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귀근득지(歸根得旨) 수조실종(隨照失宗) :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다 보면 종취(宗趣)를 잃으리라.
귀근의 근은 뿌리 근으로 원점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음속 근본이 되고, 득지의 지는 맛있을 지이니, 합하면 뿌리의 맛, 혹은 원점의 맛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니, 즉 마음속 근본에 돌아가면 대도의 뜻을 얻게 되지만 이 되고, 수조의 수는 따를 수이고, 조는 비출 조인데 앞의 근의 상대는 마음 밖의 경이 되니, 수조는 밝게 비치는 외경을 따르면 실종, 즉 종취를 잃어버린다고 했다. 종취는 원칙이니 원칙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먼저 귀근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절언절려 무처불통, 즉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 곳에 근본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지동귀지 지갱미동, 즉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써 돌아가니 그침이 다시 움직이게 되더라. 의 지동귀지의 귀지가 귀근과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귀지는 지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절언 절려가 곧 움직임을 멈추는 지동이 된다고 본다. 몸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그 한 곳마저 사라지게 할 때 지동귀지가 되고, 또 귀근이 된다고 생각한다.
동하는 것은 생멸하는 것이고, 지동은 생멸을 멈춘 것이니 귀지는 생멸이 완전히 멈추어져 본래 고요한 자리, 불생불멸하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니, 바로 이 자리가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귀근은 근본이 되는 본래의 자리인 원점, 즉 불생불멸의 자리로 돌아오다. 이다.
본래의 근본 자리로 돌아오면 그 근본 자리의 맛, 혹은 뜻을 얻을 수 있지만 눈 밖의 어떤 대상이 비추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망상에 걸려들어 제행무상 제법무아 적정열반의 종취를 잃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화두를 잘못 잡거나 그릇된 심상을 참된 것으로 알고 그를 비춰 보고 따라가는 것이나, 지식을 쌓기 위한 노력, 명예, 재, 욕을 쫓는 것 등은 종취와 멀어지는 행위들이다.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에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어버린다.
‘근경’ ‘적조’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과 경계, 평등과 차별을 뜻합니다.
즉, 근과 적은 근본이며 경 과 조는 경계를 말합니다.
근은 밖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조는 우리 마음이 밖을 향하여 이리저리 날뛰어 본심을 잃어버림을 뜻합니다.
저는 머리 굴리지 말고 본심대로 살자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사실 어떤 문제를 처리하고자 할 때에도
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 때 본심대로 하는 것이 최선책일 수 있습니다.
괜히 요란스럽게 머리 굴리다 보면 엉뚱한 결과만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 봤자.”
좋은 것의 과보로 나쁜 것이 나타나고, 즐거움의 과보로 괴로움이 나타나며, 옳은 것의 과보로 그른 것이 나타나니, 고락 시비 분별 말고 중도를 행하라.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추임을 따르면 근본을 잃는다. 귀근의 뜻은 본래 자성을 뜻한다. 분별(나눔)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이것과 저것의 상대가 사라진 자리이니, 좋고 나쁨이 없고 생사와 생멸이 없으므로, 곧 부처를 뜻한다.
그러므로 득지란, 바로 내가 꿈꾸던 성불을 얻는다는 것인데, 언어도단, 교외별전의 자리로서 이 자리에 가보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나, 득지를 하여 견성을 한 조사들의 경험에 따르면 눈곱만큼의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는 자유자재한 마음 상태라고 한다.
수조란 눈・귀・코・혀・몸・생각의 육근으로 감지하는 것, 즉,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현상에 끄달려서 고락 생사의 윤회를 거듭하며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를 따르게 되니, 이렇게 되면 위에서 말한 귀근득지를 잃게 된다는 말이다.
중생, 특히 사람들은 자업자득하며 윤회를 거듭한다. 누구나 시절인연의 업에 따라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한 사람은 없다. 나름대로 고락의 업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부자와 거지로 살지라도 시절 인연이 되어 부자가 될 때도 있고, 거지가 될 때도 있으나, 다만, 그 때가 서로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물론 전생과 금생, 내생의 삼세에 걸쳐서 업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금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더 잘살고 더 못산다고 예단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요, 오류이다. 차이가 있다면, 분별심이 없어서 욕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중도의 마음으로써 고락의 업이 없으므로 좋고 나쁨도 없으니, 고통과 괴로움도 없다.
그러나 조금의 분별로서 조금의 욕심을 가지면 조금의 과보로 인해 조금의 인과로서 조금의 고통과 괴로움이 생기게 되나, 반대로 많은 분별심으로 인해 많은 욕심이 생기면 많은 고락의 과보가 생기므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나타날 수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있는 고락의 업을 멸하지 않고, 눈으로 귀로 몸으로 생각으로 일어나는 감정에 끄달리게 되면, 고락의 감정이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게 되니, 좋고 나쁜, 옳고 그른 분별심으로 인해 결국은 고통과 괴로움을 피할 수가 없다.
즐거운 일을 겪은 과보로 인해 괴로운 일이 생기게 되고, 좋은 일로 인해 나쁜 일을 생기게 되며, 옳은 일로 말미암아 그른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 인과의 과보요, 마음의 업이라 했다. 따라서 수조실종이라 했으니, 진실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니, 좋은 일에도 걸리지 말고, 나쁜 일에도 마음을 걸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 어떤 일에도 매사에 고락 시비하는 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하느니, 절대로 좋고 나쁜, 옳고 그른 분별심을 갖지 말고, 무조건 있는 그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항상 중도中道의 마음으로 방하착해야 한다. 제 아무리 날뛰어도 뛰어봐야 벼룩이요,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무조건 그저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분별심을 놓고 놓아 방하착해야 한다.
전도顚倒된 생각
- 참됨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
“귀근득지歸根得旨하고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却前空이니라. 근원에 돌아가면 본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나니, 잠깐 사이에 반조返照하면 앞의 공空보다 뛰어나리라.”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脚前空이라.”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사실 진리에서는 잠깐과 영원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봤다는 얘기는 “눈을 뜨면 즉, 마음의 눈을 뜨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이라고 하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잠깐은 매우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은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 생각놀음에 속고 있는 겁니다. 길다, 짧다고 하는 그 생각마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유반조須臾返照란 생각의 속임수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그러니 전공前空보다 뛰어남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여기에서 전공前空이라 함은 목전공目前空을 말함인데 눈앞에 모든 것이 공했다 아니다 하는 분별이 남아있는 공입니다. 내 자신이 공했다면 전공前空이니 후공後空이니 말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공空이 있다는 것은 이미 양변에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상대성에 속은 거지요. 그래서 삼조 스님은 잠깐 동안 바로 비추는 일이 자성自性을 바로 깨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돈오頓悟라고 하신 겁니다. 홀연히 자성自性을 보는 데는 시간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그냥 몰록이라고 하셨을 뿐 법法자체에는 돈오頓悟니 점수漸修니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만큼 자성을 돌이켜 보는 일이 수승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겠지요.
“전공전변前空轉變은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라. 불용구진不用求眞하고 유수식견唯須息見하라. 앞의 공이 전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생각 때문이니, 참을 구하려 들지 말고 다만 분별심을 쉬어라.”
“전공전변前空轉變은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 앞의 공空함이 전변轉變함은 모두 망견妄見 때문이니라고 이어집니다. 사실 망견 아닌 게 없을 만큼 우리는 망견에 많이 속고 있습니다.(7) 망견이란 허망 되게 본다는 말로서 잘못 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코끼리는 무게가 무겁다고 생각하고 토끼나 또는 강아지 무게는 가볍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망견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영, 모양에서 볼 때는 코끼리는 무겁고 강아지는 가볍다고 생각되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볼 때 생명의 무게는 꼭 같습니다. 그러한 면이 불교의 심오함이고 참으로 훌륭함입니다.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의 수행자로 수행할 때 매에게 쫓긴 비둘기가 부처님을 찾아 날아 들어옵니다. 부처님은 두 말 안하고 비둘기를 숨겨줍니다. 뒤따라 날아온 매가 “그 비둘기는 내가 먹어야할 양식이다. 그 비둘기를 나에게 돌려주라”고 하니 부처님께서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를 믿고 살려달라고 나를 찾아온 비둘기를 잡아먹으라고 내줄 수가 있느냐? 나는 못하겠다.” 그러니 매가 “그럼 비둘기 생명만 소중하고 내생명은 소중하지 않느냐?”고 하니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비둘기 무게만큼 내 허벅지 살을 끊어주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이 우리가 들을 땐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직 중생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시는 그러한 보살들은 능히 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단 비둘기 무게만큼 달라.”
그렇게 해서 허벅지살을 비둘기만큼 끊어서 저울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비둘기 보다 훨씬 더 많이 올려놨는데도 비둘기 쪽이 무거운 겁니다. 나중에는 끊어놓을 수 있는 모든 살을 끊어놔도 비둘기가 더 무겁게 나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부처님 전신인 그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저울에 올리니까 그때서야 비둘기와 그 수행자가 평행을 이루는 겁니다. 그 말은 비둘기 생명의 무게나 사람의 생명 무게나 코끼리 생명의 무게나 꼭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에서 볼 때는 모든 시비 분별은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는 데서 생기는 일이 됩니다. 망견妄見이란 결국 그 평등平等한 마음, 청정淸淨한 마음을 버려두고 번뇌 망상하자는 대로 감정의 노예노릇 한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마음 깨닫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그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그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망견妄見이라는 그림자는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없는 것이거든요.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그 마음을 바다라고 한다면 망견妄見 즉 파도는 번뇌煩惱 망상妄想입니다. 그런데 그 파도는 본래 없는 것이거든요. 바람 때문에 마치 파도라는 실제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망견에 속은 거지요. 그러나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란 바람에 의해서 바닷물이 변형된 모습이지 파도란 세계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냥 그대로 공이거든요. 실상을 바로 보면 그냥 고해 속에서 바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번뇌煩惱 즉 보리菩提라, 보리와 번뇌를 같이 보는 겁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모양도 빛깔도 없는 이 마음을 어찌 찾는단 말입니까? 마음을 찾는다는 말은,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은, 모양 없는 그 마음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마음을 깨닫는 길입니다. 마음을 바로 쓴다는 말은 그냥 감정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잘 쓰는 그런 말이 아니라 무념위종無念爲宗이요, 무상위체無相爲體요, 무주위본無住爲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밉다고 미워하는 그 마음을 역력하게 아는 각성覺性이나 사랑스럽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는 각성覺性이나 그 역력한 마음에는 사랑과 미움이, 둘이 없습니다. 진공眞空에 둘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림자인 마음을 실체로 잘못 생각하고 미워하는 그림자를 따라가고 사랑한다는 그림자를 따라가는 고로 바로 생멸生滅이라, 윤회輪廻가 시작되는 겁니다.
2002년도 행복지수조사에서 보면 가난하기로 유명한 방글라데시가 1위를 했다고 합니다. 2011년에는 히말라야 밑에 조그마한 부탄이라는 나라가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글라데시를 도와주어야한다고 구호품을 보낸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참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들은 행복하고 세상이 살만하다고 참으로 환희에 차서 사는데 그런 이들에게 도와주고 있다는 우리는 불행하고 세상이 힘들어서 자살률이 점점 높아가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참 알 수 없는 일이거든요. 행복한 사람에게 불행한 사람이 도움을 받아야 그게 정상일 텐데 세상이 힘들어 자살까지 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들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걸까,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전부 망견에서 생기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황벽 스님 같은 분은 그러한 망견妄見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정말 한번 죽을힘을 다하여 수행을 하라. 찬 기운이 뼛속까지 사무친 뒤에라야 매화 향기가 코끝을 찌르리라. 이러한 황벽 스님의 가르침은 현재 우리들에게 가장 새겨들어야 할 말씀 중 하나입니다.
파도가 바닷물에서 일어나듯이 모든 생각은 공空에서 일어납니다. 공空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상태,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상태를 공空이라고 이름 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그 길이 곧 불교요, 인류를 구하는 길입니다. 너와 나, 인간과 우주가 둘이 아닌 사실을 깨닫고 서로 상생相生의 길로 간다면 지금 지구상의 자원을 가지고 지금 인구의 70배가 먹고도 남는답니다.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투쟁의 길로 가기 때문에 지금 현재 인구가 쓰기도 모자라 굶주리는 나라가 많다는 사실을 볼 때 평등平等의 공空, 실상實相의 공空을 체득하는 길이 참으로 인류를 구하는 길임을 깊이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이라.”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이 얼마나 향기 나는 공空의 언어입니까? 파도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바람만 잠재워라. 파도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이런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복이 어찌 작은 복이겠습니까? 스승들이 당신 생명을 다 바치고 애쓰고 애쓴 수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대자비로 하신 말씀이니까요. 참됨을 구한다는 것은 참됨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참으로 참됨은 연기공성緣起空性이요, 중도中道라 참됨이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참됨이라고 하신 것이거든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눈(目)을 찾아 나섰다고 합시다. 눈(目)으로 눈(目)을 볼 수가 없어서 눈이 없다고 눈을 찾아 달라고 오만데 찾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섰다고 합시다. 이 사람 이마에 눈이 그냥 있거든요. 이 사람이 눈을 찾았다고 좋아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잃어버렸던 눈이라면 찾았다고 하겠지만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찾았다는 말이 성립될 수가 없거든요.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으니 뒤늦게나마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거든요. 그래서 참됨이 아니라 이름이 참됨이라 하신 겁니다.
<금강경>에서도 반야바라밀이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구하는 마음 즉, 욕망이 앞서는 한은 참됨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망령妄靈된 견해見解만 쉬라고 하신 겁니다. 잃어버린 일이 없는 눈을 찾으려는 그 마음을 쉬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안에 완벽하게 갖추어진 그 세계를, 그래서 임제 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祖師를 구하면 조사祖師를 잃게 되고 도道를 구하면 도道를 잃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한 임제 스님의 말씀도 말에 떨어져버리면 부처도 구하지 말아야하고 조사도 구하지 말아야 하고 도道 역시 구할게 없다는 말로 잘못 듣게 됩니다. 이렇게 들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전도顚倒 된 생각으로 들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부처니 조사니 도라는 말이 흔적까지도 초월해서 양변을 떠난 중도연기中道緣起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고구정녕苦口丁寧 가르치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됨을 구하려고 마음을 일으킬게 아니라 오직 일어나는 모든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고 하신 겁니다.
<주7> 앞에서의 공, 즉 본래 공한 그 자리가 전변하는 까닭은 모두 망령된 분별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참을 구하려 들 것이 아니라 다만 분별심을 쉬면됩니다. 참을 구하려는 이 생각이 망상을 하나 더 보태는 격이니 분별심만 쉬면 참은 거기에 있습니다. 참이다 거짓이다, 경계다 마음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상대적인 견해에도 머무르지 말고 이 마음을 찾으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찾으려고 하면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산洞山스님 오도송에도 “절대로 다른 데서 찾으려 하지 마라. 남에게서 찾으려 하면 나와는 점점 멀어지리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보통은 찾으면 가까워진다고 생각할 테지만,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벌써 찾으려는 생각 때문에 천리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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