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

열반송(涅槃頌) 모음

수선님 2023. 4. 16. 12:46

구인사 설법보전 외벽

부설(浮雪)거사(?~7??)  열반송

目無所見無分別  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
耳廳無聲絶是非  듣는 바가 없으니 시비가 일지 않는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 시비 다 내려놓고
但看心佛自歸依  내 마음 부처님께 귀의할 뿐

 

 

구인사 설법보전 외벽   

 

부설거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사람으로 속명은 진 광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하였으며 아이들끼리 놀 때에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어른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스님을 보면 반가워하고 살생하는 것을 보면 슬퍼하더니 홀연 불국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부설(浮雪)이라 하였다.

 

부설은 도반(道伴)인 영희(靈熙), 영조(靈照)스님과 함께 묘적암을 짓고 수행하고 있었다. 그 뒤 문수보살을 친견하기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두릉(杜陵, 현 전북 김제군)에 당도하여 불심이 깊은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무원의 딸인 묘화는 날 때부터 벙어리였으나 부설을 보고 말문이 열렸다.  또한 그의 법문을 듣고부터 사모하게 되어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하면 죽겠다며 매달리니 부설의 황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행자의 파계시킴을 괴로워하던 딸의 아버지마저 애원을 하니 거절을 하였던 부설은 모든 것을 인연으로 생각하고 묘화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방편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실망하며 떠나는 두 도반을 보내며 부설은 새로운 각오를 하였다.묘화와 혼례를 치른 부설은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낳고 살다가 남매가 성장하자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홀로 초막에서 수도에만 전념하더니 확연 대오하였다.

 

어느 날 옛 도반인 영희, 영조스님이 찾아와 거사를 측은하게 바라보자, 부설은 세 개의 병에 물을 가득히 넣어 줄에 매달아놓고 병을 깨뜨리되 물은 쏟아지지 않는 것으로 서로의 공부를 시험해보자고 하였다. 영희, 영조스님이 병을 치자 병이 깨어지며 물도 쏟아졌으나 부설이 병을 치자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병 모양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참된 법신은 생사가 없이 여여(如如)하다” 부설은 두 스님에게 설법하였다.

 

目無所見無分別 (목무소견무분별)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분별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이청무성절시비) 귀로 소리 없음을 들으니 시비가 끊어졌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시비도방하) 분별과 시비를 놓아 버리고
但看心彿自歸依 (단간심불자귀의) 다만 마음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다.

 

게송을 마치고는 좌탈(座脫)하였다. 영희, 영조스님이 다비하여 사리를 묘적봉 남쪽에 모시고 부도를 세웠다. 이후 등운, 월명도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묘화부인은 가산을 정리하여 부설사를 세우고 110세까지 살다가 앉아서 입적하였다.

 

부설거사 일가족의 깨달음은 성불에 있어서 승속(僧俗)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있으나 물들지 않는 이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방(龐蘊)거사(?~808?) 열반송

但願空諸所有  다만 온갖 있는 바를 비우기 원할지언정
愼勿實諸所無  온갖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마라
好住世間        즐거이 머문 세간
皆如影響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 같나니

 

 

방거사의 이름은 온蘊으로 [마조]스님과 [석두]스님의 회상會上에서 연마하여 깊은 뜻을 깨닫고, [약산유엄]스님과 [단아천연]스님 등과 더불어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어 일생을 선사 못지않게 철저히 수행하다가 간 분이다.
원래 부호富豪로 잘 살다가 견성오도한 후에 전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재家財도구는 동정호洞庭湖에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초가삼간에 몸을 담아 돛자리를 짜고 집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견성 후에 처자도 참선을 시켜서 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사자 굴에는 사자만 산다)라는 말과 같이 일가가 도인 아닌 사람이 없었다.

이로부터 방거사는 장주莊主(농장주인)의 호화스런 생활을 버리고 일개 오두막집에서 돗자리를 짜면서 보림하고 가족들을 직접 지도하였다.
그가 장주로 있을 때에는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항시 체한 사람처럼 답답했는데, 오히려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도인들과 청담淸談을 나누며 돛 자리를 짜는 일은 사심 없고 속박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더욱 부인도 알뜰히 정진하고 남매도 천진을 잃지 않고 날마다 높은 경지에 올라 만족한 생활을 하였다.
만년에는 딸 靈照를 데리고 호북湖北 양주라는 고을 동굴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구가하면서 지냈고 부인과 아들은 수 십리 떨어진 산중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으면서 살았다. 하루는 방거사가 암굴에서 살면서 갈 때를 짐작하고서 산나물을 뜯어다가 다듬는 딸을 불렀다.

“얘 영조야”               - 네 아버지.
“정오가 되거는 알려다오”  - 정오에 뭘 하시려구요?
“아니다. 그저 . . .”        - 네 알았어요.
부녀간의 문답은 여기서 멎었고 거사는 방안에서, 딸애는 뜰에서 각자 자기공부에 들어갔다. 시간이 정오가 이르자
“아버지, 한낮이 된 것 같은데 일식을 하는지 해가 잘 보이지 않아요”
거사는 직접 정오를 확인하려고 뜰로 나왔다. 그 사이 영조는 방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방안으로 들어간 거사는
“영조야”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그녀는 자기자리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얘야”하고 또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딸애를 흔드니 이미 가고 없었다. 몇 분 사이의 일이었다.

- 내가 속았구나. 너한테 기선機先을 빼앗기다니 . . .

평소에도 영조는 총명하여 아버지는 물론, 찾아오는 사대부와 선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하루는 탁발승이 그의 집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염불을 하므로 밖으로 나와서는 
“무엇을 구하십니까? - 보리를 얻으러 왔오.
“스님 보리는 어떻하구요?”
탁발승은 대답을 못하고 홍당무가 되어 물러갔다. 보리菩提를 구하다니? 자기 마음속에 충만한 보리는 어떻게 하구요? 하는 뜻이다.
또 한 번은 객승이 석양에 문전에 와서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 새우고 갈 방 하나를 얻고자 합니다”
- 삼계가 원래 공한 것인데 무슨 방을 구하시렵니까?
선을 모르는 객승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선기가 날카로운 영조는 정오가 되면 알리라는 아버지 말에 짐작하고 먼저 갔던(別世) 것이다.

- 할 수 없구나. 딸애가 나보다 솜씨가 빠르니 나는 이레 뒤에 갈밖에 .  . .
거사는 영조의 껍데기를 거두어서 손수 다비茶毘해주었다. 죽음을 예고하고 여의치 않아 또 7일을 연기하는 도인 . . . 방거사는 생사를 자유자재로 하는 도인이었다.
드디어 기다리는 일주일 후가 왔다. 이때, 양주 태수로 우적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역시 선에 깊이 통달한 거사였다. 평소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라 마침 이때 방거사를 심방했던 것이다. 도담道談을 나누다가 방거사가 갑자기 피로한 듯하더니
“내가 좀 피로하이”     - 그런가. 좀 눕게나.
“자네 무릎을 좀 벨까?”  - 그렇게 하게나.
방거사가 태수의 무릎을 베고 눕더니 태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서로 준이 마주치자 무언의 작별을 나누는 것이었다. 한참을 누어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큰소리로 외친다.
“공화空華의 그림자는 어지러이 떨어지고 양염陽焰의 파도는 거세게 물결치는구나” 이 한마디를 남기고 정좌하여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드는 것이었다.
태수는 조사의 조사열반에 깊이 감동하여 다비를 치르고 유골을 방거사의 부인에게 보냈다. 방노파龐老婆는 일시에 남편과 딸의 유골을 받고도 조금도 애통해 하는 기색도 없이 한마디 내 뱉는다.
“무심한 부녀로다. 한마디 고별인사도 없이 가버리다니 . . . ”

아들은 산중에서 개간을 하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듣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손등으로 땀을 닦으면서 “먼저 가셨군요”하더니, 괭이를 지팡이처럼 집고 선 그대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심부름꾼은 한동안 좌탈입망하고 하직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터라 엉겁결에 방 노파에게 전하니 그녀 역시 “참 못난 자식이로다”하고 뇌이면서 아버지 옆에 묻어주었다. 고향에 내려가 친척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어디론지 사라져 그녀의 거취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와 딸은 앉아서 가고, 아들은 서서 갔으니 그 노파는 어리석고 못난 짓이라고 꾸짖었는데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갔을까?

방거사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준 게송이다.

但自無心於萬物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何妨萬物常圍?   만물에 둘러싸인다고 어찌 나쁘랴
鐵牛不?獅子吼   철소는 사자후를 겁내지 않나니
恰似木人見花鳥   흡사 목인이 꽃을 보는 것 같네  
木人木體自無情   목인의 본래 몸은 정이 없어서
花鳥逢人亦不驚   꽃 새가 그를 보되 놀라지 않네
心境如如只遮是   마음경계 여여하기 이러할진대
何慮菩提道不成   보리도 못 이룰까 어찌 염려하랴?

 

임제(臨濟義玄)선사 (?~867) 열반송

沿流不止問如何   법을 길이 이으려면 어찌하랴 묻는 말에
眞照無邊說似他   진성(眞性) 비춤이 끝없어서 그에게 이르기를,
離相離名人不稟   모양을 떠나고 이름 떠난 그것 좀체 아니 받나니
吹毛用了急還磨   취모검(吹毛劍) 쓰고 나선 급히 다시 갈라고.

 

임제선사

임제 의현(臨濟義玄 : 787~867)선사는 당나라 말기에 살았던중국이 나은 위대한 스님이다.
일본의 철학자인 "이시다 기다로" 박사는 2차 세계대전중에 일본의 귀중한 서적이 모두 불타 없어져도 임제선사의 어록인
『임제록』만 타지 않고 남으면 만족하겠다고 하였다.

우리 한국 불교의 조계종 또한 임제선사가 창종한 임제종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 말기의 국사였던 태고(太古)대사가 중국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는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3~1352)의 선맥을 수입해 왔다.
그것이 조선시대 선불교에 큰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 법맥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

임제선사는 하북(河北) 진주(鎭州)의 임제원에서 종풍을 드날렸다. 그래서 후세에 이를 임제종이라 불렀다.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임제선사를 지켜보던 수좌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여기서 얼마나 공부했습니까?"
"3년입니다."
"큰스님께 깨달음의 세계에 대하여 여쭙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임제선사는 수좌스님의 가르침대로 황벽선사를 찾아가서 깨달음의 뜻을 여쭈었다가 몽둥이로 얻어 맞았다.
수좌스님이 다시 여쭈어 보라고 격려하여 다시 찾아갔다가 결국 세번을 모두 몽둥이로 얻어 맞기만 하였다.

마침내 임제선사는 자신의 근기가 황벽선사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음을 깨닫고, 황벽선사를 찾아가 하직인사를 드렸다.
황벽선사는 말했다.
"고안(高安) 땅에 대우(大禹) 큰스님을 찾아가면 반드시 너에게 깨달음을 일깨워 줄 것이니 그리로 찾아 가거라."

임제선사가 대우 큰스님을 찾아가자, 대우 큰스님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황벽산에서 왔습니다.."
"황벽선사가 무슨 말(어떤 가르침)을 하였는가?"
"깨달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세 번이나 여쭈어 보았다가 세 번이나 몽둥이로 얻어맞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황벽선사의 노파심이 절실하여 너에게 그렇게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려고 간절한 가르침을 주었건만, 무슨 잘잘못을 따지고 있느냐? 이 맹꽁아!"
임제선사는 이 말 끝에 즉석에서 크게 깨닫고 말했다.
"황벽선사의 깨달음도 별 것이 아니군요."
"조금 전에는 네게 잘못이 있니 없니 하면서 오줌싸게 노릇을 하더니, 황벽선사의 깨달음의 경계가 별 것이 아니라니. 네 놈이 무슨 도리를 깨쳤는지 빨리 말해 봐라!"

임제선사는 갑자기 대우 큰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을 쳤다. 대우 노스님은 임제선사를 밀쳐내며 말했다.
"너는 황벽선사에게서 배운 제자이니 그에게 가거라. 나와는 상관이 없다."

임제선사가 황벽선사에게 돌아와서 깨달음을 인정받고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1089 ~1163) 열반송

生也祗麽   삶이 이러하고
死也祗麽   죽음이 이러하나니
有偈無偈   게송이 있고 없고
是甚麽熱   이 무슨 뜨거움인가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

송대 임제종 양기파, 선주(안휘성) 영국현사람, 성은 奚씨 자는 담회 호는 묘희, 운문.

12세에 향교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세간공부가 어찌 출세간법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16세에 동산 혜운원에서 득도하고 자력으로 운문, 목주등의 설화를 숙독하였다. 출가초기에 조동문하에서 선지참구하고 정화원년(1111) 경산의 담당문준(진정극문의 법사)회하에서 공부하고 각범혜홍(1071-1128), 장상영 등을 배알하다. 담당의 유탁으로 환오극근에게 나아가 증오하다.

 승상 여순도의 주청으로 ‘불일대사’의 호를 받고, 원오가 촉땅으로 돌아간 후 金과의 전란을 피하여 해혼(강서성)의 운문암에 이주하다. 사는 특히 조동의 묵조선에 대하여 ‘공안선’을 고취하며 경산의 능인선원에서 교화하니 학인이 항상 2천을 헤아려 ‘임제의 재흥’이라 칭하다. 그러나 전란이 간상 진檜 등에 의해 화약으로 체결되자 주전론자인 장구성당으로 몰려 의첩을 빼앗기고 형주(호남성)로 유배당하며 10여년을 고생하는 동안 [정법안장 6권]을 지었다. 그뒤 사면되어 아육왕사에 주하며 천동산의 굉지와 도교하였다.

1158년 다시 경산에 주하면서 효종제로부터 ‘대혜선사’라는 호를 받고, 남송 융흥원년 75세로 시적하다.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남긴 임종게에,‘生也只恁麽 死也只恁麽 有偈與無偈 是甚麽熱大’라 하다. 시호는 보각. 그는 특히 오조연에서 비롯한 공안선(간화선)을 확립하여 천동정각과 당대 선계의 쌍벽을 이루었다.(대혜년보, 회요17, 보등록15, 회원19, 통재20,속전등록27, 속선림승보전6, 명고승전5)

저서:[大慧語錄 12권] [대혜법어 3권] [대혜보설 5권][大慧宗門武庫] 등.

 

고봉(高峯)선사(1238~1295) 열반송

來不入死關   와도 죽음의 문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
去不出死關   가도 죽음의 문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
鐵蛇鑽入海   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撞倒須彌山   수미산을 쳐 무너뜨리도다

 

 

고봉(高峯, 1238~1295)선사는 중국 송나라 말, 원나라 초기에 살았던 분입니다.

이 분이 열반한 후 속가제자인 홍교조(洪敎祖) 직옹(直翁)거사께서 고봉화상이 남기신

 어록 중 요긴한 부분을 발췌하여 <선요>라는 명저를 편집하여 출간함으로써 스승인

고봉선사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선요>는 간화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봉선사의 수행과정이 중하근기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래 고봉선사의 법문을 보시면 화두가 들리지 않아 세네번 화두를 바꾸는 과정이

나오는데, 마치 내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나는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옷을 갈아입고, 정자(淨慈)에 가서 3년을 선(禪)을 배웠다. 처음 단교(斷橋)스님에게 참문하니 "태어날 때 어디서 왔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생하처래 사하처거]"를 참구하게 하시는데 생각이 두 갈래로 갈려 도무지 순일하지를 못했다.

 

후에 설암(雪巖)스님을 뵈오니, "무(無)"자를 참구하라 하시고 또한 이르시기를 " 사람이 길을 갈 때 하루의 갈 길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처럼 너는 매일 올라와 한마디 일러라"하시더니, 그 후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대뜸 "어느 물건이 이 송장을 끌고 왔느냐?[타사시구자]"하시고는 입을 열기도 전에 때려 쫓아내셨다. 

 

후에 경산으로 돌아와 지내는데 하루밤 꿈 속에서 문득 전날 단교스님의 방에서 들었던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만법귀일 일귀하처]"가 생각나니 이로부터 의정이 돈발하여 동서남북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6일째 되던 날 대중을 따라 누각에 올라가 풍경(諷經)하다가 문득 머리를 들어 오조연(五祖演)스님의 진찬(眞讚)을 보니, 끝 두 구절에 "백년이라 3만6천, 온갖 조화 부린 것이, 원래가 단지 바로 이놈이니라."하고 쓰인 것을 보고, 홀연히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 화두를 타파하고, 즉시 혼담이 날아가 버린뜻 기절하였다가 깨어나니 이 경지를 어찌 120근 짐을 벗어 버린 것에 비하랴! 그때는 24세요, (못 깨달으면 자결하기로 맹세하였던) 3년 기한이 다 차던 해였다.

 

그 후 설암스님께서 물으시기를, "번잡하고 바쁠 때에 주재(主宰)가 되느냐?"

 "됩니다."

 "꿈 속에서 주재가 되느냐?"

 "네! 됩니다."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을 때

 너의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에는 대답할 말도 없고 내어 보일 이치도 없었다. 이에 화상께서 

 "너는 이제부터 불법도 배울 것 없으며, 고금도 공부할 것 없으니 다만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자되, 잠이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이 일각(一覺)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것일까?"하고 참구하라 하시었다. 

 나는 "차라리 평생을 바보가 될지언정 맹세코 이 도리를 명백히 하고야 말리라" 맹세하였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어느날 밤, 잠에서 깨어 이 일을 의심하고 있는데 같이 자던 도반이 잠결에 목침을 밀어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에 홀연히 저 의단을 타파하였던 것이다. 마치 그물에 걸렸다가 풀려나온듯 하고, 불조의 공안과 고금의 차별 인연에 밝지 않음이 없게 되어, 이로부터 나라가 평안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한 생각 일으킴 없이 시방을 좌단하였던 것이다.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 (1301~1382) 열반송

人生命若水泡空   삶이란 물거품과 같나니
八十餘年春夢中   팔십 평생이 일장춘몽이로다
臨路如今放皮袋   이제 길을 떠나며 가죽 껍데기를 벗자니
一輪紅日下西峰   둥그런 붉은 해는 서산에 떨어지노라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충렬왕 27)~1382(우왕 8).

고려 말기 권문세족인 홍주홍씨(洪州洪氏) 출신으로, 아버지는 연(延)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13세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하는 회암사(檜巖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했다. 19세 때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참구했으며, 화엄학에 정진해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했다. 그러나 경전 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선(禪)의 수행으로 돌아가 정진하기 위해,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갔다가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했다. 1337년(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여 이듬해 정월 크게 깨달았다. 그뒤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있다가 1341년(충혜왕 복위 2) 중흥사 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짓고 그곳에 머물면서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 중국의 선승에게 인가를 받으러 원(元)에 건너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다. 원에 가서 2년간 머물렀는데, 원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에게 〈반야경〉을 강설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1348년 귀국 후 광주(廣州) 미원장(迷元莊)에 우거하면서 친척을 모아 일가를 이루고 공민왕에게 요구하여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설치하게 했다. 1356년(공민왕 5) 왕사(王師)로 책봉된 뒤 조정에 별정직 기관인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승직의 임명권을 장악했는데, 이는 종래의 교단운영 원칙이 무너졌음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고려의 전통적인 오교양종(五敎兩宗)의 교단체제도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그는 구산선문의 통합을 건의했으며, 수도를 남경(南京:漢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신돈과의 권력다툼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돈이 집권하자 보우는 사승(邪僧)으로 지목받고 속리산에 금고당했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했으나 병을 핑계삼아 사양했다. 1381년(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이때 우왕이 다시 국사로 봉했다. 1382년 소설사(小雪寺)로 돌아와 죽었다.

사상

그는 먼저 시대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관찰할 것을 주장하고, 당시의 구산선문에서의 파벌싸움이 심각함을 시대의 큰 폐단으로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구산을 일문으로 통합할 것을 주장하고 선문의 규칙도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구산선문을 넘어 전체 불교 교단의 문제로 확대되지 못했고, 당시 불교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당시 국가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던 권문세족과 같은 입장에 서서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농장을 확대하고 신돈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입장을 취했다. 즉 임제종의 간화선을 내세워 선의 지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천편일률적으로 무자화두만을 참구하도록 했다. 보우가 주장하는 선의 실천방법은 처음부터 선문의 쇄락(灑落)한 활구(活句), 즉 화두만을 철저히 참구할 것이며, 만일 그것에서 소득이 있으면 본분종사(本分宗師)를 찾아가 확인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지해도 용납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거의 모든 경우에 내세우고 있었던 무자와 같은 화두에는 지해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용납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휴정(休靜)의 제자들에 의해 보우의 법통이 크게 강조되었다. 저서로 〈태고화상어록 太古和尙語錄〉·〈태고유음 太古遺音〉 등이 있다.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나옹혜근(懶翁惠勤)선사 (1320∼1376) 열반송

 

七十八年歸故鄕   칠십팔 년 고향으로 돌아가나니                         
天地山河盡十方   이 산하대지 온 우주가 다 고향이네                    
刹刹塵塵皆我造   삼라만상 모든 것은 내가 만들었으며                   
頭頭物物本眞鄕   이 모든 것은 본시 내 고향이네.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

고려때스님, 이름은 원혜(元惠) 법명은 혜근 호는 나옹, 또 江月軒이라 했고 성은 牙씨, 寧海사람.

태어나면서부터 골상(骨相)이 비범하고 영특하였다.
20세때에 이웃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어른들에게,‘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功德山 妙寂庵(지금의 사불산 윤필암 四佛山 潤筆庵)의 了然선사에게 가서 祝髮得度하다.

 了然이 나옹에게,
‘네가 여기에 온 주인공 그것이 무었이냐?’라 물으니
나옹은,‘능히 말하고 듣는 그것이 왔습니다. 그러나 보려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읍니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읍니까?’ 하니 요연이,‘나도 너와 같이 말도 하고 듣기도 하는 그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다른 곳에 가서 가르침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至正4년(1344)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坐禪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
때에 일본승려 石翁이 禪床을 치며,‘大衆還聞麽’하고 물으니 師가 게송으로,‘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하였다.

 1348년 3월 大都(北京) 法源寺에서 指空禪師를 뵙고
지공問曰,‘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師曰,‘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는가 神通으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습니다’
‘신통을 보여 보아라’하니, 師가 지공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손을 포개어 叉手하고 서 있었다.
뒤에 게송을 지어 指空선사에게 드렸으니,
‘山河大地眼前花 萬像森羅亦復然 自性方知元淸淨 塵塵刹刹法王身. 迷則山河爲所境 悟來塵塵是全身 迷悟兩頭俱打了 朝朝鷄向五更啼’.

 1350년 8월 남쪽으로 내려가 淨慈寺 平山處林선사를 친견하였다.
平山問曰,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師曰,‘大都에서 왔습니다’
‘일찌기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
‘西天 指空선사를 만났읍니다’
‘지공은 매일 무엇을 하는가’
‘지공은 매일 千劒을 씁니다’
‘지공의 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一劒을 내놓아라’하니 師가 坐具로 평산을 후려쳤다.
평산이 선상에 쓰러지면서
‘이 도둑이 나를 죽인다’고 소리치자 師가 평산을 일으켜 세우며,
‘吾劒能殺人 亦能活人’이라 하니 평산이 크게 웃고 손을 잡고 方丈으로 가서 차를 권하며 몇달을 묵어가게 하였다.
 평이 어느날 信表로 法衣 한 벌, 拂子 하나를 주었다.

1358년 귀국하여 가는 곳마다 법을 설하다가 恭愍王이 청하여 내전에서 法門을 듣고 神光寺에 있게 하다.
그후 淸平寺에 주하다가 1370년 廣明寺에서 왕이 親臨한 가운데 ‘工夫禪大會’를 主宰하고 이듬해 王師가 되어 松廣에 주하였다.

1372년 우연히 지공선사의 ‘三山兩水之記’를 생각하고 檜巖寺를 重修하여 文殊會를 열어 낙성하였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賓天하고 1376년 우왕의 칙명으로 밀양 靈源寺로 가다가 驪州 神勒寺에서 입적하다. 師가 示寂할 적에 오색구름이 산위를 덮고 茶毘를 하니 頭骨 5片과 牙齒 40개는 타지 않았으며 舍利는 수없이 많았다 한다.

나이 57, 시호는 禪覺 또 普濟尊者. 李穡이 碑銘을 지어 碑와 浮屠가 회암사에 있다.
(보제존자나옹화상行狀, 보제존자諡禪覺塔銘)

 

 

함허득통(涵虛得通)선사 (1376~1433) 열반송

湛然空寂 本無一物   넉넉하여 공적하니 본래 한 물건도 없으며
神靈光赫 洞徹十方   신령스러운 빛이 혁혁하여 온세상에 뚜렷하여라
更無身心 受彼生死   다시는 몸과 마음이 생사를 받지 않아
去來往復 也無罣碍   오고 감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도다
臨行擧目 十方碧落   나아가려다 눈을 뜨니 온세상이 뚜렷하여라
無中有路 西方極樂   없는 가운데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로다

 함허화상(涵虛和尙)_(1376∼1433)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수호한 고승. 성은 유(劉)씨.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처음 법명은 수이(守夷)이며, 처음 법호는 무준(無準)이다. 충주출신.

아버지는 전객사사(典客寺事) 청(聽)이고, 어머니는 방씨이다. 미륵보살에게 기도하여 태어났다고한다.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의 뜻을 굳혔다.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 들어가서 삭발하였다. 1397년 회암사(檜巖寺)로 자초(自超)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들은 뒤 여러 산을 두루 편력하였다. 1404년(태종 4)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정좌(靜座)하고 수행을 시작하여 크게 깨우쳤다. 그뒤 1406년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 가서 4년 동안 <반야경>을 세 차례 설했고, 1410년에는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觀音窟)에서 선을 크게 진작하였다. 1411년부터 절을 중수하는 한편, 모여드는 승속(僧俗)들을 조사(祖師)의 선풍(禪風)에 입각하여 지도하였다.

1414년 3월에는 평산(平山)의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峯寺)에 작은 방을 얻어 함허당(涵虛堂)이라 명명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세 차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들어가서 오대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자사한 뒤, 그 암자에서 잘 때 꿈에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으로 지어 주어 이후 그것을 사용하였다.

1431년 문경의 희양사(曦陽寺) 봉암사(鳳巖寺)로 가서 퇴락한 절을 크게 중수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문인으로 문수(文秀)·학미(學眉)· 달명(達明)·지생(智生)· 해수(海修)·도연(道然)· 윤오(允悟) 등이 있다. 그는 자초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임에는 틀림없으나 스승과는 달리 교(敎)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사상 또한 교학적(敎學的)인 경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의 선(禪)사상에는 현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배불을 주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입장은 <현정론(顯正論)>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그는 불교와 유교의 회통(會通)뿐 아니라 도교까지 포함한 삼교일치를 제창하였다. 이 삼교일치이 사상은 신라말 최치원(崔致遠)의 사상에서도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것은 그에 의해서 시작 A었다. 그의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유교측의 강력한 배불론에 대한 호불이라고 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된 것이다. 그는 종단폐합과 사사혁거(寺社革去) 및 사전노비(寺田奴婢) 몰수 등으로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한 고승이었다. 1433년 4월에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들어보니 시방(十方)이 벽락(碧落) 하나 없는 데도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에는 <원각경소(圓覺經疏)>3권, <금강경오가해설의>2권 1책, <윤관(綸貫)>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1권이 전하여진다. 그밖에도 <반야참문(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청허휴정(淸虛休靜)선사 (1520~1604) 열반송

千計萬思量   천 가지 계획 만 가지 생각
紅爐一點雪   붉은 화로 속 한 점 눈송이
泥牛水上行   진흙 소가 물 위를 가나니
大地虛空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도다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휴정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마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12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 다음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청학동(靑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유람하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등록 傳燈錄〉·〈염송 拈頌〉·〈화엄경〉·〈능엄경 楞嚴經〉·〈반야경〉·〈원각경 圓覺經〉 등의 교리를 탐구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머리를 깎았으며,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불(佛)·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교석 禪敎釋〉·〈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운수단 雲水壇〉 등이 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으며,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부휴(浮休)선사 (1543~1615) 열반송

七十餘年遊幻海   칠십 년 꿈과 같은 바다에서 놀다가
今朝脫却返初源   오늘 이 몸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廓然空寂本無物   텅 비어 적적하여 한 물건도 없나니
何有菩提生死根   어찌 깨달음과 나고 죽음이 따로 있겠는가

 

(부휴선사.1543∼1615)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김씨. 호는 부휴(浮休). 남원출신. 아버지는
적산(積 山),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 부터 원주(圓珠)를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어릴때 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20 세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되었고, 그 뒤 부용(芙蓉) 의 밑에서 수도하여 심요(心要)를 얻었다.

그 뒤 덕유산· 가야산 ·속리산· 금강산 등의 이름있는 사찰에서 더욱
수행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 愼)의 장서를 7 년 동안 읽었다.

그의 필법은 왕희지체를 익혔는데, 사명당(四溟堂 )과 함께 당대의
2 난(二難)이라 불렸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산 초암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적 수십명을 만났다.

차수(叉手)를 하고 선 그 의 앞에서 왜적이 칼날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그가 태연부동하게 있었으므로 왜적들이 대기(大奇)하여
절한 뒤 물러갔다.

그 뒤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 )이
찾아와서 법문을 듣고 며칠 동안 옆에서 모셨다.

얼마 뒤 무주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하루는 <원각경 (圓覺經)>을
위우고 있을 때 큰 뱀이 나타나서 계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 원각경>을 다 외운 다음 뱀에게 가서 한발로 그 꼬리를 밟자
뱀이 머리를 들고 물러났다.

그날밤 꿈에 한 노인이 절하고는 "화상의 설법의 힘을 입사와 이미
고신(苦身)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는 두류산에 있었는데 어떤 미친 승려가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가 판명되어, 광해군이 내전으로 초빙한 다음 설법을 청하여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가사 한벌과 푸른 비단장삼 한벌, 푸른 비단바지 한벌, 금강석
염주 하나와 진완 (珍玩)을 주었다.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齋)를 설하여 그를 증명으로 삼았다.

1614 년 에는 조계산에서 방장산 칠불암(七佛庵)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 7 월 제자 각성(覺性)에게 부법(付法)하였다.

그해 11 월 1 일 목욕을 한 다음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나이 72 세, 법랍 57 세 였다.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名利 외면한 수행승의 본보기

1) 생 애
浮休禪師(부휴선사)는 속성이 김씨이고 법명은 善修(선수)이며 호는 浮休(부휴)로
전북 獒樹(오수.지금의 남원)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積山으로 조상은 일찍이 신라 조정에 높은 벼슬을 지낸 대성이었지만
신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도 몰락하여 서민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李(이)씨인데 자식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부부가 함께 서원하기를 만약 자식을
얻으면
  출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한 奇石(기석)에 자식을 얻기를 기도했는데 어느날
 저녁 꿈에 한 신승이
하나의둥근 구슬을 주자
 이것을 받아삼키고 임신을 하였다.  
선사가 태어난 해는 明(명)의 世宗帝(세종재) 嘉靖(가정) 22 년(중종 38, 1543)
癸卯(계묘) 2 월 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를 “뜬세상이 매우 어두우니 저는 장차 출가하기를
바랍니다”고 하더니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信明長老(신명장로)를
좇아 머리를 깎고 芙蓉靈觀(부용영관)대사의 게송을 듣고 그의 친절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그의 심법을 남김없이 터득 하였다.
그의 신체적 특징은
 배가 크고 눈썹이 길며 몸이 컸는데 다만 왼쪽 손이
조금 不仁(불인)하였다.
득법 후에는 京師(경사)에 나아가 당시의 재상 盧守愼(노수진.蘇齊.소제)의 장서를 빌려
보았는데 7 년만에 그의
 책을 남김없이 다 보았다.
그의 필법 또한 매우 뛰어나,
 당시 사명대사와 더불어
二難(이난.두
 사람의 상대하기 어려운 명수)이라 불리어졌다.

壬辰亂(임진란)을 당하여 덕유산의 초암에 있었는데 왜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암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저녁 늦게 왜적이 지나갔으리라 생각하고 샛길을 따라
암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돌연히 왜군 10 여명이 숲속으로 부터 나와서 칼을 휘두르며 기세를 떨쳤으나 선사는
叉手(차수.(깍지낌)하고 서서 태연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왜적들은 이것을 크게 이상스레 여겨 모두 선사에게
 엎드려 절하고 흩어졌다.
다음 해에 사명대사가 선사를 조정에 천거함으로 진중에 이르러
 선사도  승장의
한 사람이 되어 전지를 전전 하였다.

난이 평정되니 선사는 가야산으로 가서 다시 선창의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명나라
 사신 李宗城(이종성)이 황제의 명을 받고 豊臣秀吉(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에
봉하려고 서책과 함께 바다를 건너려 하다가 도중에 가야산 해인사를 유람하던 중 선사를
번보고 심복하여 돌아갈 것을 잊고 며칠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선사가 九天洞(구천동)으로 옮겨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눈을 감고 『원각경』을 암송하는데 아직 경을 다
 암송하기 전에 한 마리의 큰 구렁이가
계단 밑에 넘어져 있음을 보고 그 꼬리를 제쳐주니 다시 서서히 기어가는데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날밤 꿈에 노인이 와서 선사에게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화상께서 독경하는 것을 듣고 이미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고 하였다.

光海君朝(광해군조)에 선사가 두류산에 거주할 때의 일이다.
임자년에 광인의 무고를 받고 제자 碧巖(벽암)과 함께 당시 수도에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광인이 누구인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풍수설에 밝고 여러 큰 절을 짓게 하면서 궁중에
출입했던 性智(성지)라는 설이 있다.
선사가 옥에 갇히자, 옥을 관리하는 사람이 스님을 보니 氣宇(기우)가 軒昻(헌앙)하고
 언설도
또한 비범한지라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것을 광해군에게
 아뢰었다.
다음날 광해군이 선사를 안으로 들도록하여 법요를 물어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紫蘭(자란)가사,
壁彩(벽채)장삼,
 염주 등을 하사하고 그 밖에도 진기한 물건들을 후하게 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봉은사에 큰 재회를 열어 선사를 도사로 삼아 궁중에서 쓰던 좋은 말을
  타게 하고 ?人들로 하여금 전도케 하니 당시 경성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 모습을 우러러 뵈옵고 절을 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선사는 평생토록 신도로부터 받은 것을 일찍이 한 물건도 간직한 일이 없고 모두 흩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었다.
선사의 기품과 도량은 매우 깊고 의연하였으며, 크고 넓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선사의 法學(법력의
 명예)가 해내에 분분하여서 스님을 찾아와 도를 배우려는
자가 7 백여에 달했다.

광해군 6 년 庚寅(경인)에 선사는 72 세가 되어 송광사로부터 쌍계사 · 칠불암으로 갔는데,
이는 입적할 땅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해 7 월에 가벼운 병증세를 보이더니 上足(상족)제자 碧巖覺性(벽암각성)을 불러 간절히
법을 부촉하였다.
11월 1일 午時(오시)에 목욕을 마치고 시자를 불러 지필을 가져오도록 하여 하나의 게송을 썼다.
‘七十三年(칠십삼년)을 幻海(환해)에 노닐다가 오늘 껍질을 벗고 初源(초원)으로 되돌아간다.
廓然空寂(확연공적)하여 원래 一物(일물)도 없거니 어찌 菩提(보리)와 생사의 뿌리가 있으랴.’
쓰기를 마치고 조용히 遷化(천화)하니 法臘(법랍)이 57 세였다.
문인들이 靈骨(영골)을 수습해 이것을 나누어 海印(해인), 松廣(송광), 七佛(칠불),
百丈(백장) 네 곳에 부도를 세웠다.
이 일이 있은 지 5 년 후에 광해군이 ‘弘覺登階’(홍각등계) 라는 시호를 陽(양)하였다.

(상은 李能和.이능화 선생의 『조선불교통사』 高橋亨(고교형)의 『李朝佛敎.이조불교』 및
忽滑谷快天(홀골곡쾌천)의 『朝鮮禪敎史.조선선굑사』
金仁德.김인덕 교수의 『浮休禪師.부휴선사의 禪思想선사상』을 참조하였음.)


2) 교우관계
芙蓉靈觀(부용영관)선사의 심법을 곧바로 이은 직계제자로는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세에 학덕과 공훈 및 승계에 있어서 서산대사를 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서산대사에게 사명대사와 같은 걸출한 제자가 나와서 스승의 법예를 드높인 것처럼
부휴대사도 碧巖覺性(벽암각성)과 같은 빼어난 제자와 翠微(취미. 白谷.백곡 ·
晦隱.회은.등과 같은훌륭한 제자를 두어 그 법맥이 면면히 이어졌다.

벽암각성은 사명대사의 뒤를 이어 팔도 도총섭이 되어 毫名(호명)을 떨친 사람이다.
물론 제자의 많고 적음과 세상에 대한 공적에 따라서 바로 그 사람의 禪的境地(선적경지)를
평가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훌륭한 제자를 키워낼 수 있었음은 그의 법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부휴선사는 서산대사와 법형제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23세나
아래이므로 나이만으로 보면 사명대사와 동년배가 된다.
그러므로 법형인 서산스님을 스승과 같이 존중하였으며, 사명대사와는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명스님의 글이 있다.

“성인이 가신 지 3 천년이 지난 지금 大雄(부처님)의  진실한 법은 날로 쇠퇴하고 마군의 말들만
분분한데 사람들은 모두 이것에 취해 있구나. 金言(금언)은 땅에 떨어지고 세상은 헛된 말만
쫓아서 집착하니 이 때를 당하여 靈山(영산)이 어찌
 평안하겠으며 少林(서림)은  어느날  생기를
되찾을 것인가.
지금에는 오직 正眼(정안)을
 지닌 우리 형님이 있을 뿐이니, 형님이 아니고서는 누가 
邪網(사망)을 다시 정돈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 형님이라 칭한 것은 곧 부휴선사를 가리킨 것이다.
두 분의 서로를 아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사명대사가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 보니 종문의 본분사에
충실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를 은근히 자기가 마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부휴선사에게 당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휴선사는 다만 종문에서만 선지에 밝은 탁월한 스님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에
학덕과 인격을 갖춘 최고 수준의 유생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의 재상이었던 盧守愼(노수신)과의 관계가 잘 말해준다.
선사가 그의 책을 빌려서 7 년만에 모두 독파하였음은 이미 말한 바이지만 두 분은 사상적으로도
불 · 유에
 구애됨이 없이 토론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노수신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夙興夜寢箴註.풍여야침잠주』에 心(심)의 體用(체용)을
설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一物(일물)이 문득 지나가도 眞體(진체)는 전과 같이 그 光靈(광영)을 모두어
흩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려가 끊어져 明鏡止水(명경지수)와  같되 터럭 끝만치도 꾸민 흔적이 없으며
虛明靜一(허명정일)의 상이 있으되 비록 귀신이라 할지라도 그 分際(분제분별되어진 모습)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이 靜(정)하면서 存養(존양)하는 것 이 다"

여기서 一物(일물)이라 함은 眞如一心(진여일심)이라 볼 수 있고 眞體(진체)란
心眞如自體(심진여자체)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心體(심체)가 비록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眞如自性(진여자성)은 본시 그대로의
光靈(광영)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한 사려가 끊어져
 명경지수와 같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는 인위적으로 닦아 얻는 것이
아님을 다음에 말한 것이며, 끝으로 眞如自性(진여자성) 자체는 귀신이라도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心의 體用(체용)을 묘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으로 비록 언로의 자취가 남겨진 흠이
있으나, 선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없이는 하기 힘든 말이다.
그러므로 이퇴계 선생도 이 글을 평하여 말하기를, “禪(선)의 寂照虛通(적조허통)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또한 노수신은 竊見通書(절견통서)에서 말하기를 “성인을 가히 배울 수 있습니까?
배울 수 있소이다.
요긴한 것이 있습니까?
있소이다.
청컨대 여쭈어 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요긴한데 無欲(무욕)입니다.
무욕한즉 靜虛(정허)하고 動直(동직)합니다.
靜虛(정허)한즉 밝고(명) 밝은즉 통합니다.
動直(동직)한즉 공평하고 공평한즉 溥大(부대)하게 됩니다.
明通(명통)하고 公溥(공부)하면 두루할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노수신이 비록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심의 체용에 대한 이해와 공부 방법에
대해서는 선사로 부터 시사받은 바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법맥과 선사상
松廣寺嗣院事蹟碑(송광사사원사적비)를 보면, 臨濟禪師(임제선사)로 부터 18 대를 전하여
石屋淸珙(석옥청공)에게 법이 전해졌고, 이 법을 고려의 太古普愚(태고보우)선사가 전해
 
받았으며, 다시 여섯번 전승되어 부휴선사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송광사 開倉碑(개창비)에서 말하기를, “고려승 보우가 중국 가무산에 들어가
석옥 청공선사의 회상에 참여하였는데, 淸珙(청공)은 임제의 18 대 嫡孫(적손)인 바, 보우가
이 법을 남김없이 증득하여 幻庵混修(환암혼수)에게 전했다.
혼수는 龜谷覺雲(구곡각운)에게, 각운은 登階淨心(등계정심)에게
  전했으며, 정심은
碧松智嚴(벽송지엄)에게, 지엄은 芙蓉靈觀(부용영관)에게, 그리고 영관은 상족 제자에게
전했는데 그 이름이 善修(선수)이고 자호는 부휴인 바 內典(내전)을 모두 꿰뚫어
一代(일대)의 宗師(종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휴선사가 서산대사와 동문의 형제임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임제선사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종의 골수 법맥을 계승한 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핵심은 문자의 소전을 뛰어난 格外禪道理(격외선도리)를
종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가운데 소식을 누가 알 수 있으랴.
크게 분발하여 제 몸뚱이도 잊고, 간절히
 疑團(의단)을 일으키니, 地一聲(지일성)에
천지가 무너지거늘, 어찌
 북쪽바다 남쪽 땅을 논의할 것인가?"

남쪽이다 북쪽이다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른 것일 뿐, 광대무변한 
허공계에는 그런 분별이 붙을 수가 없다.
하물며 천지가 무너져 버린 마당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문자의 해석이나 구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체험의 경지이며 이는
일체의 망상이 부서져 본연의 심광이 열린 자리를 노래한 것이다.
마음의 기틀이 근원의 빛으로 되돌아왔으므로, 이를 一念廻光(일념회광)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마다 스스로 衝天(충천)하는 기운이
 있으니, 일념회광하면 곧 대장부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이 끊어졌다면 말하지 마라.
비가 지나간 뒤에 산새들이 다시 서로 부른다"
흔히 말법시대에는 참선을 해도 소용없다고들 한다.
 
시대가 혼탁하고 중생의 근기가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發心求道(발심구도)는 하지 않고, 그 책임을 시대에 돌리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을 중생일 수밖에 없다고
 자굴하는 것인 바 선사는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심은 안이한 상황에서보다 오히려 위기의 자각에서 더욱 치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가 온 뒤에(즉 고뇌를 극복한 그 자리에) 깨달음의 환희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길은 단순한 도피의 길이 아니요,
적극적인 초극의 길이다.
그러기에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틀을 당해서 活眼을 열며, 사물에 응해서 玄風을 떨쳐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毘盧(비로)의 정수리를 밟으면, 연꽃이 불 속에서 피어나리라"

어렵고 답답하며 위험한 일에 직면하여 눈을 감아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진상을 직시해야만 된다.
정신이 죽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으며,
 산 정신으로 문제를 똑바로 보면
진상을 깨달을 수 있다.
진상을 깨닫고 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자타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다.
진상을 깨닫고 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자타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스스로 중생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체념하거나 자굴하지 않을 수
있어서 聖俗(성속)의
 한계를  뛰어넘으니, 비록 번뇌의 불꽃이 맹렬한 사바속에
있을지라도 청정한 자성이 결코 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에 돌아와 망상이 곧 空임을 了達(요달)하면 중생과 부처가 본시 통해서 같아지나니,
미혹함은 마치 불나비가 불꽃 속에 뛰어듬 같고 깨달음은 마치 학이 새장을 벗어남과 같다"

불꽃이 나비나 곤충을 태우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미물이 스스로 미혹하여 
제 몸을 태우는 것일 뿐이다.
창문이 본시 열려져 있으나, 미혹한 생명이 열린 곳을 향해 날지 않고 닫힌 창문만을 두드림은
창문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장애는 본시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제 스스로의 미혹에 있음이 분명할진대 답답함에서
벗어나는 길도 지혜의 눈을 여는 길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 진리가 특별한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말(言)을 잊고 그 뜻에 계합하여라.
그 근본 뜻에서 활안을 열면 邪魔外道(사마외도)가 스스로 歸降(귀강)하리라"

마음에 미혹됨이 있어 이것과 저것이 막혀 있으면 통할 길이 없고, 마음이 통해 있으면 막힘이 없다.
그러니 제 마음은 막아놓고 있으면서 다른 것이 나를
 장애롭게 한다는 생각이 있는 동안은
사마외도의 작란을 실감할 수 밖에는
 없다.  
반대로 제 마음이 통해 있으면 본시 사마외도가 있을 자리가 없고, 설사 그런 것이 있어서
작란을 하려 할지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시 통해 있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허공을 누가 막아 놓을 수 없음과 같다.

그러면 일념회광하여 활안을 열고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선사는 간화선의 방법이 그 첩경이
 됨을 이렇게 말한다.

“趙州(조주)의 無字(무자)에 疑端(의단)을 일으켜 12시중에 뜻을 오로지하여 보라. 
물이 다하고(盡.진) 구름이 다한 자리에 이르면 곧바로 祖師(조사)의 關門(관문)을 때려 부수리라"
조주선사의 무자화두는 매우 유명하여 중국에서 看話禪(간화선)이 행해진 이래 가장 대표적인
화두로서 손꼽히고 있다.
이 화두가 생긴 유래가 있다.
어떤 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개(大)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곧 ‘無(무)’라고
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스님은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열반경』 에는 ‘-切衆生悉有佛性(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 하여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였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그 스님이 부처님이나 조주스님을 의심했다면 굳이 의심을
 일으킬 까닭이 없다
. 또한 조주스님도 童眞出家(동진출가)한 大善知識(대선지식)으로 ‘古佛(고불)’이라 불리워지는
분이니,
 결코 虛言(허언)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그 스님은 큰 의심뭉치가 가슴을
 가득 채워 밤이고 낮이고 이 문제를 참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진실로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큰 신심을 전제로 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신심이 견고하지 않으면 절실한 의단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도 선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三要(삼요)’가 있는데,
첫째가 大信根(대신근)이요 둘째가 大疑團(대의단)이며 셋째가 大憤志(대분지)라고 했다.
부휴선사의 사상적 맥락도 서산스님과 軌(궤)를 같이하므로, 大疑團(대의단)과 大憤志(대분지)를
중시해서 發憤忘身(발분망신)하고 절실히 의단을 일으킬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큰 선심을 또한
매우 중시한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道(도)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나에게 있나니 부디 먼 곳에서 구하거나
하늘에서 구하지 마라.
마음을 거두고 산창 밑에 조용히 앉아서, 낮과 밤으로 항상 趙州禪(조주선)을 참구한다"

즉 道(도)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있음을 철두철미하게 믿어야만
趙州禪(조주선)도 비로소 참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도가 나에게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활안이 열려서 몸소 그런 것임을
증득한 것이 아니요, 여래의 말씀을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씀이 없으면 처음부터 의심을 일으킬 것도 없다.
따라서 선의 참구는 여래의 말씀을 부정하는데 그 특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래의
말씀을 몸소 체증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래의 말씀을 듣고 보면서 제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면서도
문자만 이해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진실한 불자가 아니요,
또 직심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은 큰 믿음과 진실한 마음을 바탕으로하여, 어째서 여래가 그와 같이 말씀하셨는지
그 속뜻(살림)을 끝까지 체득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과 교가 본시 원융하여 전혀 갈등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부휴선사는 사명대사 小禪疏(소선소)에서 말하기를 “부처님 법은 자비스런 배가 되어
모든 중생들을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네주시니 삼계의 火宅(화택)을 면하려면 모름지기
三寶(삼보)의 威神(위신)을 힘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薦登階禪師疏(천등계선사소)에서 말하기를 “위대한 부처님의 중생을 제도하시는
대비는 만겁을 지내도 다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또 追薦父母疏(추천부모소)에서는
“법계의 含靈(함령)이 다 불법의 가피의 힘을 입었고 하늘과 같이 끝이 없으매 나를
낳으신 부모의 은혜를 정성껏 갚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문을 두드려 그 저승의 길을 닦아야 할 것이온데, 만일 귀의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어찌 그 감응이 더디겠습니까?" 하였다.

이처럼 부휴선사는 선종의 골수 법맥을 이은 종사이지만 大信(대신)을 바탕으로
활안을 열어, 말의 끝을 버리고 그 속뜻을 포섭하여 일체함령을 자재롭게
度脫(도탈)하는 길을 걸었으니, 진실로 대승의 참 불자요,
이것이 곧 한국 선종의 특색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한(孤閑)선사 (1561~1647) 열반송

空來世上特   헛되이 세상에 와서
作地獄滓矣   지옥의 찌꺼기만 만들고 가나니
命布體林麓   이 몸은 저 숲과 산기슭에 버려
以飼育獸      짐승의 먹이가 되기를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열반송

 

解脫非解脫   해탈이 해탈이 아니니  

涅槃豈故鄕   열반이 어찌 고향이리 

吹毛光爍爍   취모검의 칼날이 번뜩이니 

口舌犯鋒鋩    입 벌리면 그대로 목이 잘리네.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1562∼1649)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오씨. 호는 소요(逍遙). 전라남도 담양출신.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다.
어려서부터 탐욕을 싫어하고 도훈(道訓) 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성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그때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밑에서 경률(經律)의 깊은 뜻을 익혔다.


부휴의 문하에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소요와 충휘(沖徽)·
응상(應祥)만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달마대사가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인가 를 묻는 話頭)를 물었다.
서산대사는 한번 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의발 (衣鉢)을 전한 뒤
3년 동안 지도하였다.
그뒤 얼마안되어 서산대사는 그에게,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버린다.
우스워라, 저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
라는 법게(法偈)를 주었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과 유정(惟政)이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가자, 그는 폐허가 된 빈 절을 지키며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전쟁 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南 漢山城)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西城)을 보완하게 하여 이를 완수하 였다.
그뒤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는데,
태능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만에 공사를 끝마쳤으며,
그가 법 (法)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異類)들까지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禪) 과 교(敎)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그의 선사상을 요약하면,
(1)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는 것,
(2)이 일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얻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우 리의 자성(自性)이라는 것,
(3)이 자성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라는 것,
(4)이 자성이 나의 참된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5)이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自覺)한 사람은 무위진인
(無位眞人)으로서 아무 것에도 의존하거나 결점이 없는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즉, 상징적인 비유를 통하여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
(實相)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철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1649년 11월 21 일 열반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임종 때에는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劒)의
빛이 빛 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解脫非解脫 涅槃豈故鄕吹毛光樂 樂口舌犯鋒鎚)."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평소 태능의 도(道)를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 혜감선사
(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소요당집(逍遙堂集)> 1권이 있다. 
 

 

 

괄허(括虛)선사 (1720-1789) 열반송

 

幻來從幻去   환에서 와서 환을 쫓아가나니
來去幻中人   오고감이 환 가운데 사람이로다
幻中非幻者   환 가운데 환 아닌 것이
是我本來身   나의 본래 몸일세

 

괄허대사(括虛大師)1720~1789 경북 문경출신
법명은 취여,속명은 여도선 13세에
사불산 승파조사에게서 축발
진곡선사에게서 의발을 받았는데
서산대사의 10세손이다.
문재가 뛰어나고 능필가 였으며
<괄허집>이 전한다.

 

경허(鏡虛)선사 (1849~1912) 열반송

心月孤圓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光呑萬像   빛이 만상을 삼켰어라
光境俱忘   빛과 경계를 함께 잊나니
復是何物   다시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경허선사 성우(鏡虛禪師 惺牛)(1849∼1912)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 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 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긷 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그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 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 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 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 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 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 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 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 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 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 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 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 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 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 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 (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 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 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 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 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 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혜월(慧月)선사 (1861~1937) 열반송

一切有爲法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本無眞實相   본래 진실한 상이 없도다
於相義無相   상에서 상 없음을 안다면
卽鳴爲見性   성품을 보았다고 하느니

 

혜월(慧月) 스님

  경허스님의 제자로 1862년(철종 13)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신(申)씨, 법명은 혜명(慧明), 법호는 혜월이다.
11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출가하여 24세 때 경허 스님을 만나 그 문하에 들게 되어 천장암에서 수행하게 된다.
그때 경허 스님에게서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배우면서 󰡐한 물건󰡑에 대해 참구하다가 우연히 짚신을 삼다가 신골을 치는 소리에 한 물건 이 환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그 후 1890년 경허 스님의 인가를 받았다.
  1912년에 북방으로 간 수월과는 달리 직지사를 비롯, 도리사, 파계사, 통도사, 내원사, 선암사 등 남쪽의 선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중생을 교화하다가 1937년 부산 안양암에서 입적했다.
  아울러 선사는 천진불(天眞佛), 어린아이 같은 무구한 삶을 평생 산 스님으로도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용성(龍城)선사, 1864~1940) 열반송

諸行之無常   모든 행이 무상하고
萬法之俱寂   모든 법이 적적하여라
匏花穿離出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아가
閑臥麻田上   삼밭에 한가로이 누웠나니

 

용성(龍城)선사

 

-불교현대화를 선도(先導)한 암흑기의 큰 별-

 

1) 시대적 배경

용성선사가 살다간 시대는 우리 민족사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5백년 동안의 숭유배불정책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아 왔으며 도성의 출입조차 금지된 8천민의 집단 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용성선사가 30대가 된 1895년에야 비로소 일본 일운종(日運宗) 승려 좌야전려(佐野前勵)의 상소에 의해서 3백년만에 해제되었다. 그리하여 승려의 서울포교가 가능해지긴 했으나 유생들의 천시와 모멸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으며, 불교신자들까지 자신이 신자임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대원군의 몰락과 더불어 서구의 세력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때  앞장을 선 것이 천주교, 기독교의 선교사들이었으며, 이들은 갑신정변 후 의료선교 등 갖가지 명목으로 이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서울에는 정동교회와 새문안교회 및 명동성당 신학교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세에 의한 서양종교의 전도와 포교에 민족자각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이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양반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민족정신이 양풍에 빼앗겨 감에 비분을 느껴 1894년에는 동학혁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체포로 일시 주춤했으나 뒤에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치하에서는 그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를 이용한 서구종교들은 일본에 충성심을 강요하면서 그 대가로  YMCA 같은 단체에서는 일본정부로부터 매년 기부금까지 받기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여 한글판 성경을 보급하였으며, 불교를 미신으로 몰아세워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산중에서 수행만 하던 용성선사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회의 변천에 발맞추어 외래종교의 적극적인 포교에 자극을 느꼈을 뿐더러  불교를 비방하는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어 1910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교리적인 논박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교리적 논박서로서는 최초의 저술일 것이다.

 

또한 교단 내부적으로는 일본불교의 상륙과 더불어 왜색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연종을 비롯한 일본불교 각 종단의 상륙은 일본식민지정책 중 한국불교를 왜색화 시킴으로서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도구로 삼고자 함에 있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종단의 간부들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1911년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서 한국불교는 완전히 자치력을 상실하고 일제의 손아귀에 송두리째 넘어가 관제불교가 되고 말았다. 전국의 불교는 31본산제도로 묶여졌으며 1929년경에는 80% 이상의 사찰이 승려의 취처행위(娶妻行爲)의 금지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교단내의 질서와 계율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으며 각 사찰마다 일본불교의 흉내를 내어 대처승들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용성선사는 왜색화 되고 천시 받으며 외세(外勢)에 도전받는 불교의 새로운 이미지 부각과 조용한 혁신을 위해 불교를 대각교(大覺敎)라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때에 처한 그는 조용한 개혁과 혁신은 파괴와 전통을 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것 중 지킬 것은 참답게 지키며 고칠 것은 과감히 고치는데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용성선사는 나라를 빼앗기고 교단이 위태로울  때 승려는 어떻게 나라를 되찾고 교단을 지킬 것인가를 보여준 화신보살이었다.

(2) 생애와 사상

선사의 생애를 크게 나누었을 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재속(在俗)기간이며, 둘째는 출가수행기이며, 셋째는 민중교화기로 구분된다. 이 중 선사의 법랍이 61세인데 이를 반으로 나누었을 때 전기는 수행기이며, 후기는 교화기에 속한다. 특히 후기의 교화기는 민족의 독립운동과 대중교화에 전력을 다 바치게 되며 이러한 결정체가 대각교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사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수원(水原) 백씨(白氏)인 남현(南賢)과 어머니 밀양(密陽) 손씨(孫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상규(相奎)이고 법명은 진종(震鍾)이며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자비스러운 성품으로 자라났으며 이에 관한 일화가 많으나 생략키로 한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 합죽선(合竹扇)이란 시를 짓기도 하여 총명함이 일찍부터 알려졌다.

14세 때 꿈에 부처님을 뵌 것이 인연이 되어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우수주(于手呪)를 9개월 동안 념(念)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난 뒤 화두참구(話頭參究)에 들어갔다. 23세 때에 낙동강을 지나는 도중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금오산에는 천추의 달이 걸려 있고

낙동강에 는 만리에 파도가 치는구나

  고깃배는 어디로 가는고

예나 다름없이 갈대밭을 의지해 쉬는구나.

 

 선사는 나중에 대각교를 세울 때 이 오도송을 종지천명(宗旨闡明)의 구(句)로 삼았다. 전 후 세차례에 걸쳐 오도한 선사는 그 뒤에도 보림과 정전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내전(內典)의 열람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러한 선사의 산중생활은 47세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일찍이 선곡율사(禪谷律師)에게 비구계를 받기도 한다.

 

전국을 다니면서 안거와 운수(雲水)생활로 40세 때까지 선(禪)을 중심한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종맥을 확고하게 다지면서 제방의 납자들을 접인하게 된다. 그러다가 44세 때에는 중국의 북경에 가서 천하의 선지식들을 만났으나 여기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귀국하므로 세계의 정세와 시대의 변천을 간파하게 된다. 특히 뼈저리게 느낀 것이 기독교 세력의 범람이었다. 기독교에서 불교를 비방하고 조직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음에 많은 자극을 받은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47세 되던 해에는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기독교의 불교 비방에 대하여 강력하게 논박하고 있다.

 

선사에게 있어서는 47세가 중요한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수행과 산중선회(山中禪會)를 중심한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세계를 갈구해 왔으나 이때부터 선사의 삶은 사바세계에 뛰어든 보살의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하게 된다.

특히 이 해는 한일합방이 체결된 1910년이므로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라를 빼앗겨 민족이 방황하고 있을 때 서울에 상경하게  되며 1911년에는 신도 집에서 법회를 보다가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게 되니 이가 오늘날의 그 자리이다. 대각사는 장안의 선도량(禪道場)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이때 한용운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선사와 상의하였으며 급기야는 1919년 3.1독립운동을 성사하기에 이르른다. 선사 역시 33인 가운데 불교 대표로 참여함으로서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선사의 옥중생활은 참으로 시야를 크게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출옥 후에 대각교 운동의 방향을 뚜렷이 하는 시원점이 되었다.

 

선사는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각해일론(覺海日論)』등 많은 저술과 역경(譯經)을 하게 되며 불교의식을 완전히 한글화하며, 교단의 청정을 주장하게 된다. 선사의 정진과 교화사업은 계속되었으며, 61세 되던 해에는 왼쪽 이에서 우연히 치사리(齒舍利) 일과(一顆)가 나왔는데 이 사리는 지금도 해인사 용탑(龍塔)에 모셔져 있다. 1940년 2월 24일 새벽에 선사는 목욕재계한 뒤 제자들을 불러 두고 “그 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며, 법락이 61세였다.

 

선사의 중심사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대각(大覺)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부르짖던 대각이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된 것일까?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선사는 전후 세차례에 걸쳐 대각을 얻었으므로 어디에든지 걸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경지를 스스로 체득하게 된다. 이러한 흔들림 없는 경지를 바탕으로 새 불교운동을 전개한 것이 바로 대각교운동이다.

선사는 대각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석가모니불 법신불(法身佛)로 파악하였으므로 이를 구체화시킨 것이 비로자나불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은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심(心) 이외의 것은 모두 부인하였으며, 불(佛)과 진심(眞心)과 아(我)를 일체로 보고 있다. 이 진심에 의하여 천지만법이 창조되며, 이는 나의 동근동체(同根同體)일 뿐만 아니라 일진심광명체(一眞心光明體)는 법신불의 이명(異名)이기도 하며, 이 는 대자재(大自在)의 위신력과 무연대비의 발휘로서 처처에 자비시설(慈悲施設)을 성취하고 경원히 무애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며 역사 속에 석가모니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선사는 대각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 즉, 근본심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치고 하여 둘이 없이 원만하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구경각(究竟覺)을 다 깨친 것을 대각(大覺)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선사는 대각사상의 논리적인 근거를 『기신론(起信論)』의 각사상(覺思想)에 두고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선사의 대각사상은 『기신론(起信論)』의 여래장(如來藏)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근거는 선사의 대표적인 저술인『각해일륜(覺海日輪()』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선사는 대각의 근원을 여래장에 두고 있으며,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그 불성의 계발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남에게도 그 깨우침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이것이 바로 자각각타이며, 이의 완성이 대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선사는 이와 같은 사상에 입각하여 대사회적 실천방법론을 전개하였다. 그 실천방법론의 이론적인 뒷받침을 여래장 연기(緣起)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현시킨 것이 바로 대각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의 오도 후 전개된 생애는 그것이 그 시대를 산  오도자의 자기실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가장 근원적인 대도를 스스로 체득함으로서 자타를 초월하였으며, 민중을 떠나 불법을 구하지 않았다. 또 불법(佛法)을 떠나 민족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대각교의 모체요 토대를 민중으로 보았으며, 인인개개(人人個個)의 고유 진성으로서 일체중생은 법성을 본성으로 하고 거기서 절대적 혹은 상대적으로 영각성(靈覺性)을 나툰다고 『임종결(臨終訣)』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대각교운동은 새로운 신흥종교로까지 잘못 알려져 온 적도 있으나, 이는 기성종단이 일제(日帝)의 관제불교로 전략되자 일제와 관련없는 순수한 한국 전통불교를 되찾자는 운동이요, 현대민중에게 맞도록 혁신하자는 새 불교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대각운동(大覺運動)의 전개

선사의 대각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저술과 역경, 선의 대중화, 항일운동, 교단의 정화운동, 사원경제의 자립화, 포교의 현대화 등 여섯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저술과 역경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3.1운동으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후부터였다. 이 때 감옥에서 성경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얽히고 있음에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이 일반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역과해금강경(詳譯科解金剛經)』의 서문에서 “한자장경(漢字藏經)이 적재여산(積在如山)이라도 귀어일개후물이재(歸於一個朽物而哉)인저”라고 술하고 있다. 즉, 보지않고 쌓아만 두는 경전은 산더미같이 아무리 많더라도 한갓 종이이며 썩은 물건에 불과하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역경사업은 항일운동의 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글 화엄경』서문에서 “조선인에게는 조선글 조선말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의 시대상황이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을 때임을 감안할 때 선사의 역경사업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경사업에 대해 교단 내에서는 많은 비판도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번역본이 『화염경』을 비롯하여 30여 종이며, 저술도 『각해일륜(覺海日輪)』등 30여 종이나 된다.

 

둘째는 선의 대중화를 위하여 각 곳에 선학원을 위시한 선종포교당을 건립하게 된다. 또 선을 대중화하여 일반민중에게 스스로 자각케 함으로 대각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선사는 본인이 ‘선종인(禪宗人)’임을 확실히 했으며, 도시포교와 독립운동 등을 하면서도 참선에 대해서는 한시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각사에 ‘부인선원’을 개설하기도 했고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活句參禪萬日結社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에 처음으로 서울시내에 ‘참선(參禪)’이란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사가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각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선정진의 힘이었다.

 

셋째는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선사는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산중에서 도회로 뛰어든 뒤 1940년 입적 때까지의 30년간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되지 않음이 없었다. 특히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 대표로 서명하고 참여함으로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사는 대각사를 설립하여 여기에 머물면서 한용운 등을 위시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때로는 대각사가 독립운동의 온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경에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의 뜻을 듣고는 두말 하지 않고 도장을 한용운에게 맡기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하는 길이라면 어디에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승낙하였다. 한용운은 전국의 그 많은 승려들 중 백용성 이외는 이 일을 상의할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 일에 가담한다는 것은 최후에 사형집행까지도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사에게  있어 3.1운동은 많은 새로운 경험을 쌓게 했으며 대각교운동의 방향을 확실히 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이때에도 일본 연호를 사용치 않고 불기를 사용했다 해서 출판검열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책 속에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님도 또한 1918년 실시된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수탈된 우리의 땅과 경제적인 침략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만주에 가서 용정에 농장을 만들고 대각교당을 건립하였으며, 하동에 華果院(화과원)을 만들 선농(禪農)불교를 실천하였다.

한편으로는 교단이 왜색화 되어가자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찾기 위해 교단의 정화운동에 불을 붙였다. 2차에 걸친 ‘建白書(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일제의 불교정책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선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요시찰인물이 되었으며, 항상 일본경찰의 감시하에서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넷째는 교단의 정화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선사의  계맥은 선곡율사(禪谷律師)에게 수계하였다. 이는 조선조의 대은(大隱)스님의 계맥(戒脈)에 속하므로 한국전통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호리(毫釐)의 어김도 없이 계를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제자들에게 계율에 관해서는 철저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은 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하여 31본사는 대처한 자들이 늘어갔으며 한용운을 비롯한 대부분의 승려들은 취처해 줄 것을 총독부에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사찰에는 승려들의 처자권속들이 양육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라고들까지 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선사는 1926년 총독부에 2차에 걸친 ‘建白書(건백서)’를 127명의 비구승들의 연명으로 제출하게 된다.

 

이것이 해방 이후 일어난 대처·비구 정화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선사가 주장한 조건은 세가지였다. 첫째는 당국에서 대처식육을 금하지 못할 바에는 대처승에게 비구계를 취소 환속시켜 재가이중(在家二衆)의 위치에 있게 하든지, 둘째는 대처승들이 전국 사찰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지계병자(持戒炳子)들에게 일부의 몇 개 본사(本寺)만이라도 할양하든지 셋째는 유대승(有帶僧)과 무대승(無帶僧)을 확실히 구분하든지 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만약 해방 이후 정화운동이 선사의 뜻대로 서로의 신분에 대한 구분만 확실히 짓고 같이 공존했다면 오늘날 한국불교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화운동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그 때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오늘날 종도들은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대각사상의 전개과정에서 다섯째 사원경제의 자립화와 여섯째 포교의 현대화 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4) 불교사적 위치

이처럼 용성선사의 업적이 현대 한국 불교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선사의 대각사상과 그 운동은 여래장 사상에 그 뿌리가 있으며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여래장 연기(緣起)를 근본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이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민족의 아픔을 같이하면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하여 온 몸을 다 바치면서 불법의 새로운 중흥을 염원하였다. 사원경제의 자립화를 위하여 선농(禪農)불교를 실천하였으며 포교의 현대화를 위하여 대각사 법당에서 노승이 스스로 오르간을 치면서 일요학교를 개설하였다. 특히 천수경, 시식 등의 의식을 한글로 표현하고 실천하였으니, 대단한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교단의 정화운동은 선사가 제시한 방법대로 신분과 역할을 구분하여 공존하는 차원의 정화가 되었다고 가정할 때 오늘날과 같이 한국불교가 겪어야 할 시련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해방 이후의 불교정화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선사의 이러한 삶은 오도자(悟道者)는 어떻게 나라를 위하여 민중과 함께 생활하며 교단을 중흥시킬 것인가를 보여준 하나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의 숭고한 뜻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면서도 아직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종단의 현실이다. 특히  일제의 압박과 회유정책으로 한국 전통불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던 때에 선사의 뜻으로 인해 뭉쳐진 127명의 건백서로 오늘날 다시 청정교단이 살아날 수 있었던 점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만약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용성선사와 같은 분이 청정교단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비구교단인 조계종이 존립할 수 있었을런지 심히 의심스럽다.

 

석우(石友)선사 (1875~1958) 열반송

囊括乾坤方外擲   하늘과 땅을 바랑에 넣어 한켠에 밀쳐놓고
杖挑日月袖中藏   해와 달을 지팡이로 따서 소맷자락에 감추노라
一聲鍾落浮雲散   한 줄기 종소리에 뜬구름 흩어지고
萬蘿靑山正夕陽   만 갈래 청산에 비로소 석양이 비치나니

 

선사의 속성은 설(薛)씨이시고 본관은 순창(淳昌)이시며 법명은 보화(普化)이시고 법호는 석우(石友)이시다

을해(乙亥)서기 1875년 5월 11일에 경남 의령에서 탄생하셨고 본적은 김해(金海)이시며 신라의 홍유설총(弘儒薛聰)선생의 45세손이시다. 선사께옵선 소시(少時)에 지혜가 출중하시와 중인(衆人)으로부터 신동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으며, 마음으로 자방(子房)과 공명(孔明)의 學을 기리셨고 시서(詩書) 및 노장(老莊) 제자백가(諸子百家)지리(地理)는 물론 의학에까지 능통하시와 중인들이 그 은혜에 젖음이 적지 않았다.

30세에 이르심에 가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표현 운유(雲遊)하시기 7, 8년에 우연히 범어사에 이르셔서 보조어록을 열람하심에 三界熱惱猶如火宅 其忍淹留甘受長苦 欲免輪回莫若求佛 若欲求佛,佛卽是心이란 대목에 이르러 홀연 깨친바 있어서 불각낙루(不覺落淚)하시고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에 있구나" 하시며 심전(心田)에 티끌 개고 성천(性天)에 구름 여니 춘산(春山)에는 화소조가((花笑鳥歌)하고 추야에월백풍청(秋夜月白風淸)이로다. 아마도 무위도락(無爲道樂)은 이 밖에 다시 없어라는 시조 한 수를 읊으시고 감연 출가의 뜻을 굳히셨다.

즉시로 세진(世塵)을 등지시고 금강산 장안사(金剛山長安寺)에 이르시어 연담응신(蓮潭凝信)선사를 은사로 낙발(落髮)하시니 시년(時年)이 38세이셨다. 법을 겸수(兼受)하시고 후에 유점사(楡岾寺) 동선의정(東宣義淨)율사께 구족계(具足戒)를 받으시고 사방 선지식을 널리 참방(參訪)하시며 닦으신지 10여년에 영원암(靈源庵)으로 드시었다. 여기서 30여 성상(星霜)을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참구(參究)하심에 깊은 경지에 계합(契合)하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에 시작(詩作)도 많았으니,

'山揷爲籬水用扉 行人到此世情稀 孤庵懶客還多事 淨掃閒雲補弊衣' 란 시도 그때의 것이다. 그 후 중일(中日)사변이 일어남에 그 법제(法弟) 상월(霜月)율사에게 금강(金剛)엔 이미 연(緣)이 다 되었으니 점차 남행하자 하시고 하동 칠불사(七佛寺)로 옮겨 안주(安住)하시다가 을유(乙酉)춘(春)에 사주다솔사(四洲多率寺)에 이거(移居) 중 조국광복을 맞으셨다.

다음에 남해도로 건너가셔서 해관암(海觀庵)을 창건하시니 그 곳에서 6.25를 무사히 지내시고 해인사로 이주하셨다. 정화불사 후 중망(衆望)에 의해 초대종정에 추대되시고 병신(丙申) 3월에 동화사로 이석(移錫)하셨다.

세연(世緣)이 다 되시어 임종(臨終)에 다다름에 이르심에 시봉(侍奉)이 유게(遺偈)를 청하심에 선사께서는 소리를 높여 "망상을 말라" 한마디 말씀뿐이셨다. 물러서지 않는 시봉의 간청에 선사께서는 부득이 응(應)하시와 "그러면 네가 나를 붙들어 일으켜라 너를 위하여 게를 지으리라" 하시며 붓을 들어 囊括乾坤方外擲 杖挑日月袖中藏 一聲鐘落浮雲散 萬朶靑山正夕陽이라 쓰시고 안연(安然)히 화(化)하시니 세수는 84이시고 법랍이 45이시니 때는 정유(丁酉) 납월(臘月) 이십칠일이었다. 열반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선사를 경모(敬慕)하던 수백의 납자와 수천의 신도가 운집하였고 관계기관장들이 참석하여 애모(哀慕) 속에 엄숙히 다비가 거행되었다.

선사의 성품이 고결하시와 시은(施恩)을 받으심을 꺼렸었고, 또한 그 위용(威容)이 단엄(端嚴)하시고 그 지견(知見)이 고원(高遠)하시며 그 언어가 자상하시와 우리들로 하여금 매매(每每)히 무상대법에 자상하게 이끌어 주시어 무상정법의 신념을 굳게 다져주시었다. 이 은혜야말로 어찌 세상 일체유류은(一切有漏恩)에 비하리요 세상 일체 은혜는 필경 환화(幻化)로 돌아가리니와 이 무루성은(無漏聖恩)은 세세생생에 우리들 앞길을 인도하여 구경무상정각을 이루게 하시니 진실로 대은(大恩)이며 갈이 기념하고 싶지 않으리요! 천첩산(千疊山)과 만중수(萬重水)에 선사의 이 한 번 가심이여! 어느때나 오시나요 낙엽이 뿌리로 돌아올 때일까요 공산의구 만고수(公山依舊萬古秀)로다.



선사의 속성은 설(薛)씨이시고 본관은 순창(淳昌)이시며 법명은 보화(普化)이시고 법호는 석우(石友)이시다

을해(乙亥)서기 1875년 5월 11일에 경남 의령에서 탄생하셨고 본적은 김해(金海)이시며 신라의 홍유설총(弘儒薛聰)선생의 45세손이시다. 선사께옵선 소시(少時)에 지혜가 출중하시와 중인(衆人)으로부터 신동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으며, 마음으로 자방(子房)과 공명(孔明)의 學을 기리셨고 시서(詩書) 및 노장(老莊) 제자백가(諸子百家)지리(地理)는 물론 의학에까지 능통하시와 중인들이 그 은혜에 젖음이 적지 않았다.

30세에 이르심에 가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표현 운유(雲遊)하시기 7, 8년에 우연히 범어사에 이르셔서 보조어록을 열람하심에 三界熱惱猶如火宅 其忍淹留甘受長苦 欲免輪回莫若求佛 若欲求佛,佛卽是心이란 대목에 이르러 홀연 깨친바 있어서 불각낙루(不覺落淚)하시고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에 있구나" 하시며 심전(心田)에 티끌 개고 성천(性天)에 구름 여니 춘산(春山)에는 화소조가((花笑鳥歌)하고 추야에월백풍청(秋夜月白風淸)이로다. 아마도 무위도락(無爲道樂)은 이 밖에 다시 없어라는 시조 한 수를 읊으시고 감연 출가의 뜻을 굳히셨다.

즉시로 세진(世塵)을 등지시고 금강산 장안사(金剛山長安寺)에 이르시어 연담응신(蓮潭凝信)선사를 은사로 낙발(落髮)하시니 시년(時年)이 38세이셨다. 법을 겸수(兼受)하시고 후에 유점사(楡岾寺) 동선의정(東宣義淨)율사께 구족계(具足戒)를 받으시고 사방 선지식을 널리 참방(參訪)하시며 닦으신지 10여년에 영원암(靈源庵)으로 드시었다. 여기서 30여 성상(星霜)을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참구(參究)하심에 깊은 경지에 계합(契合)하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에 시작(詩作)도 많았으니,

'山揷爲籬水用扉 行人到此世情稀 孤庵懶客還多事 淨掃閒雲補弊衣' 란 시도 그때의 것이다. 그 후 중일(中日)사변이 일어남에 그 법제(法弟) 상월(霜月)율사에게 금강(金剛)엔 이미 연(緣)이 다 되었으니 점차 남행하자 하시고 하동 칠불사(七佛寺)로 옮겨 안주(安住)하시다가 을유(乙酉)춘(春)에 사주다솔사(四洲多率寺)에 이거(移居) 중 조국광복을 맞으셨다.

다음에 남해도로 건너가셔서 해관암(海觀庵)을 창건하시니 그 곳에서 6.25를 무사히 지내시고 해인사로 이주하셨다. 정화불사 후 중망(衆望)에 의해 초대종정에 추대되시고 병신(丙申) 3월에 동화사로 이석(移錫)하셨다.

세연(世緣)이 다 되시어 임종(臨終)에 다다름에 이르심에 시봉(侍奉)이 유게(遺偈)를 청하심에 선사께서는 소리를 높여 "망상을 말라" 한마디 말씀뿐이셨다. 물러서지 않는 시봉의 간청에 선사께서는 부득이 응(應)하시와 "그러면 네가 나를 붙들어 일으켜라 너를 위하여 게를 지으리라" 하시며 붓을 들어 囊括乾坤方外擲 杖挑日月袖中藏 一聲鐘落浮雲散 萬朶靑山正夕陽이라 쓰시고 안연(安然)히 화(化)하시니 세수는 84이시고 법랍이 45이시니 때는 정유(丁酉) 납월(臘月) 이십칠일이었다. 열반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선사를 경모(敬慕)하던 수백의 납자와 수천의 신도가 운집하였고 관계기관장들이 참석하여 애모(哀慕) 속에 엄숙히 다비가 거행되었다.

선사의 성품이 고결하시와 시은(施恩)을 받으심을 꺼렸었고, 또한 그 위용(威容)이 단엄(端嚴)하시고 그 지견(知見)이 고원(高遠)하시며 그 언어가 자상하시와 우리들로 하여금 매매(每每)히 무상대법에 자상하게 이끌어 주시어 무상정법의 신념을 굳게 다져주시었다. 이 은혜야말로 어찌 세상 일체유류은(一切有漏恩)에 비하리요 세상 일체 은혜는 필경 환화(幻化)로 돌아가리니와 이 무루성은(無漏聖恩)은 세세생생에 우리들 앞길을 인도하여 구경무상정각을 이루게 하시니 진실로 대은(大恩)이며 갈이 기념하고 싶지 않으리요! 천첩산(千疊山)과 만중수(萬重水)에 선사의 이 한 번 가심이여! 어느때나 오시나요 낙엽이 뿌리로 돌아올 때일까요 공산의구 만고수(公山依舊萬古秀)로다.

동산(東山)선사 (1890~1965) 열반송

元來未曾轉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거늘
豈有第二身   어찌 두 번째 몸이 있으랴
三萬六千朝   삼만 육천 일
反覆只這漢   날마다 되풀이하는 다만 이놈뿐이니

 

1890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난 동산선사는 13까지 고향에서 사서 삼경 등의 한학을 배웠다.

이어 고향의 익명 보통학교에 들어가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에게 배우닌 자연히

민족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동산은 서울의 중동 중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니 동산은 당시의

구식교육과 신식교육을 모두 받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게다가 의사가 되려고 했으니 당시 최고의 치식인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동산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자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

고모부인 오세창 선생에게서  용성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하니

24살때의 일이다

1914년 한암선사를 찾아가 2년동안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등을 배웠고 1916년 부터 2년 동안은 범어사에서 영명 강백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이후 스승의 옥바라지 등 여러가지 일이 많았지만 동산은 참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직지사에서 3년동안 전적으로 참선 수행만하는 결사를 한 다음 1927년 범어사에 돌아와

금어 선원에서 수행을 계속하던 중에 대나무가 내는 소리에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참 나'를 소에 많이 비유하는데 동산은 그의 오도송에서 이를 고양이에 비유했다.

"그리고 또 그리기 몇넌 이던가, 붓끝 닿는 곳에 산 고양이! 하루 종일 창 앞에서 쿨쿨 자더니,

밤이 되니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구나!"

동산이  자신이 얻는 경지를 곧 스승에게 보고하자 용성은 쾌히 동산을 인가했으니

1936년에는  우리나라 지리산 칠불계맥을 전하면서 전계증에 "정법안장을 동산에게

맡기니 잘 받아 지녀 끊이지 않게 하라"

는 내용을 넣어 동산이 자신의 법을 이었다는 것을 각별히 증명했다.

이후 동산이 스승의 뜻을 받을어 해마다 범어사에서 수계식을 거행하게 되니

범어사의 금강계단이 스님들에게 계를 내리는 권위있는 의식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기뻐하기가 바쁘게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이러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때  많은 스님들이 범어사로 피난을 왔는 데 동산은 쾌히 이들을 받아 들여

그 뒷바라지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52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꾸짖게 되는데 이는 동산의 법력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다.

동산뿐만이 아니라 혜월 선사나 만공 선사도  참나로 사는 사람에게는 권력이나 권력자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선사들에게 권력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고 권력자는 광대중의 광대에 불과 할뿐이다.

그러니 권력으니 권력자를 두려워하거나 영합하는 승려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가

틀림없다.

동산은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술, 고기, 여자를 취하지 않는 법이다.그러니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범부가 이를  취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며 제자들이나 후학들에게 계를 지킬것을 강조했다.

공양, 예불, 운력 등 매일의 일과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철저하게 지킨  동산은

"터럭 끝만큼이라도 없애버릴 번뇌나 습기가 남아 있다면 아직도 마음을 뚜렷히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 은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쳐야 한다"며

깨달음에 관해서도 철저할 것을 요구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정화 운동에 앞장서서 오늘의 한국 불교가 있게 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동산은 세번이나 종정직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동산은 1965년 3월 23일(음력)에도 평소와 다름 없이 일과를 다하고는

임종게를 남긴 뒤에 조용히 입적하셨다.

 

효봉(曉峰)선사 (1888~1966) 열반송

吾說一切法   내가 말한 모든 법은
都是早 拇    모두 다 군더더기
若問今日事  오늘 일을 묻는가
月印於千江  달이 천강(千江)에 비치니라

 

 

효봉선사(曉峰禪師, 1888-1966)

효봉선사(曉峰禪師)는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 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석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하셨습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날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스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으로 사셨습니다.
서른 여섯에 오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늦깍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습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불가의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것이 아니라, 내자신이 스스로 참구(參究)하면서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게 됩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지고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의 마흔 다섯되던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 스님이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신구도관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기시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초이틀) 일흔 아홉의 나이를 마치셨습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五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 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 若間今日事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月印於千江)

 

 

춘성(春性)선사 (1891~1977) 열반송

八十七年事   여든일곱 해의 일이
七顚八倒起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고꾸라졌다 일어남이라
橫說與竪說   횡설과 수설이여
紅爐一點雪   붉은 화로 위의 한 점 눈송이로다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  (1911~1974) 열반송(涅槃頌)

 

제불불출세(諸佛不出世)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지도 않았고

역무유열반(亦無有涅槃) 또한 열반에 드신 적도 없다.

사생본공적(死生本空寂) 생사가 본래 텅 비었으니

영허일월륜(盈虛一月輪) 차고 기우는 것은 달이 한바퀴 도는 것이로다.

 

 

 

구산(九山)선사 (1910~1983) 열반송 

滿山霜葉紅於二月花   가을 서리 내린 낙엽이 봄꽃보다 붉나니
物物頭頭大機全彰      두두물물 만물의 큰 기틀이 모두 뚜렷하도다
生也空兮死也空         삶도 공이요 죽음도 공이러니
能仁海印三昧中微笑而逝 부처님의 해인삼매 속에 미소 짓고 가노라

 

 

 

 

혜암(慧庵)선사 (1884~1985) 열반송

行狀衲衣一枝     누더기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東走西走走無窮  동서를 끝없이 달리나니
傍人若問何處走  어디로 달렸느냐 묻는다면
天下橫行無不通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리

 

 

 

 

성철(性澈)선사 (1912~1993) 열반송

生平欺狂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네
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나니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서운(瑞雲)선사 (1903-1995) 열반송

 

無形叩之卽有靈   형상이 없으나 두드리면 곧 신령스러움이 드러나고
三毒火湯過平生   삼독의 화탕지옥에서 한평생을 보냈나니
脫却體露還本鄕   이제 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寒月空山屬眞人   차가운 달 빈 산이 진리의 몸이로세

 

 

 

 

월산(月山)선사 1912~1997) 열반송

廻廻一生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未移一步   아직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도다
本來其位   본래 그 자리는
天地以前   하늘땅보다 먼저이니라

 

 

 

 

일타(日陀)선사 (1929~1999) 열반송

一天白日露眞心   하늘에 밝은 해가 진심을 드러내니
萬里淸風彈古琴   만리에 맑은 바람 거문고를 타는구나
生死涅槃曾是夢   생사와 열반이 일찍이 꿈이려니
山高海활不相侵   산은 높고 바다 넓어 방해롭지 않구나

 

 

 

 

정행(淨行)선사 (1902~2000) 열반송

如是來如是去兮   이와같이 오고 이와같이 가나니
百年生涯刹那間   백년 생애가 찰라로구나
萬里長天一樣色   끝없는 하늘은 한 모양이니
靑山不動白雲流   청산은 의연하고 흰구름은 유유할세

 

 

 

 

탄성(呑星)선사 (1930~2000) 열반송

 

山色人我相   산빛도 인아의 모습이요
流水是非聲   흐르는 물도 시비의 소리로다
山色水聲離   산빛도 물소리도 떠난 곳에
聲啞居平生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평생을 살리라

 

 

 

 

혜암(慧菴)선사 (1920~2001) 열반송

我身本非有   나의 몸은 본래 없는것이요
心亦無所住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鐵牛含月走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石獅大哮吼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청화(淸華)선사 (1924~2003) 열반송

此世他世間   이 세상과 저 세상을
去來不相關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은혜를 입음은 대천세계이거늘
報恩恨細澗   은혜를 갚음은 작은 시내라 한스럽나니

 

 

 

월하(月下)선사 (1915~2003) 열반송

一物脫根塵   한 물건이 육신과 세상에서 벗어나고
頭頭顯法身   두두물물 모두 법신을 나투네.
莫論去與住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處處盡吾家   곳곳이 나의 집이나니

 

 

 

 

서옹(西翁)선사 (1912~2003) 열반송

雲門日永無人至   구름 낀 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猶有殘春半落花   남은 봄에 꽃은 반쯤 떨어졌네
一飛白鶴千年寂   한 번 백학이 나니 천 년이 고요하고
細細松風送紫霞   부드러운 솔바람 붉은 노을을 보내나니

 

 

 

 

법홍(法弘)선사 (1915-2003) 열반송

 

一念成四大   한 생각이 사대를 형성하니
因緣聚霧散   인연따라 모였다 안개처럼 흩어지누나
心識本來空   마음과 생각은 본래 공하니
日月澄淸明   해와 달이 맑고 밝도다

 

 

 

 

서암(西庵)선사 (1946~2003)열반송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인곡(仁谷)선사 (1941~2005) 열반송

我有一鉢囊   내게 바랑이 하나 있거늘
無口亦無底   입도 없고 밑도 없도다
受受而不濫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出出而不空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나니

 

 

 

 

관조(觀照)선사 (1943-2006) 열반송

 

森羅萬象天眞同   삼라만상이 본디 부처의 모습이네
念念菩提影寫中   한 줄기 빛에 담아 보이려 했나니
莫問自我何處去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라
水北山南旣靡風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

 

 

 

진행중~

 

 

 

 

 

 

 

 

 

 

열반송(涅槃頌) 모음

구인사 설법보전 외벽 부설(浮雪)거사(?~7??) 열반송目無所見無分別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 耳廳無聲絶是非 듣는 바가 없으니 시비가 일지 않는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 시비 다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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