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6. 나란다 사원 ①
항상 1만여명 모여 공부한 '종합대학'
2002년 3월28일 오후 4시30분.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인 파트나를 떠나 라즈기르에 도착했다.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 유적과 "세계 최대의 대학"이 있었던 나란다 사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라즈기르에 도착한 지 이틀 뒤인 3월30일 "꿈에 그리던" 나란다 사원으로 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 라즈기르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져 있기에 멀지는 않았다.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녹음 우거진 거리를 달렸다. 도착하니 9시30분. 마침 3월말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덥지 않은 햇살을 받으며 유적지로 난 포장로를 걸었다. 출입구인 돌문을 지나 유적지에 들어서니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건물 초석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나란다 사원에 들어온 것이다. 폐허로 변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유적이었다.
나란다 사원. 서기 320년 건국된 굽타 왕조의 두 번째 왕인 쿠마라굽타 1세(415∼454)가 창건한 사찰. 가슴이 가볍게 떨렸다. 심호흡하며 이곳에서 공부했던 신라의 아리야발마·혜업스님 등을 떠올렸다.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는 사하(沙河)"(불국기)를 지나 천축에 도달한 스님들. 그 분들이 그 옛 날 여기서 수학했다.
유적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찬찬히 걸으며 훑었다. 이슬람 침공으로 모든 것이 파괴됐을 텐데도 여전히 거대했다. 대탑 주변에 앉아 나란다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창건된 후 나란다 사원은 역대 왕들의 보호에 힘입어 점차적으로 사역(寺域)이 확장됐다. 631년 당나라 현장스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엔 많은 승원과 탑, 예불당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사원'으로 변해 있었다.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승방(僧房)을 거느린, 당시 학문의 일대 센터였다.
<대당서역기>와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이하 삼장전)에 의하면 '나란다'는 '시무염'(施無厭. 하염없이 베푼다)이란 뜻이다. 가람의 남쪽에 암몰라 장자의 숲이 있었는데, 그 못에 사는 용의 이름이 나란다였다. 연못 옆에 사찰을 세웠으므로 용의 이름을 따 나란다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모든 사원의 승방은 4층이며, 중각(重閣)의 용마루나 대들보엔 용무늬가 장식됐다. 두공과 기둥은 붉게 단청됐고, 큰 기둥과 난간엔 갖가지 조각이 새겨졌다. 인도의 가람 수가 천만 개나 되지만, 장엄함·수려함·숭고함에 있어 나란다 사원을 따라올 사찰이 없었다.
<삼장전>은 특히 나란다 사원엔 주객을 합쳐 스님 수가 항상 1만 명이 넘었고, 모두 대승과 소승십팔부를 겸하여 배우고 있다고 밝혀놓았다. 불교 뿐 아니라 속전이나 베다 등의 책과 인명(因明)·성명(聲明)·의방(醫方)·술수(術數)에 이르기까지 갖추어 연구했다. 경론 20부를 해득하는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이나 되고, 30부를 해득하는 스님은 500여 명, 50부를 해득하는 자는 현장스님을 포함해 10명이나 됐다. 당나라 현장스님(?∼664. 나란다 사원에서 5년 간 수학)의 스승인 계현(戒賢)법사만이 모든 경전에 통달했고, 덕이 높아 대중들의 법종장(法宗匠)이 됐다.
강좌는 매일 100여 곳에서 열렸고, 학승들은 촌음을 아껴 배웠다. 학승들은 가르침을 청하고 깊은 이치를 토론하는데 온종일을 소비했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서로를 일깨우고 가르쳤다. 젊은이나 나이 든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삼장(三藏)의 깊은 이치를 말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때문에 나란다 대학에 유학한다는 이름만 내걸고 노닐어도 모두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란다 대학에 입학하기도 어려웠다.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입학은 취소됐다.
"나란다 대학에서 벌어지는 논의(論議) 마당에 끼고 싶어 다른 나라나 이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해 굴복하고 돌아가는 자도 많으니, 예나 지금이나 학문에 깊이 통달해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입문할 수 있었다. 유학하러 왔던 젊은 학자들이 학문에 관해 상세하게 논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가고 마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7∼8명이나 된다. 세상 이치에 환하다고 자부하는 나머지 2∼3명도 대중들과 차례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점차 예리함이 꺾이고 명성이 퇴색돼 입문하지 못했다. (대당서역기)"
이렇게 입학하기 어려운 나란다 대학에 신라스님들이 있었다.('나란다 사원의 신라스님들'기사 참조). 당나라 의정스님(635∼713. 나란다 사원에서 10년 간 수학)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이름이 나오는 아리야발마·혜업스님이 바로 그들인데, 두 스님은 귀국하지 못하고 나란다 사원에서 구도자의 생을 마감했다.
'쓸쓸한 상념'에서 깨어나니 햇볕이 상당히 뜨겁게 다가왔다. 대 탑 쪽으로 갔다. 대 탑 주변의 작은 탑들엔 아름다운 부처님 상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 얼굴이 파괴된 상태인데, 신체만은 또렷이 남아있다. 대 탑을 돌아 승원 유적으로 나아갔다. 마침 나란다 사원에 온 인도인 가족이 우리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월드컵은 안 보고 왜 인도에 왔느냐"고 웃으며 되물어왔다. "월드컵 전에 귀국한다"고 하자, 다른 질문을 해왔다.
인도인 가족과 이별한 뒤, 엄청나게 큰 승원 유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평야뿐이다. "나란다 사원처럼 거대한 사원을 유지하려면 대단한 경제력이 필요한데…"라는 생각이, 평야를 보는 순간 대번에 해결되는 것 같았다. 사방의 벌판이 나란다 사원을 유지시켜 준 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덕을 갖춘 대중들이 사는 곳이라서 자연히 엄숙했고, 건립이래 7백여 년이 되었으나, 한 사람의 범죄자도 있었던 적이 없었다. 국왕도 흠모하고 중히 여겨 100여 읍(邑)을 희사하여 공양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읍의 200호로부터 매일 갱미(粳米)와 우유 수백 섬씩을 진상 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학인들은 힘들여 구하지 않아도 의복·음식·잠자리·여가(餘暇) 등 사사(四事)를 자족하고, 예업(藝業)을 성취할 수 있었으니 모두 장원의 힘이다(삼장전)".
1만여 명의 학인들이 한 장소에 모여 하루에 100 강좌씩 들을 수 있었던 대학, 1500여 년 전에 그 같은 규모였던 대학은 나란다 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학인들의 수업료는 무료였고, 그들은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되는 대학은 지금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시대도 아닌 당시에 나란다는 벌써 국제적으로 이름난 학처(學處)였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티벳·몽골, 심지어 남방의 여러 불교국가들의 젊은이들이 나란다로 유학 갔다.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종합대학"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오가 가까이 오는지 강렬해진 햇살을 받으며 나란다 사원을 빠져 나왔다. 마침 발굴 중이었다. 어떻게 발굴하는지 보고싶어 유적지에 올라가니 인도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맨 채, 조심스레 땅을 파고 있었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파괴된 채 수백 년 간 방치된 나란다 대학은 1861년 비로소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이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를 토대로 나란다 승원 유적 터를 확인했고, 1916년부터 비로소 인도고고국과 영국 정부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은 대략 46,000평. 동서 250m·남북 610m 규모인데, 주변 들판에 불룩불룩 솟은 언덕들도 모두 나란다 사원 유적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해 주었다. 이 넓은 곳에 승원·탑·강당이 빼곡이 차있었던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내려와 나무 밑에 앉았다. 토론하는 학인들의 모습, 열심히 설명하는 스승의 모습, 이 강당 저 강당을 쉴새없이 다니며 메모하는 학승들 모습 등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그랬던 곳인데 이제는 유적만 있다. 세월의 무상함에 수수(愁愁)로워지지 않는 참배객이 오히려 이상하리라.
*** 나란다 사원의 신라스님들 ***
나란다 사원엔 신라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나라 의정스님(635∼713)이 지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하 구법고승전)에 의하면
"나란다에 머물며 율과 논을 많이 익힌" 아리야발마스님도 돌아올 마음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동쪽 경계인 계귀(鷄貴. 신라)에서 나와 서쪽 끝인 용천(龍泉. 나란다 사원)에서 세상을 마감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혜업(慧業)스님도 당나라에서 천축으로 건너가 대보리사에 머물며 유적을 순례하고, 나란다 사원에서 오랫동안 강(講)을 듣고 불서를 읽었다. "내(의정스님)가 나란다 사원의 불서를 조사하다 우연히 '불치목(佛齒木) 밑에서 신라승 혜업이 베껴 적었다'는 <양론(梁論)> 하기(下記)를 보고, 다른 스님에게 물으니 그는 이곳에서 죽었으며 나이는 60살에 가까웠다고 한다"는 내용이 <구법고승전>에 있다.
<구법고승전>엔 다른 신라 스님들 이름도 나온다. 정관 연간(627∼649)에 대보리사에 도착한 현각(玄恪)스님은 대보리사에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 때 스님의 나이 40이었다. 현태(玄太)스님 역시 대보리사를 예배하고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죽은 곳을 알지 못하며", 이름 모를 신라의 '두 스님'도 (당나라로) 돌아가는 도중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오로지 법(法)을 위해, 모든 것 다 버리고, 구도의 길에 나섰던 많은 신라 스님들은 인도에서, 이름 모를 땅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구법고승전>에 이름이라도 나오는 이 분들은 중국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의 사구(砂丘)에서, 혹은 파미르고원의 한 모퉁이에서, 또는 천축의 불교유적을 순례하다 이름 모를 곳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입적한 스님들에 비하면 행복한 스님들인지 모른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르지만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標識)가 되어주는"(불국기) 길이 바로 천축으로 가던 구도자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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