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알기

대승경전 / 법화경(法華經)이란 어떤 경전인가

수선님 2023. 4. 30. 12:59

『법화경』에 나타난 증상만(增上慢)의 사상적 연원과 그 정체성 고찰

차차석/동국대학교 불교학연구 제4호 (2002.6)

1. 서론

법화경의 핵심품인 방편품에는 오천명의 비구, 비구니,우바새, 우바이등이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려고 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는 장면이 나오며,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증상만의 무리라고 질책하며 말리지 않는다.

사리불존자가 세 번에 걸쳐 설법을 하여 주실 것을 청하며, 이에 설법을 시작하려고 하자 오천명의 사부중이 자리를 박차고 퇴장하는 것이다.

이에 세존께서는 그들을 죄근(罪根)이 깊고 무거우며, 증상만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므로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므로 구태어 말릴 필요가 없다고 하며 수수방관한다. 그리고 유명한 일대사인연을 설하게 된다. 물론 증상만에 대한 언급은 방편품 이외에 기타 여러 품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화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증상만이라는 무리는 단순하게 ....

『불교학리뷰(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18권(2015. 12) 49p~85p

범본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본 논문은 필자가 2015년도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의 제4장 <불보(佛寶)의 재해석: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 중 일부 내용에 다소 수정을 더하여 작성한 것이다.)하영수/(금강대학교)

[국문요약]

『법화경』 「여래수량품」은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중요한 교설을 설하는 품으로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나(=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경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은 한역 법화경에는 설해지지 않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본 논문을 작성한 계기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역과 범어본 사이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설정하여 이를 검토했다.

먼저 원문 추정을 시도해 보았다. 원문에 관해서는 크게 두 종류의 독법이

있음을 확인했는데,『법화경』의 두 한역인『정법화경』과『묘법연화경』의 독

법과 범어본『법화경』과 각종 범어사본, 그리고「법화경론」의 독법이 그것이

다. 그 중 범어본 자료들은 독법이 일치했는데, 모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경

문을 포함하고 있다.「법화경론」의 경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원문을

추정해 보았다.

이후 추정된 원문을 바탕으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

결과 ‘붓다의 보살행’이란 다름 아닌 구원성불한 이래로 전개해온 ‘붓다의 교

화행’을 지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교화행을 보살행으로 명명

하는 범본의 내용전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법화경』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설해진 배경에 대해서

검토했다.「법화경론」에서는 이를 본원(本願)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이는

핵심을 간파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이 교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붓

다의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교화라는 문맥을 보다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비화경』을 참고하여 검토했다.

이러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함의하는 바는 붓다의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그대로 그의 자비의 교화행을 의미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아울러 일체

중생을 성불로 이끌겠다는 붓다의 서원(誓願)은 ‘일불승(一佛乘)’의 지혜를

밝히는 일(「방편품」)과 ‘붓다의 부단한 보살행’(「수량품」)이라는 두 축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

종래에『법화경』은 구마라집의『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범어 사본을 교정한 비판적 편집본이 출간되면서『법화경』에 대한 연구

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범어본과 한역의 차이는 대개

근소한 것이며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

되기 쉽지만, 그러나 실제로 양자를 대조해보면 형식과 내용 면에 있어서 종종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러한 차이점이 경전의

중요한 교설과 직접적으로 관련될 경우에는 단순히 내용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경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해석학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

러한 문제를 「제16여래수량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은 「제2방편품」과 더불어『법화경』의 근본 교설을 담고 있는 품

이라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 밝

혀지는데, 붓다는 사실 현생에서 최근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득히 먼 과거세

에 이미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실성(久遠實成)’과 앞으로 남은 ‘수명’에 관

한 법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붓다의 구원실성과 수명에 관한 교설을 둘러싸고

두 한역(『정법화경』과『묘법연화경』)과 범어본에 확연한 의미상의 차이가 발

견된다. 두 한역에서는 붓다의 수명에 방점이 놓여 있지만, 범어본에서는 “나

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설하면서 붓다가 보살행을 행하고 있음을 강조

하고 있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낯설고 또한 교리적인 모순을 내포하는 것

으로 생각되는 내용이 범어본『법화경』에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역

과 범어본의 차이는 단순한 의미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도논사의 주석서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세친(世親,

Vasubandhu)의「법화경론(法華經論)」Saddharmapuṇḍarīkasūtra-upadeśa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는 점이다.「법화경론」은 범본은 산실되었고, 한

역으로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역「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

憂波提舍)」와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 역「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妙

法蓮華經論優波提舍)」2종만이 전해지는데, 두 번역 모두 「여래수량품」의 해

당 구절에 관해『묘법연화경』의 번역어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내용상으

로는 범어본의 독법을 지지하고 있다.

이로써『법화경』에 있어 중요한 교설을 담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

절에 관해 몇 가지 문제가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 설하는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원문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무엇을 함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절에 관해 원문을

추정하고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여래수량품」의 문제의 경문

「여래수량품」은 청중들에게 여래에 대한 믿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면서 시

작된다.1) 동일한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이에 대해 미륵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

살들이 여래에 대한 믿음을 보이면서 설법을 간청하기를 세 번 반복한 후에 설

법이 시작된다. 석가모니 붓다는 가야성 부근에서 이번 생애에 성불한 것이 아

니라, 사실은 수백천코티나유타의 겁 이전에 성불했다고 말한다.2) 이미 아득

한 과거세에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성불(久遠成佛)의 교설이다. 붓다는 오래

전에 성불한 이후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많은 세계에서

법을 설해왔고 또한 때때로 방편으로서 열반(죽음)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때때로 붓다는 중생의 선근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어릴 적에

출가하여 최근에 깨달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으나, 그와 같은 법문은 중생들

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한다.3) 그리고 여래의 방편은 진실한 것이

며 거짓말[虛言]이 아닌데, 그 이유는 여래의 교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생각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여래의 경계(如實知見)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

라고 설명된다.4) 그리고 본 논문에서 검토해보고자 하는 경문이 이어진다.5)

1)『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 諸善男子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

2)『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13): 善男子 我實成佛已來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3)『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3-c9).

4)『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2-13): 諸所言說 皆實不虛 所以者何 如來如實知見

三界之相.

5)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한 연구는 매우 적은 실정이다. 따라서 본문

중에 선행연구를 개관하지 않고, 다만 각주에 국내외 연구동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기

로 한다.

먼저 국내에서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아는 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

았다. 다음으로 해외의 연구동향을 언급하자면, 범어본 법화경에 대한 번역본 중에서 Kern의 영

역, 土田와 岩本의 일역, 그리고 松濤의 일역 등에서 범본의 표기대로 해당구절을 번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 Kern 1963, 302.; 土田&岩本-下

1965, 21.; 松濤-Ⅱ 2001, 109-110. 그러나 이러한 번역본에서 구체적인 해설이나 논의를 하고 있

지는 않다. 필자가 아는 한 다음의 두 연구에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田村芳朗의『법화경』해설서에서는 붓다가 보살행을 하고 있으므로『법화경』에서 보살

행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부터『법화경』의

중심사상에 기존의 진리(방편품), 생명(수량품)과 더불어 실천(보살행)을 포함시켜 이를『법화경』

의 3대사상이라고 해설한다. 그러나 그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문제를 그 특이성과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간명하게 언급하고 있어, 심도 있는 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田村 1969, 115ff.

두 번째 연구로는 松本史朗의 「久遠實成の佛について」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 논문은

필자가 아는 한 「여래수량품」의 해당 경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연구이다. 또한 필자

가 이 문제에 착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논문이기도 하다. 松本는『정법화경』『묘법연화경』이라

는 기존의 한역과 세친의「법화경론」을 대조하고, 여기에 범어본 및 범어사본을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본 논문에서 범어 원문을 추정하기 위해 채용한 방법은 松本가 그의 논문에서 취한 방법

과 같다. 필자는 여기에 범어본 자료를 더욱 보강하여 논의를 전개했다. 松本와 필자는 문헌 활용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법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범어본

에 誤記가 있다고 보고,『묘법연화경』의 독법을 지지한다. 자세한 내용은 松本 2012, 243-254.

문제의 경문

[1]『묘법연화경』: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T.9, 42c22-23)

[2]『정법화경』: 又如來不必如初所說 前過去世時行菩薩法 以爲成就壽命限也. (T.9, 113c23-25)

인용문 [1]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이 주어, “今猶未盡”이 술어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해석은 “내가 본래

행했던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지금도 오히려 끝나지 않았다”가 될 것이

다. 위 번역문은 과거에 행했던 보살도라는 인행(因行)에 의해 수명을 얻었는

데(所成壽命), 그 수명이 지금도 다 끝나지 않았음(今猶未盡)을 밝히고 있다

고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중점은

수명에 있으며, 문장의 부정어가 “未” 하나라는 점이다.

한편,『정법화경』의 한역은 번역이 쉽지 않으나, 이를 시도하면, “또한 여래

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 이전의 과거세 때에 행했던 보살법으

로 성취한 수명의 한도(限)를 삼는다”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앞 문장

“또한 여래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의 부분은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방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생이 선근

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방편으로 “젊을 때에 출가하여 깨달았다”6)고

설한다고 하였는데, 약 2500년 전에 출현하여 29세에 출가한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 역시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실제 성불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므로, “처음 설한 것과는 다르다”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뒤

의 “前過去世”로 시작되는 문장은 붓다의 수명이 과거에 보살법(보살행)에 의

해 성취한 것을 한도로 삼는다고 하여, 붓다의 수명이 보살행에 의해 결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여래가 처음 설한 바, 즉 보드가야에서 최근에야 깨달음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여래의 수명의 한도는 과거의 보살행에 의해 결정(성취)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 [2]

역시 붓다의 실제 수명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보살행을 행했다는 설명을 덧

붙이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붓다의 수명(成就壽命)에 중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문장 전체의 부정어가 “不” 하나이다.

6)『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7): 我少出家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한역의 번역이 의미상 반드시 일치하

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두 번역문 모두 붓다의 실제 수명에 방점이 있

으며,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하나의 부정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법화경』에 대한 세친의 주석서「법화경론」(보리유지 역)에서 해당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3]「법화경론」: 내가 전생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은 [내가 세웠던] 본원 때문이다. [제

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다 채워지

지 않았다고 하는 것(言未滿者)이 깨달음을 완전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非謂菩提不滿足). 이룬 수명이 또한 앞의 수의 두 배라는 것(所成壽命

倍上數者)이란, 이 문장은 여래의 수명이 영원함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다. 뛰어

난 방편으로 많은 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7)

7)『묘법연화경우바제사』권2 「제3비유품」(T.26, 9b27-c2):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衆

生界未盡 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也 所成壽命復倍上數者 此文示現如來命常 善巧

方便顯多數故.

「법화경론」의 두 번역본은 어구의 가감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본 논문에서 문제로 삼는

‘보살행’에 관해서는 번역이 일치한다. 늑나마제 역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권1 「제3비유품」(T.26, 19a2-6):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眾

生界未盡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故 所成壽命復倍上數者 示現如來常命方便顯多數

過上數量不可數知故.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이『묘법연화경』의 원문에 해당하는데, [1]의

인용문에서 “今猶未盡”이 “今猶未滿”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묘법연

화경』의 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의를 끄는 것은「법화경론」의

주석은 번역어에 있어『묘법연화경』과 거의 일치하지만, 문장의 구성과 내용

이 다르다는 점이다.『묘법연화경』은 “과거에 보살도를 행함으로 얻은 수명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반해,「법화경론」에서는 “내가 전생

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즉,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술어의 주어가『묘법연화경』에서는 ‘수명’으로 되

어 있고,「법화경론」에서는 ‘보살도’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법화경론」에

서는 과거에 행한 보살도가 다 완수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내가 세웠던] 본

원 때문이다.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

은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서,8) 그러나 이것이 보리(bodhi), 즉 깨달음을 완전

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所成壽命)이 위의 수의 두 배라고 주석하고 있다(復倍上數).

즉『묘법연화경』에서 [과거에 성취한]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

던 하나의 문장을,「법화경론」에서는 ① 보살행이 다 완수되지 않았고, ② [보

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所成壽命)이 두 배가 남았다고 하여, 두 가지 내용

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①의 내용은 교리적으로

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붓다란 과거세에 본원

(本願, 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보살도를 완성하였

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붓다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인데, ①의

내용은 성불한 붓다의 보살행이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여, 교리적인 혼

선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법화경』,『묘법연화경』,「법화경론」이 각기

내용이 서로 다르고, 교리적으로도 혼란이 예상되는 이 경문을 범어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8) 번역은 大竹晋 2011, 86-88을 참조.

[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a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SP, p.319,2-3)

위 범어문은 Kern&Nanjio 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번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

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이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api)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ṇam).9)

9) 번역은 松濤 2001, 109-110 참조. 괄호 안의 보충은 필자에 의함.

인용한 범어문은 두 가지 사실, 즉 ①과거세에 행했던 보살행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과 ②수명의 양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

고 있다. 위에 인용한 범문 [4]가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과 수명이라는 두 가

지 내용을 설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말로 “~도”라고 번역할 수 있는 “api”가

위 문장 안에 두 번 나온다는 것에서도 예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위에 인용

된 범문은「법화경론」의 인용(인용문[3])과 내용적으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

다. 다만 인용문[3]에서 마지막의 “復倍上數”는 범문의 이어지는 문장에, “그

리고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수명이 다 만료되기까지

는 그 두 배(tad-dviguṇa, 復倍上數)의 수백·천·나유타의 겁이 남아 있다”10)

라는 문장을 앞 문장과 연결시켜서 주석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두 개의 한역과 주석서「법화경론」중에서 현존하는 범문과 가

장 가까운 것은「법화경론」임을 알 수 있다.

10) SP. 319, 3-4: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

다고 하는, 매우 생소하고 교리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위 문장

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11)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위의 문장을 억지로 교리적으로 맞도록 번역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 경문의 범어원문의 형태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필자는『정법화

경』『묘법연화경』이 아닌, 지금의 범문, 그리고 범문과 거의 흡사한「법화경

론」의 해당번역을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먼저 범어본의 사본 등을

통해 살펴본 후에, 경전의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독법의 타당성을 제시

하도록 하겠다.

3. 범어본에 의한 해당 구절의 재해석

1) 범어본에 의한 원문 추정

『법화경』은 중앙아시아나 네팔 등에서 많은 범어 사본이 발견되었고, 현재

사본을 로마자로 전사(轉寫)하여 출판한 판본들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여기

서는 교정본과 전사본들의 표기를 확인해보도록 한다.

-교정본-

① Kern&Nanjio 본과 더불어 널리 활용되는 Wogihara&Tsuchida 교정본은 다

음과 같다.12)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2) SP(WT). 1958, 271,16-272,1.

② Dutt가 중앙아시아의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3)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3) Dutt, Nalinaksha 1953, 209,15-16.

③ Vaidya가 네팔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4) Vaidya, P.L. 1960, 290,27-28.

세 개의 교정본은 구절의 띄어쓰기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구문 전체에

대한 독해는 모두 Kern&Nanjio의 인용문 [4]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사본류

에 관해서는『법화경』사본의 주요 출토지인 카시미르, 중앙아시아, 네팔계통

의 사본 독법을 제시하도록 한다.

-사본류-

① Watanabe Shoko(渡辺照宏)가 Gilgit에서 발견된 사본을 교정하여 로마자로

전사(轉寫)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ī pariniṣpāditā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5) Watanabe, Shoko 1975, 113,11-12.

② Toda Hirohumi(戸田博文)의 중앙아시아 사본 로마나이즈본은 다음과 같다.16)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ū)r(v)i(kā )yuṣpramāṇam api me kulaputrā

aparipūrnam/

16) Toda, Hirohumi 1981, 156.

③ 네팔계 사본을 중심으로 집성한 Toda에서는 18개의 사본이 거의 일치한다.17)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7) Toda, Hirohumi 1994-2002, Vol.Ⅶ, 4-7.

먼저 ①에 관해서 말하자면, 와타나베는 자신의 전사본에서 위와 같이 표기

를 하고, 각주에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로 읽어야 한다고 추가하고 있다.18) 이를 해석하면 “과거의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독해가 한역의 “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과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와타나베는 위의 전사본을 출판하기 전에 사본의 위 구절에 대한 독해방

식을 문제로 삼아 논한 적이 있다.19) 와타나베는 사본의 위 구절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표하면서, 이를 위와 마찬가지로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으로

읽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해가 사본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는다고 부연하고 있다.20)

18) Watanabe, Shoko 1975, 113의 각주12) 참조.

19) 渡辺照宏 1970, 85-86.

20) 위의 책, 같은 곳.

②의 특징은 “me kulaputrā”가 두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 구

절에 두 개의 문장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나에게 선남자들이여(me kulaputrā)”

와 같이 문장을 이끄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행해오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음’과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두 가지 내용이 설해

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③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체 18개의 사본 중에서 15개의 사본이 위의 독해

와 일치한다. 그리고 15개 중에서 10개의 사본이, “pariniṣpāditā”와 “āyuṣpramāṇam”

사이에 단다(“/”)를 넣어, 이 구절을 두 가지 내용이 설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3개의 사본에 이독(異讀)이 보이는데, 문장 후반부의

“apy aparipūrṇam”가 “adhy aparipūrṇam”으로 되어 있는 사본이 1개, “asya

paripūrṇam”의 형태를 보이는 사본이 2개 있다. 여기서 adhy aparipūrṇam의

“adhy”는 의미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apy의 오기(誤記)로 생각되며, asya

paripūrṇam의 “asya”는 ‘s’가 ‘p’와 유사하므로, “apy+a(paripūrṇam)”의 오

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교정본과 사본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자면 현존하는 교정본과

사본들은 모두 인용 [4]의 범어문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타나베는

이 구절이 함의하는 교리적 특이성으로 인해 사본의 표기에 의문을 표하면서

『묘법연화경』의 문의(文意)와 통하는 독법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독해는

자신이 밝히고 있듯 사본에 의해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문

[4]에 대한「법화경론」의 주석방식의 특이점을 상기할 볼 필요가 있다. 보리류

지 역과 늑나마제 역과 모두『묘법연화경』의 번역어 “我本行菩薩道所成壽

命”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주석에 있어서는 “我本行菩薩道”와 “所成

壽命”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를 해석하고 있다. 이는 곧 두 역자가 번역어에

관해서는『묘법연화경』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되, 독해에 있어서는『묘법연화

경』의 이 구절을 오독(誤讀)으로 보고 이에 따르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첫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두 부류의 독법이 존재한다. ① 현

존하는 범어본의 교정본과 사본들 그리고「법화경론」의 독법과 ②『정법화

경』『묘법연화경』의 독법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현존하는 범어 사본과 교정

본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한역「법화경론」의 독법도 이를 지지하므로 범

어본의 독법을 필사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오류라고 보기 어려우리라 생각된

다. 따라서 범어본 『법화경』의 해당 경문은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로써 「여래수량품」 해당 경문의 원문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거의 모든 사본이 일치한다는 점으

로부터, 범어본을 통해『법화경』을 읽고 신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해되었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

정할 수 있다.「법화경론」의 두 번역본이 오역(誤譯)이 아니라면, 이 점은 한역

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논의에 의해 「여래수량품」에서 묘사되는 붓다에 대해 ‘석가모니 붓

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입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과연『법화경』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고,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한다.

2) 「여래수량품」 문맥의 재구성

‘붓다의 보살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미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붓다가 여

전히 보살행을 한다는 이 낯선 교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이 교설, 붓다의 보살행이 설해진 인용문[4]를 중심으로 그

전후 문맥을 재구성해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4]

앞에서는 구원성불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고, 인용문[4] 이후에는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적 붓다에 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둘을 각기 ‘구원실성불(久

遠實成佛)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으로 나누어 검토

하도록 한다.

(1) 구원실성불(久遠實成佛)의 보살행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먼 과거에 이미 성불했다는 사실이 밝

혀졌는데, 이러한 구원실성의 붓다가 인용문 [4]에서 보살행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고 설하였다. 이 표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이미 깨달

음을 이룬 붓다가 구원성불한 후에 실제로 어떤 활동을 펼쳐왔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구원실성불의 구체적인 행적에 관해서는 마츠모토 시

로(松本史朗)의 연구가 유용하다.21)

21) 松本, 앞의 논문 참조.

마츠모토는 그의 논문 전반에 걸쳐 구원실성의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가

대비적으로 이해되거나, 구원실성의 붓다에 대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이해하

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다. 마츠모토는『법화경』에 제시된 구원실성의 붓다가

과거에 깨달음을 얻은 장소가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의 보리수 아래”임을

다음의 경문을 들어 밝히고 있다.22)

22) 경문 [5]와 [6]은 松本의 위 연구에 인용된 것이다. 위의 논문, 243-244.

[5] 아지타(아일다=미륵)여, 나는 이 사바세계에서 무상정등각을 깨닫고서, 이 모

든 보살 마하살들(=종지용출의 보살들)을 무상정등각을 향하여 교화하고, 고무시

키고, 환희케 하고, 교도(敎導)한 것이다.23)

23) SP. 309,4-6: mayaite ajita sarve bodhisattvā mahāsattv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āv anuttarāṃ

samyaksaṃbodhim abhisaṃbudhya samādāpitāḥ samuttejitāḥ saṃpraharṣitā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 pariṇāmitāḥ /

『묘법연화경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a2-3): 是諸大菩薩摩訶薩 無量無数阿僧祇 從地涌

出 汝等昔所未見者 我於是娑婆世界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 敎化示導是諸菩薩.

[6] 그리고 나는 가야(성)에 있는 그 나무(보리수)의 뿌리 부근에서 무상의 법륜을

굴리고서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이 최상의 보리를 위해 숙련시켰다.(게송 42)

너희들 모두 나의 번뇌로부터 자유롭고(無漏), 진실한 말을 듣고서 나를 믿으

라. 나는 그와 같이 오래 전에(evaṃ ciram) 최상의 보리를 얻었으며, 그리고

그와 같이 오래 동안(evaṃ ciram) 나는 그들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무

상정등각을 향하여] 숙련시킨 것이다.(게송 43)24)

24) SP. 301,9-12: mayā ca prāpya imam agrabodhiṃ nagare gayāyāṃ drumamūli tatra/

anuttaraṃ vartiya dharmacakraṃ paripācitāḥ sarvi ihāgrabodhau//42//

anāsravā bhūta iyaṃ mi vācā śruṇitva sarve mama śraddadhadhvam/

evaṃ ciraṃ prāpta mayāgrabodhi paripācitāś caiti mayaiva sarve//43//

『묘법연화경』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b23-28): 我於伽耶城 菩提樹下坐 得成最正覺 轉無上法輪

爾乃敎化之 令初發道心 今皆住不退 悉當得成佛 我今說實語 汝等一心信 我從久遠來 敎化是等衆.

위 경문에서 붓다의 성불이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장소는 경전에서 붓다가 아

주 먼 과거세에 성불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종지용출의 보살들을

교화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 경문들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즉 붓다가 성불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행한 것은 주로 설법을 통한 중생의 교화

(samādāpana)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원실성불의 교화는 매우 다양

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7] 이때부터 줄곧 나는 선남자들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수백·천·코티·나유타의 세계에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시해온 것이다.25)

25) SP. 317,9-10: yataḥ prabhṛty ahaṃ kulaputr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au sattvānāṃ dharmaṃ

deśayāmi anyeṣu ca lokadhātukoṭīnayutaśatasahasreṣu/

『묘법연화경』권 5 「제16여래수량품」(T.9, 42b26-28): 自從是來 我常在此娑婆世界說法敎化

亦於餘處百千萬億那由他阿僧祇國導利衆生.

위 인용문에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구체적으로는 앞의 ‘오백진점겁(五百

塵點劫)’의 비유를 지시한다. 오백진점겁이란 석가모니 붓다의 성불과 수명이

라는 시간적 문제를 공간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비유인데, 그 내용은 오백천

만억나유타로 표현되는 무한에 가까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루

로 만들어 가루 하나를 일겁(一劫)으로 치더라도 붓다가 성불하고서 경과한

시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26) 따라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아주 오래

전에 성불한 이래로 계속해서’라는 의미가 된다. 즉 구원(久遠)에 성불한 이후

붓다는 사바세계와 다른 수많은 세계에서 중생에게 법을 설해왔다. 그리고 헤

아릴 수 없이 오래전에 성불한 이후 계속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가운데, 때때로

열반(죽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설해진다.

26)『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 T09, 42b11-26.

[8] 그리고 또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계속해서 찾아오는 중생들의 능력(indrya)

과 지혜의 높고 낮음, 정진을 시작한 [시간의] 길이를 관찰하고서, 곳곳에서(각각

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완전한 열반

(parinirvāṇa)을 선언하였으며, 그리고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중생들을 다양한 법

문으로 만족시켰던 것이다.27)

27) SP. 317,13-318,1: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ḥ tathāgata āgatāgatānāṃ sattvānām indriyaparāpara jñatāṃ vīryārabdhimātratāṃ vyavalokya tasmiṃs tasminn ātmano nāma vyāharati

tasmiṃs tasmiṃś cātmanaḥ parinirvāṇaṃ vyāharati tathā tathā ca sattvān paritoṣayati

nānāvidhair dharmaparyāyaiḥ/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5): 諸善男子 若有衆生來至我所 我以佛眼 觀其

信等諸根利鈍 隨所應度 處處自說 名字不同 年紀大小 亦復現言當入涅槃 又以種種方便說微妙法

能令衆生發歡喜心.

위 인용문에서 붓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를 했는데 색신(色身,

rūpakāya)의 소멸, 즉 육체적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완전한 열반(parinirvāṇa,

般涅槃)도 그의 교화 방법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붓다는 헤아릴 수 없이 오

래 전에 성불을 이룬 이후로 계속해서 중생을 제도해 왔는데, 때때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붓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다음의 경문을 보도록 한다.

[9] 실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여래가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토록 오래전에 깨닫고, 헤아릴 수 없는 수명(ayuṣpramāṇa)을 가지고 항상(sadā)

머물러 있었으며, 여래는 열반에 든 적이 없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완전한 열

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28)

28) SP. 318,14-315,1 : yad dhi kulaputrās tathāgatena kartavyaṃ tat tathāgataḥ karoti/ tāvac

cirābhisaṃbuddho 'parimitāyuṣpramāṇas tathāgataḥ sadā sthitaḥ/ aparinirvṛtas tathāgataḥ

parinirvāṇam ādarśayati vaineyavaśena/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9-21): 所作佛事 未曾暫廢 如是我成佛已來 甚大

久遠 壽命無量阿僧祇劫 常住不滅.

위 인용문은 붓다가 중생 교화를 위해 열반에 들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열

반에 든 적이 없으며, 언제나 상주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붓다의 열반이 소멸이 아니라 교화의 한 방편(方便, upāya)이라는 점이

다. 이상의 경문들은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실제로 열반에 들지

않고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하는 붓다의 이미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인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자면, 위의 인용문 [7]

[8] [9]는 모두 인용문 [4]의 앞의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 인용문 [7]은 “그때부

터 줄곧”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백진점겁에 비유될 만큼 먼 과거에 성

불을 이룬 붓다의 교화활동이 시작된 시기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인용문 [9]

는 인용문[4]의 “나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구절 바로 앞의 문장이다.

따라서 인용문들의 내용을 정리하면, 앞에서 오백진점겁에 비유되는 아득한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나서, 이 시기부터 계속해서 교화활동이 지속되었

음을 인용문[7]이 설명하고, 인용문 [8]에서 때때로 과거에 열반에 들었음을

설하나, 인용문 [9]에서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상주하여 법을 설함을 밝

히고, 마지막에 인용문 [4]에서 앞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이를 “나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문[4] 앞에 내용은 모

두 과거에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붓다가 펼쳤던 다양한 ‘교화행(敎化行)’을 지

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로부터 펼쳐왔던 다양한 교

화행을 인용문[4]에서 “나의 보살행(菩薩行)은 끝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밝

히고 있다. 즉 과거로부터 행해왔던 ‘교화행’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용문[4]의 맥락인 것이다.

(2)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

석가모니 붓다가 구원성불한 이래로 쉼 없이 중생을 교화한 것을 붓다 자

신이 보살행으로 규정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현재불, 그러니까 지금

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인도에서 출현하여,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아래에

서 최근에 성불한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0]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은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

ṇam). 그런데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앞으로도(adyāpi)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기까지 그것(지금까지의 수명의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수백·천·코티·나

유타의 겁이 남아있다. 실로 또한 나는 지금(idānīm) [실제로는] 결코 완전한 열반

에 들지 않음에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고 선언하는 것이다.29)

29) SP. 319,2-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

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idānīṃ khalu

punar ahaṃ kulaputrā aparinirvāyamāṇa eva parinirvāṇam ārocayāmi/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22-24):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

盡 復倍上數 然今非實滅度 而便唱言 當取滅度.

위 인용문에는 가야성 부근에서 최근에 성불한 붓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의 수명과 열반에 대한 교설이 담겨 있다. 우선 석가모

니 붓다의 남은 수명에 관해 구원에 성불한 이후 현재까지 아직 그 수명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은 인용문 [4]에서 설해진 바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앞으로 남은 붓다의 수명은 그것의 두 배(taddviguṇa)가 더 남아 있다고 설해

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붓다의 수명을 설명한 그 다음의 문장인데,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지금(idānīm)”이라는 단어이다. “지금(idānīm)”

이란 말은 과거세에 이미 성불을 이룬 붓다가 선언한 열반에 대해 대비적으로

사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지금”이란 말은 곧 “바로 이번 생에

있어서”의 의미이며, 직접적으로는 「제11견보탑품」에서의 열반에 대한 선언

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30) 그리고 열반에 든다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는 인

용문[9]에서 그 의미가 밝혀졌듯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을 보여줄 뿐,

실제로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머무르며 중생교화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의도하고 있다.

30)『묘법연화경』권4 「제11견보탑품」(T.9, 33c13-14): 誰能於此娑婆國土廣說妙法華經

今正是時如來不久當入涅槃.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의 주요 내용을 인용문[4]를 중심으로 하여 구원실

성불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의 보살행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해보았다. 결론

을 말하자면, 구원성불한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의 보살행은 동일하며, 그 핵

심은 중생에 대한 교화, 즉 ‘교화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해 항상 상주하며 법을 설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방편으로 중생을 돕는다. 그와 같이 구원성불한 이래 무수

한 시간동안에 걸친 ‘교화행’을 인용문[4]에서 붓다 자신이 ‘보살행’이라고 불

렀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중생에게 법을 설하고, 또한 과거와 똑같은 방

식으로 중생교화의 일환(一環)으로써 열반을 보여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

고 붓다에게는 앞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남아있다. 과거에 행했던 교화

활동을 붓다 스스로가 보살행이라고 불렀으므로, 가야근성불의 교화행도 마찬

가지로 보살행이 된다. 따라서 붓다의 보살행은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

에까지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상에서 범어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을 한역의 그것과 비교하여 검

토해보도록 한다. 범어본의 내용전개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로 다양한 중생교

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그 교화행을 가리켜서 보살행이라 부르면서 앞으로

도 수명이 매우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 수명 동안에 붓다의 교화행, 즉 보살행

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역의 경우에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

로 다양한 방식으로 교화행을 펼쳐왔음을 설하고서, “내가 과거에 행한 보살

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今猶未

盡)”는 흐름이 된다. 그 경우에, 앞에서 자세하게 과거의 ‘교화활동’을 설명하

다가 갑자기 ‘보살도에 의해 성취한 수명’ 문제로 넘어가게 되므로 내용전개가

매끄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직전의 내용은 분명히 구원에 성불했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구원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을 언

급한다면, 과거에 성불했다는 내용과 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을 했다는 두

개의 과거사(過去事)가 등장하므로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여

래수량품」의 내용전개는 먼저 서두에서 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

히고, 그 오랜 시간동안 붓다 자신이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교화했음을 설명

하고, 그것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고, 앞으로도 수명이 그에 두 배가 넘게 남

았으므로, 자신의 교화행/보살행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범어본의 내

용 전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것이 「여래수량품」의 문맥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해가 적어도 범본을 중심으로『법화경』을 이해해온 사람

들에 의해 지지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4. 석가모니 붓다의 현재진행형 보살행

1) 석가모니 붓다의 서원과 예토성불-비화경의 설명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에서 언급되는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검토

해보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법화경』에는 다른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독특한 교설이 설해지고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 [3]의「법화경론」에서는 “본원(本願)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중생계가 다하지 않으니 원(願)이 궁극적으로 끝난 것

(究竟)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bodhi)가 다 구족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법화경론」에서는 붓다의 보살행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시절에 세웠던 본원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31) 붓다는 보리(bodhi)를

성취했지만,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한량없는 중생을 성불로

이끌기 위해 보살 때 세웠던 원행을 계속한다는 해석은 경전의 문의(文意)를

잘 드러내는 탁월한 주석으로 생각된다.

31)『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은 모든 중생이 붓다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본원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묘법연화경』권1 「제2방편품」(T.9, 8b4-7):

舍利弗當知 我 本立誓願 欲令一切衆 如我等無異 如我昔所願 今者已滿足 化一切衆生

皆令入佛道.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중생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붓다가 보살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고 한다면, 이는 다른 불국토의 붓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

문이다. 즉 서방 극락(極樂, Sukhāvatī)정토에서도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아

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 역시 쉼 없이 보살행을 행해야 할 것이고, 동방

묘희국(妙喜國, Abhirati)의 아촉불(阿閦佛, Akṣobhya)도 마찬가지일 것이

다.32) 따라서 모든 불국토의 붓다들은 예외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교

리가 성립할 것이며, 그러한 교리가 불교의 교리사에 있어서 이미 정설로서 확

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체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리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붓다의 보살행을 본원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법화경론」의

주석은 어떤 특정한 맥락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그 작업은 무엇보

다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 시절에 세운 본원이 어떤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가

에 대해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32) 붓다와 그들의 국토에 관해서는 다음의 저서들을 참조. 시즈타니 마사오·수구로 신죠 2008,

199-210.; 폴 윌리암스·앤서니 트라이브 2009, 269-274.

석가모니 붓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로 예토(穢土)에서의 성불과 중생교화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화성유품(化城喻品)」에는 대통지승(大通智勝, Mahā-

abhijñājñānābhibhū)여래의 아들인 16왕자들이 대통지승여래에게 출가하여

법을 청문하고 성불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석가모니 붓다는 예토인 사

바세계에서 성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33)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성불

및 중생교화의 인연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경전으로『비화경(悲

華經)』을 들 수 있다.

33)『묘법연화경』권3 「제7화성유품」(T.9, 25c5-6): 第十六我釋迦牟尼佛 於娑婆國土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비화경』의 범어 경전 제목은 Karuṇāpuṇḍarīka-sūtra이다. 제목에서 karuṇā

는 자비, puṇḍarīka는 연꽃들 중에서도 흰 연꽃(白蓮)을 의미하며, 따라서 경

전 제목은 ‘자비(慈悲)의 흰 연꽃(白蓮)에 관해 설하는 경전(經)’으로 풀이될

수 있다.『비화경』에는 총 4종류의 한역이 있다고 전해지는데,『비화경』의 원

형으로 추측되는 축법호 역의『한거경(閑居經)』(1권), 역자불명의『대승비분

타리경(大乘悲分陀利經)』, 도공(道龔) 역『비화경』, 담무참 역의『비화경』(10

권)이다.34)『정법화경』을 번역한 축법호가 이 경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한

거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는 경전의 내용을 상세히 소

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사전의 해설로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비화경』에 대한

「大乘經典解說事典」의 내용 소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정토에서 깨달은 붓다임에 반해, 『비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이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깨닫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

석가모니불이 대비(大悲, mahākaruṇā)의 보살임을 찬탄하는 것이 주제이다.35)

35) 勝崎裕彦 외 3인 편 1997, 232f.

『비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과거 보살이었을 시기에 500가지의 서원

(誓願)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경전에 그 구체적인 항목들이 소개되지는 않지

만, 요점은 그의 본원(本願, pūrvapranidhāṇa)이 정토(淨土)가 아닌 예토(穢

土)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과거 보살

이었을 시절에 정토(淨土)에서 성불할 것을 서원했는데 반해, 석가모니의 전

신인 보해(寶海, Samudrareṇu)보살은 예토, 그 중에서도 번뇌가 가장 치성한

사바세계에서 성불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의 붓다인 보장(寶藏, Ratnagarbha)여래는 보해보살의 자비심을 크

게 칭찬하여, 그를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고 부른다.36)『비화경』은 석가모

니 붓다가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게 된 인연이 그의 본원에 의한 것

이며, 그 본원은 그의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36) 위의 책, 같은 곳.

필자는 석가모니 붓다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중생제도가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과 관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토의 중생을 제

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행(因行)으로 성취한 과보를 향유할 여유도 없이, 쉼

없이 중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대단히 수고스럽고 어려운 일이다.『법화경』에

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중생에게] 여러 선근이 생기도록, 여러 인연과 비유와 온갖 말로써 가지가지

법문을 하는 것이니라. 붓다로서 해야할 일을 지금까지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느

니라.37)

37)『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7-21): 欲令生諸善根 以若干因緣 譬喻

言辭種種說法 所作佛事 未曾暫廢.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헌신하는 석가모니 붓다

의 교화는 철저하게 이타행으로 일관된 것이며, 이는 대자비심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이타행은 문수보살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일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의 관념과도 유사성이

인정된다.38) 예를 들어 문수보살은 본래 성불을 이룬 붓다이지만, 중생제도를

위해 보살의 모습으로 교화하며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교화행을 계속 펼치고 있다.39)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예토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과 문수보살과 같은 대보살이 열반을 미루면서 예토에서 중생교화에 힘쓰는

것은 ‘붓다’와 ‘보살’이라는 명칭의 차이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거의

없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은 불보살의 본원과 대자비심, 자유

자재한 구제력, 예토라는 환경의 특수성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수긍하기 어려

운 것은 아닐 것이다.

38) 一闡提(icchantika)란 일반적으로 반열반의 성질이 없는 자, 또는 성불의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자

라고 설명된다. 한편,『능가경(楞伽經)』에서는 두 유형의 일천제에 대해 설하고 있다. 첫째는 일

체의 선근을 끊어(斷善根) 반열반할 수 없는 범부중생 일천제이다. 두 번째 유형의 일천제는 중생

구제의 本願(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그 원력에 의해 윤회 속에 머무르며 대비의 이타행을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이 대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자발적으로 열반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

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 또는 대비천제(大悲闡提)’라고 불린다. 두 종류

의 일천제는 모두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이유가 업력(業力)이냐, 원력(願力)이

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천제의 의미 및 능가경에서 설명된 두 종류의 일천제에 관

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 小川一乘 1968, 340-343.; 가라시마 세이시(辛嶋静志) 2012,

301-319.

39)『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龍種上佛)이었을 시절에 많은

중생을 교화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용종상불이 열반에 들자 중생들은 무수한 탑을 세워 공양했지

만, 그는 실제로 열반에 들었던 것은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붓다를 도와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平

川彰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이었다는 점, 그리고『수능엄삼매경』에서 묘사되는 문수보

살의 열반 시현(示現) 등을 근거로 문수보살의 경지를 붓다의 경지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平

川彰 1991, 43ff. 참고로『수능엄삼매경』에서 문수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열반을 시현(示現)

한 것과『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설명하는 열반에 관한 묘사는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에게 자신이 보살 시절에 닦은 공덕을 붓다가

된 후에 스스로 향유하는 자수용(自受用, svasaṃbhoga)이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40) 석가모니 붓다는 성불하여 많은 공덕을 성취하

였지만, 예토라는 환경은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려

울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의 성불 및 중생제도’라는 서원이 결

과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유의 교설을 낳

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40) 붓다의 세 가지 신체(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중에서 법락을 수용하는 수용신(受用身,

sāṃbhogikakāya)에는 스스로 법락을 수용하는 자수용(自受用)과 타인에게 법락을 수

용케 하는 타수용(他受用)이 있다. 자수용은 자리적인 성격의 것이며, 타수용은 이타적

행위이다. 히라카와 아키라 등편 2001, 132.

2)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교화와 「신해품」

여기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을

경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4신해품」에는 유명한 장자궁자(長子窮子)

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는 붓다 자신이 설한 것이 아니라 가섭과 수보리 등

대제자들이 설한 것인데, 위대한 지혜와 공덕을 갖춘 붓다를 부유한 자산가(장

자)에, 성문제자들을 가난한 아들(궁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우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가난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사자좌에 앉아 많은 귀족들에게 공경을 받으며 위엄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도망치게 된다(아들은 그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지 못한다). 도망치다 결국 기절까지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집

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유한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의 집에서 오물청소의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하는 장면이

설해지는데, 그에 대한 묘사가 주의를 끈다.

그리고 그 부유한 남자는 둥근(gavākṣa, 소의 눈처럼 둥근) 창문을 통해 자신의 아

들이 오물통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고서 한편으로 기특하게 생각했습

니다. 그리하여 그 장자는 자신의 저택에서 내려와서(avatīrya), 화환과 장신구를

내려놓고 부드럽고(mṛduka) 깨끗하고(caukṣa) 화려한(udāra) 옷을 벗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서 오른손에 바구니(piṭaka)를 들고서 먼지(pāṃsu)로 자신의 몸 곳곳

(gātra)을 더럽히고서 아주 멀찍이서 말을 걸면서 그 가난한 사내에게로 다가갔습

니다. 다가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게. 서

있지 말고 오물(pāṃsu)을 치우게.” 이러한 방법(upāya)으로 그 아들에게 말을 걸

고 서로 얘기를 할 것입니다.41)

41) SP. 106,2-8: sa cāḍhyaḥ puruṣo gavākṣavātāyanena taṃ svakaṃ putraṃ paśyet saṃkāradhānaṃ

śodhayamānam/ dṛṣṭvā ca punar āścaryaprāpto bhavet/ atha khalu sa gṛhapatiḥ svakān

niveśanād avatīrya apanayitvā mālyābharaṇāni, apanayitvā mṛdukāni vastrāṇi, caukṣāṇy

udārāṇi malināni vastrāṇi prāvṛtya, dakṣiṇena pāṇinā piṭakaṃ parigṛhya pāṃsunā svagātraṃ

dūṣayitvā dūrata eva saṃbhāṣamāṇo yena sa daridrapuruṣas tenopasaṃkrāmet upasaṃkramyaivaṃ

vadet/ vahantu bhavantaḥ piṭakāni, mā tiṣṭhata, harata pāṃsūni/ anenopāyena taṃ

putram ālapet saṃlapec ca/

『묘법연화경』권2 「제4신해품」(T.9, 17a14-19): 又以他日 於窓牖中遙見子身 羸瘦憔悴 糞土塵坌

污穢不淨 卽脫瓔珞 細軟上服 嚴飾之具 更著麁弊垢膩之衣 塵土坌身 右手執持除糞之器 狀有所畏

語諸作人 汝等勤作 勿得懈息 以方便故 得近其子.

자산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내려와 깨끗하

고 부드러운 옷을 벗고, 장신구를 내려놓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 온 몸에 먼지

를 묻히고서 아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장면은 석존의 교화가 어떠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예토에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중생들에게 교화를 한다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가 자신의 복덕과 안락을 내려놓고, 아들과 똑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온 몸에 흙먼지를 묻히고 다가가 함께 땀 흘려 일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석존의 교화는 보살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지은 인행의 과보를 향유

하면서 법을 설하는 정토의 붓다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예토에서는 중생들이

선업이 적고, 근기가 낮으므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붓다는 위 비유에서 집

으로 표현된 자신의 거처에서 내려와서, 자신이 성취한 복덕과 장엄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예토의 거친 풍토 속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법

을 전해야 했다. 즉 예토에서의 교화란 붓다가 자신의 성취 속에 머무르는 것

이 아니라,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운동을 동반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필자

는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에 대해서 예토가 지니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

다고 생각되며, 「신해품」의 위 비유는 「여래수량품」의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문구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방식

의 교화란 예토 교화의 필연적인 양상이며, 예토 교화를 서원한 석가모니 붓다

에게는 일종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사실상 보살행

의 연속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필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요약 및 그 함의에 대해서

이제『법화경』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정

리하고 그 함의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한역본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따라서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

가를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 단계로서 먼저 원문을 추정해보았는데, 범어본 교정본과 사본류 그

리고「법화경론」을 근거로 하여 범어본이 원문을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

했다. 또한 범어본『법화경』과 사본들, 그리고「법화경론」이 모두 일치하고 있

으므로, 경전(범어본『법화경』)과 논서(「법화경론」)의 가르침대로 ‘붓다의 보

살행’이라는 교설을 신앙하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

았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하고서 다음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내용을 중심으

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보았다. 범본의 내용에 따르면, 「여래수량

품」의 내용 전개는 ①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②그 후에 다

양한 방법으로 중생교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③그러한 ‘교화행’을 붓다 스

스로가 ‘보살행’으로 규정하고서 ④붓다에게는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음

을 알리고, ⑤따라서 앞으로도 붓다의 보살행/교화행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

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내용 전개는 붓다의 교화와 수명을 일목요연하

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한역의 내용 전개는 ①과 ②는 동일

하나 ③과 ④를 하나로 묶어 과거에 닦았던 보살행에 의해 얻은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고 설하는 흐름이 된다. 과거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갑자기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교설이 전개되는 것은 흐름상 돌연한 느

낌을 주며, 더욱이 구원성불한 붓다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구원성불 이전의 보

살행을 언급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범어본의 맥락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경전의 흐름상으

로는 더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후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법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

토해보았다. ‘본원’에 의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는「법화경론」

의 주석은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붓다의 보살행은 그다지 일

반적인 내용이 아니므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석가

모니 붓다가 세운 본원의 특징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문

제에 관해『비화경』의 설명을 참조하여,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인 ‘예토에서의

성불과 교화’가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

적인 모습이 「신해품」의 장자궁자의 비유에 잘 묘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가 머물고 있는 예토라

는 환경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예토라는 특수한 환경은 불과(佛果)를 성취한

붓다가 과보의 향유에 머무르지 않고,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활동을 통해서

만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보살

행의 연속이라 할 만한 행(行)의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붓다의 보살행’이라는『법화경』의 교설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

가?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여래수량품」은 석가모니 붓다의 무한한 수명을 설하는 것으로 유명

하지만, 범어본을 통해 볼 경우 그 풍경에는 미세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

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문장이 「여래수량품」 내에 도입되면서

붓다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교설이 곧 붓다의 무한한 보살행을 지시하게 된다

는 것이다. 즉 ‘여래의 수명=보살행’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붓다가 그의 위대함을 칭송받기 위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중생구제

를 위해 우리 곁에 머문다는 「여래수량품」의 대의(大義)는 ‘붓다의 보살행’을

매개로 하여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여래의 수명=보살행’이라는 함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에 대해 검

토해 보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법화경』『에서 붓다 교화의 궁극적인 목적

은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도록 하여 모두 성불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경전에서는 ‘일불승(一佛乘)’이라는 용어로 표

현하는데, 일불승은 다음의 두 계기를 통해 확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

저 지혜의 관점에서 일불승의 이치를 밝히고서(「방편품」), 실제로 붓다가 상

주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도와 성불로 이끄는 방편교화행, 즉 보살행

을 펼침으로써(「여래수량품」) 일체중생의 성불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와 같이 「방편품」(지혜)과 「여래수량품」(방편)이 하나가 됨으로써 ‘일체중생

을 구제하겠다는 붓다의 본원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경전의 문구는 온전하

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에 대해 대

강의 문맥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문제들,

예를 들어 법화경에서의 보살행에 관한 보다 면밀한 검토, 그리고 붓다들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을 실현해가는 구체적인 방식 등에 관해서

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1. 경전의 편집

 

붓다 입멸 이후 100년이 지나서 분열이 시작된 불교는 끝내 20개 부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불교는 곧이어 기존 불교의 분파보다 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서력기원 전후가 되자 그때까지의 부파불교에 대한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혁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부파불교를 '진리에 이르는 작은 탈것(小乘) 즉 소승불교라 비난하고 자신들이 시작한 불교운동을 '커다란 탈것(大乘)" 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은 각자의 사상적 주장에 따라서 여러가지가 편찬되었다. 그중에서도 <법화경>은 기원후 50년경에서 150년 사이에 걸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여러 종류의 법화경(法華經)

 

한역된 법화경

먼저 <법화경>의 한역본과 원전에 대하여 알아보자. <법화경>의 한역은 전역(全譯)과 부분역(部分譯)을 합해 여러 종류에 이른다. 전역된 경전만 해도 옛부터 6역(六譯).3존(三存). 3결(三缺)이라 하여 여섯 종류가 번역 되었는데 그중 셋은 남아 있고 셋은 없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현존하는 한역본은 286년에 축법호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 27품, 406년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 27품(훗날 권28품으로 됨), 601년에 사나굴다와 달마급다가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27품 세가지이다. 이중 <첨품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을 보정한 번역본이다.

 

번역 연대로 보면 축법호가 번역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축법호가 사용한 원전이 제일 오래된 형태의 것이라는 증거는 안된다. 원본이 사라져 버려서 어느 번역본이 가장 오래된 원형인가를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가장 잘 번역된 명역(名譯)이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법화경>은 이밖에도 481년에 담마가다야샤(曇摩伽陀耶舍_번역본 <무량의경(無量義經)>을 개경(開經)으로 해서 담마밀다의 <관보현보살행법경>을 결경(結經)으로 하는 이른바 '법화삼부경'을 성립 시켰다.

 

원전사본의 발견

<법화경>의원전은 그 사본(寫本)이 근년에 와서 네팔 캐시미르 중앙아시아에서 발견 되었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영국의 호지손이란 사람이다. 그는 네팔 주재 공사 였을때 불경의 범어본 사본을 수집했는데 그중에 <법화경>의 사본도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 경의 원본사본이 발견 되었다.

 

<법화경> 사본은 대부분이 네팔 계통의 것과 중앙 아시아 계통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네팔계 사본은 완전한 형태의 것이 많다. 이에 비해 중앙 아시아계 사본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중 어느것이 더 오래된 것인가는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네팔계는 11세기 이후이고 중앙 아시아계는 그 이전으로 생각되고 있다.1931년 캐시미르이 길기트에서 <법화경>의 원전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5-6세기경의 사본으로 추정되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경전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을 번역했던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쿠자에서 태어나 뒷날 중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번역에 사용했던 원전사본은 중앙아시아계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중앙아시아계의 것은 인도의 굽타왕조 시대의 문자로 씌여져 있다.

 

묘법연화경

3. 법화경의 특색

전통적 구분

한역본은 구마라집 번역의 <묘법연화경>이 가장 많이 읽혔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초로 해서 살펴보는게 좋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했을 당시는 제바달다품이 없고 7권래품이었다. 그런데 천태지의(天台智. 538-597) 때부터 제바달다품이 제 12장으로 삽입되어 7권28품이 되었고 8세기 중간에는 8권28품으로 정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법화경> 제14장 안락행품(安樂行品)과 제15장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 사이에서 구분이 생긴다. 이것을 나눈 최초의 인물이 구마라집의 제자 도생(道生) 이다. 도생은 앞부분을 인문(因門) 뒷부분을 과문(果門)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인문은 일승(一乘)의 진리 (眞實法輪. 진실법륜)을 증명하는 것이며 과문은 상주(常住)의 생명(無餘法輪. 무여법륜)을 증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광택사의 법운(法雲)이 도생의 해석을 다시 계승하여 인문을 개삼현일(開三顯一), 과문을 개근현원(開根顯元)이라고 정의했다. 개삼현일이란 삼승(三乘)의 진리를 일승(一乘)에 통일한다는 뜻이며, 개근현원이란 인도에 출현한 석가모니는 실은영원상주의 부처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천태종을 창립한 천태지의 역시 인과이문(因果二門) 계승했는데 천태지의는 그것을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법화경>의 구성을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세분하고 조직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 <법화경> 전체를 셋으로 나누는 것을 일경삼단(一經三段)이라 한다. 그리고 적문, 본문을 각각 삼분할 경우 적문삼단 본문삼단이라 했다. 그리고 이를 합해서 이경육단(二經六段) 이라 했다.

 

3요소 3특색

제 14장 안락행품(安樂行品)과 제 15장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을 기점으로 <법화경>을 반으로 나눈 이유는 전반에서 제2장 방편품(方便品) 을 중심으로 하여 우주의 통일적 진리(일승묘법.一乘妙法)를 증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반에서 제16장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의 인격적 생명(구원본불.久遠本佛)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방편품은 '시방불토(十方佛土) 가운데는 오직 일승의 법만 있고 둘도 없고 셋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승(二乘: 성문승. 연각승)내지 삼승(三乘: 聲聞(성문). 緣覺(연각).菩薩(보살))을 포함해 일불승(一佛乘)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이르는 커다란 탈것(乘物)은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 역시 우주의 만물을 통일하는 근본의 대법(大法)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을 다른말로 묘법(妙法)이라고 표현하고 무상도(無常道)라고도 한다. 또한 제일의(第一義)등으로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이 경의 후반부 중심사상은 구원의 인격적 생명(구원본불.久遠本佛) 이다. 이 사상이 제시된 것은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이처럼 오래 전에 성불한 여래는 수명무량(壽命無量)이며 상주(常住)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실로 오랜 예전에 부처님이 되어 있었으며 아룰러 부처님으로서의 수명은 영원 무한임을 증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샘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구원불로 강조했던 의도는 다음 세가지라고 생각 된다.

 

첫째는 제불(諸佛)의 통일이라는 것이다.<법화경>에 이르기까지 대승불교 경전은 여러 종류의 부처님을 내세워 왔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님들은 실은 구원본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分身佛)이며 그 분신은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통일적 진리가 있으며 구원의 인격적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의 일승묘법(一乘妙法)은 단순한 자연이법이 아니고 인생생활에 작용하는 영원한 인격적 생명적 약동체이을 밝힌 것이다.

 

셋째는 현실에서의 실천 활동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약동이 직접 체득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 구원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칠줄 모르는 실천활동(보살행)을 실현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셋중에서 특히 세번째는 <법화경>의 원전 성립사상으로 생각되어 진다. <법화경>의 원이 편집되고 성립되어 가는 모양을 검토해 보면 앞의 전통적인 두 부분에 대해 또 한 부분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두 부분에 겹쳐지는 것인데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서 제22장 축루품(囑累品) 까지로서 이것은 '제3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학자들은 이를 '제3법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인생의 고난을 이겨내면서 진리실천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현실의 인간적 활동(보살행도)의 주장이다. 수많은 환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구원을 믿는 한 인생은 최후까지 건투해 나갈 용기를 획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법화경>은 전통적 입장과 성립사적 관점을 합쳐서 살펴보면 진리(法)과 인격(佛)과 인간(菩薩.보살) 또는 진리와 생명과 실천의 삼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주의 통일적 진리(一乘妙法.일승묘법), 구원의 인격적 진리(久遠本佛.구원본불), 현실의 인간적 활동(菩薩行道.보살행도)덩의 제1부분. 제2부분. 제3부분의 각각의 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3요소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화경>의 제목 즉 '사말다.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mdarika sutra. 묘법연화경)이다. 사말다(妙法. 묘법)는 진리에 관해서 정의 내린 것이며 수트라(經)는 부처님의 교훈이라는 뜻으로 부처님과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푼다리카(蓮華. 연화)는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보살이란 보디사트바의 음사어로써 깨달음의 진리를 현실의 세계에서 실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는 '연꽃에 물이 묻지 않듯이 지금 여기에 그들은 대지를 뚫고 모였다'라는 표현이 있다. 연꽃이란 흙탕물 속에서 살지만 그러면서도 흙탕물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에게 해당시킨 것이다.

 

중생은 우주의 통일적 진리에 오로지 믿음을 바칠 때 구원본불의 생명에 감싸여진다. 이것을 깨달을 때 세상의 사악한 악에 물들지 않고 인생의 고통을 인내하면서 진리 실천에 매진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영원한 생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법화경>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의 제목을 입으로 외우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된다고 하는 종파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4. 법화경의 세계

 

법화경의 우주관

<법화경>은 전반에서 일승묘법이란 통일적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 경은 통일된 전체 우주를 묘사하고 있다. 구마라집은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번역 했는데 현대적으로 번역을 해 본다면 '우주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각자를 받쳐주고 있는 이법(理法)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총칭해서 불교에서는 '일체법' 또는 '제법(諸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독립 무관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서는 불이(不二)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다. 그 불이(不二)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곳에 제법통일의 대법 즉 우주의 통일적 진리가 있는 것이다.

 

<법화경>이 설명한 '일승묘법(一乘妙法)'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정신(心)에는 정신의 법(心法)이 있고 육체(色)에는 육체의 법(色法)이 있다. 그러나 근본에서는 색심불이(色心不二)로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색법과 심법을 근본에 두고 통일돼 있는 색심불이의 일승묘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병도 정신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치료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병도 육체의 건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신과 육체만이 불이(不二)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끝을 더듬어 가다보면 모든(제법)것이 서로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법화경>이 설법한 일승묘법은 우주만유(諸法.제법)를 근저에 놓고 통일하는 대법이라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 경은 제법의 그물과 같아서 그물(일승묘법)을 잡아 당기면 모든 그물코가 끌어 당겨진다는 것이다.

 

일승묘법이란 이처럼 우주만유의 밑바탕에 있는 통일의 원리다. 이 원리에 의해 전체 우주의 현상이 전개된다. 구라마집은 이를 '제법실상'이란 번역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바꿔말하면 '우주실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

<법화경>에서 설명된 우주 전체 우주상은 이른바 기본형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조직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천태지의 대사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 이다. 마하지관(摩訶止觀) 제5권에 의하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우주의 존재를 (1)지옥 (2)아귀 (3)축생 (4)아수라 (5)사람 (6)천 (7)성문 (8)연각 (9)보살 (10)불 등 십계(十界)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 십계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즉상관(相卽相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계 하나하나에 다시 십계가 내포되어 (十界之具. 십계지구)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계(白界)가 된다.

 

그런데 <법화경>의 제2장 방편품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각각의 본질로서 10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구마라집 번역본에 의하면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 과(果). 보(報). 본말구경(本末究景) 등 열개가 그것인데 그 열 개 항목의 앞에 '이와같이(如是.여시)'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이를 '십여시(十如是)'라고 부른다.

 

여기서 상(相)이란 외상(外相), 성이란 내성(內性), 체란 외상.내상을 합한 전체, 역(力)이란 잠재적인 능력, 작(作)이란 현재적인 작용, 인(因)이란 사물이 생기는 직접적 원인, 연(緣)이란 인을 도와주는 간접적 원인(조건), 과(果)란 인연으로 인해 생긴 결과, 보(報)란 결과가 사실이 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 본말구경이란 상에서 보까지 서로 관계되고 일관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십여시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활동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백계에서 십여시가 서로 곱해져서 다시 천(千)이란 숫자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또 한 가지 존재는 각각 주체(衆生世間.중생세간)와 환경(國土世間.국토세간) 그런 것을 구성하는 물심의 다섯 가지 요소(五陰世間.오음세간) 세가지(三乘世間.삼승세간)가 있는데 이 삼종세간을 위의 천에 곱해 보면 삼천이란 숫자가 된다. 요컨데 삼천이란 극대화의 전체 우주의 상태를 표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념(一念)이란 물질이든 마음이든 극소 극미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일념삼천'이란 극소의 세계와(一念) 극대의 세계(三千)와 상극상관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천태지의는 일념과 삼천에 대해서 전후(前後). 본말(本末). 주종(主從). 동이(同異)등을 논의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즉 어느 쪽이 전체이고 부분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극미의 일념에 삼천의 우주만상이 포함되고 충만하며 삼천의 우주만유에 극미의 일념이 투철하고 충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힘이 하나가 되어 한 물질 속에 존재하며 또 한 물질의 힘이 퍼져나가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논리다. 따라서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전체 우주의 생명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경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념의 극소와 삼천의 극대를 상즉 상관 시키고 있는 것이 즉 <법화경>이 설명한 일승묘법이다. 이 일승묘법으로 일관된 전체 우주를 조직화한 것이 즉 천태의 일념삼천설이다.

 

5. 법화경의 정토(淨土)

 

있는 정토(常寂光土.상적광토)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와 세계의 상(常)과 무상(無常) 내지 유한과 무한 육체와 영혼의 상이(同異), 사후의 생존 유무 등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남이라든가 죽음, 육체와 영혼,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하는 구분 또는 분별할 수 있는 사고를 초월하였을 때 진정한 영원한 세계 영원한 생명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침묵을 통해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화경> 제14장 안락행품에도 보면 '전도(顚倒)된 생각 때문에 법이 유(有)라거나 무(無)라거나,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거나, 이것은 태어남이고 저것은 죽음이라고 분별한다'고 우리의 전도된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또 제16장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래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고, 죽어 없어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고, 유전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며, 같지 않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도 아니고 나 아닌 것도 아니라고 여래는 범부가 눈앞에 보는 것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

 

생사.유무.피차 따위의 분별하는 생각(分別見. 분별견)을 초월한 곳에 영원절대의 생명 또는 영원절대의 세계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당장 이곳에 영원한 생명이 박동하고 영원한 세계가 현전(現前. 앞에 나타나다)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현실의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순간순간 변화하고 멸망해 간다. 그리고 한정된 것이고 괴로움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른바 범부가 사는 사바세계다. 그러나 열렬한 신앙으로서 그런 범부의 사바세계에 영원한 생명 구원의 정토가 감득(感得. 느껴서 알게되다. 영감으로 깨달아 알게되다)되는 것이다.

 

<법화경>은 이런 사실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증명하려 했다. '구원본불로서의 석가모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보드가야 근처에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여러 곳에서 설법하시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모니는 유한의 존재다. 그러나 <법화경>은 그 유한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의 제16장 여래수량품을 보면 '오랜 옛날에 성불한 여래는 수명무량으로 항상 하노라'는 말이 나온다. 열심으로 신앙하면 이런 불멸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볼 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고 사바세계인 이곳에서 구원의 정토를 감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사와 피차를 초월한 절대정토를 전채지의는 '상적광토(常寂光土)'라고 설명했다.

 

'상적광토'라는 말은 <법화경>의 결정인 <관보살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에 따온 것이다.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정토라는 뜻인데 알게 쉽게 말하면 바로 '여기에 있는' 정토라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설법도

 

 

이루는 정토(淨佛國土.정불국토)

그런데 정토를 말할 때 또 한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다. 그것은 정불국토(淨佛國土)라 불리는 것이다. 즉 국토를 정화하는 것이며 정토를 현실사회 안에 실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회의 정토화이고 불국토의 건설이라 할 것이다. <법화경>을 보면 '정토를 맑게 하기 위해서 항상 정진하고 중생을 교화시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상적광토 즉 '있는' 정토에 비교되는 '이루는' 정토라 할 수 있다. <법화경>의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대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연민하는 까닭에 인간으로 태어났도다."

 

<법화경>의 이러한 정신은 그 가르침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같은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여래사(如來使)'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절대정토(있는정토)에만 도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런 정토를 실재로 현실사회에 구현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살행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인간계의 현실상은 무상하고 유한한 것이다. 그러한 현실세계에 부처님이 출현한 것은 이곳이야말로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내지 정토가 활현(活現)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자연에 있는 소리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인데 우리의 귀가 그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도 작은 용기(容器. 그릇)인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작은 한정된 그릇에 자연의 영원하고 무한한 소리를 담아냄으로써 오히려 자연의 묘음(妙音)을 우리들에게 살아서 울려 오게 될 것이다.

 

화가는 영원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정된 캔버스 위에 한정된 그림 물감으로 그려 내려고 한다. 그것은 소용없는 아무 의미없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에서 오히려 영원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비밀이 있고 그 부분을 파악한 자가 명연주가이고 명예술가이고 인생의 명인(名人)이다.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고 현실은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살아가는 의의가 있고 영원의 생명은 오히려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삶을 얻은 자의 임무이다. 그것을 이룩해 낸 자가 인생의 명인인 것이다.

 

인간의 현실 세계는 유한이고 그 유한의 인생으로 태어난 일도 그곳에 영원무한한 생명이 발현되고 구원의 정토가 현현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토현현의 사명을 갖고 사람들은 이 세간을 살아왔다. 그것이 다름아닌 <법화경>의 정신이다.

 

가는 정토(來世淨土. 내세정토)

마지막으로 내세정토(來世淨土) 즉 죽은 후 돌아가는 정토이다. 간단히 이것을 '가는 정토'라고 한다.인간계에서 삶을 사는 자는 불법을 신봉함으로써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계에 있으면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경지에 안주(있는 정토)한다.

 

또 영원한 생명을 느껴서 알게 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생이 있는 한 각자 자기으 처지를 통해서 불법을 생활 속에 끌어들여 영원한 생명을 구현한다. 나아가서는 불국토 건설에 노력해 나가려고(이루는 정토)한다. 그리하여 그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문을 들어설 때에는 본래의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가는 정토). 살아 있는 한 정불국토 즉 불국토 건설에 노력해 나갈 때 죽음은 편안한 고효양으로 돌아가는 문으로서 열려지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있는 정토(절대정토)''이루는 정토(정불국토)''가는 정토(내세정토)'의 세 가지 정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하나이다. 다만 정토가 세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사람의 근기에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 법화신앙의 역사

 

인도의 법화신앙

인도에서 법화신앙은 대략 서기 50년경에서 150년경에 걸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춘 뒤 발전을 거듭해 <법화경> 신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 <법화경>은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 일승묘법이 설명된 부분이 특히 주목 되었다.

 

일승묘법이란 구마라집의 번역에 의하면 무상도(無常道) 또는 제일의(第一義) 또는 평등법(平等法)이란 뜻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즉 일승묘법이란 근원이 되는 통일된 최고의 절대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바닥에 공통되는 제일원리(第一原理)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으로 의해 평등하게 유지되고 본래 둘이 아닌 하나의 것이다. 일승묘법 아래서는 모든 한정적인 틀이 제거되고 사물은 불이평등(不二平等), 세계는 허공무한(虛空無限)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이며 모든 만물의 진상(諸法實相.제법실상)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저것, 자기 또는 타인이라든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생과 사 등 여러가지의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테두리는 임시로 마련된 것이며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고정시하고 불변(不變) 부동(不動)처럼 생각하는 것에서 미혹이 생긴다. 이를테면 우주에는 본래 동서남북이 없다. 시방공(十方空) 이 며 좌우와 상하가 없는 무변의 허공이다.

 

등산에도 비유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길을 잃었을 때 '초심자'는 초조해하며 계곡이나 늪에 빠져 점점 더 미로에서 진퇴양난이 된다. 그러나 능숙한 '경험자'는 산의 정상으로 되돌아가 널리 사방을 굽어보고 올바른 길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면 곧 이리저리 판단도 해보고 걱정하며 좋았다, 걱정했다 한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을 일시 정지시키고 광대무변한 허공에 몸을 맡기고 초조한 마음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법화경>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강조한다.

 

인도의 법화신앙자들은 거기에 끌렸다. 그래서 용수는 <반야경>을 주석한 <대지도론>에서 <법화경>이 일승평등의 진리 세계를 설명하는 점이 <반야경>보다 뛰어나다고 밝히고 있다. 또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여러가지 논서, 이를테면 견의(堅議)가 쓴 <입대승론(入大乘論)>과 세친(Vasubandhu. 世親)이 쓴 <법화경론>등에서도 마찬가지의 지적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세친이 쓴 <법화경론>은 <법화경>이 진리의 평등, 세계의 평등, 존재의 평등(이를 三平登이라고 함)을 설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다른것 보다 뛰어난 점이며 그것을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또 4세기경에 편집된 <열반경>은 모든 존재의 평등한 성불과 영원 보편성을 강조한 것으로 규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이 점은 <열반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중국의 법화신앙

서력기원을 전후할 무렵 이미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서 불교는 처음에는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노자의 사상을 차용해 해석되기도 했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부터 경전과 논서가 계속 번역 소개됨에 따라 불교를 불교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아울러 부처님의 최고 가르침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로 연구와 논의가 왕성해졌다. 특히 구마라집에 의해 <반야경><법화경>과 <중론><대지도론>등 수많은 경전과 논서가 번역 소개되자 이러한 운동과 연구는 한층 더 활발해 졌다. 그리하여 불교의 연구자들은 각자의 생각으로 여러 경전을 정리하고 배열하려고 노력했다. 교상판선(敎相判釋)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교상판석은 5-6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가장 활발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강남에 삼사(三事) 강북에 칠사(七事) 합해서 십사(十事)의 교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천태지의가 쓴 <법화현의(法華玄義)> 제10권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교판논의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반야경>을 근본에 둘 때 <법화경><화엄경><열반경>을 어떻게 배열하는가 하는 일이다.

 

<반야경>은 불교의 진리를 원리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그것을 근본에 둔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경전을 진리의 3대 특성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중 <법화경>은진리의 통일성을 밝힌 것으로 이를 '만선동귀교(萬善同歸敎)'라 했다. 그리고 <화엄경>은 진리의 순일성을 밝힌 것으로 이것은 '돈교(頓敎)'로 정의 되었다. 마지막으로 <열반경>은 진리의 영원성을 밝힌 것으로 '상주교(常住敎)'라고 정의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화엄경>과 <열반경>을 최고시하고 <법화경>은 그 중간에 놓는 교판이다.

 

그러나 천태대사는 이 '만선동귀교'로서의 <법화경>을 최고의 위치에 놓았다. 천태대사의 이러한 의도는 통일적 진리를 밝힌 <법화경>에 의해 지금까지의 불교가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사상을 총합, 통일하고 교판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있었다. 사실 중국에 잡다하게 들어왔던 불교의 여러 사상, 여러 경전은 일단 천태대사의 이러한 교판에으해 총합되고 통일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천태대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때마침 수(隨)나라에 의한 통일국가 실현시기였다. 천태지의에 의한 통일불교의 수립은 이러한 정치정세와 맞아 떨어져 잡다한 교판을 통일적인 것으로 바꾸고 종합적인 세계관 인생관의 확립으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등에 이 점이 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뒷날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불교에 이만큼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주장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법화신앙의 탄생은 천태지의에 의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태대사의 법화신앙은 유명한 주석서로 결실 되었다. 이른바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 또는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 '라 불리는 것으로 <법화문구(法華文句)><법화현의(法華玄義)><마하지관(摩訶止觀)>등이 그것이다. <법화문구>는 <법화경>을 주석한 것이고 <법화현의>는 <법화경>에 근거한 철리(哲理)를 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마하지관>은 <법화경>에 근거한 실천을 설명한 것이다.

 

<법화경>에 대한 주석은 천태대사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행해졌다. '법화삼대부'는 그런 것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대성한 것이다. 천태대사 이후의 법화신앙에서는 이 삼대부가 항상 지침이 되었다.

 

'법화삼대부'를 일관하는 기본사상에 관해 약간 설명을 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의 모습은 자타(自他). 남녀(男女). 생사(生死). 신심(身心). 선악(善惡). 고락(苦樂). 미추(美醜)등과 같이 A.B 두개의 틀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A.B. 란 고정적 개별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무상(無常) 변멸(變滅)하는 것이고 서로가 상의상관(相依相關)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과 상의(相依)를 합쳐서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하거니와 이것을 바꿔 말하면 A.B 둘은 현실계의 가정된 모습이고 그 근저는 무아(無我)와 공(空)이 근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과 근본은 또한 둘이 아니며 일체를 이루고 있다. <법화경>의 입장에서 말하면 A.B. 둘은 근본에서 일승묘법에 의해 통일되고 있다. 즉 A.B 둘은 가정(假定)의 현실상으로 A.B 가 둘이 아니고 (不二) 공(空)한 것이 진실상이며 영원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A.B 둘로 나누어진 현실상에 입각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A.B 는 둘이라고 고집하고(아견.我見) 이렇다 저렇다 갈라진 생각(分別見.분별견)을 일으키기 쉽다. 이것이 미혹의 근본이고 불이(不二). 공(空)의 진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이름한다. 그래서 무명을 떨쳐 버리고 집착을 버리며 둘이 아니고 공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계속 강조하는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것을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이라 이름하였다. A.B 둘로 나뉜 현상을 거짓으로 보고 거기에서 둘이 아닌 공(空)의 진실상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는 공관(空觀)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른바 제일수행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짓에서 공으로 들어 간다고 해서 들어간 채로 공에 머물러 버린다면 또한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 '소승(小乘)'이라고 평가되었던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은 공에 머물러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살리는 일을 잊어 버리고 있다. 나아가서는 공을 허무로 오해하고(虛無空見.허무공견) 인생이 무(無)로 돌아가는 이상(理想)이라 생각한다. 또 보살들이 불국토 건설(淨佛國土.정불국토)에 매진하는 것을 보아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다만 방관할 뿐이다. 그래서 <법화경> 제4장 신해품(信解品) 은 '오직 공(空).무상(無常)이 무작(無作)만을 생각하고 보살로서 유희신통하며 불국토를 정화시키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마음으로부터 희락(喜樂)하지 못한다'고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다음으로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을 설한다. 공(空)에서 가(假)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가관(假觀)이라고 약칭한다. 즉 현실(假.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공에 들어 간다는 것은 거기에서 실은 올바른 현실을 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그러므로 공의 체계화에 주력했던 용수는 그의 저서 <중론>에서 '공성(空性)이 성립하는 곳에 일체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개공(一切皆空) 일체개성(一切皆性)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부정이 아니고 거꾸로 사물의 성립근거이며 공에 의해 일체의 사물이 성립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까닭으로 천태대사는 공에서 거짓의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활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이고 가관(假觀)이다. 앞에서 말한 종가입공관 또는 공관을 제일수행이라 하면 이 종공입가관 또는 가관은 제2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이 강조하는 보살행이다.

 

또한 <법화경>의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서는 이와같은 보살행에 매진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사도(如來使)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이런 자각 아래 고난을 인내하면서(인욕)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일(자비) 할 것을 설하고 있다. 다만 현실에 지나치게 흥분되어 빠져버린다면 다시 출발저믕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않기 위해서는 공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거짓에 있어도 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사품에서는 또 보살의 현실활동의 마음가짐으로서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를 제시하면서 그것은 자비.인욕.공성의 삼궤법(三軌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거짓에 있으면서 공을 잊지 않는 것을 마지막으로 중도제1의관(약해서 중관)에 두고 끝맺고 있다. 그것은 종가입공관(공관)과 종공가입관(가관)을 통일한 것이다. 묶어서 말하면 공(空).가(假).중(中) 삼관이라 한다. A.B 둘에 관해서 말하면 A.B 둘에서 A.B 불이(不二) 즉 공관(空觀) A.B 불이(不二)에서 A.B 둘로(假觀.가관) 다시 양자의 통일(中觀.중관)이 된다. 천태는 그것이 '이이불이(二而不二) 불이이이(不二二而)' 즉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서 둘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것이 천태대사 법화삼대부의 골격이며 법화철학 내지 실천론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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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대론 / 문을식

- <밀린다팡하>에서 윤회설을 둘러싼 무아설과 그리스 영혼관을 중심으로-

불교평론[11호] 2002년 09월 10일 (화) 문을식 candra21@hanmail.net )

1 . 서론

1) 《밀린다팡하》의 성립

《밀린다팡하》는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팔리어로 Milinda)와 비구승 나가세나(Nagasena)와의 대론(對論)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팔리어로 기록되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에 전해오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와 한역되어 한국, 중국, 일본에 전해오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의 두 가지가 있다.

《밀린다팡하》는 서문(1편)과 본문(6편)을 합해 7편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반해, 《나선비구경》은 《밀린다팡하》의 1편(서문)과 2, 3편으로 이루어졌으나, 서문 부분은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밀린다팡하》의 나머지 4, 5, 6, 7편은 후대에 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성립과 편집에 관한 원전 비판의 연구 및 번역은 1880년 트렌크너(V. Trenckner)의 비평적 교정본의 출판을 계기로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선비구경》의 A본(2권본)과 B본(3권본)에 기초한 팔리문과의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

《밀린다팡하》는 원형 부분과 후세에 증광되고 부가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판명되었다. 혹은 이것을 고층과 신층의 두 부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원형 부분은 트렌크너본의 서문과 문답을 포함해 89페이지 부분이다. 이것은 앞에서 기술한 《나선비구경》과 거의 일치한다. 팔리본과 한역은 각각 유통 과정을 달리하고, 내용적으로도 세부적으로 서로 다른 점이 발견된다.

특히 후세에 윤색되고 부가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는 서문의 모습은 양자의 책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의 전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일본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씨는 원형의 성립을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로 잡고, 증광된 과정과 그 연대를 논증하고 있다.4)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씨는 이 책이 팔리어로 정리된 연대를 기원후 1세기 전반 또는 그보다 이전이라 한다. 그리고 처음에 서북 인도에서 제작되어 인도 동부의 마가다 지방에서 팔리문으로 개변되고 증광되어 스리랑카에 전해졌다고 본다.5)

2) 구성

이 책의 구성은 트렌크너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처음에 서문 부분(T. 1∼25)이 있다. 이 부분은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 두 사람의 전생 이야기(Ja?aka)에 해당한다. 밀린다 왕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 이야기와 나가세나 비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 이야기를 서술했다. 팔리본의 전생 이야기는 밀린다 왕이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책 이름이 《밀린다팡하》, 즉 《밀린다 왕의 물음》으로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한역 《나선비구경》은 나가세나(那先)의 전생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이 부분은 둘 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고층 부분(2, 3편)이 성립한 뒤에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본론에 들어가서, 나가세나 비구와 밀린다 왕의 대론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제1회의 대론은 T. 25∼64에 해당하고, 제2회의 대론은 T. 65∼89에 해당한다. 이 제1, 2회의 대론 부분이 고층이고, 또 《나선비구경》과 대응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신층 부분으로 난문(難問) 부분(T. 90∼326)이 있다. 난문이란 모순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여기서는 양도논법(兩刀論法)의 질문을 말한다. 그 다음은 추리에 관한 물음 부분(T. 329∼362), 비유에 관한 물음(T. 363∼4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맺는 말(T. 419∼420)로 이루어졌다. 이 마지막 부분에는 밀린다 왕이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한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가운데 《밀린다팡하》의 원형으로 보여지는 고층 부분에서 대론은 80여 개를 헤아린다. 그들 안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 점은 불멸 후의 부파교단이 가장 관심사로 삼은 문제―윤회와 무아의 관계―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논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4부 ‘모순에 관한 문답’(이하 T본 90 이하)의 증광 부분에서는 앞의 문제가 전혀 논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의 고층과 신층의 두 부분은 본래 문제 의식이 같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불멸 후 불교교단이 붓다를 찬탄하고, 또한 붓다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고 여법한 수행을 강조한 것은 이 책에서 고층과 신층 모두를 통해서 일반적인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고층 부분의 각 대론이 제각기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그리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생동감 넘치는 대론을 전하고, 또한 사흘 동안에 이루어진 대론의 결과 왕이 나가세나를 스승으로 부르고, 자기 자신을 제자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고 맺고 있는 점에서 보면 신층 부분과는 크게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

또 대론을 시작할 때 양자 사이에 정해진 대등한 입장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기본적 태도는 고층의 대론에서 일관되게 보이고 있고, 인도와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에 의한 수준 높은 대론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것 또한 신층 부분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그렇게 자주 대두된 대론의 공통 주제는 단연 윤회업보설과 그것과 무아설과의 관계에 대한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과 현실 경험을 중요시하고 존중하는 그리스인의 왕에게 매우 불가결했던 것은 인도사상 전체의 밑바탕에 흐르는 윤회의 사고와 불교인들의 무아설이라는 두 가지 점이고, 그리고 당시 부파불교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롭게 체계화하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왕은 알고 싶어했다. 고층 부분에서 왕이 던진 솔직한 의문점과 나가세나의 해결 방법은 오늘에 있어서도 불교사상 연구의 귀중한 하나의 문헌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다.

다음에서 열거하는 21개의 대론 주제를 보면 윤회설을 둘러싼 자아(영혼)와 무아에 대한 대론의 경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6)

이름에 대한 문답(T. 25∼28)

아난타카야의 그리스적 영혼관(T. 29∼31)

무영혼설(T. 54∼57)

영혼은 인정되지 않는다(T. 71)

영혼과 정신작용과의 구별(T. 86∼87)

무아설은 윤회의 관념과 모순하지 않는가(T. 40∼41)

다음 세상에서 생을 맺는 이유(T. 32)

다음 세상에서 생을 맺지 않는 이유(T. 32)

생사의 연속으로서 윤회(T. 77)

시작이 없는 윤회의 생존(T. 51∼52)

윤회생존이 성립하는 근거(T. 52)

윤회에서 명칭과 형태(T. 59)

업은 실재하는가(T. 72)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의식의 연속(T. 73)

윤회의 주체(T. 46-48)

다시 윤회의 주체를 묻는다(T. 49)

윤회와 개인 존재의 형성력(T. 52∼54)

윤회의 주체는 전이하지 않는다(T. 71)

윤회하는 다른 주체의 유무(T. 72)

죽은 뒤 재생하기까지의 시간(T. 82∼83)

재생(윤회)하지 않는 사람(T. 41)

이 가운데 1번은, 이 대론은 왕과 장로가 처음 만나서 교류했던 것으로 인격적 개체(pudgala)의 부인 곧 무아설에 관한 대론이고, 2번 이하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리스 왕이 불교의 무아설을 그리스적 무영혼설로 이해해서 비난하고 있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윤회 생존을 초극해서 해탈의 획득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불교가 무아, 무영혼, 무실체라고 설한 것은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왕의 기본적인 입장을 중심으로 왕이 추구하는 윤회의 관념과 윤회의 주체에 관한 질문과 그 해답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위의 문제에 기초하여 윤회설을 둘러싼 불교의 무아설과 그리스의 영혼설에 대한 대론의 내용과 취지를 파악해 볼 것이다.

2. 대론의 배경과 원칙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비구와 대론할 때 현자론에 근거하는 입장을 취했다. 거기에는 불교가 그리스인에게도 개방된 종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도는 계급 제도가 엄격한 나라이므로 외국인은 모두 오랑캐로 취급되고, 아우트 캐스트(Out-caste, 4성 계급 밖의 천민)에 속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외국인인 그리스인은 종교나 종교관이 다르다 해서 인도인으로부터 하천(下賤)계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오랑캐로 취급받는 그리스인이 인도의 사회와 문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바라문교 이외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불교는 교조 고타마 붓다 이래로 계급 제도를 배제할 것을 말해 왔다. 사성계급을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혈통이나 출신에 의해 존엄함이나 비천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평등하며, 각자의 행위가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이 그리스인에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환영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그 뒤, 적어도 이슬람 침입 이전까지는 인도에 침입한 여러 민족은 대부분 불교를 보호하고 또는 불교 신자가 된 예가 많았다. 따라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가 대론하는 근거를 고찰할 때도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조류를 고려해야 한다.

밀린다 왕은 제왕의 덕과 위엄을 가지고 통치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스스로 정의를 수호하는 왕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따르면, 그는 정의의 통치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대단히 두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유골을 여러 곳에서 나누어가고 또 그를 기념하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밀린다 왕이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다는 것은 《밀린다팡하》 첫 편에 그것을 입증하는 문답이 있다.

밀린다 왕이 말하였다. “존자여, 나와 대론(對論)하겠습니까?”

나가세나는 왕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대왕이여, 현자(賢者)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나도 응하겠습니다. 하지만 제왕의 권위로 대론을 원한다면 나는 응할 뜻이 없습니다.”

“존자여, 현자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설령 현자의 대론에서는 문제가 해명되고 해설되고 서로 비판되고 수정되고 반박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현자는 결코 성내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제왕으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제왕은 대론에서 대개 한 가지 것을 주장하고 한 가지 것만을 밀고 나가며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왕의 권위로 벌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알았습니다. 저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현자로서 스님과 대론하겠습니다. 스님은 비구나 사미나 신도들과 대론하듯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대론하십시오.”

“대왕이여, 좋습니다.”라고 하며 흔쾌히 동의했다.7)

여기서 나가세나 비구는 진정한 대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쪽의 일반적인 강압에 못 이겨 이루어지는 제왕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론 자유와 진리 탐구의 기치를 들어 양자가 대등하게 대론하는 현자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현자론이 대론의 기반이고, 이것이 전제되어 원만한 대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의 의견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대론할 것임을 동의하고 긴장감 넘치는 대론을 시작한다.

3. 불교의 무아설과 밀린다 왕의 영혼관

1) 실체로서 영혼의 부정

먼저 약간의 대화 안에서 간단한 것으로는 “영혼이 인정되는가?”라는 밀린다 왕의 질문에 대해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승의에서는 영혼은 인정되지 않습니다.”(T. 71)라고 대답한다.

다음의 유명한 문답에서는 이것을 구체적인 실례에 따라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이름에 관한 질문’을 시작한다.(T. 25 이하)

“존자는 어떻게 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대왕이여, 저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동료 수행자들은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는 나에게 나가세나(龍軍), 또는 수라세나(勇軍), 또는 비라세나(雄軍), 또는 싱하세나(獅子軍)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왕이여,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명칭, 호칭, 가명(假名),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인격적 개체(人格的 個體, 즉 육체 속에 있는 영원불변한 어떤 것, pudgala)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밀린다 왕은 5백 명의 그리스인과 8만 명의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름 속에 내포된 인격적 개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한다.

“존자여, 만일 인격적 개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에게 의복과 음식과 좌구와 약품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또 그것을 받아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5역죄(五無間業)를 짓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일 인격적 개체가 없다고 한다면, 공도 죄도 없으며, 선행 악행의 과보(果報)도 없을 것입니다. …… 그대는 나에게 말하기를 ‘승단의 수행 비구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존자여, 머리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대왕이여,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몸에 붙은 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살갗, 살, 힘줄, 뼈, 뼛골 …… 콧물, 관절액, 오줌, 뇌들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도, 그것들 전부도 모두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존자여, 물질적인 형태(色)나 감수작용(受)이나 표상작용(想)이나 형성작용(行)이나 식별작용(識)의 5온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들 색, 수, 상, 행, 식을 모두 합친 것(五蘊)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5온 밖에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여전히 ‘아니다’고 또 대답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가세나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자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나가세나는 없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했습니다.”

그때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대왕이여, 그대는 귀족 출신으로 호화롭게 자랐습니다. 만일 그대가 한낮 더위에 뜨거운 땅이나 모랫벌을 밟고 또 울퉁불퉁한 자갈 위를 걸어 왔다면 발을 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산란하여 온몸에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도대체 그대는 걸어서 왔습니까? 아니면 탈 것으로 왔습니까?”

“존자여, 나는 걸어서 오지 않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주십시오. 수레채(轅)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굴대(軸)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퀴(輪)나 차체(車體)나 차틀(車棒)이나 멍에나 밧줄이나 바큇살(輻)이나 채찍(鞭)이 수레입니까?”

왕은 이들 모두를 계속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합한 전체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왕은 여전히 ‘아니다’고 대답했다.

“대왕이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수레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수레란 단지 빈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타고 왔다는 수레는 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대는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전 인도에서 제일 가는 왕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거짓을 말씀했습니까?”

이렇게 물은 다음 나가세나는 5백 명의 그리스인과 8만 명의 비구들에게 말했다.

“밀린다 왕은 여기까지 수레로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했을 때 어느 것이 수레라고 단정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왕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5백 명 그리스인은 환성을 올리며 왕에게 말한다.

“대왕이여,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에게 다시 말한다.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 즉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반연(緣)하여 ‘수레’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모든 것, 즉 인체의 33가지 물질과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반연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의(勝義)에 있어서는 영혼 또는 인격적 개체(pudgala)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몇 개의 요소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됨으로써 개체 존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개체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에 의존하기 때문에 각 구성 요소를 떠나 특수한 실체로서의 인격적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 곧 밀린다 왕이 제기한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적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2) 밀린다 왕의 영혼관

그런데 이와 같은 영혼관은 그리스에는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인은 이와 다른 영혼관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이루어진 대론에서 나가세나가 밀린다 왕에 ‘나가세나라는 개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 그 다음날에 밀린다 왕과 대론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의 신하인 아난타카야가 나가세나에게 가까이 와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존자여, 제가 나가세나라고 할 때 그 나가세나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때 나가세나는 아난타카야에게 “그대는 나가세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아난타카야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나가세나라고 생각합니다.”(T. 30)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리스인은 옛날부터 인간의 생명으로서의 숨(asu)을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영혼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라는 말은 원래 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진실된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리스인 아난타카야는 곧바로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같은 견해는 채용하지 않는다. 나가세나는 곧바로 “그렇다면 만약 나간 숨이 돌아오지 않거나 들어온 숨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난타카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그러면 피리 부는 사람들이 피리를 불 때 그가 내 쉰 숨이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지”를 묻는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나가세나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때 아난타카야는 “저는 그대와 같은 논자(論者)와는 논쟁할 수 없습니다. 존자여, 그 뜻이 어떠한가를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승복하게 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불교의 입장에서 “호흡에는 영혼이 없다. 들이 쉬는 숨과 내 쉬는 숨은 신체의 계속적인 활동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현실에서 작용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동인(動因)으로서 잠세력(潛勢力, 形成力, sankhara)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 말은 또 현실로 형성된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혼과 같은 실체적인 원리를 부인하고 이와 같은 원동력을 상정하는 쪽이 적어도 영혼을 호흡으로 간주하는 그리스인의 통속적인 관념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불교의 영혼관, 곧 무아관(無我觀)은 어떠한가. 다음 대론은 그것에 관해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나가세나의 무아관은 밀린다 왕의 영혼관에 대립되는 의미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3) 불교의 무영혼설과 밀린다 왕의 영혼관

아비달마 불교9)는 무영혼설을 주장한다. 곧 실체로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린다 왕이 “존자여, 영혼(vedagu?이라는 게 있습니까?”(T. 54)라고 질문하였다. 그때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다. 그랬더니 왕은 “안에 있는 생명 원리(個我)는 눈에 의해 형상(色)을 보고, 귀에 의해 소리를 듣고, 코에 의해 냄새를 맡고, 혀에 의해 맛을 보고, 몸에 의해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에 의해 존재요소(法)를 식별합니다.

마치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동, 서, 남, 북 어느 창문(감각기관)으로든 내다보고 싶은 창문으로 내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내다보고 싶은 어느 문으로든지 내다 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다섯 개의 문에 관해서 말하겠습니다. 잘 주의해 들어주십시오. 만일 안에 있는 생명 원리가 대왕이 말씀하신 것처럼, 창문을 마음대로 고르듯이 눈에 의하여 형상을 볼 수 있다면, 눈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하나 하나에 의해서도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존재요소를 식별하는 것에서도 다른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어느 것에 의해서나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즉 한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경우를 다 지적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공세를 취하자 밀린다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눈은 현상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맛보고, 몸은 감촉해야 할 것을 감촉하고, 마음은 그 밖의 모든 대상을 식별한다고 말한다. 곧 여섯 개의 감각기관과 여섯 개의 대상과는 각각 대응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만약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이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무시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 선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창문과 감각기관을 비교하는 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창문을 모두 열어제치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큰 허공을 본다면 모든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의 문이 제거될 때에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모든 대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사상을 식별하는 것 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문들이 제거될 때 역시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밀린다 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나가세나는 계속해서 비유를 통해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그대가 말한 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여기 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고 합시다. 대왕은 ‘딘나가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말하자, 밀린다 왕은 ‘그렇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고 할 때 대왕은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하니, 대왕은 이번에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다시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어떤 맛을 지닌 것이 혀 위에 놓여졌을 때, 식별하는 개아는 그것이 시다, 짜다, 쓰다, 맵다, 떫다, 달다든지 하는 사실을 알겠느냐?”라고 하니, 대왕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그러면 맛을 지닌 것이 위 속으로 들어갔을 때도 개아는 맛을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대왕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나가세나는 ‘대왕의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점점 더 강하게 몰아친다.

“대왕이여, 가령 어떤 사람이 백 개의 꿀 접시를 꿀통에 쏟은 다음에 어떤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꿀이 가득 들어 있는 그 통 속에 던졌다면 통속에 던져진 사람은 단맛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왕은 ‘그 사람의 입 속으로 꿀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꿀맛을 느낄 수 없다’고 나가세나의 말에 수긍한다.

그러나 나가세나는 이에 멈추지 않고 대왕의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며 공격의 고삐를 더 움켜쥐었다. 그때 대왕은 그대와 같은 뛰어난 논자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 왜 그런지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아비달마론으로부터 도출된 이론으로 밀린다 왕에게 ‘눈과 형상에 의해 눈의 식별작용이 생기고 그밖에 접촉(觸)과 감수(感受)와 표상(表象)과 의사(思)와 통일작용(作意)과 생명력과 주의 등이 함께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들의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므로 거기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해 준다.

그런데 대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영혼과 신체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하는 것이었다. 나가세나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대왕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왕의 궁중 안에 있는 망고 열매는 신맛이 납니까 아니면 단맛이 납니까?”라고 물었다. 왕은 “궁중 안에는 원래 그 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과실이 단맛이 나는지 신맛이 나는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왕의 말을 받아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혼이 신체와 같은 것인지 같지 않는 것인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여기서 나가세나는 분명히 무영혼설의 입장에 서 있다. 원시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혼의 문제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넘어선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관해서 판단을 유보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들어서면 아비달마 불교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영혼에 대한 입장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영혼이란 그와 유사한 관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따져 물었다. “존자 나가세나여, 혹은 식별(識, vin???.a)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지혜(慧, pan???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생명체의 개아(命, bhu?asmin-j沖va, 정신적 자아, 곧 영혼)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본질과 글자가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본질은 같고 글자만 다릅니까?”(T. 86)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대왕이여, 식별은 구별해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분명히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지만, 생명체의 개아(영혼) 같은 것은없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질문한다. “만일 생명체의 개아와 같은 것이 없다면, 무엇이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으로 사물(法)을 식별합니까?”(T. 55)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만일 생명체의 개아와 같은 것이 있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식별한다면, 눈의 문(감각기관)이 제거될 때 개아는 머리를 밖으로 내놓고 더 큰 공간을 통해 전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귀나 코나 혀나 피부가 제거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전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감촉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나가세나가 주장하는 ‘신체 안에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에 동의를 나타낸 것이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식별이라든지 지혜라든지 하는 정신작용을 현상 형태로만 인정할 뿐, 그 배후에서 그것들을 움직이는 능동적인 실체, 곧 영혼을 상정하지 않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4. 윤회와 윤회의 주체 문제

1) 무아설과 윤회의 관념과의 관계

인도에서는 동일한 영혼 또는 인간의 주체가 이 세상에서 죽은 뒤에 다음 세상에 태어나고, 거기서 얼마 동안 생존하다가 또 죽어서 다시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 같은 무한한 생사를 반복한다는 윤회(sam.)의 관념이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신봉되고 있다. 불교도 또한 윤회사상을 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달마 불교에서 무아설의 입장에서 말하면 윤회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윤회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도의 일반 철학자들은 불교의 이런 어려운 점을 비판해 왔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윤회의 관념은 반드시 인도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고 그리스인들 사이에도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71∼500) 학파와 플라톤도 또한 윤회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인 일반을 지배하는 관념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 그리스적 사유에서는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사적 사정을 고려한다면 무아설에 의한 윤회라는 것은 많은 인도인보다도 그리스인에게 당연히 한층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인간이 죽은 뒤든 생전에든 관계없이 다만 현세의 현상만을 염두에 두고 인격적 개체가 동일한 것으로 존속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다. 둘째는 아(我), 인격적 개체(pudgala), 또는 영혼(vedagu? j沖va)이 죽은 뒤에도 동일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현재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밀린다팡하》에서는 이 두 문제는 한 곳에서 동시에 논하지 않고 따로 논해지고 있다. 먼저 첫째 문제에 대해서 밀린다 왕은 질문한다.

“존자 나가세나여, 재생하는 것은 다른 시기에서도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T. 40)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전통적 보수적 아비달마 불교의 무아설에 입각해서 “그것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인에게는 매우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밀린다 왕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실례를 들어 대답한다. “대왕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찍이 갓난애였고, 유약하였고, 꼬마였고, 등에 업혀 있었던 당신과 지금 어른이 된 당신과는 같습니까?” 그러자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와는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가세나는 이 대답 속에 모순이 내포해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고늘어진다. “대왕이여, 만일 당신이 그 어린애가 아니라면, 당신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선생도 없게 될 것이다. 또 학문이나 계율(戒律)이나 지혜도 배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왕이여, 잉태 후 첫 7일 동안의 어머니와, 셋째 7일 동안의 어머니와, 넷째 7일 동안의 어머니가 각각 다릅니까? 어릴 때의 어머니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어머니가 다릅니까? ……”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질문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나가세나는 “내 자신은 등에 업힌 연약한 갓난아이 적의 나와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 같습니다. 진실로 이 신체에 의존해서 이들 모든 상태는 하나에 포괄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그러나 왕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비유로서 설명해 보라고 한다.

“대왕이여, 여기에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타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한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한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각각 다르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모든 사물의 연속은 마치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같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면서 최후의 의식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또한 거기에 지속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우리 존재의 주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서, 결코 같은 상태를 갖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그리스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35∼475)는 “우리들은 같은 강물에서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우리는 있으면서 있는 것이 아니다.”13)라고 하였다.우리는 보통 같은 강물에서 목욕한다고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욕하는 사이에도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강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우리 자신도 있으면서 없다는 모순된 표현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인 에피카르모스(Epikharmos)는 감각되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격적 주체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와 이들 그리스의 철학자와는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의 관념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15) 그런데 불교는 이 영혼의 관념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피타고라스 학파 등은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포함되어 있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혼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6) 하지만 불교의 영혼관은 다른 학파들과 유사한 사상을 품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아의 윤회라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독특하다.

2) 윤회의 주체 문제

여기서는 앞에서 든 윤회의 문제 가운데 두 번째의 아(我), 인격적 개체, 또는 영혼이 죽은 뒤에도 동일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현재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에 관해 두 사람 사이의 대론을 살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 시기와 후 시기에서 같지 않으면서 같기도 하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와 같이 몇 생애에 걸쳐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의 주체는 옮아가는지 어떤지에 대한 대론을 살펴보자.

먼저 밀린다 왕은 도대체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T. 46) 하고 윤회의 주체에 관해 묻는다. 나가세나는 그것은 명칭(名, nama)과 형태(rupa)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명칭과 형태란 우파니샤드에서 현상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정리하여 표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왔다. 그것이 불교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다섯 가지 구성요소, 곧 5온의 체계로 정립되었다. 5온 가운데 명칭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으로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식별작용(識)의 넷을 의미하고, 이에 대해 형태란 인간의 물질적인 면, 특히 신체(色)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명칭과 형태의 근저에는 아트만(a?man)이라는 실체를 상정했지만 불교에서는 항상하고 불변하는 영혼이나 상주하는 주체를 부정하고 이와 같은 ‘명칭과 형태’만을 인정한다.

그런데 밀린다 왕은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로서 ‘명칭과 형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서 바꿔 태어납니까?”라고 질문한다.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명칭과 형태에 의하여 선이나 악의 행위를 하고, 그 행위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새로운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서 바꿔 태어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등불을 들고 자기 집 꼭대기 방으로 가서 식사를 하다가 잘못하여 등불이 지붕을 태우고 이어서 마을을 태웠다고 합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붙잡아 ‘당신은 어찌하여 마을을 태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니오. 나는 마을을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식사를 하기 위해 밝힌 불과 마을을 태운 불은 다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입씨름을 하다가 왕에게 가서 그렇게 말한다면 왕은 어느 쪽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존자여, 마을 사람들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대왕이여, 어째서 그렇습니까?”

“존자여,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마을을 태운 불은 그 사람이 식사하기 위해 사용한 불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현재의 명칭 형태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명칭과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두번째의 것은 첫번째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악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밀린다 왕은 그렇다면 악업을 받은 윤회생존의 주체는 옮아가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존자여, 사람이 죽은 경우에 윤회의 주체가 다음 세상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납니까?”(T. 71)

나가세나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왕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러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등불과 시(詩)를 비유로 들어 왕에게 반문한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하나의 등에서 다른 등에 불을 붙인다고 합시다. 이럴 경우 하나의 등이 다른 등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왕은 아직도 이것의 뜻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라고 한다.

“대왕이여, 당신이 어렸을 때 어떤 시인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기억할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당신에게 옮아온 것입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몸으로부터 다른 몸으로 윤회의 주체가 옮김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구성요소인 5온이 옮김 없이 그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윤회전생의 계기를 만드는 요인을 이루는 것은 업이고, 윤회생존인 우리의 개체는 업이 상속(相續)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업은 일반적으로 선인락과(善因樂果)라든지 악인고과(惡因苦果)의 응보를 한결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불교만 아니고, 인도의 다른 종교도 윤회설을 업의 응보 관념과 결합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런 응보설이 불교의 무아설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주체 내지 행위를 책임지는 항상하는 주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무아’라면 행위의 주체 내지 행위의 책임 소재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밀린다 왕은 무아설에 뒤따르는 난점을 몇 번이고 찔렀고, 이와 관련해 윤리적인 면에서 윤회전생의 이론에 관해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명칭과 형태’가 다만 타는 불처럼 주체의 연속으로서 계속 윤회한다는 것을 밝혀서 왕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항상 불변의 주체라든지 실체로서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나가세나는 전생의 주체가 상주하는 것이고, 따라서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신체 안에서 어떠한 윤회의 주체가 전이한다는 생각을 배척했다.

5. 맺는 말

우리는 오늘날 이런 말을 곧잘 한다. ‘불교는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쩐지 마음에 끌려 불교를 알고 싶어하고 불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교단을 보면 여러 점에서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나라 불교도는 거의 1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과연 그 많은 신도들 가운데 불교교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아니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물으면 그 대답이 어떻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런가.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일반 신행자가 모르는 불교교리를 스님이나 알만한 불교인들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고, 또 일반 신행자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요즈음 우리 나라 불교는 양적·질적으로 제2의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아주 번창하고 있다. 일주일이면 멀다 하고 학회도 열린다. 하지만 학회에서 발표되는 연구 성과물들이 불교를 종교로서 신행하는 일반 신도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문제만은 아니고, 불교 발생국 인도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특히 불멸 후 여러 부파로 쪼개지면서 다양한 이론을 내놓는 아비달마 불교 시대에서는 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의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인도에 들어와 인도 변경 지방을 통치하던 밀린다 왕도 그랬던 것 같다. 《밀린다팡하》는 바로 그런 시대적 사정을 반영한 책이다. 그 시대는 인도뿐만 아니고 그 서쪽 너머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거기서 밀린다 왕이 던진 질문들은 2천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역시 던지고 싶은 질문들이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들이다.

《밀린다팡하》를 읽노라면, 질문의 하나 하나가 조금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니 지금 내 자신이 밀린다 왕처럼 나가세나와 같은 해박한 선지식에게 질문해서 의문을 풀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바로 그리스인 왕에 의해 던져지고, 나가세나 비구에 의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 그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은 인도 일반의 특색이기는 하지만, 아비달마 교학처럼 학승들도 알기 어려운 불교교리를 굳이 빙빙 돌리지 않고, 아주 쉽게 해명하려고 하는 태도에 호감이 간다.

다만 2천여 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 나가세나의 대답 가운데는 우리들의 지성으로 수긍할 수 없는 설명도 물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대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 불교의 진수를 아는 데 아무런 불편 없는 훌륭한 대론서이고 대론 내용이다. ■

문을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논저서로 <기우다빠다의 불살생과 용수의 중도설><마야설의 불이일원론적 이해><인도의 사상과 문화><역서로 힌두교 입문><인도철학의 자아사상>등이 있다.

나선 비구경(밀린다 왕문경) 연구 | 대승경전/밀린다 팡하

『법화경』에 나타난 증상만(增上慢)의 사상적 연원과 그 정체성 고찰

차차석/동국대학교 불교학연구 제4호 (2002.6)

1. 서론

법화경의 핵심품인 방편품에는 오천명의 비구, 비구니,우바새, 우바이등이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려고 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는 장면이 나오며,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증상만의 무리라고 질책하며 말리지 않는다.

사리불존자가 세 번에 걸쳐 설법을 하여 주실 것을 청하며, 이에 설법을 시작하려고 하자 오천명의 사부중이 자리를 박차고 퇴장하는 것이다.

이에 세존께서는 그들을 죄근(罪根)이 깊고 무거우며, 증상만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므로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므로 구태어 말릴 필요가 없다고 하며 수수방관한다. 그리고 유명한 일대사인연을 설하게 된다. 물론 증상만에 대한 언급은 방편품 이외에 기타 여러 품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화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증상만이라는 무리는 단순하게 ....

『불교학리뷰(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18권(2015. 12) 49p~85p

범본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본 논문은 필자가 2015년도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의 제4장 <불보(佛寶)의 재해석: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 중 일부 내용에 다소 수정을 더하여 작성한 것이다.)하영수/(금강대학교)

[국문요약]

『법화경』 「여래수량품」은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중요한 교설을 설하는 품으로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나(=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경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은 한역 법화경에는 설해지지 않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본 논문을 작성한 계기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역과 범어본 사이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설정하여 이를 검토했다.

먼저 원문 추정을 시도해 보았다. 원문에 관해서는 크게 두 종류의 독법이

있음을 확인했는데,『법화경』의 두 한역인『정법화경』과『묘법연화경』의 독

법과 범어본『법화경』과 각종 범어사본, 그리고「법화경론」의 독법이 그것이

다. 그 중 범어본 자료들은 독법이 일치했는데, 모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경

문을 포함하고 있다.「법화경론」의 경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원문을

추정해 보았다.

이후 추정된 원문을 바탕으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

결과 ‘붓다의 보살행’이란 다름 아닌 구원성불한 이래로 전개해온 ‘붓다의 교

화행’을 지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교화행을 보살행으로 명명

하는 범본의 내용전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법화경』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설해진 배경에 대해서

검토했다.「법화경론」에서는 이를 본원(本願)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이는

핵심을 간파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이 교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붓

다의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교화라는 문맥을 보다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비화경』을 참고하여 검토했다.

이러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함의하는 바는 붓다의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그대로 그의 자비의 교화행을 의미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아울러 일체

중생을 성불로 이끌겠다는 붓다의 서원(誓願)은 ‘일불승(一佛乘)’의 지혜를

밝히는 일(「방편품」)과 ‘붓다의 부단한 보살행’(「수량품」)이라는 두 축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

종래에『법화경』은 구마라집의『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범어 사본을 교정한 비판적 편집본이 출간되면서『법화경』에 대한 연구

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범어본과 한역의 차이는 대개

근소한 것이며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

되기 쉽지만, 그러나 실제로 양자를 대조해보면 형식과 내용 면에 있어서 종종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러한 차이점이 경전의

중요한 교설과 직접적으로 관련될 경우에는 단순히 내용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경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해석학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

러한 문제를 「제16여래수량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은 「제2방편품」과 더불어『법화경』의 근본 교설을 담고 있는 품

이라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 밝

혀지는데, 붓다는 사실 현생에서 최근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득히 먼 과거세

에 이미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실성(久遠實成)’과 앞으로 남은 ‘수명’에 관

한 법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붓다의 구원실성과 수명에 관한 교설을 둘러싸고

두 한역(『정법화경』과『묘법연화경』)과 범어본에 확연한 의미상의 차이가 발

견된다. 두 한역에서는 붓다의 수명에 방점이 놓여 있지만, 범어본에서는 “나

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설하면서 붓다가 보살행을 행하고 있음을 강조

하고 있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낯설고 또한 교리적인 모순을 내포하는 것

으로 생각되는 내용이 범어본『법화경』에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역

과 범어본의 차이는 단순한 의미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도논사의 주석서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세친(世親,

Vasubandhu)의「법화경론(法華經論)」Saddharmapuṇḍarīkasūtra-upadeśa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는 점이다.「법화경론」은 범본은 산실되었고, 한

역으로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역「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

憂波提舍)」와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 역「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妙

法蓮華經論優波提舍)」2종만이 전해지는데, 두 번역 모두 「여래수량품」의 해

당 구절에 관해『묘법연화경』의 번역어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내용상으

로는 범어본의 독법을 지지하고 있다.

이로써『법화경』에 있어 중요한 교설을 담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

절에 관해 몇 가지 문제가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 설하는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원문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무엇을 함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절에 관해 원문을

추정하고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여래수량품」의 문제의 경문

「여래수량품」은 청중들에게 여래에 대한 믿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면서 시

작된다.1) 동일한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이에 대해 미륵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

살들이 여래에 대한 믿음을 보이면서 설법을 간청하기를 세 번 반복한 후에 설

법이 시작된다. 석가모니 붓다는 가야성 부근에서 이번 생애에 성불한 것이 아

니라, 사실은 수백천코티나유타의 겁 이전에 성불했다고 말한다.2) 이미 아득

한 과거세에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성불(久遠成佛)의 교설이다. 붓다는 오래

전에 성불한 이후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많은 세계에서

법을 설해왔고 또한 때때로 방편으로서 열반(죽음)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때때로 붓다는 중생의 선근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어릴 적에

출가하여 최근에 깨달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으나, 그와 같은 법문은 중생들

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한다.3) 그리고 여래의 방편은 진실한 것이

며 거짓말[虛言]이 아닌데, 그 이유는 여래의 교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생각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여래의 경계(如實知見)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

라고 설명된다.4) 그리고 본 논문에서 검토해보고자 하는 경문이 이어진다.5)

1)『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 諸善男子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

2)『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13): 善男子 我實成佛已來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3)『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3-c9).

4)『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2-13): 諸所言說 皆實不虛 所以者何 如來如實知見

三界之相.

5)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한 연구는 매우 적은 실정이다. 따라서 본문

중에 선행연구를 개관하지 않고, 다만 각주에 국내외 연구동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기

로 한다.

먼저 국내에서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아는 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

았다. 다음으로 해외의 연구동향을 언급하자면, 범어본 법화경에 대한 번역본 중에서 Kern의 영

역, 土田와 岩本의 일역, 그리고 松濤의 일역 등에서 범본의 표기대로 해당구절을 번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 Kern 1963, 302.; 土田&岩本-下

1965, 21.; 松濤-Ⅱ 2001, 109-110. 그러나 이러한 번역본에서 구체적인 해설이나 논의를 하고 있

지는 않다. 필자가 아는 한 다음의 두 연구에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田村芳朗의『법화경』해설서에서는 붓다가 보살행을 하고 있으므로『법화경』에서 보살

행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부터『법화경』의

중심사상에 기존의 진리(방편품), 생명(수량품)과 더불어 실천(보살행)을 포함시켜 이를『법화경』

의 3대사상이라고 해설한다. 그러나 그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문제를 그 특이성과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간명하게 언급하고 있어, 심도 있는 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田村 1969, 115ff.

두 번째 연구로는 松本史朗의 「久遠實成の佛について」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 논문은

필자가 아는 한 「여래수량품」의 해당 경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연구이다. 또한 필자

가 이 문제에 착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논문이기도 하다. 松本는『정법화경』『묘법연화경』이라

는 기존의 한역과 세친의「법화경론」을 대조하고, 여기에 범어본 및 범어사본을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본 논문에서 범어 원문을 추정하기 위해 채용한 방법은 松本가 그의 논문에서 취한 방법

과 같다. 필자는 여기에 범어본 자료를 더욱 보강하여 논의를 전개했다. 松本와 필자는 문헌 활용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법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범어본

에 誤記가 있다고 보고,『묘법연화경』의 독법을 지지한다. 자세한 내용은 松本 2012, 243-254.

문제의 경문

[1]『묘법연화경』: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T.9, 42c22-23)

[2]『정법화경』: 又如來不必如初所說 前過去世時行菩薩法 以爲成就壽命限也. (T.9, 113c23-25)

인용문 [1]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이 주어, “今猶未盡”이 술어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해석은 “내가 본래

행했던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지금도 오히려 끝나지 않았다”가 될 것이

다. 위 번역문은 과거에 행했던 보살도라는 인행(因行)에 의해 수명을 얻었는

데(所成壽命), 그 수명이 지금도 다 끝나지 않았음(今猶未盡)을 밝히고 있다

고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중점은

수명에 있으며, 문장의 부정어가 “未” 하나라는 점이다.

한편,『정법화경』의 한역은 번역이 쉽지 않으나, 이를 시도하면, “또한 여래

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 이전의 과거세 때에 행했던 보살법으

로 성취한 수명의 한도(限)를 삼는다”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앞 문장

“또한 여래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의 부분은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방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생이 선근

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방편으로 “젊을 때에 출가하여 깨달았다”6)고

설한다고 하였는데, 약 2500년 전에 출현하여 29세에 출가한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 역시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실제 성불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므로, “처음 설한 것과는 다르다”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뒤

의 “前過去世”로 시작되는 문장은 붓다의 수명이 과거에 보살법(보살행)에 의

해 성취한 것을 한도로 삼는다고 하여, 붓다의 수명이 보살행에 의해 결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여래가 처음 설한 바, 즉 보드가야에서 최근에야 깨달음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여래의 수명의 한도는 과거의 보살행에 의해 결정(성취)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 [2]

역시 붓다의 실제 수명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보살행을 행했다는 설명을 덧

붙이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붓다의 수명(成就壽命)에 중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문장 전체의 부정어가 “不” 하나이다.

6)『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7): 我少出家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한역의 번역이 의미상 반드시 일치하

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두 번역문 모두 붓다의 실제 수명에 방점이 있

으며,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하나의 부정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법화경』에 대한 세친의 주석서「법화경론」(보리유지 역)에서 해당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3]「법화경론」: 내가 전생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은 [내가 세웠던] 본원 때문이다. [제

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다 채워지

지 않았다고 하는 것(言未滿者)이 깨달음을 완전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非謂菩提不滿足). 이룬 수명이 또한 앞의 수의 두 배라는 것(所成壽命

倍上數者)이란, 이 문장은 여래의 수명이 영원함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다. 뛰어

난 방편으로 많은 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7)

7)『묘법연화경우바제사』권2 「제3비유품」(T.26, 9b27-c2):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衆

生界未盡 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也 所成壽命復倍上數者 此文示現如來命常 善巧

方便顯多數故.

「법화경론」의 두 번역본은 어구의 가감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본 논문에서 문제로 삼는

‘보살행’에 관해서는 번역이 일치한다. 늑나마제 역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권1 「제3비유품」(T.26, 19a2-6):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眾

生界未盡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故 所成壽命復倍上數者 示現如來常命方便顯多數

過上數量不可數知故.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이『묘법연화경』의 원문에 해당하는데, [1]의

인용문에서 “今猶未盡”이 “今猶未滿”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묘법연

화경』의 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의를 끄는 것은「법화경론」의

주석은 번역어에 있어『묘법연화경』과 거의 일치하지만, 문장의 구성과 내용

이 다르다는 점이다.『묘법연화경』은 “과거에 보살도를 행함으로 얻은 수명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반해,「법화경론」에서는 “내가 전생

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즉,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술어의 주어가『묘법연화경』에서는 ‘수명’으로 되

어 있고,「법화경론」에서는 ‘보살도’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법화경론」에

서는 과거에 행한 보살도가 다 완수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내가 세웠던] 본

원 때문이다.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

은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서,8) 그러나 이것이 보리(bodhi), 즉 깨달음을 완전

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所成壽命)이 위의 수의 두 배라고 주석하고 있다(復倍上數).

즉『묘법연화경』에서 [과거에 성취한]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

던 하나의 문장을,「법화경론」에서는 ① 보살행이 다 완수되지 않았고, ② [보

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所成壽命)이 두 배가 남았다고 하여, 두 가지 내용

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①의 내용은 교리적으로

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붓다란 과거세에 본원

(本願, 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보살도를 완성하였

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붓다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인데, ①의

내용은 성불한 붓다의 보살행이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여, 교리적인 혼

선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법화경』,『묘법연화경』,「법화경론」이 각기

내용이 서로 다르고, 교리적으로도 혼란이 예상되는 이 경문을 범어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8) 번역은 大竹晋 2011, 86-88을 참조.

[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a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SP, p.319,2-3)

위 범어문은 Kern&Nanjio 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번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

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이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api)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ṇam).9)

9) 번역은 松濤 2001, 109-110 참조. 괄호 안의 보충은 필자에 의함.

인용한 범어문은 두 가지 사실, 즉 ①과거세에 행했던 보살행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과 ②수명의 양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

고 있다. 위에 인용한 범문 [4]가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과 수명이라는 두 가

지 내용을 설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말로 “~도”라고 번역할 수 있는 “api”가

위 문장 안에 두 번 나온다는 것에서도 예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위에 인용

된 범문은「법화경론」의 인용(인용문[3])과 내용적으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

다. 다만 인용문[3]에서 마지막의 “復倍上數”는 범문의 이어지는 문장에, “그

리고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수명이 다 만료되기까지

는 그 두 배(tad-dviguṇa, 復倍上數)의 수백·천·나유타의 겁이 남아 있다”10)

라는 문장을 앞 문장과 연결시켜서 주석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두 개의 한역과 주석서「법화경론」중에서 현존하는 범문과 가

장 가까운 것은「법화경론」임을 알 수 있다.

10) SP. 319, 3-4: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

다고 하는, 매우 생소하고 교리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위 문장

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11)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위의 문장을 억지로 교리적으로 맞도록 번역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 경문의 범어원문의 형태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필자는『정법화

경』『묘법연화경』이 아닌, 지금의 범문, 그리고 범문과 거의 흡사한「법화경

론」의 해당번역을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먼저 범어본의 사본 등을

통해 살펴본 후에, 경전의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독법의 타당성을 제시

하도록 하겠다.

3. 범어본에 의한 해당 구절의 재해석

1) 범어본에 의한 원문 추정

『법화경』은 중앙아시아나 네팔 등에서 많은 범어 사본이 발견되었고, 현재

사본을 로마자로 전사(轉寫)하여 출판한 판본들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여기

서는 교정본과 전사본들의 표기를 확인해보도록 한다.

-교정본-

① Kern&Nanjio 본과 더불어 널리 활용되는 Wogihara&Tsuchida 교정본은 다

음과 같다.12)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2) SP(WT). 1958, 271,16-272,1.

② Dutt가 중앙아시아의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3)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3) Dutt, Nalinaksha 1953, 209,15-16.

③ Vaidya가 네팔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4) Vaidya, P.L. 1960, 290,27-28.

세 개의 교정본은 구절의 띄어쓰기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구문 전체에

대한 독해는 모두 Kern&Nanjio의 인용문 [4]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사본류

에 관해서는『법화경』사본의 주요 출토지인 카시미르, 중앙아시아, 네팔계통

의 사본 독법을 제시하도록 한다.

-사본류-

① Watanabe Shoko(渡辺照宏)가 Gilgit에서 발견된 사본을 교정하여 로마자로

전사(轉寫)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ī pariniṣpāditā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5) Watanabe, Shoko 1975, 113,11-12.

② Toda Hirohumi(戸田博文)의 중앙아시아 사본 로마나이즈본은 다음과 같다.16)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ū)r(v)i(kā )yuṣpramāṇam api me kulaputrā

aparipūrnam/

16) Toda, Hirohumi 1981, 156.

③ 네팔계 사본을 중심으로 집성한 Toda에서는 18개의 사본이 거의 일치한다.17)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7) Toda, Hirohumi 1994-2002, Vol.Ⅶ, 4-7.

먼저 ①에 관해서 말하자면, 와타나베는 자신의 전사본에서 위와 같이 표기

를 하고, 각주에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로 읽어야 한다고 추가하고 있다.18) 이를 해석하면 “과거의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독해가 한역의 “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과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와타나베는 위의 전사본을 출판하기 전에 사본의 위 구절에 대한 독해방

식을 문제로 삼아 논한 적이 있다.19) 와타나베는 사본의 위 구절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표하면서, 이를 위와 마찬가지로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으로

읽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해가 사본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는다고 부연하고 있다.20)

18) Watanabe, Shoko 1975, 113의 각주12) 참조.

19) 渡辺照宏 1970, 85-86.

20) 위의 책, 같은 곳.

②의 특징은 “me kulaputrā”가 두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 구

절에 두 개의 문장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나에게 선남자들이여(me kulaputrā)”

와 같이 문장을 이끄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행해오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음’과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두 가지 내용이 설해

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③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체 18개의 사본 중에서 15개의 사본이 위의 독해

와 일치한다. 그리고 15개 중에서 10개의 사본이, “pariniṣpāditā”와 “āyuṣpramāṇam”

사이에 단다(“/”)를 넣어, 이 구절을 두 가지 내용이 설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3개의 사본에 이독(異讀)이 보이는데, 문장 후반부의

“apy aparipūrṇam”가 “adhy aparipūrṇam”으로 되어 있는 사본이 1개, “asya

paripūrṇam”의 형태를 보이는 사본이 2개 있다. 여기서 adhy aparipūrṇam의

“adhy”는 의미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apy의 오기(誤記)로 생각되며, asya

paripūrṇam의 “asya”는 ‘s’가 ‘p’와 유사하므로, “apy+a(paripūrṇam)”의 오

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교정본과 사본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자면 현존하는 교정본과

사본들은 모두 인용 [4]의 범어문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타나베는

이 구절이 함의하는 교리적 특이성으로 인해 사본의 표기에 의문을 표하면서

『묘법연화경』의 문의(文意)와 통하는 독법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독해는

자신이 밝히고 있듯 사본에 의해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문

[4]에 대한「법화경론」의 주석방식의 특이점을 상기할 볼 필요가 있다. 보리류

지 역과 늑나마제 역과 모두『묘법연화경』의 번역어 “我本行菩薩道所成壽

命”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주석에 있어서는 “我本行菩薩道”와 “所成

壽命”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를 해석하고 있다. 이는 곧 두 역자가 번역어에

관해서는『묘법연화경』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되, 독해에 있어서는『묘법연화

경』의 이 구절을 오독(誤讀)으로 보고 이에 따르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첫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두 부류의 독법이 존재한다. ① 현

존하는 범어본의 교정본과 사본들 그리고「법화경론」의 독법과 ②『정법화

경』『묘법연화경』의 독법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현존하는 범어 사본과 교정

본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한역「법화경론」의 독법도 이를 지지하므로 범

어본의 독법을 필사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오류라고 보기 어려우리라 생각된

다. 따라서 범어본 『법화경』의 해당 경문은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로써 「여래수량품」 해당 경문의 원문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거의 모든 사본이 일치한다는 점으

로부터, 범어본을 통해『법화경』을 읽고 신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해되었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

정할 수 있다.「법화경론」의 두 번역본이 오역(誤譯)이 아니라면, 이 점은 한역

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논의에 의해 「여래수량품」에서 묘사되는 붓다에 대해 ‘석가모니 붓

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입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과연『법화경』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고,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한다.

2) 「여래수량품」 문맥의 재구성

‘붓다의 보살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미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붓다가 여

전히 보살행을 한다는 이 낯선 교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이 교설, 붓다의 보살행이 설해진 인용문[4]를 중심으로 그

전후 문맥을 재구성해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4]

앞에서는 구원성불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고, 인용문[4] 이후에는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적 붓다에 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둘을 각기 ‘구원실성불(久

遠實成佛)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으로 나누어 검토

하도록 한다.

(1) 구원실성불(久遠實成佛)의 보살행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먼 과거에 이미 성불했다는 사실이 밝

혀졌는데, 이러한 구원실성의 붓다가 인용문 [4]에서 보살행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고 설하였다. 이 표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이미 깨달

음을 이룬 붓다가 구원성불한 후에 실제로 어떤 활동을 펼쳐왔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구원실성불의 구체적인 행적에 관해서는 마츠모토 시

로(松本史朗)의 연구가 유용하다.21)

21) 松本, 앞의 논문 참조.

마츠모토는 그의 논문 전반에 걸쳐 구원실성의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가

대비적으로 이해되거나, 구원실성의 붓다에 대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이해하

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다. 마츠모토는『법화경』에 제시된 구원실성의 붓다가

과거에 깨달음을 얻은 장소가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의 보리수 아래”임을

다음의 경문을 들어 밝히고 있다.22)

22) 경문 [5]와 [6]은 松本의 위 연구에 인용된 것이다. 위의 논문, 243-244.

[5] 아지타(아일다=미륵)여, 나는 이 사바세계에서 무상정등각을 깨닫고서, 이 모

든 보살 마하살들(=종지용출의 보살들)을 무상정등각을 향하여 교화하고, 고무시

키고, 환희케 하고, 교도(敎導)한 것이다.23)

23) SP. 309,4-6: mayaite ajita sarve bodhisattvā mahāsattv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āv anuttarāṃ

samyaksaṃbodhim abhisaṃbudhya samādāpitāḥ samuttejitāḥ saṃpraharṣitā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 pariṇāmitāḥ /

『묘법연화경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a2-3): 是諸大菩薩摩訶薩 無量無数阿僧祇 從地涌

出 汝等昔所未見者 我於是娑婆世界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 敎化示導是諸菩薩.

[6] 그리고 나는 가야(성)에 있는 그 나무(보리수)의 뿌리 부근에서 무상의 법륜을

굴리고서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이 최상의 보리를 위해 숙련시켰다.(게송 42)

너희들 모두 나의 번뇌로부터 자유롭고(無漏), 진실한 말을 듣고서 나를 믿으

라. 나는 그와 같이 오래 전에(evaṃ ciram) 최상의 보리를 얻었으며, 그리고

그와 같이 오래 동안(evaṃ ciram) 나는 그들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무

상정등각을 향하여] 숙련시킨 것이다.(게송 43)24)

24) SP. 301,9-12: mayā ca prāpya imam agrabodhiṃ nagare gayāyāṃ drumamūli tatra/

anuttaraṃ vartiya dharmacakraṃ paripācitāḥ sarvi ihāgrabodhau//42//

anāsravā bhūta iyaṃ mi vācā śruṇitva sarve mama śraddadhadhvam/

evaṃ ciraṃ prāpta mayāgrabodhi paripācitāś caiti mayaiva sarve//43//

『묘법연화경』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b23-28): 我於伽耶城 菩提樹下坐 得成最正覺 轉無上法輪

爾乃敎化之 令初發道心 今皆住不退 悉當得成佛 我今說實語 汝等一心信 我從久遠來 敎化是等衆.

위 경문에서 붓다의 성불이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장소는 경전에서 붓다가 아

주 먼 과거세에 성불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종지용출의 보살들을

교화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 경문들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즉 붓다가 성불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행한 것은 주로 설법을 통한 중생의 교화

(samādāpana)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원실성불의 교화는 매우 다양

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7] 이때부터 줄곧 나는 선남자들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수백·천·코티·나유타의 세계에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시해온 것이다.25)

25) SP. 317,9-10: yataḥ prabhṛty ahaṃ kulaputr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au sattvānāṃ dharmaṃ

deśayāmi anyeṣu ca lokadhātukoṭīnayutaśatasahasreṣu/

『묘법연화경』권 5 「제16여래수량품」(T.9, 42b26-28): 自從是來 我常在此娑婆世界說法敎化

亦於餘處百千萬億那由他阿僧祇國導利衆生.

위 인용문에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구체적으로는 앞의 ‘오백진점겁(五百

塵點劫)’의 비유를 지시한다. 오백진점겁이란 석가모니 붓다의 성불과 수명이

라는 시간적 문제를 공간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비유인데, 그 내용은 오백천

만억나유타로 표현되는 무한에 가까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루

로 만들어 가루 하나를 일겁(一劫)으로 치더라도 붓다가 성불하고서 경과한

시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26) 따라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아주 오래

전에 성불한 이래로 계속해서’라는 의미가 된다. 즉 구원(久遠)에 성불한 이후

붓다는 사바세계와 다른 수많은 세계에서 중생에게 법을 설해왔다. 그리고 헤

아릴 수 없이 오래전에 성불한 이후 계속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가운데, 때때로

열반(죽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설해진다.

26)『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 T09, 42b11-26.

[8] 그리고 또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계속해서 찾아오는 중생들의 능력(indrya)

과 지혜의 높고 낮음, 정진을 시작한 [시간의] 길이를 관찰하고서, 곳곳에서(각각

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완전한 열반

(parinirvāṇa)을 선언하였으며, 그리고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중생들을 다양한 법

문으로 만족시켰던 것이다.27)

27) SP. 317,13-318,1: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ḥ tathāgata āgatāgatānāṃ sattvānām indriyaparāpara jñatāṃ vīryārabdhimātratāṃ vyavalokya tasmiṃs tasminn ātmano nāma vyāharati

tasmiṃs tasmiṃś cātmanaḥ parinirvāṇaṃ vyāharati tathā tathā ca sattvān paritoṣayati

nānāvidhair dharmaparyāyaiḥ/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5): 諸善男子 若有衆生來至我所 我以佛眼 觀其

信等諸根利鈍 隨所應度 處處自說 名字不同 年紀大小 亦復現言當入涅槃 又以種種方便說微妙法

能令衆生發歡喜心.

위 인용문에서 붓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를 했는데 색신(色身,

rūpakāya)의 소멸, 즉 육체적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완전한 열반(parinirvāṇa,

般涅槃)도 그의 교화 방법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붓다는 헤아릴 수 없이 오

래 전에 성불을 이룬 이후로 계속해서 중생을 제도해 왔는데, 때때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붓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다음의 경문을 보도록 한다.

[9] 실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여래가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토록 오래전에 깨닫고, 헤아릴 수 없는 수명(ayuṣpramāṇa)을 가지고 항상(sadā)

머물러 있었으며, 여래는 열반에 든 적이 없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완전한 열

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28)

28) SP. 318,14-315,1 : yad dhi kulaputrās tathāgatena kartavyaṃ tat tathāgataḥ karoti/ tāvac

cirābhisaṃbuddho 'parimitāyuṣpramāṇas tathāgataḥ sadā sthitaḥ/ aparinirvṛtas tathāgataḥ

parinirvāṇam ādarśayati vaineyavaśena/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9-21): 所作佛事 未曾暫廢 如是我成佛已來 甚大

久遠 壽命無量阿僧祇劫 常住不滅.

위 인용문은 붓다가 중생 교화를 위해 열반에 들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열

반에 든 적이 없으며, 언제나 상주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붓다의 열반이 소멸이 아니라 교화의 한 방편(方便, upāya)이라는 점이

다. 이상의 경문들은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실제로 열반에 들지

않고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하는 붓다의 이미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인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자면, 위의 인용문 [7]

[8] [9]는 모두 인용문 [4]의 앞의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 인용문 [7]은 “그때부

터 줄곧”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백진점겁에 비유될 만큼 먼 과거에 성

불을 이룬 붓다의 교화활동이 시작된 시기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인용문 [9]

는 인용문[4]의 “나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구절 바로 앞의 문장이다.

따라서 인용문들의 내용을 정리하면, 앞에서 오백진점겁에 비유되는 아득한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나서, 이 시기부터 계속해서 교화활동이 지속되었

음을 인용문[7]이 설명하고, 인용문 [8]에서 때때로 과거에 열반에 들었음을

설하나, 인용문 [9]에서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상주하여 법을 설함을 밝

히고, 마지막에 인용문 [4]에서 앞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이를 “나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문[4] 앞에 내용은 모

두 과거에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붓다가 펼쳤던 다양한 ‘교화행(敎化行)’을 지

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로부터 펼쳐왔던 다양한 교

화행을 인용문[4]에서 “나의 보살행(菩薩行)은 끝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밝

히고 있다. 즉 과거로부터 행해왔던 ‘교화행’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용문[4]의 맥락인 것이다.

(2)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

석가모니 붓다가 구원성불한 이래로 쉼 없이 중생을 교화한 것을 붓다 자

신이 보살행으로 규정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현재불, 그러니까 지금

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인도에서 출현하여,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아래에

서 최근에 성불한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0]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은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

ṇam). 그런데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앞으로도(adyāpi)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기까지 그것(지금까지의 수명의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수백·천·코티·나

유타의 겁이 남아있다. 실로 또한 나는 지금(idānīm) [실제로는] 결코 완전한 열반

에 들지 않음에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고 선언하는 것이다.29)

29) SP. 319,2-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

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idānīṃ khalu

punar ahaṃ kulaputrā aparinirvāyamāṇa eva parinirvāṇam ārocayāmi/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22-24):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

盡 復倍上數 然今非實滅度 而便唱言 當取滅度.

위 인용문에는 가야성 부근에서 최근에 성불한 붓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의 수명과 열반에 대한 교설이 담겨 있다. 우선 석가모

니 붓다의 남은 수명에 관해 구원에 성불한 이후 현재까지 아직 그 수명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은 인용문 [4]에서 설해진 바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앞으로 남은 붓다의 수명은 그것의 두 배(taddviguṇa)가 더 남아 있다고 설해

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붓다의 수명을 설명한 그 다음의 문장인데,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지금(idānīm)”이라는 단어이다. “지금(idānīm)”

이란 말은 과거세에 이미 성불을 이룬 붓다가 선언한 열반에 대해 대비적으로

사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지금”이란 말은 곧 “바로 이번 생에

있어서”의 의미이며, 직접적으로는 「제11견보탑품」에서의 열반에 대한 선언

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30) 그리고 열반에 든다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는 인

용문[9]에서 그 의미가 밝혀졌듯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을 보여줄 뿐,

실제로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머무르며 중생교화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의도하고 있다.

30)『묘법연화경』권4 「제11견보탑품」(T.9, 33c13-14): 誰能於此娑婆國土廣說妙法華經

今正是時如來不久當入涅槃.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의 주요 내용을 인용문[4]를 중심으로 하여 구원실

성불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의 보살행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해보았다. 결론

을 말하자면, 구원성불한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의 보살행은 동일하며, 그 핵

심은 중생에 대한 교화, 즉 ‘교화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해 항상 상주하며 법을 설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방편으로 중생을 돕는다. 그와 같이 구원성불한 이래 무수

한 시간동안에 걸친 ‘교화행’을 인용문[4]에서 붓다 자신이 ‘보살행’이라고 불

렀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중생에게 법을 설하고, 또한 과거와 똑같은 방

식으로 중생교화의 일환(一環)으로써 열반을 보여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

고 붓다에게는 앞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남아있다. 과거에 행했던 교화

활동을 붓다 스스로가 보살행이라고 불렀으므로, 가야근성불의 교화행도 마찬

가지로 보살행이 된다. 따라서 붓다의 보살행은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

에까지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상에서 범어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을 한역의 그것과 비교하여 검

토해보도록 한다. 범어본의 내용전개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로 다양한 중생교

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그 교화행을 가리켜서 보살행이라 부르면서 앞으로

도 수명이 매우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 수명 동안에 붓다의 교화행, 즉 보살행

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역의 경우에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

로 다양한 방식으로 교화행을 펼쳐왔음을 설하고서, “내가 과거에 행한 보살

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今猶未

盡)”는 흐름이 된다. 그 경우에, 앞에서 자세하게 과거의 ‘교화활동’을 설명하

다가 갑자기 ‘보살도에 의해 성취한 수명’ 문제로 넘어가게 되므로 내용전개가

매끄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직전의 내용은 분명히 구원에 성불했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구원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을 언

급한다면, 과거에 성불했다는 내용과 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을 했다는 두

개의 과거사(過去事)가 등장하므로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여

래수량품」의 내용전개는 먼저 서두에서 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

히고, 그 오랜 시간동안 붓다 자신이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교화했음을 설명

하고, 그것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고, 앞으로도 수명이 그에 두 배가 넘게 남

았으므로, 자신의 교화행/보살행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범어본의 내

용 전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것이 「여래수량품」의 문맥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해가 적어도 범본을 중심으로『법화경』을 이해해온 사람

들에 의해 지지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4. 석가모니 붓다의 현재진행형 보살행

1) 석가모니 붓다의 서원과 예토성불-비화경의 설명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에서 언급되는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검토

해보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법화경』에는 다른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독특한 교설이 설해지고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 [3]의「법화경론」에서는 “본원(本願)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중생계가 다하지 않으니 원(願)이 궁극적으로 끝난 것

(究竟)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bodhi)가 다 구족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법화경론」에서는 붓다의 보살행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시절에 세웠던 본원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31) 붓다는 보리(bodhi)를

성취했지만,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한량없는 중생을 성불로

이끌기 위해 보살 때 세웠던 원행을 계속한다는 해석은 경전의 문의(文意)를

잘 드러내는 탁월한 주석으로 생각된다.

31)『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은 모든 중생이 붓다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본원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묘법연화경』권1 「제2방편품」(T.9, 8b4-7):

舍利弗當知 我 本立誓願 欲令一切衆 如我等無異 如我昔所願 今者已滿足 化一切衆生

皆令入佛道.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중생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붓다가 보살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고 한다면, 이는 다른 불국토의 붓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

문이다. 즉 서방 극락(極樂, Sukhāvatī)정토에서도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아

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 역시 쉼 없이 보살행을 행해야 할 것이고, 동방

묘희국(妙喜國, Abhirati)의 아촉불(阿閦佛, Akṣobhya)도 마찬가지일 것이

다.32) 따라서 모든 불국토의 붓다들은 예외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교

리가 성립할 것이며, 그러한 교리가 불교의 교리사에 있어서 이미 정설로서 확

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체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리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붓다의 보살행을 본원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법화경론」의

주석은 어떤 특정한 맥락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그 작업은 무엇보

다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 시절에 세운 본원이 어떤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가

에 대해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32) 붓다와 그들의 국토에 관해서는 다음의 저서들을 참조. 시즈타니 마사오·수구로 신죠 2008,

199-210.; 폴 윌리암스·앤서니 트라이브 2009, 269-274.

석가모니 붓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로 예토(穢土)에서의 성불과 중생교화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화성유품(化城喻品)」에는 대통지승(大通智勝, Mahā-

abhijñājñānābhibhū)여래의 아들인 16왕자들이 대통지승여래에게 출가하여

법을 청문하고 성불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석가모니 붓다는 예토인 사

바세계에서 성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33)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성불

및 중생교화의 인연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경전으로『비화경(悲

華經)』을 들 수 있다.

33)『묘법연화경』권3 「제7화성유품」(T.9, 25c5-6): 第十六我釋迦牟尼佛 於娑婆國土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비화경』의 범어 경전 제목은 Karuṇāpuṇḍarīka-sūtra이다. 제목에서 karuṇā

는 자비, puṇḍarīka는 연꽃들 중에서도 흰 연꽃(白蓮)을 의미하며, 따라서 경

전 제목은 ‘자비(慈悲)의 흰 연꽃(白蓮)에 관해 설하는 경전(經)’으로 풀이될

수 있다.『비화경』에는 총 4종류의 한역이 있다고 전해지는데,『비화경』의 원

형으로 추측되는 축법호 역의『한거경(閑居經)』(1권), 역자불명의『대승비분

타리경(大乘悲分陀利經)』, 도공(道龔) 역『비화경』, 담무참 역의『비화경』(10

권)이다.34)『정법화경』을 번역한 축법호가 이 경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한

거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는 경전의 내용을 상세히 소

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사전의 해설로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비화경』에 대한

「大乘經典解說事典」의 내용 소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정토에서 깨달은 붓다임에 반해, 『비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이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깨닫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

석가모니불이 대비(大悲, mahākaruṇā)의 보살임을 찬탄하는 것이 주제이다.35)

35) 勝崎裕彦 외 3인 편 1997, 232f.

『비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과거 보살이었을 시기에 500가지의 서원

(誓願)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경전에 그 구체적인 항목들이 소개되지는 않지

만, 요점은 그의 본원(本願, pūrvapranidhāṇa)이 정토(淨土)가 아닌 예토(穢

土)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과거 보살

이었을 시절에 정토(淨土)에서 성불할 것을 서원했는데 반해, 석가모니의 전

신인 보해(寶海, Samudrareṇu)보살은 예토, 그 중에서도 번뇌가 가장 치성한

사바세계에서 성불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의 붓다인 보장(寶藏, Ratnagarbha)여래는 보해보살의 자비심을 크

게 칭찬하여, 그를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고 부른다.36)『비화경』은 석가모

니 붓다가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게 된 인연이 그의 본원에 의한 것

이며, 그 본원은 그의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36) 위의 책, 같은 곳.

필자는 석가모니 붓다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중생제도가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과 관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토의 중생을 제

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행(因行)으로 성취한 과보를 향유할 여유도 없이, 쉼

없이 중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대단히 수고스럽고 어려운 일이다.『법화경』에

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중생에게] 여러 선근이 생기도록, 여러 인연과 비유와 온갖 말로써 가지가지

법문을 하는 것이니라. 붓다로서 해야할 일을 지금까지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느

니라.37)

37)『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7-21): 欲令生諸善根 以若干因緣 譬喻

言辭種種說法 所作佛事 未曾暫廢.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헌신하는 석가모니 붓다

의 교화는 철저하게 이타행으로 일관된 것이며, 이는 대자비심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이타행은 문수보살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일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의 관념과도 유사성이

인정된다.38) 예를 들어 문수보살은 본래 성불을 이룬 붓다이지만, 중생제도를

위해 보살의 모습으로 교화하며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교화행을 계속 펼치고 있다.39)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예토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과 문수보살과 같은 대보살이 열반을 미루면서 예토에서 중생교화에 힘쓰는

것은 ‘붓다’와 ‘보살’이라는 명칭의 차이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거의

없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은 불보살의 본원과 대자비심, 자유

자재한 구제력, 예토라는 환경의 특수성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수긍하기 어려

운 것은 아닐 것이다.

38) 一闡提(icchantika)란 일반적으로 반열반의 성질이 없는 자, 또는 성불의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자

라고 설명된다. 한편,『능가경(楞伽經)』에서는 두 유형의 일천제에 대해 설하고 있다. 첫째는 일

체의 선근을 끊어(斷善根) 반열반할 수 없는 범부중생 일천제이다. 두 번째 유형의 일천제는 중생

구제의 本願(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그 원력에 의해 윤회 속에 머무르며 대비의 이타행을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이 대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자발적으로 열반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

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 또는 대비천제(大悲闡提)’라고 불린다. 두 종류

의 일천제는 모두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이유가 업력(業力)이냐, 원력(願力)이

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천제의 의미 및 능가경에서 설명된 두 종류의 일천제에 관

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 小川一乘 1968, 340-343.; 가라시마 세이시(辛嶋静志) 2012,

301-319.

39)『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龍種上佛)이었을 시절에 많은

중생을 교화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용종상불이 열반에 들자 중생들은 무수한 탑을 세워 공양했지

만, 그는 실제로 열반에 들었던 것은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붓다를 도와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平

川彰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이었다는 점, 그리고『수능엄삼매경』에서 묘사되는 문수보

살의 열반 시현(示現) 등을 근거로 문수보살의 경지를 붓다의 경지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平

川彰 1991, 43ff. 참고로『수능엄삼매경』에서 문수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열반을 시현(示現)

한 것과『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설명하는 열반에 관한 묘사는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에게 자신이 보살 시절에 닦은 공덕을 붓다가

된 후에 스스로 향유하는 자수용(自受用, svasaṃbhoga)이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40) 석가모니 붓다는 성불하여 많은 공덕을 성취하

였지만, 예토라는 환경은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려

울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의 성불 및 중생제도’라는 서원이 결

과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유의 교설을 낳

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40) 붓다의 세 가지 신체(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중에서 법락을 수용하는 수용신(受用身,

sāṃbhogikakāya)에는 스스로 법락을 수용하는 자수용(自受用)과 타인에게 법락을 수

용케 하는 타수용(他受用)이 있다. 자수용은 자리적인 성격의 것이며, 타수용은 이타적

행위이다. 히라카와 아키라 등편 2001, 132.

2)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교화와 「신해품」

여기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을

경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4신해품」에는 유명한 장자궁자(長子窮子)

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는 붓다 자신이 설한 것이 아니라 가섭과 수보리 등

대제자들이 설한 것인데, 위대한 지혜와 공덕을 갖춘 붓다를 부유한 자산가(장

자)에, 성문제자들을 가난한 아들(궁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우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가난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사자좌에 앉아 많은 귀족들에게 공경을 받으며 위엄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도망치게 된다(아들은 그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지 못한다). 도망치다 결국 기절까지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집

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유한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의 집에서 오물청소의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하는 장면이

설해지는데, 그에 대한 묘사가 주의를 끈다.

그리고 그 부유한 남자는 둥근(gavākṣa, 소의 눈처럼 둥근) 창문을 통해 자신의 아

들이 오물통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고서 한편으로 기특하게 생각했습

니다. 그리하여 그 장자는 자신의 저택에서 내려와서(avatīrya), 화환과 장신구를

내려놓고 부드럽고(mṛduka) 깨끗하고(caukṣa) 화려한(udāra) 옷을 벗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서 오른손에 바구니(piṭaka)를 들고서 먼지(pāṃsu)로 자신의 몸 곳곳

(gātra)을 더럽히고서 아주 멀찍이서 말을 걸면서 그 가난한 사내에게로 다가갔습

니다. 다가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게. 서

있지 말고 오물(pāṃsu)을 치우게.” 이러한 방법(upāya)으로 그 아들에게 말을 걸

고 서로 얘기를 할 것입니다.41)

41) SP. 106,2-8: sa cāḍhyaḥ puruṣo gavākṣavātāyanena taṃ svakaṃ putraṃ paśyet saṃkāradhānaṃ

śodhayamānam/ dṛṣṭvā ca punar āścaryaprāpto bhavet/ atha khalu sa gṛhapatiḥ svakān

niveśanād avatīrya apanayitvā mālyābharaṇāni, apanayitvā mṛdukāni vastrāṇi, caukṣāṇy

udārāṇi malināni vastrāṇi prāvṛtya, dakṣiṇena pāṇinā piṭakaṃ parigṛhya pāṃsunā svagātraṃ

dūṣayitvā dūrata eva saṃbhāṣamāṇo yena sa daridrapuruṣas tenopasaṃkrāmet upasaṃkramyaivaṃ

vadet/ vahantu bhavantaḥ piṭakāni, mā tiṣṭhata, harata pāṃsūni/ anenopāyena taṃ

putram ālapet saṃlapec ca/

『묘법연화경』권2 「제4신해품」(T.9, 17a14-19): 又以他日 於窓牖中遙見子身 羸瘦憔悴 糞土塵坌

污穢不淨 卽脫瓔珞 細軟上服 嚴飾之具 更著麁弊垢膩之衣 塵土坌身 右手執持除糞之器 狀有所畏

語諸作人 汝等勤作 勿得懈息 以方便故 得近其子.

자산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내려와 깨끗하

고 부드러운 옷을 벗고, 장신구를 내려놓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 온 몸에 먼지

를 묻히고서 아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장면은 석존의 교화가 어떠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예토에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중생들에게 교화를 한다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가 자신의 복덕과 안락을 내려놓고, 아들과 똑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온 몸에 흙먼지를 묻히고 다가가 함께 땀 흘려 일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석존의 교화는 보살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지은 인행의 과보를 향유

하면서 법을 설하는 정토의 붓다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예토에서는 중생들이

선업이 적고, 근기가 낮으므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붓다는 위 비유에서 집

으로 표현된 자신의 거처에서 내려와서, 자신이 성취한 복덕과 장엄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예토의 거친 풍토 속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법

을 전해야 했다. 즉 예토에서의 교화란 붓다가 자신의 성취 속에 머무르는 것

이 아니라,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운동을 동반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필자

는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에 대해서 예토가 지니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

다고 생각되며, 「신해품」의 위 비유는 「여래수량품」의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문구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방식

의 교화란 예토 교화의 필연적인 양상이며, 예토 교화를 서원한 석가모니 붓다

에게는 일종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사실상 보살행

의 연속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필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요약 및 그 함의에 대해서

이제『법화경』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정

리하고 그 함의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한역본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따라서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

가를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 단계로서 먼저 원문을 추정해보았는데, 범어본 교정본과 사본류 그

리고「법화경론」을 근거로 하여 범어본이 원문을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

했다. 또한 범어본『법화경』과 사본들, 그리고「법화경론」이 모두 일치하고 있

으므로, 경전(범어본『법화경』)과 논서(「법화경론」)의 가르침대로 ‘붓다의 보

살행’이라는 교설을 신앙하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

았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하고서 다음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내용을 중심으

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보았다. 범본의 내용에 따르면, 「여래수량

품」의 내용 전개는 ①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②그 후에 다

양한 방법으로 중생교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③그러한 ‘교화행’을 붓다 스

스로가 ‘보살행’으로 규정하고서 ④붓다에게는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음

을 알리고, ⑤따라서 앞으로도 붓다의 보살행/교화행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

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내용 전개는 붓다의 교화와 수명을 일목요연하

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한역의 내용 전개는 ①과 ②는 동일

하나 ③과 ④를 하나로 묶어 과거에 닦았던 보살행에 의해 얻은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고 설하는 흐름이 된다. 과거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갑자기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교설이 전개되는 것은 흐름상 돌연한 느

낌을 주며, 더욱이 구원성불한 붓다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구원성불 이전의 보

살행을 언급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범어본의 맥락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경전의 흐름상으

로는 더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후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법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

토해보았다. ‘본원’에 의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는「법화경론」

의 주석은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붓다의 보살행은 그다지 일

반적인 내용이 아니므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석가

모니 붓다가 세운 본원의 특징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문

제에 관해『비화경』의 설명을 참조하여,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인 ‘예토에서의

성불과 교화’가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

적인 모습이 「신해품」의 장자궁자의 비유에 잘 묘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가 머물고 있는 예토라

는 환경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예토라는 특수한 환경은 불과(佛果)를 성취한

붓다가 과보의 향유에 머무르지 않고,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활동을 통해서

만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보살

행의 연속이라 할 만한 행(行)의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붓다의 보살행’이라는『법화경』의 교설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

가?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여래수량품」은 석가모니 붓다의 무한한 수명을 설하는 것으로 유명

하지만, 범어본을 통해 볼 경우 그 풍경에는 미세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

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문장이 「여래수량품」 내에 도입되면서

붓다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교설이 곧 붓다의 무한한 보살행을 지시하게 된다

는 것이다. 즉 ‘여래의 수명=보살행’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붓다가 그의 위대함을 칭송받기 위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중생구제

를 위해 우리 곁에 머문다는 「여래수량품」의 대의(大義)는 ‘붓다의 보살행’을

매개로 하여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여래의 수명=보살행’이라는 함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에 대해 검

토해 보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법화경』『에서 붓다 교화의 궁극적인 목적

은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도록 하여 모두 성불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경전에서는 ‘일불승(一佛乘)’이라는 용어로 표

현하는데, 일불승은 다음의 두 계기를 통해 확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

저 지혜의 관점에서 일불승의 이치를 밝히고서(「방편품」), 실제로 붓다가 상

주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도와 성불로 이끄는 방편교화행, 즉 보살행

을 펼침으로써(「여래수량품」) 일체중생의 성불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와 같이 「방편품」(지혜)과 「여래수량품」(방편)이 하나가 됨으로써 ‘일체중생

을 구제하겠다는 붓다의 본원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경전의 문구는 온전하

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에 대해 대

강의 문맥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문제들,

예를 들어 법화경에서의 보살행에 관한 보다 면밀한 검토, 그리고 붓다들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을 실현해가는 구체적인 방식 등에 관해서

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1. 경전의 편집

 

붓다 입멸 이후 100년이 지나서 분열이 시작된 불교는 끝내 20개 부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불교는 곧이어 기존 불교의 분파보다 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서력기원 전후가 되자 그때까지의 부파불교에 대한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혁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부파불교를 '진리에 이르는 작은 탈것(小乘) 즉 소승불교라 비난하고 자신들이 시작한 불교운동을 '커다란 탈것(大乘)" 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은 각자의 사상적 주장에 따라서 여러가지가 편찬되었다. 그중에서도 <법화경>은 기원후 50년경에서 150년 사이에 걸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여러 종류의 법화경(法華經)

 

한역된 법화경

먼저 <법화경>의 한역본과 원전에 대하여 알아보자. <법화경>의 한역은 전역(全譯)과 부분역(部分譯)을 합해 여러 종류에 이른다. 전역된 경전만 해도 옛부터 6역(六譯).3존(三存). 3결(三缺)이라 하여 여섯 종류가 번역 되었는데 그중 셋은 남아 있고 셋은 없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현존하는 한역본은 286년에 축법호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 27품, 406년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 27품(훗날 권28품으로 됨), 601년에 사나굴다와 달마급다가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27품 세가지이다. 이중 <첨품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을 보정한 번역본이다.

 

번역 연대로 보면 축법호가 번역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축법호가 사용한 원전이 제일 오래된 형태의 것이라는 증거는 안된다. 원본이 사라져 버려서 어느 번역본이 가장 오래된 원형인가를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가장 잘 번역된 명역(名譯)이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법화경>은 이밖에도 481년에 담마가다야샤(曇摩伽陀耶舍_번역본 <무량의경(無量義經)>을 개경(開經)으로 해서 담마밀다의 <관보현보살행법경>을 결경(結經)으로 하는 이른바 '법화삼부경'을 성립 시켰다.

 

원전사본의 발견

<법화경>의원전은 그 사본(寫本)이 근년에 와서 네팔 캐시미르 중앙아시아에서 발견 되었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영국의 호지손이란 사람이다. 그는 네팔 주재 공사 였을때 불경의 범어본 사본을 수집했는데 그중에 <법화경>의 사본도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 경의 원본사본이 발견 되었다.

 

<법화경> 사본은 대부분이 네팔 계통의 것과 중앙 아시아 계통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네팔계 사본은 완전한 형태의 것이 많다. 이에 비해 중앙 아시아계 사본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중 어느것이 더 오래된 것인가는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네팔계는 11세기 이후이고 중앙 아시아계는 그 이전으로 생각되고 있다.1931년 캐시미르이 길기트에서 <법화경>의 원전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5-6세기경의 사본으로 추정되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경전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을 번역했던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쿠자에서 태어나 뒷날 중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번역에 사용했던 원전사본은 중앙아시아계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중앙아시아계의 것은 인도의 굽타왕조 시대의 문자로 씌여져 있다.

 

 

묘법연화경

3. 법화경의 특색

전통적 구분

한역본은 구마라집 번역의 <묘법연화경>이 가장 많이 읽혔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초로 해서 살펴보는게 좋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했을 당시는 제바달다품이 없고 7권래품이었다. 그런데 천태지의(天台智. 538-597) 때부터 제바달다품이 제 12장으로 삽입되어 7권28품이 되었고 8세기 중간에는 8권28품으로 정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법화경> 제14장 안락행품(安樂行品)과 제15장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 사이에서 구분이 생긴다. 이것을 나눈 최초의 인물이 구마라집의 제자 도생(道生) 이다. 도생은 앞부분을 인문(因門) 뒷부분을 과문(果門)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인문은 일승(一乘)의 진리 (眞實法輪. 진실법륜)을 증명하는 것이며 과문은 상주(常住)의 생명(無餘法輪. 무여법륜)을 증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광택사의 법운(法雲)이 도생의 해석을 다시 계승하여 인문을 개삼현일(開三顯一), 과문을 개근현원(開根顯元)이라고 정의했다. 개삼현일이란 삼승(三乘)의 진리를 일승(一乘)에 통일한다는 뜻이며, 개근현원이란 인도에 출현한 석가모니는 실은영원상주의 부처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천태종을 창립한 천태지의 역시 인과이문(因果二門) 계승했는데 천태지의는 그것을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법화경>의 구성을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세분하고 조직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 <법화경> 전체를 셋으로 나누는 것을 일경삼단(一經三段)이라 한다. 그리고 적문, 본문을 각각 삼분할 경우 적문삼단 본문삼단이라 했다. 그리고 이를 합해서 이경육단(二經六段) 이라 했다.

 

3요소 3특색

제 14장 안락행품(安樂行品)과 제 15장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을 기점으로 <법화경>을 반으로 나눈 이유는 전반에서 제2장 방편품(方便品) 을 중심으로 하여 우주의 통일적 진리(일승묘법.一乘妙法)를 증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반에서 제16장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의 인격적 생명(구원본불.久遠本佛)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방편품은 '시방불토(十方佛土) 가운데는 오직 일승의 법만 있고 둘도 없고 셋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승(二乘: 성문승. 연각승)내지 삼승(三乘: 聲聞(성문). 緣覺(연각).菩薩(보살))을 포함해 일불승(一佛乘)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이르는 커다란 탈것(乘物)은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 역시 우주의 만물을 통일하는 근본의 대법(大法)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을 다른말로 묘법(妙法)이라고 표현하고 무상도(無常道)라고도 한다. 또한 제일의(第一義)등으로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이 경의 후반부 중심사상은 구원의 인격적 생명(구원본불.久遠本佛) 이다. 이 사상이 제시된 것은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이처럼 오래 전에 성불한 여래는 수명무량(壽命無量)이며 상주(常住)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실로 오랜 예전에 부처님이 되어 있었으며 아룰러 부처님으로서의 수명은 영원 무한임을 증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샘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구원불로 강조했던 의도는 다음 세가지라고 생각 된다.

 

첫째는 제불(諸佛)의 통일이라는 것이다.<법화경>에 이르기까지 대승불교 경전은 여러 종류의 부처님을 내세워 왔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님들은 실은 구원본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分身佛)이며 그 분신은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통일적 진리가 있으며 구원의 인격적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의 일승묘법(一乘妙法)은 단순한 자연이법이 아니고 인생생활에 작용하는 영원한 인격적 생명적 약동체이을 밝힌 것이다.

 

셋째는 현실에서의 실천 활동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약동이 직접 체득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 구원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칠줄 모르는 실천활동(보살행)을 실현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셋중에서 특히 세번째는 <법화경>의 원전 성립사상으로 생각되어 진다. <법화경>의 원이 편집되고 성립되어 가는 모양을 검토해 보면 앞의 전통적인 두 부분에 대해 또 한 부분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두 부분에 겹쳐지는 것인데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서 제22장 축루품(囑累品) 까지로서 이것은 '제3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학자들은 이를 '제3법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인생의 고난을 이겨내면서 진리실천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현실의 인간적 활동(보살행도)의 주장이다. 수많은 환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구원을 믿는 한 인생은 최후까지 건투해 나갈 용기를 획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법화경>은 전통적 입장과 성립사적 관점을 합쳐서 살펴보면 진리(法)과 인격(佛)과 인간(菩薩.보살) 또는 진리와 생명과 실천의 삼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주의 통일적 진리(一乘妙法.일승묘법), 구원의 인격적 진리(久遠本佛.구원본불), 현실의 인간적 활동(菩薩行道.보살행도)덩의 제1부분. 제2부분. 제3부분의 각각의 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3요소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화경>의 제목 즉 '사말다.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mdarika sutra. 묘법연화경)이다. 사말다(妙法. 묘법)는 진리에 관해서 정의 내린 것이며 수트라(經)는 부처님의 교훈이라는 뜻으로 부처님과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푼다리카(蓮華. 연화)는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보살이란 보디사트바의 음사어로써 깨달음의 진리를 현실의 세계에서 실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는 '연꽃에 물이 묻지 않듯이 지금 여기에 그들은 대지를 뚫고 모였다'라는 표현이 있다. 연꽃이란 흙탕물 속에서 살지만 그러면서도 흙탕물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에게 해당시킨 것이다.

 

중생은 우주의 통일적 진리에 오로지 믿음을 바칠 때 구원본불의 생명에 감싸여진다. 이것을 깨달을 때 세상의 사악한 악에 물들지 않고 인생의 고통을 인내하면서 진리 실천에 매진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영원한 생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법화경>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의 제목을 입으로 외우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된다고 하는 종파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4. 법화경의 세계

 

법화경의 우주관

<법화경>은 전반에서 일승묘법이란 통일적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 경은 통일된 전체 우주를 묘사하고 있다. 구마라집은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번역 했는데 현대적으로 번역을 해 본다면 '우주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각자를 받쳐주고 있는 이법(理法)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총칭해서 불교에서는 '일체법' 또는 '제법(諸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독립 무관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서는 불이(不二)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다. 그 불이(不二)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곳에 제법통일의 대법 즉 우주의 통일적 진리가 있는 것이다.

 

<법화경>이 설명한 '일승묘법(一乘妙法)'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정신(心)에는 정신의 법(心法)이 있고 육체(色)에는 육체의 법(色法)이 있다. 그러나 근본에서는 색심불이(色心不二)로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색법과 심법을 근본에 두고 통일돼 있는 색심불이의 일승묘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병도 정신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치료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병도 육체의 건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신과 육체만이 불이(不二)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끝을 더듬어 가다보면 모든(제법)것이 서로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법화경>이 설법한 일승묘법은 우주만유(諸法.제법)를 근저에 놓고 통일하는 대법이라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 경은 제법의 그물과 같아서 그물(일승묘법)을 잡아 당기면 모든 그물코가 끌어 당겨진다는 것이다.

 

일승묘법이란 이처럼 우주만유의 밑바탕에 있는 통일의 원리다. 이 원리에 의해 전체 우주의 현상이 전개된다. 구라마집은 이를 '제법실상'이란 번역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바꿔말하면 '우주실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

<법화경>에서 설명된 우주 전체 우주상은 이른바 기본형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조직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천태지의 대사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 이다. 마하지관(摩訶止觀) 제5권에 의하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우주의 존재를 (1)지옥 (2)아귀 (3)축생 (4)아수라 (5)사람 (6)천 (7)성문 (8)연각 (9)보살 (10)불 등 십계(十界)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 십계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즉상관(相卽相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계 하나하나에 다시 십계가 내포되어 (十界之具. 십계지구)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계(白界)가 된다.

 

그런데 <법화경>의 제2장 방편품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각각의 본질로서 10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구마라집 번역본에 의하면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 과(果). 보(報). 본말구경(本末究景) 등 열개가 그것인데 그 열 개 항목의 앞에 '이와같이(如是.여시)'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이를 '십여시(十如是)'라고 부른다.

 

여기서 상(相)이란 외상(外相), 성이란 내성(內性), 체란 외상.내상을 합한 전체, 역(力)이란 잠재적인 능력, 작(作)이란 현재적인 작용, 인(因)이란 사물이 생기는 직접적 원인, 연(緣)이란 인을 도와주는 간접적 원인(조건), 과(果)란 인연으로 인해 생긴 결과, 보(報)란 결과가 사실이 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 본말구경이란 상에서 보까지 서로 관계되고 일관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십여시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활동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백계에서 십여시가 서로 곱해져서 다시 천(千)이란 숫자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또 한 가지 존재는 각각 주체(衆生世間.중생세간)와 환경(國土世間.국토세간) 그런 것을 구성하는 물심의 다섯 가지 요소(五陰世間.오음세간) 세가지(三乘世間.삼승세간)가 있는데 이 삼종세간을 위의 천에 곱해 보면 삼천이란 숫자가 된다. 요컨데 삼천이란 극대화의 전체 우주의 상태를 표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념(一念)이란 물질이든 마음이든 극소 극미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일념삼천'이란 극소의 세계와(一念) 극대의 세계(三千)와 상극상관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천태지의는 일념과 삼천에 대해서 전후(前後). 본말(本末). 주종(主從). 동이(同異)등을 논의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즉 어느 쪽이 전체이고 부분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극미의 일념에 삼천의 우주만상이 포함되고 충만하며 삼천의 우주만유에 극미의 일념이 투철하고 충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힘이 하나가 되어 한 물질 속에 존재하며 또 한 물질의 힘이 퍼져나가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논리다. 따라서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전체 우주의 생명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경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념의 극소와 삼천의 극대를 상즉 상관 시키고 있는 것이 즉 <법화경>이 설명한 일승묘법이다. 이 일승묘법으로 일관된 전체 우주를 조직화한 것이 즉 천태의 일념삼천설이다.

 

5. 법화경의 정토(淨土)

 

있는 정토(常寂光土.상적광토)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와 세계의 상(常)과 무상(無常) 내지 유한과 무한 육체와 영혼의 상이(同異), 사후의 생존 유무 등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남이라든가 죽음, 육체와 영혼,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하는 구분 또는 분별할 수 있는 사고를 초월하였을 때 진정한 영원한 세계 영원한 생명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침묵을 통해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화경> 제14장 안락행품에도 보면 '전도(顚倒)된 생각 때문에 법이 유(有)라거나 무(無)라거나,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거나, 이것은 태어남이고 저것은 죽음이라고 분별한다'고 우리의 전도된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또 제16장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래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고, 죽어 없어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고, 유전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며, 같지 않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도 아니고 나 아닌 것도 아니라고 여래는 범부가 눈앞에 보는 것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

 

생사.유무.피차 따위의 분별하는 생각(分別見. 분별견)을 초월한 곳에 영원절대의 생명 또는 영원절대의 세계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당장 이곳에 영원한 생명이 박동하고 영원한 세계가 현전(現前. 앞에 나타나다)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현실의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순간순간 변화하고 멸망해 간다. 그리고 한정된 것이고 괴로움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른바 범부가 사는 사바세계다. 그러나 열렬한 신앙으로서 그런 범부의 사바세계에 영원한 생명 구원의 정토가 감득(感得. 느껴서 알게되다. 영감으로 깨달아 알게되다)되는 것이다.

 

<법화경>은 이런 사실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증명하려 했다. '구원본불로서의 석가모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보드가야 근처에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여러 곳에서 설법하시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모니는 유한의 존재다. 그러나 <법화경>은 그 유한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의 제16장 여래수량품을 보면 '오랜 옛날에 성불한 여래는 수명무량으로 항상 하노라'는 말이 나온다. 열심으로 신앙하면 이런 불멸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볼 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고 사바세계인 이곳에서 구원의 정토를 감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사와 피차를 초월한 절대정토를 전채지의는 '상적광토(常寂光土)'라고 설명했다.

 

'상적광토'라는 말은 <법화경>의 결정인 <관보살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에 따온 것이다.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정토라는 뜻인데 알게 쉽게 말하면 바로 '여기에 있는' 정토라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설법도

 

이루는 정토(淨佛國土.정불국토)

그런데 정토를 말할 때 또 한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다. 그것은 정불국토(淨佛國土)라 불리는 것이다. 즉 국토를 정화하는 것이며 정토를 현실사회 안에 실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회의 정토화이고 불국토의 건설이라 할 것이다. <법화경>을 보면 '정토를 맑게 하기 위해서 항상 정진하고 중생을 교화시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상적광토 즉 '있는' 정토에 비교되는 '이루는' 정토라 할 수 있다. <법화경>의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대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연민하는 까닭에 인간으로 태어났도다."

 

<법화경>의 이러한 정신은 그 가르침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같은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여래사(如來使)'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절대정토(있는정토)에만 도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런 정토를 실재로 현실사회에 구현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살행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인간계의 현실상은 무상하고 유한한 것이다. 그러한 현실세계에 부처님이 출현한 것은 이곳이야말로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내지 정토가 활현(活現)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자연에 있는 소리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인데 우리의 귀가 그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도 작은 용기(容器. 그릇)인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작은 한정된 그릇에 자연의 영원하고 무한한 소리를 담아냄으로써 오히려 자연의 묘음(妙音)을 우리들에게 살아서 울려 오게 될 것이다.

 

화가는 영원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정된 캔버스 위에 한정된 그림 물감으로 그려 내려고 한다. 그것은 소용없는 아무 의미없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에서 오히려 영원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비밀이 있고 그 부분을 파악한 자가 명연주가이고 명예술가이고 인생의 명인(名人)이다.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고 현실은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살아가는 의의가 있고 영원의 생명은 오히려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삶을 얻은 자의 임무이다. 그것을 이룩해 낸 자가 인생의 명인인 것이다.

 

인간의 현실 세계는 유한이고 그 유한의 인생으로 태어난 일도 그곳에 영원무한한 생명이 발현되고 구원의 정토가 현현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토현현의 사명을 갖고 사람들은 이 세간을 살아왔다. 그것이 다름아닌 <법화경>의 정신이다.

 

가는 정토(來世淨土. 내세정토)

마지막으로 내세정토(來世淨土) 즉 죽은 후 돌아가는 정토이다. 간단히 이것을 '가는 정토'라고 한다.인간계에서 삶을 사는 자는 불법을 신봉함으로써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계에 있으면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경지에 안주(있는 정토)한다.

 

또 영원한 생명을 느껴서 알게 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생이 있는 한 각자 자기으 처지를 통해서 불법을 생활 속에 끌어들여 영원한 생명을 구현한다. 나아가서는 불국토 건설에 노력해 나가려고(이루는 정토)한다. 그리하여 그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문을 들어설 때에는 본래의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가는 정토). 살아 있는 한 정불국토 즉 불국토 건설에 노력해 나갈 때 죽음은 편안한 고효양으로 돌아가는 문으로서 열려지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있는 정토(절대정토)''이루는 정토(정불국토)''가는 정토(내세정토)'의 세 가지 정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하나이다. 다만 정토가 세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사람의 근기에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 법화신앙의 역사

 

인도의 법화신앙

인도에서 법화신앙은 대략 서기 50년경에서 150년경에 걸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춘 뒤 발전을 거듭해 <법화경> 신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 <법화경>은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 일승묘법이 설명된 부분이 특히 주목 되었다.

 

일승묘법이란 구마라집의 번역에 의하면 무상도(無常道) 또는 제일의(第一義) 또는 평등법(平等法)이란 뜻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즉 일승묘법이란 근원이 되는 통일된 최고의 절대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바닥에 공통되는 제일원리(第一原理)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으로 의해 평등하게 유지되고 본래 둘이 아닌 하나의 것이다. 일승묘법 아래서는 모든 한정적인 틀이 제거되고 사물은 불이평등(不二平等), 세계는 허공무한(虛空無限)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이며 모든 만물의 진상(諸法實相.제법실상)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저것, 자기 또는 타인이라든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생과 사 등 여러가지의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테두리는 임시로 마련된 것이며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고정시하고 불변(不變) 부동(不動)처럼 생각하는 것에서 미혹이 생긴다. 이를테면 우주에는 본래 동서남북이 없다. 시방공(十方空) 이 며 좌우와 상하가 없는 무변의 허공이다.

 

등산에도 비유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길을 잃었을 때 '초심자'는 초조해하며 계곡이나 늪에 빠져 점점 더 미로에서 진퇴양난이 된다. 그러나 능숙한 '경험자'는 산의 정상으로 되돌아가 널리 사방을 굽어보고 올바른 길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면 곧 이리저리 판단도 해보고 걱정하며 좋았다, 걱정했다 한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을 일시 정지시키고 광대무변한 허공에 몸을 맡기고 초조한 마음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법화경>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강조한다.

 

인도의 법화신앙자들은 거기에 끌렸다. 그래서 용수는 <반야경>을 주석한 <대지도론>에서 <법화경>이 일승평등의 진리 세계를 설명하는 점이 <반야경>보다 뛰어나다고 밝히고 있다. 또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여러가지 논서, 이를테면 견의(堅議)가 쓴 <입대승론(入大乘論)>과 세친(Vasubandhu. 世親)이 쓴 <법화경론>등에서도 마찬가지의 지적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세친이 쓴 <법화경론>은 <법화경>이 진리의 평등, 세계의 평등, 존재의 평등(이를 三平登이라고 함)을 설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다른것 보다 뛰어난 점이며 그것을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또 4세기경에 편집된 <열반경>은 모든 존재의 평등한 성불과 영원 보편성을 강조한 것으로 규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이 점은 <열반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중국의 법화신앙

서력기원을 전후할 무렵 이미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서 불교는 처음에는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노자의 사상을 차용해 해석되기도 했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부터 경전과 논서가 계속 번역 소개됨에 따라 불교를 불교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아울러 부처님의 최고 가르침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로 연구와 논의가 왕성해졌다. 특히 구마라집에 의해 <반야경><법화경>과 <중론><대지도론>등 수많은 경전과 논서가 번역 소개되자 이러한 운동과 연구는 한층 더 활발해 졌다. 그리하여 불교의 연구자들은 각자의 생각으로 여러 경전을 정리하고 배열하려고 노력했다. 교상판선(敎相判釋)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교상판석은 5-6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가장 활발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강남에 삼사(三事) 강북에 칠사(七事) 합해서 십사(十事)의 교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천태지의가 쓴 <법화현의(法華玄義)> 제10권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교판논의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반야경>을 근본에 둘 때 <법화경><화엄경><열반경>을 어떻게 배열하는가 하는 일이다.

 

<반야경>은 불교의 진리를 원리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그것을 근본에 둔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경전을 진리의 3대 특성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중 <법화경>은진리의 통일성을 밝힌 것으로 이를 '만선동귀교(萬善同歸敎)'라 했다. 그리고 <화엄경>은 진리의 순일성을 밝힌 것으로 이것은 '돈교(頓敎)'로 정의 되었다. 마지막으로 <열반경>은 진리의 영원성을 밝힌 것으로 '상주교(常住敎)'라고 정의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화엄경>과 <열반경>을 최고시하고 <법화경>은 그 중간에 놓는 교판이다.

 

그러나 천태대사는 이 '만선동귀교'로서의 <법화경>을 최고의 위치에 놓았다. 천태대사의 이러한 의도는 통일적 진리를 밝힌 <법화경>에 의해 지금까지의 불교가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사상을 총합, 통일하고 교판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있었다. 사실 중국에 잡다하게 들어왔던 불교의 여러 사상, 여러 경전은 일단 천태대사의 이러한 교판에으해 총합되고 통일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천태대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때마침 수(隨)나라에 의한 통일국가 실현시기였다. 천태지의에 의한 통일불교의 수립은 이러한 정치정세와 맞아 떨어져 잡다한 교판을 통일적인 것으로 바꾸고 종합적인 세계관 인생관의 확립으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등에 이 점이 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뒷날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불교에 이만큼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주장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법화신앙의 탄생은 천태지의에 의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태대사의 법화신앙은 유명한 주석서로 결실 되었다. 이른바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 또는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 '라 불리는 것으로 <법화문구(法華文句)><법화현의(法華玄義)><마하지관(摩訶止觀)>등이 그것이다. <법화문구>는 <법화경>을 주석한 것이고 <법화현의>는 <법화경>에 근거한 철리(哲理)를 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마하지관>은 <법화경>에 근거한 실천을 설명한 것이다.

 

<법화경>에 대한 주석은 천태대사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행해졌다. '법화삼대부'는 그런 것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대성한 것이다. 천태대사 이후의 법화신앙에서는 이 삼대부가 항상 지침이 되었다.

 

'법화삼대부'를 일관하는 기본사상에 관해 약간 설명을 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의 모습은 자타(自他). 남녀(男女). 생사(生死). 신심(身心). 선악(善惡). 고락(苦樂). 미추(美醜)등과 같이 A.B 두개의 틀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A.B. 란 고정적 개별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무상(無常) 변멸(變滅)하는 것이고 서로가 상의상관(相依相關)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과 상의(相依)를 합쳐서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하거니와 이것을 바꿔 말하면 A.B 둘은 현실계의 가정된 모습이고 그 근저는 무아(無我)와 공(空)이 근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과 근본은 또한 둘이 아니며 일체를 이루고 있다. <법화경>의 입장에서 말하면 A.B. 둘은 근본에서 일승묘법에 의해 통일되고 있다. 즉 A.B 둘은 가정(假定)의 현실상으로 A.B 가 둘이 아니고 (不二) 공(空)한 것이 진실상이며 영원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A.B 둘로 나누어진 현실상에 입각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A.B 는 둘이라고 고집하고(아견.我見) 이렇다 저렇다 갈라진 생각(分別見.분별견)을 일으키기 쉽다. 이것이 미혹의 근본이고 불이(不二). 공(空)의 진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이름한다. 그래서 무명을 떨쳐 버리고 집착을 버리며 둘이 아니고 공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계속 강조하는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것을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이라 이름하였다. A.B 둘로 나뉜 현상을 거짓으로 보고 거기에서 둘이 아닌 공(空)의 진실상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는 공관(空觀)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른바 제일수행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짓에서 공으로 들어 간다고 해서 들어간 채로 공에 머물러 버린다면 또한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 '소승(小乘)'이라고 평가되었던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은 공에 머물러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살리는 일을 잊어 버리고 있다. 나아가서는 공을 허무로 오해하고(虛無空見.허무공견) 인생이 무(無)로 돌아가는 이상(理想)이라 생각한다. 또 보살들이 불국토 건설(淨佛國土.정불국토)에 매진하는 것을 보아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다만 방관할 뿐이다. 그래서 <법화경> 제4장 신해품(信解品) 은 '오직 공(空).무상(無常)이 무작(無作)만을 생각하고 보살로서 유희신통하며 불국토를 정화시키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마음으로부터 희락(喜樂)하지 못한다'고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다음으로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을 설한다. 공(空)에서 가(假)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가관(假觀)이라고 약칭한다. 즉 현실(假.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공에 들어 간다는 것은 거기에서 실은 올바른 현실을 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그러므로 공의 체계화에 주력했던 용수는 그의 저서 <중론>에서 '공성(空性)이 성립하는 곳에 일체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개공(一切皆空) 일체개성(一切皆性)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부정이 아니고 거꾸로 사물의 성립근거이며 공에 의해 일체의 사물이 성립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까닭으로 천태대사는 공에서 거짓의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활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이고 가관(假觀)이다. 앞에서 말한 종가입공관 또는 공관을 제일수행이라 하면 이 종공입가관 또는 가관은 제2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이 강조하는 보살행이다.

 

또한 <법화경>의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서는 이와같은 보살행에 매진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사도(如來使)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이런 자각 아래 고난을 인내하면서(인욕)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일(자비) 할 것을 설하고 있다. 다만 현실에 지나치게 흥분되어 빠져버린다면 다시 출발저믕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않기 위해서는 공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거짓에 있어도 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사품에서는 또 보살의 현실활동의 마음가짐으로서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를 제시하면서 그것은 자비.인욕.공성의 삼궤법(三軌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거짓에 있으면서 공을 잊지 않는 것을 마지막으로 중도제1의관(약해서 중관)에 두고 끝맺고 있다. 그것은 종가입공관(공관)과 종공가입관(가관)을 통일한 것이다. 묶어서 말하면 공(空).가(假).중(中) 삼관이라 한다. A.B 둘에 관해서 말하면 A.B 둘에서 A.B 불이(不二) 즉 공관(空觀) A.B 불이(不二)에서 A.B 둘로(假觀.가관) 다시 양자의 통일(中觀.중관)이 된다. 천태는 그것이 '이이불이(二而不二) 불이이이(不二二而)' 즉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서 둘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것이 천태대사 법화삼대부의 골격이며 법화철학 내지 실천론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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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대론 / 문을식

- <밀린다팡하>에서 윤회설을 둘러싼 무아설과 그리스 영혼관을 중심으로-

불교평론[11호] 2002년 09월 10일 (화) 문을식 candra21@hanmail.net )

1. 서론

1) 《밀린다팡하》의 성립

《밀린다팡하》는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팔리어로 Milinda)와 비구승 나가세나(Nagasena)와의 대론(對論)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팔리어로 기록되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에 전해오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와 한역되어 한국, 중국, 일본에 전해오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의 두 가지가 있다.

《밀린다팡하》는 서문(1편)과 본문(6편)을 합해 7편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반해, 《나선비구경》은 《밀린다팡하》의 1편(서문)과 2, 3편으로 이루어졌으나, 서문 부분은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밀린다팡하》의 나머지 4, 5, 6, 7편은 후대에 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성립과 편집에 관한 원전 비판의 연구 및 번역은 1880년 트렌크너(V. Trenckner)의 비평적 교정본의 출판을 계기로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선비구경》의 A본(2권본)과 B본(3권본)에 기초한 팔리문과의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

《밀린다팡하》는 원형 부분과 후세에 증광되고 부가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판명되었다. 혹은 이것을 고층과 신층의 두 부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원형 부분은 트렌크너본의 서문과 문답을 포함해 89페이지 부분이다. 이것은 앞에서 기술한 《나선비구경》과 거의 일치한다. 팔리본과 한역은 각각 유통 과정을 달리하고, 내용적으로도 세부적으로 서로 다른 점이 발견된다.

특히 후세에 윤색되고 부가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는 서문의 모습은 양자의 책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의 전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일본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씨는 원형의 성립을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로 잡고, 증광된 과정과 그 연대를 논증하고 있다.4)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씨는 이 책이 팔리어로 정리된 연대를 기원후 1세기 전반 또는 그보다 이전이라 한다. 그리고 처음에 서북 인도에서 제작되어 인도 동부의 마가다 지방에서 팔리문으로 개변되고 증광되어 스리랑카에 전해졌다고 본다.5)

2) 구성

이 책의 구성은 트렌크너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처음에 서문 부분(T. 1∼25)이 있다. 이 부분은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 두 사람의 전생 이야기(Ja?aka)에 해당한다. 밀린다 왕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 이야기와 나가세나 비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 이야기를 서술했다. 팔리본의 전생 이야기는 밀린다 왕이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책 이름이 《밀린다팡하》, 즉 《밀린다 왕의 물음》으로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한역 《나선비구경》은 나가세나(那先)의 전생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이 부분은 둘 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고층 부분(2, 3편)이 성립한 뒤에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본론에 들어가서, 나가세나 비구와 밀린다 왕의 대론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제1회의 대론은 T. 25∼64에 해당하고, 제2회의 대론은 T. 65∼89에 해당한다. 이 제1, 2회의 대론 부분이 고층이고, 또 《나선비구경》과 대응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신층 부분으로 난문(難問) 부분(T. 90∼326)이 있다. 난문이란 모순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여기서는 양도논법(兩刀論法)의 질문을 말한다. 그 다음은 추리에 관한 물음 부분(T. 329∼362), 비유에 관한 물음(T. 363∼4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맺는 말(T. 419∼420)로 이루어졌다. 이 마지막 부분에는 밀린다 왕이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한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가운데 《밀린다팡하》의 원형으로 보여지는 고층 부분에서 대론은 80여 개를 헤아린다. 그들 안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 점은 불멸 후의 부파교단이 가장 관심사로 삼은 문제―윤회와 무아의 관계―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논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4부 ‘모순에 관한 문답’(이하 T본 90 이하)의 증광 부분에서는 앞의 문제가 전혀 논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의 고층과 신층의 두 부분은 본래 문제 의식이 같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불멸 후 불교교단이 붓다를 찬탄하고, 또한 붓다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고 여법한 수행을 강조한 것은 이 책에서 고층과 신층 모두를 통해서 일반적인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고층 부분의 각 대론이 제각기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그리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생동감 넘치는 대론을 전하고, 또한 사흘 동안에 이루어진 대론의 결과 왕이 나가세나를 스승으로 부르고, 자기 자신을 제자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고 맺고 있는 점에서 보면 신층 부분과는 크게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

또 대론을 시작할 때 양자 사이에 정해진 대등한 입장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기본적 태도는 고층의 대론에서 일관되게 보이고 있고, 인도와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에 의한 수준 높은 대론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것 또한 신층 부분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그렇게 자주 대두된 대론의 공통 주제는 단연 윤회업보설과 그것과 무아설과의 관계에 대한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과 현실 경험을 중요시하고 존중하는 그리스인의 왕에게 매우 불가결했던 것은 인도사상 전체의 밑바탕에 흐르는 윤회의 사고와 불교인들의 무아설이라는 두 가지 점이고, 그리고 당시 부파불교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롭게 체계화하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왕은 알고 싶어했다. 고층 부분에서 왕이 던진 솔직한 의문점과 나가세나의 해결 방법은 오늘에 있어서도 불교사상 연구의 귀중한 하나의 문헌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다.

다음에서 열거하는 21개의 대론 주제를 보면 윤회설을 둘러싼 자아(영혼)와 무아에 대한 대론의 경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6)

이름에 대한 문답(T. 25∼28)

아난타카야의 그리스적 영혼관(T. 29∼31)

무영혼설(T. 54∼57)

영혼은 인정되지 않는다(T. 71)

영혼과 정신작용과의 구별(T. 86∼87)

무아설은 윤회의 관념과 모순하지 않는가(T. 40∼41)

다음 세상에서 생을 맺는 이유(T. 32)

다음 세상에서 생을 맺지 않는 이유(T. 32)

생사의 연속으로서 윤회(T. 77)

시작이 없는 윤회의 생존(T. 51∼52)

윤회생존이 성립하는 근거(T. 52)

윤회에서 명칭과 형태(T. 59)

업은 실재하는가(T. 72)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의식의 연속(T. 73)

윤회의 주체(T. 46-48)

다시 윤회의 주체를 묻는다(T. 49)

윤회와 개인 존재의 형성력(T. 52∼54)

윤회의 주체는 전이하지 않는다(T. 71)

윤회하는 다른 주체의 유무(T. 72)

죽은 뒤 재생하기까지의 시간(T. 82∼83)

재생(윤회)하지 않는 사람(T. 41)

이 가운데 1번은, 이 대론은 왕과 장로가 처음 만나서 교류했던 것으로 인격적 개체(pudgala)의 부인 곧 무아설에 관한 대론이고, 2번 이하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리스 왕이 불교의 무아설을 그리스적 무영혼설로 이해해서 비난하고 있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윤회 생존을 초극해서 해탈의 획득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불교가 무아, 무영혼, 무실체라고 설한 것은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왕의 기본적인 입장을 중심으로 왕이 추구하는 윤회의 관념과 윤회의 주체에 관한 질문과 그 해답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위의 문제에 기초하여 윤회설을 둘러싼 불교의 무아설과 그리스의 영혼설에 대한 대론의 내용과 취지를 파악해 볼 것이다.

2. 대론의 배경과 원칙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비구와 대론할 때 현자론에 근거하는 입장을 취했다. 거기에는 불교가 그리스인에게도 개방된 종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도는 계급 제도가 엄격한 나라이므로 외국인은 모두 오랑캐로 취급되고, 아우트 캐스트(Out-caste, 4성 계급 밖의 천민)에 속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외국인인 그리스인은 종교나 종교관이 다르다 해서 인도인으로부터 하천(下賤)계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오랑캐로 취급받는 그리스인이 인도의 사회와 문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바라문교 이외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불교는 교조 고타마 붓다 이래로 계급 제도를 배제할 것을 말해 왔다. 사성계급을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혈통이나 출신에 의해 존엄함이나 비천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평등하며, 각자의 행위가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이 그리스인에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환영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그 뒤, 적어도 이슬람 침입 이전까지는 인도에 침입한 여러 민족은 대부분 불교를 보호하고 또는 불교 신자가 된 예가 많았다. 따라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가 대론하는 근거를 고찰할 때도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조류를 고려해야 한다.

밀린다 왕은 제왕의 덕과 위엄을 가지고 통치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스스로 정의를 수호하는 왕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따르면, 그는 정의의 통치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대단히 두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유골을 여러 곳에서 나누어가고 또 그를 기념하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밀린다 왕이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다는 것은 《밀린다팡하》 첫 편에 그것을 입증하는 문답이 있다.

밀린다 왕이 말하였다. “존자여, 나와 대론(對論)하겠습니까?”

나가세나는 왕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대왕이여, 현자(賢者)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나도 응하겠습니다. 하지만 제왕의 권위로 대론을 원한다면 나는 응할 뜻이 없습니다.”

“존자여, 현자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설령 현자의 대론에서는 문제가 해명되고 해설되고 서로 비판되고 수정되고 반박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현자는 결코 성내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제왕으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제왕은 대론에서 대개 한 가지 것을 주장하고 한 가지 것만을 밀고 나가며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왕의 권위로 벌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알았습니다. 저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현자로서 스님과 대론하겠습니다. 스님은 비구나 사미나 신도들과 대론하듯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대론하십시오.”

“대왕이여, 좋습니다.”라고 하며 흔쾌히 동의했다.7)

여기서 나가세나 비구는 진정한 대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쪽의 일반적인 강압에 못 이겨 이루어지는 제왕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론 자유와 진리 탐구의 기치를 들어 양자가 대등하게 대론하는 현자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현자론이 대론의 기반이고, 이것이 전제되어 원만한 대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의 의견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대론할 것임을 동의하고 긴장감 넘치는 대론을 시작한다.

3. 불교의 무아설과 밀린다 왕의 영혼관

1) 실체로서 영혼의 부정

먼저 약간의 대화 안에서 간단한 것으로는 “영혼이 인정되는가?”라는 밀린다 왕의 질문에 대해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승의에서는 영혼은 인정되지 않습니다.”(T. 71)라고 대답한다.

다음의 유명한 문답에서는 이것을 구체적인 실례에 따라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이름에 관한 질문’을 시작한다.(T. 25 이하)

“존자는 어떻게 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대왕이여, 저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동료 수행자들은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는 나에게 나가세나(龍軍), 또는 수라세나(勇軍), 또는 비라세나(雄軍), 또는 싱하세나(獅子軍)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왕이여,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명칭, 호칭, 가명(假名),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인격적 개체(人格的 個體, 즉 육체 속에 있는 영원불변한 어떤 것, pudgala)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밀린다 왕은 5백 명의 그리스인과 8만 명의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름 속에 내포된 인격적 개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한다.

“존자여, 만일 인격적 개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에게 의복과 음식과 좌구와 약품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또 그것을 받아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5역죄(五無間業)를 짓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일 인격적 개체가 없다고 한다면, 공도 죄도 없으며, 선행 악행의 과보(果報)도 없을 것입니다. …… 그대는 나에게 말하기를 ‘승단의 수행 비구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존자여, 머리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대왕이여,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몸에 붙은 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살갗, 살, 힘줄, 뼈, 뼛골 …… 콧물, 관절액, 오줌, 뇌들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도, 그것들 전부도 모두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존자여, 물질적인 형태(色)나 감수작용(受)이나 표상작용(想)이나 형성작용(行)이나 식별작용(識)의 5온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들 색, 수, 상, 행, 식을 모두 합친 것(五蘊)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5온 밖에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여전히 ‘아니다’고 또 대답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가세나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자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나가세나는 없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했습니다.”

그때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대왕이여, 그대는 귀족 출신으로 호화롭게 자랐습니다. 만일 그대가 한낮 더위에 뜨거운 땅이나 모랫벌을 밟고 또 울퉁불퉁한 자갈 위를 걸어 왔다면 발을 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산란하여 온몸에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도대체 그대는 걸어서 왔습니까? 아니면 탈 것으로 왔습니까?”

“존자여, 나는 걸어서 오지 않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주십시오. 수레채(轅)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굴대(軸)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퀴(輪)나 차체(車體)나 차틀(車棒)이나 멍에나 밧줄이나 바큇살(輻)이나 채찍(鞭)이 수레입니까?”

왕은 이들 모두를 계속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합한 전체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왕은 여전히 ‘아니다’고 대답했다.

“대왕이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수레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수레란 단지 빈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타고 왔다는 수레는 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대는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전 인도에서 제일 가는 왕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거짓을 말씀했습니까?”

이렇게 물은 다음 나가세나는 5백 명의 그리스인과 8만 명의 비구들에게 말했다.

“밀린다 왕은 여기까지 수레로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했을 때 어느 것이 수레라고 단정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왕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5백 명 그리스인은 환성을 올리며 왕에게 말한다.

“대왕이여,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에게 다시 말한다.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 즉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반연(緣)하여 ‘수레’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모든 것, 즉 인체의 33가지 물질과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반연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의(勝義)에 있어서는 영혼 또는 인격적 개체(pudgala)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몇 개의 요소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됨으로써 개체 존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개체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에 의존하기 때문에 각 구성 요소를 떠나 특수한 실체로서의 인격적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 곧 밀린다 왕이 제기한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적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2) 밀린다 왕의 영혼관

그런데 이와 같은 영혼관은 그리스에는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인은 이와 다른 영혼관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이루어진 대론에서 나가세나가 밀린다 왕에 ‘나가세나라는 개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 그 다음날에 밀린다 왕과 대론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의 신하인 아난타카야가 나가세나에게 가까이 와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존자여, 제가 나가세나라고 할 때 그 나가세나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때 나가세나는 아난타카야에게 “그대는 나가세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아난타카야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나가세나라고 생각합니다.”(T. 30)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리스인은 옛날부터 인간의 생명으로서의 숨(asu)을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영혼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라는 말은 원래 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진실된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리스인 아난타카야는 곧바로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같은 견해는 채용하지 않는다. 나가세나는 곧바로 “그렇다면 만약 나간 숨이 돌아오지 않거나 들어온 숨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난타카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그러면 피리 부는 사람들이 피리를 불 때 그가 내 쉰 숨이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지”를 묻는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나가세나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때 아난타카야는 “저는 그대와 같은 논자(論者)와는 논쟁할 수 없습니다. 존자여, 그 뜻이 어떠한가를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승복하게 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불교의 입장에서 “호흡에는 영혼이 없다. 들이 쉬는 숨과 내 쉬는 숨은 신체의 계속적인 활동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현실에서 작용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동인(動因)으로서 잠세력(潛勢力, 形成力, sankhara)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 말은 또 현실로 형성된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혼과 같은 실체적인 원리를 부인하고 이와 같은 원동력을 상정하는 쪽이 적어도 영혼을 호흡으로 간주하는 그리스인의 통속적인 관념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불교의 영혼관, 곧 무아관(無我觀)은 어떠한가. 다음 대론은 그것에 관해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나가세나의 무아관은 밀린다 왕의 영혼관에 대립되는 의미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3) 불교의 무영혼설과 밀린다 왕의 영혼관

아비달마 불교9)는 무영혼설을 주장한다. 곧 실체로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린다 왕이 “존자여, 영혼(vedagu?이라는 게 있습니까?”(T. 54)라고 질문하였다. 그때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다. 그랬더니 왕은 “안에 있는 생명 원리(個我)는 눈에 의해 형상(色)을 보고, 귀에 의해 소리를 듣고, 코에 의해 냄새를 맡고, 혀에 의해 맛을 보고, 몸에 의해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에 의해 존재요소(法)를 식별합니다.

마치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동, 서, 남, 북 어느 창문(감각기관)으로든 내다보고 싶은 창문으로 내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내다보고 싶은 어느 문으로든지 내다 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다섯 개의 문에 관해서 말하겠습니다. 잘 주의해 들어주십시오. 만일 안에 있는 생명 원리가 대왕이 말씀하신 것처럼, 창문을 마음대로 고르듯이 눈에 의하여 형상을 볼 수 있다면, 눈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하나 하나에 의해서도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존재요소를 식별하는 것에서도 다른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어느 것에 의해서나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즉 한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경우를 다 지적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공세를 취하자 밀린다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눈은 현상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맛보고, 몸은 감촉해야 할 것을 감촉하고, 마음은 그 밖의 모든 대상을 식별한다고 말한다. 곧 여섯 개의 감각기관과 여섯 개의 대상과는 각각 대응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만약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이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무시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 선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창문과 감각기관을 비교하는 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창문을 모두 열어제치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큰 허공을 본다면 모든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의 문이 제거될 때에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모든 대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사상을 식별하는 것 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문들이 제거될 때 역시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밀린다 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나가세나는 계속해서 비유를 통해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그대가 말한 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여기 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고 합시다. 대왕은 ‘딘나가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말하자, 밀린다 왕은 ‘그렇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고 할 때 대왕은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하니, 대왕은 이번에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다시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어떤 맛을 지닌 것이 혀 위에 놓여졌을 때, 식별하는 개아는 그것이 시다, 짜다, 쓰다, 맵다, 떫다, 달다든지 하는 사실을 알겠느냐?”라고 하니, 대왕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그러면 맛을 지닌 것이 위 속으로 들어갔을 때도 개아는 맛을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대왕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나가세나는 ‘대왕의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점점 더 강하게 몰아친다.

“대왕이여, 가령 어떤 사람이 백 개의 꿀 접시를 꿀통에 쏟은 다음에 어떤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꿀이 가득 들어 있는 그 통 속에 던졌다면 통속에 던져진 사람은 단맛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왕은 ‘그 사람의 입 속으로 꿀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꿀맛을 느낄 수 없다’고 나가세나의 말에 수긍한다.

그러나 나가세나는 이에 멈추지 않고 대왕의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며 공격의 고삐를 더 움켜쥐었다. 그때 대왕은 그대와 같은 뛰어난 논자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 왜 그런지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아비달마론으로부터 도출된 이론으로 밀린다 왕에게 ‘눈과 형상에 의해 눈의 식별작용이 생기고 그밖에 접촉(觸)과 감수(感受)와 표상(表象)과 의사(思)와 통일작용(作意)과 생명력과 주의 등이 함께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들의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므로 거기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해 준다.

그런데 대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영혼과 신체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하는 것이었다. 나가세나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대왕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왕의 궁중 안에 있는 망고 열매는 신맛이 납니까 아니면 단맛이 납니까?”라고 물었다. 왕은 “궁중 안에는 원래 그 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과실이 단맛이 나는지 신맛이 나는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왕의 말을 받아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혼이 신체와 같은 것인지 같지 않는 것인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여기서 나가세나는 분명히 무영혼설의 입장에 서 있다. 원시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혼의 문제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넘어선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관해서 판단을 유보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들어서면 아비달마 불교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영혼에 대한 입장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영혼이란 그와 유사한 관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따져 물었다. “존자 나가세나여, 혹은 식별(識, vin???.a)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지혜(慧, pan???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생명체의 개아(命, bhu?asmin-j沖va, 정신적 자아, 곧 영혼)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본질과 글자가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본질은 같고 글자만 다릅니까?”(T. 86)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대왕이여, 식별은 구별해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분명히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지만, 생명체의 개아(영혼) 같은 것은없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질문한다. “만일 생명체의 개아와 같은 것이 없다면, 무엇이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으로 사물(法)을 식별합니까?”(T. 55)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만일 생명체의 개아와 같은 것이 있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식별한다면, 눈의 문(감각기관)이 제거될 때 개아는 머리를 밖으로 내놓고 더 큰 공간을 통해 전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귀나 코나 혀나 피부가 제거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전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감촉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나가세나가 주장하는 ‘신체 안에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에 동의를 나타낸 것이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식별이라든지 지혜라든지 하는 정신작용을 현상 형태로만 인정할 뿐, 그 배후에서 그것들을 움직이는 능동적인 실체, 곧 영혼을 상정하지 않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4. 윤회와 윤회의 주체 문제

1) 무아설과 윤회의 관념과의 관계

인도에서는 동일한 영혼 또는 인간의 주체가 이 세상에서 죽은 뒤에 다음 세상에 태어나고, 거기서 얼마 동안 생존하다가 또 죽어서 다시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 같은 무한한 생사를 반복한다는 윤회(sam.)의 관념이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신봉되고 있다. 불교도 또한 윤회사상을 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달마 불교에서 무아설의 입장에서 말하면 윤회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윤회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도의 일반 철학자들은 불교의 이런 어려운 점을 비판해 왔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윤회의 관념은 반드시 인도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고 그리스인들 사이에도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71∼500) 학파와 플라톤도 또한 윤회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인 일반을 지배하는 관념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 그리스적 사유에서는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사적 사정을 고려한다면 무아설에 의한 윤회라는 것은 많은 인도인보다도 그리스인에게 당연히 한층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인간이 죽은 뒤든 생전에든 관계없이 다만 현세의 현상만을 염두에 두고 인격적 개체가 동일한 것으로 존속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다. 둘째는 아(我), 인격적 개체(pudgala), 또는 영혼(vedagu? j沖va)이 죽은 뒤에도 동일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현재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밀린다팡하》에서는 이 두 문제는 한 곳에서 동시에 논하지 않고 따로 논해지고 있다. 먼저 첫째 문제에 대해서 밀린다 왕은 질문한다.

“존자 나가세나여, 재생하는 것은 다른 시기에서도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T. 40)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전통적 보수적 아비달마 불교의 무아설에 입각해서 “그것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인에게는 매우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밀린다 왕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실례를 들어 대답한다. “대왕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찍이 갓난애였고, 유약하였고, 꼬마였고, 등에 업혀 있었던 당신과 지금 어른이 된 당신과는 같습니까?” 그러자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와는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가세나는 이 대답 속에 모순이 내포해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고늘어진다. “대왕이여, 만일 당신이 그 어린애가 아니라면, 당신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선생도 없게 될 것이다. 또 학문이나 계율(戒律)이나 지혜도 배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왕이여, 잉태 후 첫 7일 동안의 어머니와, 셋째 7일 동안의 어머니와, 넷째 7일 동안의 어머니가 각각 다릅니까? 어릴 때의 어머니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어머니가 다릅니까? ……”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질문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나가세나는 “내 자신은 등에 업힌 연약한 갓난아이 적의 나와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 같습니다. 진실로 이 신체에 의존해서 이들 모든 상태는 하나에 포괄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그러나 왕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비유로서 설명해 보라고 한다.

“대왕이여, 여기에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타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한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한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각각 다르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모든 사물의 연속은 마치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같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면서 최후의 의식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또한 거기에 지속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우리 존재의 주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서, 결코 같은 상태를 갖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그리스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35∼475)는 “우리들은 같은 강물에서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우리는 있으면서 있는 것이 아니다.”13)라고 하였다.우리는 보통 같은 강물에서 목욕한다고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욕하는 사이에도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강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우리 자신도 있으면서 없다는 모순된 표현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인 에피카르모스(Epikharmos)는 감각되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격적 주체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와 이들 그리스의 철학자와는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의 관념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15) 그런데 불교는 이 영혼의 관념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피타고라스 학파 등은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포함되어 있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혼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6) 하지만 불교의 영혼관은 다른 학파들과 유사한 사상을 품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아의 윤회라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독특하다.

2) 윤회의 주체 문제

여기서는 앞에서 든 윤회의 문제 가운데 두 번째의 아(我), 인격적 개체, 또는 영혼이 죽은 뒤에도 동일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현재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에 관해 두 사람 사이의 대론을 살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 시기와 후 시기에서 같지 않으면서 같기도 하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와 같이 몇 생애에 걸쳐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의 주체는 옮아가는지 어떤지에 대한 대론을 살펴보자.

먼저 밀린다 왕은 도대체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T. 46) 하고 윤회의 주체에 관해 묻는다. 나가세나는 그것은 명칭(名, nama)과 형태(rupa)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명칭과 형태란 우파니샤드에서 현상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정리하여 표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왔다. 그것이 불교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다섯 가지 구성요소, 곧 5온의 체계로 정립되었다. 5온 가운데 명칭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으로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식별작용(識)의 넷을 의미하고, 이에 대해 형태란 인간의 물질적인 면, 특히 신체(色)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명칭과 형태의 근저에는 아트만(a?man)이라는 실체를 상정했지만 불교에서는 항상하고 불변하는 영혼이나 상주하는 주체를 부정하고 이와 같은 ‘명칭과 형태’만을 인정한다.

그런데 밀린다 왕은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로서 ‘명칭과 형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서 바꿔 태어납니까?”라고 질문한다.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명칭과 형태에 의하여 선이나 악의 행위를 하고, 그 행위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새로운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서 바꿔 태어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등불을 들고 자기 집 꼭대기 방으로 가서 식사를 하다가 잘못하여 등불이 지붕을 태우고 이어서 마을을 태웠다고 합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붙잡아 ‘당신은 어찌하여 마을을 태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니오. 나는 마을을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식사를 하기 위해 밝힌 불과 마을을 태운 불은 다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입씨름을 하다가 왕에게 가서 그렇게 말한다면 왕은 어느 쪽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존자여, 마을 사람들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대왕이여, 어째서 그렇습니까?”

“존자여,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마을을 태운 불은 그 사람이 식사하기 위해 사용한 불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현재의 명칭 형태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명칭과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두번째의 것은 첫번째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악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밀린다 왕은 그렇다면 악업을 받은 윤회생존의 주체는 옮아가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존자여, 사람이 죽은 경우에 윤회의 주체가 다음 세상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납니까?”(T. 71)

나가세나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왕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러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등불과 시(詩)를 비유로 들어 왕에게 반문한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하나의 등에서 다른 등에 불을 붙인다고 합시다. 이럴 경우 하나의 등이 다른 등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왕은 아직도 이것의 뜻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라고 한다.

“대왕이여, 당신이 어렸을 때 어떤 시인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기억할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당신에게 옮아온 것입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몸으로부터 다른 몸으로 윤회의 주체가 옮김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구성요소인 5온이 옮김 없이 그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윤회전생의 계기를 만드는 요인을 이루는 것은 업이고, 윤회생존인 우리의 개체는 업이 상속(相續)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업은 일반적으로 선인락과(善因樂果)라든지 악인고과(惡因苦果)의 응보를 한결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불교만 아니고, 인도의 다른 종교도 윤회설을 업의 응보 관념과 결합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런 응보설이 불교의 무아설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주체 내지 행위를 책임지는 항상하는 주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무아’라면 행위의 주체 내지 행위의 책임 소재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밀린다 왕은 무아설에 뒤따르는 난점을 몇 번이고 찔렀고, 이와 관련해 윤리적인 면에서 윤회전생의 이론에 관해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명칭과 형태’가 다만 타는 불처럼 주체의 연속으로서 계속 윤회한다는 것을 밝혀서 왕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항상 불변의 주체라든지 실체로서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나가세나는 전생의 주체가 상주하는 것이고, 따라서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신체 안에서 어떠한 윤회의 주체가 전이한다는 생각을 배척했다.

5. 맺는 말

우리는 오늘날 이런 말을 곧잘 한다. ‘불교는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쩐지 마음에 끌려 불교를 알고 싶어하고 불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교단을 보면 여러 점에서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나라 불교도는 거의 1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과연 그 많은 신도들 가운데 불교교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아니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물으면 그 대답이 어떻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런가.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일반 신행자가 모르는 불교교리를 스님이나 알만한 불교인들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고, 또 일반 신행자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요즈음 우리 나라 불교는 양적·질적으로 제2의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아주 번창하고 있다. 일주일이면 멀다 하고 학회도 열린다. 하지만 학회에서 발표되는 연구 성과물들이 불교를 종교로서 신행하는 일반 신도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문제만은 아니고, 불교 발생국 인도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특히 불멸 후 여러 부파로 쪼개지면서 다양한 이론을 내놓는 아비달마 불교 시대에서는 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의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인도에 들어와 인도 변경 지방을 통치하던 밀린다 왕도 그랬던 것 같다. 《밀린다팡하》는 바로 그런 시대적 사정을 반영한 책이다. 그 시대는 인도뿐만 아니고 그 서쪽 너머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거기서 밀린다 왕이 던진 질문들은 2천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역시 던지고 싶은 질문들이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들이다.

《밀린다팡하》를 읽노라면, 질문의 하나 하나가 조금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니 지금 내 자신이 밀린다 왕처럼 나가세나와 같은 해박한 선지식에게 질문해서 의문을 풀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바로 그리스인 왕에 의해 던져지고, 나가세나 비구에 의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 그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은 인도 일반의 특색이기는 하지만, 아비달마 교학처럼 학승들도 알기 어려운 불교교리를 굳이 빙빙 돌리지 않고, 아주 쉽게 해명하려고 하는 태도에 호감이 간다.

다만 2천여 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 나가세나의 대답 가운데는 우리들의 지성으로 수긍할 수 없는 설명도 물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대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 불교의 진수를 아는 데 아무런 불편 없는 훌륭한 대론서이고 대론 내용이다. ■

문을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논저서로 <기우다빠다의 불살생과 용수의 중도설><마야설의 불이일원론적 이해><인도의 사상과 문화><역서로 힌두교 입문><인도철학의 자아사상>등이 있다.

나선 비구경(밀린다 왕문경) 연구 | 대승경전/밀린다 팡하

밀린다 왕문경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Ⅱ. 서장(序章)

1장

1. 이름에 관한 문답

2. 나이에 관한 문답

3. 장로의 엄숙한 약속

4. 아난타카-야의 영혼에 관한 문답

5. 출가의 목적

2장

1. 무아설은 윤회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2. 윤회에 관하여

3. 해탈하면 지식은 없어지는가

4. 해탈한 사람도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가

5. 감각이 성립하는 근거

6. 윤회의 주체

7. 윤회에 관하여

8. 명칭과 형태

9. 생사윤회를 벗어남에 관하여

10. 지혜에 관하여

11. 계행의 특징에 관하여

12. 신행에 관하여

13. 정진에 관하여

14. 전념에 관하여

15. 정신통일에 관하여

16. 지혜의 특징에 관하여

17. 일체의 선법은 번뇌를 끊는다.

3장

1. 시간이 존재하는가

2. 영원한 시간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3. 시간의 시원은 인식되지 않는다

4. 윤회하는 생존은 시작이 없다.

5. 윤회하는 생존이 성립하는 근거

6. 개인의 존재의 형성력

7. 배다구우(영적인 것)에 관하여

8. 감각과 통각에 관하여

9. 접촉의 특징에 관하여

10. 감수의 특징에 관하여

11. 표상의 특징에 관하여

12. 의사의 특징에 관하여

13. 식별작용의 특징에 관하여

14. 성찰의 특징에 관하여

15. 고찰의 특징에 관하여

4장

1. 여러 가지 정신 작용의 협동

2. 통각작과 자연 법칙의 문제

3. 인격의 평등과 불평등

4. 수행의 시기

5. 업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따라

6. 불교의 우주구조설

7. 이상의 경지, 열반(涅槃)은 지멸 (止滅)인가

8. 누구나 열반을 얻는가

9. 열반이 즐거움(安樂)이란 것을 어떻게 아는가

5장

1. 부처님(佛陀)은 실재(實在)한가

2. 부처님은 뛰어난 분이신가 1

3. 부처님은 뛰어난 분이신가 2

4. 윤회의 주체는 전생하지 않는다

5. 영혼같은 것은 없다.

6. 업은 어디에 있는가

7. 과거나 미래에 대한 의식의 연속

8. 열반하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6 장

1. 출가한 자에게 육신은 소중한가

2. 부처님 가르침이 실천적 성경에 관하여

3. 부처님의 32가지 위인의 특징에 관하여

4. 부처님은 지혜를 가진 최고의 인격자다.

5. 부처님은 계행을 갖춘 최고의 인격자다.

6. 이전을 초월하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정신

7. 해탈을 얻은 사람의 생존

8. 지혜는 어디에 깃들고 있는가

9. 윤회란 생사의 연속을 말한다.

10. 생각은 기억에 의존한다.

11. 기억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7 장

1. 열여섯 가지 기억 형식

2. 염불로써 구하는 것

3. 수행의 목적

4. 신통력을 갖는 자

5. 사후(死後), 다시 태어나기 까지의 시간

6.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지혜(칠각지)

7. 공덕을 증대시킴으로써 얻는 것

8. 모르고 짓는 악행은 지과가 더 크다

9. 신통력(神通力)과 마음의 자재력(自在力)

10. 장장 7백마일이 뼈

11. 초인적인 생리현상

12. 큰 바다에 관한 논의

13. 지혜는 가장 미세한 것도 끊을 수 있다.

14. 영혼과 정신 작용의 구별

15. 뛰어난 심리현상의 분석

16. 대론을 끝내며

III. 논란

 

1장

1. 부처님에 대한 공양(供養)은 결과를 맺는다

2. 부처님은 전지자(全知者)다

3. 데바닷타(提婆達多)는 어찌하여 출가하게 되었는가

4. 벳산타라 왕의 보시(布施)

5. 눈을 보시한 시비(尸毘)왕

6. 수태(受胎)에 관하여

7. 부처님 가르침(正法)의 존멸(存滅)

8. 세존께서는 모든 죄악을 소멸하고 부처님이 되셨는가

9. 부처님(如來)에게 다시 더 수행해야 할 것이 있는가

10. 신통력(神通力)을 칭찬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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