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4. 마투라와 불상의 탄생
북서 인도 포교거점, 불상 처음 조성된 古都
갠지즈강 중·하류(야무나강 오른편 기슭)에서 간다라 등 북서인도로 통하는 교역로 상에 위치한 마투라는 북동쪽의 쉬라바스티(사위성)에서 남쪽의 웃자이니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라자가하(왕사성) 등 동인도에서 흥기한 불교와 자이나교는 바로 이 마투라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갔다. 불교는 북서쪽으로 진출해 인도 밖으로 가게 됐고, 자이나교는 주로 서남 인도로 퍼졌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마투라는 특히 불교에게 의미 있는 장소다. 동인도 불교가 북서인도로 확산될 때 '포교거점'이었고, 북서인도의 간다라와 더불어 '불상이 탄생된 곳'이기 때문이다. 2세기 전반 불상을 조상(造像)하기 시작, 무수한 '마투라불'을 만든 중심지였고, 부파(部派) 가운데 설일체유부가 이곳에서 번창했다. 때문에 철로가 승원(僧院) 유적을 가로질러 달릴 정도로 지금도 도시 곳곳에 불교유적이 산재돼 있다.
경전엔 마하캇차나(가전연) 존자가 마투라에서 전도했다는 구절은 있으나, 부처님이 이곳을 직접 방문했다는 부분은 없다. 부처님은 "마투라에는 다섯 가지 화(禍)가 있다"며 가지 않았다 한다. 힌두교 주신(主神) 중 비쉬누의 화신인 크리쉬나신의 탄생지라는 점에서 힌두교와도 물론 인연 깊은 장소다.
뭄바이(봄베이)를 통해 인도 대륙에 들어선 지 9일 만인 2002년 3월13일 밤 8시.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에 도착했다. 관광도시 아그라는 그때까지 본 인도의 다른 곳과 달리 깨끗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타지마할에 갔다. 새벽인데도 무척이나 사람들이 붐볐다. 1인당 500루피 짜리 티켓을 구입해 타지마할에 들어선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타지마할의 위용에 절로 벌어진 것이다. 거대한 건축물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타지마할을 나와 마투라로 향했다. 2시간 정도 걸렸다. 마투라는 아그라와 달리 지저분했다. 도로 곳곳에 하수 물이 넘쳤고, 휴지는 골목마다 널려 있었다. 번잡한 길을 돌아 마투라 박물관에 도착했다. 1인당 25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에 들어서니, 마투라에 대한 인상이 대번에 달라졌다. 사진으로 보던 불상들이 즐비한 박물관 회랑에선, 지저분한 거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마투라가 한 때 불교의 중심도시였음을 박물관에서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5세기 초 마투라를 방문한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여러 곳을 지나 한 나라에 도착하니 마두라였다. 요포방나(야무나 강)를 지났는데, 강 좌우의 언덕에 30의 승가람이 있고, 스님은 거의 3000명이나 돼 불법은 매우 성했다. 무릇 사하(沙河. 고비사막) 서쪽의 인도제국은 국왕들이 모두 불교를 독신하고 있었다. 왕이 승중(僧衆)을 공양할 때는 천관(天冠)을 벗고 여러 종친·군신과 더불어 손수 음식을 대접하고, 공양이 끝나면 융단(絨緞)을 땅에 깔고 스님들을 윗자리에 앉게 한 뒤 아랫자리에서 스님들을 향해 앉는데, 스님들 앞에서는 감히 상(床)에 앉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200년 뒤 현장스님이 마투라를 방문했을 때에도 불교는 살아있었다. "말토라 국의 둘레는 5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집집마다 암몰라과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있다. …(중략)… 기후는 무더우며 풍속은 선하고 순박하다. 내세의 덕 빌기를 좋아하며, 덕과 학문을 숭상한다. 가람은 20여 곳 있으며, 승도는 2000여 명 있는데, 대·소승을 겸하고 익히고 있다.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스투파는 셋 있는데, 무우왕(아육왕)이 세운 것이다. 과거 네 분의 부처님의 유적이 참으로 많다."
자세히 보면 법현스님과 현장스님의 기술(記述)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수는 10개나 줄고, 스님들 숫자도 1000명이나 적다. 현장스님이 인도에 갔을 때 불교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마투라 불교도 서서히 힌두교에 길을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을 샅샅이 살폈다. 몇몇 자아나교 상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불상이었다. 세계의 모든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인, 130년 경 조성된 불상(명문이 있음)이 전시실 한 가운데 있었다. 크게 뜬눈과 전체적인 포즈에 힘이 넘쳤고, 역동성이 불상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소라고둥 모양의 육계(살상투), 육체가 훤히 보이는 가사, 발달한 근육을 그대로 묘사한 가슴 등. 후기 마투라불에 나타나는 고요하고 숙연한 분위기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마투라 하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불상의 기원지다.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던 불상 조성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투라 기원설'과 '간다라 기원설'로 대별된다. 간다라 불상에 그리스적 영향이 보인다면, 마투라 불상엔 인도의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평가된다.
마투라불상은 젖꼭지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등 육체의 아름다움을 대담하게 표현하는데, 가사로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보여준다. 간다라불의 영향으로 옷 입은 마투라불이 후기엔 등장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가사 속 육체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마투라불의 특징이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굽타 왕조 시절에도 마투라는 불상조성의 중심적 지위에 있었다.
박물관엔 참으로 명품들이 많았다. 너무 많아 관리를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기원 후 1·2세기에 조성된,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무조건 국보가 됐을 유물들이 회랑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불상 조각 이전부터 마투라에서 많이 만들어졌다는 약시상도 많았다. 약시상은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고, 굴곡 심한 요염한 포즈를 취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시실과 회랑을 보고 나도 어딘지 허전했다. 마투라박물관이 발행한 도록 표지에 있는, 5세기경 조성된 세계적인 불입상(佛立像)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박물관 직원에게 가볍게 항의하니, 창고 속에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 그냥 갈 순 없는 법. 몇 번씩 졸랐다. 박물관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지르라즈 프라사드씨가 와서야 볼 수 있었다.
지르라즈씨의 안내로 창고에 갔다. 창고 안에는 국보급 불상들이 가득했다. 너무 많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지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우리가 보고싶다고 말했던 그 불상은 모포에 가리운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모포를 걷어내는 순간 - 타지마할을 보고 입이 벌어졌듯 -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지르라즈씨의 말처럼 마투라 박물관 최고의 명품이 그곳에 있었다. 5세기 조성된 불입상은 과연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물결치는 파도 모양의 U자형 가사, 탄력있는 몸매, 생각에 잠긴 듯 감은 눈,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광배 등 모든 것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너무나 잘 생긴 상호에 반해 한 참을 쳐다보았다.
이것 외에도 창고 안에는 명품들이 즐비했다. 바닥에 뉘어놓은 것, 모포로 덮어놓은 것,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등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마투라는 과연 '불상의 본향(本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시내에 산재한 유적지를 찾아갔다. 고빈드 나가르, 캉카리와 부테스발, 카트라 부근의 승원 유적지를 돌아다녔다. 스투파 유적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 심지어 철도가 관통된 유적지도 있었다. 철로가 관통된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세월의 무상을 절감했다. 한 때 성(盛)의 극(極)을 달리던 '마투라 불교'는 이제 폐허 속에만 남아 있는 듯 했다. 절로 마음이 수수(愁愁)해졌다.
법현스님이나 현장스님이 보았다는 2000 ∼ 3000명의 스님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마투라엔 여전히 종교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데, 거리엔 불교는 왜 없을까. 인도불교 흥망성쇠의 원인은 무엇일까. 유적지에서만 느껴지는 이런 저런 잡념이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마투라에 불교가 다시 일어나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고 떠나야만 하는 순례 객.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마투라 불교의 부흥자 만싱씨
마투라에서 불교는 미약하지만 소생하고 있었다. 2002년 3월14일 마투라 박물관에서 만난 만싱씨에 의해. 현대 인도불교 부흥의 선구자인 암베드카 박사 이름을, 출판사 이름(암베드카출판사)으로 사용하는 그는 마투라 불교 부흥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아육왕전>에 보면 아쇼카왕의 스승인 '우파굽타'(優波掘多)라는 스님이 나온다. 스님은 아쇼카왕을 교화해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석주를 세우게 만든 인물. 바로 그 우파굽타 스님의 고향이 마투라. 만싱씨는 현재 우파굽다 스님의 이름을 딴 '우파굽타사(寺)'를 마투라 교외에 건립하고 있다.
한편으로 만싱씨는 마투라 주변 유적지를 무분별하게 발굴하지 못하게 하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발굴이라는 미명 하에 불교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불교는 인도 사회를 이끌 훌륭한 사상"이라고 밝힌 만씽씨는 "불교가 성했을 때 인도도 마투라도 발전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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