 알

지 못하는 것과 같다.5) 부끄러움이 없는 학자들은 책6)에 의지해 숱한 말들

을 하며 시종일관 천착하나 그것은 눈먼 개나 나귀의 눈과 같이 쓸모없는

일이니,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두 죄인들이 불법을 비방하는 죄가

적지 않으니, 삼가고 또 삼가라! 만일 배우러 찾아오는 학인을 보거든 어

떤 맛도 없고 모색할 수단도 없는7) 화두를 있는 힘을 다해 들고서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한다.

此事天地不能覆, 其軆山河不能匿. 其光, 內窺無積聚, 外望無

盈餘. 八萬大藏收不得, 諸子百家說不得. 愽量聰明, 所不能

知;文章句法, 所不能識. 言之卽乖, 念之則差, 況以言語筆畵?

眞空識量, 甁盛法海, 直饒拈花面壁, 猶是鐵褁面皮, 不識羞

恥. 無慚學者, 將卷軸打葛藤, 從頭穿鑿, 如瞎狗盲驢之眼, 其

能和會乎? 兩箇罪人, 謗法不少, 愼之愼之! 如見來學者, 以沒

滋味無摸底話頭, 盡力提起, 使自悟入, 始得.

1) 차사(此事). 본분사(本分事)를 말한다. 납자로서 본분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시

급한 눈앞의 일이므로 ‘이 일’이라 한다.

2) 원문에 ‘載’자가 탈락되어 있다. ‘하늘은 만물을 덮고 땅은 만물을 싣는다’는 말

은 『中庸』 등에 널리 나온다. “하늘에 덮이고 땅에 실린다.”(『中庸』. 天之所覆, 地

之所載.);“도는 만물을 덮기도 하고 싣기도 하는 것이다.”(『莊子』 「天地」. 夫道覆

載萬物者也,);“하늘이 덮을 수 있다고 해도 실을 수는 없고, 땅이 실을 수 있다

고 해도 덮을 수는 없다.”(『莊子』 雜編 「天下」. 天能覆之而不能載之;地能載之而不

能覆之.)

3) “밖을 내다보아도 남아도는 것이 없고 안을 들여다보아도 쌓인 것이 없다. 눈에

닿지만 보이지 않고 귀에 가득하지만 들리지 않는다.”(『唯心訣』 大48 p.994b11.

外望無盈餘, 內窺無積聚. 觸目而不見, 滿耳而不聞.)

4)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 지은 염화미소(拈花微笑)와 9년 동안

소림사에서 면벽한 달마대사의 벽관(壁觀)을 가리킨다. 교설과 문자의 정해진

격을 벗어난 교외별전(敎外別傳)과 불립문자(不立 文字)를 대표하는 선종의 설

화이다.

5) 이론으로 헤아리는 교학적 방법이나 선(禪)의 방법을 모두 부정하는 조사선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6) 권축(卷軸). 글이나 그림을 종이나 비단 등에 말아놓은 것으로서 옛날 방식의

책의 형태를 가리킨다. 곧 경론 등의 글이 담겨진 책을 뜻한다.

7) 화두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말. 갖가지 관념을 연상시키는 맛도 없으며 일정

한 이론이나 분별의 틀로 모색할 실마리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다음 글에 나오는

범부와 성인 또는 마군과 부처 등의 틀에 의존하면 관념상의 맛이 발생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한 부처에게는 일정한 형상이 없고 진실

한 법에는 정해진 차별상이 없다.8) 학인들 중 본보기를 만들어 부처를 구

하거나 법을 구하려는 시도는 모두 여우의 혼령이 하는 짓이나 외도의 견

해일 뿐이다.”9) 만약 진인(眞人)10)이 뛰어난 모습으로 홀로 나타나 부처에

집착하지도 않고 구하고 법에 집착하지도 않고 구한다면, 비록 지옥의 갖

가지 악한 모습을 보더라도 허공에 핀 꽃과 같이 여기고, 여러 부처님의

갖가지 뛰어난 상호를 보더라도 또한 어린아이들 장난과 같이 여기게 될

것이니, 억지로 법을 조작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그러므

로 내가 정법(正法) 가운데 있으면, 범부라느니 성인이라느니 하는 두 가

지 견해가 모두 착각이고 마군과 부처라는 두 갈래 분류도 또한 착각이며

범부와 성인의 차별이 없다는 견해 또한 착각이고 마군과 부처의 차별이

없다는 견해도 또한 착각이다. 불법은 본래 공(空)이기 때문에 이 공으로

다시 공을 얻을 수 없고, 불법은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줄기 신령한 빛이 막힘없이 트여 텅

비어 있는데, 어찌 억지로 시비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항상 조사

의 공안을 제기하고 온힘을 다해 참구하여 활연히 대오하려는 것을 공부

의 시작으로 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佛云,“ 眞佛無形;眞法無相. 學人作樣, 求佛求法者, 皆是野

狐精, 外道見.” 若眞人逈然獨出, 不著佛求, 不着法求, 則雖

見地獄種種惡相, 猶如空花;雖見諸佛種種勝相, 亦如兒戱,

不是强爲法, 如是故也. 然我正法中, 凡聖二見俱錯, 魔佛二道

亦錯, 無凡聖解亦錯, 無魔佛解亦錯. 佛法本空故, 不可以空更

得空;佛法本無所得故, 亦不可以無所得更得也. 一段靈光,

廓然豁, 豈可强是非也? 是故, 不如常常提起祖師公案, 盡

力叅究, 以豁然大悟爲入門.

8) 이런 취지는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말 자체는 『臨

濟錄』 大47 p.500a12에 나온다.

9) ‘진실한 부처에게는 일정한 형상이 없고’라는 구절부터 여기까지는 『臨濟錄』 大

47 p.500a12~a14를 인용한 문장이다. “진실한 부처에게는 일정한 형상이 없고

진실한 법에는 정해진 차별상이 없다. 그대들이 이렇게 헛것에서 본뜨는 모양

을 조작하니, 설령 구했다하더라도 그 모두가 여우의 혼령이 분별하는 짓이요,

어느 것도 참된 부처가 아니며 외도의 견해일 뿐이다.”(『臨濟錄』大47 p.500a12.

眞佛無形, 眞法無相. 爾秖麽幻化上頭, 作模作樣, 設求得者, 皆是野狐精魅, 並不是眞

佛, 是外道見解.)

10) 원래『莊子』「大宗師」에 나오는 말인데, 일찍부터 불(佛)이나 아라한(阿羅漢) 등

의 번역어로 쓰였고, 선가에서는 임제가 제기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말

이 화두로써 가장 많이 활용된다.

교학자의 병敎學者病

교학자는 활구(活句)를 참구하지 않고 다만 총명한 지혜를 가지고 귀

동냥한 지식11)을 세상 사람들에게 뽐내며 자랑하지만, 본분의 참된 땅을

밟아보지는 못했으니 말과 실천이 어긋난다. 여기저기로 산과 물을 찾아

다니면서 식량만 허비하고 스스로 경론(經論)에 속으면서 일생을 보내다

12) 끝내는 지옥의 찌꺼기13)가 될 뿐, 세상을 구제하는 배[舟航]는 되지

못한다.14)

敎學者, 不叅活句, 徒將聰慧, 口耳之學, 衒曜於世, 脚不踏實

地, 言行相違. 這邊那邊, 討山討水, 徒費粥飯, 自被經論賺過

一生, 終作地獄滓, 非濟世舟航也.

11) 구이지학(口耳之學). 군자의 학문 태도와 대비하여 소인의 학문 태도를 비판한

말로 『荀子』「勸學」에 나온다. 옛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입으로만 따라 외울 뿐인 학문을 말한다. 도청도설(道聽途說)과

도 통하는 뜻이다. “소인의 학문하는 태도를 보자면, 귀로 듣자마자 바로 입으로

내뱉고 만다. 귀와 입 사이는 겨우 네 치일 뿐이니, 어찌 칠 척의 몸을 살찌울 수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 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

12) “마곡이 ‘누구냐?’라고 묻자 양수가 말했다. ‘화상이시여,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만일 이렇게 찾아와서 화상께 인사드리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경론의 교설

에 속임을 당하면서 한평생을 보낼 뻔했습니다.’”(『雲門廣錄』 권중 大47 p.557c6.

麻谷問, ‘阿誰?’ 良遂云, ‘和尚, 莫瞞良遂! 若不來禮拜和尚, 洎被經論賺過一生’.)

13) 지옥재(地獄滓).『선가귀감』 주석294) 참조.

14) “세상을 구제할 배는 아니며 지옥의 종자일 뿐이다.”(『緇門警訓』 권2 大48

p.1049c27. 非濟世舟航也, 地獄種子爾.)

선학자의 병禪學者病

선학자는 한가한 것이 습성이 되어15) 모범이 되는 스승을 구하지 않은

채 여우굴16) 속에서 쓸데없이 애쓰며 앉아서 졸다가 눈앞에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걸리면 뚫고 벗어나지 못한다. 입을 꼭 다물고 수수께끼

를 풀듯이 궁리하는 자17)는 다만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18)

될 뿐이니, 이 또한 세상을 구제할 배가 아니다.

禪學者, 習閑成性, 不求師範, 野狐窟中, 徒勞坐睡, 被目前緣

起事法, 未能透脫. 觜嚧都摶謎子者, 只作依草附木精靈, 亦非

濟世舟航也.

15) 규봉종밀(圭峯宗密)의 말로서 『圓覺經略疏』 등에 나온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수

행자의 행태를 비유한다. 그는 조용한 방에서 편안하게 머물거나 깊은 산에 은

거하며 마음에는 어떤 일도 할 생각이 없어 경계를 대해도 어긋나거나 순조로

움이 없고, 한가한 것이 습성이 되어 잠시 정식(情識)을 잊을 수 있기에 나와 남

의 차별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가지고 무아(無我)를 증득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다.”(『圓覺經略疏』 大39 p.564c13. 此況道者, 燕居靜室, 或隱深山, 心絕經營,

境無違順, 習閑成性, 暫得忘情, 不覺自他, 謂證無我.)

16) 대상과 인연을 끊고 이것저것 분별하는 것. “운문이 어느 때 ‘색도 아니고 소

리도 아닌 것을 본체에서 밝히니, 이는 몇 번째 근기인가?’라 묻고 대신하여

대답했다. ‘여우굴 속에서 살 길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雲門廣錄』 권2 大47

p.566c14. 師或云, ‘非色非聲, 體上明得, 是第幾機?’ 代云, ‘不可向野狐窟裏作活計.’)

17) 『書狀』 「答汪狀元」 2 大47 p.932c8에 나오는 말.

18) 언어와 문자에 기대고 속박되어 있어 자유롭지 못한 학인을 비유하는 말. “산승

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법은 하나도 없고, 다만 병을 고치고 속박을 풀어줄 뿐

이다. 그대들 제방에서 도를 추구하는 무리들이여! 시험 삼아 어떤 것에도 의존

하지 말고 나와 보라. 그러면 나는 반드시 그대들과 함께 법에 대해 문답할 것이

다. 15년 동안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모두들 풀에 의지하거나 잎에 붙어살

거나 대나무에 깃든 혼령이거나 여우 도깨비들이며, 모든 똥 덩어리를 마구 씹

어 먹는 자들뿐이었다.”(『臨濟錄』 大47 p.500b28. 山僧無一法與人, 祇是治

病解縛. 爾諸方道流! 試不依物出來. 我要共爾商量. 十年五歲, 並無一人, 皆是

依草附葉, 竹木精靈, 野狐精魅, 向一切糞塊上亂咬.)

삼승학인의 병三乘學人病

밤에 새끼줄이 움직임도 없이 있는데도 그것이 뱀이 아닐까 의심하며,

깜깜한 방이 본래 텅 비어 있는데도 그곳에 귀신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한

다.19) 마음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정식을 일으키고 성품 가운데 범부

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세우는 것이 누에가 실을 뽑아내어 스스로 제

몸을 감는 꼴과 같으니,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만약 한 찰나에 지혜의

빛을 되돌려 비춘다면 바로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지만, 천 가

지 만 가지 온갖 생각을 하면 자신의 심왕(心王)20)을 잃게 된다. 이 심왕이

라는 것은 언어로 표현해 낼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작용이 사라진 경계이

기 때문이다.

夜繩不動, 汝疑之爲蛇;暗室本空, 汝怖之爲鬼. 心上, 起眞妄

之情;性中, 立凡聖之量, 如蠶吐絲, 自纏其身, 是誰過歟? 若

一念回光, 則直是菩提正路, 千思萬慮, 失我心王. 此心王者,

言語道斷, 心行處滅.

19)『了堂惟一語錄』권1 卍123 p.891b4 등에 나오는 비유이다. 새끼줄의 비유는 다

음과 같은 전거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새끼줄인 것을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착각하여 그것을 뱀이라고 여긴다.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모르고 허망하

게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분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끼줄 자체는 뱀

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는 속성을 모두 떠나 있으나 다만 마음이 미혹되어 허

망하게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大乘入楞伽經』권7

大16 p.632c23. 如愚不了繩, 妄取以爲蛇. 不了自心現, 妄分別外境. 如是繩自體,

一異性皆離, 但自心倒惑, 妄起繩分別.);“새끼줄은 의타성(依他性)을 비유한 것

이고, 뱀은 분별성(分別性:遍計所集性)을 비유한 것이다. 이승과 범부는 의타

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별성에 집착하여 인식 주관과 객관 대상이 있다고 생각

한다.”(『攝大乘論釋』 권7 大31 p.204b14. 藤相譬依他性, 蛇譬分別性. 二乘凡

夫, 不了 依他性, 執分別性有人法.)

20) citta. 마음 그 자체. 마음 작용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마음이 대상을 받아들여

통합하는 기능을 왕에 비유한 것이다. 학파에 따라 6식이나 8식을 심왕으로 본

다.『入楞伽經』 권9 大16 p.565c1,『大毘婆沙論』권16 大27 p.81b20 등 참조.

선문헌에서는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지만 깨달음의 근거인 ‘마음’ 등을 포괄적

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강하다. “심왕이 헛되게 움직이지 않으면 여섯 나라(6식)

가 한순간에 통한다.”(『黃龍語錄』 大47 p.637b11. 心王不妄動, 六國一時通.);

“근본을 깨달으면 마음을 알고, 마음을 알면 부처를 본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며, 생각마다 부처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한다. 빨

리 성불하고자 하는가? 계를 지키는 마음 자체가 율이며, 이 청정한 율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이니 이 심왕 이외에 더 이상 별도의 부처는

없다.”(『善慧大師語錄』 권3 「心王銘」 卍120 p.23b4. 了本識心, 識心見佛.

是心是佛, 是 佛是心, 念念 佛心, 佛心念佛. 欲得早成? 戒心自律, 淨律淨心.

心卽是佛, 除此心王, 更無別佛.)

팔만대장경으로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이 향상하는 하나의 길[向上

一路]21)이고, 3천의 고불(古佛)일지라도 설할 수 없는 것이 격외(格外)의

선지(禪旨)이다. 만약 품은 생각을 잊은 채로 텅 비고 밝기만 하여 목석과

같고 허공과 같다면, 도(道)에 겨우 조금 상응할 뿐이다. 학인들 중 죽은

말[死語]만을 고수하는 자는 항상 깨끗한 것에 구속되어 있어 다만 마음

속으로 그윽하고 한가함을 지킬22) 줄만 알고 활구(活句)23)에서 참구하는

방법은 모르는 것이 마치 꿩은 이미 고개를 넘어가버렸는데 부질없이 텅

빈 숲을 지키고 있는 꼴과 같다.

八萬大藏收不得者, 向上一路;三千古佛說不及者, 格外禪旨.

若忘懷虛朗, 如木石, 如虛空者, 於道少分相應. 學者, 守死語

者, 常爲淨潔所拘, 只知內守幽閑, 不知活句上叅究者也, 如雉

已過嶺, 但守空林也.

21)『精選 선어록』진각어록 주석153) 참조.

22) 내수유한(內守幽閑). “예컨대 지금 그대가 나의 설법을 듣고 있다면, 이는 내가

법문하는 소리를 따라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

체를 소멸시켜 자기 안의 깊고 한적한 상태를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

나의 법진(法塵)이며 의식의 그림자를 분별하는 것일 뿐이다.”(『楞嚴經』 권1 大

19 p.109a9. 如汝今者, 承聽我法, 此則因聲, 而有分別. 縱滅一切, 見聞覺知, 內守

幽閑, 猶爲法塵, 分別影事.)

23) 활구와 사어(死語). 활구란 사유분별로 포착할 수 없는 몰자미(沒滋味)의 화두

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활구는 생각으로 더듬어서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이 아니

며, 오히려 모든 생각이 끊어진 경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본질이 드러난다. 활

구도 사유분별로 접근하면 사구(死句)로 전락하고 만다. 모든 유형의 분별이 탈

락된 ‘의심’에 기초한 참구만이 활구를 활구로서 살아 있게 한다.

방편을 고수하는 자는 마음이 장벽과 같은 경계를 오히려 도(道)로 여

기니24) 텅 비고 고요한 무기(無記)에 막혀 다른 자가 목을 베어가도 알아

차리지 못한다. 이와 같이 공부한다면 미륵보살이 세상에 내려올 때25)

지 좌선하고 있어도 번뇌를 타파할 수 없을 것이니, 계현(戒賢)26)과 같은

자들이 이런 부류이다.

守方便者, 心如墻壁, 反以爲道, 滯於空寂無記中, 他人斬頭而

不覺. 如此功夫, 坐到彌勒下生, 未能打破, 如戒賢之類也.

24) 달마의 벽관(壁觀)에서 유래한 말. 달마대사는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했다

고 하는데, 벽관이란 몸과 마음이 장벽과 같아져 어떤 망상도 침입할 수 없는

삼매 상태를 가리킨다.“『별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달마대사가 처음 소림사

에서 9년간 면벽할 때 2조에게 설법하면서 단지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한 집

착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져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은 경지에 이

르러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景德傳燈錄』권3「菩提達磨傳」

大51 p.219c27. 別記云, 師初居少林寺九年, 爲二祖說法祇敎曰, ‘外息諸緣, 內

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25) 미륵하생(彌勒下生). 여기서는 아득한 세월을 나타내지만, 본래는 일생보처보

살(一生補處菩薩)로 도솔천에 머물고 있는 미륵보살이 미래세에 이 세상으로 내

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례에 걸쳐 설법을 하고 중생을 제도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26) 529~645. Śīlabhadra, N3 an3 -tshul-bzan3 -po. 인도 후기불교의 유가행중관파(瑜

伽行中觀派) 논사. 음사어는 시라발다라(尸羅跋陀羅). 동인도 삼마달타국(三摩呾

吒國 Samatat3a)의 왕족으로, 바라문 출신이다.『大唐西域記』권8 大51 p.914c3

에 따르면, 나란다 사원의 법호(法護 Dharmapāla)에게 유상유식(有相唯識)을

배웠다. 법호가 입적한 후 그 뒤를 이어 나란다의 학장(學長)이 되어 정법장(正

法藏)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존경받았다. 636년 106세가 되던 해에 인도로 유

학을 온 현장(玄奘 600~664)을 만나 법호로부터 전수받은 유식학을 가르쳐 주었

고, 현장은 중국으로 돌아온 후 법호의 교학을 기본으로『成唯識論』의 중점만을

정리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세웠다. 유식학파의 전설에 따르면, 무착(無着)이

신통력으로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을 만난 뒤 대승공관(大乘空觀)의 궁극적 의

미를 체득하고서 미륵의 가르침을 세상에 유포했다고 한다. 법상종에서는 미륵

보살을 주존으로 신앙하였기 때문에 계현과 같은 부류는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수행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방편을 버리는 자는 장벽에서 참구하여 의식 내용을 다 끊은 다음에 다

시 되살아나 지혜의 빛이 밝아지기에 말로 닿을 수 없는 경계를 또렷하게

스스로 안다. 혜가(慧可)27)와 같은 자들이 이런 부류이다.

捨方便者, 於墻壁上叅究, 絕後再蘇, 慧光發明, 了了自知言之

不及處, 如慧可之類也.

27) 487?~593? 선종 제2조. 속성은 희(姬)씨. 하남성 낙양 출신이다. 초조 달마의 제

자로 단비(斷臂) 공안이 전한다.

요즘 학인들은 달마가 이조(二祖) 혜가에게 준 말28)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조주 무자화두에 끌어다가 앞뒤로 방편을 세우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 더욱 심한 착각이라 할 만하다.

今學者, 不知達摩所授二祖語故, 反引趙州無字上, 立前後方

便者, 徃徃有之, 尤可錯也.

28) 달마의 안심법문(安心法門)을 가리킨다. “신광(神光:慧可)이 말했다. ‘저의 마

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 마음을 가져오너

라. 그러면 편안히 해주리라.’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내

가 이미 그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느니라.’”(『景德傳燈錄』권3「達摩傳」大51

p.219b21. 光曰, ‘我心未寧, 乞師與安.’ 師曰, ‘將心來, 與汝安.’ 曰, ‘覓心了, 不可得.’ 師

曰, ‘我與汝安心竟.’)

또 어떤 자는 스스로 무심(無心)이 방편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름을 세

우고 뜻을 가지런히 정리한 뒤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말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마가 하나하나 열거한 뜻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기에 한 걸

음 물러나 ‘장벽과 같다’는 말에 대해서 참구할 수 없는 것이니, 활발한

조사의 뜻을 매몰시키고 한갓 이름에서 착각을 일으킨 자들이라고 할 만

하다.29)

又有自謂無心方便, 立名安排, 只伊麽念過. 殊不知達摩一一

裂30)下之意, 未能退步, 墻壁上叅究, 可謂埋沒活祖師意, 錯下

名言者也.

29) 벽관과 안심법문에 대한 대혜종고(大慧宗杲)의 해설에 근거한다. “2조 혜가도

처음에 달마가 제시한 방편을 모르고 ‘밖으로 모든 대상의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번뇌망상의 헐떡임이 없다’는 말이 마음과 마음의 성품에 대하여 설한

것이며, 도와 이치에 대하여 설한 것이라 생각하여 문자를 인용하여 증명함으

로써 인가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달마가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여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서야 비로소 물러나 ‘마음이 마치 장

벽과 같다’는 말은 달마대사의 진실한 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홀연히 장

벽과 같은 마음이 되어 단번에 모든 대상에 대한 분별을 그치고 곧바로 달을 보

고 손가락을 잊어 ‘또렷하게 항상 알고 있으나 말로는 미칠 수 없습니다’라고 그

경지를 말했던 것입니다.”(『書狀』「答劉寶學」大47 p.925b28. 二祖, 初不識

達磨, 所示方便, 將謂外息諸緣, 內心無喘, 可以說心說性, 說道說理, 引文字證據,

欲求印可. 所以, 達磨一一列下, 無處用心, 方始退步思量, 心如墻壁之語, 非達磨

實法, 忽然於墻壁上, 頓息諸緣, 卽時見月亡指, 便道了了常知故, 言之不可及.)

30) 裂은 列자의 오식(誤植).

또 죽은 말[死語]을 분별하는 것에 집착하고 텅 비고 고요한 경계에 주

저앉은 채 본래면목을 활짝 열지 못하는 자는 또한 방편을 버리지 않고

고수하며 종사(宗師) 노릇을 하는 자이다.31) 그를 따르는 학인들 중에 심

의식(心意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며 비밀스러운 종지를 천착하여 관념

적 이해를 얻고 맑고 고요함으로써 맑고 고요함에 들어가 합하는 것32)

구경의 법으로 삼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경절문33)의 활구

인 맛이 없는 이야기[無滋味之談]·양구(良久)34)·방할(棒喝)35)·삼구(三

句)36)·삼현(三玄)37)·삼요(三要)38)를 모두 선지(禪旨)로 취하는 것이다. 학

인은 조사의 활구에서 곧장 타파해야 하니 비록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

도 사흘이나 닷새나 이레,39) 아니면 일생의 끄트머리에서라도 깨닫게 될

것이다.

又執分別死語, 坐在空寂中, 不能開豁面目者, 亦守方便不捨,

爲宗師者. 學人以心意識, 商量計度, 穿鑿密旨, 得思量解, 以

湛入合湛, 爲究竟法者, 不可勝數. 是以徑截門活句, 無滋味之

談, 良久捧喝, 三句三玄三要, 皆禪旨. 學者, 須祖師活句上, 卽

時打破, 雖未省悟, 或三日或五日七日, 至於一生, 省得去矣.

31) 이 역시 대혜종고의 다음 취지에 따른다. 달마의 방편을 실법(實法)으로 수용하

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편지를 받아보니,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그치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임도 사라지면 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이

방편문입니다. 방편문을 빌려서 도를 깨닫는 것은 옳지만 방편을 고수하고 버

리지 않으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보내주신 말씀과 같

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어보고 기뻐서 뛸 듯한 기꺼운 마음을 이기지 못했습니

다. 오늘날 제방의 칠통과 같은 무리들은 단지 방편을 버리지 않고 고수하기 때

문에 실법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書狀』「答曾侍郎」5 大47 p.919a4. 承諭, ‘外息諸緣,

內心無喘, 可以入道, 是方便門. 借方便門, 以入道則可;守方便, 而不捨則爲病.’

誠如來語. 山野讀之, 不勝歡喜踊躍之至. 今諸方漆桶輩, 只爲守方便而不捨, 以

實法指示人. 以故瞎人眠, 不少.)

32)『書狀』「答曾侍郎」5 大47 p.919a9.

33) 徑截門. 무수히 많은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

고 간명하고 적절한 방법이라는 말. 곧 활구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가

리킨다. 경절은 직절(直截)·첩경(捷徑) 등과 같은 뜻으로서 『碧巖錄』 44則 大48

p.181c7·『書狀』「答劉通判」2 大47 p.926c10 등에 나온다. 그러나 명백하게

간화선과 연관시켜 ‘경절문’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지눌(知訥)로부터 비롯되었고

(『看話決疑論』 韓4 p.733a17), 그로부터 태고와 나옹을 거쳐 서산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사상에 면면히 계승되었다.

34)『精選 선어록』 나옹어록 주석93) 참조.

35) 위의 책 태고어록 주석87) 참조.

36) 위의 책 진각어록 주석75) 참조.

37) 위의 책 진각어록 주석76) 참조.

38)『선가귀감』「임제가풍」 참조.

39) 이렇게 깨달음의 기한을 설정하는 방식은『禪要』에 나온다. “진실로 이와 같이

공을 들이고도 사흘이나 닷새 또는 이레가 지나서도 뚫지 못한다면, 내가 오늘

큰 거짓말을 저지른 것이니 영겁토록 혀로 밭을 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禪要』 卍122 p.710a16. 誠能如是施工, 或三日或五日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犯

大妄語, 永墮拔舌犂耕.)

요즘 제방(諸方)의 칠통(漆桶)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다만 조

사가 보여준 경절(徑截)의 방편을 고수하기 때문에 실법으로써 여러 학인

을 가르친다. 그런 까닭에 학인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으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40)

今諸方漆桶軰, 只爲守着祖師所示徑截方便, 以實法, 指示諸

人. 所以瞎人眼不少, 亦不可不知也.

40) 주석31) 참조.

뜻을 참구한다는 것41)은 활구에서 깨우치는 경계를 얻지 못하고, 교학

의 어구에 의지하여 심의식(心意識)으로 헤아려 문득 이해하고자 하는 것

을 말한다.

叅意者, 未得活句中省發, 依敎語, 却將心意識商量, 忽然開

解者.

41) 제시된 화두의 문자상 의미를 궁구한다는 말. “뜻을 참구한다는 것은 원돈문의

사구를 가리킨다.”(『선가귀감』12. 參意者, 圓頓門死句也.)

활구란 심의식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이니, 본래의 심왕이 살아 있는 것이

마치 달리는 맹수와 같다. 사구(死句)란 심의식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니,

본래의 심왕이 죽은 것이 마치 달리는 개와 같다.42)

活句者, 心意識不及處, 本心王活也, 比走獸;死句者, 心意識

及處, 本心王死也, 比走狗.

42) 맹수 또는 사자는 흙을 던진 사람을 물고(활구), 개는 흙덩이를 쫓아간다(사구)

고 하는 비유에 따른다.『선교석』 발문 주석10) 참조.

선(禪)이나 교(敎)나 일념(一念)에서 일어난다. 심의식으로 미치는 경계

는 사량의 영역 속하는 것이니 교이며, 심의식으로 미치지 못하는 경계는

참구(叅究)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선이다.

禪敎起於一念中. 心意識及處, 卽屬思量者, 敎也;心意識未

及處, 卽屬叅究者, 禪也.

조사들이 제시한 말은 무엇이 되었건 그 한 구절43)에 팔만사천의 법문

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43) 그러므로 수연(隨緣)과 불변(不變),44) 성상(性

相)과 체용(體用),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전수(全收)와 전간(全揀),45)

융(圓融)과 항포(行布)46) 등이 자재하여 서로 걸림이 없으니, 본래부터 이

들 모두가 동일한 시간에 존재하고 앞뒤의 차별도 없는 것이 바로 선(禪)

이다. 여러 부처님이 펼쳐 보인 돈오와 점수, 수연과 불변, 성상과 체용, 전

수와 전간, 원융과 항포에 비록 사사무애(事事無礙)의 법문이 갖추어져 있

기는 하지만, 수행과 증득에 계급과 차제라는 선후가 있는 것이 바로 교

(敎)이다.

祖師所示, 皆是一句中, 八萬四千法門, 元自具足. 故隨緣不

變, 性相軆用, 頓悟漸修, 全收全揀, 圓融行布, 自在無碍, 元

是一時, 無前後者, 禪也. 諸佛開示, 頓悟漸修, 隨緣不變, 性

相軆用, 全收全揀, 圓融行布, 事事無碍法門, 雖有具足, 有修

有證, 階級次第先後者, 敎也.

43) 활구로서의 화두를 말한다.

44)『大乘起信論』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두 가지 측면을 일컫는 말. 진여는 모

든 법의 근거로서 생성과 소멸을 넘어서 상주하므로 불변이라 하고, 또한 진여

는 이러한 불변의 본질을 지니면서도 염정(染淨)의 인연을 따라 움직이며 삼라

만상을 드러내므로 수연이라 한다. “진여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불변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수연의 뜻이다.”(『大乘起信論義記』권중 大44 p.255c20.

眞如有二義, 一不變義, 二隨緣義.)

45) 전수는 차별 없이 모두 거두어들인 것, 전간은 모두 분별하여 가려낸 것을 말한

다. 규봉종밀(圭峯宗密)의 말이다.『圓覺經略疏』권하 大39 p.577b10·『金師

子章雲間類解』大45 p.665a17·『宗鏡錄』권11 大48 p.475b2 참조.

46) 원융은 개별적인 법들을 무차별하게 총괄하여 포섭하는 것이며, 항포는 개별

적인 법들을 차별 그대로 펼치는 것을 말한다. 화엄교학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서

로 걸림 없이 교섭되는 구조로 파악한다. “항포는 교상(敎相)의 시설이며 원융

은 곧 이성(理性)의 덕용(德用)이다. 상(相)은 성(性)의 상인 까닭에 항포가 원융

을 가로막지 않고, 성은 상의 성인 까닭에 원융이 항포를 가로막지 않는다. 원융

이 항포를 가로막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무량이고, 항포가 원융을 가로막지 않

기 때문에 무량이 하나이다.”(『大華嚴經略策』 권1 大36 p.706a4. 行布是敎相施設;

圓融乃理性德用. 相是性之相故, 行布不礙圓融;性是相之性故, 圓融不礙行布. 圓融

不礙行布故, 則一爲無量;行布不礙圓融故, 則無量爲一.)

선(禪)의 등불이 가섭의 마음47)에 붙여진48) 이래로 여러 조사가 그 근본

을 전하고 이름을 드러내며 그 본체를 말없이 드러내었다. 이는 바른 선맥

(禪脈)을 계승하며 종지(宗旨)의 근원을 직접 전한 것이다.

禪燈, 點迦葉之心, 諸祖相傳其本, 標擧其名, 嘿示其軆. 正脉

相承, 直傳宗源也.

47) 부처님이 가섭에게 세 차례에 걸쳐서 마음을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分半

座·拈花微笑·槨示雙趺)에 근거한 말이다. 『선교석』 주석17) 참조.

48)『禪門寶藏錄』「序」卍113 p.985a2에 나오는 천책(天頙)의 말이다.

교(敎)의 바다가 아난의 입49)에 쏟아 부어지고50) 여러 부처가 그 지말을

전해서 법(法)·의(義)와 인(因)·과(果)를 보여줌으로써 믿고 이해하고 닦

고 증득하게 하였다. 이것이 만대(萬代)가 의지하는 근거가 되어51) 다양한

유파로 바르게 이어진 것이다.

敎海, 瀉阿難之口, 諸佛相傳其末, 示以法義因果, 信解修證,

此萬代依憑, 正承流派也.

49) 부처님 멸도(滅度) 후 아난존자에 의해서 최초로 경장(經藏)이 결집(結集)된 사

실에 근거한 말이다.

50) 『禪門寶藏錄』「序」 卍113 p.985a3에 나오는 천책(天頙)의 말이다. 본래는 40권본

『大般涅槃經』권40의 다음 글에 근거한다. “나를 섬긴 이래로 내가 설한 12부경

을 지니고서 한 번이라도 귀에 스쳐 들은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 이해하여 더 이

상 묻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병에 담긴 물을 쏟아 다른 병에 고스란히

옮겨 두는 것과 같았다.”(40권본『大般涅槃經』 권40 大12 p.601c3. 自事我來, 持我所

說, 十二部經, 一經於耳, 曾不再問. 如寫甁水, 置之一甁.)

51) 규봉종밀의 말에 따른다. “부처님의 교설은 만대가 의지하는 근거이니 그 이치

를 자세히 보여 줄 필요가 있고, 선사의 가르침은 즉시 도탈하고 그 뜻은 현묘한

도리에 통하게 하는 데 있다. 현묘한 도리에 통하는 관건은 반드시 말을 잊어야

하므로 말을 듣자마자 바로 그 자취를 남겨서는 안 된다. 생각에서 자취가 끊어

지고 마음의 근원에서 도리가 나타나면 가르침을 믿고 이해하며 닦고 증득하게

되니 굳이 하는 것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성취할 수 있고, 경·율·소·론을 익히

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뜻에 깊숙이 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

방법에 대하여 물으면 ‘따로 닦을 도가 없다’고 답하며, 해탈을 구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면 도리어 ‘누가 그대를 속박했느냐?’라고 반문하고, 성불하는 길

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본래 범부가 없다’고 답하는 것이다.”(『都序』권 상1 大48

p.399c2. 佛敎萬代依馮, 理須委示;師訓在卽時度脫, 意使玄通. 玄通必在忘言故,

言下不留其迹, 迹絕於意地, 理現於心源, 卽信解修證, 不爲而自然成就, 經律疏論

不習, 而自然冥通. 故有問修道, 卽答以無修;有求解脫, 卽反質誰縛;有問成佛之

路, 卽云本無凡夫.)

자신의 성품 속에 갖춰진 반야로 조사의 활구를 항상 제기하고 온힘을

다해 참구하여 막힘없이 크게 깨닫는 것을 입문으로 삼는다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모든 것에 대해 심지(心地)가 어둡지 않을 것이다.

自性中般若, 常常提起祖師活句, 盡力叅究, 以豁然大悟爲入

門, 一切見聞覺知, 心地不昧.

상을 닦는 문[修相門]의 반야로는 망념이 본래 공(空)이고 마음이 본래

적(寂)임을 알지 못하여 진실과 망념이 별개라고 집착할 뿐만 아니라 닦

는 주체인 능(能)과 닦는 대상인 소(所)를 대치시켜 닦고 익히는 방편을

입문으로 삼으니, 공과 노력에 의해 조작된 모든 것에서 마음이 분별을 일

으킨다. 자기의 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볼 뿐 성인의 갖가지 해탈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52)이 선가(禪家)의 눈이고, 다른 사람의 시비에 대해서 말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허물을 돌이켜 보는 것이 선가의 발이다. 그러므

로 달마는 “불심(佛心)의 종지53)를 깨달아 평등하고 어긋남이 없으며 이해

[解]와 실행[行]이 상응하는 이를 가리켜 조사라 한다”54)라고 한 것이다.

修相門般若, 不知妄本空, 心本寂, 眞妄別執, 能所相治, 修習

方便, 爲入門, 一切功用所作, 心生分別. 返照自己面目, 不慕

諸聖解脫者, 禪家之眼也;不說他人是非, 常省自己過患者,

禪家之足也. 故達摩云,“ 悟佛心宗, 等無差誤, 解行相應, 名

之曰祖.”

52) 불모제성해탈(不慕諸聖解脫). 석두희천(石頭希遷)의 말.『景德傳燈錄』권5「靑原

行思傳」 大51 p.240b23 참조.

53) 『楞伽經』의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佛語心爲宗)”라고 한 말을

전거로 하여 문자를 세우지 않고 경전에 의지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것을 종지로 삼으므로 불심종이라 한다. 달마대사가 2조 혜가(慧

可)에게 심인과 더불어 4권본 『楞伽經』을 전했다는 설과 관련된다. “달마가 서

쪽으로부터 와서 본래 문자를 세우지 않았지만 『능가경』을 동토에 전하며 심인

으로써 불심의 종지를 전하였다.”(『注大乘入楞伽經』 권1 大39 p.433b29. 達磨

西來, 本自不立 文字, 楞伽東付, 以印傳佛心宗.)

54) “밖으로 향한 분별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으면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 불심의 종지를 밝히고 평등하고 어긋남이 없

어 이해와 실행이 상응하면 조사라고 한다.”(『二種入』 大48 p.370a25. 外息

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明佛心宗, 等無差誤, 行解相應, 名之曰祖.)

참선문參禪門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조사선을 참구해야 한다.

若欲脫生死, 須叅祖師禪.

조사선이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를 가리킨다. 일천칠백여

칙의 공안55) 중에 제일의 공안으로서 세상의 납승 모두가 이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한다. 옛날에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

이 있습니까?” “없다.”

祖師禪者, 狗子無佛性話也. 一千七百則公案中, 第一公案也. 天下衲

僧, 盡叅無字話. 昔有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55) 대표적인 선종사서(禪宗史書)인 『景德傳燈錄』이 과거7불로부터 법안문익(法眼

文益)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52세(世) 1701인(人)에 대해 기록한 점에 근

거한 말이다.『景德傳燈錄』「序」大51 p.196c3 참조.

모든 유정(有情)에게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무엇 때문에 ‘없다’라고 말

했을까? 조주의 속뜻은 무엇일까?56) 이 무자화두를 찰나마다 이어서 다니

거나 머물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눈앞에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그

것은 마치 하나의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가면 얼굴을 태워버릴 것이

다.57) 그러므로 불법에 대한 분별적 견해[知解]가 붙을 곳조차 없어 전혀

알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하니58) 분별의식으로 생각해서는 미칠 수 없

는 것이다. 무심(無心)으로도 구할 수 없고, 유심(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

으며,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거늘59) 어떻게 헤아

릴 수 있겠는가? 도리로 모색할 수 있는 길도 없고 마음으로 미칠 수 있는

길도 없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길도 없고 아무 맛도 없으며 움켜잡

을 여지도 없으니 모색할 수단이 전혀 없는 것이다.

一切含靈, 皆有佛性, 趙州因甚道無? 意作麽生? 此無字, 念

念相連,60) 行住坐故無佛法知解所着之處, 百不知百不會, 識情思想不到. 不可

以無心求;不可以有心得;不可以語言造;不可以寂黙通,

擬議得麽? 沒理路, 沒心路, 沒語路, 沒滋味, 沒巴鼻, 無摸

底工.

56)『誡初心學人文』 大48 p.1005a12를 인용한 문장.

57)『선교석』 주석50) 참조.

58)『精選 선어록』태고어록 주석220) 참조.

59)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말이다.『精選 선어록』진각어록 주석377) 참조.

이 일념자(一念子)61)가 터지듯이 한 번에 부서져야 비로소 생사의 도리

를 알아차릴 수 있다. 분별의식이 부서지기 이전에는 마음의 불이 뚜렷이

탈 것이니 바로 이럴 때 오로지 의심하고 있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들어

야 한다. 천 가지 만 가지 온갖 의심이 다만 이 한 가지 의심일 뿐이니 이

렇게 헤아려도 옳지 않으며 저렇게 헤아려도 옳지 않다.62)

這一念子, 爆地一破, 方了得生死. 情識未破, 則心火熠熠地,

正當伊麽時, 但以所疑底話頭提撕. 千疑萬疑, 只是一疑, 左來

也不是;右來也不是.

61) 의단(疑團)으로 형성된 화두를 말한다. 들고 있는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 전

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일념(一念)이라 한다. “만일 가장 빠른 길로 이해하고 싶

다면 이 일념자가 터지듯이 한번에 깨지는 경지를 얻어야 비로소 생사의 도리

를 알아차릴 것이며, 비로소 깨달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집착된 마음

을 가지고 화두가 타파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화두가 타파된 경지

에 얽매인다면 영원히 타파되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망상으로 전

도된 마음과 사량 분별하는 마음과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분별로 이해하려는 마음과 고요함을 기뻐하고 시끄러움을 꺼려하는 마음을 한

꺼번에 눌러버리고, 이렇게 눌러버린 경계에서 주어진 화두를 살피십시오.”(『書

狀』「答富樞密」大47 p.921c2. 若要徑截理會, 須得這一念子, 嚗地一破, 方了

得生死, 方名悟入. 然切不可存心待破. 若存心在破處, 則永劫無有破時. 但將妄想

顚倒底心, 思量分別底心, 好生惡死底心, 知見解會底心, 欣靜厭鬧底心, 一時按下,

只就按下處, 看箇話頭.)

62)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 보는 일은 그치고, 집에 돌아왔으면 길 물어보는 일은

그만둡니다. 분별의식이 사라지지 않으면 마음의 불이 뚜렷이 탈 것이니 바로

이럴 때 오로지 의심하고 있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들어야 합니다. 가령 ‘개에

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주가 ‘없다’고 답한 따위의 화두만을 들고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을지언정 이렇게 헤아려도 옳지 않으며 저렇게 헤아려도

옳지 않습니다.”(『書狀』 「答張舍人」 大47 p.941b8. 見月休觀指;歸家罷問

程. 情識不破, 則心火熠熠地, 正當恁麽時, 但只以所疑底話頭提撕.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只管提撕擧覺, 左來也不是;右來也不是.)

모름지기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활구를 참구해야 하며 사구를 참구해

서는 안 된다. 활구로 알아차린다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지

만 사구로 알아차리면 제 자신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63) 활구란

경절문이다. 이는 마음으로 미칠 수 있는 길도 없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길도 없으니 모색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사구란 원돈문이다. 이는

도리로 모색할 수 있는 길도 있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길도 있으니

들어서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64)

大抵學者, 須叅活句, 莫叅死句. 活句下薦得, 堪與佛祖爲師;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活句者, 徑截門也. 沒心路, 沒語路,

無摸故也. 死句者, 圓頓門也, 有理路, 有心路, 有聞解思想

故也.

63)『선가귀감』12 및 주석68) 참조.

64)『선가귀감』12 참조.

염불문念佛門 65)

65)『선가귀감』52 원문과 서산의 평을 발췌한 글이다.『선가귀감』52 주석 내용 참조.

염불을 할 때 입으로 내는 소리는 ‘송(誦)’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우는

것은 ‘염(念)’이라 한다. 단지 입으로 소리만 낼 뿐 마음속에서 놓쳐버리

66) 도를 이루는 데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 6자 진언

은 반드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

의 경계를 대상으로 삼아 간직하여 잊지 않으며, 입으로는 부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분명하여 산란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딱 들어맞는 것을 염불이라고 한다.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 南無67)阿

彌陀佛六字, 㝎出輪廻之捷徑也. 心則緣佛境界, 憶持不忘, 口

則稱佛名號, 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 名曰念佛.

66) 실념(失念). 염불을 할 때 간단없이 놓치지 않고 불명(佛名)을 외워야 하는 이 요

령은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과도 통한다. 염(念)이 대상을 명백하게 기억하여 잊

어버리지 않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라면, 실념은 대상으로 삼는 경계와 모든 선

법(善法)에 대해 명백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교학적 측

면에서는 유식백법(唯識百法) 중 이십수번뇌(二十隨煩惱)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67) 원문에는 ‘南無’ 두 글자가 빠져 있다.

범어 아미타불은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無量光)68)이라 한역

하는데, 시방 삼세를 통틀어 근본이 되는 부처님의 명호이다. 인위(因位)

에 있을 때는 법장비구라고 하였는데, 세자재왕불에게 48가지 서원을

일으켜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시방의 무앙수세계의 모든 천인(天人)으

로부터 날아다니거나 기어 다니는 온갖 벌레들에 이르기까지 저의 이름

을 열 번만 칭념하면 저의 불국토에 반드시 태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이

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내 성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梵語阿彌陀佛, 此云無量壽佛, 亦云無量光. 十方三世諸佛第一號. 因名

法藏比丘, 對世自在王佛前, 發四十八願云,“ 我佛時. 十方無央數世界

諸天人民, 以至蜎飛蝡動之流, 念我名十聲者, 必生我刹中. 不得是願,

終不成佛.”云云.

68) amita-prabha의 한역어. “무량수불의 위신 있는 광명은 가장 존귀하여 최고이

니, 다른 부처님의 광명은 미칠 수 없다. …… 이런 까닭에 무량수불을 무량광

불·무변광불·무애광불이라고 한다.”(『無量壽經』 권상 大12 p.270a23. 無量壽

佛, 威神光明, 最尊第一, 諸佛光明, 所不能及. …… 是故無量壽佛, 號無量光佛,

無邊光佛, 無礙光佛.)

옛 성인이 말했다.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소리 내어 부르면 천마(天

魔)의 간담을 상하게 하고, 귀신의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져 백은(白銀)이

깔려 있는 연못에 연꽃으로 피어나리라.” 또 참법(懺法)에는 이렇게 전한

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있으니, 한쪽은 더디고 한쪽은 빠르다.”69)

先聖云, “唱佛一聲, 天魔喪膽, 名除鬼簿, 蓮出金池.” 又懺法

云,“ 自力他力, 一遲一速.”

69)『선가귀감』52 [평]에 의하면, 이 뒤에 생략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바다를 건너

고자 하는 자가 나무를 심어 자란 뒤에 배를 만든다면 더딜 것이니 이는 자력을

비유한 것이다. 배를 빌려 타고 바다를 건넌다면 빠를 것이니 이는 불력을 비유

한 것이다.”(欲越海者, 種樹作船, 遲也, 比自力也. 借船越海, 速也, 比佛力也.);“자

력과 타력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마치 개미가 금시조 위에 붙어 있으면 장차 개

미가 수미산에 오르게 되니 높은 곳에 올라서 여러 가지 기쁨을 누리는 것과 같

다. 대체로 염불 또한 이와 같아서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빨리 서방 정토세계에

태어나 여러 가지 기쁨을 누리니 마치 개미가 금시조를 타고 수미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이것이 타력이다. 나머지 방법으로 도를 닦는 것은 마치 개미가 자신

의 힘으로 수미산에 올라가려는 것과 같아서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이 곧 타력이

다.”(『念佛鏡』大47 p.122c16. 自力他力者, 猶如蟻子寄在翅鳥之上, 遂將蟻子在須彌

山, 蟻子昇高受諸快樂. 凡夫念佛亦復如是, 乘佛願力速生西方, 受諸快樂, 猶如蟻子乘

翅鳥力上山相似. 此之他力. 餘門修道, 猶如蟻子自力行上山, 不可得到. 此乃自力.)

삼종정관三種淨觀 70)

70) 글의 전체적 내용은 『觀無量壽佛經』의 교설에 근거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마음

먹은 그대로 신통을 부리면서 시방의 국토에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나타난다. 때

로는 큰 몸으로 나타나 허공을 가득 채우고, 때로는 1장 6척(서 있을 때) 또는 8

척(앉아 있을 때)의 작은 몸으로 나타나며, 나타내는 형색은 모두 순수한 금색이

다. 원광(圓光) 속의 화신불과 보련화(寶蓮花)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모든 장소에서 동일한 몸으로 나타나기에 중생들은 단지

두 보살의 머리 모양만 보고도 관세음보살인지 대세지보살인지 알 수 있다. 이

두 보살은 아미타불을 도와 일체의 중생을 두루 교화한다.”(『觀無量壽佛經』

大12 p.344c1. 阿彌陀佛神通如意, 於十方國變現自在. 或現大身滿虛空中;或

現小身丈六八尺, 所現之形皆眞金色. 圓光化佛, 及寶蓮花, 如上所說. 觀世音菩

薩, 及大勢至, 於一切處身同, 衆生但觀首相, 知是觀世音, 知是大勢至. 此二菩

薩助阿彌陀佛, 普化一切.)

아미타불의 몸은 순수한 금색이며 칠보 가득한 연못의 대연화(大蓮花)

위에 앉아 계시고 신장은 1장 6척71)이며 양미간에 오른쪽 위로 말려 올라

간 백호(白毫)72)가 있으니, 정심(停心)으로써 백호를 관상(觀想)하라.73)

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왼쪽에 서 있는데, 몸은 자줏빛이 도는 금색이고

손에는 백련화(白蓮花)를 들고 있으며 쓰고 있는 천관(天冠)에는 화신불

(化身佛)이 있다고 관상하라.74)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서 있

는데, 몸은 자줏빛이 도는 금색이고 쓰고 있는 천관에는 한 개의 보병(寶

瓶)75)이 있다고 관상하라. 염불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구송

(口誦), 둘째는 사상(思像), 셋째는 관상, 넷째는 실상(實相)이다.76) 근기에

는 예리함과 둔탁함의 차이가 있으니 근기에 따라서 적절한 관상법에 들

어간다.

阿彌陀佛眞金色, 七寶池中大蓮花上坐, 身長丈六, 兩眉中間

向上有白毫右旋轉, 以停心注想於白毫. 觀世音菩薩, 立左邊

而身紫金色, 手執白蓮花, 其天冠中, 有立化佛. 大勢至菩薩,

立右邊而身紫金色, 其天冠中, 有一寶甁. 念佛有四種. 一口

誦, 二思像, 三觀想,77) 四實相. 根有利鈍, 隨機得入.

71) 부처님의 신장을 보통 1장 6척이라고 하는 말에 따른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몸이 1장 6척이라 주장하고, 어떤 이는 1리나 10리 또는 백천만억 또는 끝도 없

고 헤아릴 수도 없어 허공을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신밀(身密)이라 한다.”(『大智度論』 권10 大25 p.127c14. 有人見佛身, 一

丈六尺, 或見一里十里, 百千萬億, 乃至無邊無量, 遍虛空中. 如是等名身密.)

72) ūrnā, ūrna, ūruna, unna, unnā, unna-loma, unnā-loma.

부처님과 보살만이 가지고 있는 양미간 사이에 난 흰 터럭을 말한다. 32상호 중

하나이다. 오른쪽으로 말려 올라간 형상으로 수정같이 희고 가늘고 부드럽다. 끝

없이 퍼져가는 빛을 발하는데, 그 광명을 백호광(白毫光)이라 한다. “그때 부처님

께서 두 눈썹 사이에 난 흰 털에서 빛을 일으켜 동쪽 1만 8천 불국토를 비추어 두

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法華經』「序品」大9 p.4a18. 爾時, 如來放眉

間白毫相光, 照東方萬八千佛土, 靡不周遍.)

73)『龍舒增廣淨土文』권4 大47 p.264b23~b27을 인용한 것. 정심(停心)이란 선정(禪

定)에 들어 안정되고 산란하지 않은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74)『觀無量壽佛經』 大12 p.343c18 참조.

75) 보병에 대한 내용은『觀無量壽佛經』의 내용과 다르다. 경전에는 천관에 보병이

있는 것이 아니며, 정수리에 있는 연꽃 모양의 육계(肉髻) 위에 보병이 있는 것

으로 묘사되어 있다.『觀無量壽佛經』大12 p.344a29 참조.

76) 종밀(宗密)의 분류에 따른 사종염불(四種念佛)을 말한다. 칭명념(稱名念)·관상

념(觀像念)·관상념(觀想念)·실상념(實相念) 등이다.『華嚴經行願品別行疏鈔』

卍7 p.914a11 참조.

아미타불은 어느 곳에 계실까?78)

이 의심 마음에 붙여 두고 결코 잊지 마시라.

염송이 막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계에 이르면,

여섯 문79)에서 항상 자금색 광명이 비추리라.80)

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

放紫金光.

78) 나옹선사의 권념송(勸念頌)이다.『懶翁語錄』「答姝氏書」韓6 p.728a9 참조.

『精選 선어록』나옹어록 누이에게 답하는 편지」참조.

79) 육문(六門)은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을 말한다.

80) “여러분에게는 각자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보배가 있다. 그것은

눈에서 빛을 내어 산하대지를 비추고, 귀에서 빛을 내어 모든 선악의 음향을 분

별하도록 한다. 육문에서 주야로 항상 광명을 뿜어내므로 방광삼매라고도 한

다.”(『景德傳燈錄』권9「大安傳」 大51 p.267c11. 汝諸人, 各自有無價大寶.

從眼門放光, 照山河大地;耳門放光, 領釆一切善惡音響. 六門晝夜, 常放光明,

亦名放光三昧.)

자성의 아미타불 어디에 있을까?81)

이 의심 언제나 찰나마다 놓치지 마라.

홀연히 어느 날 모든 망상을 잊는다면,82)

낱낱의 존재에서 아미타불 드러나리라.

自性彌陀何處在? 時時念念不須忘. 驀然一日如忘憶, 物物頭

頭不覆藏.

81) 나옹화상의 게송이다.『懶翁和尙歌頌』韓6 p.743a9 참조. 염불에 화두 공부의

방법을 적용시킨 염불선(念佛禪) 또는 선정일치(禪淨一致) 사상의 전형을 보여주

는 게송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본성(覺性)이 곧 아미타불(阿彌陀

佛)이라는 자성미타(自性彌陀)사상에 근거하여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염불

과 화두 공부를 결합한 것이다.『精選 선어록』 태고어록 주석236) 참조.

82) ‘모든 망상을 잊는다(忘憶)’라는 것은 의심에 대해서 더 이상 더듬어 찾을 수 없

는 곳에 이른 경계를 말한다. 이는 아미타불에 대해서 아무런 모색을 할 수 없어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경계가 된 상태를 말한다. 위 게송의 3구인 “염송

이 막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계에 이르면(念到念窮無念處)”이라는 맥

락과 동일하다.

위에 나오는 게송은 ‘자성의 아미타불’에 관한 게송이다. 이는 사상염

불에 해당한다. 예리한 근기와 높은 지혜를 가진 자는 입으로 읊는 행위

[口誦]와 관계없이 걷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말하거

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거나, 기쁘거나 화나거나 슬프거나

즐거운 모든 경계 속에서 아미타불을 떠올려 생각할 뿐이지만, 둔하고

하열한 근기는 오히려 이러한 방법을 등진다.

右自性彌陀頌, 此思像念佛也. 利根上智, 不涉口誦, 行住坐

臥, 語默動靜, 喜怒哀樂中, 思而念之而已;鈍根劣機, 反此耳.

선송禪頌 83)

83) 이 제목 아래 참선의 요지를 드러내는 9수의 게송이 수록되어 있다.

무수한 수행법 중에,

참선이 가장 좋다네.

천 번 만 번 태어나도,

여래의 방84)에만 앉으리.

無量行門中 叅禪爲第一

千千萬萬生 直坐如來室

84) 여래실(如來室). 여러 경전에 나오지만 여기서는 불도를 따르는 자가 수행하는

장소인 ‘참선하는 방’ 정도의 뜻이다. “여래의 방이란 모든 중생들에게 있는 큰

자비심이 그것이다.”(『法華經』 권4 大9 p.31c25. 如來室者, 一切衆生中, 大慈悲心,

是.);“두루 여래의 방에 들어가 이와 같은 도를 수행하리라.”(80권본 『華嚴經』

권77 大10 p.427a11. 普入如來室, 當行如是道.);“목숨을 마친 다음에 그 국토에 태

어나면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미 여래의 방에 들어

왔고 두려움이 없는 성에 머물고 있다.’”(『大寶積經』 권20 大11 p.107b12. 若命終

後, 生於彼土, 卽於生時, 得如是念, 我已入如來室, 住無畏城.)

이 일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사의 관문을 참구하라.85)

바다처럼 드넓은 믿음 일으키고,

산과 같이 높이 솟은 뜻 세워서,

일상의 모든 행위 반경 안에서,

있는 힘 다해 의단86) 일으켜라.

냉담하여 어떠한 맛도 사라지고,

화두 하나만 또렷이 드러나서,87)

분별 가라앉고 마음 길 끊기면,88)

장부의 뼛속에 한기 사무치리라.88)

欲識這箇事 須叅祖師關

發信如大海 立志卓如山

日用四威儀 盡力起疑團

冷談89)沒滋味 話頭獨單單

識沉心路絶 丈夫骨應寒

85) 간화선을 근본으로 삼는 입장이 나타난다. 이 구절은『無門關』1則「評唱」大48

p.292c22를 활용한 것으로 제9구와 연결된다. “참선을 하려면 반드시 조사의 관

문을 꿰뚫어야 하고, 묘하게 깨달으려면 마음의 길이 끊어진 경계를 궁구해야

한다.”(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86) 疑團. 의심덩어리. 간화선의 핵심적인 방법은 하나의 화두에 대하여 온몸과 마음

으로 의심을 일으키고 안팎의 모든 것을 오로지 이에 대한 의심으로 만드는 것

이 요령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통일시켜 한 덩어리로 만

들기 때문에 ‘의심덩어리’라 한다. “이와 같이 갈 때도 바로 이 의심덩어리일 뿐

이며, 앉아 있을 때도 바로 이 의심덩어리일 뿐이고,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도

바로 이 의심덩어리일 뿐이며, 대소변을 볼 때도 바로 이 의심덩어리일 뿐이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바로 이 의심덩어리일 뿐이다.”

(『禪要』 「示衆」 제2 卍122 p.706a18. 如是, 行也, 只是箇疑團;坐也, 只是

箇疑團;着衣喫飯也, 只是箇疑團;屙屎放尿也, 只是箇疑團, 以至見聞覺知, 總

只是箇疑團.)

87) 화두에서 어떤 맛도 느끼지 못할 때가 화두를 타파할 결정적인 순간이다. “다

만 화두에서 살피고 꾸준히 반복하여 살피다가 잡을 수단이 전혀 없고 어떤 맛

도 없어 마음이 답답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때가 화두에 힘을 붙이기 아주 적절

한 순간이니 결코 화두 이외의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바로 이렇게 답

답한 경계가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되어 세상 사람들의 혀에 눌러앉아 아무 말도

못하게 할 자리입니다.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書狀』「答曾宗丞」大47 p.934b3. 但於話頭上看, 看來看去, 覺得沒巴鼻,

沒滋味, 心頭悶時, 正好著力, 切忌隨他去. 只這悶處, 便是成佛作祖, 坐斷天下

人舌頭處也. 不可忽! 不可忽!)

88) 화두에 아무 맛도 없어 분별로 더듬어갈 ‘마음의 길’이 모두 끊어진 경계를 말

한다.『선교결』주석11) 참조.

89) 談은 淡자의 오식(誤植).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의심날 때,

당사자가 힘을 얻은 순간이로다.90)

바로 이 경계에 도달하고 나서야,

생사의 횃불을 꺼뜨릴 수 있다네.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나귀 해까지 기다려야 하리라.91)

不疑自疑時 當人得力處

到這箇田地 可滅生死炬

若不從斯語 驢年始得去

90) 공부가 무르익어 화두를 애써 들거나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에 대

한 의심이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화두를 드는 힘이 충분히 생겼기 때문에 애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서 나옹(懶翁)선사의 글에도 보인다. “반복하여 꾸준히 의심하다가 의심하기

에 힘이 덜 드는 경계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힘을 얻은 경계이니,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게 된다.”(『禪

要』「示衆」제2 卍122 p.706b3. 疑來疑去, 疑至省力處, 便是得力處, 不疑自

疑, 不擧自擧.);“문득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생길 것이니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았어도 앉은 줄 모르며

오로지 참구하는 생각만이 홀로 빛나고 뚜렷하여 분명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번뇌가 끊어진 경계라 하고, 아(我)를 잊은 경계라고도 한다.”(『禪觀策進』「大

乘山普巖斷岸和尙示衆」大48 p.1103b25. 忽爾不擧自擧, 不疑自疑, 行不知行,

坐不知坐, 惟有參情, 孤孤逈逈, 歷歷明明. 是名斷煩惱處, 亦名我喪處.) 『懶翁語

錄』韓6 p.726a13.

91)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는 말.

뚜렷하게 공안을 들고서,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말 것이며,92)

물에 잠긴 달처럼 맑고 밝게 하고,

죄임과 늦춤 거문고 조율하듯 하라.93)

병든 자가 의사를 구하려는 의지와,

갓난아이가 엄마를 찾는 마음으로,94)

친밀하고 적절하게 공부하는 순간,

붉은 해 동쪽 봉우리에 떠오르리라.

歷歷提公案 莫浮亦莫沉

虛明如水月 緩急若調琴

病者求醫志 嬰兒憶母心

做功親切處 紅日上東岑

92) 도거(掉擧)와 혼침(昏沈)이라는 두 가지 병통을 가리킨다. 도거는 화두를 들면

서 여러 가지 생각과 분별이 붙는 착의(著意)와 같고, 혼침은 화두를 놓치고 마

음을 텅 비우기만 하는 무기(無記) 또는 망회(忘懷)와 같다.『大慧語錄』권17

大47 p.884c18 참조.

93)『선가귀감』18 참조.『雜阿含經』권9 大2 p.62c15에 수행의 요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되는 말을 근거로 한다. “부처님께서 다시 이십억이(二十億

耳)에게 물었다. ‘거문고 줄을 잘 조율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줄이 느슨하

지도 팽팽하지도 않게 한 뒤에야 묘하고 조화로우며 아름다운 음이 나오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십억이에게 말씀하셨다.

‘정진을 지나치게 급히 하면 도거와 후회[悼悔]를 증가시키고, 정진을 지나

치게 느리게 하면 해이하고 태만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평등하게

닦고 익혀서 마음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집착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며 상을

취하지도 마라.’” (世尊復問, ‘云何善調琴絃? 不緩不急, 然後發妙和雅音不?’

答言, ‘如是. 世尊.’ 佛告二十億耳, ‘精進太急, 增其悼悔;精進太緩, 令人懈

怠. 是故, 汝當平等修習攝受. 莫著, 莫放逸, 莫取相.’)

94)「참선문」 참조.

활구에 마음을 둔 선객이여!

그 누가 맞수가 될 수 있나?

주어진 수명95) 다하는 그날,

염라대왕도 저절로 항복하리.

活句留心客 何人作得雙

報緣遷謝日 閻老自歸降

95) 보연(報緣). 한 생애 동안 누리는 수명

삼도96)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조사선 참구해야 하리라.

시간은 진실로 아까운 것이니,

부디 할 일 없이 잠자지 마라.

要免三途海 須叅祖師禪

光陰眞可惜 愼勿等閑眠

96) 三途. 삼악도(三惡道). 여섯 가지 윤회의 길 중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 가지 악

한 길.

공부를 할 땐 먼저 분한 뜻97) 일으키고,

법을 깨달으려면 또 몸마저 버려야 하리.

활구에서 의단을 타파해야,

비로소 대장부라 하리라.

做功先發憤 爲法更亡軀

活句疑團破 方名大丈夫

97) 참선의 세 가지 요소 중 대분지(大憤志)와 통한다.『선가귀감』14 참조.

조주가 걸어놓은 관문의 빗장,98)

그것을 풀어 여는 납승이라면,

천하의 걸출한 노화상의,

콧구멍도 꿰뚫어 버리리라.99)

趙州關捩子 衲僧如打開

天下老和尙 鼻孔穿却來

98) 관려자(關捩子). 무자(無字) 등의 화두에 설정된 핵심적인 뜻. 유(有)도 무(無)도

그것을 여는 열쇠의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걸려 있는 빗장과 같다.

99) 조주의 관문만 타파하면 탁월한 선사들이 제시하는 모든 화두를 아울러 타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 마치 소의 콧구멍을 꿰면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 있는 것

처럼 그들의 본분 화두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쪽에서 온 달마의 뜻이여!

잣나무 되어 뜰 안에 섰구려.100)

우습다, 남쪽 돌아다니는 이여!

110성을 돌며 헛수고만 했도다.101)

西來祖師意 栢樹立庭中

可笑南詢子 徒勞百十城

100) 조주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곧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말한다. 이 화

두가 달마대사의 종지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

다. “그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

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07a17. 時, 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學云, ‘和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

將境示人.’ 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101)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110성(城)을 돌아다니며 53

명의 선지식을 친견했지만, 조주의 화두 하나를 타파하면 될 일을 헛되이 애만

썼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선재를 남순동자(南詢童子)라고도 한다. “이 장자의

아들(선재동자)은 이전에 복성(福城)에서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은 다음부터

점차로 남쪽으로 돌아다니며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하였다. 110개의 성에 사는

선지식을 다 경유하고 난 다음에 내(미륵보살)가 있는 이곳에 이른 것이다.”(80

권본『華嚴經』권78「入法界品」大10 p.428c23. 此長者子, 曩於福城, 受文

殊敎, 展轉南行, 求善知識. 經由一百一十善知識已, 然後而來至於我所.)

염송念頌 102)

102) 염불에 관한 6수의 게송. 마지막 게송에 나오듯이 참선(參禪)이 곧 염불이라는

관점이 그 사상적 바탕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을 염불에 적용

한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입장이다. 염불의 염(念)과 간화의 간(看)은 간단없이

마음에 담아두고 간수(看守)하는 요령과 다르지 않다.

마음에 하나의 금산103) 떠올리며,

손으로는 백팔염주 돌려야 하리라.

염하는 자 누구인지 돌이켜 보면,104)

마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네.105)

이것은 몸의 형상을 생각하며106) 행하는 염불에 대한 게송이다.

心想一金山 手回珠百八

返觀念者誰 非心亦非物

此頌思像念佛也.

103) 金山. suvarna-parvata, suvanna-pabbata. 부처님 몸을 비유하는 말.

“몸의 색은 금산과 같아 단엄하고 매우 깊으며 미묘하다.”(『雜阿含經』권23

大2 p.161b16. 身色如金山, 端嚴甚深妙.)

104) ‘염불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라고 되묻는 방법은 조사선의 선법에도 적지 않

게 발견된다. “조주가 대중에게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니 염불하고

염법(念法)하라’고 하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저의 자신을 염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염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상대할 짝이 없습니다’. 이에 조주가

‘이 나귀 같은 놈아!’라고 질책했다.”(『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13b15.

師示衆云, ‘不得閑過, 念佛念法.’ 僧乃問, ‘如何是學人自己念?’ 師云, ‘念者是誰?’

學云, ‘無伴.’ 師叱, ‘者驢!’);이렇게 염불하는 자를 돌이켜 살피는 것에 화두에

대한 ‘의심’을 덧붙이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융합시킨 수행법이 선정쌍수(禪淨

雙修)이다. “염불하는 한 소리 혹은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의 소리에 대하여 묵

묵히 돌이켜 물어보라. ‘이 한 소리 내는 부처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또한 ‘이

렇게 염불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어 보라. 의심이 생기면 단지 의심하기

만 하라. 만일 일으킨 물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의심도 절실하지 않을 것이다. 그

럴 때는 다시 ‘필경 이렇게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제기하라.

앞에서 한 의문보다 적게 묻고 적게 의심하더라도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물어라.”(『禪關策進』「智徹禪師淨

土玄門」大48 p.1102b19. 念佛一聲, 或三五七聲, 默默返問. ‘這一聲佛, 從何處起?’

又問, ‘這念佛的是誰?’ 有疑只管疑去. 若問處不親, 疑情不切. 再擧, ‘箇畢竟這念佛

的是誰?’ 於前一問, 少問少疑, 只向念佛是誰, 諦審, 諦問.) 이러한 방법은 태고보우

와 나옹혜근의 선법에도 강하게 나타난다.『太古語錄』권상 韓6 p.679c13.「낙암

거사에게 주는 염불의 간략한 요지에 대한 법어」(『精選 선어록』) 등에 자신의

본성이 아미타불이라는 생각에 근거하여 간단없이 화두를 참구하듯이 자성의 아미

타불을 염하면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의심하는 방법이 제시된다. 또한

『精選 선어록』 나옹어록 「누이에게 답하는 편지」 등에도 염불하다가 마주하는

은산철벽과 같은 경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전형적으로 화두참구법과 염불이 결

합된 양상이 드러난다.

105)『太古語錄』권상 韓6 p.679c11(『精選 선어록』)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라는 60권본 『華嚴經』 권10 大9 p.465c29의 구절을 근거로

자기 본성의 아미타불[自性彌陀]을 염불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과 취지가 같다.

106)『觀無量壽佛經』의 16관(觀) 중 여덟 번째. 부처님 몸의 형상을 관찰하는 상상관

(像想觀)에 속한다.『觀無量壽經義疏』大37 p.243c9 참조.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고,

고요한 맘으로 미타107) 염하라.

평생 꿈속에 생각했던 일,

늘 백련화108)에 있었다네.

合掌向西方 凝心念彌陀

平生夢想事 常在白蓮花

107) 彌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줄임말.

108) 白蓮花 pundarika, kumuda. 서방정토(西方淨土)에 피는 꽃. 음사어는 분다리가

(分陀利迦)이다.『一切經音義』권3 大54 p.324b15에 따르면, 눈이나 은과 같은

광채가 시력을 빼앗을 정도로 밝고 향기도 짙으며, 대부분 아누달지(阿耨達池

Anavatapta)에서 자라고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한다.

염불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금지109)엔 이미 연꽃 심어졌네.

믿는 마음 물러나지 않는다면,

꼭 금선110)을 친견하게 되리라.

念佛纔開口 金池已種蓮

信心如不退 決㝎禮金仙

109) 황금으로 장식된 연못. 서방정토 또는 불국토 일반을 장엄하는 것 중 하나이다.

110) 金仙. mahars 3 3 i, mahesi.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 대선(大仙)·금선(金

僊) 등과 같은 말. 성문(聲聞)·벽지불(辟支佛)·보살(菩薩) 등을 선(仙)이라 부르

고, 부처님은 이 선 중에서 가장 위대하므로 대선 또는 금선이라 한다.『般若燈

論釋』권10 大30 p.99b6 참조.

고요한 마음으로 일몰까지 사바세계 떠나서,

십육관경111)에서 석가모니불의 법문 들어라.

무한한 색과 소리로 눈과 귀 깨끗이 씻으면,

수많은 천지만물이 하나의 미타일 뿐이리라.

凝心日沒謝娑婆 十六觀經聽釋迦

無限色聲淸耳目 許多天地一彌陀

111) 十六觀經.『觀無量壽佛經』의 다른 이름. 이 경전이 16가지 관상법(觀想法)을 핵

심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곧 일상(日想), 수상(水想), 지상(地想), 보수

(寶樹), 보지(寶池), 보루(寶樓), 화좌(華座), 상상(像想), 진신(眞身), 관음(觀音),

세지(勢至), 보관(普觀), 잡상(雜想), 상배생상(上輩生想), 중배생상(中輩生想), 하

배생상(下輩生想) 등을 가리킨다.

서방을 그리며 염불하는 법,

반드시 생사를 넘어서리라.

마음과 입이 상응한다면,112)

짧은 순간 정토 왕생하리.

한 찰나에 연꽃을 밟거늘,

누가 8천 리라 말하는가?113)

공을 이루고 목숨 마칠 때,

아미타불이 그대를 맞이하리라.114)

西方念佛法 決㝎超生死

心口若相應 徃生如彈指

一念踏蓮花 誰道八千里

功成待命終 大聖來迎爾

112) 심구상응(心口相應).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는 칭(稱)과 마음으로 부단하게 생

각하는 염(念)이 어긋나지 않고 부합하는 경계를 말한다.『선가귀감』주석227)

과「염불문(念佛門)」참조.

113) ‘연꽃을 밟는다’는 말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8천 리라는 말

은 서방정토가 사바세계로부터 10만 8천 리의 거리에 있다는 관념에 따른다.

“또한 ‘서방정토는 이곳에서 10만 8천 리의 거리에 있다’라고 한다. 이것 또한 4

천축(天竺)을 서방이라 오인해서 생긴 말이다. 경에 ‘이 서방으로부터 10만억 불

국토를 지나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10만 8천 리의 거리

에 그치겠는가!”(『觀無量壽佛經義疏』권상 大37 p.284b29. 又云, ‘西方去此十

萬八千里.’ 此亦誤以四竺爲西方也. 經云, ‘從此西方, 過十萬億佛土, 有世界名曰

極樂.’ 豈止十萬八千乎!);『阿彌陀過渡人道經』권상 大12 p.304b6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욕지(浴池)는 길이와 너비가 모두 4만 8천 리라 하며, 7보로 장식되

어 있고 향기로운 물이 가득하며 갖가지 꽃이 피어 있다고 한다.

114) “저 수행자가 임종하려고 할 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이 모든 권

속과 함께 금련화를 들고 5백의 화신불로 변화하여 이 사람을 맞이한다.”(『觀無

量壽經』大12 p.345a24. 彼行者, 命欲終時, 阿彌陀佛, 及觀世音, 幷大勢至, 與諸

眷屬, 持金蓮華, 化作五百化佛, 來迎此人.)

참선이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참선이라.

본성은 방편을 모두 벗어나,

밝디밝고 매우 고요하다네.

叅禪卽念佛 念佛卽叅禪

本性離方便 昭昭寂寂然

교가오십오위敎家五十五位115)

115) 간혜지(乾慧地),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사가행(四

加行), 난위(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 십지(十地)의 오

십오위를 말함. “이와 같이 겹겹으로 단·복의 열두 과위를 닦아가야 비로소 묘

한 깨달음을 다하여 무상의 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지가지의 과위마다

에서 모두 금강의 마음으로 환(幻)과 같은 열 가지 깊은 비유를 관찰하고 사마

타(奢摩他) 가운데서는 모든 여래의 바른 지혜로 대상의 본질을 관찰하여[毘婆

舍那] 청정하게 닦고 증득하여 점차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모두 세 가지 증진수행법을 쓰기 때문에 훌륭하게 오십오위의 진실한 보리의

길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楞嚴經』 권8 大19 p.142c22. 如是重重, 單複十二, 方

盡妙覺, 成無上道. 是種種地, 皆以金剛, 觀察如幻, 十種深喻, 奢摩他中, 用諸如來, 毘

婆舍那, 淸淨修證, 漸次深入. 阿難, 如是, 皆以三增進故, 善能成就五十五位眞菩提路.)

오십오위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을 쉬고 망상을 제거한 뒤

에 얻는 과위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과위[佛果]를 다 완성하기도

전에 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적은 것을 얻고도 만족스럽게 생각하여 자신

이 얻은 법에 대해 다 안다는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대각(大

覺)에 들어가면 앞에서 밟아온 과위가 모두 허깨비와 같아서 쓸모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오십오위를 밟지 않으리

라”116)고들 말하는 것이다.

五十五位者, 但息心除妄之後得果. 所以未滿位前, 若到一級,

則得少爲足, 生知解法慢. 末後入大覺, 前之曆117)位, 悉是幻

化, 無可用處. 故祖師云, 寧死不踐五十五位, 云云.

116)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다. 돈오(頓悟)의 입장이 드러난다.

117) 曆자는 다른 판본에는 歷자로 되어 있다.

교외별전곡敎外別傳曲

부처님께서 꽃을 집어 들자 가섭이 파안미소로 답한118) 이래로 입 밖으

로 드러내신 말씀을 다시 입으로 후세에 전한 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달마대사의 ‘확연무성’,119) 육조 혜능(慧能)의 ‘선이라고도 생

각지 말고 악이라고도 생각지 마라’,120) 남악회양(南岳懷讓)의 ‘수레가 가

지 않는다면 소를 채찍질해야 하리’,121) 청원행사(靑原行思)의 ‘여릉의 쌀

값’,122)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려라’,123)

두희천(石頭希遷)의 ‘불법을 모른다’,124) 운문문언(雲門文偃)의 ‘호떡’,125)

조주종심(趙州從諗)의 ‘차나 마시게’,126) 투자대동(投子大同)의 ‘기름 사

려’,127) 현사사비(玄沙師備)의 ‘석 장의 백지 편지’,128) 설봉의존(雪峰義存)

의 ‘공을 던지다’,129) 화산무은(禾山無殷)의 ‘북을 두드릴 줄 안다’,130) 신산

승밀(神山僧密)의 ‘체질합니다’,131) 도오원지(道吾圓智)의 ‘춤추기’132)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과거 부처님과 선대 조사들이 똑같이 부른 교외

별전의 곡이다.

世尊拈花, 迦葉破顔, 乃至, 出於口而傳之於後, 曰, 達摩廓然

無聖, 六祖善惡不思, 讓師車滯鞭牛, 思師廬陵米價, 馬祖吸盡

西江, 石頭不會佛法, 雲門胡餠, 趙州喫茶, 投子沽油, 玄沙白

紙, 雪峯輥毬, 華133)山打鼓, 神山鼓羅, 道悟134)作舞. 斯等先佛

先祖, 同唱敎外別傳之曲也.

118) 가섭파안미소(迦葉破顔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

전(敎外別傳) 등의 취지를 대표하는 이야기. “부처님께서 영추산의 법화회상(法

華會上)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대중이 모두 말이 없었으나 오직 가

섭만이 파안미소를 지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正法)을 간직

한 눈·열반의 현묘(玄妙)한 마음·형상을 벗어난 진실한 상·미묘한 법문 등이

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교(敎) 밖에 별도로 전하니,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聯燈會要』 권1 卍136 p.440b18. 世尊, 在靈山會上, 拈花示衆,

衆皆默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119) 廓然無聖. ‘확연’이란 드넓게 트여 한 점도 걸릴 장애가 없고 모든 대립과 상대

적인 짝이 사라진 대오(大悟)의 경계를 형용하는 말이다. ‘무성’이란 그러한 경

계에는 성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최고의 진리는 일체의 분별을 넘어서므

로 성(聖)과 속(俗) 또는 성(聖)과 범(凡)의 차별도 없는 도리를 나타낸다. “양무

제가 ‘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달마가 ‘드넓게

트였으니 성스러운 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景德傳燈錄』 권3 「達磨傳」 大51

p.219a27. 帝, 又問, ‘如何是聖諦第一義?’ 師曰, ‘廓然無聖.’) 성과 속을 나누어 보는

양무제의 집착을 달마가 타파하기 위해 던진 말이다.

120) 선악불사(善惡不思). 본래의 온전한 구절은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다.

혜능이 행자의 신분으로 5조 홍인(弘忍)으로부터 6조로 인가를 받아 달마 이래

로 조사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를 지니고 대유령(大庾嶺)을 넘어가다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좇아오던 도명(道明)에게 주었던 화두이다. 종보본(宗寶本) 『壇經』

大48 p.349b14에 따르면, 그 당시 도명은 혜능이 바위에 던져 놓은 의발을 집어

들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자 겁을 먹고는 의발이 욕심이 나서 좇아온 것이

아니라 5조로부터 받은 법을 알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혜능이 그 전후의

사정을 모두 간파하고 그에 적절한 문제를 던진 것이 바로 이 화두이다. 곧 의발

을 빼앗으려 했던 애초의 악한 마음과 그 뒤에 법을 구하겠다고 한 선한 마음을

소재로 삼아 그 현장에 가장 적절한 화두로 도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 뒤에

바꾼 마음을) 선하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이전의 마음을) 악하다고도 생각하지

마라. 바로 이럴 때 어떤 것이 명상좌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여기에서 ‘본래면목’이라는 말이 최초

로 사용되어 이 공안이 후대에 활용될 때는 본래면목과 불가분하게 연결시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121) 거체편우(車滯鞭牛). 남악마전(南嶽磨磚)으로 잘 알려진 화두. 남악회양(677~

744)이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편벽된 좌선수행을 깨우쳐 주기 위한 수

단으로 벽돌을 갈았던 이야기에서 비롯하였다. “당나라 때 회양선사가 남악혜

사(南嶽慧思)의 옛터에서 암자를 짓고 있었다. 마조도일이 그 옆에서 오랫동안

좌선을 하고 있었고, 회양은 이따금 벽돌을 갈고 쪼았다. 마조가 회양에게 물었

다. ‘벽돌을 갈아 무엇에 쓰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

돌을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든단 말입니까?’ ‘벽돌로 거울을 만들 수 없을진대

좌선을 하여 어떻게 도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마조가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

다. ‘그렇다면 필경에는 어떻게 해야 옳은 것입니까?’ ‘예컨대 수레를 타고 있는

자가 있다고 하자.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채찍질해야 옳겠는가, 소를 채

찍질해야 옳겠는가?’ 마조는 이 말에 확연히 깨우쳤다.”(『南嶽總勝集』 권중

「福嚴禪寺」大51 p.1070c18. 有唐懷讓禪師, 結菴于思之故基. 有道一和尚, 坐

禪于側久之, 讓往以磚磨而激之. 一謂讓曰, ‘磨磚何用?’ 曰, ‘爲鏡.’ 一曰, ‘磚如

何得作鏡?’ 讓曰, ‘磚旣不能作鏡, 坐禪如何成道?’ 一異之曰, ‘畢竟如何卽是?’

讓曰, ‘謂如乘車者, 車旣不行, 鞭車則是, 鞭牛則是?’ 一決然開悟.);『馬祖語錄』

卍119 p.810a5 참조.

122) 여릉미가(廬陵米價). 여릉은 중국의 여릉현(廬陵縣)으로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인데 좋은 쌀의 산지로 유명하다. 청원행사(靑原行思 ?~741)가 불법의 대의를 묻

는 학인에게 일상과 직접 관련된 쌀값을 묻는 말로써 대답하여 크다·작다, 많

다·적다, 싸다·비싸다는 등의 구분과 분별을 제거하도록 던져준 화두이다. “‘불

법의 근본적인 뜻은 어떤 것입니까?’ ‘여릉 지방의 쌀값이 얼마인가?’”(『景德傳燈

錄』 권5 「靑原行思傳」大51 p.240c3.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廬陵米作麽價?’)

123) 마조흡진서강(馬祖吸盡西江). 마조도일과 방거사(龐居士) 사이에 있었던 문답

을 소재로 한 공안. 방거사가 어떤 존재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립한 사람[不與萬

法爲侶者]에 대해 묻자 마조가 서강의 물을 한입에 모두 마시면 말해 주겠다고

하여 분별할 여지를 완전히 빼앗는 파주(把住)의 방법을 써서 뜻을 전한 문답

에서 비롯한 화두이다. “방거사가 후에 강서로 가서 마조대사를 만나 참문하였

다.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는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한입에 서강

의 물을 모두 마시면 말해 주겠다.’ 방거사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깊은 뜻을 알

아차렸다.”(『龐居士語錄』 권상 卍120 p.55a13. 居士, 後之江西, 參馬祖大師.

問曰, ‘不與萬法爲侶者, 是什麽人?’ 祖曰, ‘待汝一口, 吸盡西江水, 卽向汝道.’

士於言下, 頓領玄旨.);『馬祖廣錄』 卍119 p.815b1 참조.

124) 석두불회불법(石頭不會佛法). “어떤 학인이 석두에게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

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노주에게 물어보라.’ ‘저는 모르겠습니다.’ ‘나도 또

한 모른다.’”(『聯燈會要』 권19 「石頭希遷章」 卍136 p.738a3. 問, ‘如何是祖

師西來意?’ 師云, ‘問取露柱.’ 云, ‘某甲不會.’ 師云, ‘我更不會’)

125) 운문호병(雲門胡餠). 胡는 餬자로도 쓴다.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물었다. ‘부처

와 조사를 초월한 말이란 어떤 것입니까?’〈(입이) 열렸구나. 가뭄에 천둥 치는 듯

한 소식이다. 쥐어틀어라!〉 운문은 ‘호떡!’이라고 답하였다.〈혀를 입천장에 붙여라!

잘못이다.〉”(『碧巖錄』77則「本則」大48 p.204b11. 僧問雲門, ‘如何是超佛越

祖之談?’〈開. 旱地忽雷. 拶!〉 門云, ‘餬餅!’〈舌拄上齶! 過也.〉)

126) 조주끽다(趙州喫茶). 혹은 끽다거(喫茶去)라고도 한다. “조주종심선사가 처음

찾아온 이에게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와 본 일이 있습니

다’라 답했고, 조주는 ‘차나 마시게’라고 하였다. 같은 질문을 다른 스님에게 하

자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조주는 이번에도 역시 ‘차나 마시게’라

고 하였다. 후에 원주(院主)가 물었다. ‘어째서 와 보았다고 해도 차나 마시라 하

시고, 와 보지 않았다고 해도 차나 마시라고 하십니까?’ 조주가 ‘원주!’ 하고 부

르자 원주가 ‘예’라고 대답하니 ‘자네도 차나 마시게’라고 하였다.”(『五燈會元』

권4「趙州從諗章」 卍138 p.131b17. 師問新到, ‘曾到此間麽?’ 曰, ‘曾到.’ 師曰,

‘喫茶去.’ 又問僧, 僧曰, ‘不曾到.’ 師曰, ‘喫茶去.’ 後院主問曰, ‘爲甚麽曾到, 也云,

喫茶去, 不曾到, 也云, 喫茶去?’ 師召院主, 主應喏, 師曰, ‘喫茶去.’)

127) 투자고유(投子沽油).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과 조주종심(778~897) 사이의

문답에서 유래한 화두. “투자산에 머물며 띠풀을 엮어 만든 초옥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조주종심이 동성현에 이르렀는데 투자도 산을 내려왔다가 도중에 서로

마주쳤으나 아직 면식은 없는 상태였다. 조주가 속인에게 나지막이 물어보고는

그가 투자임을 알고는 이에 몸을 돌려 물었다. ‘투자산의 주인이 아닌가?’ ‘한 푼

주시오.’ 조주가 먼저 암자에 도착하여 앉아 있는데 투자가 뒤따라 기름 병 하나

를 들고 암자로 돌아왔다. 조주가 물었다. ‘오래전부터 투자의 명성을 익히 들어

왔는데 와서 보니 한낱 기름 파는 늙은이로고.’ ‘그대는 단지 기름 파는 늙은이

만을 보았을 뿐 투자는 알지 못하는구려.’ ‘어떤 것이 투자인가?’ ‘기름 사려! 기

름 사려!’”(『景德傳燈錄』 권15 「投子大同傳」 大51 p.319a5. 隱投子山, 結茆

而居. 一日, 趙州諗和尚, 至桐城縣, 師亦出山, 途中相遇, 未相識. 趙州潛問俗士,

知是投子, 乃逆而問曰, ‘莫是投子山主麽?’ 師曰, ‘茶鹽錢乞一箇.’ 趙州卽先到庵

中坐, 師後携一缾油歸庵. 趙州曰, ‘久嚮投子, 到來只見箇賣油翁.’ 師曰, ‘汝只見

賣油翁, 且不識投子.’ 曰, ‘如何是投子?’ 師曰, ‘油! 油!’);『投子語錄』 古尊宿

語錄36 卍118 p.622b4;『五燈會元』 권5 「投子大同章」 卍138 p.189a10;

『祖庭事苑』권4 卍113 p.114a6;『聯燈會要』권21 卍136 p.775b7 등 참조.

128) 현사백지(玄沙白紙). “현사가 학인을 시켜 설봉에게 편지를 올리게 했다. 설봉

이 받아 뜯어보니 단지 석 장의 백지가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편지를 들어 보이

며 학인에게 물었다. ‘알겠느냐?’ 그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설봉이 말했다.

‘군자는 천 리의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뜻을 같이 나눈다는 말을 모르느

냐!’ 학인이 이 일을 현사에게 전하자 현사가 말했다. ‘산두(설봉) 노화상이 모르

고 지나쳤다는 것도 모르는구나.’ ‘스님의 높은 뜻은 무엇입니까?’ ‘초봄에는 여

전히 춥다는 것도 모르느냐!’”(『玄沙廣錄』 권하 卍126 p.389b16. 師, 令僧持

書上雪峰. 雪峰開, 只見三張白紙. 遂拈起問僧云, ‘還會麽?’ 僧云, ‘不會.’ 峰云,

‘不見道, 君子千里同風!’ 僧擧似師, 師云, ‘山頭老漢, 蹉過也不知.’ 云, ‘未審和

尚尊意如何?’ 師云, ‘孟春猶寒, 也不解道!’);『雪峰語錄』 권하 卍119 p.965a2

참조.

129) 설봉곤구(雪峯輥毬). “설봉이 현사에게 말했다. ‘나는 때때로 온전한 작용을 그

대로 가지고서 세 개의 나무 공을 한꺼번에 던진다. 온전하게 다 가지고 싶은

가?’ ‘화상께서 던진 다음에 만일 어떤 학인이 나와서 「화상이시여, 공을 조심하

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가?’

‘저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렵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본분을 벗

어나는 것이 아닙니다.’”(『雪峰語錄』 권하 卍119 p.963a13. 師謂玄沙云, ‘我

時時全機提持, 把三個木毬一時抛. 要全提去?’ 沙云, ‘和尙抛後, 忽被個師僧出來

道,「和尙, 看毬!」 又作麽生?’ 師云, ‘道什麽?’ 沙云, ‘某甲卽不與麽.’ 師云, ‘汝

作麽生?’ 沙云, ‘也未是分外.’);“법좌에 올라 말하였다. ‘대지 전체가 하나의 해

탈문이거늘 손을 잡고 끌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구나.’ 이때 한 학인이 나와 말

하였다. ‘화상께서는 제가 그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또 다른

학인이 말하였다. ‘들어가서 무엇 하시렵니까?’ 설봉이 바로 때렸다. 현사가 말

하였다. ‘제가 지금 제 역량을 남김없이 다 발휘해버린다면 화상께서는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이에 설봉은 세 개의 나무 공을 한꺼번에 던졌고, 현사는 패

를 쪼개는 시늉을 해 보였다. 설봉이 말하였다. ‘그대는 영산회상에 직접 있었

기 때문에 비로소 이와 같은 경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기

자신의 일일 뿐입니다.’”(『五燈會元』 권7 「雪峰義存章」 上堂, ‘盡大地是箇

解脫門, 把手拽伊不肯入.’ 時一僧出曰, ‘和尚怪某甲不得!’ 又一僧曰, ‘用入作甚

麽?’ 師便打. 玄沙謂師曰, ‘某甲如今大用去. 和尚作麽生?’ 師將三箇木毬一時拋

出, 沙作斫牌勢. 師曰, ‘你親在靈山, 方得如此.’ 沙曰, ‘也是自家事.’);『玄沙

廣錄』 권중 卍126 p.372a11 참조.

130) 화산타고(禾山打鼓).『선가귀감』주석447) 참조.

131) 신산고라(神山鼓羅). 신산타라(神山打羅)라고도 하며, 羅는 鑼로도 쓰인다. “신

산이 남전 문하에서 수좌로 있을 때 체질을 하고 있었다. 남전이 물었다. ‘무엇

을 하고 있는가?’ ‘체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손으로 체질을 하는가, 발로

체질을 하는가?’ ‘화상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기억하라. 후에

눈 밝은 작가종사를 만나거든 단지 이렇게만 들려 주거라.’〈운암이 대신 말한다.

‘손도 발도 없어야 비로소 체질을 할 수 있다.’〉”(『景德傳燈錄』 권15 「神山僧

密傳」大 51 p.323b26. 師在南泉, 打羅次, 南泉問, ‘作什麽?’ 師曰, ‘打羅.’ 曰,

‘汝以手打脚打?’ 師曰, ‘却請和尚道.’ 南泉曰, ‘分明記取. 向後, 遇明眼作家, 但

恁麽擧似.’〈雲巖代云, ‘無手脚者, 始解打.’〉)

132) 도오작무(道吾作舞). 도오홀무(道吾笏舞) 또는 도오무홀(道吾舞笏)이라고도 한

다. 도오원지(道吾圓智)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한 학

인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홀을 들고 춤을 추어보인 일화에서 비롯한 화

두. “〈『오등회원』권4〉보유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곤주 관남의 도오화상에

게 한 학인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도오는

홀을 들고 읍하고서는 「예.」라고 응답했다.’ 운정산의 덕부선사가 게송을 읊었

다. ‘예나 지금이나 그 큰 뜻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오원지가 홀을 휘두

르며 춤을 추어보인 뜻은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야 알 수 있고, 석공

혜장(石鞏慧藏)이 활시위를 당긴 뜻은 본분을 깨달은 작자라야 알 수 있다.’〈『경

덕전등록』 권29에 전한다.〉”(『禪苑蒙求』권상「道吾舞笏」卍148 p.219a13.

〈會元 四〉和補曰, 衮州關南, 道吾和尚,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以簡〈笏也〉

揖曰, ‘喏.’ 雲頂山, 德敷禪師頌, ‘古今大意曰, 道吾舞笏同人會, 石鞏彎弓作者諳.’

〈傳灯廿九〉)

133) 華는 禾가 옳다.

134) 悟는 吾가 옳다.

대체로 보건대 선과 교에서 모두 방편을 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부처

님께서는) 하나의 기틀을 별도로 전하기 위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셨

고, 상중하 세 근기를 위해 생애에 걸쳐 일체의 가르침을 설하셨다.135)

에 조사가 나와 부처에 대한 견해와 법에 대한 견해를 모두 꺾어버린 것

은 사실 교의 뜻을 돋워 일으킨 것이지 교를 비난하여 헐어 부순 것은 아

니다. 그러므로 운문이 ‘개에게 먹이로 주었으리라’136)고 한 말은 부처님

의 은혜를 갚은 것137)이니, 바로 심인(心印)을 가리켜 보인 것일 뿐 별다른

방편을 쓴 것이 아니다.

大抵禪敎, 皆是似言方便. 爲別傳一機, 三處傳心, 爲三種根

機, 一代所說. 於是, 祖師出來, 摧佛見法見者, 實是挑出敎意,

非毁敎也. 故云, 雲門喫狗子, 報佛恩也, 直指心印無方便.

135)『선가귀감』5 참조.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이고,

생애에 걸쳐 설하신 일체의 가르침은 교문(敎門)이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136) “내가 당시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이고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을 도모하였을 것이다.”(『雲門廣錄』권중 大47 p.560b17. 我當時

若見,一棒打殺, 與狗子喫却, 貴圖天下太平.);『禪門拈頌說話』 2則 「세존주행

(世尊周行)」 참조.

사조(四祖)가 “그대들은 하루 어느 때나 항상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이 곧 자신의 마음임을 믿어라. (달마대사가 인도에

서 중국에 이르러) 최상의 일심법을 전하신 것은 개오(開悟)의 방법을 여

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대들 중 법을 구하는 자라면 구한다는 마

음조차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별도의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 밖

에 별도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38)라고 하였다. 참된 마음

은 선이나 악이나 모두 대상으로 삼지 않으니,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

람은 근기가 천하고, 시비를 다투는 사람은 두루 통하지 못하며, 부딪히

는 모든 대상경계에서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선정(禪定)에 들기 어렵

고, 적막하기만 하여 마음의 활발한 작용을 잊은 자는 지혜가 가라앉으며,

오만하며 자만심에 찬 사람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세고, 공에 집착하거나

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으며, 문자에 파고들어 깨달음을 얻고

자 하는 사람은 더욱 막히게 될 뿐이다. 고행을 무릅써가며 부처가 되기를

구하는 자는 외도요, 마음이 곧 부처라고 집착하는 자는 마군이니,139) 마음

을 일으키는 것은 천마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음마요, 일으키기도

하고 일으키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140) 그러나 우리의 정법 가운

데는 본래 이와 같은 일은 없다. 그대들은 본분사를 알아채고 금강검을 호

쾌히 빼어 들기 바라노라. 일념 중에 깨달음의 빛을 돌이키면 만법이 모두

헛것임을 알게 될 것이요, 그 헛것이 또한 병인 줄 알면 한 찰나에 내려놓

아야 하리라.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면 본래의 천진한 면목 나타날 것이다.

四祖云,“ 汝等十二時中, 信自心卽是佛心, 佛心卽是自心. 最

上一心法, 傳之開悟. 汝等求法者, 應無所求, 心外無別佛, 佛

外無別心也.” 眞心不緣善惡, 嗜欲深者根淺, 是非交爭者未

通, 觸境生心者少定, 寂寞忘機者慧沈, 傲物高心者壯我, 執空

執有者皆愚, 尋文取證者益滯. 苦行求佛者爲外, 執心是佛者

爲魔, 起心是天魔, 不起心是陰魔, 或起或不起, 是煩惱魔. 然

我正法中, 本無如是事. 請君知介事, 決141)提金剛刃. 回光一念

中, 萬法皆成幻. 成幻又成病, 一念須放下. 放下又放下, 舊來

天眞面.

138) 마조(馬祖)의 말이다. 본문에서 사조(四祖)라 한 것은 마조의 오식으로 보인다.

“마조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 모두는 각자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요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달마대사가 남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러 최

상승의 일심법을 전한 것은 그대들에게 깨달음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

『능가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을 인증한 것은 그대들이 전도되어 이

일심법을 각자가 본래 구유하고 있음을 믿지 못할까 걱정해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능가경』에도「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고, 별다른 문이

없음을 법문으로 한다」고 하였다. 법을 구하는 자라면 구한다는 마음조차 없어

야 하니, 마음 밖에 별도의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 밖에 별도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馬祖語錄』 卍119 p.810b18. 祖示衆云, ‘汝等諸人,

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 達磨大師, 從南天竺國, 來至中華, 傳上乘一心之法, 令汝等

開悟. 又引楞伽經, 以印衆生心地, 恐汝顚倒不信, 此一心之法, 各各有之. 故楞伽經,

「以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 夫求法者, 應無所求, 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

139) ‘참된 마음은 선이나 악이나’라는 구절부터 ‘집착하는 자는 마군이니’라는 구절

까지는 마조의 제자인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眞心不緣善惡’

앞에 ‘태허는 신령한 지혜를 일으키지 않는다(太虛不生靈智)’는 구절이 더 붙어

있다(『景德傳燈錄』 권6 「大珠慧海傳」 大51 p.247c27. 師曰, ‘太虛不生靈智,

眞心不緣善惡, 嗜欲深者機淺, 是非交爭者未通, 觸境生心者少定, 寂寞忘機者慧沈,

傲物高心者我壯, 執空執有者皆愚, 尋文取證者益滯, 苦行求佛者俱迷, 離心求佛者

外道, 執心是佛者爲魔.);『五燈會元』 권3 卍138 p.105a16;『五燈全書』 권6

卍140 p.257b14 참조.

140) 이 또한 대주혜해의 말이다.『景德傳燈錄』권28「大珠慧海傳」大51 p.442a12

참조.『선가귀감』주석111) 참조.

(141) 決은 快자의 오식(誤植)으로 보인다.

초발심보살의 수행初發心菩薩修行142)

142)『景德傳燈錄』권6「百丈懷海傳」大51 p.250a26 이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경전적 근거는 80권본『華嚴經』권17 大10 p.91c24에 보인다.

어떠한 때에도 일체의 선과 악·더러움과 깨끗함·유위와 무위·세간과

출세간의 복덕과 지혜에 구속당하지 않는 것을 불지혜(佛智慧)라고 한다.

옳음과 그름·아름다움과 추함·이치에 맞음과 이치에 어긋남 등 모든 지

견과 정식(情識)이 남김없이 사라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경계에서 이

마음이 자유자재한 것을 초발심보살의 수행이라고 한다.

一切時中, 不被一切善惡, 垢淨, 有爲無爲, 世出世間福德智慧

之所拘繫, 名爲佛智慧. 是非好醜, 是理非理, 諸知見情盡, 不

能繫縛處, 是心自在, 名初發心菩薩修行.

대승인의 수행大乘人修行143)

143) “일체의 소리와 색을 뛰어넘어 막힘과 장애가 있지 않는 자를 도인이라고 한

다.”(『景德傳燈錄』권6「百丈懷海傳」大51 p.250a25. 透一切聲色, 無有滯礙,

名爲道人.)는 문장을 응용한 것이다.

어떠한 소리와 색에 대해서도 막힘과 장애가 있지 않고 선과 악·옳음

과 그름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여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버리지

도 않는 것을 대승인의 수행이라고 한다.

一切聲色, 無有滯碍, 善惡是非, 但不運用, 不受一切法, 亦不

捨一切法, 名 爲大乘人修行.

선가에서는 지해라는 두 글자가 가장 큰 병禪家知解二字最爲病

지해는 불법(佛法)의 근본적인 병이다.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조계혜능

(曹溪慧能)의 서자(庶子)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44)『유마경』에서 문

수사리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마거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치

운’ 일화145)와『법화경』에서 궁자(窮子)가 자신의 아버지인 장자의 집에서

‘거름 치고 삯을 받은’ 일화146)는 모두 이 지해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해가 정견(正見)에 장애가 되는 것은 흡사 잘된 밥으로 아귀에게 제사

지낸 것147)과 같으며 더러운 물로 마음의 밭을 오염시키는 것148)과 같으니,

조주의 무자화두를 살피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知解者, 佛法之大病也. 荷澤爲曺溪之孽子者, 以此也. 維摩經

云, ‘除去所有.’ 法華經云, ‘除糞取價.’ 皆此知解處也. 是故

知解之碍正見, 一似餿飯之祭餓鬼;一似惡水之汚心田也, 不

如看趙州無字也.

144)『壇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 근거한다. “하루는 혜능이 대중에게 말하

기를 ‘나에게 하나의 그 무엇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

고 명칭도 없으며, 뒤도 없고 앞도 없다. 여러분은 알겠는가?’라고 하자 신회가

나와서 말했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신회의 불성입니다.’ ‘그대에게

이름도 없고 명칭도 없다고 말했건만 그대는 다시 또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

부르느냐! 그대가 앞으로 대중을 이끄는 지위에 서는 일이 있더라도 단지 지해

를 근본으로 삼는 무리[知解宗徒]가 될 뿐이리라.’”(宗寶本 『壇經』 大48 p.359b29.

一日, 師告衆曰, ‘吾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無背無面. 諸人還識否?’ 神會出曰,

‘是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師曰, ‘向汝道無名無字, 汝便喚作本源佛性! 汝向去有把

茆蓋頭, 也只成箇知解宗徒.’);『法集別行錄節要』 韓4 p.741a3 참조.

145) “그때 유마힐장자가 마음속으로 ‘지금 문수사리와 대중이 함께 온다고 하니 신

통력으로 방 안을 비워야겠구나’라고 생각하고서,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치우

고 시자들마저 내보냈다. 그리고 오직 침상 하나만 놓아둔 채 앓는 척 누워 있었

다.”(『維摩經』권중 大14 p.544b9. 爾時長者維摩詰心念, ‘今文殊師利, 與大衆

俱來, 卽以神力, 空其室內.’ 除去所有, 及諸侍者, 唯置一床, 以疾而臥.)

146) “그때 궁자는 장자의 집에 가서 먼저 삯을 받고서 거름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

는 아들을 보고 가엾이 여기면서도 달아나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루는 창틈으

로 먼발치에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야위어 초췌했으며 온통 거름과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法華經』 권2 「信解品」 大9 p.17a12. 爾時, 窮

子先取其價, 尋與除糞. 其父見子, 愍而怪之. 又以他日, 於窓牖中, 遙見子身, 羸

瘦憔悴, 糞土塵坌, 汚穢不淨.)

147) “수보리가 무설(無說)을 제창하여 도를 드러냈으니 잘된 밥으로 별 볼일 없는

귀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과 같다.”(『大慧語錄』권9 大47 p.847a29. 須菩提

唱無說, 以顯道, 餿飯祭閑神.)

148)『湛然圓澄語錄』권2 卍126 p.189b18 참조.

상근대지가 스스로 깨달은 경계上根大智自悟處

부모님은 나와 가깝지 않다.149) 그러면 누가 가장 가까운 자인가? 눈먼

거북과 절뚝발이 자라가 가장 가깝다. 여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도(道)

는 나의 도가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도가 가장 좋은 도인가? 그대의 도가

그대 마음과 가장 가깝다. 장부는 본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를 가지고

있어 여래께서 다니신 곳을 따라서 가지 않는 법이다.150)

父母非我親. 誰是最親者? 盲龜跛鱉親. 諸佛非我道. 誰是最

道者? 汝道與心親. 丈夫自有衝天志, 不向如來行處行.

149) “부모님은 나와 가깝지 않으며, 여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도(道)는 나의 도가 아

니다. 본색을 갖춘 납승은 여기에 이르러야 한 가닥 살 길이 생겨날 것이다.”(『宏

智廣錄』권1 大48 p.5c13. 父母非我親, 諸佛非我道. 本色衲僧, 到這裏, 有一條活路.)

150)『景德傳燈錄』권29「同安常察 十玄談」大51 p.455b16 참조.

사람은 모두 본래부터 태평하다人人本太平

몽둥이질 하는 곳에서 증득의 단서를 얻으려 하면 덕산(德山)의 속뜻을

저버리는 짓이고, 할하는 소리에 알아차리려고 한다면 임제(臨濟)의 속뜻

을 매몰시키는 짓이다.151) 하물며 쓸데없는 말들을 끌어다 이러니저러니

떠들며 산승의 입을 더럽히고 선수행자의 귀를 막는 것에 대해서야 다시

말해 무엇 하겠는가?〈양구(良久)>152) 여기저기 분을 칠하고 바른 얼굴을 어

찌 꾸밈없는 그대로의 얼굴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捧頭取證, 辜負德山;喝下承當, 埋沒臨濟. 況復牽枝引蔓, 橫

說竪說, 汚却山僧口, 塞却禪子耳?〈良久〉 東塗與西抹, 豈似天

眞面目?

151) 방이나 할 자체에 깨달음의 단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추구해 들어가는 것

을 경계하는 말이다. “방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은 그 진실한 뜻에 흙과 모

래를 뿌려 더럽히는 짓이며, 할에서 알아차리려는 것은 허공을 따라가 메아리

를 잡으려는 허망한 짓이다.”(『圜悟語錄』권2 大47 p.720a5. 棒頭取證, 撤土

撒沙;喝下承當, 承虛接響.)

당사자 스스로 수긍하여 깨닫는 경계當人自肯悟處

배우는 자는 반드시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곳에 스스로 도달하여, 3세의 모든 부처님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오고, 역

대의 조사들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오며, 삼계의 중생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게 충분히 참구하

다 당사자가 홀연히 말없는 가운데 계합하여 스스로 수긍하고 스스로 깨

달으면 지혜의 빛이 밝게 일어나 칠통153)을 깨뜨리게 되리니, 그런 다음에

야 비로소 입문할 수 있다.

學者, 須自到思量不及, 言語不及處, 但提擧, 不知三世諸佛,

從何處出;曆代祖師, 從何處出;三界衆生, 從何處來耶? 久

久, 當人忽然黙契, 自肯自悟, 慧光發明, 打破漆涌, 然後, 始

得入門.

153) 漆桶. 시커먼 통.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앞부분에 나온

생각과 언어로 미치지 못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두를 말한다.

부처님이 설한 삼구佛說三句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154) 이 제1구이고, 화엄교의 삼전(三轉)155) 방편

이 제2구이며, 평생 설한 가르침156)이 제3구이다. 자성(自性)에 본디 범부와

성인이라는 대립된 두 가지 견해가 없으니, 두 가지 견해를 놓아버리면 일

념(一念)만이 홀로 우뚝 나타난다. 눈앞에 드러난 일념은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고, 하나의 법이며, 신령스럽게 아는[靈知] 마음이다.

중생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상(相)에 빠진 채 부처를 구하기 때문에

부처는 서방의 정토에 있고 자기 자신은 동방의 예토(穢土)에 있다고 여

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성의 아미타불157)과 서방의 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성립된 것이니,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이러한 견해에 빠져서는 안 된다.

三處傳心第一句;華嚴三轉方便第二句;一代所說第三句.

自性中, 本無凡聖二見, 二見放下, 一念獨立. 現前一念者, 人

人本源心, 亦是一法, 亦是靈知之心. 衆生心外覓佛, 滯相求

佛故, 佛在西我在東. 於此立名, 自性彌陀西方彌陀, 願學者,

不落此見.

154) 삼처전심(三處傳心).『선교석』주석17) 참조.

155) 종밀(宗密)의『華嚴經行願品別行疏鈔』권4 卍7 p.924a14에 나온다. 종밀에 따르

면 법에 대해 가르침을 펼치는 시상전(示相轉)·권수전(勸修轉)·인증전(引證轉)

등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시상전은 법상을 교시하는 것이고, 권수전은 그 법에

대해 수행하기를 권장하는 것, 인증전은 열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156) 보통 3승12분교(三乘十二分敎)라고 한다. 3승은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

乘)·보살승(菩薩乘)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각각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

이 그 근기에 따라 펼치는 교법과 수행법에 3승의 차별을 두었으며 각 근기에

적절한 교법과 수행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증과(證果) 또한 다르다고 주장한다.

십이분교는 부처님의 교설을 그 성격과 형식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한 것인데,

수다라(修多羅)·기야(祇夜)·수기(授記)·가타(伽陀) 등이다.

157)『선가귀감』주석246) 참조.

법에는 본래부터 병이라는 귀신이 없다法中本無病鬼 158)

158)『懶翁語錄』「因雲禪者有疾示之」韓6 p.724c3~c10 참조. 수행자의 병을 화두로

제시한 법어.

강월헌 대사〈강월헌은 나옹(懶翁)스님의 헌호(軒號)이다.〉159)가 병든 스님 운도

(雲道)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중병이 든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병이오?

몸의 병이오? 마음의 병이오? 만약 몸의 병이라고 한다면, 그 몸이란 지

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임시로 합해져 있는 것일 뿐이니 도대체 이 중

어떤 것이 병들었단 말이요? 만약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면, 그 마음이란

수상행식(受想行識) 4온(蘊)160)으로 이루어진 임시적인 개념일 뿐이니,

도대체 이 중 어떤 것이 병들었단 말이요? 그렇다면 아픔이라는 것은 어

디서 나오는 것이오? 또 아픔을 모른다는 것은 무엇이오? 이와 같이 참

구해 보기 바랍니다. 꾸준히 반복하여 살피다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고 또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이 병든 스

님이 생(生)과 사(死)라는 두 글자가 나온 유래를 살폈다면, 생도 얻을 수

없고 사도 얻을 수 없으며 천당도 얻을 수 없고 지옥도 얻을 수 없어 결

국에는 ‘이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만이 마음속에 남았을 것이다. 아야161)

라는 두 글자를 그대는 아는가? 병이 나으면 앓던 원래의 병이 돌아갈

곳이 없다.

江月軒大師〈江月軒, 懶翁軒號也〉, 謂病僧雲道者曰,“ 汝若重病,

未審是何病邪? 是身病邪? 是心病邪? 若身病, 則身爲地水火

風, 四大假合, 是誰病者? 若心病, 則心爲受想行識, 四蘊假

名, 是誰病者? 然則痛苦者, 從何處來? 又不知痛者, 是箇什

麽? 請如此叅看, 看來看去, 驀然省去也. 至囑, 至囑.” 這病

僧, 看生死二字來處, 生也不得, 死也不得, 天堂也不得, 地獄

也不得, 畢竟是箇什麽? 阿耶二字君知否? 病覺, 元來病不歸.

159) 판본에 따라 이 착어가 없기도 하며, 제목인 ‘法中本無病鬼’에 붙어 있기도 하다.

160) 5온 중에 색(色)은 물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5온 중에서 색온을 뺀 나머지를

제시한 것이다

161) 阿耶. 아플 때 내는 소리이다. ‘아야아야(阿耶阿耶)’·‘아야야(阿耶耶)’ 등으로도

쓴다. 이 자체를 하나의 화두로 쓴다. 덕산(德山)의 공안(『禪門拈頌說話』677則)

이 그 예가 된다. “덕산이 병이 들었을 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병들지 않는 사

람도 있습니까?’ ‘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야! 아야!’”

본래의 법에는 본디 견해가 없다本法本無見

본래의 법에는 지키거나 범하는 경계가 없다. 계를 지키는 것은 소승의

견해이고,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은 중생의 견해이며, 그 자리에서 무심해

162)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바로 대승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연기문(緣起門)163)을 고수하지 않고서 항상 자기의 본래면목164)을 돌

이켜 비추어 언제나 조사의 활구(活句)로써 분별을 끊은 후에 다시 태어

나야 한다. 한편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에 집착하는 것은 중

생의 견해이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는 것은 소승의 견해이

니, 모두 삿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그대

로 소리와 색을 초월하여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는 것이 바로 대승의 견

해이다.

本法無持犯. 持戒者, 小乘見, 不持戒者, 衆生見, 直下無心,

分別不生, 是爲大乘見. 故學者, 不守於緣起門, 常常返照自己

面目, 常以祖師活句上, 絶後再甦始得. 又卽着見聞覺知者, 衆

生見, 離見聞覺知者, 小乘見, 未免邪解. 卽見聞覺知, 超越聲

色, 返照自己者, 大乘見也.

162) 직하무심(直下無心). “모든 불보살과 모든 중생들이 이 대열반성을 함께한다. 성

이란 곧 마음이며, 마음은 곧 부처이고, 부처는 곧 법이다. 한 찰나라도 이 진실

을 떠난다면 모두가 망상이다.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해서는 안 되며, 부처

로써 다시 부처를 구하려 해도 안 되고, 법으로써 다시 법을 구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심해져서 묵묵하게 하나가 될 뿐

이니, 조금이라도 분별하면 어긋난다.”(『傳心法要』 大48 p.381a28. 諸佛菩薩,

與一切蠢動含靈, 同此大涅槃性. 性卽是心, 心卽是佛, 佛卽是法. 一念離眞, 皆爲妄

想. 不可以心更求於心, 不可以佛更求於佛, 不可以法更求於法. 故學道人, 直下無心,

默契而已, 擬心卽差.)

163) 생멸하는 제법을 인연과 과보의 틀로서 제시하는 법문(法門).

164) 本來面目. 선·악, 미(迷)·오(悟) 등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타고난 그대로의 모

습 또는 어떤 인위적 조작도 가하지 않은 본바탕을 가리킨다. 본지풍광(本地風

光)·본분전지(本分田地)·자기본분(自己本分)·본분사(本分事)·본인(本人)·

부모미생전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과 같은 맥락으로 쓰인다. 흥성사본(興聖寺

本)·덕이본(德異本)·종보본(宗寶本) 등의 『壇經』에 6조 혜능이 혜명(慧明)에게

던진 화두로 나오며, 돈황본(敦煌本)·대승사본(大乘寺本) 등에는 없다.『慧能硏

究』p.289 참조. “혜능이 말했다. ‘선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악이라고 생각하지

도 마라. 바로 이럴 때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慧能云,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이것이 본래면목이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예이다.

본래면목이란 자기의 본분사이고 본지풍광(本地風光)165)이란 생성도 소

멸도 없는 경계이다. 본체(本體)와 본용(本用)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현

묘한 관문, 8식166)이 타파되어 드러난 본래부터 갖고 있었던 심지(心地),

선가(禪家)에서 운운하는 장승[木人]의 노래와 박수,167) 철우(鐵牛)의 포

효, 석마(石馬)의 방광(放光)168)이라는 말들은 모두 무생 중의 활발한 작용

을 나타내니, 죽음 속에도 살아날 길을 갖추고 삶 속에도 죽는 도리를 갖

추고 있다.

本來面目者, 自己本分上事, 本地風光者, 無生境界. 本軆本用

之間, 孤峭玄關, 破八識本田地, 禪家木人唱拍, 鐵牛吼哮, 石

馬放光之言, 皆無生中活用, 死中具活, 活中具死.

165)『선가귀감』주석349) 참조.

166)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

167)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景德傳燈錄』권23 大51 p.391c26,『宏智廣錄』

권4 大48 p.36c1 등에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168) 야보(冶父)의 게송 등에 나온다. “오랜 세월 석마(石馬)가 미간의 털에서 빛

을 발하고, 철우(鐵牛)는 포효하며 바다로 들어간다.”(『金剛經註解』권4 卍38

p.940b1. 多年石馬放毫光, 鐵牛哮吼入汪洋.)

스승과 제자 간에 전수할 것이 없다師資無傳授處

석가는 가난하고 가섭은 부유하며, 달마는 법을 전하러 서쪽에서 오지

않았고 혜가는 법을 구하러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169) 하나의 법에 본래

갖추어져 있거늘 어디서 찾아 헤매는가?

釋迦貧, 迦葉富;達摩不西來, 慧可不徃西. 一法本具, 何處

覓得?

169) “달마는 중국으로 오지 않았고, 2조 혜가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景德傳燈

錄』권18 大51 p.344a7. 達磨不來東土, 二祖不往西天)라는 표현이 일반적이다.

지혜가 없는 치우친 견해無慧偏見

옛날에 어떤 노파가 살았는데, 그 딸로 하여금 수도하는 한 스님을 시

봉하도록 하여 30년170)이 되었다. 하루는 식사를 마친 다음 그 딸이 도인

을 포옹하면서 “스님! 바로 이럴 때 기분은 어떻습니까?”라 묻자 그 스님

이 “고목이 차가운 바위에 기대어 있으니 삼동(三冬)에 따스한 기운이 없

는 것과 같소”라 응답했다.171) 이것은 도를 익혀서 얻는 진실한 마음이 어

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말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지혜가 없는 치우친 정

(定)이며, 자기 안의 깊고 한적한 상태를 고수하는 것172)일 뿐이다. 조사가

법을 보일 적에 어찌 여유롭게만 할 것인가! 운문이 제시한 당문검(當門

劒)173)과 임제의 취모검(吹毛劒)174)과 같은 법들이 어찌 음계175) 속에서 일

어나는 일이겠는가! 잘못된 기틀과 잘못된 지혜로는 미칠 수 없고, 오로

지 죽이기만 하거나 살리기만 하더라도 좋은 솜씨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지금 사람마다 자기 본분상에서 공부하여 반드시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종사(宗師)의 수단이다.

古者, 有一老婆, 使其少女, 事一道人, 三十年矣. 一日, 食畢

而後, 其女相抱曰, “和尙! 正伊麽時如何?” 道人曰, “枯木倚

寒岩, 三冬無煖氣.” 云云. 此言, 正是不知習心也. 如此之見,

無慧之偏定, 內守幽閑者也. 祖師示法, 豈等閑邪! 雲門當門

釰, 臨濟吹毛釰, 豈陰界中事也! 狂機狂慧所不及, 單殺單活

不176)好手. 卽今, 使人人向自己上做工夫, 須自悟, 是宗師手段.

170) 선종에서 30년이란 반드시 산술적인 세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발심하여

깨닫기까지 소요되는 수행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禪門拈頌說話』1463

則 韓5 p.922b22·『頌古聯珠通集』 권40 卍115 p.512a11 참조.

171)『禪門拈頌說話』1463則 韓5 p.922b21~c2·『頌古聯珠通集』 권40 卍115

p.512a11~a15 참조.

172) 주석22) 참조.

173) 관문을 엄중히 지키는 칼. 간화선의 화두, 곧 활구를 비유하는 말이다.

174) 취모검이란 머리카락을 불어 그 칼날에 대면 잘려나갈 정도로 예리한 칼. 이 역

시 활구를 비유하는 말이다.

175) 陰界. 일반적으로는 귀신들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모든 장애를 잘

라 없애는 칼날과 같이 활발한 작용을 잃어버리고 일정한 관념에 고요히 침몰

해 버린 경계를 뜻한다. “위산이 앙산에게 말했다. ‘혜적아, 속히 말해 보라! 음

계에 들어가지 말거라.’ ‘혜적은 신(信)도 세우지 않습니다.’ ‘그대는 신도 세

우지 말고, 불신(不信)도 세우지 마라.’ ‘제 이름과 같이 지혜[慧]와 고요함[寂]

그 자체이거늘 다시 무엇을 믿겠습니까!’”(『景德傳燈錄』 권9 「潙山靈祐」 大51

p.265a23. 師謂仰山曰, ‘寂子, 速道! 莫入陰界.’ 仰山云, ‘慧寂信亦不立 .’ 師云, ‘子信了

不立 , 不信不立 .’ 仰山云, ‘只是慧寂, 更信阿誰!’);“보기만 하고 말로 표현하지 못

하면 음계에 떨어져 견해가 치우치고 메마를 것이다. 반면 말로 표현은 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눈앞의 기틀에 떨어지고 독이 퍼진 바다에 빠질 것이다.

만약 나의 문하에서라면 설령 제대로 말하고 바르게 보더라도 30방 맞기 딱 알

맞고,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더라도 30방 맞기 딱 알맞을

것이다.”(『續傳燈錄』 권28 「雪庭元淨傳」 大51 p.658b26. 見得說不得, 落在陰界,

見解偏枯, 說得見不得, 落在時機, 墮在毒海. 若是翠雲門下, 直饒說得見得, 好與三十棒;

說不得見不得, 好與三十棒.)

176) 원문에는 ‘不’자가 없지만, 맥락상 ‘不’자가 들어가야 의미가 통한다.

간기刊記

서산이 이 ‘심법요초’를 지은 본래 뜻은 마음을 닦는 사람들에게 힘들

이지 않고 쉽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배우는 자들은 모두 초

나라의 임금과 신하1)들처럼 보는 안목이 없어서, 도리어 버려진 물건으로

여겼다. 그런 이후 거의 50여 년이 흘렀던 것이다. 목양이(牧羊賾)2) 대사가

한번 보고서는 그것이 연성보3)와 같이 귀중한 것임을 홀로 알아보았다.

한편으로는 월개(月蓋)왕자의 법공양4)을 본받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서산의 본래 뜻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추계(秋溪)5)

글이 남아 있었기에 또한 목양이 대사가 베푼 만 가지 공덕 중 하나를 돕

게 되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쓰고 삼가 기록한다.5)

西山之撰此心法, 使其修心人, 不費力以易悟爲志也, 而後之

學者, 皆似楚之君臣, 反爲空棄之物也. 爾來殆且五十餘載也.

牧羊賾大師, 一見而獨知其連城之寶. 一以效月盖之法供, 一

以滿西山之志也. 秋溪有文, 亦助其賾大師之萬一. 敬而書,

謹而識.

1)『심법요초』의 진가를 파악하지 못한 당시의 학자들을 한나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한신(韓信)을 중용하지 못한 초왕 항우(項羽)와 그의 신하들에 비유한 말

이다.

2)「심법요초서」주석4) 참조.

3) 連城寶. 화씨벽(和氏璧)을 일컫는 말로서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

(和氏璧)을 얻자, 진(秦)나라 소왕이 편지를 부쳐 15개 성과 바꾸자고 제안한 고

사에서 유래한 말이다.『史記』「廉頗·藺相如列傳」에 전한다.

4) 과거 대장엄(大莊嚴)이라는 세계의 월개왕자가 약왕여래(藥王如來)에게서 법공

양의 뛰어남에 대해서 듣고 나서 보살행을 닦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에 법공양을 행하고 정법을 수호할 것을 서원했다. 약왕여래가 설한 법공양이

란 모든 부처님이 설한 심오한 경전이자 보살의 법장(法藏)에 해당한다. 보살은

법공양을 통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이르고 6바라밀행을 성취하여 온갖 그

릇된 견해에 빠지지 않으며, 온갖 뛰어난 지혜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그

들이 다시 법륜을 굴리게 함으로써 법을 지켜나가는데, 이것이 바로 법공양의

뛰어난 점이라고 설하였다.『維摩經』권하 大14 p.556b17 참조.

5) 지명인지 인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갑진년6) 음력 9월 모일(某日) 대둔산 안심사에서 새롭게 간행하여 보

관하다.

시주(施主) 차례:윤길 양주(兩主),7) 예양 양주는 여러 사람에게 시주

를 권함, 조운기 양주, 정진 사도(使刀),8) 천성 비구

時甲辰菊月日, 大芚山安心寺, 新刊留置.

施主秩:尹吉兩主, 禮楊兩主引勸, 曺雲起兩主, 鄭進使刀, 天性比丘.

6) 서산대사가 입적한 1604년 이후 50여 년이 지난 시기의 갑진년은 1664년이다.

7) 부부를 일컫는 말.

8) 직함을 일컫는 말로 추정된다. 또는 ‘刀’를 ‘道’자의 오자로 본다면 고을의 원

(員)인 ‘사또’로도 볼 수 있다.

부록附錄

강서·백장·황벽·임제 4대사1)상당서_사명 지음

江西 百丈 黃蘗 臨濟 四大師上堂序_四溟述2)

1) 강서는 마조도일(馬祖道一), 백장은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은 황벽희운(黃蘗

希運), 임제는 임제의현(臨濟義玄)을 가리킨다. 『선가귀감』 주석 368)~371) 참조.

2) 말미와 연결하여 보면, 사명이 구술(口述)하고 제자 쌍흘이 받아 적은 형식이다.

영취산 마지막 법회 때 부처님께서 꽃을 집어 대중에게 보이자 계봉노인

(雞峯老人)3)은 미소 속에 칼을 감추었고,4) 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

벽하며 침묵하고 있을 때 신광(神光)은 팔을 잘랐고,5) 마음을 장벽처럼 하

라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으며,6) 강서의 일할(一喝)에 대웅산

(大雄山)7) 백장은 귀가 멀었고,8) 황벽의 활발한 방(棒)을 맞고 임제는 살아

났으니,9) 이러한 경계를 마주친 순간 조금이라도 분별이 가능했겠는가? 만

약 그 틈에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헛된 것에게 부림을 당하여10) 자신의

목숨이 구덩이로 떨어지는 지경이 되어 구하려 해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강서(江西)·홍주(洪州)11)·균주(筠州)12)·

주(鎭州)13)의 네 대사14)는 지극히 짧은 한마디 말로도 하늘을 기울이고 땅

을 뒤집었으니 귀먹은 자는 듣게 되고 눈먼 자는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

수하게 많은 부처님들도 그것을 골수로 삼았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

은 조사들도 그것을 본래면목으로 삼았으니 물방울마다 떨어지는 즉시 얼

어붙는 듯하고15) 은산철벽16)과도 같다. 그것은 마치 덥고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시원하고 고요한 법당(法幢)17)과 같아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회생시키는 묘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약간의 말을 적어서 취광

(翠光)18)장로의 노고를 받드는 것이지만, 장로께서 어찌 서문을 미리 준비

하지 않았겠는가? 나도 조금 돕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직 노스님

이 애쓰신 공로가 아니겠는가!

제자 쌍흘19)이 받아 적다.

靈鷲山末後會, 拈花示衆, 雞峯老, 笑裏藏鋒, 少林寺九年默,

神光斷臂, 墻壁上了得安心, 江西一喝, 大雄耳䏊, 黃蘗活棒,

臨濟得生, 當此時, 能容得擬議麽? 若一毫商量於其間, 被影

子使之, 而自家性命, 墮坑塹去矣, 救取無門, 其庸詎可乎!

然, 江西洪州筠州鎭州, 四大士, 其一言半句, 可以傾天覆地,

䏊者聞, 盲者見. 塵沙諸佛, 以之爲骨髓;恒沙諸祖, 以之爲面

目, 滴水滴凍, 銀山鐵壁. 如所謂熱惱海中, 淸凉寂滅法幢也,

可作回生起死之妙藥. 故今記若干言, 以奉翠光長老之行, 長

老胡不預偹? 余亦一助耳, 唯老師勉哉!

小弟子雙仡謹書.

3) 마하가섭(摩訶迦葉)을 말한다. 계봉은 계족산의 한 봉우리로서 전설에 따르면

마하가섭이 미륵불(彌勒佛)의 출현을 기다리는 장소이다. 마하가섭이 부처님

의 명을 받고서, 미륵불이 출현하면 부처님의 가사를 전해 주기 위해 입정(入

定)한 채로 계족산 계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설에 따른다.『增壹阿含經』권44

大2 p.789a6·『有部律雜事』권40 大24 p.409a14 참조.

4)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 지은 염화미소

(拈花微笑)를 가리킨다. 비록 미소를 지었지만 분별로 접근할 수 없는 관문의

빗장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과 불립문자(不立 文字)의 취지

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선종의 설화이며 가섭을 인도 전법의 초조(初祖)로 내세

우는 조통설(祖統說)의 근거가 되었다. 이 설화를 경전적으로 근거 짓기 위하

여『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 위작되어 나오기도 했다. 2권본『大梵天王問佛

決疑經』卍87 p.930a2·1권본『大梵天王問佛決疑經』卍87 p.976a10·

『聯燈會要』권1 卍136 pp.440b18~441a2 참조.

5) 혜가단비(慧可斷臂). 혜가가 가르침을 구하며 달마에게 왼쪽 팔을 잘라 바친 설

화를 말한다. 신광은 2조 혜가가 법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자르기 전의 법명이다.

『景德傳燈錄』 권3「菩提達磨傳」大51 p.219b17 참조.

6)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고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초기 선종의 선법이다.

『심법요초』 주석22) 참조.

7) 백장이 주석한 홍주(洪州) 대웅산을 말한다.

8)『선교결』주석19) 참조.

9) 임제가 황벽에게 불법의 대의를 묻고서 3번 얻어맞은 후 대우(大愚)를 찾아가

서 깨달은 인연을 말한다.『景德傳燈錄』권12 大51 p.290a19~b8 참조.

『禪門拈頌說話』 607則「임제불법(臨濟佛法)」참조.

10) “우두커니 생각하며 마음의 기틀을 멈추고 있다면 헛된 것에 미혹당하리라.”

(『書狀』「答汪內翰」大47 p.929b18. 若佇思停機, 則被影子惑矣.)

11) 백장의 주석처.

12) 황벽의 주석처.

13) 임제의 주석처.

14) 大士. mahāsattva의 한역어로서 보살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여기서는 네 선

사에 대한 존칭이다.

15) 적수적동(滴水滴凍). 화두 이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경계를 비유한

다. “요즘 사람들은 질문을 받을 경우 단지 도리를 지어내어 분별하는 데만 골

몰할 뿐이다. 그래서 하루 중 어느 시각에나 사람들로 하여금 화두를 씹으며 음

미하도록 하고, 물방울마다 떨어지는 즉시 얼어붙는 것처럼 빈틈없이 궁구하게

하여 올바른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碧巖錄』 91則 「評唱」

大48 p.216a8. 如今人問著, 只管作道理計較. 所以十二時中, 要人咬嚼, 敎滴水滴凍,

求箇證悟處.)

16) 銀山鐵壁. 화두의 본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비유이다. 눈과 얼음으로 덮여 오

를 수 없는 은산과 무쇠로 되어 뚫고 나갈 수 없는 철벽을 말한다. 타파할 분별

의 수단이 전혀 없는 화두의 속성을 나타낸다. “뚫기 이전에는 은산철벽과 흡

사하다가 다 뚫고 난 경지에 이르러 보면 자기가 본래 은산철벽이 되리라. 만

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만일 이 안에서 하나

의 기틀을 드러내고 하나의 경계를 간파한다면 관문의 요소를 단단히 지키고

앉아 범부가 되었건 성인이 되었건 모두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여도 자신의 능

력을 벗어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리라.”(『碧巖錄』 57則 「垂示」

大 48 p.190c27. 未透得已前, 一似銀山鐵壁;及乎透得了, 自己元來是鐵壁銀山.

或有人問, 且作麽生? 但向他道, 若尚箇裏, 露得一機, 看得一境, 坐斷要津, 不通凡

聖, 未爲分外.);“옛사람이 제시한 공안에서 도리로 통하는 길이 있어 씹어서 맛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도리로 통하는 길이 없어 마치 은산철벽과

같은 것이라면 또한 어떤 이해도 불가능하다.”(『雪巖語錄』 권2 卍122 p.515a2.

凡古人公案, 有義路可以咬嚼者, 則理會得下;無義路, 如銀山鐵壁者, 又却都會不得.)

17) 법의 깃발. 불법을 깃발에 비유한 말. ‘당’은 당번(幢幡)이나 정기(旌旗)와 같다.

적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깃발을 세워 표시하듯이, 법의 깃발은 불

보살의 설법이 중생의 번뇌를 항복시킬 만한 힘이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선종

에서는 종사가 주석하며 설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내거는 깃발을

법당이라 하며, 절에 언제나 깃발을 세워 불법이 있는 장소라는 표시를 한다.

18) 4대사의 상당문을 편집한 스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9) 雙仡. 서산의 제자. 서산의 비명을 짓기 위해 편양언기(鞭羊彦機) 등과 월사(月

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를 찾아가는 등 서산의 법을 알리고 기리기 위한

여러 사업에 참여한 행적이 보인다.

서산이 완허당20)에게 준 전법게21)西山贈玩虛堂傳法偈

20) 완허원준(玩虛圓俊 1530~1619). 서산의 제자. 속성은 표(表)씨. 함경남도 홍원(洪

原) 출신. 태백산에서 서산을 친견하고 정진하여 서산으로부터 의발(衣鉢)과 전

법게를 받고 입실(入室)제자가 되었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입적하였다.

변헌(卞獻 1570~1636)이 지은「普賢寺玩虛堂大師石鐘碑」가 전한다.

21)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했다는 다음의 게송과 유사하다. “법 중에 본래의 법은 법

이 없으나, 법이 없는 법도 법이라네. 이제 법이 없는 법을 전하니, 법마다 어찌

법이라 하겠는가!”(『景德傳燈錄』권1「釋迦牟尼佛傳」大51 p.205c1. 法本

法無法, 無法法亦法. 今付無法時, 法法何曾法!)

법마다 본래 법이 없으나,

법이 없는 법도 법이라네.

이제 법이 없는 법을 전하니,

그 법 길이 단절되지 않게 하라.

法法本無法, 無法法亦法.

今付無法法, 令法永不絶.

완허당임종게玩虛堂臨終偈

선의 등불과 교의 바다에서 핵심만 떼 낸 종지여!22)

일찌감치 눈 밝은 스승께 받아 의심 다 풀었다네.

팔만사천의 금은보화로 가득 찬 곳간이여!

떠나는 마당에 모조리 잎새에 붙여 날려 보내리.

우습구나, 말없이 잠깐 침묵하는 사이에,

무수히 떨어지는 꽃잎 아름답기도 하여라.

禪燈敎海揮斤旨! 曾稟明師已決疑.

八萬四千金寶藏! 臨行都付葉中吹.

可笑無言良久處, 落花千點巧相儀.

22) 도끼를 휘둘러 코를 다치지 않고 코에 묻은 진흙만 제거하듯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핵심만 집어내는 선사의 뛰어난 기량을 비유한다.『莊子』「徐無鬼篇」

의 고사에 근거한다. 초(楚)나라의 영(郢) 지방에 흙 바르는 사람[郢人]이 자기

코에 파리 날개만큼 얇게 백토를 바르고 장석(匠石)에게 깎아내도록 시켰다. 장

석이 바람 소리가 나도록 도끼를 휘둘렀지만, 영인(郢人)은 그 소리를 듣기만

하고 꼼짝없이 있었고, 코를 조금도 상하지 않고 백토만 떨어져 나갔다. “뛰어난

솜씨로 도끼를 휘둘러 코에 묻은 진흙을 제거하니, 납승의 마음 작용이 미묘한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大慧語錄』 권8 大47 p.845a25. 好手揮斤去鼻泥,

衲僧機妙安能識?)

“아하하! 꿈속에서 꿈 얘기를 했구나. 시자야, 차를 달여23) 오거라!” 하고

는 차를 마신 다음 붓을 놓고 앉은 채 머무는 듯했지만 이미 떠난 뒤였다.

법랍 70세, 세수 90세로 삶을 마쳤다.

“阿呵呵! 夢中說夢也. 侍者, 點茶來!” 茶訖, 放茟24)而坐, 泊

然已逝. 法臘七十, 壽九十而終焉.

23) 점다(點茶). 분말차에 물을 붓고 조리[茶筅]로 저어서 거품을 걷어내고 마시는 다

도 중 하나이다. 본래 분말차와 관련된 말이었으나 점차 차를 만들어 마시는 방법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간기刊記 24)

24) ‘筆’자의 오식(誤植)으로 보인다.

종봉(鍾峯)의 수고(手稿)를 해인사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도 초록한 것

을 간행한 것이어서 누락된 것이 많다. 사명(四溟)의 비문과 서산 원고의

서문은 허균25)이 지은 것인데, 종파의 전승에 대해서 착오를 일으키고 있

26) 후인들에게 그대로 전하여 보게 할 수 없었다. 참석한 무리들 중 이

를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어, 이에 여러 현인의 기록과 여러 절의 비문을

채집해 보니 종파의 연원이 뚜렷하고 그 유파의 흐름도 환히 밝혀졌다. 이

런 까닭에 허균이 쓴 서문을 바로잡아서 여기에 기록하니, 후대의 달통한

자는 그 옳고 그름을 따져보라. 또 사명과 완허당 두 대사는 모두 서산으

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제자로서「사대사의 상당 서문」과「임종게」를 남겼

다. 이 두 글은 너무 짧아서 따로 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다 함께 붙

여 둔 것이니,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기 바란다.

刊鍾峯手稿于海印也. 此集亦抄而刊焉, 所欠者多矣. 四溟之

碑文, 西山之稿序, 乃許端甫所撰, 錯承宗派, 不可流目於後

人. 叅席之輩, 無不悵然, 於是采集群賢之記, 亦及諸山之碑,

宗源曆曆, 流派昭昭. 是故, 以正其序, 書之于此, 後之達者,

校其當否. 又四溟玩虛二大師, 皆西山傳法弟也, 四師堂序, 與

臨終偈. 此文至小不可獨行故, 幷附于此, 此亦勿疑, 幸甚.

25) 허단보(許端甫). 허균(許筠 1569~1618). 단보는 허균의 자(字)이다.

26) 서산의 법계를 이은 사람은 태고가 아닌 나옹이라고 한 허균의 주장을 말한다.

심법요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