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6. 중도(中道)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만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했다. 율장 초전법륜편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세존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이라 한다.”
성철은 불교의 근본이 중도사상에 있음을 대중에게 알렸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고 확증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성철은 근본불교사상, 중관사상, 유식사상과 천태종, 화엄종 등 선종의 핵심 사상 등을 총동원해서 중도사상을 설파했다. 중도사상은 출가에 영향을 끼친 ‘신심명’ 머리에 나오는 구절이 핵심이었다. 성철은 이를 적확하게 새겨서 평생 익히고 숙성시켰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니,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中道正覺)을 이룬다는 것이다. 중도의 기본은 있음(有)과 없음(無), 생함(生)과 멸함(滅) 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성철은 또 흔히 중도를 변증법으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했다.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한다고 가르쳤다.
성철의 법문은 구체적이었다. 중도의 실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전했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만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雙照二諦]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음과 그릇됨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성철은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고, 그것이 곧 중도라 말했다. 또 불생불멸은 관념론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것이며 이는 과학이 증명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성철은 불생불멸의 중도법문을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로 설명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입니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E=mc²)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우리가 다 아는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하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한다는 것은 미국 물리학자 앤더슨(C. D. Anderson),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간 이탈리아 학자 세그레(Emilio Segre)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은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나면 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 얼음이 녹아서 물이 돼도 얼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상대성 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에서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질량으로 전환하고 질량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쌍생쌍멸(雙生雙滅)이라고 합니다.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할 때 언제든지 쌍으로 변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고 합니다. 앤더슨의 실험에서도 광(光)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양전자와 음전자를 합하니까 완전히 쌍으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이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이 됩니다. 이것은 중도의 공식, 곧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쌍차쌍조의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전환하는 이론으로 증명이 됩니다.”
결국 자연계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은 불생불멸, 부증불감이며 따라서 우주는 영원토록 상주불멸이었다. 성철은 주장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으로 우주 전체를 환히 들여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이 그대로 불생불멸임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음을 마침내 알아냄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원리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요사이 이것이 수학적, 과학적으로도 4차원의 세계라는 개념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정확한 것이 수학인데 거기에 4차원 세계의 공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4차원 세계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것인데, 민코프스키(H. Minkowski)라는 수학자가 4차원 세계의 공식을 완성하여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놓고 첫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앞으로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온다.’
3차원이라는 입체 즉 공간을 말하며 시간은 1차원입니다. 그런데 차별상대의 세계인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되어 현상계의 차별 모순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불교 중도의 진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은 같다고 봅니다.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중도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4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기 때문에 물과 불이 서로 통하여 물이 곧 불이며 불이 곧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걸림이 없는 세계[無碍世界]라고 합니다.”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를 일관하는 중도사상이라는 것은 불교만의 독특한 진리였다. 부처님 앞에도 없었고, 부처님 살아계실 당시에도 없었다.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다했어도 아무 소득이 없었지만 그러한 행을 버리고 보리수 아래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공부하여 새벽별을 보고 정각을 이루었던 것이다. 양변을 떠나 가운데[中]도 머물지 아니하는 중도사상만이 오직 참다운 극락세계를 이 현실에 실현시킬 수 있었다. 성철은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 선과 교를 하나로 꿰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다.”
그것은 자랑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잘 이해하여 전수해주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불교보다 나은 진리가 있다면 나는 언제든 불교를 버릴 용의가 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하지는 않았다’고 한 그 진리는 바로 중도사상이었다. 중도란 곧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중도를 깨쳤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자리’ ‘근본자성’을 바로 보았음을 뜻하니, 그것이 곧 견성이었다.
중도설은 두 변에 집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형식이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수행에서 지켜야하는 실천적인 것이다. 성철은 중도사상을 진리로 체득하고 이에 감응하여 살았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1호 / 2016년 2월 10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7. “과학이 불교였다 아니 불교 속으로 과학이 들어왔다”
『“불교는 가장 과학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늙고 오래되어 낡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사실은 가장 새롭고 역동적인 종교였다. 성철은 이런 ‘과학 법문’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다. 동구불출하며 공부했던 성전암에서 성철이 메모한 수십 권의 노트에는 과학으로 불교의 근본교리가 밝혀지고 있음을 찬탄했다.”』
성철은 과학 이론을 통해 불교의 원리를 설명했다. 백일법문에서도 또 이후의 법문에서도 불교의 진리를 과학으로 풀어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니라.(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란 유형을 말하고 공이란 것은 무형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쯤 되면 법문인지 과학 강의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불교는 가장 과학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늙고 오래되어 낡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사실은 가장 새롭고 역동적인 종교였다. 성철은 이런 ‘과학 법문’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다. 동구불출하며 공부했던 성전암에서 성철이 메모한 수십 권의 노트(성전암 노트)에는 과학으로 불교의 근본교리가 밝혀지고 있음을 찬탄했다.
‘우주의 근본 대원리를 구명하여 합리 또 합리한 만세부동(萬世不動)의 법칙으로써 조직되어 허공은 가히 붕괴시킬 수 있으나 이론체계는 추호도 움직일 수 없는, 영원히 진정한 종교가 3천 년 전부터 존재하였다. 유-그릴의 기하공리(幾何公理)는 이론이 천박하여 이해가 용이하므로 고금을 통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영원히 진정한 종교의) 이 교리는 원래 우주의 심오난사(深奧難思)한 근본원리를 토대로 하였으므로 일반적인 보급은 지극히 어렵고, 오직 탁출(卓出)한 몇몇 지혜인에 독점되어 심산궁곡(深山窮谷)의 고경(古經) 속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경이적 비약으로 인지(人知)가 크게 발달한 금일에야 비로소 그 진가의 일부를 공개하게 되어 그 광명이 점차 우주를 덮게 되었으니 다름 아니라 인도의 싯다르타 태자가 개척한 우주의 원리인 불교 그것이다.
우주의 대신비를 천명한 심원(深遠)한 불교 교리는 1940년대의 과학으로도 몰이해 상태에 있었으나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어서 원자과학의 극치인 등가원리 즉 질량에너지 동등원리가 만방에 공개됨으로써 불교교리의 기초인 진여상주이론(眞如常住理論)을 다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고 또한 백 인치 2백 인치 망원경이 완성되어 광대무변한 은하계 밖 우주를 측정함으로써 3천대천세계의 불교우주관을 인식하게 되고, 전자현미경으로 일호(一毫)에 9억이란 불교세균설을 규명하여 판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러한 사실로만 보더라도 불교가 얼마나 광대심원한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성전암 노트)
성철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가 진가를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허황하고도 미신적이라며 공격받던 불교 교리가 과학의 힘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며 대견해했다. 성철은 또 영국의 캐논 경(Sir Alexander cannon)의 ‘잠재력(The Power Within)’이란 보고서를 인용하여 인간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캐논 경의 실험 보고를 통해 인간의 정신작용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에 관계없이 독립해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정신과 정신이 서로 통하는 텔레파시(Telepathy)라는 ‘정신감응’이 있음을 얘기했다. 한쪽에서 어떤 생각을 강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하면 그 생각이 그대로 상대편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 부처님이 수백, 수천의 장소에 몸을 나타내는 ‘분신(分身)’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 쓰는 ‘육근호용(六根互用)’도 가능하다고 했다. ‘중국 사천에 사는 어린이가 모든 것을 귀로써 본다’는 언론 보도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다[耳見眼聞]는 이 말은 본래 불교에 있는 말입니다. 오조 법연 선사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번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 수 없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서로 통하게 됩니다.”
성철은 ‘아함경’이나 ‘범망경’ 또는 ‘화엄경’에 나타난 불교의 우주관에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봤다. ‘한 일월(日月)이 한 세계를 빚어 천(千)세계가 있나니 이것이 소천(小千)세계요, 소천세계가 천이 있나니 이것이 중천(中千)세계요, 중천세계가 천이 있나니 이것이 대천(大千)세계’(아함경)라는 것과 또 ‘백억 세계에 백억 일월이 있는 끝없는 세계대해’(범망경)는 부처님이 설파한 우주관이었다. 하지만 광대무변한 세계대해를 사람들이 이해할 리 없었다. 허망한 망설로 배척당했다. 그러다 과학이 발달하여 대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관찰한 사람들은 경악했다. 부처님의 우주관은 틀림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대천세계를 세 번 곱한 것이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표현방식을 뿐이고 실지 내용은 백억 세계, 혹은 백억 일월인 것입니다. 또 이 백억 세계, 백억 일월을 한 불찰(佛刹)이라고 하고 이런 불찰이 미진수(微盡數)로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입니다. 이런 크기는 혜안이 열리지 않고는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 망원경을 통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주라는 것 밖에도 무한한 우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단순히 별 하나뿐인 단일체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모인 집단 우주가 무한히 많은 숫자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사진에도 나타나고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무한한 우주집단이 대략 40억 개 내지 50억 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백억 세계라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과학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철은 부처님의 혜안에 두손을 모았다.
‘광대무변한 공간에 무한히 흩어져 있는 대성운들을 확인한 금일에서야 비로소 불교의 삼천대천 백억 세계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으니, 석가모니는 무슨 능력의 소유자이길래 이러한 불가사의한 통찰력을 가졌는지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성전암 노트)
성철은 전생과 영혼, 그리고 윤회가 있음을 설파했다. 아이임에도 지난 생을 정확히 기억하고 이를 얘기하는 전생기억(前生記憶), 몸을 바꾸어 다시 살아나는 차시환생(借屍還生), 최면술 등을 이용하여 전생을 연구하는 연령역행(年齡逆行), 전생을 꿰뚫어 전생과 금생의 인과를 아는 전생투시(前生透視) 등 사례를 모아 제시했다. 정신과학 등을 동원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적시하여 인간에게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전생과 영혼, 윤회가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성철은 전생기억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다.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生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난 뒤로 한 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곧 나면서부터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생이지지는 바로 전생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금생에로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성철은 또 처음 가보는 것인데 낯이 설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생은 분명 있었다. ‘법화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욕지내생사 금생작자시(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최근 우주의 중력파가 검출됐다. 13억 년 전에 일어난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파동을 지구인들이 잡아냈다. 중력파는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면서 발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중력파는 불교에서 말하는 찰라와 겁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 속된 호기심 같지만 도(道)를 이루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인가. 성철이 인용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는 과연 도래할 것인가.
성철은 과학은 발달을 거듭할수록 불교 쪽으로 오게 되어있다고 말했다. 이미 중도와 연기사상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과학 속에서, 아니 그 위에서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설령 원자탄이 천 개, 만개의 우주를 다 부순다하더라도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사상의 원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성철이 중력파를 건져내는 우리 시대에 있었다면 또 어떤 설법을 했을 것인가. 성철의 ‘과학적인 법문’은 이전에 없던 것이었다. 결국 과학이 불교였다. 아니 불교 속으로 과학이 들어왔다. 성철은 반세기 전에 이미 무변광대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발견 또는 발명한 우주선에 올라 삼천대천세계를 유영(遊泳)하고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2호 / 2016년 2월 24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8. 청담, 그리고 향곡과 자운
『“청담이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이었다.”』
성철의 백일법문은 달리 말하면 중도법문이었다. 방대한 불경을 중도로 꿰어 쉽게 강설했다.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깨쳐야하는지 알 수 없었던 후학들에게는 귀한 지침이 되었고, 불자들에게는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바로 ‘백일법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이 법문을 통해 불자의 의식개혁을 일깨웠습니다.”(고우 스님)
백일법문은 제자 원택 스님의 표현대로 ‘일백 개의 해가 솟아있는 법문’이었다.
1971년 11월15일 조계종 총무원장 청담 스님이 돌연 입적했다. 청담은 도선사 경내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입적하기 나흘 전에는 이화여대에서 법문을 했고, 사흘 전에는 서울 대방동 공군사관학교 법당(현 보라매법당) 준공법회에 참석했다. 이틀 전에는 원주 1군사령부 법당 준공법회에서 설법했다. 일요일인 14일에도 신도들의 야외법회를 이끌며 설법했다. 실로 총무원장으로서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그렇더라도 청담의 입적은 누구도 예상조차 못했던 비보였다. 그날 밤 조계사에서 입적을 알리는 범종이 울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부대중이 크게 울었다.
성철은 해인사에서 도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한국불교는 청담이 더 있어야 했다. 정화불사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향곡과 만나 서울로 올라갔다. 향곡은 성철을 보자 대뜸 소리 질렀다.
“너 앞으로 레슬링 상대할 사람 없어 어쩔래?”
청담과 성철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붙잡고 힘자랑을 했다. 두 사람만 있으면 거의 난투극에 가깝게 뒹굴며 싸우는 게 흡사 레슬링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간혹 성철이 서울에 올라가 신당동 신도 집에 머물 때면 청담이 찾아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두 큰스님이 만났다하면 방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집안이 들썩거렸다. 집주인이 하도 궁금해서 어느 날 큰맘 먹고 방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두 스님이 웃통을 벗고 나뒹굴고 있었다. 고승의 풍모는 간 데 없고, 삭발한 학생 둘이 싸우는 것 같았다. 그걸 알고 있는 향곡이 레슬링 얘기를 꺼내 성철의 서운함을 달래줬다.
1964년 갈 곳이 없었던 성철이 도선사를 찾아가자 청담은 도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청담의 제자 현성은 이렇게 회고했다.
“성철 스님이 도선사에 오신 후부터 청담 스님의 방에선 두 분의 대화가 쩌렁쩌렁 울렸고, 간간이 박장대소가 도량을 휘몰아치곤 했지요. 이전까지 항상 참선으로 적요만 흐르던 스님의 방이었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나는 그 무렵 성철 스님에게 불만이 생겼어요. 은사이신 청담 스님이 훨씬 연상인데도 두 분은 ‘너, 나’ 하면서 서로 하대하는 거예요. 그 점이 이해가 안 갔지요.”
그리고 어느 날 현성은 청담 스님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스님이 큰형님뻘인데, 성철 스님은 예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청담은 그런 제자를 나무랐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보물이다. 그걸 내가 알지 못하면 누가 알겠느냐. 내가 열 살 많지만 불교는 성철이 열 배나 더 잘 안다. 그 따위 생각일랑 버리거라.”
청담은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대명사였다. 조계종단의 기틀을 마련했고 초대 중앙종회 의장, 종정, 장로원장, 총무원장 등 주요 소임을 차례로 맡았다. 청담은 평생 교단정화와 중생교화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현대불교의 거목이었다.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이었다.
“산중의 성철은 뜻이 깊다. 성철과 팔만대장경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성철 스님을 택하겠다.”
‘청담 스님을 위시한 종단정화가 수행환경의 외연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면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은 정화를 통해 확립한 그릇에 수행이라는 내용을 채우는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화에 발 벗고 나섰던 청담 스님과 끝까지 수행에만 몰입했던 성철 스님이 “부처님 법대로”를 기치로 삼았던 봉암사결사에서 서로 의기투합했던 도반임을 상기한다면 그 두 분은 각자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정화를 통해 설립된 해인총림에서 백일법문이 울려 퍼지지 않았다면 정화는 단지 사찰의 주인이 바뀌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서재영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오르네’)
성철에게 도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는 깊게 교유했다. 청담 외에도 자운과 향곡과 여러 일화를 남겼다.
향곡은 성철의 권유로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고, 봉암사에서 확철대오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성철이 물었다.
“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향곡은 성철의 질문에 꼼짝하지 못했고 그날부터 대분발심이 일어나 정진에 들어갔다. 그리고 21일 동안의 용맹정진 끝에 사중득활(死中得活), 즉 ‘죽은 자리에서 살아남’의 경계에 이르러 오도송을 지었다. 실로 도반의 참모습이었다. 당시 향곡은 경허-혜월-운봉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받았다. 스승 운봉으로부터 1944년 8월 전법게를 받았다. 이름과 위상이 우뚝 솟았음에도 도반의 질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수행 정진했다. 깨달음의 경계를 알아보고 질문을 던진 성철과 이를 받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공부에 들어간 향곡,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인가. 둘 사이에는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없었다. 오직 깨달음으로 가는 길 위에 함께 있을 뿐이었다.
1960, 1970년대의 불가에서는 ‘북전강 남향곡(北田岡 南香谷)’이란 말이 돌았다. 즉 ‘북쪽에는 전강 스님이, 남쪽에는 향곡 스님이 있다’ 했으니 향곡의 법력이 누리에 뻗침이었다. 당호 그대로 향기로운 골짜기를 이루었다. 나이가 같았지만 성철보다 먼저 입적했다. 1979년 1월 묘관음사에 머물다 원적에 들었다. 성철은 장의위원장을 맡고 추도사를 지었다.
‘슬프도다, 이 종문의 악한 도둑아. 하늘 위 하늘 아래 너 같은 놈 몇일런가. 업연(業緣)이 벌써 다해 훨훨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의 말이 되든 서쪽 집의 소가 되든 애닯고도 애닯도다. 갑을병정무기경(甲乙丙丁戊己庚)’
이 얼마나 소탈하면서도 절절한 그리움인가. 성철은 향곡을 생각하며 고비 때마다 떠나간 도반을 찾았다.
“지금 향곡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고.”
자운은 가야산 해인사 바로 왼쪽에 있는 홍제암에 머물렀다. 성철과 자운은 해인사 큰절의 양대 거목이었다. 성철과 자운은 1940년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만났다. 그리고 50년이 넘는 세월을 도반으로 지냈다.
일찍이 봉암사 결사 시절에는 성철의 부탁을 받고 이 땅에 계율을 다시 세웠다. 당시에도 이미 ‘포살’ 같은 절집의 전통을 되살리고 장삼의 본을 만들어냈다. 치열하게 공부하면서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철은 이렇게 회고했다.
“봉암사 시절에는 모두 어렵던 시절이라 탁발도 쉽지 않았지. 그럼에도 제일 많이 탁발을 다녔던 분이 자운 스님이야.”
또 성철이 성전암에 있을 때의 일화도 전해진다. 하루는 자운이 걸망을 지고 성철을 찾아왔다. 그 안에는 원고뭉치가 들어있었다.
“운허 스님이 ‘금강경’을 번역한 원고라네. 노스님께서 특별히 교정을 부탁하시니 한번 읽어주시게.”
“내가 어찌 노스님 원고를 교정본단 말인가. 나는 못하겠으니 다시 싸 짊어지고 가소.”
자운은 할 수없이 원고뭉치를 걸망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자운은 똑같은 걸망을 메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성철은 무심했다. 다시 거절했다.
또 몇 달이 지나 자운은 걸망을 지고 다시 성철을 찾아왔다.
“어른 체면을 봐 주시게.”
그렇다고 마음을 바꿀 성철이 아니었다. 그러자 자운이 불처럼 화를 냈다.
“내가 세 번을 올라와 부탁하고, 노스님이 세 번이나 교정한 글을 한 번도 못 봐주다니 이럴 수 있나.”
자운이 화를 내자 성철도 난감했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스님 말처럼 그 사이에 운허 스님께서 세 번이나 교정보신 것을 내가 손 댈 것이 뭐 있소. 내가 손대는 것 자체가 노스님께 불경 아닙니까.”
그러자 자운이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저 고집을 언제 꺾어 보려나.”
자운은 이렇듯 성품이 온화했다. 성철은 성전암에 머물던 1955년 해인사 주지로 추대되자 이를 뿌리치며 대뜸 자운을 추천했다. 그리고 자운은 또 “해인사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철 스님을 모셔와야 한다”며 문경 김용사에 머물던 성철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이끌었다.
성철도 자운의 청이라면 숙고를 거듭했다. 종정으로 추대되었을 때도 자운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기에 뿌리치지 못했다.
자운은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스님을 친견한 후 법제자가 되었다. 어질고 품이 넓어 “자운 스님 포대 속에 어른스님들이 다 들어가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교와 선을 익히고 율에 정통했다. 1992년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으니 세수 82세였다. 청정계율을 지킨 한국불교 계맥(戒脈)의 중흥조였다. 이름 그대로 ‘자애로운 구름(慈雲)’으로 수좌들을 품었으니 계를 받은 수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성철은 종정으로서 도반을 추모했다.
‘(전략) 계행은 달과 같고 자비는 꽃과 같아 삼공이 줄지어 빛남이로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닦으심이여, 맑고 맑고 깨끗하고 깨끗하도다. 만법을 거두시고 선정에 드심이여, 사바와 극락이 두 가지가 아니로다. 허허! 만리길이 황금의 나라요 천층의 백옥누각이로다. 온통 천지가 노래소리 춤이요 전 세계가 풍류일 뿐이로다.’
자운의 다비식이 끝나고 사리친견법회가 있었다. 법회가 진행되는 동안 제자가 사리를 모셔오자 성철은 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것이 자운인가, 사리가 이리 나왔으니 얼마나 좋은가.”
성철은 평소 재를 뒤적이는 사람들은 크게 나무랐지만 자운만은 예외였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9. “해동불교의 종조는 태고 보우스님이다”
『“본 종은 신라 도의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 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
1976년 7월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했다. 백일법문을 하면서 자신의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니고 선가의 본분을 버린 이론과 언설이라 했건만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문자를 동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답하여 붓을 들었는가. 성철이 보기에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하는 사법전등(嗣法傳燈)에 삿된 것이 스며들어 한국불교의 법계가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승려와 학자가 주동이 되어 조계종 종조를 갑자기 태고에서 보조로 바꿨다. 납득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성철은 이러한 뒤틀림이 곧 바로잡힐 줄 알았다. 문중에 어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종정이던 만암 스님은 종조 바꿔치기를 크게 꾸짖으며 조계종 종정직을 내던졌다. 1955년 8월이었다. 조사들의 행적에 밝았던 만암은 거의 800년 동안 모셔온 종조가 바뀌자 크게 낙담했다.
“종조를 바꿈은 환부역조(換父易祖)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고 어른의 노여움에도 종단은 끄떡없었다. 종단을 움직이는 세력은 따로 있었다. 결국 만암은 백양사로 돌아갔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도 조계종 내부에서는 별 일 없이 10여년이 지났다. 그러자 선승 성철이 나섰다. 문자에 의존해서라도 법맥을 제대로 알리고 법통을 바르게 잇고자 했다. 그 책이 바로 ‘한국불교의 법맥’이었다.
한국 승려들은 임제와 태고의 법손이며 이는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법맥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종봉영당기(鍾峯影堂記)’와 ‘서산행적초(西山行蹟草)’를 바탕으로 성철은 ‘임제태고종통(臨濟太古宗統)’을 세웠다.
임제……석옥(石屋)-태고(太古)-환암(幻菴)-구곡(龜谷)-벽계(碧溪)-벽송(碧松)-부용(浮蓉)
그리고 부용은 서산(西山: 청허)과 부휴(浮休)라는 걸출한 제자를 두었고 서산은 다시 사명(四溟)과 편양(鞭羊)을 두었다. 따라서 서산과 부휴는 임제를 바로 전한 태고의 법손이라는 것이다. 고승대덕의 비문과 행록(行錄) 등에도 태고종통임을 밝히고 있으니 성철이 전거로 든 것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휴정비(休靜碑), 대흥사 청허비(淸虛碑), 완주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 부휴비(浮休碑), 벽암비(碧巖碑), 선가귀감(禪家龜鑑), 사명집(四溟集), 남원 승연사기(勝蓮寺記), 대은암기(大隱菴記), 경헌비(敬軒碑), 취운비(翠雲碑), 허백비(虛白碑), 춘파비(春坡碑) 조계산 송광사사적비(松廣寺寺蹟碑), 백암비(栢菴碑), 벽송집(碧松集), 풍담비(楓潭碑), 월담비(月潭碑), 월저비(月渚碑), 화월비(華月碑), 허정비(虛靜碑), 연담비(蓮潭碑).
그럼에도 성철이 보기에는 거짓으로 지어낸 주장들이 난무했다. 불교학자 이불화는 ‘임제보조종통(臨濟普照宗統)’을 주장했다. 즉 태고 대신 보조를 종통으로 내세웠다. 성철은 이불화의 주장이 허구임을 여러 각도에서 파헤쳤다. 그중 염향사법(拈香嗣法: 개당 설법을 할 때 법 스승에게 향을 사르고 대중 앞에서 법통을 선언하는 것)을 내세워 보조가 대혜의 법을 이었다는 이불화의 주장이 허설임을 밝혔다. 문헌상으로 보조는 경산 대혜 스님에게 염향사법한 일이 없었다. 또 스스로 대혜의 법제자라 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불화는 보조가 대혜에게 염향사법했으므로 대혜의 법제자라고 우겼다. 후세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에도 보조는 스승 없이 오직 도만을 따랐고 불도징, 구마라습, 배도, 지공 등과 같은 무리라고 새겨져 있다. 즉 ‘단경’으로 스승을 삼고 ‘서장’으로 벗을 삼았다는 학자 목은(牧隱)의 평가대로 보조는 사법사(嗣法師)가 없었다. 이에 성철은 이불화에게 호통을 쳤다.
“이처럼 보조 자신은 물론 그의 법손들이나 뒷날의 역사가들도 보조를 두고 대혜의 법제자라고 일컬은 이는 한 사람도 없는데, 8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불화씨가 허설을 거짓 조작하여 보조를 대혜의 법사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그 이론은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자로서의 자살행위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 환속한 불교학자 이종익은 ‘법신종신설(法身宗承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보조가 단경과 대혜어록을 읽다가 조계(曹溪)와 대혜(大慧)의 심법(心法)을 발견하고 그 마음을 전했으니, 보조가 육신조계와 육신대혜를 사승한 것이 아니라, 법신의 심법(心法)을 스승으로 하여 종승(宗承)한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란 굳이 만나서 전법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마음으로 전해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불조의 혜명을 잇는 인가와 전법은 문중의 생명선인데 이를 부정했다. 이심전심이 꼭 만나서 전하는, 즉 면수구전(面授口傳)할 필요가 있냐며 “한 교조가 한 종조가 되는 것은 독창적이고 혁명적이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철은 다시 일갈했다.
“이종익씨는 궁여지책으로 법신상속설(法身相續說)을 주장하지만 이는 천고미문의 법을 파괴한 논설이다. 법신은 일체에 변만(遍滿)하여 개개가 평등구족함으로 어느 특정 법신을 사승(師承)한다는 것은 불법상으로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망론은 외도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왜 조계종단의 주류는 보조 띄우기에 열을 올리고 성철은 보조종통설에 주장자를 치켜들었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에서 활짝 핀 선사상이 한반도에서도 화엄종의 기세를 누르고 불교의 중심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조선조 말에 이르러서는 선종 하나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 한국불교는 돌연 1954년 불교정화를 내세운 이승만의 유시가 발표되고 이후 승려들의 다툼이 일어났다. 불교계는 비구승의 조계종, 대처승의 태고종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고종은 임제종의 적자인 태고 보우를 종조로 삼았고 태고의 홍가사(紅袈裟)를 선점했다. 조계종은 이에 맞서 보우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인 지눌을 새로운 종조로 내세웠다.
우리나라 선맥은 신라 도의국사에서 비롯되었다가 중간에 그 맥이 끊겼다. 그 후 고려 말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종의 법맥을 전해 받은 태고 보우가 다시 맥을 이었다. 그런 전통은 불교정화운동 전까지는 불교계가 통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불교정화를 거치며 태고종이 보우를 선점하자 조계종이 지눌을 선택한 것이다. 일종의 차별화였다. 그러나 지눌은 유학승이 아니어서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또 지눌은 깨친 후에도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을 주창하여 보우의 돈오돈수설과는 달랐다. 이때부터 종조와 사상 논란은 시작되었다. 사실 종조와 돈점논란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처승들과의 대립각을 세우고 치열하게 영역다툼을 벌였기에 공론화 할 수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보조의 종조 추대를 민족문화독립운동이라 치켜세웠다. 종교가 아닌 민족을 끌어들인 것이다. 태고 보우가 중국에서 법을 이어오고 보조는 그 누구의 법도 이어받지 않음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성철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달마는 서천(西天)에서 동토(東土)로 법을 전하였으니 동토의 초조(初祖)가 되며, 태고는 중국에서 해동으로 등불을 전하였으니 해동의 종조가 된다. 그리고 종명(宗名)은 나말·여초로부터 선종을 조계아손(曹溪兒孫)으로 통칭하였으므로 ‘조계종’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제1조는 한국불교의 종조를 보조라 하고 있다.
“본 종은 신라 도의(道義)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 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
성철은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이고, 보조는 사굴산문이니 법맥이 다르고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종조는 보조가 아니라 태고 보우 국사여야 한다고 간곡하게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지눌 보조를 받드는 제단은 매우 높고 견고하다. 물론 성철 또한 보조가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함을 ‘한국불교의 법맥’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가 태고법계임은 분명하다. 한편 사상적으로는 보조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교외별전이며 이심전심인 불법전승의 생명선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철에게는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준 득도사(得度師)는 있지만, 법을 이어준 사법사(嗣法師)가 없다. 성철은 선문의 철칙대로 오도 후 인가를 받으려 했다. 효봉, 만공 등 큰스님을 찾아다님도 나름 인가를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성철은 벼락같은 법거량을 기다렸지만 당시 선지식들은 주장자를 들지 않았다. 고승들과 성철 사이에 깨달음의 경계와 관련해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철은 결국 법 스승을 갖지 못했다. 불도징, 구마라습, 배도, 지공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보조 또한 그렇다.
보조도 성철도 법 스승이 없으니 사법전등의 계보에 오를 수 없다. 하지만 본인이 적손(嫡孫)이 아니더라도 계보는 바로 알려야 하지 않은가. 본인들은 모두 이를 인정하는데 후손들이 이를 비튼다면 그것이 큰일 아니겠는가. 1962년 3월에 제정된 조계종 종헌 제1조는 지금까지 한 자도 수정되지 않았다. 성철은 이렇게 고치라 말한다.
“본 종은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한다.”
이에 이의가 있는 이들은 벌떼처럼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철의 논지를 반박해야 할 것이다. 성철이 책에서 밝힌 논거들을 차례로 부숴야 할 것이다. 성철이 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보조의 사상이 뛰어나서, 단지 보조가 좋아서, 오로지 보조를 연구해서 보조종통설을 붙들고 있다면 또 다른 업을 짓는 일이 아니겠는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4호 / 2016년 3월 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0. 돈오돈수
『“깨친 이후 성철은 돈오돈수를 설파했다. 찾아오는 납자들마다에게 이를 강조했다. 당시 전국 선방에서는 견성 못한 승려가 드물 정도로 ‘성불견성’이 넘쳐났다.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한 소식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점검해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교(敎)는 말로 말을 전하는 이언전언(以言傳言)이지만 선(禪)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선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달함이 근본이다. 흔히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선교일치를 무심하게 얘기한다. 하지만 성철은 이를 무심하게 넘기지 않았다. 예리하게 바라봤다.
선은 깨침[證]이요, 교는 이해[解]이니 그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조선불교의 최고봉이며 중흥조인 청허 스님도 선은 천자(天子), 교는 백 천 신하[百僚]에 비유하여 선과 교는 비유 자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살지만 그 밥맛을 팔만대장경 이상으로 기록하고 설명해 놓는다 해도 실제 밥맛은 거기 들어가 있지 않다. 하지만 밥 한 숟가락을 딱 떠먹으면 찰나 간에 그 밥맛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는 밥맛을 얘기하는 것이고 선은 밥 한 숟가락을 떠먹는 것이다. 그러니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진정한 깨달음도 선종에서는 단박 찰라[頓]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견성성불(見性成佛)법을 주장한다. 반면에 교문(敎門)에서는 층계를 올라가듯이 점차 공부하여 성불한다고 가르친다. 선종에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直指人心]’ 돈교문(頓敎門)만을 주장하고 점차문(漸次門)은 삿된 것으로 취급했다. 선종의 근본은 단박 깨침[頓悟]에 있기에 점차문은 육조 혜능대사의 조계정맥이 아니었다. 육조 스님은 ‘단경’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돈점논쟁은 7세기 중국불교에서 자못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렇다면 돈(頓)과 점(漸)은 왜 생겼는가. 육조 혜능은 본래 법에는 돈과 점이 없다고 했다. 단지 사람마다 근기가 달라 수승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있기에 돈과 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돈문(頓門)으로 들어가 도를 빨리 성취하고, 근기가 하열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점문(漸門)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점문은 방편가설이지 실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점문을 실법으로 알고 참다운 선이라 주장하면 삿된 종[邪宗]이라 했다.
그리고 1000년이 훨씬 넘은 한국 불교계에서 다시 돈점논쟁이 불붙었다.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은 어떻게 이뤄지고 그 경계는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음과 깨달았지만 점차 더 닦아 성불에 이름. 돈오돈수 속에는 성철이 우람하고 돈오점수 속에는 지눌이 우뚝하다. 사실 돈오돈수라는 용어는 성철이 처음 사용했다.
“돈오돈수란 말은 성철 스님이 몸소 현토·편역한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법보단경’에는 한 번 등장한다. 이것이 비록 성철 스님이 지어낸 내용이 아님에도, 즉 중도 및 돈오돈수사상이 새로운 사상은 아니지만 이 사상들은 한국불교의 개혁자로서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알맞게 소개한 것을 미루어 보면 성철 스님의 창의성이나 개척정신을 알 수 있다.” (서명원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 서명원은 창의성이나 개척정신을 얘기하지만 사실은 성철이 돈오점수가 전통 선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방편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돈오점수가 선문의 정맥인 양 인식되고 성찰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반대 개념으로 돈오돈수를 부득이 일으켜 세운 것이라는 얘기다.
깨친 이후 성철은 돈오돈수를 설파했다. 찾아오는 납자들마다에게 이를 강조했다. 당시 전국 선방에서는 견성 못한 승려가 드물 정도로 ‘성불견성’이 넘쳐났다.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한 소식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점검해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견성했으니 인가해 달라고 찾아오는 자들도 태반은 견성은커녕 몽중일여도 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견성은 대무심지(大無心地)인 오매일여를 넘어선 구경각이라 일러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스님, 스님의 견성은 하늘의 별처럼 까마득히 높습니다.”
성철이 보기에 통탄할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임제종맥을 이어받았다는 조계종은 깨달음의 경계를 잘못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지눌 보조 스님의 ‘수심결’ 영향이 컸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함을 말한다. 그것은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렇기에 ‘단박에 닦는다[頓修]’라고 한다.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음이다. 전체를 다 마쳤음이니 등각(等覺)을 넘어선 묘각(妙覺), 즉 구경각이다. 이는 경전과 경론, 그리고 선종 정안조사들의 말씀이 전하는 바다. 성철은 ‘능가경’ ‘대열반경’ ‘대승신기론’ ‘유가론’ ‘육조단경’ ‘종경록’ ‘원오록’ 등을 인용하여 돈오돈수의 참의미를 밝혔다.
돈오점수의 ‘돈오’는 곧 ‘해오(解悟)’이다. 해오란 얼음이 본래 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듯 중생이 본래 부처란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망상은 아직 그대로이다. 얼음이 본래 물이라 해도 얼음인 채로는 융통자재할 수 없다. 중생이 본래 부처란 것을 알았다 하여도 번뇌망상이 남아있는 해오는 생사에 자유자재한 증오(證悟)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6추를 비롯한 3세의 미망까지 완전히 끊어 일체를 해탈해야만 비로소 증오라 하기 때문이다.
교가에서는 흔히 얼음이 본래 물인 줄 아는 해오를 두고 ‘돈오’라고들 한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얼음이 완전히 녹아 자유자재한 물이 되었을 때인 증오를 돈오라고 했다. 교가에서는 해오를 돈오라 하여 “깨달은 후에 3현 10성의 지위를 거치며 닦아나간다” 하고, 선가에서는 증오를 돈오라 하여 “10승 등각마저 넘어선 구경각이 깨달음이니 다시 배우고 닦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돈오’라는 용어는 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런데 보조국사 지눌은 달마대사의 선풍을 이었다고 하면서도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수심결(修心訣)’에서 이렇게 이른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하여 깨친다.’(종상제성 막부선오후수 인수내증 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성인들은 누구나 먼저 깨치고 뒤에 닦아 구경각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깨친 뒤에도 오랫동안 망념이 일어나거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라는 것이다. 돈오점수사상은 보조 스님의 ‘수심결’ ‘결사문’에 근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입적하기 직전에 쓴 ‘절요(節要)’에서는 사상적 전환이 있었다. 돈오점수는 교종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은 아니라고 밝혔다.
보조는 ‘절요’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했던 하택과 규봉을 ‘지해를 주장하는 무리[知解宗徒]’라며 조계정맥(曹溪正脈)이 아니라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지해인 해오를 선양하고 있다. 그러나 사후에 발견된 ‘간화결의론’에서는 비로소 교외별전인 선종을 받들었다. 그러면서도 사후에 함께 발견된 ‘원돈성불론’에서는 여전히 해오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교종에서는 보조가 교와 함께 선을 주창했다고 찬양하고 있지만 성철의 평가는 냉정했다. 보조가 일생동안 선과 교를 혼동했고, 말년에도 끝내 지해의 병을 떨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보조에게 영향을 끼친 규봉은 어떤 스님인가. 그는 하택 스님의 법을 받아 선종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화엄종으로 들어간, 이른바 사선입교(捨禪入敎)의 승려였다. 규봉은 교가의 입장에서 선을 취급하다보니 선과 교를 혼동하여 돈오점수가 달마선이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성철은 수행고백을 기록한 규봉의 ‘도서(都序)’를 인용하여 그의 깨달음이 단지 해오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좋아하는 생각은 막기 어렵고 스스로 생각하고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닦아 생각 쉬기를 모두 10년을 했다. 그랬더니 창틈에 햇빛이 비치면 티끌먼지가 요란하듯, 맑은 물속에 그림자가 뚜렷이 비치듯, 미세한 습정이 기멸하면 고요한 지혜에 비춰지고 차별된 법의(法義)가 늘어서면 빈 마음에 드러났다.’
규봉은 정과 혜를 닦아 고요한 지혜가 조금 있긴 있으나 그 가운데 망상이 먼지 일어나듯 하니 마치 아침 해가 뜰 때 창문 틈으로 빛이 들어오면 거기에 먼지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듯 했다. 또 맑은 못에 그림자 모양이 환하게 밝으나 모든 차별법과 망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으니 그런 경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규봉은 이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돈오돈수의 구경각에 이르지 못했다고 미루어 알 수 있다.
선문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마조 스님은 견성하고 돈오하면 병도 약도 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규봉은 달랐다. 깨달았어도 교와 관, 정과 혜를 익혀야 한다고 했다. 마조는 구경각을 성취해 병이니 약이니 일체 필요 없는 분이었고, 규봉은 깨달았다고는 하나 자기가 병이 여전하니 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철은 규봉의 눈이 어두워 마조를 바로 볼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겼다. 규봉은 마조의 깨달음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했음이니 그것이야말로 망상이라는 얘기였다.
성철이 보기에 한국의 선방에서는 보조의 ‘수심결’을 보고 돈오점수를 따르고 있었다. 한 둘이 아니고 그런 승려가 선방마다 넘쳐났다. 흔히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견성했다” “한 소식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그릇된 견해와 망상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을 끊는 심각한 폐해였다.
성철은 강원에서 해오를 선문이라고 주장한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를 가르치지 말아야 하며, 경허 스님이 편찬한 ‘선문촬요’에서도 ‘간화결의론’ 이외의 보조 저술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선문은 온갖 이론과 수행이 범벅이 되어 그 선지가 분명치 않으니 선의 근원인 육조를 정점으로 삼아 정리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따라서 육조의 정맥을 계승한 ‘돈오요문(頓悟要門)’ ‘전심법요(傳心法要)’ ‘완릉록(宛陵錄)’ ‘임제록(臨濟錄)’ ‘증도가(證道歌)’ 등의 가르침을 받들어 선문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일렀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