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원각경 법문을 마무리하며 하신 당부말씀

수선님 2023. 6. 18. 12:26

불교를 수행하는 불자들을 위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한다 

1. 자신의 알음알이를 고집하지 말라.


  알음알이라는 것은 육식(六識)을 말한다. 
 눈으로 보아서 알고, 귀로 들어서 알고, 코로 냄새 맡아서 알고, 혀로 맛 봄으로서 알고, 몸으로 부딪쳐서 알고, 마음으로 헤아려서 아는 것들이 육식이고 알음알이인 것이다. 불교 수행은 어디까지나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수행함으로서 몸소 체험해서 깨쳐 알아야 되는 것이다. 알음알이로 아는 것은 상식적이고 피상적이며 관념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중생지견(衆生知見)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아는 것을 옳게 아는 것이라고 고집해서 좀처럼 참된 진리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아는 것을 내새워서 참된 진리의 말을 묵살해 버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불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불도를 성취하자면 먼저 자기자신의 알음알이로 아는 것을 남김없이 모두 다 버려야 할 것이요. 무엇이나 아는 것이 있으면 이것이 곧 병(病)인 것이다. 이 병은 중병 중에서도 가장 큰 병이요, 심하면 불치의 병이 되어 불도는 영원히 성취할 수가 없게 되는 무서운 병이다. 이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아무리 참된 진리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이 무서운 병을 고치고자 하면 우선 무조건 자기의 아는 것은 틀린 것이고 선지식들의 말이 옳은 것이라고 굳게 믿어야만이 이 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찰의 사찰 불이문(不二門)이나 사찰 정문인 일주문에는 반드시 “입차문내(入此門內) 막존지혜(莫存知解)”라는 글이 붙어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아는 것을 가지고는 이 문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병을 고치지 않는 한 절대로 불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병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게 아는 것이고 선지식들의 말이 도리어 틀린 것처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경전의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 
 

경전에 의하면 석가세존께서는 무량한 오랜 세월 즉 무량한 아승지겁을 통해서 백개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알과 같이 많은 수의 부처님들께 공경하고 공양하여 선근(善根)을 심어서 비로소 연등불의 수기(授記)를 받아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시였다.
 이 경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들 중생들은 그와 같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그와 같은 많은 부처님들에게 선근을 심지 않았으니 도저히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미리 겁을 먹게 되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아예 단념하게 된다. 
이 경의 말씀대로만 중생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부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그 모두가 방편설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경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 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고 되어 있으나 부처경지는 시공간(時空間)이 끊어져서 무량한 아승지겁이라는 시간관념이 없는 자리다. 비록 수많은 부처님들이라고 하나, 부처경지는 똑같아서 갈라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이라서 수많은 부처님들이라고 하나 꼭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지견을 가진 한 분의 선지식에게 공경하고 공양하면, 삼세일체의 모든 부처님들에게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이 된다. 경의 방편설에 얽매여서 미리 겁을 집어먹고 불도 닦는 일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삼세제불에게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보다 무심도인(無心道人), 즉 정지견을 가진 한 분의 선지식에게 공경하고 공양하면 그 공덕이 더욱 크다고 하였다. 또 아무리 오랜 세월에 걸쳐서 수많은 부처님들에게 공경하고 공양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성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불하고자 하면 불도를 닦아서 성취해야 되는 것이다. 정지견을 가진 선지식에게 공경하고 공양하고 나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아서 성취해야 되는 것이다. 정지견을 가진 선지식을 모시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각고의 수행을 하면 누구라도 성불할 수가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닦으면 되는 것이다.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된다. 경전이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이기는 하나 말 밖에 또는 문자 밖에 숨어있는 참된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 경에 의하면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명호 앞에 참회하고 서원해야 된다고 되어 있으나 부처님의 참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부처님이라고 할지라도 중생들이 본래 간직하고 있는 불성(佛性)과 똑같아서 불가분이며 꼭 하나인 것이다. 중생들이 자성(自性)에게 참회(懺悔)하고 서원(誓願)하면 일체제불에게 참회하고 서원함이 된다는 뜻이다. 

 


3. 경전의 문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능엄경(楞嚴經)에 말씀하시기를 음심(淫心)을 제거하지 않고는 삼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시였다. 왜냐하면 생사(生死)의 근본은 애욕(愛欲)이기때문이다. 출가인이나 재가인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음심이 없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음심이 없다면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송장일 것이며 목석과도 같은 것이다. 
 부처가 이런 죽은 사람이나 목석과도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없애고자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음심을 그냥 두고 음심에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무주무착(無住無着)이면, 음심을 제거하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또 능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고기를 먹는 사람을 어떻게 불자라고 하겠느냐고 하시였다. 또 능가경 차식육품에 말씀하시기를 육식은 곧 살생행위라고 하시였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불자는 자비심을 으뜸으로 하고 있으며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인 것이다. 육축(肉畜)과 물고기가 모두 나와 동체인데 어떻게 그의 고기를 먹기 좋아 하겠는가?
 그러나 출가인이 아닌 재가인들은 사회인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고 또 부모처자의 가족관계도 있어서 그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아가야 함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과 어울려서 같이 고기를 먹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생활과 가정관계를 원만하게 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가 없으니 만부득이해서 그들과 어울려서 같이 고기를 먹게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의가 아니니 만부득이해서 고기를 같이 먹되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에 집착만 하지 않으면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 되는 법이다. 
 육조혜능대사께서도 대오(大悟)하시고 법을 펴지 못하고 십오년 동안이나 은거생활을 하시면서 살생을 업으로 하는 사냥꾼들과 어울려서 같이 생활한 일이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가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서 생활을 하되 일체에 집착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불도의 대본이다. 
 제자가 달마대사에게 묻기를 가정을 가진 사람은 음욕을 버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달마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오직 견성(見性)을 말할 뿐 음욕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범부는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욕이 문제가 되지만 견성만하면 음심과 욕심이 본래 공적하여 끊거나 버리기 위해 힘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지도 않으니 습성이 남아 있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 집착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비록 색신(色身) 가운데 있더라도 물들거나 더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가인(在家人)이라도 견성(見性)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만 하면 백정이라도 성불할 수가 있다고 하셨다. 또 율장(律藏)에 의하면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지켜야만 된다고 되어 있다. 그렇게되면 재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출가인이라  할지라도 그 많은 계율을 모두 다 지킨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 오기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다. 어느 누가 감히 그 모든 계율을 능히 다 지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되지도 않는 일이다. 아마  도인 이라고 할지라도 그 많은 계율을 모두 다 지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한번 호흡하는데 공기중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미물중생 들이 죽어 갈 것이다. 발을 한 발자국 디디면 많은 미물중생들이 밞혀서 죽을 것이다. 농부들이 밭을 갈게 되면 흙 가운데 있는 많은 미물중생들이 죽거나 다치게 됨으로 계율을 모두 다 지킬 수 없거니와 모두 다 지킬려고 하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느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의식적으로 살생(殺生)을 하고 도적질 을 하고 간음(姦婬)을 하고 파계(破戒)하는 일이 있어서는 불도는 고사하고 중생계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성불하겠다고 전심수행(全心修行) 하는 사람들이 그런 파계를 할 리가 만무하다.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자성 밝히는 수행을 하면 모든 올바른 행을 겸해서 다 같이 닦게 되는 것이다. 계행(戒行)은 물론이요 육바라밀(六婆羅密)과  모든 선행(善行)을 같이 닦음이 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계율을 운운하면서 계율에 묶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계율을 존중하고 지키는 일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나 계율에 집착해서 묶여 있어서는 불도는 고사하고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또 계율을 아무리 다 지킨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성불할 수가 없다. 성불하겠다고 결심하고 각고의 수행을 쌓아 올려야만 성불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계율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계율을 지키되 계율에 집착해서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계율을 지켜야 되겠다고 집착하면 계율에 얽매임이 되는 것이고 계율에 주착하지 않으면 계율을 지킴이 되는 것이다. 집착해서는 안된다. 물론 불교교단을 지키고 또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자면 어디까지나 계율에 집착하고 계율을 생명과도 같이 엄격히 지켜나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다.
 그러나 한 티끌에도 얽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견성성불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계율에 얽매임도 큰 병이 되는 것이다. 언재 어디서나 어떠한 경계에서도 계율에 무주무착(無住無着)해야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부처님의 뜻이기도 하다. 육조혜능대사께서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음이 계(戒)요,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음이 정(定)이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혜(慧)라고 하셨다.     


 

4. 법에 묶여서도 안된다.

 

 경에 의하면 망상을 여의어야 한다. 번뇌를 여의여야 된다. 개구즉착(開口則錯)이다. 
 이러니 법(法)에도 묶여서는 안된다. 망상과 번뇌를 여의려는 생각이 곧 망상이며 번뇌인 것이다. 망상과 번뇌 등 일체의 생각에 주착하지 않으면 망상이 곧 보리(菩提)요 번뇌가 곧 열반(涅槃)이다. 
 개구전착(開口前錯) 개구즉착(開囗則錯)이라고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도 하지 않는 그런 부처는 있을 수가 없다. 만약 개구전착(開口前錯) 개구즉착(開口則錯)이라고 하는 것에 얽매인다면 상구보리(上求菩提)는 어떻게 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생각을 하고 또 말을 하고 행을 하되 거기에 주착하지 않는 것이 참된 부처인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말의 뜻이 바로 이런 뜻이다. 일체의 법에 얽매여서도 안된다. 


 5. 부처님께 얽매여서도 안된다.

 

 목불(木佛) 금불(金佛) 석불(石佛)에 얽매서 집착 하는 것은  것은 자성을 죽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성불(自性佛)을 두고서 다른 곳에 부처를 찾으면 사도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수행하는 수도자가 “목불, 금불, 석불에 공경하고 공양하여 기도하면 불보살의 가호가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승속(僧俗)간에 너무나 많음을 볼 수 있다.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가 마음의 조작이요 중생들이 마음으로 만들어내어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한 중생들이 그렇게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적어도 자성을 밝혀서 불도를 성취하겠다고 대승진리(大乘眞理)의 공부를 하는 수행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해서야 되겠는가. 
 자성 밖에서 부처를 찾으면 사도인 것이다. 또 참된 부처에 얽매여서도 안되는 법인데 하물며 목불 석불 금불은 무지한 하근 중생들의 신앙의 대상이지 참 부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신앙의 대상인 목불. 금불 석불에 얽매여 가지고 언제 성불할 수가 있겠는가.

 


 6. 승(僧)이다 속(俗)이다 하는 관념(觀念)에 묶여서도 안된다. 

 

 재가속인이 불도를 닦는다고 하면, 대뜸 먼저 묻는 말이 어느 절에 나가서 공부를 하느냐고 묻게 된다. 마치 불법이 절에만 있어서 절에 가야만 공부도 하고 나아가서 견성성불(見性成佛)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음을 볼 수 있다. 재가인들은 수계(受戒)도 하지 않고 따라서 계율(戒律)도 지키지 아니하고 오신채, 즉 마늘과 파와 달럐와 부추와 홍거 등등 냄새나는 음식과 고기와 술을 먹고 또 부부생활도 하면서 눈만 뜨면 이해관계에 얽혀서 살아가니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일체 중생들은 본래로부터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일찌기 석가세존 부처님께서 제세시에도 유마거사와 같은 분은 재가인이면서도 성불(成佛)한 분이 아니었던가. 또 그 후에도 유명한 방거사(龐居士)와 부설거사(浮雪居士) 월명(月明) 아씨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재가인들이 견성성불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불법에는 승속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불법이 절에나 있고 또 산이나 어디 먼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속간에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곧 불법인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모두 불법 아닌 것이 없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일체 경계에 무주무착(無住無着)하면 되는 것이다. 무주무착한다는 것은 계율을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에 쏠리지 않고 또 일체의 경계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빠져 들어가지 아니함을 말하는 것이다. 
 불도의 대본은 무주무착인 것이다. 무주무착하면 행을 해도 행을 함이 아니되는 것이다. 신출가(身出家)를 해서 승려가 되어서 수도를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비록 신출가(身出家)도 중요한 일이나 심출가(心出家)가 더욱 가치가 있고 중요한 일이다. 심출가(心出家)란 대승진리의 불도를 닦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일체 경계에 주착(住着)함이 없는 마음가짐으로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록 재가인들은 형편에 따라서 신출가는 못했을지라도 심출가를 해서 선지식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에 몰두하면 견성성불할 수가 있는 것이다. 
 수행을 게을리하면 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출가인이라고 해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견성성불하는 것이지 그냥 출가만 했다고 해서 견성성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요는 승속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견성성불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불도를 열심히 닦으면 승려나 속인이나 인천(人天)의 공경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공경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승이다 속이다고 하는 관념에 묶여서도 안된다. 또 공부를 하는 방식에 있어서 비록 재가인이라고 할지라도 한편으로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일상생활을 해가면서 언재나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간직하는 공부를 쌓고 수련을 해 나가야 한다. 
 나라 일에 충성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고 가정을 원만하게 이끌어 나가면서, 화두(話頭)는 잊지 아니하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계에서라도 소소(昭昭)하게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는 것이 일상생활에 조금도 방해가 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모든 일에 충실해도 화두는 생생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심야(深夜)에 잠을 자지 말고  용맹정진을 계속해야 하며 낮에는 낮대로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일상생활을 하여도 조금도 지장이 없게 된다. 용맹정진을 한다는 것은 일체심(一切心)을 완전히 쉬게 하는 것이니 낮일에 조금도 고단하거나 피로하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정신은 더욱 맑아서 일이 더 잘 되는 것이다.
 한달 두달 석달 할 것 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때까지 용맹정진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화두를 타파해야 하는데 화두를 타파하자니 잠을 적게자고 정진을 해야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중도에 좌절하는 일이 있으면 견성성불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견성성불을 못하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자면 필연적으로 용맹정진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한편으로는 용먱정진을 계속하고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하게 되어 있다. 견성성불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경에 가서는 용맹정진에 들어가야만 승부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자신의 알음알이에 얽매여 있어도 안되고 경전의 문자에 얽매여서도 안되는 것이다. 또 계율(戒律)에 묶여 있어서도 안되며 법(法)에 묶여 있어서도 안되고 부처에 얽매여서도 안되며 승(僧)이다 속(俗)이다 하는 관념에 묶여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털끝만치라도 어디엔가에 마음이 묶여 있거나 얽매임이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로 막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경계에 무주무착(無住無着)해서 오직 자성(自性) 밝히는 수행에만 전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대추나무에 연줄 얽히듯이 이렇게 많은 곳에 얽혀 있어서야 어떻게 불도를 닦아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 불도를 닦을 수가 있겠으며 이래서야 어떻게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에 들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안될 말이다. 
 티끌만치라도 얽매인 것이 있으면 불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렇게 많은 곳에 얽혀 있어서야 이것은 묶여 있는 것이지 어떻게 일체 무애의 해탈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불법의 근본은 동체평등(同體平等)에 있는 것이요 불법의 대본(大本)은 무주무착(無住無着)에 있는 것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야 하는 것이다. 
 운문선사(雲門禪師)같은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신데 대하여,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석가모니를 때려 잡아서 주린 개에게나 줄 것을 하셨다. 여기에 있어서 부처에 묶여 있는 중생들은 기절초풍했을 것이요 겁이 나고 죄스러워서 아마 석달 열흘 앓아누웠을 것이다. 운문선사를 때려 잡아야 된다고 아우성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가 온 누리의 주인공(主人公)이요 그냥 그대로가 불성(佛性)인데 새삼스럽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후세중생들을 개오(開悟)시키기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경계하신 것이다. 
 어느 선사는 부처에 묶여서 꼼짝 달싹을 못하는 스님네들을 후세에까지 길이길이 건져주고자 하는 대자대비 한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네들 앞에서 목불을 불태워 보임으로 부처에 얽매여 있는 병을 고쳐주고자 애쓰신 일이 있었다. 어떤 선사는 부처님의 경내에서 소변을 하면서 온누리가 비로자나불의 법신(法身)인데 어디에 따로 소변할 곳이 있는가 하고 부처에 묶여 있는 병을 고쳐주고자 애를 쓰시었다. 

 

 진묵대사(眞默大師) 같은 스님은 곡차를 즐겨 드셨다. 진묵대사 음주송(飮酒頌)에
 천금지욕 산위침(天衾地褥 山爲枕)
 월촉운병 해작준(月燭雲屛 海作樽)
 내기무 대취거연(乃起舞 大醉居然)
 각혐장유 괘곤륜(却嫌長䄂 掛崑崙)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로 삼으며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삼아 바다물을 술통으로.
 술을마시고 크게 취하여 일어나서 두둥실 춤을추니
 옷소매가 곤륜산(崑崙山)에 걸릴까 두렵도다.

 하는 유명한 무애경계(無礙境界)의 음주송(飮酒頌)을 남겨서 후세 중생들이 계율에 묶여 있는 병(病)을 고쳐 주고자 무애행의 거울이 되게 하셨다. 무애도인(無礙道人)이신 경허선사(鏡虛禪師)같은 분은 사찰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사내대중들에게 보임으로서 계율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스님네를 건져 주고자 힘쓰시었다.
 어느 선사는 전신에 똥을 칠하고 다니면서 청정한데에 묶여 있는 중생들을 건져 주고자 애쓰시었다. 어느 선사는 평생을 광인행(狂人行)으로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같은 이들은 무애걸인행(無碍乞人行)으로서 중생들이 모든 것에 걸려 있는 병들을 고쳐주고자 무애행의 본보기로 행세하셨다. 
 그 밖에도 많은 선지식들이 중생들의 얽매여 있는 모든 병을 고쳐 주고자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갖은 애를 썻던 것을 생각할 때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이와 같이 모든 대성(大聖)들께서 중생들의 얽매여 있는 병들을 고쳐주고자 애를 쓰고 있는데 어찌 해서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계율에 묶이고 부처에 묶여서 쩔쩔매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능엄경(楞嚴經)에 묶여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능가경(楞伽經)의 방편설(方便說)에 묶여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설이니 부처님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생각을 돌아켜서 부처가 되라고 했지 언제 모든 것에 걸려 있으라고 했는가. 무엇에나 걸려 있으면 이것은 묶여 있는 것이지 어찌 그것이 해탈일 수가 있겠는가.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무애요 해탈인 것이다. 여기에 또 무애경지의 시들을 게재하니 일체의 걸림을 풀고 해탈하기를 바란다. 

- 서산대사(西山大師) 향로봉시(香爐峰詩)

 만국도성 여질의(萬國都城 如蛭蟻)
 천가호걸 야해계(千家毫傑 若醢鷄)
 무한송풍 운역재(無限松風 韻亦齋)
 일창명월 청허침(一窓明月 淸虛枕)
 일만 나라의 서울은 마치 개미들이 사는 곳과 같고.
 천 집의 영웅호걸들은 마치 초벌레들이 우굴거리는 것과 같네
 솔바람의 곡조 또한 멋지나니 
 창문에 비치는 밝은 달빛만 베개위에 맑도다. 

-  소동파 연화대시(蘇東坡 蓮花台詩)
계성자시 광장설(溪聲自是 廣長說)
 산색기비 청정신(山色豈非 淸淨身)
 야래팔만 사천게(夜來八萬 四千偈)
 타일여하 거개인(他日如何 擧皆人)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곧 무정설법(無情說法)인데
 푸른 산 빛은 어찌 청정(淸淨)한 법신(法身)이 아닐까 보냐.
 밤의 팔만사천의  수 많은 시들을
 다른 날 그 모두를 어떻게 이야기하리요.  

 

 중생들이 불도를 닦는 목적은 깨달음에 들어서 대자유자재하여 이와 같은 무애경지에 들고자 함이거늘 무엇에나 털끝만치라도 걸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자신의 못된 습성을 합리화시키려고 무애행을 빙자해서 흡사 무애도인인양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천불출세(千佛出世)라도 구제불능이니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또 한마디 더 하고자 한다.

 

 1.

 

경전에 한문으로 된 원문은 석가세존 부처님께서 직접 번역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께서 사십오년간 설하신 법문을 부처님께서 열반하신후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께서 경전으로  만든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그대로를 말해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말하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법인데 과연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께서 반드시 경전 전체가 부처님의 뜻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또 중국 땅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어서 사본에 사본을 거듭해 내려오다가 우리 나라에 들어 온 것만해도 천육백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렸다. 또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사본을 거듭해서 내려오는 과정에서 빠진 구절도 있었을 것이며 오자도 있었을 것이고 원본과 틀린구절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뜻과는 점점 거리가 먼 다른 방향으로 끌려 가게 되고 말법시대의 불법(佛法)은 부처님의 뜻한 바의 정법(正法)은 멀어지고 그릇된 법이 성해지게 되는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현재 유포되고 있는 경전 가운데에도 원문이 빠진 구절이 있는가 하면 오자도 많이 있음을 더러 본다. 이래 가지고서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까. 
 한문으로 된 원문은 부처님께서 직접 번역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번역되고 또 그것을 사본해 내려오는 것이니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번역된 부분이 있을 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목판본 능엄경(楞嚴經) 제 6권에 미망유허공(迷妄有虛空)이라는 원문이 있다. 미망유허무(迷妄有虛無)라고 되어 있어야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인데 미망유허공(迷妄有虛空)이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는 관계로 그 뜻이 엉뚱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릇되게 전해져 내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원문이 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하면 부처님께서 진리에 어긋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단연코 번역이 잘못된 것이니 원문의 문구에 진리를 갖다 맞추려고 하지말고 원문을 진리에 맞도록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왕왕 진리를 갖다가 원문에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음을 본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 그래서 문자에 의지하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수가 있고. 또 문자만으로서는 증득할 수가 없으니 불입문자(不立文字)라는 말도 나오게 된 것이다. 불자들은 이 점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2.

 

일월성신(日月星辰)이라고 해서 별 성 “星”자와 별 신 “辰”자를 넣어서, 별이 겹쳐 있음을 본다. 
 여기에서 눈 밝은 수행자는 선도리(禪道理)로 한번 살펴봐야 한다.
 석가세존 부처님께서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발해서 세계각국 어느나라 어느 땅에나 화신(化身)으로 나투시어 현재 오늘날에도 중생교화에 여념이 없으실 것이다. 또 끝없는 미래까지 교화하실 것이라는 것을 노납(老衲)은 믿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옳은 대승진리이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선사께서 객선을 탔는데, 갑자기 돌풍을 만나 심한 파도가 일고 배가 곧 뒤집혀질 지경에 이르러 위험하기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선객(船客)들 모두가 죽는다고 아우성치고 있는데, 유독 선사만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나니 다행히 파도도 멎고 해서 배가 육지에 닿자 모두들 배에서 내리게 되었다. 그때서야 선사는 일어나서 내리니 모두들 선사에게 모여들어 우리들은 꼭 죽는 줄만 알고 아우성치고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스님은 태연히 누워만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사왈 나는 배를 탄 일이 없노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무주무착(無住無着)의 표본이 아니겠는가. 
 소가 어떻게 생긴건가 명확하게 모르면서 말로만 듣고 책에서나 보고 마음으로 헤아려서 네 발로 걸어다니고 머리에는 뿔이 두개 있는 줄만 알고 소는 자기집 마굿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디 먼 곳에 있는 줄로만 알고서 찾아 헤매어 다닌다. 문득 들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염소를 발견하고 네 발로 걸어다니고 또 머리에 뿔이 두개 나 있으니, 이것이 소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으로 몰고 와서 나는 이미 소를 발견해서 집에 몰고 왔다고 하면서 염소를 소인줄 그릇 알고서도 참으로 소를 안 것 같이 굳게 믿고 행세를 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눈 한개만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눈 두개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면 무슨 괴물이나 온 것 같이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떠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 한개 가지고 있는 자기네가 괴물이면서도 도리어 눈 두개 가진 사람을 병신 취급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소라는  것은 색깔도 다양하고 사람도 태우기도 하고 짐을 등에 실어서 가기도 하고 짐수레를 끌고 가기도 한다. 운반하는 데에도 쓰이고 농사도 짓고, 또 호랑이 같은 짐승들을 만나면 사람들을 보호할려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용맹하게 호랑이와 싸워서 쫓아 버리기도 한다. 또 거다가 강을 만나면 헤엄쳐서 건너기도 하고 산에 닿으면 산을 넘기도 하여 무엇에나 두려움이 없고 걸거침이 없다.
 그런데 염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을 보면 겁을 내고 호랑이를 만나면 잡아 먹히는 등 아주 보잘 것 없고 쓸모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와 같은 염소를 소라고 그릇되게 알고 굳게 믿고 있다가는 언젠가 호랑이를 만나면 잡아 먹히고 말 것이다.확실하게 틀림이 없는 소를 찾는 공부에 열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자면 확실하게 소를 아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지 염소를 소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을 따라서 공부를 하면 소는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방편문에도 팔만사천문이나 있는데 옛날 한 남자가 아이를 낳고 호랑이가 답배 피우던 시절의 방편을 그냥 그대로 쓴다는 것은 촌노들리 사랑방에나 모여 앉아서 이야기나 하는 고담꺼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 들에게는 어제가 다르게 날로 인지가 발전해 나가야 하고 따라서 달나라에도 갔다 왔다 하고 로버트가 음악회를 하고 가정부 노릇도 하고 직공 노릇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또 말만 하면 그대로 글자가 인쇄되어 나오기도 하고 서로 마주보면서 전화도 하게 되고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초과학 문명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우리 불교도 이에 발맞추어 전진에 전진을 거듭해서 현실감각에 맞는 방편법문으로서 대중을 끌어 들여야만 제도가 가능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불교는 아직 이와 같은 전진을 보지 못하고 낙후되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현대문명에서 낙후된 후진국가와 그 민족은 그야말로 비참하기가 이를 때가 없고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라는 것도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와 반대로 선진국에서는 옛날 평양감사 상(床)보다 더욱 좋은 상이 들어와도 한눈에도 차지 않아서 양주하고 더 좋은 상을 들여오라고 호통을 치고 떵떵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불교도 현대문명에서 낙후되면 쇠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현대문명보다 한 발 앞서 간다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핵무기 시대에 활이나 쏘고 녹슨 부엌칼을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방편법문에 있어서 수백년 전의 고인들의 발자취에만 맹종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인줄만 알고 신봉을 하게 되니 어디엔가 고색이 짙어 보이고 탕국수 냄새가 나서 현대인들의 생기 발랄한 감각에 맞지 않으니 자연히 이들과의 거리는 날로 멀어져 갈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인들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현대감각에서 낙후된 부분이 있다고 하면 과감히 이것을 제거하고 현대 감각에 맞게끔 개안수술도 하고 심장이식수술도 해서 날로 진보하고 있는 이들을 우선 불문에 끌어들어야 제도도 하지 않겠는가. 끌어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무슨 수로 제도한다는 말인가. 
 현대인들 대부분이 불교공부를 하고 싶어도 불교의 말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말이고 글도 특별한 한문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읽을 수가 없는 말이고 글도 특별한 한문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읽을 수가 없고 또 안는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윤곽조차 잡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디를 찾아가도 알아 듣도록 말해 주는 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불평들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불교가 일부분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라도 비록 국민학교 학생들이라고 할지라도 능히 알아들을 있도록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들 중에는 쌀이 어떻게 생기는가 물으면 쌀나무에서 열린다고 할 것이라는 학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겨자씨니 백수자니 하고 있으니 현재 어른들 중에서도 참으로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차라리 모래알이라고 하던지 무궁화나무라고 한다던지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방편문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이미 늦기는 하나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시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빙산에 일각을 예시한 것에 불과하며 그 예를 들자면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만약에 시대가 조금 더 지나면 겨자씨니 백수자니 하면 영어인지 독일어인지 조차도 모르게 될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가지와 잎사귀를 이리 접하고 저리 고쳐서 꽃이 더욱 아름답고 열매도 크고맛도 더 있고 보기도 더 좋게 하는데 열을 올려서 개조하고 발전을 하니, 모두가 환희심을 가지고 여기에 끌려들어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의 뿌리는 그 가지와 잎사귀 등에 눌러서 맥을 못추고 있는 형편이요 주인이 우둔하니 권속들이 방자해서 주인을 멸시하고 자기네들 뜻대로 하게 되면 질서는 문란해지고 통솔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주인이 옳은 주인 노릇을 해야만 권속들도 순종하고 질서가 잡혀서 모두가 원만하게 되는 법이다.
 이제는 주인이 당당하게 큰 소리 치면서 주인 노릇을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당당한 주인 이라야 주인 행세도 하고 권속들이 순종 하는 법이다. 이것으로 하던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좀 쉬운 이야기로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신도님에게나 법회에 활용했던 이야기들을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서 비유를 발취하여 좀 쉽게 활용 하도록 하겠다. 지금까지는 대승경전 이야기로 너무 어렵다는 말씀이 많아서 다음은 아함부 경전에서 쉬운 이야기만 좀 쉬었다 가는 의미에서 비유를 들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ARAMA - 체계적인 불교 공부 - 원각경 법문을 마무리하며 하신 당부말씀

불교를 수행하는 불자들을 위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한다 1. 자신의 알음알이를 고집하지 말라. 알음알이라는 것은 육식(六識)을 말한다. 눈으로 보아서 알고, 귀로 들어서 알고, 코로 냄새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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