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불전에 나타난 성차별적 교설의 분석

수선님 2023. 4. 23. 13:04

 

佛典에 나타난 성차별적 교설의 분석

구 자 상/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목 차 •

 

Ⅰ. 문제제기

Ⅱ.「마누법전」에 나타난 여성상

Ⅲ. 比丘尼八敬法의 성차별 문제

Ⅳ. 三從五障說의 성차별 문제

Ⅴ. 變成男子成佛說의 성차별 문제

Ⅵ. 맺음말

 

Ⅰ. 문제제기

 

최근 여성의 시각으로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재인식하려는 작업들이 활발히 전개

되고 있다. 이른바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인식

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문제틀로 간주되어 온 남성중심주의와 이 남성중

심주의적 문제틀에서 규정되어 온 여성의 위치를 재조명하고, 향후 여성의 역할과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여성의 정체

성 찾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현재 ‘불교페미니즘’이

라는 새로운 말까지 등장하여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1)

1) ‘불교페미니즘(Buddhist feminism)’이라는 학문방법론을 개척한 사람은 비교

종교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Rita M. Gross이다. 그녀는 전통적인 불교학이

대체로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연구되어 왔다고 보고, 여성적인 시각, 즉 페미

니즘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 불교와 페미니즘을

접목한 새로운 불교학 연구영역으로서의 불교페미니즘을 정립하고 있다.(안옥선,

「불교페미니즘의 선구자」, <법보신문> 제746호(2004. 3.10) 참조) 우리나라에

서는 최근「불교평론」통권 제3호(2000년)에서 ‘불교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

를 다룬 바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현상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불교의 성차별

적 교설들을 분석함으로써 그 진의를 살펴보는데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불교는

석존의 교설을 바탕으로 한 종교이다. 물론 시대 사회적 변화에 따른 다양한 사상의

변천은 있지만, 그 근본은 역시 석존의 교설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석

존의 교설을 전승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佛典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불전이 단순히 석존의 교설을 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상

황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2) 다시 말해 불전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 속

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와 사유방식으로 석존의 교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불전제작의 주체였던 비구의 상당수가 당시 사회의 지도층인 바라문 출신이

었고,3) 또 불교의 지반자체가 여성을 경시한 바라문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전에 나타난 여성관련 교설의 배경에는 당시의 바라문교 및 힌두사

회의 여성관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2) 이것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Émile Durkheim을 들 수 있는데, 그의「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 따르면, 모든 문화와 문명의 첫걸음이자 사회의 모든 면,

심지어 가장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면까지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다. 특히

그는 종교가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제도나 문화양식을

유지, 계승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Émile Durkheim, 노치준‧민혜숙 역,「종교생

활의 원초적 형태」, 서울 : 민영사(1992), pp.21~45, pp.572~586 참조)

3) 岩本裕에 의하면, 팔리의『앙굿타라 니카야』(Aṅguttara-nikāya)에 41명, 이것에

대응하는 한역『增一阿含經』에 101명의 비구들이 나오는데, 바라문 출신은『앙

굿타라 니카야』의 경우 23명으로서 56%,『증일아함경』의 경우 59명으로서 58%

라고 한다.(岩本裕,「佛敎入門」, 東京 : 中央公論社(1990), pp.134~135 참조)

 

그렇다면 불교의 근간이 되는 불전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성립한 시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고려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불교의 여성론 역시 이러한 토대 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단지 불전상의 표현만을 근거로 성차별을 주장하거나 불교적

진리의 평등성이라는 피상적인 측면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불전상의 성차별적

교설을 무시하는 태도는 결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

서 본 논의는 불전 상의 여성관련 교설들을 불교의 발생 및 그 전개과정상의 인

도적 현실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또 그 구체적인 현실성을 찾아내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나아가 필자는 이처럼 불전 상의 성차별적 교설들을 그 현실성과

관련해서 이해할 때만이 비로소 남녀 평등한 오늘날의 현실에 맞춰 재해석될

수 있고, 또 보편종교로서의 불교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논의는 먼저 고대인도의 사정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마누법전」

등을 중심으로 불교의 발생 및 불전편찬 당시의 여성의 현실을 살펴본 다음, 이것

을 토대로 오늘날 대표적인 성차별적 교설로서 거론되고 있는 ‘比丘尼八敬法’을

비롯하여 ‘女人五障說’, ‘變成男子成佛說’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마누법전」에 나타난 여성상

 

불교의 발생 및 불전이 편찬되던 시기의 인도여성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

이다. 특히 ‘三從之道’나 ‘女人五障’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는 여성멸시

적인 경향이 강하였으며, 또한 여성은 남성 종속적인 존재였다는 견해가 지배적

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자료 중에서 이러한 여성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이「마누법전」이다.4)

4) 필자가「마누법전」에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 걸쳐 완성된「마누법전」이 편찬이후 거의 변

질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인도에 관한 자료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 편찬 당시까지 인도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마누법전」과 초기 불전의 편찬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전 속의 여성관련 교설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마누법전」과 마찬가지로 불전 편찬의 주도세력도 남성인 비구였기

때문에 불전에는 편찬 당시 그들의 여성관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마누법전」의 여성관을 통해 불전 편찬 당시 비구들의 여성관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며, 또한 그럼으로써 불전 속의 여성관련 교설을 이해하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마누법전」에서 여성관련 기사는 그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여자의 본성, 둘째는 여자의 의무, 셋째는 여자의 존재이유이다. 먼저

여자의 본성에 관한 대표적인 기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 남자를 타락시키는 것이 여자의 본성이다. … 여자들은 이 세상에

서 어리석은 자뿐만 아니라 현자도 애욕과 분노의 힘으로 굴복시켜 악도로 이끈

다."(2‧213~4)

 

"여자는 용모를 따지지 않으며, 연령도 개의치 않는다. 용모가 좋든 나쁘든 간에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인다. 이 세상에서 여자들은 아무리 주의해서 단속

해도 남자에 대한 열정, 변덕스러움 그리고 천성적인 냉정함으로 남편을 배반한

다."(9‧14~5)

 

"마누는 창조 때에 여자들에게 침대, 좌석, 장식품, 애욕, 분노, 不正, 적대심, 악

행을 배분했다."(9‧17)

 

이 인용문들에 의하면, 여자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不正할 뿐만 아니라 감각적이고

쾌락적이다. 그리고「마누법전」에는 다시 이것을 근거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강

력한 감독의무,5) 나아가 여성의 교육권 및 제사권의 박탈까지 정당화하고 있다.

5) 프라자파티(prajāpati ; 창조주)가 창조 때 부여한 여자의 본성이 이와 같음을 알고,

남자는 여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9‧16)

 

"여자들에게는 聖句(베다)를 수반한 제식의례가 없다는 다르마가 확립되어 있다."

(9‧18)

 

 

이 인용문은 여성이 베다 및 그것에 의거한 제사로부터 완전히 배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마누법전󰡕에는 베다학습자의 여성과의 접촉을 금지함으로써,

6)베다가 이미 남성의 전유물이며 여성에게는 베다학습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

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 인도인들에게 있어 베다는 창조주의 계시

서인 동시에 모든 가치를 초월하는 신격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또한「마누법전」

에는 베다가 이 세상에서는 명성을, 사후에는 無上의 행복을 주는 것임을 명시하

고,(2‧9) 심지어 베다를 학습하지 않는 자를 슈드라와 같은 것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2‧172)

6) “베다학습자는 벌꿀, 고기, 향료, 화환, 조미료, 여자, 신맛 나는 모든 음식, 살생을

피해야 한다.”(2‧177)

 

이와 같이, 고대 인도인들에게 있어 베다 및 제사는 절대적 가치를 갖는 동시에 인

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성이 이것들로부터 배제되고

있었다는 것은 곧 슈드라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그만큼 박탈당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마누법전」도 여성의 존재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

은 아니다. 예컨대 마누에 의한 세계창조와 관련해서, “창조주는 자신의 신체를

둘로 나누어 반은 남자, 반은 여자로 만들었다.”(1‧32)고 하여, 여성도 남성과 마

찬가지로 神의 분신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여자는 본성

자체가 不正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남자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이른바 ‘三從

之道’이다.

 

"어리거나 젊거나 혹은 늙거나 여자는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비

록 가사일지라도. 어릴 때는 아버지, 젊을 때는 남편, 남편이 죽었을 때는 아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여자는 독립을 향수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 남편 혹은 아들

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5‧147~149)

 

이 인용문에 의하면, 여성의 주체성은 철저히 부정된다. 나아가 여성의 지위란 다음과

같이 오직 남성의 특성, 즉 그녀가 속한 부계 내지 남편의 신분 등에 의해서 결정될 뿐

이다.

 

"아내가 어떤 특질을 지닌 남편과 규칙에 따라 맺어질 때, 그녀는 그것과 같은 특질을

지니게 된다. 마치 하천이 바다와 결합하는 경우와 같다."(9‧22)

 

이외에도「마누법전」에는 여성의 재산권 및 상속권의 박탈,7) 심지어 아내를 팔거나

유기하는 등 여성을 사물화 하는 현상까지 나오고 있다.(9‧46, 11‧62) 특히 결혼조

차도 이 연장선상으로서 아버지에 의한 일종의 증여행위이자 아내에 대한 남편의 소

유권이 발생하는 원인으로서 규정하고 있다.(5‧152)

7) 아내, 아들, 종, 이 셋은 재산을 가질 수 없는 자라고 말해진다. 그들이 획득한 부는

그들이 귀속된 자의 것이다.(8‧416)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는 자는 아들이다.(9‧185)

 

이상과 같이, 적어도「마누법전」이 편찬되던 시기의 인도는 여성멸시적인 사고가

그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가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이 시기의 불전 속에 등장하는 ‘삼종오장설’은 당시의 이러한

관념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필자는 대승불교의 ‘변성남자성불설’도

당시의 이러한 관념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한 대표적인 여성구제

론으로 보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여성은 과연 어떻게 해야만 구제될 수 있는가?「마누법전」에 의하면, 이것

은 남성에 대한 복종을 골자로 하는 ‘여자의 의무’를 완수함으로서만 가능하다.「마

누법전」에 의하면, 고대의 인도인들은 生天신앙을 가지고 있었다.8) 그러나 增谷文

雄에 의하면, 이것은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의 단적인 예로, 그는 내세

생천을 기원하는 소마제(Soma- yajña) 가운데 하나인 一切祠(Sarva-medhā)를 제

시한다. 一切祠는 모든 재산뿐만 아니라 아내까지도 神에게 바치는 제사로서, 이른

바 여성의 희생을 통한 남성의 생천을 기원하는 제사이다.9) 다시 말하면 이것은 생

천의 주체가 오직 남성이며, 여성은 그러한 남성에 대한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당시 인도일반의 통념이었다고 생각

하는데, 이 때문에 ‘변성남자성불설’이 대승불교의 전형적인 여성구제론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상황에서는 심지어 여성들에게조차 ‘女身成佛

說’보다는 ‘변성남자성불설’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8) 예컨대 “공손하게 공물을 받은 자와 공손하게 준 자는 天界로 간다. 그러나 반대일

때는 지옥으로 간다.”(4‧235), “남편 사후, 순결을 결심하고 정절을 지키는 아내는

아들 없어도 천계로 간다.”(5‧160), “사후, 악덕을 지은 자는 끝없이 아래로 향하고,

악덕이 없는 자는 천계에 오른다.”(7‧53), “최선을 다해 재물을 베다에 정통하고

홀로 살아가는 바라문에게 주는 자는 사후에 천계를 향수한다.”(11‧6) 등이 있다.

9) 增谷文雄, 목정배 역,「陀時代」, 서울 : 경서원(1984), pp.106~108 참조.

 

 

마누법전」에 있어 여성은 이처럼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생천할 수 없는 존재였

다. 그러면 여성에게 남겨진 길은 무엇인가? 󰡔마누법전󰡕에 의하면, 이것은 결혼을

통해 오직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특히 인도전통의 業 이론에 의하면,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전생에 있어 악업의 결과이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

는 일이란 기껏해야 남편에 대한 의무를 어김없이 이행하여 사후 천계에 태어나고,

나아가 내세에는 다시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은 이와

같은 사정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기술들이다.

 

"남편은 비록 그 성이 악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좋은 자질이 없더라도 정절을 지

키는 아내에 의해서 항상 神처럼 섬겨져야 한다. … 남편을 섬김으로써 사후 천계

에서 영화를 누린다. 정절을 지키는 아내가 남편의 세계를 바랄 때는 남편이 살아있

을 때나 사후나 그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 죽도록 참고 견디며,

자기를 억제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한 사람만을 남편으로 섬기는 아내로서의 최고의

생활방식(다르마)을 구해야 한다. … 아내는 남편을 배반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비난

받고 재생해서는 자칼로 태어나며, 또한 죄에 따른 역병으로 고통을 당한다. … 마음

과 말과 신체를 억제하며, 이처럼 살아가는 아내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명성을, 그리

고 저 세상에서 남편의 세계를 획득한다."(5‧154~166)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의 구제는 오직 남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마누법전」에는 다시 이러한 의무를 지키지 않는 아내를 단속하

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처벌규정까지 제시되고 있다.

 

"남편은 증오심을 품은 아내를 1년간 기다려야 한다. 1년이 지나면 그녀에게 준 물

건을 빼앗고, 그녀와의 동거를 끝내야 한다. 아내가 방탕한 남편, 술주정뱅이 남편

혹은 병든 남편을 무시할 때는 장신구와 소지품을 빼앗고 3개월간 유기해야 한다.

… 아내가 술을 마시고, 소행이 좋지 않고 반항적이며 병들고 항상 살아있는 것에

危害를 가하고 혹은 낭비가 심할 때에는 당연히 [다른 여자로] 바뀌어야 한다. …

바뀐 아내가 화를 내며 집을 뛰쳐나갈 때는 그녀는 곧 연금되거나 가족 앞에서 버려

져야 한다."(9‧77~83)

 

이상과 같이 여성은 비록 명분상으로는 남성과 같은 신분일지 모르지만, 그 지위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면 이처럼 열등하고 멸시되어 마

땅했던 여성의 존재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에 대한 실마리도 역시「마누법전」

속에서 발견된다. 법전에 의하면, 고대 인도인의 4주기적인 생활방식에서 마지막

유행기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은 ‘3가지 부채’를 다 청산했을 때만 주어진다고 한다.

(4‧257, 6‧35~37, 6‧94) 여기서 ‘3가지 부채’란 첫째, 옛 선인에 대한 베다학습의

부채, 둘째, 神들에 대한 제사의 부채, 셋째, 조상에 대한 가계존속의 부채를 말한

다. 이 가운데 세 번째 부채는 “남자는 장자가 태어남으로써 아들의 아버지가 되

며, 조상에 대한 부채에서 해방된다.”(9‧106)고 하듯이, 이른바 조상에게 제사지

내고 가계를 이어갈 아들에 관한 것이다.10)

 

10) 이외, “여자는 출산을 위해서, 남자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 창조되었다.”(9‧96),

“불임의 아내는 8년째에, 자식이 모두 죽어버린 아내는 10년째에, 여자만을 낳은

아내는 11년째에, 그리고 불평만 하는 아내는 그 자리에서 마땅히 교체되어야 한

다.”(9‧81) 등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적어도「마누법전」이 편찬되던 시기의 인도인에게는 아들의 생산이 인

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를 ‘푸트(put)’라고

불리는 지옥에서 구한다. 그 때문에 스바얌부(Svayaṃbhū ; 自在者)에 의해서 아들

은 ‘푸트라(putra)’라고 불렸다.”(9‧138)고 하듯이, 남자에게 있어 아들은 내세를

위한 일종의 사후보험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성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러

한 아들의 출산에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가 흥기하던 시대의 인도사회는 여성멸시적인 경향이 그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승가의 책임자로서 석존

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만 했을까? 필자는 석존도 이러한 현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석존을 반여성주의자로 취급해서

는 곤란하다. 주지하듯이, 석존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출가여성 단체를 창설했으며,

『테리가타』에는 이러한 출가여성들의 해탈 사례들이 수없이 열거되고 있다. 만

약 석존이 반여성주의자였다면 이것을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고대의 인도사회는 석존의 출현여부와 상관없이 언제

나 바라문 사회였으며, 석존 역시 그 시대의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석

존의 출현이 당시 사상적,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사회구조 자체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에

대해 增谷文雄은, 불교가 인도문화사의 주류에 대해 적극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문화사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불교 또한 바라문 문화 가운데

하나의 파생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11)

11) 增谷文雄, 앞의 책, pp.183~196 참조.

 

그러나 석존이 바라문 사회의 종성제도를 비판한 사회개혁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는 견해도 적지 않다. 그리고『숫타니파타』의 다음 게송은 바로 이러한 주장을 대

변하는 예로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다.

 

출생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136)

 

이 게송은 출생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던 당시의 사회구조를 감안하면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것이 과연 종성제도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표현상으로 보면, 이것은 이미 기존의 종성제도를 전제하고 있다. 즉

당시의 제도권에서 최고 권위자였던 바라문을 표준으로써 그 행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바라문 출신이면서 그 행위가 옳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으

로도 충분히 그 의미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增谷文雄에 의하면, 이것은 사회조

직으로서의 종성제도가 아니라 승가 내부에 관한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즉 이것

은 종성제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종성이 석존의 제자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增一阿含經』권

21 「苦樂品」 제9경의 다음 기술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례 가운데 하

나이다.

 

세존이 모든 비구들에게 告하기를, 지금 있는 4大河의 물은 阿耨達泉에서 나온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소위 恒伽‧新頭‧婆叉‧私陀이다. … 4大河의 물은 阿耨達泉을

에워싸고 恒伽는 동해로 들어가고, 新頭는 남해로 들어가며, 婆叉는 서해로 들어가

고, 私陀는 북해로 들어간다. 그때 4大河가 바다로 들어간 뒤에는 본래의 이름을 여

의고 단지 바다라고만 불린다. 이것 또한 그와 같이 四姓이 있다. 무엇을 넷이라 하

는가? 刹利‧婆羅門‧長者‧居士의 種이다. 여래에게 나아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3法衣

를 입고 출가하여 道를 배우면 본래의 姓을 여의고, 단지 사문 석가의 아들이라고만

불린다.12)

12) “世尊告諸比丘 今有四大河水從阿耨達泉出 云何爲四 所謂恒伽‧新頭‧婆叉‧私陀 …

四大河水遶阿耨達泉已 恒伽入東海 新頭入南海 婆叉入西海 私陀入北海 爾時 四大

河入海已 無復本名字 但名爲海 此亦如是 有四姓 云何爲四 刹利‧婆羅門‧長者‧居士

種 於如來所 剃除鬚髮 著三法衣 出家學道 無復本姓 但言沙門釋迦子”(『大正藏』제2권,

p.658중~하)

 

이 인용문도 기존의 종성제도를 전제하고 있는데, 단지 석존의 승가에는 그러한 구별

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석존 역시 인도라는 지역적, 시대적 한계를 결

코 뛰어넘을 수 없는 역사적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석존 및 이후

의 불교사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데, 이 논의의 목적은

바로 이것을 밝혀봄에 있다. 즉 현대 불교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불교의 성차별적

요소들, 예컨대 ‘비구니팔경법’이나 ‘여인오장설’, ‘변성남자성불설’ 등도 바로 이러한

인도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Ⅲ. 比丘尼八敬法의 성차별 문제

 

 

마누법전」에도 나타나듯이(1‧87∼91), 석존 당시의 시대는 바라문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그리고 석존은 처음부터 이러한 계급적 차별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즉 상기의 󰡔숫타니파타󰡕 136게송처럼 행위에 의한 차별은

있을지언정 출생에 의한 인간 사이의 계급적, 신분적 차별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앞서 增谷文雄의 지적처럼, 석존은 현실개혁론자는 아니었다. 따라

서 여기서의 평등도 세속적인 차원에서 귀천의 차별을 부정하는 평등론으로 이해

해서는 곤란하다. 다시 말해 상기의 평등론은 法 앞에서의 평등으로서, 석존의 가

르침에 있어 어떤 차별도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출생보다 행위를 묻는 것이 중시되면 자연히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의 기회의 균등도 주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이 입장에 서면 종성

이나 가문, 性의 구별이 인간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석존의 신념을 실현하고 있는 곳이 이른바 僧伽(saṃgha)이다. 나아가 석존은 승가

에 출가한 수행자들에 대해 구족계를 받고 난 후의 햇수, 즉 법랍에 의한 순서만을

인정할 뿐, 그 외에는 모두 ‘釋子’라고 하여 인간평등의 이상을 표방하고 있었다.13)

13) 각주 12) 참조바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전에 나타난 석존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여성의 출가와 관련한 비구니팔경법은 상기의 인간평등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인도전통의 남성 중심적인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은 무엇 때문인가?

 

불교에 있어 여성의 출가는 석존의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Mahāpajāpatī

Gotamī) 왕비의 세 번에 걸친 간청과 시자이자 종제인 아난의 중재에 의해서 이루

어졌다. 이때 석존은 8가지의 조건, 곧 비구니팔경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 하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구니팔경법이 과연 석존의 직설인

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 적지 않은 의견차가 있어 왔다. 먼저 오직 석존만이 계

율을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구니팔경법도 당연히 석존의 직설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불교의 經‧律을 석존의 교설로서 인정하는 한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그런

데 비구니팔경법의 내용과 그 제정시점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예컨대 ‘비록 법랍이 100세인 비구니라도 새로 수계한 비구에게 예배해야 한

다.’는 등의 조항은 평등을 승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던 석존의 입장과 너무나

거리가 멀고, 또한 비구니팔경법의 제정 시점도 여성이 최초로 출가할 때라고 되어

있지만, 비구니 승가가 정비된 이후의 ‘二部僧衆’, ‘式叉摩那’, ‘六法’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주장은 비구니 승가가 만들어진 최초에 이러한

규칙이 모두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성의 출가에 다소 부정적이었던 비구

들이 불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수정 내지 삽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율장의 현재형뿐이며, 석존의 직설 자체를 복원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록 율장의 현재형에 후대의 수정‧삽입이 있

다 해도 석존이 비구니팔경법과 같은 여성의 출가조건을 제시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14)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비구니팔경법이 비구니 350계

및 수계법의 모태가 되었으며, 나아가 비구니의 생활을 규정하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것으로 인해 여성차별이 가속화 내지 고착화되었다는 데에 많은 학

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14) 平川彰도 비구니팔경법이 실제 석존에 의해서 제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이 상당히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구니 승가 성립 당시에 이러한 규칙

모두가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적어도 비구니 승가가 성립하고 난 이후에

정리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율장에 있어 비구니팔경법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부파분열 이전, 즉 초기불교에서 성립한 것임은 확실

하다고 보고 있다.(平川彰, 석혜능 역,「원시불교의 연구」, 서울 : 민족사(2003),

p.546)

 

율장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6종이 있다. 여기서 비구니팔경법은

『팔리율』을 비롯한 여섯 율장 모두에 나타나 있다. 본 논의에서는『五分律』과 더

불어 현재 그 성립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인정되고 있고, 또한 한역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고 있는『四分律』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異見이 있는 만큼, 먼저 비구니팔경법을 석존의 직설이라는 차원에서 논구한 다음,

후대의 부가 내지 창작설이라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비록 [법랍이] 100세인 비구니라 할지라도 새로 수계한 비구를 보면 마땅히 일어

나 迎逆, 禮拜하고, 깨끗한 자리를 펴서 내주며 앉도록 청하라.15)

15) “雖百世比丘尼見新受戒比丘 應起迎逆禮拜與敷淨座請令坐”(『大正藏』제22권,

p.923상~중)

 

이 제1법은 수계연수(법랍)에 의한 불교의 서열규정이 무시되고 있는 조항으로 분류

된다. 특히 이것은 비구니를 비구보다 이미 열등한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Môhan Wijayaratna가 지적하듯이,16) 여기에는 佛法과

梵行의 단절을 우려한 다소 의도적인 측면이 있음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먼저 不婬

行을 강조하는 승가에 여성이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오해와 불신을 낳기에 충분했다

는 점이다. 비록 금욕적인 수행집단이라고는 해도 각종 법회나 행사에 있어 비구와

비구니의 접촉은 피할 수 없고, 또한 그로 인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

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경쟁하던 당시의 종교 사상계를 감안하면 자칫 기존의 비구

승가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16) Môhan Wijayaratna, 온영철 역,「비구니승가」, 서울 : 민족사(1998), p.38.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여성멸시적인 당시의 사회적 관념이다.「마누법전」에도 나

타나듯이, 당시의 바라문적인 전통은 아직 여성을 자신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받아

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곧 바로 비구와 동등한 비

구니 승가를 설립하고 그것을 세상에 공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누구도

그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출가연수에 의한 서열규정을 그대로 적

용한다면 각종 행사에서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섞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또한 그럼으로써 세간의 의혹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석존도 이러한 문

제들을 해결할 특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도 당시의 현

실을 고려하면 이처럼 비구니 승가를 비구 승가에 종속시키는 방법이 결코 부정적

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단 사회일반의 관념에 따라 비구니

를 비구에게 종속시킴으로써 그 의구심을 해소하고, 나아가 비구니 승가의 안정성

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기의 제1법은 비록 비구니에

게는 가혹한 것 같지만, 비구와 비구니 사이의 서열을 확실히 해 둠으로써 가능한

한 비구와 비구니의 접촉을 줄이고, 또한 그럼으로써 혼성교단에 대한 세간의 의

혹을 해소한다는 점이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② 비구니는 마땅히 비구를 꾸짖어 가책하지 못하며, 破戒‧破見‧破威儀를 말하여

비방하지 못한다.17)

17) “比丘尼不應罵詈比丘呵責 不應誹謗言破戒破見破威儀”(『大正藏』제22권,

p.923중)

 

이 제2법도 제1법과 마찬가지로 비구니의 비구에 대한 종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摩訶僧祇律』권30에는 비구니가 비구보다 먼저 식사, 방사, 평상과 이

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기술까지 보인다.18) 하지만『사분율』권48에는 다시

이 가책의 범주를 破戒‧破見‧破威儀에 국한하며, 增上戒와 增上心, 增上智를 위

해서는 學問하고 誦經하는 등의 가책이 가능하다는 조문이 부가되어 있다.19)

특히 이 가운데 增上戒‧增上心‧增上智는 戒‧定‧慧의 三學과 대응하는 것으로서

불교적 실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적 실천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조문만을 놓고 보면 비구니가

비구를 가책하는데 있어 어떠한 제약도 없다고 볼 수 있다.

18) “比丘尼不先比丘受食房舍床褥”(『大正藏』제22권, p.474하)

19) “比丘尼不一切不得呵比丘比丘尼不應罵比丘不得呵責比丘 不應誹謗若破見

破戒破威儀 不應如是呵 瞿曇彌 若敎持增上戒增上心增上智學問誦經 如是事

應呵”(『大正藏』제22권, p.927상)

 

 

 

이처럼 제2법에는 상호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율장의 현재형뿐이며, 이 모

순의 진의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상기

의 제2법이 결코 여성에게만 일방적인 계율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비구니가 왜 비구의 破戒‧破見‧破威儀를 가책할 수 없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이것이 성차별을 담보하는 근거일 수도 없다. 즉 내용

적인 모순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어느 하나만으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③ 비구니는 마땅히 비구에 대하여 擧罪, 憶念, 自言케 하지 못하며, 타인의 覓罪,

說戒, 自恣를 막지 못한다. 비구니는 마땅히 비구를 꾸짖지 못하며, 비구는 마

땅히 비구니를 꾸짖는다.20)

20) “比丘尼不應爲比丘作擧作憶念作自言 不應遮他覓罪遮說戒遮自恣 比丘尼不應

呵比丘 比丘應呵比丘尼”(『大正藏』제22권, p.923중) 여기서 ‘憶念’은 비구에게

죄가 있음을 주지시켜 기억케 하는 것이며, ‘自言’은 비구에게 자백, 참회시키는

것을 말한다. ‘覓罪’는 앞뒤가 맞지 않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만약 비구가 이것을

하더라도 비구니는 그것을 중지시킬 수 없다고 한다. ‘說戒’는 매월 15일에 있는

布薩을 말하며, 自恣란 안거 중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행위에 대해 見‧聞‧疑한 것을

지적받고 참회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 제3법도 내용상 상기의 제2법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즉 여기서의

‘比丘尼不應呵比丘 比丘應呵比丘尼’는 제2법의 ‘比丘尼不應罵詈比丘呵責’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법의 성차별적 요소에 대해서는 제2법과

같이 설명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조항에 해당하는『팔리율』에 있어서의 ‘言路’라는

말의 성격이다.21) H. Oldenberg는 이 말에 해당하는 ‘vacanapatha’를 ‘official

admonition’, 즉 ‘공개적으로 훈계하는 것’으로서 해석하고 있는데,22) 이것에

따르면 곧 비구니는 비구에 대해 공개적으로 훈계할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에

대해 공개적으로 훈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 역시 ①의 조

항과 마찬가지로 기존사회의 관념에 따른 현실과의 타협책일 수 있다고 보고 있

다. 다시 말해 고대인도에서 여성이 남성을 훈계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조항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21)『팔리율』의 小品(Cullavagga,Ⅹ)에 나오는 ‘八重法’은 다음과 같다. ⑴ 비구니는

구족계를 받고 100세일지라도 오늘 구족계를 받은 비구를 위해서 敬禮, 迎逆, 合掌,

恭敬을 해야 한다. ⑵ [우기에]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주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⑶ 비구니는 반월마다 比丘衆에게 二法을 청해야 하니, 布薩을 묻는 것과 敎誡에

가는 것이다. ⑷ 비구니는 우안거를 마치면 양 승가에 見‧聞‧疑의 三事로서 自恣를

행해야 한다. ⑸ 비구니가 이 尊法을 범하면 양 승가에서 반월마다 摩那埵를 행해야

한다. ⑹ 식차마나가 2년간 6법을 배우고 나면 양 승가에서 구족계를 청해야 한다.

⑺ 비구니는 어떠한 경우에도 비구를 罵詈 讒謗해서는 안 된다. ⑻ 오늘 이후, 비구

니의 비구에 있어서의 言路는 폐쇄되고, 비구의 비구니에 있어서의 언로는 폐쇄되지

않는다.(Vinaya-piṭaka,Ⅱ, p.255.『南傳』제4권, pp.380~381)

22) 植木雅俊,「佛敎のなかの男女觀」, 東京 : 岩波書店(2004), p.153 참조.

 

 

 

 

式叉摩那는 學戒를 마치면 비구승으로부터 大戒를 乞受해야 한다.23)

23)“式叉摩那學戒已 從比丘僧乞受大戒”(『大正藏』제22권, p.923중)

 

여기서 ‘式叉摩那’는 팔리어 ‘sikkhamānā(Ⓢśikṣamāṇā, 正學女)’의 음사로서, 아

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미니와 비구니의 중간단계에 있는 자를 말한다. 율장 모

두 이 기간을 2년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十誦律』권45에는 “지금부터

사미니에게 2년 동안 6법을 배울 것을 허락한다. 임신의 유무를 알아야 한다.”24)

고 하여, 그것이 임신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20세

이상의 여성은 사미니계를 받은 다음 곧바로 구족계를 받고 비구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지원자들조차 자신의 임신여부를 모를 수가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비구

니로서 출산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마

련된 일종의 유예기간인 셈이다.

24) “從今聽沙彌尼二歲學六法 可知有娠無娠”(『大正藏』제23권, p.326중) 여기서

‘2년 6법’이란『팔리율』의 經分別(Suttavibhaṅga,Ⅱ)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①殺生을 여의는 戒를 2년 동안 범하지 않는다. ②不與取를 여의는 戒를 2년 동안

범하지 않는다. ③非梵行을 여의는 戒를 2년 동안 범하지 않는다. ④妄語를 여의는

戒를 2년 동안 범하지 않는다. ⑤飮酒를 여의는 戒를 2년 동안 범하지 않는다.

⑥非時食을 여의는 戒를 2년 동안 범하지 않는다.(Vinaya-piṭaka,Ⅳ, p.319.『南傳』

제2권, pp.514~515) 또한 이것은 5戒 가운데 ‘不邪婬’을 ‘非梵行’으로 대치하고

여기에 ‘非時食戒’를 더한 것으로,『사분율』도 순서상의 차이만 있을 뿐 내용은

일치한다. ①不得犯不淨行行婬欲法 ②不得偸盜 ③不得故斷衆生命 ④不得妄語

⑤不得非時食 ⑥不得飮酒(󰡔大正藏『제22권』, p.924중~하)

 

이 제4법은 식차마나가 2년 동안 6법의 學戒를 받고, 이것을 마치면 먼저 비구니

승가의 大戒(구족계)를 받고 다시 비구 승가로부터도 大戒를 받아야만 비구니가

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표면상 성차별적 규정으로 간주될

만한 충분한 요소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비구니 승가는 이러한 이중 수계로 인해

그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구 승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

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비구니 승가의 미약한 기반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

통적으로 수행자들은 일반사회와 동떨어진 깊은 산림이나 숲 속에서의 고행자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맹수나 도적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

에 없었다. 심지어 蓮華色 비구니의 강간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25) 비구니

를 수행자가 아니라 애욕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석존도 여성만의 자치생활을 쉽게 허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출발하는 비구니 승가는 이미 확보된 비구 승가의 정통성을 적극 이용할 필요

가 있었다. 이미 지적했듯이, 당시의 인도인들은 보시의 공덕으로 내세에 생천하고

자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보시의 공덕은 석존 등과 같은 성자

를 통해서 극대화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탁발에 의존하던 당시의 수

행환경 상 무엇보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 성자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

었던 것이다. 이것은 작게는 수행자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며, 크게는 승가의 존

립이 걸린 문제였다.

25) 이것은 蓮華色 비구니가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 근처의 숲 속에서 수행할 때

누군가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것이 나중에 승가의 문제꺼리가 되었는데,

이때 석존은 그녀가 욕망을 느꼈는지의 여부를 물어 무죄를 선고하고 논쟁을 종식

시켰다.(岩本裕, 앞의 책, pp.104~106 참조)

 

그런데 출가여성의 경우는 처음부터 그 자격을 의심받고 있었다. 즉 여성멸시적인

사회적 관념으로 인해 여성의 성자로서의 자질 그 자체가 부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석존은 이 문제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것에 대한 석존의

해결책이 바로 비구니를 비구에 종속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성자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하고 있던 비구에게 비구니를 종속시킴

으로써 비구와 동등한 성자적 이미지를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구에

의한 비구니의 수계는 그러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굳이 이중수계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석존의 본래 의도대로라면 비구니 승가에서의 수계는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十誦律』권45의 설명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석존의 본래 의도는 비구 승가에서의 수계였지만, 임신 등

출가 부적격자를 가려냄에 있어 여성에 대한 비구의 신체검사가 불가능했기 때문

에 이중수계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⑤ 비구니는 僧殘罪를 범하면 마땅히 二部僧衆에게 반월마다 마나타를 행해야 한다.26)

26) “比丘尼犯僧殘罪 應在二部僧衆半月行摩那埵”(『大正藏』제22권, p.923중). 여기서

僧殘은 僧伽婆尸沙(Ⓢsaṃghāvaśeṣa)의 의역으로서, 성적 악습이나 승가의 분열을

유도하는 등의 사상적 행동과 관련된 규정을 말한다. 승잔은 참회로도 속죄될 수 있는

죄이지만, 만약 숨기면 그 일수만큼 別住시켜 근신케 한다. 별주기간이 끝나도 다시

6일간의 별주생활을 더 하게 되는데, 이것을 6夜의 마나타(mānatta)라고 한다. 마나

타가 끝나면 20인 이상의 비구 승가로부터 出罪를 인정받게 된다. 이것은 별주나 마

나타 등의 행법에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율장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20인 이상의 비구가 모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것 역시 중죄

라고 할 수 있다. 비구는 13조, 비구니는 17조의 승잔법이 있다.

 

제5법은 승잔죄에 대한 비구니의 二重出罪를 규정하는 조항으로서, 여기에도

비구니 승가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측면이 있다. 예컨대 이 법은 승잔죄에 대한

차별규정으로서, 비구는 6일 동안 마나타를 행하면 出罪를 청할 수 있는 반면,

비구니는 비구니 승가에서 15일 동안 마나타를 행하고, 또 매일 비구‧비구니의

양 승가에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 역시 당시 비구니 승가의 현실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점

이 있다고 보고 있다. 비구의 경우는 이미 전통적인 기반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

에 그것을 조직함에 있어서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출가생활은 기본적으로 재가의 보시에 의존

하게 되는데, 당시 멸시의 대상이던 여성에게도 과연 그러한 보시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집단이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이 아직

마련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의 출가여성이 있기는 했지만,27)

대규모의 출가여성단체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

해 생겨날 수 있는 문제들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승가의 책임자

였던 석존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28)

27) Môhan Wijayaratna에 의하면, 육사외도 중 ‘邪命外道’로 알려진 Makkhali

Gosāla의 Ājīvika교도 중에도 여성사문들이 있었고, 자이나교의 교주 Nigaṇṭha

Nātaputta의 제자 중에도 여성사문들이 있었다고 한다.(앞의 책, pp.17~18 참조)

28) ‘출가사문’이란 소위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를 말한다. 이것은 곧 그들의

생활이 재가자들의 보시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러한 자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던 여성을 출가시킨

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칫 오해라도 생긴다면 그들의 출가생활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로 인한 기존의 비구까지도 그 위험을 감당

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석존도 이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초기의 출가여성은 독자적인 승가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유례가 없었기 때문에 승가 운영상의 제반 규정들도 기존

의 비구 승가에서 그대로 차용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승가운영상의 경험이

풍부한 기존 비구들에게 그 운영상의 실태를 확인케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

는 것이다. 더구나 석존이 일일이 지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승

가운영에 대한 판단이 비구 승가에 위임되는 것도 필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다. 이처럼 상기의 제5법도 당시 비구니 승가의 현실과 관련하면 반드시 성차별

적 규정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점이 있다.

 

⑥ 비구니는 반월마다 僧으로부터 敎授를 구해야 한다.29)

29) “比丘尼半月從僧乞敎授”(『大正藏』제22권, p.923중)

 

이 조문은 불교에 있어 매월 보름과 그믐에 행해지는 포살과 관련된 것으로, 비

구니는 비구가 비구니팔경법을 교수할 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출석해야 하며,

또한 비구니 승가는 포살의 종료를 비구 승가에 보고하고, 15일에 한 번씩 비구

니팔경법의 교수를 위해 비구의 파견을 요청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표면상으로만 보면 이 제6법도 성차별적 조항이다. 그러나 제5법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비구니 승가의 현실을 감안하면 필요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초

기의 비구니들에게는 아직 법을 교수할만한 적격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비구

의 교수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승인된 비구만이 비구니를

교수할 수 있다는 조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컨대『사분율』권12에는 계율

을 구족하고 비구‧비구니의 계율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법랍이 20년

이상이어야 한다는 등으로 비구니 교수자로서의 비구의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30) 이것은 단지 비구라는 이유만으로 비구니를 교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자만이 교수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제6법도 비구니의

교수능력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당시 비구니들의 실정을 고려한 방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30) “若有比丘成就十法者 然後得敎授比丘尼 戒律具足 多聞誦二部戒 利決

斷無疑 善能說法 族姓出家 顔貌端正 比丘尼衆見便歡喜 堪任與比丘尼

衆說法勸令歡喜 不爲佛出家而披法服犯重法 若滿二十歲若過二十歲 如

此等可與比丘尼敎誡”(『大正藏』제22권, p.648하). 이것은 波逸提法의

‘非選而敎尼戒’, 즉 “만약 비구승이 [비구니 교계에] 차출되지 않고 비구

니를 교계하면 바일제이다.(若比丘僧不差敎誡比丘尼者波逸提)”는 조문

의 주석부분에 있는 것으로,『사분율』서는 10법을 들고 있지만『팔리

율』의 經分別(Suttavibhaṅga,Ⅱ)에는 8법이 언급되고 있다. 예컨대 ⑴

持戒者 ⑵波羅提木叉의 律儀에 따라 몸을 잘 수습하며 머무는 자 ⑶威儀를

구족한 자 ⑷작은 죄에도 두려움을 품는 자 ⑸學處를 굳게 執持하여 배운 자

⑹多聞인 자 ⑺들은 바를 憶持하고 積集하는 자 ⑻諸法을 구족하고 二部의

波羅提木叉에 통달하여 비구니를 敎誡할 수 있으며, 출가해서 세존의 重法을

범하지 않고 20夏를 지난 자이다.(Vinaya-piṭaka,Ⅳ, p.51.『南傳』제2권,

pp.81~82)

 

⑦ 비구니는 마땅히 비구가 없는 곳에서 하안거를 하지 못한다.31)

31) “比丘尼不應在無比丘處夏安居”(『大正藏』제22권, p.923중)

 

이 제7법은 인도의 기후적 특성과 관련된 것으로, 비구니는 비구의 지도 아래

90일 동안의 안거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것 역시 당시 출가여성의 현실

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점이 있다고 보는데, 특히 여기에는 비구니들만의

안거로 인한 문제의 소지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먼

저 비구와 함께 안거를 할 경우, 맹수나 도적, 치한 등의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변상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안거는 보통 민간인의 왕

래가 없는 외딴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

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연화색 비구니의 예에서처럼, 비구니를 수행자가

아니라 애욕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여기에는 치안의

부재로 인한 위험성을 비구와의 공동 안거로 해소하고자 한 일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기로 인한 행동반경의 제약이다. 주지하

듯이, 초기의 불교수행자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소규모 단위로 유행생활을 하

고 있었다. 이것은 석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행생활은 자연

히 수행상의 의문이라든가 經‧律에 대한 학습의 부재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안거라는 의식 자체는 오랜 우기로 인한 유행의 불편함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만, 여기에는 이처럼 그 동안의 의문과 經‧律에 대한 학습을 보충한다

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비구니가 비구와 왕래할 수 없는 곳에

서 안거를 하게 된다면 이러한 것들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이미 지

적했듯이, 초기의 비구니들은 아직 제자를 지도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

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존 비구들의 수행상의 경험과 지도도 필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7법도 이러한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

원이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⑧ 비구니승은 안거가 끝나면 마땅히 비구승중에게 見‧聞‧疑의 3事에 대한 自恣를

구해야 한다.(32)

32) “比丘尼僧安居竟 應比丘僧衆中求三事自恣見聞疑”(『大正藏』제22권, p.923중)

 

이 제8법은 제7법에 이어 안거 마지막 날에 행해지는 自恣와 관련된 것으로, 비구

니는 비구니‧비구의 양 승가에서 자자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약간의 문제점은 발견된다. 예컨대 비구들은 단독으로 안거‧포살‧자자를 행할 뿐만

아니라 수계 및 기타 出罪作法도 그들만으로 행하지만, 비구니의 경우는 이 모든

행위가 비구의 동참이 없으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에 언급된33) 여성의 출가와 관련한 석존과 아난의 문답을 통해서도 알 수 있

듯이, 석존이 여성의 출가를 승인했다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여성의 능력을 불신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구니들의 시를 수록한『테리가타』는 깨달음을

얻어 높은 경지에 이른 비구니가 많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초기의 출가

여성에게는 적지 않은 현실상의 문제가 있었다. 만약 석존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

고 곧바로 비구와 동등한 비구니 승가의 성립을 도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정

그러한 성격의 여성단체가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그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필자는 바로 이러한 당시의 사정이 비구니팔경법에

적지 않게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을 배제하고 단지 그 표현

만으로 이것을 논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33) 각주 34) 참조

 

지금까지 비구니팔경법이 석존의 직설이라는 전제 하에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러

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후세의 비구들에 의한 부가 내지 창작일 가능성도 부

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사분율』권48에서 비구니팔경법이 나오는 곳을 보면, 다음과 같은 아난과

석존의 대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비구니팔경법은 바로 이 대화 다음에

열거되고 있다.

 

아난이 佛에게 아뢰기를, 여인도 佛法 속에 출가하여 수계하면 須陀洹果 내지

阿羅漢果를 얻을 수 있습니까? 佛이 아난에게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34)

34) “阿難白佛 女人於佛法中出家受戒 可得須陀洹果乃至阿羅漢果不 佛告阿難可得”

(『大正藏』제22권, p.923상)

 

그런데『오분율』권29에는 이것에 이어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만약 여인의 出家受具足戒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佛의 正法은 세상에 천년이나

머물렀을 것이다. 지금 출가를 허락해서 곧 500년 줄어들 것이다.35)

35) “若不聽女人出家受具足戒 佛之正法住世千歲 今聽出家則減五百年”(『大正藏』

제22권, p.186상)『사분율』권48에는 “만약 여인이 佛法에 출가하지 않는다면

佛法은 마땅히 500歲를 久住할 것이다.(若女人不於佛法出家者 佛法當得久住五

百歲)”(『大正藏』제22권, p.923하)고 있다.

 

여기서 ‘여성도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석존의 직설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출가여성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비구들이 이것을

부가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과 앞서 언급한 출가에 있어서의

무차별성을 감안하면, ‘정법 500년 감소설’은 후세의 부가 내지 창작이라고 볼 수

도 있는 것이다. 즉 정법이 쇠퇴한다면 불교적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문제인데, 승

가의 책임자로서의 석존이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고 보

기는 어렵고, 또한 이것은 佛法의 전도를 위해 45년간 편력했던 석존의 모습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오분율』에 있어 상기의 인용문은 비구니팔경법을 매개로 석존의

직설과 후대의 부가 내지 창작을 함께 연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에 대해 植

木雅俊은 불전의 편찬을 주도한 비구들이 ‘여성도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석존의 직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차선책으로 석존을 빌

어 비구니팔경법을 부가하고, 나아가 정법의 감소설까지 삽입했다고 보고 있다.

36) 그리고 그는 그 논거로서『테리가타』등 초기불전에 나타난 석존의 여성관

과 비구니팔경법에 보이는 남성 중심적인 경향이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점을 들

고 있다. 먼저『테리가타』에는 석존 당시의 수계 장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36) 植木雅俊, 앞의 책, pp.156~157.

 

… 붓다는 ‘어서 오시오, 밧다(Bhaddā, 跋提)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에 의해서

나는 완전한 계율을 받게 되었다.(109)

 

또한『테라가타』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다.

 

 

스승은 … ‘어서 오시오, 밧다(Bhadda, 跋陀)여.’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의 수계였다.(478)

 

자비로운 스승이자 모든 세간의 慈愛者는 ‘어서 오시오, 수행자여.’라고 나에게 말씀

하셨다. 이것이 나의 수계였다.(625)

 

神들과 인간의 스승이며, 자비를 내리시는 위대한 仙人 붓다는 그때 그에게 ‘어서

오시오, 수행자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에 의해서 그는 수행자의 자격을 부여받

았다.(870)

 

이것들에 의하면, 석존의 수계는 단지 ‘오시오(ehi)’라는 말만으로도 가능한 것이

었다고 볼 수 있다.37) 그리고 平川彰의 분석에 따르면, 수계법은『十誦律』에 10종,

38)『摩訶僧祇律』에 4종,39)『善見律毘婆沙』에 8종,40)『毘尼母經』에 5종,41)

『律二十二明了論』에 9종,42)『薩婆多毘尼毘婆沙』에 7종,43)『俱舍論』에 10종

44)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각 논서에 공통하는 三歸依具足, 白四羯磨受具, 善來具

足 등의 성립이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45) 이렇게 보면 불교 초기에 있어서의 수

계는 어렵고 복잡한 절차 등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사분율』

등의 율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구니팔경법이 여성의 출가조건으로서 고정되어 있

는 것이다.

37) 中村元,「原始佛敎の成立」, 東京 : 春秋社(1978), p.234 참조.

38) “佛佛世尊自然無師得具足戒 五比丘得道卽得具足戒 長老摩訶迦葉自誓卽得具足戒

蘇陀隨順答佛論故得具足戒 邊地持律第五得受具足戒 摩訶波闍波提比丘尼受八重法

卽得具足戒 半迦尸尼遣使得受具足戒 佛命善來比丘得具足戒 歸命三寶已三唱我隨佛

出家卽得具足戒 白四羯磨得具足戒”(『大正藏』제23권, p.410상)

39) “四種具足法 自具足 善來具足 十衆具足 五衆具足”(『大正藏』제22권, p.412중)

40) “善來比丘得具足戒 三歸得具足戒 受敎得具足戒 答問得具足戒 受重法得具足戒

遣使得具足戒 以八語得具足戒 白羯磨得具足戒”(『大正藏』제24권, p.718중)

41) “有能成就比丘五種受具 名爲受具 何者五 一者善來比丘卽得受具 二者三語卽得受具

三者白四羯磨受戒名爲受具 四者佛敕聽受具卽得受具 五者上受具 何故名爲上受具

佛在世時不受戒 直在佛邊聽法得阿羅漢 名上受具 … 比丘尼亦有五種受具 一者隨師

敎而行名爲受具 二者白四羯磨而得受具 三者遣使現前而得受具 四者善來而得受具

五者上受具(『大正藏』제24권, p.801중)

42) “律中說依他圓德有七種 比丘有四種圓德 一由善來比丘方得 二由受三歸方得 三由

略羯磨方得 四由廣羯磨方得 比丘尼有三種圓德 一由善來比丘尼方得 二由遣使方得

三由廣羯磨方得 獨覺有量功德至得 諸佛世尊無量功德波羅蜜至得 合有九種圓德”

(『大正藏』제24권, p.668하)

43) “凡七種受戒 一者見諦受戒 二者善來得戒 三者三語得戒 四者三歸受戒 五者自誓受戒

六者八法受戒 七者白四羯磨受戒”(『大正藏』제23권, p.511상)

44) “諸毘柰耶毘婆沙師說 有十種得具戒法 爲攝彼故復說等言 何者爲十 一由自然 謂佛

獨覺 二由得入正性離生 謂五苾芻 三由佛命善來苾芻 謂耶舍等 四由信受佛爲大師

謂大迦葉 五由善巧酬答所問 謂蘇陀夷 六由敬受八尊重法 謂大生主 七由遣使 謂法

授尼 八由持律爲第五人 謂於邊國 九由十衆 謂於中國 十由三說歸佛法僧 謂六十賢

部共集受具戒”(『大正藏』제29권, p.74중~하)

 

 

 

 

45) 平川彰,「律藏の硏究」, 東京 : 山喜房佛書林(1970), pp.587~588 참조.

 

이와 같이 아난이여, 내가 지금 설한 이 八不可過法(비구니팔경법)을 만약 여인이

능히 행한다면, 이것이 곧 수계이다.46)

46) “如是阿難 我今說此八不可過法 若女人能行者卽是受戒”(『大正藏』제22권,

p.923중)

 

이것은『테리가타』에 있어서의 수계의 단순함과 비교하면 상당히 까다롭다. 뿐

만 아니라『테리가타』에 있어 비구니팔경법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고, 당사자

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도 이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비구니팔경법이 석존의 직설이 아니

라 후세의 부가 내지 창작이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비구니팔경법이 현존하는 율장 모두에 나타나 있고, 또 그 내용도 거의 유

사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후세의 부가, 창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즉 석존

이 비구니팔경법과 같은 성격의 규범을 제정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는 석존이 먼저 비구니팔경법의 원형을 제시하였고, 여기에 후

세의 부가 내지 창작이 보태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석존멸후 인도전통의 여성멸시 관념이 유입되고, 또한 여기에 비구니

팔경법이 고착화됨으로써 출가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

나 이것을 석존의 말로서 비구니 승가의 창설멤버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에게 수용

케 하는 장면을 설정함으로써 보다 권위를 더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연

한 귀결이겠지만, 이로 인해 여성의 깨달음도 점점 부정되기에 이르고, 마침내 여성

을 출가시킨 것은 석존의 진의가 아니었다는 전설까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

의 출가를 중재한 아난에 대한 비난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에는 대가섭(Mahā-kassapa)의 이름으로 아난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많다. 예

컨대『사분율』권54와『오분율』권30에는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대가섭이 아난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佛法 속에서 먼저 여인을 구제할 것을 요구

하여 突吉羅罪를 얻었다. 지금 마땅히 참회해야 한다.47)

47) “大迦葉語阿難言 汝於佛法中先求度女人得突吉羅罪 今應懺悔”(『大正藏』제22권,

p.967중~하)

 

가섭, 다시 아난을 힐책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세존에게 세 번이나 청하여 여인이

正法에 출가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요구하여 突吉羅를 범했다. 또한 마땅히 죄를

보고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48)

48) “迦葉復詰阿難言 汝三請世尊求聽女人於正法出家 犯突吉羅 亦應見罪悔過”(『大正藏』

제22권, p.191중)

 

그런데『테리가타』에는 이와 대조적인 모습의 대가섭이 나타나고 있다.

 

 

붓다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가섭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있다. 과거세의 생활을 아는

그는 천계와 지옥을 보았다. 뒤이어 성자 가섭은 생사의 滅盡에 이르러 다양한 신

통력을 터득했다. 즉 이들 3종의 明知에 의해서 그는 3종의 明知를 갖춘 바라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밧다 카필라니(Bhaddā Kapilānī)도 또한 3종의 明知를 갖추

어 死魔를 물리치는 자이다. 그녀는 악마와 그 권속을 이겨내고, 최후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 이 세간에 재앙이 있음을 보고, 우리 두 사람은 출가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더러움을 멸하고, 마음을 調御하여 청량하고 평온함을 얻고 있다.

(63~66)

 

이것은 밧다 카필라니라는 여성이 석존멸후 승가의 유력자가 된 대가섭을 자신과

비교하는 시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밧다 카필라니는 자신이 대가섭과 어떤 차이도

없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녀는 대가섭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깨달음을 얻

은 사람이었다고 한다.49)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대가섭이 비구니 승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대가섭의 이름으로 행해진 여성의

출가를 중재한 아난에 대한 비난 역시 후대에 창작, 부가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이다.

49)中村元,「佛弟子の生涯」, 東京 : 春秋社(1991), p.572.

 

이와 같이 여성의 출가조건인 비구니팔경법과 이것을 중재한 아난에 대한 비난은

『사분율』을 비롯한 여섯 율장 모두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곧 부파분열 이전에

이미 출가여성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비구들이 있었으며, 나아가 여성멸시의 움직

임도 시작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

면서 가속화되어 ‘삼종오장설’도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Ⅳ. 三從五障說에 대한 분석

 

이미 언급했듯이, 불교의 발생 및 그 전개과정상에 있어 인도는 여성차별적인 바라

문 사회였다. 그리고 비록 석존이 法에 의한 남녀평등을 설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가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즉 불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승가 밖의

여성은 여전히 바라문교의 여성차별적인 관념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석존의 가르침을 실천하던 승가 내에 있어서도 사실상 완전한 남녀평등을 기

대하기란 어려웠다. 이미 지적했듯이, 석존 당시 비구 승가의 상당수가 여성차별적

인 문화의 정점에 있던 바라문 출신이었고, 또 그 비율이 석존멸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것은 불교에 있어 여성관의 토대 및 그 배경에 바

라문교적인 여성관이 내재되어 있음을 말하는데, 이렇게 보면 불교의 성차별적인

여성관도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이른바 ‘삼종오장설’이다.

 

 

 

. 三從說

삼종설은 앞서 언급한 힌두사회의 기본성전인 󰡔마누법전󰡕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마누법전」이 성립하던 기원전 2세기경은 마우리야 왕조가 붕괴되고 바

라문교가 다시 부활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삼종설도 불교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종설이 나오는 대표적인 불전으로는『佛說玉耶女經』과『玉耶經』등을 들 수

있는데, 먼저『佛說玉耶女經』의 삼종설은 給孤獨長者(Sudatta, 須達多)의 며느

리 玉耶(Sujātā, 善生)가 친정의 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하며 아내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석존의 교화 속에 나온다.

 

佛이 옥야에게 말하기를, 여인의 법에 三鄣十惡이 있다. … 첫째는 어릴 때 부모에

게 종속되고, 둘째는 출가하여 남편에게 종속되고, 셋째는 늙어서 아들에게 종속

된다. 이것을 三鄣이라고 한다.50)

50) “佛告玉耶 女人之法 有三鄣十惡 … 一者小時父母所鄣 二者出嫁夫主所鄣 三者老時

兒子所鄣 是爲三鄣”(『大正藏』제2권, p.864상)

 

여기서 ‘三鄣(三障)’이 ‘三從’에 해당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계통의『玉耶經』에는 여인의 ‘十惡事’ 속에 그 일면이 나타난다.

 

… 여덟 번째, 여인은 어려서는 부모의 撿錄를 받는다. 아홉 번째, 젊어서는 夫壻의

제재를 받고, 열 번째, 노년에는 兒孫(자손)의 가책을 받는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자재를 얻지 못한다.51)

51) “… 八者女人小爲父母所撿錄 九者中爲夫婿所制 十者年老爲兒孫所呵 從生至終

不得自在”(『大正藏』제2권, p.866상)

 

여기에는 ‘三障’이나 ‘三從’이라는 말이 보이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삼종’

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52)그러면 이와 같이『佛說玉耶女經』이나『玉耶經』

속에 삼종설이 들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玉耶女經』계통의 경전군은 아내로

서의 존재방식이 그 기본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도전통의 여성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삼종설도 그 연장선상에서 유입된 것이 아닐까 생

각된다.

52) 같은 계통의『玉耶女經』에는 “여인의 몸속에 十惡事가 있다.(女人身中有

十惡事)”(『大正藏』제2권, pp.864하~865상)고만 할뿐,『佛說玉耶女經』과

『玉耶經』에서의 ‘三障’이나 ‘三從’이 보이지 않는다.

 

먼저 이들 경전에 열거된 여성에 대한 ‘十惡’을 보면 전통적인 인도여성의 실태

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佛說玉耶女經』: ①태어날 때 부모가 기뻐하지 않는다. ②양육해도 無味이다.

③항상 시집보내기(嫁娶)와 禮를 잃지 않을까 근심한다. ④어디서나 남을 두려워

한다. ⑤부모와 이별한다. ⑥남에게 기댄다. ⑦회임이 매우 어렵다. ⑧출산 때 어

렵다. ⑨항상 남편을 두려워한다. ⑩영원히 자재를 얻지 못한다.53)

53) “何等十惡 一者生時父母不喜 二者養育無味 三者常憂嫁娶失禮 四者處處畏人

五者與父母別離 六者倚他門戶 七者懷妊甚難 八者産生時難 九者常畏夫主

十者恒不得自在”(「大正藏」제2권, p.864상)

 

⑵『玉耶女經』: ①탄생(託生)해도 부모가 매우 양육하기 어렵다. ②회임을 근심

걱정한다. ③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가 기뻐하지 않는다. ④양육해도 無味하다.

⑤부모를 따라다니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⑥어디서나 남을 두려워한다. ⑦

항상 시집보내기를 근심한다. ⑧살면서 이미 부모와 이별한다. ⑨항상 남편을 두

려워한다. ⑩자재를 얻지 못한다.54)

54) “何等十惡 一者託生父母甚難養育 二者懷妊憂愁 三者初生父母不喜 四者養育無味

五者父母隨逐不離時宜 六者處處畏人 七者常憂嫁之 八者生已父母離別 九者常畏

夫婿 十者不得自在”(『大正藏』제2권, p.865상)

 

⑶『玉耶經』: ①여인이 처음 태어나 땅에 떨어졌을 때 부모가 기뻐하지 않는다.

②양육하며 보살피지만 재미(滋味)가 없다. ③여인의 마음은 항상 남을 두려워한

다. ④부모는 항상 시집보내기(嫁娶)를 근심한다. ⑤부모와 서로 생이별한다. ⑥

항상 남편을 두려워하며, 그 안색을 살핀다. ⑦회임과 출산이 매우 어렵다. ⑧여

인은 어려서 부모의 단속(撿錄)을 받는다. ⑨젊어서는 남편의 제재를 받는다.

⑩늙어서는 자손(兒孫)의 가책을 받는다.55)

55) “女人身中有十惡事 何等爲十 一者女人初生墮地父母不喜 二者養育視無滋味

三者女人心常畏人 四者父母恒憂嫁娶 五者與父母生相離別 六者常畏夫婿視其

顔色 … 七者懷妊産生甚難 八者女人小爲父母所撿錄 九者中爲夫婿所制 十者

年老爲兒孫所呵”(『大正藏』제2권, p.866상)

 

여기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태어나도 부모가 기뻐하지 않는다.”, “양육해도 무

의미하다.”, “항상 남편의 제재를 받는다.”, “항상 자재가 주어지지 않는다.” 등의

항목들은 인도전통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 세 경전에는 공통적으로 ‘五善三惡’이 설해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인도

전통의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는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먼저 ‘五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佛說玉耶女經』: ①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가사를 꾸린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

면 자신이 먹지 않고 시부모와 남편에게 먼저 내놓는다. ②집안의 물건을 잘 살펴

누실이 없게 한다. ③잡담과 수다(口語)를 삼가하고, 인욕하며 성내지 않는다. ④

[행동거지를] 근엄하고 장중하게 하고, 스스로 조심해 삼가면서 항상 미치지 않음

을 두려워한다. ⑤일심으로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하고 효도하며, 좋은 평판 있게

하여 친족이 환희하고 남이 칭찬하는 바가 된다.56)

56) “佛告玉耶言 一者晩眠早起修治家事 所有美膳莫自向口 先進姑嫜夫主 二者看視家物

莫令漏失 三者愼其口語忍辱少瞋 四者矜莊誡愼 恒恐不及 五者一心恭孝姑嫜夫主 使

有善名 親族歡喜爲人所譽 是爲五善”(『大正藏』제2권, p.864상)

 

⑵『玉耶女經』: ①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좋은 음식은 먼저 내놓는다. ②때리고

욕해도 성내지 않는다. ③일심으로 남편을 대하며 부정한 회임(邪妊)을 하지 않는다.

④남편의 장수를 바라며 온몸으로 봉사한다. ⑤남편이 먼 길을 떠나면 집안을 잘 다

스리고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57)

57) “何等五善 一者後臥早起美食先進 二者撾罵不得懷恚 三者一心向夫不得邪婬 四者

願夫長壽以身奉使 五者夫婿遠行整理家中無有二心”(『大正藏』제2권, p.865상)

 

 

⑶『玉耶經』: ①아내는 마땅히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빗으로 머리를 빗고 의복을

정돈하며, 얼굴을 씻어 더러움이 없게 해야 한다. 일을 하기에 앞서 所尊(佛壇)을 열

고, 마음을 항상 공순히 하여 설령 맛이 좋아도 먼저 먹지 않는다. ②남편이 꾸짖고

욕해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③일심으로 남편을 지키며, 邪婬을 생각하지 않

는다. ④항상 남편의 장수를 바라며, 남편이 길을 떠나면 아내는 마땅히 집안을 정

돈해야 한다. ⑤항상 남편의 선을 생각하며, 남편의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58)

58) “何等爲五善 一者爲婦當晩臥早起 櫛梳髮綵整頓衣服 洗拭面目勿有垢穢 執於

作事先啓所尊 心常恭順 設有甘美不得先食 二者夫[土胥]呵罵不得瞋恨 三者

一心守夫婿 不得念邪婬 四者常願夫婿長壽 出行婦當整頓家中 五者常念夫善

不念夫惡”(『大正藏』제2권, p.866상~중)

 

다음으로 ‘三惡’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佛說玉耶女經』: ①어둡지도 않은데 일찍 자고, 해가 떠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편이 꾸짖으면 눈을 부릅뜨고 오히려 불평하며 욕한다. ②좋은 음식은 자기가

먹고, 나쁜 음식은 곧 시부모와 남편에게 준다. 姦色, 詐欺, 妖邪한 것 일색이다.

③생활은 생각지 않고 세간을 방탕하게 떠돈다. 남의 좋고 나쁨을 말하며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구한다. 헐뜯는 말(口舌)로 분란을 일으키며 친족을 미워하고 시

기해서 남이 천하게 여기는 바가 된다.59)

59) “何者三惡 一者未冥早眠日出不起 夫主訶瞋反見嫌罵 二者好食自噉 惡食便與

姑嫜夫主 姦色欺詐妖邪萬端 三者不念生活 遊冶世間 道他好醜求人長短 鬥亂

口舌 親族憎嫉 爲人所賤 是爲三惡”(『大正藏』제2권, p.864상)

 

⑵『玉耶女經』: ①남편을 업신여기고 시부모(大長)를 따르지 않으며, 좋은 음식

은 자기가 먹는다. 어둡지도 않은데 일찍 자고 해가 떠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편

이 꾸짖으면 눈을 부릅뜨고 성내며 맞선다. ②남편을 보고도 기뻐하는 마음이 없

고, 항상 낙심(敗壞)하며 다른 남자가 좋다고 생각한다. ③남편이 일찍 죽어 다시

시집가기를 바란다.60)

60) “何等三惡 一者輕慢夫婿不順大長 美食自噉 未冥早臥日出不起 夫婿敎訶瞋目怒應

二者見夫不歡心常敗壞 念他男子好 三者願夫早死更嫁”(『大正藏』제2권, p.865상)

 

⑶『玉耶經』: ①아내의 도리로써 시부모(姑妐)와 남편을 섬기지 않고, 오직 좋은

음식을 바라며 먼저 그것을 먹는다. 어둡지도 않은데 일찍 자고 해가 떠도 일어나

지 않는다. 남편이 꾸짖으려고 하면 눈을 부릅뜬 채 남편을 보고 응대하며 오히려

욕한다. ②일심으로 남편을 대하지 않고, 오직 다른 남자를 생각한다. ③남편이

일찍 죽어 다시 시집가기를 바란다.61)

 

 

 

61) “何等爲三惡 一者不以婦禮承事姑妐夫婿 但欲美食先而噉之 未冥早臥日出不起

夫欲敎呵瞋目視夫 應拒猶罵 二者不一心向夫婿 但念他男子 三者欲令夫死早得

更嫁”(『大正藏』제2권, p.866중)

 

이상과 같이, ‘五善三惡’은 재가여성, 특히 아내로서의 존재방식이 남편을 중심으

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과 앞서 언급한「마누법전」과의 유사

성을 고려하면, 이들 불전이 편찬되는 시기에는 적어도 이러한 관념이 승가 속에

도 침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전에는 남편의 존재방식을 설한 가르침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

다. 예컨대『싱가라에의 가르침』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로서 ①존경할 것,

②경멸하지 않을 것, ③도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 ④권위를 줄 것, ⑤장식품을 제공

할 것 등 5가지 사항을 들고 있다.62) 그리고 여기에 보이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

무는 상기의 불전들뿐만 아니라 인도전통의 윤리와도 매우 상반된 것이다. 특히 여

자의 천성은 부정하기 때문에 항상 남자의 규제를 받아야 하고(9‧16), 남편이 비록

그 성이 악하더라도 아내에 의해 神처럼 섬겨져야 한다(5‧154)는 등의「마누법전」

의 규정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다.

62) 中村元 譯,「シンガーラへの敎え」,『佛典』, 東京 : 筑摩書房(1972), p.90.

 

이상과 같이, 석존은 어느 일방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경하고 봉사할 것을

설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상기의 ‘十惡’과 ‘五善

三惡’은 석존멸후 인도전통의 관념에 따라 부가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三從’도 그

연장선상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 女人五障說

다음으로 ‘여인오장’이란 여성이 될 수 없는 다섯 가지의 지위나 신분을 말하는데,

이것의 출전으로는 宋의 慧簡이 번역한『佛說瞿曇彌記果經』을 비롯하여 화지부

전승의『오분율』권29와 설일체유부 전승의『중아함경』권28「瞿曇彌經」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여인은 끝내 五事를 할 수 없다. 如來�‧無所著等正覺 및 轉輪王이 될 수 없다.

[帝]釋이 될 수 없다. 魔[王]이 될 수 없다. 梵[天]이 될 수 없다.63)

63) “… 女人 終不得五事 不得成如來無所著等正覺 及轉輪王 不得爲釋 不得爲魔

不得爲梵” (『大正藏』제1권, pp.857하~858상)

 

여인은 五礙가 있어 天帝釋, 魔天王, 梵天王, 轉輪聖王, 三界의 法王이 될 수 없다.64)

64) “女人有五礙 不得作天帝釋 魔天王梵天王轉輪聖王三界法王”(『大正藏』

제22권, p.186상)

 

아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인은 五事를 행할 수 없다. 만약 여인이 如來‧

無所著等正覺 및 轉輪王, 天帝釋, 魔王, 大梵天이 된다면 끝내 옳지 않다. 마땅히

알라. 남자는 五事를 행할 수 있다. 만약 남자가 如來‧無所著�等正覺 및 轉輪王,

天帝釋, 魔王, 大梵天이 된다면 필시 옳다.65)

65) “阿難 當知女人不得行五事 若女人作如來無所著等正覺 及轉輪王天帝釋魔王

大梵天者 終無是處 當知男子得行五事 若男子作如來無所著等正覺 及轉輪王

天帝釋魔王大梵天者 必有是處”(『大正藏』제1권, p.607중)

 

여기에 언급된 ‘五事’와 ‘五礙’는 내용적으로 보면 ‘여인오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오분율』과『중아함경』은 현재 산스크리트 원전이 없기 때문에 五事와

五礙가 무엇에 대한 번역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또 植木雅俊에 의하면,『중아함

경』에 상응하는 팔리의『맛지마 니카야』에도 ‘여인오장’에 해당하는 말이 없

고, 팔리어 사전에도 그 용례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66) 따라서 이것만으로는 五

事와 五礙의 본래적인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비록 대승불전이기는

하지만,『법화경』에는 한역과 산스크리트어가 모두 현존하고 있고, 특히 여기

에 ‘오장’의 원어가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 본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66) 植木雅俊, 앞의 책, p.163.

 

먼저 구마라집이 번역한『법화경』권4의 「제바달다품」에는 문수사리보살이

大海의 사가라(Sāgara) 용궁에서 행한 중생교화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그 대표적 인물로 8세의 용녀를 소개하고 이미 불퇴전에 이르렀음을 말

한다. 하지만 성문, 즉 소승불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리불은 “여자의 몸으로

는 붓다가 될 수 없다.”고 하며, 그 이유로서 ‘여인오장’을 들고 있다.67)

67) “又女人身猶有五障 一者不得作梵天王 二者帝釋 三者魔王 四者轉輪聖王

五者佛身 云何女身速得成佛”(『大正藏』제9권, p.35하)

 

이것에 의하면, ‘오장’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pañca sthānāni’이다. 여

기서 ‘pañca’는 ‘다섯’을 의미하며, ‘sthānāni’는 ‘지위’, ‘신분’, ‘계급’을 의미

한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다섯의 지위’, 즉 ‘五位’가 적당한 번역어

가 될 것이다.68) 그러면 구마라집이 이것을 ‘오장’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무엇

일까? 이것은 원문에 있어서의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즉 ‘五位’보다는 ‘五障’이라는 표현이 보다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법화경󰡕(Saddharma-

puṇḍarīka-sūtra)에 있어서의 ‘불퇴전의 보살’을 ‘佛身’으로 바꾼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68) 산스크리트어『법화경』(Saddharma-puṇḍarīka-sūtra)에서 한역 “又女人

身猶有五障”에 해당하는 부분은 “여성은 지금까지 다섯의 지위(五位)에 도

달한 적이 없다.”이다. 또한 ‘오장’에 대해서는 “제1은 브라흐마神의 지위

(brahma-sthāna), 제2는 인드라神의 지위(śakra-sthāna), 제3은 大王의

지위(mahā-rāja-sthāna), 제4는 전륜성왕의 지위(cakra-varti-sthāna),

제5는 불퇴전 보살의 지위(avaivarika-odhisattva-sthāna)이다.”고 하여,

한역의 ‘魔王’이 ‘大王’, ‘佛身’이 ‘불퇴전의 보살’로 되어 있다.(植木雅俊,

앞의 책, p.164)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인오장’도 ‘삼종’과 마찬가지로 오랜 바라문교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브라흐마神(梵天王), 인드라神

(帝釋), 魔王(他化自在天)은 고대인도에 있어 최고의 神들이며, 전륜성왕도 고

대인도의 이상적인 제왕이었다. 따라서 불교의 오장이란 단지 여기에다 ‘불퇴전

의 보살’, ‘삼계의 법왕’, ‘여래‧등정각’, ‘佛身’ 등을 추가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여인오장설’의 구체적인 근거로서는 聶承遠이 번역한『佛說超日明三昧

經』에 약간의 설명이 보인다. 이것은 上度라는 비구가 慧施라는 여성에게 말한

것으로,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69)

69) “何謂五礙 一曰 … 雜惡多態故 爲女人不得作天帝釋 二曰 … 婬恣無節故 爲

女人不得作梵天 三曰 … 輕慢不順毁疾正敎故 爲女人不得作魔天 四曰 …

匿態有八十四無有淸淨行故 爲女人不得作聖帝 五曰 … 而著色欲淖情匿態身

口意異故 爲女人不得作佛得”(『大正藏』제15권, p.541중)

 

① 악과 교태가 잡다하기(雜惡多態) 때문에 여인은 天帝釋이 될 수 없다.

② 음란방자하고 절제가 없기(婬恣無節) 때문에 여인은 梵天이 될 수 없다.

③ 輕慢不順하고, 正敎를 훼손하고 싫어하기(毁疾) 때문에 여인은 魔天이 될 수

없다.

④ 숨기는 태도(匿態)가 84가지나 있고 청정행이 없기 때문에 여인은 聖帝(轉輪

聖王)가 될 수 없다.

⑤ 색욕에 집착하며 情에 얽매고(淖情), 속마음(匿態)과 겉모양(身口意)이 다르기

때문에 여인은 佛이 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앞서 언급한 󰡔마누법전󰡕의 여성관과 거의 일치하고 있

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가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불전 속에 등장하는 삼종오장설은 당시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권오민에 의하면,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 아라한으

로의 길을 걷는 성문과 붓다로의 길을 걷는 보살은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라한으로의 길은 자신의 실존문제에 관심을 둔 수행자로서의 길이지만,

보살의 길은 인류애에서 비롯된 이타행의 도정으로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길인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성문들은 자신들과 붓다로의 길을 걷는 보살

을 엄격히 구분하고, 그 붓다로서의 지위도 결코 넘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이

시대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붓다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70) 따라서

여자로서 붓다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등장한 삼종오장설도 부파불교의 사상적 특징과

관련되었다기보다는 당시의 시대 사회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삼종오장설은 인도전통의 여성차별적인 관념의 한

단면으로서, 불전편찬을 주도했던 비구들의 여성관 내지 승가의 성격변화에

의해 불교 속으로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70) 권오민,「아미달마불교」, 서울 : 민족사(2003), p.315~328 참조.

 

 

Ⅴ. 變成男子成佛說의 분석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대승불교 전반에 걸쳐 여성의 구제론으로 제시되고 있는

‘변성남자성불설’(轉成男子, 轉女成男)이다. 이것은 이른바 여자의 몸에서 남자

의 몸으로 변신함으로써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 설의 기원

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岩本裕는『법화경』권4의 「제바달

다품」을 근거로 데바닷다(Devadatta) 교단에서 발달한 사상이라고 추론하고

있다.71)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71) 岩本裕,「佛敎と女性」, 東京 : 第三文明社(1980), pp.79~82.

 

먼저 岩本裕는『법화경』의 ‘변성남자성불설’이 데바닷다에 관한 기사 다음에

기술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것이 데바닷다 교단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것

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그의 주장에 따르면, 데바닷다 교단은 계율의 엄격화

를 고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전통의 통념에 따라 여성의 종교적 가치

내지 성불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 그

세력을 확장해 가자,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성남자성불설’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불교도들도 이것을 적극 수용하여 당시 사회와

의 마찰을 모면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발생초기부터 대승불교운동의 중심사상이었던 空의 논리와 이

타행을 그 본질로 하는 보살사상의 적극성을 감안하면 동의하기가 어렵다. 예컨

대 반야계 경전을 비롯한 초기 대승불전의 ‘空’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이라든가

여성이라는 등의 자성 내지 실체성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72) 그리고 이

것은 이전의 여인오장설의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

도 고려해야만 한다.「대지도론」권4에 “재가보살은 총설하면 우바새, 우바이

속에 있고, 출가보살은 총설하면 비구, 비구니 속에 있다.”73)고 하듯이, 대승

불교운동에는 출가뿐만 아니라 재가의 남녀가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 다시 말

하면 대승불교에 있어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승보살도

여성의 성불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필자는

‘변성남자성불설’의 필연성이 대승불교의 외부가 아니라 이미 대승불교 자체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72) 空의 관점에서 남녀의 성차를 부정하는 경전으로는『首楞嚴三昧經』과『維摩經』

등을 들 수 있는데, 먼저『수능엄삼매경』은 남녀의 구분이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전도된 생각일 뿐이기 때문에 여성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 역시

전도된 견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선남자여, 대승을 발한 자는 남녀에

別異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 분별이 있기 때문에 남녀가 있다. … 선남자여,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것은 남자, 이것은 여자라는 것은 모두 전도된 것이다.

善男子發大乘者不見男女而有別異 … 有分別故有男有女 … 善男子 是故當知

是男是女俱爲顚倒”(『大正藏』제15권, p.635상) 그리고 󰡔유마경󰡕도 사리불과

천녀 간의 대화를 통해 남녀의 성차가 空이며, 女身은 방편임을 논함으로써 여인

오장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각주 80) 참조바람.

73) “在家菩薩總說在優婆塞優婆夷中 出家菩薩總在比丘比丘尼中”(『大正藏』제25권,

p.85상)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의문들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菱木政晴은 여자의 몸을

남자의 몸으로 바꾸어야만 성불할 수 있는가, 변성남자는 여성의 성불에 있어

절대적인 조건인가, 또한 최종적으로 佛이 된다고는 하지만 일단 여성에서 남성

으로 변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여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74) 그러면 과연 ‘변성남자성불설’은 여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

다. 하나는 대승불교운동 당시의 현실성을 고려한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시

각화를 통해 그들의 주장을 극대화한다는 관점이다.

74) 菱木政晴, 「佛敎の性差別」,「日本佛敎學會年報」 第56號, 京都 : 平樂寺書店

(1991), p.137.

 

첫 번째 관점은 초기의 대승불전이 성립하던 시대에 ‘삼종설’이나 ‘여인오장설’이

인도사회뿐만 아니라 부파불교 시대의 주된 여성관이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석존은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신분적인 차별이나 인간적인 차별

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을 기반으로 성립한 것이 이른바 승가이다.

하지만 석존멸후에도 이 이념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삼종’,

‘여인오장’ 등 기존의 여성차별적인 관념이 유입됨으로써 남녀의 평등은 사실상

부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시점과 맞물려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대승불교도들은 여성성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야 하는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래에 인용한『大乘涅槃經』75) 권36

「迦葉菩薩品」의 기술처럼,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일체중생의 성불을 주장하는

것이다.

75) 원 제명은 曇無讖 번역의『大般涅槃經』(Mahāparinirvāṇa-sūtra,『大正藏』

제12권, pp.365상~603하)이지만, 동일명의 초기경전인『大般涅槃經』

(Mahāparinibbāna-suttanta,『大正藏』제1권, pp.191중~207하,『南傳』제7권,

pp.27~164)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大乘涅槃經』으로 명명하였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어 一闡提人이 方等經을 비방하고, 五逆罪를 짓고,

四重禁을 범해도 반드시 마땅히 보리의 道를 이룰 수 있다. 須陀洹人‧斯陀含人‧

阿那含人‧阿羅漢人‧辟支佛 등도 반드시 마땅히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이룰 수

있다.76)

76) “一切衆生悉有佛性 一闡提人謗方等經作五逆罪犯四重禁 必當得成菩提之道

須陀洹人斯陀含人阿那含人阿羅漢人辟支佛等 必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大正藏』제12권�, pp.574하~575상). 五逆이란 ①殺母 ②殺父 ③殺阿

羅漢 ④出佛身血 ⑤破和合僧을 말하며, 四重이란 4波羅夷, 즉 ①婬戒 ②盜戒

③殺戒 ④妄語戒를 말한다.

 

 

이것은 여성차별적인 당시의 사회통념상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설득력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했을까? 이것은 직접적인

여성성불론이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직

접적인 남녀평등론 내지 여성성불론은 그 만큼 기존사회와의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발전도상에 있던 대승불교도들

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문제였다.『법화경』권6의 「常不輕品」77)에 출가재

가, 남녀구별 없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상불경 보살에 대해 몽

둥이와 돌 등으로 박해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

니라 여성성불론과 관련한 대승불전에 ‘여신성불설’이 거의 없고, ‘변성남자

성불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77)『大正藏』제9권, p50하.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감안하면, ‘변성남자성불설’은 기존사회와의 충돌을 피

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中村元는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인을 멸시하는 관념에 바로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경우

에는 일단 그것과 타협하여 실질적으로 부인에게도 남자와 같이 구제가 주어진

다고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때문에 성립한 것이 ‘남자로 태어난다.(轉成男

子)’고 하는 사상이다."78)

78) 中村元, 정태혁 역,「原始佛敎 그 사상과 생활」, 서울 : 동문선(1993), p.236.

 

필자 역시 이 견해에 따라, ‘변성남자’라는 표현의 배경에는 일단 여성차별적인

인도적 통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기존의 여성관을 고려한다면,

변성남자를 통한 여성성불론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부언한다면, 윤회사상이 일반화된 당시의 사상계를

볼 때도 ‘여신성불설’보다는 ‘변성남자성불설’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岩本裕도 고대인도의 윤회전생설에 따라 변성남자성불을 설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예로서 당시 유력한 사상조류의 하나

였던 자이나교를 들고 있다. 예컨대 자이나교의 공의파는 지금까지도 이 입장을

고수하며, 여자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해탈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

다고 한다.79) 그런데 이 주장을 분석해 보면, 이것 역시 인도라는 당시의 현실

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岩本裕의 이 주장도 지금까지

설명한 첫 번째 관점과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

79) 岩本裕,「佛敎と女性」, p.47 참조.

 

두 번째 관점은 전통적인 여성차별 관념이 남녀의 성차에 기인하기 때문에 변성

남자를 통해서 女身이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는 관점

이다. 이것은 먼저『유마경』에서 사리불이 천녀의 모습으로, 천녀가 사리불의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리불이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 때문에 女身을 바꾸지 않는가? 천녀가 말하기

를, 나는 12년 전부터 여인의 相을 구해왔지만 끝내 얻을 수가 없었다. 마땅히

무엇을 바꾸겠는가? 비유하면 幻師가 만들어낸 幻女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 때문에 女身을 바꾸지 않는가 물으면, 이 사람은 바르게 물었다고 하겠는

가? 사리불이 말하기를, 아니다. 幻에는 定相이 없다. 마땅히 무엇을 바꾸겠는

가? 천녀가 말하기를, 一切諸法도 또한 이와 같이 定相이 있지 않다. 어찌 곧

女身을 바꾸지 않느냐고 묻는가? 그때 천녀가 신통력으로써 사리불로 하여금

천녀처럼 바꾸고, 천녀 자신은 사리불처럼 化身하였다. 그리고 묻기를, 무엇

때문에 女身을 바꾸지 않는가? 사리불이 천녀의 모습으로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어떻게 전변하여 女身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천녀가 말하기를,

사리불이여, 만약 이 女身을 바꿀 수 있다면, 곧 일체의 여인도 또한 마땅히

바꿀 수 있다. 사리불이 여인이 아니면서 女身을 나타내었듯이, 일체의 여인

도 또한 이와 같다. 비록 女身을 나타내지만 여인이 아니다. 이 때문에 佛은

일체제법이 男도 아니고 女도 아니라고 설하였다. 그때 천녀는 神力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사리불의 몸은 다시 옛날처럼 되돌아왔다. 천녀가 사리불에

게 묻기를, 女身의 色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리불이 말하기를, 女身의

色相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천녀가 말하기를, 일체제법도

또한 이와 같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무릇 있는 것도 아니

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佛이 설한 바이다.80)

80) “舍利弗言 汝何以不轉女身 天曰 我從十二年來 求女人相了不可得 當何所轉

譬如幻師化作幻女 若有人問何以不轉女身 是人爲正問不 舍利弗言 不也 幻無

定相當何所轉 天曰一切諸法亦復如是無有定相 云何乃問不轉女身 卽時天女

以神通力 變舍利弗令如天女 天自化身如舍利弗 而問言 何以不轉女身 舍利

弗以天女像而答言 我今不知何轉而變爲女身 天曰 舍利弗 若能轉此女身 則

一切女人亦當能轉 如舍利弗非女而現女身 一切女人亦復如是 雖現女身而非

女也 是故佛說一切諸法非男非女 卽時天女還攝神力 舍利弗身還復如故 天

問舍利弗 女身色相今何所在 舍利弗言 女身色相無在無不在 天曰 一切諸法

亦復如是 無在無不在 夫無在無不在者佛所說也”(『大正藏』제14권. p.

548중~하)

 

이것은 곧 ‘여인오장설’에 집착하여 여인의 성불을 불신하는 사리불에게 그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줌으로써 의심을 해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

는 이것이 ‘변성남자성불설’의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법

화경』권4 「제바달다품」의 다음 인용문은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될 것

이다.

 

"당시의 衆會 모두 용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변성남자 하여 보살행을 갖추고 곧

南方無垢世界로 가서 寶蓮華에 앉아 등정각을 이루고, 32상 80종호와 두루 시

방의 일체중생을 위해서 묘법을 연설하는 것을 본다."81)

81) “當時衆會皆見龍女 忽然之間變成男子 具菩薩行 卽往南方無垢世界 坐寶

蓮華成等正覺 三十二相八十種好 普爲十方一切衆生演說妙法”(『大正藏』

 

제9권, p.35하)

 

그런데 「제바달다품」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이미 용녀는 변성남자하기 전에

불퇴전의 지위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혜가 매우 뛰어나(利根) 중생의 諸根(身・口・意)의 行業을 잘 알고, 다라니를

얻어 諸佛이 설한 바의 매우 깊은 秘藏을 다 능히 수지하고, 깊이 선정에 들어

諸法을 了達하고, 찰나 동안에 보리심을 발하여 불퇴전을 얻는다.82)

82) “智慧利根善知衆生諸根行業 得陀羅尼 諸佛所說甚深袐藏悉能受持 深入禪定

了達諸法 於刹那頃發菩提心 得不退轉”(『大正藏』제9권, p.35중)

 

이 인용문은 용녀에 대한 문수사리보살의 증언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미 용녀는 여래의 가르침을 터득하여 불퇴전의 지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불퇴전의 보살’이란 앞서 언급했듯이, 佛身과 동격이다. 뿐

만 아니라 용녀 자신도 佛을 증인으로서 스스로의 성불을 확신하고 있다.83)

이것은 곧 용녀의 성불에 있어 변성남자가 필요치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변성남자는 결코 용녀의 성불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

만 사리불은 용녀의 깨달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용녀가 여

성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여인오장설이다. 따라서 이제 사리불과 같

은 위치에서 그가 말하는 성불의 모습을 구현함으로써 그것을 논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용녀의 성불을 ‘32상 80종호’, 즉 陰馬藏相을 갖춘 남성의 모

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리불이 집착하고 있던 전통적인 여성관을 토대로 여성의 성불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변성남자라는 표현이 나온 또 하나의

이유라고 보고 있다.

83) 又聞成菩提 唯佛當證知 我闡大乘敎 度脫苦衆生”(『大正藏』제9권, p.35하)

 

이상과 같이 변성남자는 사리불로 상징되던 부파불교 시대의 여성관을 논파하

기 위해 도입된 테마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문수사리보살이 밝히고 있듯이,

『법화경』의 진의는 女身 그대로 불퇴전의 지위에 이르고, 女身 그대로 佛이

될 수 있음(여신성불)을 나타내는데 있었다. 그렇다면 ‘변성남자성불설’은 인도

라는 제약 속에서 여성성불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타협적인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여신성불이 용인되던 사회였다면 변성남자라는 표현은 나

올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앞서 ‘변성남자

성불설’은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성에로 일원화하는 것이라는 菱木政晴의 주

장에 동의하기는어렵다.

 

Ⅳ. 맺음말

 

이상, 불전에는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과 남성 종속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을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성차별의 범주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까지 살펴봤듯이, 이것을 당시의 현실과 관련해서 보면 단순히 성차별적 요소로

단정 짓기 어려운 점도 있다. 다시 말해 비구니팔경법에 있어 남성 종속적 측면

들은 당시 출가여성의 현실을 고려한 일종의 보완장치로서 이해할 수 있으며, 변

성남자성불설도 당시의 제약 속에서 여성성불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타협적인

표현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불전, 특히 계율의 경우 그 조문을 절대시하면 시대나 장소가 바

뀌어 이것이 현실에 적합하지 않게 된 경우에도 그것을 강요하려는 폐해가 생겨나

기 쉽다는 점이다. 󰡔대반열반경󰡕에 “아난이여, 만약 승단이 원한다면 내가 죽은

후에 소소계는 폐지해도 좋다.”84)고 하듯이, 계율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증진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계율의 조문에다 시대나 장

소를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

리의 문제의식도 당연히 그 방향을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즉 석존멸후 비구들이

승가의 중심세력이 되면서 형성된 제도화된 불교, 나아가 수행환경상이나 자질

상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고 있

는 불교여성의 현실에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85)

84) Mahāparinibbāna-suttanta, Dīgha-nikāya,Ⅱ, p.154.『南傳』제7권, p.142.

한역『長阿含經』권4의『遊行經』에서 이것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阿難 自今日始 聽諸比丘捨小小戒”(『大正藏』제1권, p.26상~중)

85)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비구니는 수행과 포교, 교학에 있어 그 능력과 역할이

비구 못지않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에서는 아직 이에 상응하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조계종의 경우 종정을 비롯하여 총

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및 각 부장급들을 모두 비구가 차지하고 있으며,

8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중앙종회에서도 비구니의 의석은 단 10석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비구니의 성불평등 의식에 관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설문

대상자 중 74% 이상의 비구니가 비구로부터 성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비구니팔경법’을

내세우며 깍듯이 대접할 것을 요구하거나 ‘감히 비구니가....’ 등과 같이 비구니

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경우(33.7%)였으며, 그 다음으로 공식행사나 회합

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하거나 의사결정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14.5%)였다

고 한다.(유승무, 「한국 비구니승가의 성불평등 의식 연구」,「불교와 사회복지」

4, 서울 : 조계종출판사(2000), pp.35~36 참조)

 

이상, 필자는 현재 성차별적 요소들로 지적되는 것들이 불교의 본질적인 것이라

기보다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유입된 것들로 보고 있다. 물론 이것이 근거가

되어 지금까지 불교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가 저하되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불교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비판도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다 성공적인 불교

의 여성운동을 위해서는 문제의식의 방향도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불교

의 성차별적 요소들이 불교 외적인 요인들에 의한 것인 만큼 문제의식의 방향도

그것이 등장한 시대의 불교적 현실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또한 그

럴 때에만 현 상황에 맞는 불교적 대안도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

시 말해 성차별적인 요소와 관련된 시대의 불교적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오늘

날의 현실에 맞는 불교, 예컨대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시대에 있어서의 불교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전에 나타난 성차별적 교설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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