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ㅎ ― 12>

수선님 2023. 7. 23. 13:27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ㅎ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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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법계(華嚴四法界)---사법계(四法界)란 화엄종의 우주관으로 사종법계(四種法界) 또는 사계(四界)라고도 한다. 화엄종에서는 현상(現象)과 본체(本體)를 관찰하여 네 가지 단계로 나눈다.

즉, <화엄경>의 교리로 말하면,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네 가지 방면으로 관찰해 네 가지 법계로 나누니, 곧 사법계(事法界)ㆍ이법계(理法界)ㆍ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ㆍ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그것이다. 이 네 법계는 <화엄경>의 중요한 이치만이 아니라, 실로 불교 전체의 철리(哲理)를 체계적으로 총괄한 것이다. 결국 사법계란 대승불교의 우주관 내지 궁극적 이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법계(法界)’는 그 체(體)를 따라 이름 한 것으로, 화엄세계는 이 법계로써 체를 삼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 법계의 이(理)를 밝힘에 불과하기에 화엄법계라고 말한다. 화엄 4법계라는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一心)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 통괄되는 것을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며 네 가지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상의 세계를 사법계(事法界)라 하고, 언제나 평등한 본체 ― 진리의 세계를 이법계(理法界)라 한다. 그러나 현상과 본체는 결코 떨어져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항상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를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라 한다. 다시 나아가 현상, 그것도 각 현상마다 서로가 원인이 돼 밀접한 융합을 유지하는 ―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세계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이다.

그러니 4법계란 모든 존재의 세계를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한 화엄종 우주관이다. 그리고 법계(法界)라고 한 것은 우주만유란 말과 같은 것인데 우주만유는 그 본체인 일심(一心)으로부터 연기한 것이요, 이 연기한 우주만유를 총섭한 것이 일심으로서 서로 주(主)가 되고 반(伴)이 돼 무진연기해가는 상태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 이것을 화엄의 4법계라 한다.

• 사법계(事法界)---사법계란 우주 만유의 차별 현상을 말한다. 사(事)는 사상(事象)이다. 즉,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말하고, 계(界)는 분(分)을 뜻한다. 그리하여 사법계라 할 때 사(事)는 현상계에 드러나 있는 색상(色相)을 의미한다. 사법계의 특징은 차별 현상이고, 현상세계-경험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사법계는 가장 열등한 범부의 경계에서 현상계에 드러난 색상, 즉 사(事)를 보고 그것을 참다운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의 근원인 본체, 즉 이(理)를 보지 못하고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눈앞에서 모든 것을 보는 바와 같이 집, 가구, 집기, 자동차, 비행기, ... 등 온갖 사물을 따로따로 차별해서 보는 것인데, 이때의 계(界)란 말은 나누어진 한계의 의미를 가졌으므로 하나의 물이 얼음이 되고 끓는 물이 되는 것을 얼음, 물, 끓는 물의 각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인 미혹의 세계를 일컬으며, 우주만유현상이 서로 대립해 차별이 있는 현상세계, 즉, 사(事)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낱낱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의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며, 개체와 개체는 공통성이 없어 차별적인 면만 드러낸 것이다.

곧 우주는 각종 사물이 모두 인연으로 생겨나며, 각기 그 영역이 다르며 경계가 제한된다. 사물의 차별성이나 특수성으로 대상을 인식하는데, 이것이 분별심의 경계이다. 비록 있기는 하지만 진실함이 아니므로 불지(佛智)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 이법계(理法界)----이(理)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理)는 이성(理性)이다. 이(理)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말하고, 계(界)란 성(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理)는 총체적 일심진여(一心眞如)이며, 공(空)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와 개체의 동일성, 공통성을 본 것이다. 이(理)는 곧 본심(本心)이며, 불성(佛性)이며, 진여(眞如)다. 그러나 이 경계를 통달하더라도 오히려 진여의 묘용(妙用)을 제대로 쓰지 못하므로 불완전한 것이다.

사(事)를 일단 제쳐놓고 색상을 일어나게 하는 근원자, 곧 이(理)를 근원으로서의 법계, 모든 사물의 본체로 보는 것이다. 하나의 이(理)가 모든 사물에 두루 존재하며, 각각의 사물 안에는 완전한 참된 이(理)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계에서는 철저한 공(空)의 논리가 전개된다. 우주 만유의 평등성. 곧 본체계ㆍ근본원리를 말한다.

모두가 평등하며 하나라고 하는 것으로 부처님도 중생도 삼라만상 모두를 평등하게 보는 것인데, 이를테면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고, 끓는 물이 돼도 물건을 적시는 성질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이니, 물건을 적시는 성질에서 보면 모두가 같다는 말이다. 이는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수행이 최고조에 달해 상수멸정(想受滅定)의 상태가 되는 경지, 번뇌가 녹아서 완전히 없어지고, 너와 나의 차이 또는 사물과 나와 차이가 전혀 없이 일체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완전히 통일이 돼버리는 경지이다. 바로 정각성불(正覺成佛)이 되는 것을 말한다.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사법계와 이법계의 편향성을 극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 모순되지 아니하고 화합하고 조화시킴으로써 온전한 법계의 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상세계인 사(事)와 본체 세계인 이(理)가 서로 융통 무애해서 현상이 곧 실재라는 것을 말한다.

진여의 이(理)로부터 나타난 만법(事)이기 때문에 사(事)가 이(理)이고, 이(理)가 사(事)인 것이, 비유하면 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인 것과 같이 서로 융합해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는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 ‧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와 사,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사법계(事法界)에서는 적과 아군이 있지만 이사무애법계에서는 적도 아군도 없다는 것이다.

이상인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인 미혹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 현실 즉 이상(現實卽理想) 세계이다.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세계관이다. -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금사자장(金獅子章)>에서 금사자(金獅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理)’는 이치요 ‘사(事)’는 현상이다. 법신의 바탕이 이치요, 그로 인해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이 현상이다. 이치가 작용해 현상이 일어나니 이치를 떠나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에서 그 이치가 드러나니 현상에서 이치를 분리할 수 없어 본디 서로 ‘상즉’ 한다. 금으로 만든 금사자(金獅子)에 있어서,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佛性을 금으로 표현]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여러 가지 수행방편이란 뜻]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해 표상(불성에 의지해서 수행결과)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의 경계라는 것이다.

※금사자장(金獅子章)---원래 이름은 <화엄금사자장>이다. 현수 법장(賢首法藏)이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뜰 앞에 놓인 금사자를 가지고 비유해 10문(門)으로써 화엄의 교관(敎觀)을 설명한 것이다.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우주만상이 모두 법성으로부터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나타난 모두가 서로 융통해서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미 이(理)와 사(事)가 무애하다면 사와 사가 무애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티끌 하나에 이르기까지 융통무애해서 어느 하나를 들면 다른 모든 것이 이에 따라 취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결과 파도는 둘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한 것은 화엄의 특색이다. 이는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를 말하는데, 현상계는 서로 교류해, 한 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즉,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세계이다. 이 말은 어떠한 사물이건 고립돼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해당한다. 공과 공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애한 것처럼, 색과 색도 서로 걸림이 무애하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해 받아들이고 하나가 돼 원융무애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이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는 이사무애(理事無碍)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깨달음의 세계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과 실천행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늘 그렇게 있는 세계이나 이해나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현실화해야 하는 세계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강조하는 무진연기(無盡緣起), 인다라망(因陀羅網), 상입상즉(相入相卽), 육상원융(六相圓融), 십현연기(十玄緣起) 등을 뜻하며, 현실적으로는 ‘나비 효과’역시 사사무애법계를 나타내는 말이다.---→사법계(四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참조.

*화엄사상(華嚴思想)---화엄사상은 천태사상과 더불어 중국불교철학의 쌍벽을 이루는 사상이다. 그런데 화엄사상은 인도에서 직접 전해 받은 불교철학이 아닌 중국인이 새로이 체계화한 독창적인 사상체계라 할 수 있다. 사상계에 있어서도 화엄종은 선종과 더불어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性理學)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쳐 쇠퇴한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또한 중국의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정토종과 선종(禪宗)은 화엄학에서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초기불교의 중심과제가 고(苦)의 원인을 규명해 그 고(苦)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비되는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하는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으로서 영원불멸의 부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해답으로 ‘깨달음[覺]과 실천행[行]’을 보살의 가장 큰 원행(願行)으로 제시하고 있다.

<화엄경>은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 단순히 화엄사상의 소의경전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불신사상(佛身思想)과 보살사상(菩薩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연기사상(緣起思想), 정토사상(淨土思想), 선사상(禪思想) 등이 고루 설해지고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하나의 경전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각 품(品)들이 별도의 경전으로 성립 유통되다가 대승불교 초기에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됐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화엄사상의 기본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돼 중중무진(重重無盡:끊임없이 이어짐) 관계로 엮임으로써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과 뿌리를 같이 한다. 그리고 사법계(四法界) ‧ 십현연기(十玄緣起) ‧ 육상원융(六相圓融) ‧ 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은 이 무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四法界)란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 ‧ 이법계(理法界)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사사무애법계란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를 말하며, 화엄사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삼라만상 사사물물이 각기 독립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서 화엄종의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즉일체 일체즉일’이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네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여기는 일심(一心)사상과 같이 하고 있으며,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 주고받는 상응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인연이 겹치고 겹쳐 끝이 없다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세계를 뜻하며, 하나와 전체, 전체와 하나가 다함이 없이 서로 겹치고 서로 스며드는 상입상즉(相入相卽)하는 존재의 실상을 말한다.

그리고 화엄의 원융과 회통의 원리가 잘 나타나는 용어가 바로 ‘회향(廻向)’이란 말이다. 회향은 돌이켜 향한다는 것이다. 회향은 소승과 대승을 통합해 일승으로 향하게 하고,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통합해 모든 중생을 구제하도록 이끈다. 세속적으로는 ‘부(富)의 사회환원’이 바로 불교에서 회향의 정신이다.

인과율(因果律)이란 각자가 짓는 업(業)대로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과와 윤회만이 존재한다면 돌이켜야 할 것도 없고 다른 대상 혹은 사람을 향할 필요도 없다. 각자가 열심히 정진해 해탈에 이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문과 연각, 즉 이승(二乘)의 생각이다.

업은 스스로 짓는 업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업에 따르른 업도 있다. 아무리 홀로 정진한다 하더라고 인간이므로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의 업 때문에 짓게 되는 업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인 이상 다른 생명체를 섭취하는 일을 피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에 의지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파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성문과 연각은 열반에 이를 수 있지만 남김 없는 완전한 열반(무여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한편 대승은 끊임없이 중생구제를 목표로 실천하도록 독려한다. 그래서 대승의 실천자는 끊임없이 중생을 구제하지만 정작 자신을 구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제해야 할 중생과 중생의 업이 무한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승과 대승은 회향을 통해서 통합한다. 회향은 자신이 지은 공덕을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게 하는 실천이다. 이승의 입장에서도 회향을 통해 각자가 지은 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행을 통해 좋은 업을 쌓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과와 윤회를 인정하는 것으로도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또 대승의 입장에서는 회향을 통해 모은 중생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회향함으로써 궁극적인 자리(自利)를 획득할 수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과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중생을 향해 회향한 만큼 중생도 나를 향해 회향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엄사상(華嚴思想)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킴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교설이다. 따라서 화엄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중도(中道)라 하겠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왕권국가에서는 화엄사상을 왜곡해 율령정치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아, 민중을 위하기보다 왕실불교 귀족불교의 사상적 역할을 했다.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전승---화엄법계에서 조사(祖師)를 정할 때는 인도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그리고 중국에서는 두순(杜順)을 초조(初祖)로 삼아 지엄(智儼)→법장(賢首法藏)→징관(澄觀)→종밀(宗密)까지를 합해서 화엄칠조(華嚴七祖)로 세우고 있다.

마명(馬鳴)을 화엄조사로 받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대승경전을 약축해 사상을 정립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저술했으며, 중국의 화엄 종주들이 한결같이 <대승기신론>을 즐겨 연구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화엄경>을 번역한 승려는 동진(東晋)의 각현(覺賢)이다. 그 뒤 한역본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이 두순(杜順, 557~640)에 의해 이루어졌다. 두순의 제자 지엄(智儼, 602~668)은 인도에 유학하는 등 화엄학 정립에 공헌했고, 지엄의 제자로는 중국의 법장(賢首法藏)과 신라의 의상(義湘)이 있다. 의상은 지엄의 인가를 받은 뒤 신라로 돌아와 원효(元曉)와 함께 화엄사상을 전파했다.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중국에 화엄학을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법장의 문하에는 혜원(慧苑)이 있고 혜원의 문하에서는 징관(澄觀)이 나왔다.

징관의 법맥을 이은 종밀(宗密)은 <원인론(原因論)>을 지어 유 ‧ 불 ‧ 도 삼교의 사상을 대비시킴으로써 불교의 참뜻을 선양했고, 교(敎)와 선(禪)의 병행을 논하는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를 저술해 고려의 지눌(知訥)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종밀의 사상은 송대에 와서 정원(淨源)으로 이어졌는데, 정원은 고려의 의천(義天)과 사상적인 교류가 많았던 화엄종사이다.

화엄사상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됐고, 그 어떤 사상이나 신앙보다 중요시되면서 끊임없이 연구돼 한국불교사상의 한 전통으로 정립됐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화엄사상을 수용해 연구한 사실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신라에는 544년(진흥왕 5) 인도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원돈(華嚴圓頓)의 깊은 이치를 해동에 유통시키니 신라의 화엄사상이 이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연기조사가 실재인물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그에 대한 기록들도 모두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적으로 뚜렷이 증명되고 있는 화엄학의 전래자는 자장(慈藏) 율사이다. 자장은 흔히 계율을 엄중히 정비해 신라불교계를 정리한 율사로 알려져 있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은 자신의 개인집을 절로 만들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는 등 포교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화엄의 묘의를 통달했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화엄사상에 대한 이해는 중국을 앞지를 만큼 창의적이었고, 또 그 방대한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와 같은 작업은 주로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에 의해 기틀이 마련됐다.

의상(義湘, 625~702)은 화엄학을 대성시킨 중국의 화엄 종주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화엄사상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676년(문무왕 16)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해 화엄의 종지를 널리 편 이래 오늘날까지 화엄종 개창자로서 숭앙받고 있다.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하나의 조직을 갖추었고 체계화된 방법으로 화엄사상을 널리 선양해 해동화엄의 초조(初祖)가 됐다. 의상이 저술한 <법성게(法性偈)>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의 근본정신을 간결하게 요약한 탁월한 업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영향이 미쳤다. 그리고 의상의 문하에는 3,000여 명의 학승이 따랐다고 하며, 그 가운데 10명의 제자인 표훈(表訓)ㆍ신림(神琳)ㆍ지통(智通)ㆍ오진(悟眞)ㆍ진정(眞定)ㆍ진장(眞藏)ㆍ도융(道融)ㆍ양원(良圓)ㆍ상원(相源)ㆍ능인(能仁) 등은 그의 화엄사상을 전수해 후세에 의상의 학덕을 선양했으며, 통일기의 신라불교를 융성하게 한 고승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학풍은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는데, 이 사찰을 의상화엄전교십찰(義湘華嚴傳敎十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원효(元曉, 617-686)는 화엄사상을 우리나라 불교에 적용시켜 우리나라 불교로 하여금 회통불교를 지향하게 기반을 다졌다. 화엄의 진리는 의상과 원효에 의해 신라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려 오늘날 한국 화엄학이 있게 한 것이다. 특히 원효의 <화엄경소(華嚴經疏)>는 중국 화엄학의 대가들이 참고하고 인용했을 만큼 정평이 있는 명저였을 뿐 아니라 원효의 뛰어난 사상성을 드러냈다.

고려에 와서는 균여(均如, 923~973)가 화엄교학에 한 획을 그었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화엄학 창달에 크게 공헌했다. 흔히 천태종 개조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사상적 기반은 화엄학이었으며, 그 자신도 화엄종의 승려로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함에 있어 권1의 제일 앞에 <화엄경>을 배당했으며, 그 서문에 자신을 해동전화엄대교사문(海東傳華嚴大敎沙門)이라고 자서했다. 그리고 그가 편찬한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의 원종은 화엄종을 말하는 것이다. 의천은 화엄사상 가운데 특히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을 가장 중요시했다.

고려 후기엔 지눌(知訥, 1158~1210)이 화엄사상을 연구했다. 지눌은 혜능(慧能)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통해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이 곧 부처)의 선지(禪旨)를 체득했으나, 자심(自心)만 찾고 사사무애(事事無礙)를 체득하지 못하면 불과(佛果)를 이룰 수 없다는 말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중국 당나라 이통현(李通玄, 635~730)의 <화엄론(華嚴論)>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해 화엄사상을 천명했다.

고려 말 화엄사상의 천명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한 승려로는 충숙왕과 충혜왕 때에 활동한 각해대사(覺海大師) 체원(體元)을 들 수 있다. 체원은 이제현(李齊賢)의 가형(家兄)이다. 그가 20세를 전후해 출가했을 당시의 화엄종단은 정치적인 배경을 잃고 사상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한 채 기층사회 속에서 실천신앙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체원은 개경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해인사를 근거지로 해서 활약했으며, 경주지방의 지방토호 등과 유대를 맺으며 활동을 했으나 그의 노력엔 한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숭유억불이라는 국가적 시책에 의해 화엄학도 이전의 한국불교사의 주종이었던 역사적 특성을 잃어버리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 중기에 보우(普雨, 1509∼1565)에 의해 잠깐 조선시대의 화엄사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화엄사상을 특별히 천명한 바는 없고, 그의 수제자인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화엄교학을 높이 평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후도 특별히 선양된 바는 없으나 꾸준히 그리고 면면히 화엄사상은 우리나라 불교의 한 축으로서 계속 전승돼 왔다.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산림법회(山林法會)란 사찰에서 불경을 강설하는 특별한 모임을 말한다. 그리고 화엄산림은 <화엄경>을 설하는 법회가 일정기간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산림’은 ‘최절인아산 장양공덕림(摧折人我山 長養功德林)’에서 따온 말로서 아만심을 없애고 공덕의 숲을 키워나간다는 뜻이다. 또한 <화엄경>을 설하는 법회에 대중이 산에 산림처럼 많이 모여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같은 화엄법회는 신라시대부터 있어왔으며, 지금의 화엄산림법회는 1927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鏡峰) 스님이 출가자와 재가신도가 동참해 화엄의 바다에서 함께 수행하는 화엄법석을 마련한 것이 시초로서 이후 매년 열리고 있다.

*화엄삼매(華嚴三昧)---해인삼매는 존재의 세계관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지표를 말한 것이 화엄삼매이다. 즉, 해인삼매가 <화엄경>의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화엄삼매는 우리의 인생관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해인삼매가 일체만상의 실상(實相)을 비춘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화엄삼매는 우리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삶의 지표를 설하고 있는 것으로, 삼매에 들어가서 주객(主客) ․ 자타(自他) 등 상대관계를 초월해 현실에 전개하는 삶을 화엄삼매라 할 수 있다. 우리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진실에 계합되고 비로자나불의 세계에 융합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보살의 인생행로를 나타낸 것이 화엄삼매이다. 즉, 해인삼매로서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드러나고 이를 사회에 실현하고, 또한 중생을 제도하고 구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화엄삼매이다. 해인삼매가 비로자나불의 세계관이라면, 화엄삼매는 그 세계관에 의거한 보살의 인생행로, 보살의 인생관 또는 보살의 행위가 완성돼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화엄삼매에서 ‘삼매(三昧)’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지혜 상태를 말한다. 보살을 항상 삼매 상태에 있다. 이때 보살의 삼매는 바른 지혜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즉, 망상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화엄경> ‘현수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여기서 보살은 삼매 중에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보살살주재삼매중(菩薩住在三昧中)하야 - 보살이 삼매 가운데 머물러서

종종자재섭중생(種種自在攝衆生)일새 - 가지가지 자재로 중생을 포섭할새.

*화엄성기사상(華嚴性起思想)---성기사상(性起思想)이란 <60 화엄경> ‘성기품(性起品)’에 근거한 말로서, 여기서 성기(性起)란 곧 진여체성(眞如體性)의 현기(現起)를 말하는 바,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계 밖에 따로 진리의 세계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현상계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즉,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된 것이라고 파악한다. <대방광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경의 제목이 뜻하듯이 삼신(三身)이 원융(圓融)한 비로자나 부처님이 우주 존재에 그 빛을 두루 밝게 비추며 동시에 모든 존재는 비로자나불의 현현(顯現)이 아님이 없으니 그것을 여래출현(如來出現) 또는 여래성연기(如來性緣起) 혹은 줄여서 성기(性起)라고 한다.

*화엄성중(華嚴聖衆)---<화엄경> 설법 시의 성인과 현인들, 모든 무리들을 모두 칭송하는 말이다. 모든 보살, 부처, 아라한, 불자, 유정 전부를 말한다.

<화엄경> 설법의 삼대성원(三大聖員)은 비로자나부처님, 문수보살님, 보현보살님이다. 그러나 우주의 전체가 <화엄경>의 부처님 말씀처럼, 진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욕계(欲界)]와 마음을 수행하여 오욕(五欲) 등의 나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色界)의 모든 생명체들을 보호하는 성현이니, 이 분들의 힘은 모든 신통력으로 이루어진다. 이 신통의 힘으로써 진리를 믿는 이들을 위해 발휘하는 성현들이므로 신중(神衆)이라고도 한다. 즉, 불법과 불법을 믿는 사람을 보호하는 신이란 말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① 화엄성중(華嚴聖衆)이란 <화엄경>에 등장하는 성스러운 신중(神衆)들 모두를 말한다. 즉, 이들은 부처님 법에 귀의해 <화엄경>을 호지하고 <화엄경>에 관련된 성현이나 화엄경을 받드는 모든 무리를 호지한다.

② 화엄성중의 호지 대상은 비록 성현(聖賢)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무리, 곧 천지만물(天地萬物),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을 말한다. 어리석은 중생은 물론이고, 모든 만상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 원자, 양자, 중성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이것이 신중(神衆)이라 했을 때와 성중(聖衆)이라 했을 때, 어감의 차이이다.

*화엄신중(華嚴神衆)---화엄성중(華嚴聖衆), 화엄신장(華嚴神將)이라고도 한다. 화엄이란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다. <화엄경>의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대방광(大方廣)은 부처님을 수식하는 말로, 무한 광대한 부처님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화엄(華嚴)이란 아름다운 꽃인데, 그것도 장미나 모란처럼 한동안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 그런 꽃이 아니라 영원히 지지 않는 꽃으로 장식함을 뜻한다. 즉, 이는 청정하고 올바르고 덕스러운 보살의 행에 비유한 것이니, 세상에 덕이 될 수 있는 공덕의 꽃은 결코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화엄경>은 한마디로 말해 이웃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인간다운 삶을 이룰 수 있는가를 온갖 비유와 이야기를 들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화엄경>이 보여주듯 무한한 관계 속의 자신을 투철히 인식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인간다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속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나 보살을 단지 경전에 등장하는 과거의 특정 인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들의 자리에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대입시켜 보고, 자신의 존재와 서야 할 자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화엄경> ‘적멸도량품(寂滅道場品)’에는 33명의 신중이 부처님 정각(正覺)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이 궁극적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을 형성해서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신 역할을 한다.

화엄신중에는 인도의 토속신은 물론이고, 중국 도교의 칠성신, 한국의 산신이나 조왕신 등의 토속신이 자리를 차지하게 돼 최종적으로 104명으로 구성되기에 이른다. 사찰의 대웅전 전면 중심을 보면 상단(불단), 중단(신중단), 하단(영단)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중단에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모신 탱화를 볼 수 있다. 즉, 신중(神衆) 탱화는 신중단인 중단에 불법을 호위하는 신장님들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신중(神衆)은 <화엄경>에 나오는 104분의 성현, 신장들, 8금강, 4보살, 10대명왕, 대범천왕, 제석천왕, 사천왕 등 각 천왕과 천자, 호법선신 등을 말한다. 인원수에 따라 22위(位), 39위, 44위, 104위 등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면,

• 금강신(金剛神) ― 절에 들어가는 문이나 전각의 입구에 서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

• 신중신(身衆神) ― 중생을 마음대로 이익하게 하는 신 등 39位, 104位의 신장이 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시고 보리수 밑에서 설법한 내용을 결집한 경전이 <화엄경>이며 부처님의 불법을 호지하고 불법을 받들고 옹호하는 신들의 무리를 신중(神衆)이라 한다. 이러한 화엄신중(성중)들은 개별적으로 신앙되는 것이 아니라 한 무리로서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음력 초하루부터 삼일 간 절에서 '신중기도'를 올리는데, 이는 매월 초 불ㆍ보살과 호법선신들께 예불공양을 드림으로써 일 년을 잘 열어가려는 신심의 발로인 것이다.

사시예불(巳時禮佛) 때 보면 상단(불단)에 올렸던 마지(밥)공양을 신중단에 옮겨 올리고 신중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봉독하면서 사시예불을 마치는 데 이를 퇴공(退供)이라고 하는 것으로 신중들이 퇴공을 받는 이유는 부처님과 보살들이 먼저 공양을 드신 후 그 물려받은 것으로 공양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화엄 십지(華嚴十地)---<화엄경> 가운데 십지품(十地品)을 말하는데, 이 십지품을 따로 분리해서 <십주경(十住經)>이라고도 한다. 십지에는 <화엄경>에 천명한 수행계위(階位) 52위 중, 제41에서 제50위까지의 10지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10지, 이렇게 두 가지가 있으며, 이 두 가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천태종의 10지는 초발심(初發心)의 단계에서 부처의 지위까지를 10단계로 분류해 놓은 것이고, 화엄종의 10지는 보살의 완숙한 경지를 설명한 것이다.

<화엄경> 내용 중에서도 십지품(十地品)은 그 성립연대가 가장 이른데, 처음에 <십지경(十地經)>으로 독립돼 있다가 <화엄경>에 편입된 듯하다. 십지는 십바라밀(十波羅蜜)과 관련해 보살의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깊은 단면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교훈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보살의 수행단계에 따라 구분하는 10지(地)를 흔히 10주(住)라고도 한다. 10지설에 따르면 보살은 이 10지위에 오르게 될 때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내어 불성(佛性)을 보고 성자가 돼 불지(佛智)를 지님과 아울러 널리 중생을 지키고 육성하기 때문에, 이 수행계위를 ‘지위(地位)의 십성(十聖)’이라 하고 이들을 ‘지상(地上)의 보살’이라 하며, 10지의 각 단계는 아래와 같다.

• 제1 환희지(歡喜地) ― 보살이 처음으로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기쁨을 느끼는 제1 단계이다. 보살이 환희지에서 느끼는 기쁨이란 곧 부처님을 믿고 공경할 때 생겨나는 마음이며, 모든 번뇌를 떨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 제2 이구지(離垢地) ― 더러운 때와 같은 번뇌를 떨치고 깨끗하게 되는 단계로서 보살은 계율을 지키고 10선행(善行)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구지에선 청정한 계행을 우선한다.

• 제3 발광지(發光地) ― 보살수행을 하는 사람의 존재가 주위를 밝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보살의 인격은 높고 동시에 밝으며, 그리고 온화해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온화한 분위기로 가득 찬 그러한 사람이 오게 되면, 그 한 사람의 덕의(德義)로 주위가 밝게 된다. 그와 같은 경지를 발광지라 한다.

• 제4 염혜지(焰慧地) ― 제3 발광지와 같이 인간성이 밝고 온화한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혜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진정으로 모든 주위 것들을 다 평등하게 인도해 갈 수 없다. 그러한 지혜가 타오르는 불꽃같이 맹렬한 경지를 염혜지라고 한다.

• 제5 극난승지(極難勝地) ― 진속 2지(眞俗二智)의 행(行)이 서로 응하거나 어울리는 것, 곧 상응(相應)해 서로 기맥(氣脈)이 상통(相通)하는 경지이다. 진(眞)이란, 불도(佛道)를 말함이요, 속(俗)이란 세속생활을 말한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지혜와, 세속의 사회인으로서의 생활의 지혜가 스스로 일치하게 된 경지가 너무도 거룩하다고 해 불교에서는 극난승지(極難勝地)라 한다. 우리들 재가불자(在家佛子)는 사회인으로서 가족과 생활을 해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사업을 하면서 또 관공서나 회사 등에 근무하면서 또는 사생활에서의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중대한 일을 일으킨다든가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말을 하기 전에, 과연 이것이 불도에 어긋나는 일인지 어긋나지 않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고 난 뒤에,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 됐던 것인지 어떤지 반성하라는 것이다.

• 제6 현전지(現前地) ― 극난승지에서 더욱 더 수행정진하게 되면 혜력(慧力)이 점차로 커지게 되며, 모든 사람들이 본질에 있어서는 평등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게 된다. 교의상(敎義上)으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본래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불성이 있다는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현명치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분별하기 쉽다. 그러나 깨달음의 정도가 높아져 서서히 성불 경지에 가까워지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이치적으로 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인다. 그것을 현전지라고 한다.

• 제7 원행지(遠行地) ― 이것은 대비심(大悲心)을 발(發)해 성문 ∙ 연각 경지에서 멀리 떠나 버렸다는 뜻이다. 성문ㆍ연각의 깨달음도 훌륭한데, 무엇 때문에 성문 ∙ 연각에서 멀리 떠나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문 ‧ 연각은 이승(二乘)의 근성이 있어서, - 나는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 하고 자기와 남을 차별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차별심까지도 깨끗이 없어지고 자타일체(自他一切)가 된 경지를 원행지(遠行地)라 한다. 남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알 게 모르게 구제의 손길을 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나와 남이라 하는 차별감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대비심(大悲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감기가 들어 코가 막힌 어린 아이를 그 엄마가 코를 빨아내 준다든가, 아픈 아이에 대변을 찍어 맛을 보아 건강상태를 알아보는데, 더럽다는 것을 전연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이가 완전일체가 돼 아이를 남이라고 생각지 않는 차별감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도 이와 같은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을 원행지라 한다.

• 제8 부동지(不動地) ― 무상(無相) 불상(不相)이다. 상(相)은 차별상(差別相)이라는 뜻이다. 무상(無相)이라 하는 것은, 차별이 있는 모양(相)이 아니라, 무차별상(無差別相)이라는 뜻이다. 불상(不相)이라 하는 것은, 차별적인 작용을 하지 않는, 차별을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안 다음에,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중생을 인도하게 된 그 과보(果報)로 부처님의 경계 곧 ‘큰 하나’에 이르는 자격을 얻는다. 그 자격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 경지라 하여 부동지라고 한다.

• 제9지 선혜지(善慧地) ― 보살이 선혜지에 들어가면 부처님의 십력(十力)이 작용한다. 선혜지는 여래십력(如來十力) 곧 부처님의 열까지 신통력이 작용하는 보살경지이다.

• 제10지 법운지(法雲地) ― 보살로서의 최고의 경지이다. 법운지에서는 부처님 법은 마치 만물을 소생시키는 비의 원천인 구름과도 같다. 큰 구름이 하늘을 덮고 일체의 생물 위에 공덕의 큰 비를 내리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법운지라 한다. 다시 말하면 법운지는 부처님 경계의 일보직전이다. 이 단계에 이른 보살을 십지보살(十地菩薩)이라 한다.

위와 같은 10지의 각 단계는 보살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방편적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누구든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불법을 믿고 따라야 하며 흔들림 없이 수행에 전념해야 한다. 이 점은 경전 곳곳에서 강조하는 것으로서 모든 단계에 필수적이며 보살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점이다.---→통교(通敎) 십지(十地, daśa-bhūmi) 참조.

*화엄십찰(華嚴十刹)---의상(義湘) 대사가 화엄교학을 전파한 사찰 열 곳을 이른다. 헌데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6개 사찰이 기록돼 있고,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10찰 명칭이 기록돼 있으나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6개 사찰은 ①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②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③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④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⑤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⑥ 남악(南岳 :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등이다.

<법장화상전>에 실린 10개 사찰은 ① 중악 공산(中岳公山) 미리사(美理寺), ②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③ 북악 부석사(浮石寺), ④ 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및 보광사(普光寺), ⑤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⑥ 계룡산 갑사(岬寺), ⑦ 낭주(良州)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⑧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⑨ 전주 무산(母山) 국신사(國神寺), ⑩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 청담사(淸潭寺) 등이다. <삼국유사>의 비마라사를 제외한 다섯 사찰은 <법장화상전>에 모두 제시돼 있어서 일치한다.

즉, 확실한 다섯은 영주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부산 범어사, 경남 고성 연화산 옥천사, 구례 화엄사이다. 옛 기록 ‘비슬산 옥천사’에서 비슬산은 현재 대구 비슬산이 아니라 경남 고성 연화산의 옛 이름이 비슬산이다. 그래서 경남 고성 연화산 옥천사를 말한다.

*화엄십현연기설(華嚴十玄緣起說)---→십현연기(十玄緣起) 참조.

*화엄오교(華嚴五敎)---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에서 오교의 체계로 불교를 체계화한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오교란 소승교(小乘敎), 대승시교(大乘始敎), 종교(終敎), 돈교(頓敎), 원교(圓敎)를 말하는데, 수많은 불교경전을 이 다섯에 배속시키고 <화엄경>은 대승원교의 가르침이라 해서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원교는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밝히는 것이다.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당대(唐代) 화엄종의 대성자(大成者)인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의 저서로서, 원명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 또는 <화엄일승교의분제의(華嚴一乘敎義分齊義)>라고 한다. 법장(法藏)의 30여 세 때 저서라고 하며, 원본(原本)은 3권이었으나 송대(宋代)에 들어와서 개판된 송본(宋本) 4권이 있다. 이 책은 단순한 화엄교학(華嚴敎學)의 개설서일 뿐만 아니라 화엄종의 입장에서 불교 전체를 조직 체계화한 불교개론의 체제를 갖춘 것으로, 이에 의해 사실상 화엄종이 대성됐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은 10장으로 나뉘며, 앞의 8장(上卷)은 교판(敎判)에 관한 것, 뒤의 2장(중·하권)은 교의(敎義)에 관한 것이다. 특히 4장의 5교10종(五敎十宗) 교판은 천태(天台)의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과 함께 중국불교의 독자성을 나타낸 것으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화엄육상원융설(華嚴六相圓融說)---→육상원융(六相圓融) 참조.

*화엄일승(華嚴一乘)---일체중생이 오직 하나의 진리에 의해 성불하는 것을 일승(一乘)이라 한다. <법화경>에서 이 뜻을 설할 때에는 법화일승(法華一乘)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화엄일승(華嚴一乘)이라고 한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60 화엄경>의 광대무변한 진리를 압축한 핵심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게송이 <법성게(法性偈)>이다. 이 30구의 게송을 54각(角)의 네모꼴로 도표화 도인(圖印) - 인장(印章)이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줄여서 <법계도>, <해인도> 혹은 <법성게>라 한다. 의상이 법계도를 완성한 것은 668년 7월이었다.

<화엄경>의 사상을 그 핵심만 들어 간략히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해동화엄(海東華嚴)의 발원지가 된 명문(名文)이다. 가히 유식에서의 <유식삼십송>에 비견할 ‘화엄삼십송’이라 할 만하다.

이로써 저자 의상(義湘, 625~702) 대사는 해동화엄의 초조(初祖)라 칭송된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출가해 원효(元曉)를 만나 같이 입당 유학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1차 입당 시도는 실패하고, 36세 때 행한 2차 입당 시도가 성공해 중국 화엄의 기초자 지엄(智儼)에게 사사했다. 이때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과는 동문이 됐다.

<법계도>는 <화엄경>의 대의를 간추려, 인(印)으로 만들어 지엄에게 제시해 인가받았다고 한다. 스승 지엄(智儼) 화상은 자신이 그린 72인(印)보다 의상의 1인(印)이 더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법계도>에서 의상은 먼저 7언 30구 210자의 도인(圖印)을 제시하고, 이어서 이를 2문(門)으로 나누어 해석했다. 즉, 구성을 살펴보면 첫째 대의 및 도인, 둘째 석문(釋門)이다.

<법계도>에 나타난 의상의 화엄사상도 성기(性起)사상이다. 그것은 <법계도>의 첫 구절 ‘법성원융 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나타난다. 법성(法性)은 언어가 끊어진 불가설이고 본래 적정한 증분(證分)인데, 이것이 진성(眞性)으로 대체되면서 연기분(緣起分)이 성립된다. 법성이 연기하는 것(性起)을 <법계도>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기와 연기는 둘이 아니다. 성기 즉 연기, 연기 즉 성기인 것이다.

이 <법계도>와 관련해서 신비스런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의상이 스승 지엄(智儼)에게서 <화엄경>의 도리를 배우던 때, 어느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 남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 주었고, 또 어느 날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나타나 머리가 총명해지는 약(藥)을 10여 제(劑)나 지어 주었으며, 또 하루는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비결을 전수해 주었다.

하도 기이해 의상이 이 사실을 스승에게 고하자, 스승 지엄은 “나는 꿈에 한 번 신인을 만났을 뿐인데 너는 세 차례나 만났으니 멀리서 찾아와 공부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며, 그 동안 얻은 바를 책으로 정리하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의상은 <대승장(大乘章)>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올렸는데, 스승은 이를 보고 “의리(意理)는 아름다우나 문장이 옹색하다.”고 해서, 의상은 다시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고 뜻이 통하도록 한 다음 <입의숭현(立義崇玄)>이란 이름을 지어 올렸다.

이를 받아본 지엄은 의상과 함께 불전(佛殿)에 나아가 아뢰기를, “원컨대 이 글이 성인(聖人)의 뜻에 맞는다면 불에 타지 마소서.”라고 서원한 뒤, 책을 태웠는데 다른 부분은 모두 불에 탔으나 210자만은 타지 않자, 스승은 이 글자를 주워서 의상에게 주면서 <화엄경>의 요지로 다시 쓰게 했다. 그리하여 대사가 며칠 동안에 이를 <게송>으로 새로 지어 <해인도(海印圖)>라는 도표에 써넣으니 이것이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이에 스승 지엄은 경탄해 가로되, “나는 72개의 해인(海印)을 그렸는데 그대는 한 개 해인으로 다했노라. 그대의 해인은 총체(總體)가 되고 나의 해인은 별개(別個)가 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법성게(法性偈) 참조.

*화엄일승십현문(華嚴一乘十玄門)---중국 화엄종 초조 두순(杜順, 557~640)이 설한 것을 두순의 법을 이어받은 화엄종 제2조 지엄(智儼:602~668)이 기술한 저서로서, 지엄은 <화엄일승십현문(華嚴一乘十玄問)>에서 십현문(十玄問)이라는 참신하고 균형 잡힌 화엄론을 제시했다.---→화엄십현연기설(華嚴十玄緣起說) 참조.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ㅎ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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