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16

물질불멸(物質不滅)의 원리(原理) / 구산 스님

물질불멸(物質不滅)의 원리(原理) 일체(一切)법의 유무(有無)가 불즉불리(不卽不離)인 이때에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다르지 않고 무명(無明)과 실성(實性)이 다르지 않으니 물질도 영원히 존재한다.그래서 환상(幻相)과 실상(實相)이 불이(不二)임을 실상(實相)심이라 하며미몽(迷夢)이 곧 본성(本性)심이며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물물(頭頭物物)이우주의 대(大)진리인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전신(全身)이다. 산야(山野)에 있는 고목(枯木)을 물론 죽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생여사 아사여사(我生汝生 我死汝死) 내가 살면 너도 살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라고 보는 것이 옳게 본 것이다. 고목뿐이 아니라 소라를 잡아서 삶아 알맹이를 까서 먹었다.그 소라는 껍질 만 남아 있는데 성품(性品)..

선지식 2024.10.20

<불교 의식(儀式) 예불문>

​불교 사찰에서는 조석(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린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은 에서 ‘예불에 나아가되 모름지기 조석으로 근행해서 스스로 게으름을 꾸짖으며, 대중이 행하는 차례를 알아서 어지럽히지 말라’고 하셨다. 마음을 다잡고 정성 드려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 의례는 군더더기가 없다. 깔끔하면서 무게가 있다. 그 순간 의례에 참여하는 불자들은 누구나 마음으로 나름의 다짐을 하게 된다. 그 의례의 순서를 보자. 아침예불의 순서를 살펴보면, 도량을 청정히 하는 도량석(道場釋)으로 시작된다. 사찰에서 새벽 예불 전에 도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행하는 불교의식을 도량석이라 한다. ​――――도량석(道場釋)――――​도량석이란 말은 도량을 깨운다, 도량을 풀어준다는 뜻이다. 도량은 모든 불보살이 ..

불교 2024.10.20

백장야호 / 철학자 강신주의 무무관과 철학

불교의 중도란 느슨한 인과 관계를 긍정하는 지혜​모든 것이 공하다고 보면대상에 대한 집착 끊어져​항상 존재한다는 생각과없다는 생각 버려야 중도​성인, 인과 어둡지 않을뿐초월해서 존재하지는 않아​백장(百丈) 화상이 설법하려고 할 때, 항상 대중들과 함께 설법을 듣고 있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설법이 끝나서 대중들이 모두 물러가면, 노인도 물러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은 설법이 끝나도 물러가지 않았다. 마침내 백장 화상이 물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迦葉) 부처가 계실 때 저는 이 산에 주지로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학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 저는..

선의 세계 2024.10.20

「산은 산이요(山是山), 물은 물이로다(水是水)」

「산은 산이요(山是山), 물은 물이로다(水是水)」참 평이한 말이다. 초등학생도 말할 수 있는 이 평이한 말이선가(禪家)의 법어로 회자하게 된 것은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이 말이 처음 선가에 나오게 된 유래는 살펴보면중국 송(宋)나라 때 선승인 청원행사(淸原行思)가 한 말로송(宋)대에 발간된 전등서(傳燈書)인「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 비롯된다. ​「오등회원(五燈會元)」은 중국 남송대(南宋代)의 선승(禪僧)보제(普濟): 1178∼1253)의 지휘 아래 그의 제자들과기존의 불조(佛祖) 전등록(傳燈錄)들을 정리 재편집하여송나라 보우 원년(寶祐元年: 1253)에 간행된 전등서로그 뒤 원나라 말기인 지정 2년(至正二年: 1364)에 중각된 뒤로도여러 번 증각 되었다. 보제(普濟)의 속성은 장씨(張氏)‚호..

지혜의 공간 2024.10.20

인도불교-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1)

인도 불교-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1)  ​불교 발상지 인도가 요즘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와 G-7 등 서구 세력에 대항하여 앞으로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브릭스 BRICS’ 국가가 영향력이 커지고, 경제력이 향상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고. 골드만 삭스의 경제학자 짐 오닐(Jim O'Neil)은 이들 네 나라가 2050년에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잠재력이 있다는 설을 발표했다.미국 실리콘 벨리의 구글 등 IT 업계의 사장에 특히 인도 공과대학 출신들이 많다는 보도가 많다. 또 인도의 실리콘 벨리인 ‘벵갈루루’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오히려 인재들이 벵갈루루로 몰려든다는 흥미로운 기사도 자주 보인다. 인구..

불교관련 2024.10.20

부처님 울타리 속에서 평생을 살다 / 송석구

나의 삶 나의 불교나의 삶 나의 불교. 나의 삶이란 내가 살아온 역사일 것이요, 나의 불교란 나와 불교는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내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를 입학할 때부터 나는 불교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나의 자의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역사는 동국대학교의 울타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동국대학교 생활이 나의 삶의 역사이다. ​얼마 동안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때가 있긴 하였으나, 그때도 동국대 강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으니 동국대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나의 불교도 단 한 번도 다른 종교를 넘나든 경험이 없기에 나는 불교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속에 살았다는 뜻은 나의 팔십 평생의 역사 속에 ..

불교관련 2024.10.20

어떻게 해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할 수 있는가?  중국 당나라 때 운문(雲門) 스님이정월 초하루날 원단(元旦)의 상당(上堂)에 올라가셔서대중들한테 하시는 말씀이'내가 그대들에게 과거(過去) 지나간 달의 소식은 묻지 않고닥쳐오는 달의 그 소식을 한마디 말해 보아라'. 지나간 달의 소식은 그대들에게 아무런 해답(解答)을 구(求)하지 않고,앞으로 당래(當來)하는 달의 소식을 한마디 말해보아라,그리했단 말입니다.이 때 대중(大衆)가운데 한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쉬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그래서 운문대사(雲門大師)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대답했습니다.년년시호년(年年是好年)이요, 해마다 바로 좋은 해요.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날마다 바로 좋은 날이라. -중략- 그런데 운문(雲門)스님께서는..

선지식 2024.10.20

蘇東坡(소동파) 시모음

​蘇東坡(소동파) 시모음  蘇 東坡(1036-1101) 宋代의 詩人. 字는 子瞻, 이름은 軾, 東坡는 號다. 仁宗 景祐 3년 (1036, 고려 정종 2년) 사천성 眉山에서 태어났다. 22살 때 아우 蘇 轍과 함께 과거에 급제, 곧 代理評事簽書에 임명되고, 다시 鳳翔判官에 제수되었다. 神宗때 王安石과 의견이 맞지 않아, 지방으로 나가 杭州通判이 되었다가, 이어 密州.徐州.湖州등지를 맡아보았다. 이 무렵 이미 그의 文名이 높아서 소인들의 싫어하는바 되어, 44살 때 마침내 黃州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동쪽 언덕(東坡)에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 스스로 東坡居士라 일컬었다. 哲宗이 즉위하자 吏部尙書가 되었다가, 곧 潁州지사가 되고 뒤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兵部尙書, 禮部尙書를 역임, 翰林 侍讀의 양 學士를 ..

기타 2024.10.20

『숨』 - 죽음과 삶에 관하여 / 능행스님

​긴말 필요 없이 『숨』은 생명이다. ‘숨 쉬면 살고, 숨 안 쉬면 죽는것이다.’능행스님은 비구니로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불교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정토마을」을 운영하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스님은 병원을 운영한 지, 20여 년 만에 온몸으로 맞닥뜨린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성찰, 죽음의 결과물로 삶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고 한다. 이 책은 2015년 나왔다. “20년 이생과 저생의 정거장 앞에서 온몸으로 죽음을 맞닥뜨린 경험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그동안 제 곁에서 세상을 떠난 많은 분들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지금 죽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책‘프롤로그’에서 스님이 한 말이다. 어느 날 성문 밖으로 나갔다가 생로병사의 고..

불교관련 2024.10.20

발우공양에 담긴 뜻 / 구미래

특집 | 음식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1. 발우공양의 유래와 전승​인간은 음식을 섭취해야 살아갈 수 있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일 정도는 대부분 해결할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밥이 주식인 우리에게 ‘밥’은 ‘끼니’와 동의어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물질이기에, 밥은 그것이 지닌 의미에 비추어 가장 신성한 동시에 가장 무심한 대상이다. 따라서 ‘밥을 먹는 일’에 대한 의미를 새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한 끼를 때우거나, 사교와 식탐이 풍성한 식탁 위에서 자유롭게 음식을 소비한다. 현대인이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도 ‘나의 한 끼가 좀 더 풍요롭기를 바라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인간이 지향하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식사’와 반대편에 놓인 ‘불편한 식사’가 있다. 그것은..

불교 2024.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