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모정불심] 2.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의 어머니

수선님 2023. 5. 21. 13:35

“니 혼자 부처 되면 뭐 하노?” 

‘너혼자 부처되면 뭐하겠느냐’는 
스님 어머니만의 타박이자 경책
모범생 장남 출가 보낸 죄인으로
평생 살면서도 끝까지 자식 걱정
어머니 멀리 떠나보내는 49재서
“다음생 중 엄마 되지마소” 弔辭

 

그림=박구원

팔순의 노모가 예순 살이 넘은 아들 스님에게 전화를 건다. 가끔 하는 안부전화다.  

“애미다.” 
“평안하십니까?”
“스님, 뭐 하시노?”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공부 덜 했나?”
“부처가 되려면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니 혼자 부처 되면 뭐 하노.”

열다섯 살에 부모를 버리고 출가해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정진하며 중생교화의 길을 걸어왔지만, 어머니의 무심한 한마디에 아들 스님은 가슴이 뜨끔하다. 그래도 한 마디 안 할 수 없다. 

“만 중생 제도해야지요.”
“한 중생도 제도 못하면서 무슨 만 중생을 제도할 끼고. 한 중생 다 죽고 난 뒤에 제도해라.”
“제도해도 제도된 바가 없답니다. 어머니 스스로 잘 제도하고 계시네요. 그만 끊으소.”
“우야든지 몸조심해라.” 

아들 스님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니 혼자 부처되면 뭐 하노’, 어머니의 그 소리는 선배 조사 스님들이 내리친 장군죽비보다 더 뼈아팠다. 출가자는 마땅히 일체 중생과 함께 해야 하는데, 나 홀로 선방에서 이슬이나 먹고 사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선원수좌회 의장을 역임하고, 지금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과 문경 세계명상마을(국제간화선 센터) 운영위원장 소임을 보고 있는 월암 스님은 중학교 2학년 때 출가했다. 머리 좋고 모범생이던 장남이 경주의 한 절에서 법문을 듣고 출가해버리자 부모님은 망연자실했다. 아들이 경주의 최고 명문중학교에 들어가자 이제 판·검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기고, 시골의 논밭을 팔아 경주 시내로 이사까지 했던 아버지는 비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낳았던 어머니는 ‘집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켰길래 아이가 집을 나가게 만들었느냐’는 지아비의 닦달에 죄인이 되어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홀로 남아 농사지으며 어린 아들 둘을 키웠다.  

“기가 막히고 서운하셨겠지만 내색은 안했죠. 말씀이 없었고 매사에 무던한 분이셨어요. 그냥 선한 분이셨습니다.”

누구보다 기대를 걸었던 큰아들이 출가해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 후 어머니의 일생이 얼마나 신산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리라 뜨겁게 발원하고 출가를 감행했으나, 왜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찾았다. 제대 후 재발심을 다지며 지리산 칠불암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온 뒤였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 동생들을 키우고 있는 어머니를 며칠이라도 모시고 있다가 돌아가고픈 마음이었다. 

20대의 늠름한 청년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기뻐했다. 정성껏 찬을 준비해 밥상에 올려놓았다. 얼굴이 환해졌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말씀은 안 해도,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나이에 출가했다가 이제 철이 드니 집으로 돌아오려나 보다 생각하는 것이 역력했다. 며칠을 더 묵으며 떠날 기회를 엿보다 칠일 째가 되는 날 걸망을 챙겨들었다. “어머니, 저 갑니다.” 
사립문을 나서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그렇게 가야만 하는가’하는 눈빛으로 한마디 토해냈다. “마, 가나?”

스님에게 물었다. “아무리 스님들이 냉정하다 해도 그때 어머니를 두고 나서는 심정이 쓰리셨을 것 같아요.”
“좀 마음이 아팠죠. 그러나 어차피 돌아가야 하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뚜벅뚜벅 걸어 나와 버렸죠.”

그런데 이 무정한 이별이 스님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었던 걸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어느 해 겨울, 다시 어머니가 사는 고향집을 찾았다. 생각해보니, 나이 50세가 넘도록 부모님을 한 번도 봉양해 본 적이 없었다. 밥 한 끼 지어드린 적이 없고 용돈 한번 드리지 못했다. 돌아가시고 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그해 동안거를 고향집에서 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스님은 30대 중반에 중국 북경대학으로 유학해서 선학(禪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에 있던 10년 동안 중국 동포를 대상으로 포교에 있는 힘을 다 쏟았다. 그리고 돌아와 몇 달 간 지리산 벽송사에서 수백 명의 사부대중을 앞에 두고 사자후를 토해냈다. 무문관에도 들어가 정진했다. 그리고 세간의 수많은 중생들에게 법문을 해 무명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아들 스님이 법문하는 곳을 찾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 법문을 들었다. 사람들이 간혹 물었다. “보살님, 아드님이 큰 스님이 되어서 좋으시지요?”
어머니의 답은 담백했다. “큰 스님이 뭔교?”

아들 스님은 가끔 찾아오는 어머니에게 염불하며 사시라고 권했다. 그런데 어쩐지 어머니는 염불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염불 잘하고 계십니까?”
“따로 무신(무슨) 염불이 있나. 착하게 사는 게 염불이지.” 

남달리 신심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아들이 죽어라 공부할 때 농사를 지어 남은 자식들을 키웠던 갑남을녀의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 스님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오십 중반 줄에 들어선 아들 스님의 효도에 칠십이 넘은 어머니는 이번에도 말할 수 없이 기뻐했다. 아들은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어머니께 올렸다. 어머니는 스님 아들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기가 불편했다. 며칠이 지나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기쁨을 빼앗는 것 같아 아들도 더 이상 우기지 않고 어머니가 지어주는 밥을 먹었다. 3개월 동안 시장에 함께 가서 장도 보고 목욕탕도 모셔다 드렸다. 고향 가까운 절에 가서 함께 절도 올리고 바닷가로 드라이브도 나갔다. 일찍 지아비를 보내고 장성한 자식들은 객지에 나가 살아 홀로 살던 어머니는 한겨울 내내 얼굴에서 웃음꽃이 지지 않았다. 모처럼 친구들에게 아들 스님 자랑도 했다. 

“어머니가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잘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비로소 마음의 빚을 덜었죠.”

다시 십 년 후, 스님은 지난 해 여든여섯의 어머니와 영원히 작별했다. 눈감기 하루 전, 중환자실에서 1인 병실로 옮겨 혼수상태로 계시던 어머니는 아들 스님의 방문을 받고 ‘괜찮으세요’ 묻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별 일 없죠? 지금 가셔도 되겠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은 어머니께 〈원각경〉 ‘보안보살장’을 읽어드렸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들의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아들이 부르는 아미타불 염불을 마음속으로 따라 불렀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도 아들이 먼저 일어났다. “저 갑니다. 언제 가실지 모르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아미타불을 부르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과 이별한 어머니는 다음 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월암 스님은 어머니의 49재 날, ‘어머니의 독백’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영전에 올렸다. 

도통골에서 자라나 가마골로 시집갔다. 아들 셋 낳았다고 칭찬들을 때는 몰랐네. 
늘그막에는 딸이 보배라는 것을. 큰아들 학교 입학해서 백점 맞아왔을 때 처음으로 신랑에게 큰 소리 한 번 쳤다. 못 배운 애미 뱃속에서 백 점짜리 나왔다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부디 공부 잘해 판사 되고 검사 되소. 이 애미도 어디 한번 호강하고 살아보게. 욕심이 과하면 동토가 난다더니 큰아들 출가하고 남편마저 가출하니 남은 것은 철부지 어린 것들. 여기저기 귓속말 들려온다. 저 집 아들 중질 갔단다. 
집 나간 두 남자, 그리고 집에 남은 두 남자. 구멍 뚫린 가슴 모진 바람 지나간다. 
부모 복 없으면 남편 복 없다고 어디 자식 복 있겠냐만. 그래도 우리 시님 법회 온다 소식이 있어 뒷자리 숨어 난생 처음 법문을 듣고 보니, 이제사 알겠다 애미 뱃속에서 부처가 나온 것을. 
어쩌랴, 기쁨도 잠시 중생심이 발동하니 니 혼자 부처되면 뭐 하노. 자식은 애미를 버릴 생각이 있지만 애미는 자식을 버릴 마음이 없다는데 한 자식 출가하면 구족이 승천한다고 어디 한번 묻어갈 수 있는지. 
다음 생엔 절대로 중 엄마 되지 마소. 차라리 중이 되고 말지.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 이토록 절절한 시를 올린 스님에게 어머니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세상에 나오도록 몸을 빌려주신 분이죠. 못난 이 중생을 인도하려고 보살의 화현으로 오셨는지도 모르죠.”

중생제도를 위해 한생을 보냈는데 어머니를 제도했을까? “내가 제도한 바도 없고 어머니도 제도 받을 분도 아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길을 가셨고 저는 제 길로 가는 겁니다. 그냥.”

법문을 할 때마다 쩌렁쩌렁 큰 소리로 ‘지금 그대들의 본래면목은 안녕하시냐’고 묻는 월암 스님에게 이 시대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예요. 항상 자리이타가 몸에 배어 있는 대승보살이어야 합니다. 명예나 돈, 출세 등의 허상을 강요하는 자식교육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간성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사 제행무상이 아닌 것이 없으나 동서고금, 시대를 막론하고 어머니의 대승보살 역할은 변함없을 것 같다. 


 

 

 

 

 

 

 

[모정불심] 2.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의 어머니 - 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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