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

오도송(悟道頌)<無學大師>

수선님 2023. 7. 2. 13:20

오도송(悟道頌)

 

靑山綠水眞我面청산녹수진아면 平平仄仄平仄仄

明月淸風誰主人명월청풍수주인 平仄平平平仄平

莫謂本來無一物막위본래무일물 仄仄仄仄平仄仄

塵塵刹刹法王身진진찰찰법왕신 平平仄仄仄仄平

<無學大師>

 

푸른 산 푸른 물이 나의 참모습이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의 주인은 누구인가.

본래부터 한물건도 없다 이르지 마라.

온 세계 티끌마다 부처님 몸, 아니런가.

 

이 게송(偈頌)은 무학대사(無學大師)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은 면(), 인(人), 신(身)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은 근체시(近體詩) 평측(平仄)은 맞지 않다. 무학대사(無學大師) 네이버 자료는 이렇다. ”법명은 자초(自超), 속성은 박(朴)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陝川郡: 삼기(三岐)) 삼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344년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고려말(高麗末) 퇴락(頹落)하는 불교(佛敎)를 비판(批判)하였고 이성계(李成桂)를 만나 그가 새로운 왕(王)이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왕사(王師)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 묘엄존자(妙嚴尊者)의 법호(法號)를 받고 회암사(檜巖寺)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都邑)을 한양(漢陽)으로 옮기는 데 찬성(贊成)하였으며 조선 건국 초기 나라가 안정하고 정착하는데 헌신하였다. 유교의 바탕에서 건국된 조선에서 독특하게 불교승(佛敎僧)으로 주도적(主導的)인 역할(役割)을 맡았으며 기득권(旣得權)에 안주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로 평가된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그해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청을 받아 함주(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상왕(太上王) 이성계(李成桂)를 설득하여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403년에는 회암사(檜巖寺)를 사직(辭職)하였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78세에 입적(入寂)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성계(李成桂)와 인연(因緣)은 서산(西山)대사가 지은 설봉산 석왕사기(釋王寺記)에는 밀접한 관계와 함께 조선 건국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고려 우왕(禑王) 10년(1384), 청년 이성계는 전북 금마(金馬)로부터 함경북도 남쪽의 학성(鶴聲) 지방으로 옮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다. 1만 집의 닭이 ‘꼬꾜오“하며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일제히 두들겨대는 다듬이 소리가 났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재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졌다. 꿈이 하도 신기해 이웃에 사는 노파를 찾아가 해몽(解夢)을 부탁했더니 그 노파는 정중히 사양하며 다른 ‘물을 곳’을 소개해 준다. “여자의 소견으로 어찌 대장부의 꿈이야기를 함부로 하리까. 여기서 40리(里) 가량 떨어진 설봉산(雪峯山) 토굴(土窟)에 이상한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솔잎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사는 그를, 얼굴이 검다 하여 세상 사람들은 흑두타(黑頭陀)라 부르지요. 그곳에서 그는 9년 넘도록 꼼짝않고 수행하고 있으니 거기 가서 물으시면 좋은 해몽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삼베옷과 지팡이 하나 즉 간편한 행장으로 토둘을 찾아가 예(禮)를 올리고 나아가 찾아온 뜻을 말한다. “풀집을 얽고 사는 가난한 속인[人]이 의문 나는 일을 판단코자 하여 찾아왔으니 부디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답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냐’는 스님의 반문(反問)에 이성계는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 집의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났으며 제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허름한 집에서 나왔습니다.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암시일까요” 다 듣고난 스님은 옷깃을 여미며 말 한다. “모두 앞으로 임금이 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꿈입니다. 1만 집의 닭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高貴位:꼬끼요의 音讀]를 경하(慶賀)하는 것이고 1천 집의 다듬이 소리는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御近當]을 알리는 겁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게 되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또 서까래 셋을 사람이 지면[負] 임금‘왕(王)’자(字)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성계에게 당부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큰 일은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닌 만큼 이곳에 절 하나를 세우고 이름을 ‘왕될 꿈을 해몽한 절’이라는 뜻으로 석왕사(釋王寺)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서둘러 짓지 말고, 3년을 기한으로 잡아 5백 성인을 모셔다 오백성재(五百聖齎)를 올리면 반드시 왕업(王業)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십분 조심하십시오.” 이성계는 자리를 물러나 예를 올리며 말한다.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큰일이 원만히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성계는 1년 만에 절을 짓고 5백성재(五百聖齎)를 올리는 한편 3년 동안 불공을 드렸는데 아무도 그가 그렇게 하는 까닭을 몰랐다. 고려 우왕(禑王) 14년(戊辰)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공략하게 했다. 4월초 이성계는 의주(義州)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5월 중 압록강을 건너 강 속의 섬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대의(大義)를 밝혀 군대를 되돌렸다. 공양왕(恭讓王) 4년(壬申, 1392) 7월 16일 이성계는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임금 자리에 오른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곧 설봉산 토굴의 스님을 찾도록 하여 왕사(王師)로 봉하니 이 스님이 바로 무학(無學)이다. 무학은 토굴에서 나와 태조(太祖) 이성계를 위해 그 조상들의 산소를 옮기고 나라의 새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다. 청야만집(靑野漫潗)에는 이태조가 즉위 직후 사람을 시켜 무학을 찾게 하는 이야기가 잘 나타나 있다. 이태조는 조선국을 건국한 뒤 영(令)을 내려 무학을 찾았다. 이에 함께 무학을 찾아 나선 세 도(道)의 방백(方伯) 도지사들은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지방에 이르러 고달산(高達山)의 조그마한 암자에 한 고승이 홀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시종하던 측근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고달산 골짜기로 들어가 소나무 가지 끝에 방백의 관인(官印)을 걸어놓고 비렸다는 뜻, 짚신을 끌며 그리로 달려갔다. 초암(草庵)에 다다르니 한 스님이 쇠 코잠방이[犢鼻]를 입은 채 손수 채소밭을 손질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방백이 다가가 물었다.

이 암자는 누가 지은 것입니까? 노승이 지었습니다. 뭘 보고 이런 곳을 택하여 절을 세웠습니까? 세 개의 관인(官印) 형상(形相)을 하고 있는 저 삼인봉(三印峯) 때문이지요. 무엇 때문에 삼인봉이라고 부릅니까? 저 앞의 세 봉우리가 곧 삼인(三印)의 형국입니다. 만약 이곳에 절을 지으면 삼도(三道)의 방백(方伯)이 골안의 나무 위에 관인을 벗어 거는 그러한 응험이 있게 됩니다. 삼도 방백들은 노승이 말을 마치자마자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이분은 틀림없이 무학일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들은 무학과 함께 돌아와 조정에 글을 올려 일의 전말(前末)을 보고하였다. 이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무학을 스승의 예(禮)로써 섬기는 한편 그에게 새 도읍지(都邑地) 선정(選定)에 대해 자문(諮問)을 구했다. 무학은 이에 한양(漢陽)에 이르러, 인왕산(仁王山)으로써 진산(鎭山)을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삼아 도읍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도전(鄭道傳)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자고로 임금은 모두 남향(南向)하여 나라를 다스려왔습니다. 동향(東向)하여 다스렸다는 예는 없습니다. 무학은 무한한 아쉬움을 표하며, 내 말을 좇지 않으면 2백년 뒤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라 때 의상(義湘) 대사가 지었다는 산수기(山水記)에는 한양도읍(漢陽都邑)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그래도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하면 제5대(代)도 지나지 않아 임금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재앙(災殃)이 있으며 도읍한 지 2백년 쯤 뒤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國難)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의상(義湘)대사 산수기(山水記)에서 말하는 ‘스님’은 무학(無學)대사를 가리키고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정도전(鄭道傳)을 지칭하는 것이다. 의상이 8백년 뒤의 일을 미리 아는 것이 마치 부절(符節)이 맞듯 꼭 맞으니 어찌 세상만사를 꿰뚫어 보는 성스러운 스님이라 아니 하리오! 팔역지(八域志)에는 무학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에게 조선의 수도(首都)를 정하게 하자 무학은 지금의 북한산 백운대로부터 맥(脈)을 찾아서 만경(萬景)에 이르고 그곳에서 다시 서남(西南) 쪽으로 가다가 비석봉(碑峰)에 다다르니, 글씨가 새겨진 큰 돌이 보였다. 그 돌에 쓰여진 글씨를 자세히 보니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리라’는 뜻의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여석 글자였다. 이는 곧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 국사가 세운 것이다. 무학은 이에 길을 바꾸어 다시 만경으로부터 정남(正南) 쪽으로 걸어가다가 백악산(白岳山) 아래 이르러서 세 개의 산맥이 모여 하나의 들[坪]을 이룬 것을 보고 마침내 궁궐터를 정한다. 그곳은 곧 고려 때 조선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오얏을 심은 곳이다. 바깥 성[(外城) 쌓을 자리를 놓고 무학과 선비들의 의견이 엇갈려 성의 둘레와 거리(遠近)등을 결정하지 못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밤에 천하를 모두 뒤덮기라도 하려는 듯 많은 눈이 내려 안으로는 깎이고 밖으로는 계속 쌓여 성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태조는 이에 명령을 내려 눈을 좇아서 성을 쌓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날의 성이다.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38년, 조선 태조 14년(1405,太宗 5년임) 을유(乙酉) 9월 11일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 79세였다. 1407년(丁亥) 스님의 영골(靈骨)을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회암사에 모셨으며 1410년(庚寅) 탑명(塔銘)을 짓고 지공(指空)ㆍ나옹(懶翁)ㆍ무학(無學) 세 존자(尊者)의 사당(祠堂)을 석왕사에 세웠다. 그리고 편액을 내려 석왕사(釋王寺)라 했다. 이곳 석왕사에는 태조와 숙종, 영조의 친필이 있으며 또한 숙종ㆍ영조ㆍ정조가 직접 쓴 기록들이 남아 있다. 시호를 추증하여 묘엄존자(妙嚴尊者)라 했다. 정조 임금 때 스님의 비석글이 지어졌다.“ 무학대사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다. 당시 한양천도(漢陽遷都)를 통해 조선 건국의 기틀을 세우는 데 관여하였을 뿐 아니라, 왕사라는 위치는 당시 정신적 최고의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조 이성계에게 당시 정치범 사면을 권하거나, 백성들을 어버이처럼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애민정책의 가르침을 주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정신적 뒷받침을 했다. 또한 당시 숭유억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해 역사상 최고의 불교탄압을 받게 되는 조선시기에 그나마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와서는 무학은 민초들에게 ‘풍수가’로서 친근하게 알려지기도 했다. 합천 지역에만도 여러 설화가 있다. 신승(神僧:기이하고 뛰어난 승려)이나 효자(孝子) 설화 등이다. 무학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록 야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 등에서 대사에 대한 민초들의 친근한 감정들이 잘 들어난다.”

 

무학대사가 천도 도읍지를 찾아다닐 때 왕십리 무학봉이란 작은 봉우리 산에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무학봉은 해발 90,lm의 낮는 산봉리다. 중구 신당동과 왕십리동 경계에 있다. 무학대사가 이곳에 올라 주변 지형을 살폈다고 해서 무학봉이란 산명(山名)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무학봉은 북쪽으로는 청계천과 남쪽으로는 매봉산, 응봉산이 이어져 있다. 무학대사와 왕십리 지명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를 더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뒤엎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국도인 개경 도읍지에 머물 명분도 없게 되자, 새 왕조 도읍지를 무학대사에게 봐달라고 부탁한다. 최초에 거론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고, 두 번째는 서대문지역에 새 도읍지로 올랐으나 고려 남경 자리로 여겨서 탈락하고 서울 한양이 최종 확정되었다. 무학대사는 왕명을 받고 도성은 어느 곳에 쌓고 어디에다가 궁궐을 지을지 서울 일대를 샅샅이 찾아 나섰다. 지금 한양대 자리에 올라 지형을 살피고 있는데,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에게 말하기를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을 닮았구나! 하고 소를 꾸짖었다. 무학대사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그 소 끌고 가는 노인에게 왜? 소가 무학보다, 더 미련하냐고 물었다. 요즘 무학이 도읍 왕궁터를 잡는다고 헤매고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럼 왕궁 도읍(都邑) 터가 될만한 곳을 노인장은 알고 있소? 노인이 하는 말이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보시오. 라고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무학대사가 소 끌고 가던 노인이 일러준 대로 서북쪽 10리를 가서 찾아간 곳이 지금의 현재 경복궁(景福宮) 자리라고 한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地名)도 십리(十里)를 더 가라는 말을 듣고 무학대사가 천도도읍지(遷都都邑地)를 찾던 때 얻어진 지명(地名)이라는 한다.

 

올봄에는 인왕산 치마바위가 산물로 그을렸다고 한다. 치마바위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의 본처 폐비 신씨의 전설이 얽힌 바위다.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다. 반정(反) 한주 만에 강제 이혼 후 궁에서 쫓겨난 불운의 폐비다. 중종은 반정세력(反正勢力) 앞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지키지도 못하고 인왕상 정상 바위에 신씨가 즐겨 입었던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인왕산은 천도 도읍 당시에 경복궁의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서 호랑이에 해당하는 산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궁방향(王宮方向)을 정할 때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仁王山)을 나라의 주산(主山)으로 보고 백악(북악산)산과 남산(南山)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로 삼자고 제안(提案)을 한 것은 인왕산이 난리(亂離)를 진압(鎭壓)하는 형세(形勢)를 갖추웠기 때문인데 태조 이성계의 책사(策) 였던 정도전(鄭道傳)은 제왕(帝王)이 동쪽을 바라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강력하게 반대하자 이태조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조선왕조는 무학대사의 제안(提案)을 받아드리지 않아서 골육상쟁(骨肉相爭) 왕권(王權) 다툼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풍수가들의 이야기다. 무학대사에 관한 선화(禪話)는 많다. 오늘은 무학대사 오도송을 평청운에 맞춰서 반추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

 

 

 

 

 

 

 

 

오도송(悟道頌)<無學大師>

오도송(悟道頌) 靑山綠水眞我面청산녹수진아면 平平仄仄平仄仄明月淸風誰主人명월청풍수주인 平仄平平平仄平莫謂本來無一物막위본래무일물 仄仄仄仄平仄仄塵塵刹刹法王身진진찰찰법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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