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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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菩提)와 반야(般若)---보리(菩提)란 깨달음을 뜻하고, 반야(般若)란 지혜를 뜻한다. 반야로써 보리를 얻는다. 즉, 지혜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인과적으로 따지자면 반야가 원인이며, 보리가 결과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게 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런 이유로 반야바라밀다는 보살의 것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의 것이다.
보살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 즉 무상정등정각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해 육바라밀을 행한다. 그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보살이 성불할 때는 이 반야바라밀다가 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된다. 그러므로 반야[지혜]를 닦아서 보리를 이루는 것이다. 지혜로써 번뇌의 강을 건너 보리를 성취한다.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5세기 말~6세기 초)---인도 출신으로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승려. 그는 삼장(三藏)에 정통했다. 508년 낙양으로 왔으며,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는 그를 매우 환영해 영녕사(永寧寺)에 주석하도록 배려했다. 보리유지는 유식학을 추구하는 지론종(地論宗)을 전했으며, <십지경론(十地經論)>, <입능가경(入楞伽經)>,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대살차니건자소설경(大薩遮尼乾子所說經)> 등 많은 불전을 한역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달마(達磨) 대사를 시기한 나머지 AD 528년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더불어 달마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한다. 또 한명의 보리유지가 있어서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보리유지(菩提流支, ?~725)---위의 보리유지와 다른 인물이다. 당나라시대에 활약한 남인도 출신 밀교계통 승려로서, 유명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모다라니신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姥陀羅尼神經)=천수경>을 번역했으며, 그 외에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紳變眞言經)>을 한역하고, <대보적경(大寶積經)>을 편집 완성했다. <대보적경>은 별개의 여러 경전들을 한데 묶어 정리 집성한 일종의 혼합경이다. 그리고 보리유지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신역 <80 화엄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우기도 했다.
그런데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보리유지가 한역한 <불공견삭신변진언경>을 감색(紺色) 종이에 은니(銀泥)로 쓴 것이 현재 남아 있어, 국보 제210호로 지정돼 삼성리움미술관에 보관돼 있다.---→대보적경(大寶積經) 참조.
*보리(菩提)의 종류---보리(菩提)는 불 ․ 연각 ․ 성문이 각각 그 과(果)에 따라 얻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보리 가운데 불타의 보리가 더할 나위 없는 최상 최고의 궁극적인 것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부르고, 번역해서 무상정등각무상보리(無上正等覺無上菩提) 혹은 무상보리(無上菩提)라 한다.
그 외에 많은 종류의 보리가 있지만 <대지도론>에서는 보살 수도의 계급을 다섯 종으로 나누고, 보리를 발심보리(發心菩提) ․ 복심보리(伏心菩提) ․ 명심보리(明心菩提) ․ 출도보리(出到菩提) ․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오종 보리(五種菩提)로 나누었다.
천태종에서는,
①실상(實相)의 리(理)를 깨달은 것을 진성보리(眞性菩提/無上菩提).
②리(理)에 계합한 지혜를 깨닫는 것을 실상보리(實相菩提/淸淨菩提).
③자유자재로 중생을 교화하는 기능을 깨닫는 것을 방편보리(方便菩提/究竟菩提)라 한다.
<법화경론>에서는 불(佛)의 법(法) ∙ 보(報) ∙ 응(應)의 삼신에 대해 법불보리(法佛菩提/法身菩提) ∙ 보불보리(報佛菩提/報身菩提) ∙ 응불보리(應佛菩提/應身菩提)의 3종 보리를 주장하고 있다.---→보리(菩提, 산스크리트어 Bodhi), 오종 보리(五種菩提) 참조.
*보리자성(菩提自性)---깨달음(보리)의 자성, 보리는 깨달음, 깨달음이란 스스로의 성품이란 말이다. 자성은 본래 있는 영원한 성품을 말한다. 실제로 보리자성(菩提自性)이란 말이 쓰인 사례를 보자. 다음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사구게이다.
「보리자성(菩提自性) 본래청정(本來淸淨) 단용차심(但用此心) 직요성불(直了成佛) - 깨달음 스스로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고 맑다. 따라서 그 마음을 바르게 일으키면 곧 바로 성불하리라.」
자성은 변치 않는다. 다만 자성은 본체적 측면이 있고, 작용적 측면이 있다. 무명에 의해 흔들리면 망념이 생기는 측면은 작용적 측면이다. 즉, 자성은 가만히 두면 공적하지만, 영향을 받으면 갖가지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진공묘유라가 하는 것이다.
비록 무명에 의해 망념이 일어나고 헛되이 경계를 보게 되지만, 진여자성은 본래 청정해서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러함을 잘 살피면 곧 바로 성불하리라 한 것이다.
바람(무명)이 불면 파도가 일어난다. - 망념, 심식작용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물의 성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파도가 일면 대상을 그대로 비출 수가 없다. 파도가 자면 여실히 비춘다. 그러나 파도도 물의 성품인 것은 같다. 파도가 일어나도 물의 성품은 그대로인 것처럼, 자성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제대로 본 사람은 생사의 번뇌를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육조단경에 나오는 또 하나의 사구게이다.
「보리본자성(菩提本自性) 기심즉시망(起心卽是妄) 정심재망중(淨心在妄中) 단정무삼장(但正無三障) - 깨달음이 본래 스스로의 본성인데, 마음을 일으키니 바로 망념이 된다. 깨끗한 마음은 망념 속에 있으니, 단지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가 안 생긴다.」
깨달음이란 본래의 자기의 성품이다. 깨달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자성)이란 말이다. 본래부터 자기에게 있는 성품이 어떤 마음을 일으키면 바로 그것이 망념이 된다.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고 하는 마음이 바로 망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망념 속에 깨끗한 마음이 있다고 했다. 망념이 없다면 정심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상놈이 있고 양반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상놈이 없으니 양반도 없다. 이처럼 망념이란 곧 바른 생각이라는 전제가 있고, 바르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바로 망념이 있다는 전제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어떤 마음이거나 일으키면 그것이 망념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만 정심(正心)이면 삼장(三障)이 없다고 했다. 삼장이란 수행에서 생기는 장애로서, 번뇌장(煩惱障), 업장(業障), 보장(報障)을 말한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번뇌가 장애가 되고, 번뇌가 업장을 만든다. 그리고 업장은 과보를 받는 보장(報障)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삼장이다. 그런데 정심(正心)이 되면 장애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심(正心)’을 바른 마음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바르다. 그르다”는 이분법적 생각이 되기 때문에 망념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정심(正心)은 분별하는 것을 떠난 마음을 말한다. 작다 크다, 하나네 둘이네 하는 마음이 아닌 마음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이 없어서 장애나 망념이 없는 마음을 정심(正心)이라 한 것이다.
*보리행(菩提行)---보리(菩提)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을 의미하고, 보리행이란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요, 깨달음의 실천을 말한다. 그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 곧 자비이다. 그리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보리행은 자비에 중점을 두되 지혜도 균형 있게 닦고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대승보살이 보리행(菩提行)에 의해 중생의 어려움을 구제하려는 것은 중생이 스스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생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불성을 되찾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고 중생이 보리행을 하려면 습성으로 익혀온 마음속 이기심을 변화시켜야 한다. 마음 따로 있고 보리심이라는 것이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별이나 집착, 망상이 없는 인식에서 선행과 선심의 보리행이 나와야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보리(菩提, 산스크리트어 Bodhi) 참조.
*보리행경(菩提行經)---<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이라고도 한다. 인도 불교학자 적천(寂天, 산티데바/Santideva, 7∼8세기경)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으나 10세기 송(宋)대에 천식재(天息災)가 번역한 한역본에는 용수(龍樹)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보살행을 밝히는 경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을 설한, 8품(品)으로 된 게송. 대승불교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참조.
*보림(保任)---→보임(保任) 참조.
*보림전(寶林傳)---원제는 <대당소주쌍봉산조계보림전(大唐韶州雙峰山曹溪寶林傳)>이다. 선종에 전하는 조사(祖師)의 법맥이 달마까지 28조라고 주장한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의 고승 지거(智炬)가 801년에 지었다. 마하가섭(摩訶迦葉)에서 달마에 이르는 조사의 법맥을 순서대로 다루고 조사에 관한 전설과 법을 전하게 된 인연을 소개했다. 이 보림전에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란 말이 처음 등장한다.
*보명(寶明)---<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부루나 존자가 후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부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부처가 되면 그 이름을 법명(法明)이라 하고, 그 법명여래가 다스리는 시대를 보명(寶明)이라 한다고 하셨다.---→부루나(富樓那, Purna maitrayani putra) 참조.
*보문(普門)---넓은 문, 두루 통함, 원만하게 두루 융합함, 원만하고 완전한 가르침 등을 뜻하는 말인데, <화엄경>에서 우주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일체법(一切法)을 포섭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한자 ‘보(普)’는 넓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하다, 두루 미치다, 어질다는 뜻이고, 이에 따라 보음(普音), 보세(普世), 보신(普信), 보천(普天) 등의 말이 있다.
특히 불교에서 보(普)는 몸체에 온갖 성덕(性德)을 다 갖춘 것을 말하고, 문(門)은 쓰임이 나타나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보문(普門)이란 우주의 모든 사물이 저마다 일체의 법을 포섭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한편 보문(普門)이란 널리 열려진 문이라는 뜻으로,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문, 그래서 어떤 사람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을 다 구제해 주는 관세음보살의 대비원(大悲願)을 나타낸 말이기도 해서 보문은 관세음(觀世音)의 별칭이기도 하다. 이 경우, 보(普)는 널리 통한다는 말이고, 문(門)은 아무 걸림이 없이 활짝 열려 있다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넓고 큰 방편문(方便門)을 시현(示現)하는 것처럼 다양한 방편으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뜻한다.
*보문시현(普門示現)---부처님께서 보다 쉽고 가깝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중생의 마음이나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나타나는 것을 시현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의 근기에 맞는 33가지 몸으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관세음보살께서 ‘넓은 문으로 (몸을)나타내다’는 말이다.
서른세 가지 몸의 모습으로 혹은 32응신이라 해서 서른두 가지 몸 모습으로 중생의 필요(고통 받는 소리)에 따라 몸을 나타내시어(시현해) 고통을 없애주시니, ‘넓은 문’이라 했다. 관세음보살은 그 종류가 많지만, 성관음(聖觀音)만이 본신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문시현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 화신(化身)이다.
*보법수행(普法修行)과 일법수행(一法修行)---수행이라는 것은 알 줄 아는 마음에서 모를 줄 아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알 줄 아는 마음이란, 중생들은 분별심 즉 알 줄만 안다. 산다 죽는다, 보인다 안 보인다, 좋다 나쁘다. 이게 전부 아는 마음이다. ‘분별’ 즉 ‘갈라놓는 마음.’이다. 그것만 안다. 그러나 모를 줄 아는 마음, 이걸 ‘무분별심’이라 한다.
알 줄 아는 마음은 ‘의식’, 즉 생각과 인식이고, 모를 줄 아는 마음은 ‘반야, 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모를 줄 아는 마음이 본래 고향이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은 알 줄 아는 마음에서 모를 줄 아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그런 수행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느냐? 이걸 ‘보법수행(普法修行)’이라고 한다. 보법수행은 화엄학에서 쓰는 말이다(화엄학에서는 전체법을 보법이라 함).
그리고 일법수행(一法修行)은 하나만을 중요시한다는 수행인데, 선종에서 쓰는 용어이다. 마음 하나 닦으면 모든 게 다 된다. 관심일법(觀心一法 - 마음을 돌아보는 한 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법수행이다.
보법수행은 대승불교 전체에서 말하는 육바라밀, 10바라밀 수행이라든지 일체선행과 일체정진을 다 닦는 것이다. 마음의 지혜가 되고 온갖 것에 복이 되는 그런 행위는 전부 보법수행이다. 일체선법을 다 닦는 것을 말한다. 모든 복과 지혜를 다 닦는 것이 수행이 돼서 나중에, 즉 복과 지혜가 원만구족하면 그걸 성불이라 한다. 그래서 복혜양족(福慧兩足)이라 하며 이것을 대승불교라 한다. 그걸 보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보법수행이라 하더라도 원 길이 하나가 있다. 수행엔 길이 하나뿐이다. 신심(信心) 하나뿐이다. - 종범 스님
*보비관음(普悲觀音)---자비를 세계에 널리 펼친다는 의미의 관세음보살이다. 33신 중의 대자재천신으로 나투며 양 손을 법의에 감추고 산 위에 서 있다.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로서, 보디(Bodhi)와 사트바(sattv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디(Bodhi)는 보리(菩提) 즉 깨달음을 의미 하며, 사트바(sattva-살타)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으로 각유정(覺有情), 대사(大士), 고사(高士) 등으로 의역되기도 하며, 부처(깨달은 사람 또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불교 초기에는 보살이란 용어가 없었으나 기원전 1세기경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석가모니의 본생담 <자카타>에 언급된 보살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전인 전생의 존재를 지칭하였으나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보살의 개념은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보살 즉 각유정(覺有情)이란 뜻 속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깨친 중생,
둘째는 깨치게 하는 중생,
세 번째는 깨칠 중생이 그것이다.
즉, 중생은 중생이로되 이미 불법의 진리를 깨친 중생이고, 중생으로 하여금 깨치도록 유도하는 중생, 그리고 그와 같은 보살과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깨치게 될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다.
보살은 대승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위로는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 하면서[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하화중생(下化衆生)] 역할을 하는 일종의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 보살은 깨달으려고 애쓰는 사람, 중생은 깨달으려 하지도 못하고 헤매는 사람이다. 보살은 소승에는 없다. 대승에서 보살을 설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승이 탁월함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시설됨으로써 비로소 불교는 획기적인 확장을 할 수 있게 됐다.
보살은 출가자 재가자의 구분이 없다. 재가자로서 보살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 <승만경>의 주인공 승만부인은 재가자였으며, 신라의 원효 스님은 수행게위 제8지 보살이었다고 한다.
본래 대승이란 자신의 문제인 깨달음보다 다른 이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자비 실현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를 자비의 상징인 ‘보살중심 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성불을 한 생 늦추더라도 중생교화에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고 서원하는 것이 대승수행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의 실현보다 오히려 깨달음에 더욱 치중하는 감을 주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습은 보살이다. 보살은 모든 존재가 공(空)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공의 진리와 이 공이 무(無)가 아닌 불공(不空)이라는 중도(中道)의 진리를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집착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 나서 두루 중생을 구한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는 무수한 보살들이 등장한다. 중생은 업력(業力)으로 먹고 살고, 보살은 원력(願力)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초기불교 및 아비달마불교와 후대 대승불교의 가장 다른 점은 대승불교는 불교 실천의 주체로 보살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보살은 부처님이 깨달으시기 이전의 상태를 지칭하는 술어로 여러 초기경전에도 등장하고, 특히 자따까(본생담)에서는 부처님의 전생도 보살이라 칭하고 있으며, 보살의 다양한 보살행을 묘사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보살의 개념을 확대하는데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파불교시대 상좌부는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이전의 단계이므로 석가모니의 부처되기 전 수행자 시절과 지금 도솔천에 있는 미륵만이 보살이라고 보는데 반해, 대중부에서는 막연하게 많은 보살의 존재를 거론했다. 따라서 부처님 교설로 볼 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 등 많은 보살들은 부처님 교설에는 없는 대승불교에서 창작한 보살이다. 그리고 이들 보살들은 힌두교의 신들을 이름만 바꾸어 불교에 편입한 것이라고 한다.
보살을 상(像)으로 조성할 때는 머리에 모자 같은 것을 얹는다. 이것을 보관(寶冠)이라 하는데, 보관은 수행하는 사람이 보살초지 이상의 수행단계가 되면 머리에 저절로 쓰게 되는 관이다.
역사에 존재했던 고승(高僧)이나 대학자에게 존칭으로 보살을 사용하기도 한다. 실존인물로 보살 칭호로 불리는 사람은 용수(龍樹)ㆍ마명(馬鳴)ㆍ무착(無着)ㆍ세친(世親) 정도이다. 보살과 부처의 관계는 아래와 같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 부파불교에 있어서 수행목표는 아라한(阿羅漢)을 이상으로 했다. 그러므로 여기엔 범부가 성불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라한을 이상적인 인간상, 이상적 종교인상으로 삼았다면 대승불교의 이상적 종교인상은 보살(菩薩)이다.
보살이라는 말은 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만 국한돼 씌었었다. 그러던 것이 이타(利他)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에서는 누구든지 진리를 향해 굳은 발심을 하고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실천하면 다 보살이라 부르게 됐다. 즉 ‘석가보살’에서 ‘범부보살’로 보살의 의미가 확대적용된 것이다. 이 보살은 깨달음과 중생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지닌다. 그래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의 모든 생명을 제도하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념에 산다. 그래서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앓는다는 뜻은 중생이 병들어 있는 까닭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보살도 앓는 몸으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유마경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러한 보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보살에 대한 관점을 논의하는 것을 보살론(菩薩論)이라 한다.
즉, 부처가 되기를 목적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닦는 행을 보살행(菩薩行), 보살이 해야 할 법칙과 양식을 보살 법식(法式), 부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보살승(菩薩乘), 그리고 그 가르침의 경전을 보살장(菩薩藏)이라 한다. 따라서 대승경전을 통틀어 보살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보살행, 보살 법식, 보살승, 보살장에 관한 논의를 통틀어 보살론이라 한다. 그리고 대승 보살행의 대표적인 사례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이다.
그런데 보살이 윤회를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스님이나 경전 등에서 보살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듦으로써 윤회를 벗어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화엄경> 같은 경전에서는 보살이 범부중생과 더불어 윤회전생을 한다고 돼있다. 어느 말이 맞는가. 원칙적으로 보살이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한다는 것은 범부중생과 더불어 윤회전생 함을 의미한다. 그래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장보살이 지옥에 드는 것도 윤회를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그래야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부처님 한분은 윤회를 벗어나셨지만 대승보살은 범부중생과 더불어 윤회전생 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대승불교를 보살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초기불교와 남방 상좌부불교(스승불교)에서는 보살을 인정하지 않고, ― 부처님만 정각(正覺)을 이루시기 이전엔 보살이셨다. 그래서 아라한만 있으니 물론 아라한은 윤회를 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 부처는 보살만을 교화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보살은 자신의 권속인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인연 없는 중생들까지 구하고자 함이 부처의 마음과 같기 때문에 부처는 보살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이다. 열반 하셨음에도 부처는 보살이 부처가 할일을 대신 행하고 있기에 늘 부처는 보살이 중생들을 구할 수 있는 최상의 법을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아비달마불교를 이웃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소승불교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남방불교 스님들이 대승불교라 자처하는 한국 스님들보다 훨씬 이타행을 많이 하고 있다. 대승불교를 자처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이웃을 돕는 이타행을 말로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제대로 조직적인 이타행은 오히려 남방불교에 비해 부족한 상태이다.
※보살과 부처의 관계---보살이라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과 같은 분들을 뜻한다. 부처가 되는 과정은, 성문으로서 수행 정진해 아라한의 단계에 올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후 45단계를 거쳐 초지보살의 단계로 간다. 초지보살에서 10단계의 보살단계를 거치고 다음 묘각보살의 단계를 거처 무상등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루면 부처의 경지가 된다. 그런데 아라한 이상부터는 그 단계 하나하나가 하늘과 땅차이이다. 관자재보살은 초지보살을 지난 칠지보살이고 지장보살은 십지보살의 경지로 알려져 있다.
※보살의 구분---보살을 권현보살, 지상보살, 지전보살로 구분하기도 한다. 권형보살(權現菩薩)은 부처님처럼 진리를 완성한 보살로 부처의 경지에 있으면서 일부러 중생 제도를 위해 이 세상에 몸을 보인 보살을 가리킨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이 이에 속한다.
지상보살(地上菩薩)은 권현보살처럼 진리를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 깨달음의 반열에 든 보살을 가리킨다. 즉, <화엄경>에서 말하는 십지(十地) 이상의 과위에 오른 보살을 말한다.
지전보살(地前菩薩)은 신심과 수행을 갖추고 있으나 아직 어떤 깨달음의 반열에 들지 못한 보살을 가리킨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십지(十地) 이전의 보살을 말한다.
*보살가나(Bodhisattva-gana)---부파불교시대 번쇄한 이론중심의 아미달마불교에 반기를 들고 대승불교가 흥기할 무렵 대승불교도가 그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삼은 것이 보살가나이다. 가나(Gana)란 승가(僧家)와 동일한 의미로, 곧 보살가나는 보살중(菩薩衆), 보살 집단을 가리킨다. 재래의 출가자 중심의 교단인 '승가(僧伽)'에 대해서, 대승보살들의 공동수행집단, 혹은 대승교단을 보살가나라고 했는데, 이들은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교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 ― 대승경전을 편찬해갔다.
*보살계(菩薩戒)---보살계(菩薩戒)란 보살이 되고자 서원하고 발심하는 사람이 받는 계를 받는 것[수계(受戒)], 곧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원력(願力)으로 지혜와 자비를 실현해 나가는 보살이 지켜야 할 실천덕목이다. 본래는 대승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승려 외에 속인의 경우에도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계율로 인식되고 있다.
부처님은 해탈열반하기 위해서 계(戒) ‧ 정(定) ‧ 혜(慧)를 닦을 것을 말씀하셨다. 초기율장에 전해지는 계들은 거의 모두가 부처님이 직접 정하신 계율들로서 비구계를 비롯한 비구니계 등 많은 계율들이 있다. 후대에 보살사상의 등장으로 보살들이 지켜야 계율들이 따로 정해졌다. 이 계율들은 부처님이 정하신 초기율장의 계율을 근거로 하면서도 보살사상에 맞는 계율들이 추가돼 전승됐다.
선종 4조 도신(道信, 580~651)은 <보살계본(菩薩戒本)>을 지었다. 도신뿐 아니라 달마 때부터 육조까지 모두 보살계(菩薩戒)를 그때그때 설했으나 4조 때부터만 기록이 남아 있다. 육조 혜능(慧能) 선사는 <육조단경>에 보살계를 설했다. 보살계는 바로 무상계(無相戒)이다. 무상계란 상(相)을 여읜 계(戒)란 말이다. 그래서 보살계를 불성계(佛性戒) 혹은 무상계(無相戒)라 한다.
무상계(無相戒)는 육조 혜능 대사가 설한 것으로 혜능 대사가 <금강경>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相)을 여읠 것을 설하는 <금강경>의 사상을 드러내기 위해 무상(無相)이란 이름을 써서 무상계를 설한 것이다. 초기율장에 전해지는 계율부터 보살계, 무상계 모두 불자들에게 탐(貪) ‧ 진(瞋) ‧ 치(癡)를 여의고 해탈열반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설한 것들이다.
사찰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유의 불교행사가 있다. 영남의 3대 사찰이라 하는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는 각기 그 특색에 맞는 전통의 법회가 있다. 통도사는 화엄산림, 해인사는 장경 이운식, 그리고 범어사는 보살계 수계법회(菩薩戒 受戒法會)이다. 과거에 보살계는 모두 범어사에서 받았다. 2박 3일을 사찰에 머물면서 큰스님의 보살계 설법을 듣고 1일 3회 예불기도 올리고 참회발원 하면서 보살계를 받았다. 보살계를 받으면 모든 불자는 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계 수계는 자주 받는 것이 좋다. 그것은 불자로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고 점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범어사는 일 년에 한 번 보살계를 재가자에게 내리는데 삼화상(三和尙)과 칠증사(七證師)를 모시고 그 분들의 증명 하에 보살계를 수여한다. 자기 자신이 처음 부처님 전에 와서 예배하고 절을 하던 그 순수하고 순박한 그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살계를 받는 이유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처럼, 동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는 슬로건이 보살계 수계식(受戒式)이다. 보살계를 받으면 법명(法名-佛名)을 받는다.---→수계(受戒), 법명(法名) 참조.
*보살도(菩薩道)---대승불교의 보살이 닦고 실천하는 수행을 말한다.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습은 보살이다. 보살은 모든 존재가 공(空)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공의 진리와 이 공이 무(無)가 아닌 불공(不空)이라는 중도(中道)의 진리를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집착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 나서 두루 중생을 구한다.
따라서 수행의 근거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인데, 보살이 자리이타의 실천행을 닦는 까닭은 참된 깨달음은 모든 중생과 함께 하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또는 여래장(如來藏)의 발현이야말로 이 세계를 진정한 불국토(佛國土)로 만들고 그 불국토의 구현이 불교의 목표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심을 발했으면 반드시 실천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보살도를 닦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입으로 부르기만 할 뿐,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경계를 만나면 화를 낸다거나 사사건건 따지려 든다면 진정으로 보살도를 닦는 게 아니다. 보살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육바리밀(六波羅密)’이고, 가장 방편적인 것이 ‘사섭법(四攝法)’이며, 3종심(三種心), 사무량심(四無量心)도 있어야 하고, 또 사홍서원(四弘誓願)도 발해야 한다.
① 삼종심은 직심(直心)ㆍ심심(深心)ㆍ대비심(大悲心)으로, 이들 마음가짐을 온전하게 갖추어야만 보살도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갖출 수 있다고 했다.
② 사무량심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무량심으로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미혹과 고통을 제거하여 주기 위한 것이다.
③ 육바라밀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의 실천행으로, 보살행을 좁은 뜻으로 해석할 때는 이것만을 논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④ 사섭법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기본적 태도로 보시(布施)ㆍ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이다. 보살행의 실천에 솔선수범한 승려로는 신라의 대안(大安)ㆍ혜공(惠空)ㆍ원효(元曉), 조선의 언기(彦機) 등이 있다.
※화엄보살도(華嚴菩薩道)---보살의 삶이란 무엇인가?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을 42단계로 설하고 있는데,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단계를 차례로 설하고 있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마하(摩訶)는 크다는 뜻이고, 살(薩)은 사람, 중생 혹은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으뜸가는 이를 마하살이라 한다. 따라서 보살 마하살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싶다는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큰 사람(大士), 즉 위대한 보살, 큰 보살이란 말이다. 이미 부처의 지위에 올랐지만 중생을 위해 보살로 남아있는 보살을 큰 보살이라 할 수 있다.
*보살사상(菩薩思想)---초기불교에는 석가모니부처님 전생만 보살이라고 했다. 즉,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부처님은 성불(成佛)이 확정되고 이런 수행자는 수기를 받지 않은 사람과 구별해야 하므로 여기에 보살(菩薩)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처럼 보살이란 처음에는 부처님이 성불하시기 이전의 상태를 이르는 용어였다.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보살이란 번뇌 망념에 의한 업(業)에서 인과(因果)를 단절한 성인으로 정의하고 본생담(本生譚-Jataka)에 나오는 석가보살(釋迦菩薩) 이외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처음의 용례와는 관계없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며 바라밀행(波羅蜜行)을 닦아서 성불을 기약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보살이라 하게 됐다. 즉, 누구나 보살도(菩薩道)를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새로운 보살사상이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보살이라는 말과 개념은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로 이행할 당시 즉 연대로 말하면 대략 BC 2세기 경 이후에 등장한 것 같다.
역사 속에 인간으로 사셨던 부처님이 대승불교에서는 신격화 되고 그 신격화 된 나머지 인간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저 위대한 분이 돼버렸다.
그래서 그 중간자 역할을 할 분이 필요했는데, 이 분들이 바로 보살들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끊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보살들은 일부러 자기의 원력에 따라 윤회의 세상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언제든 원력에 따라 중생세계에서 만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다분히 힌두교적인 영향을 받아서 탄생했다. 당시 대부분의 민중들이 힌두교의 비슈누신이나 시바신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신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대승불교에 와서 민중을 포섭하기 위해 힌두교 신들의 모습을 차용해 여러 보살들을 등장시킨 것이다.
어떻든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시설은 불교 확장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대승경전에서 설하는 보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불의 서원을 세우고 자리도(自利道)를 구하는 보살이다. 이들을 자리적(自利的) 수행에 의한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구도보살(求道菩薩)이다.
둘째로는 대승화신보살(大乘化身菩薩)이라고 하는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과 같은 과거에 이미 성불한 대보살이 있다. 이러한 보살들은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일부러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출현하며 성도(成道)와 전법륜(轉法輪)의 상(相)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한다. 또한 이들은 성불의 수기(授記)를 초월해 순수 이타적(利他的) 보살행(菩薩行)만을 행한다. 그러므로 이들을 이성(已成)의 불(佛) 혹은 오도보살(悟道菩薩)로서 이타적 중생구제보살이라고 한다. 대승보살이란 바로 이들을 말한다.
이와 같은 보살의 관념은 부파불교시대의 출가승단과는 다른 불탑신앙의 보살집단(보살가나)에서 나타난 것으로 간주된다. 가나(Gana)란 승가(僧家)와 동일한 의미로, 곧 보살가나는 보살중(菩薩衆), 보살집단을 가리켰다. 이들은 정신적으로는 보리(菩提)를 구하고, 행(行)으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전개한 무리들이다. 부파불교에서의 출가자들은 소극적 자기수행만으로 전념함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잃어가고, 부처님 진리가 일반대중들과의 괴리감으로 나타남으로써 민중의 편에 서려는 뜻있는 분들의 각성으로 민중과 함께 바라밀을 실천하려는 대중불교운동이 일어남은 그 시대의 부름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중과 함께 하며 대중불교의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부파불교의 번쇄한 이론중심 아미달마불교에 반기든 민중들 역시 그들의 구심점으로서 보살가나(보살단)를 지지했다. 이렇게 해서 대승불교, 그리고 ‘보살’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 보살집단을 재래의 출가자 중심의 교단인 승가(僧伽)에 대해서, 대승보살들의 공동수행집단, 혹은 대승교단의 보살가나(Bodhisattva-gana)라고 했다. 이들은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교단이었다. 이들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하나 되는 길을 택해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민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게 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sattva)’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형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보리살타(보디사트바)는 불교의 새로운, 그리고 위대하고도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 됐다. 이 보살이라는 인간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나아가서, 새로이 등장한 대승보살은 수기가 없이도 성불할 수 있는 보살이었다. 즉, 일반범부인 대승수행자도 보살로서 수기 없이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다는 자부심의 보살이었다. 이들 수기를 받지 않은 범부보살은 자기 스스로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승사상인 불성사상과 여래장사상으로도 이어지면서 대중을 이끌어 온 많은 출가보살, 재가보살의 힘이 되고 사상의 근저가 됐다.
그리하여 보살은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一切皆苦]을 잘 통찰하고 있지만 자신의 해탈을 서두르지 않는다. 많은 중생들의 고통을 껴안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해탈의 세계로, 깨달음의 세계로 가고자 했다. 따라서 보살정신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정신이었다.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습은 보살이다. 보살은 모든 존재가 공(空)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공의 진리와 이 공이 무(無)가 아닌 불공(不空)이라는 중도(中道)의 진리를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집착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 나서 두루 중생을 구한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의 실천은 오직 자리(自利)만을 구하지 않고 이타(利他)에 전력하는 입장이었으며, 성불도 도모하지 않는 끊임없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결의가 필요했다. 보살의 이런 굳은 결의를 홍서(弘誓)라 하고, 이러한 대개(大蓋-대 원칙)을 세워 실천함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됐다. 대승보살, 즉 일반 재가불자로서 보리심을 발한 자는 이상과 같은 힘든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는 마치 부파불교에 대한 대승불교의 자각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만큼 재가불자들의 심경은 대단한 결의로 무장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 ― 대승경전과 논서들을 편찬해갔다.
*보살상(菩薩像)---『평범한 사람들의 눈빛은 거짓말을 못한다. 다큐 영화 ‘오 마이 파파’에 등장하는 모든 이의 눈빛에서 ‘행복’과 ‘감사’가 넘친다. 영화는 ‘부산 송도의 성자’로 불리는 미국 출신 알로이시오(한국명 소재건, 1930~1992) 신부의 삶과 업적을 1시간 37분에 걸쳐 차분하게 보여준다.
중년 이상 부산 사람들에겐 ‘소 신부님’으로 잘 알려진 알로이시오(Aloysius) 신부는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메리놀대학과 벨기에 루뱅대에서 공부한 후 1957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자원해서 부산으로 왔다. 당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장 가난한 이웃을 찾아든 것.
(6, 25)피난민 판자촌이 즐비하던 송도성당 주임을 자원한 그는 마리아수녀회를 창립하고,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기숙사와 학교를 갖춘 ‘소년의 집’을 열게 된 것도, 아이들이 다른 학교와 축구 시합을 벌일 때 꼭 함께 뛴 것도 아이들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다. ‘고아 새끼’라고 무시당하던 아이들이 소 신부가 함께 뛰면 기가 살아난 것, 시설을 최고로 지었다.
돈 걱정은 소 신수의 몫이었다. 매일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동네 주부들이 부업으로 만든 수놓은 손수건을 동봉했다. 후원자들이 보내오는 후원금은 평균 1인당 1달러, 5달러 이상은 ‘고액후원자’였다. 소 신부는 후원금을 은행에 넣는 일 없이 바로 펑펑 썼다. “가난한 이 가운데 가장 가난한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철학에 따른 것. 정작 그는 지독히 가난하게 살았다. 수단(무릎까지 내려오는 사제복), 양복 각각 한 벌로 평생 살았고, 구두도 수시로 꿰매 신었다. 한 수녀는 말한다. “차라리 애덕(愛德)은 쉬워요. 그런데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에요.…”
다큐 곳곳에 등장하는 소 신부의 어록은 그의 영성(靈性)이 어디를 지향하는지 잘 보여준다. “기도를 하다가도 아이들이 찾으면 기도를 멈추고 아이에게 가세요. 그 아이 안에 살아있는 예수님을 보세요.” (수녀들에게)“내 희망은 보통 가정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보통 아버지는 자식이 건강하고 교육 잘 받고 잘 취직해서 사는 것 아니겠어요?”
한 수녀는 “조금만 더”를 되새기고 있다. “신부님은 항상 ‘조금만 더’를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가볍게 들리지만 실천은 어려워요. ‘조금만 더 참고, 더 친절하고, 더 이해하는 것…”
1992년 한참 나이(60대 초반)에 루게릭병을 얻어 선종(善終)한 그는 작년(2015년) 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의 전단계인 가경자(加敬者)로 선포됐다.』- 2016, 11, 4일자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이 글을 읽다가 보면, 불자라는 게 부끄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보살상을 보는 것 같다. 비록 천주교 신부이지만 ‘알로이시오’라는 이름 대신 보살을 대입시켜도 정말 훌륭한 보살상이라 생각된다. 아마 한국불교 종단에 이런 스님 10명만 계셔도 한국불교는 빛을 발하리라. 초기불교가 어떻고, 대승불교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백년 해봐야 이런 신부님 앞에 서면 그게 다 부질없는 이야기, 헛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고, 막존지해(莫存知解)라 했다. 알음알이로 왈가왈부하기보다 이웃 사랑 조금 더 베푸는 일이 더 부처님 곁에 다가서는 일일 것이다.
부처님이 선정의 최고단계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까지 오르셨으나 마음의 어둠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해탈을 얻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인과의 실천을 통해 업을 지우려 하지 않고 기존의 전통에 얽매여 다만 선정(禪定)으로 모든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깨달음은 선정과 고행으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통해 쌓은 공덕이 세상을 덮을 정도가 돼 그 선근(善根)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와서 해탈을 얻은 것이니 모든 제자들은 부지런히 법을 배우고 실천과 노력을 해 깨달음에 이르라“고 하신 것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자신을 닦아야지 현실과 유리된 명상이나 선정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을 닦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공덕을 짓는 활동을 통해 변화하며 자기가 짓는 공덕(원인)에 따라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가 한 치의 어김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인과법인 것이다. 앉아서 하는 선정이나 명상 호흡 같은 것은 원인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을 좋게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오늘날 수행자들은 바로 여기에 걸려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정과 명상은 인생을 닦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마음을 보는 기술에 불과하다. 사람은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욕망과 습을 버리며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맑고 강한 정신을 얻을 때 진정한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지 선정을 한다거나 명상을 하거나 소리나 빛에 집중하거나 기를 돌려서는 결코 자신의 정신을 닦을 수가 없다.
아무리 이 우주와 자신의 실체가 공함을 생각으로 깨친다 하더라도 자신 속에 숙생의 업을 통해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업이 계속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이를 지울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방법은 오직 바른 이치를 배워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 땅으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진리인 인과법과 생생한 마음을 버리고 공을 받아들였으니 머리는 텅 비고 눈은 흐려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인연에서 멀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이며 세상이 흘러가는 사실적인 이치이니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면 삶이 허황하게 되며,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를 어기면 삶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현실을 극복하며 사는 진지한 삶을 통해 정각을 얻은 자의 해탈지심은 마음속에 쌓여있는 모든 업의 뿌리를 뽑아내어 다시 헝클어질 먼지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려도 더 이상 흐려질 것이 없으며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간에 항상 진여가 빛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보살 수도 5위(修道5位)---→보살수행 5위라고도 한다.---→수도 5위(修道5位), 보살수행 52위(菩薩修行五十二位) 참조.
*보살수행 52위(菩薩修行五十二位)와 보살수행 5위---<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보살영락본업경>, <범망경> 등에서 보살 52위설을 말하고 있다. 대승불교 보살, 즉 보살승(菩薩乘) 수행자가 처음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후 수행의 공덕을 쌓아서 불과(佛果), 즉 부처의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거쳐 가는 단계 또는 계위(階位)를 말한다. 보살의 수행계위라고도 하는데, 보살 수행계위에 대해 모든 대승불교의 경전과 논서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계위체계가 있다. 그러나 그 대표적인 것에 두 유형이 있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설하고 있는 수행계위 52위(位)와 유식에서 말하는 보살수행 5위(唯識修行五位)=수도 5위(修道5位)가 있어 아래와 같다.
• 보살수행 52위---<보살영락본업경> 등에 기술한 보살수행 52위(位)는 보살이 처음에 보리심을 일으키면서부터 인행을 닦아서 수행의 공덕을 쌓아 부처의 과보를 이루기까지의 계위(階位)를 일컫는다. 이에는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의 50위와 부처님 지위인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을 더해서 52단계이다. 이 52계위는 부처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되며 차례차례 위 계단으로 올라간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10위 십신(十信)
11~20위 십주(十住)
21~30위 십행(十行)
31~40위 십회향(十廻向)
41~50위 십지(十地)
51위 등각, 정등각
52위 묘각
• 보살수행 5위---유식에서 주장하는 보살수행 5위(修行五位)란 <유식30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하며, 보살수행 5위, 보살수도 5위(修道 5位), 수행위차(修行位次), 수행계위(修行階位)라고도 한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모든 인식활동으로 얻어진 번뇌를 정화하고, 이의 본성인 진여성(眞如性)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유식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8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識)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된 허망한 인식인 망식을 대승적인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지혜를 증득하는데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가 있다.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5위이다.
위의 보살수행계위 52위와 보살수행 5위, 두 유형의 보살수행단계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의 수행 5위(修行5位)에서 앞의 두 단계, 즉 자량위와 가행위에 전념하는 수행자를 지전(地前)보살이라고 한다. 이는 보살수행 52위(位)에서 소위 보살 10지(地)라고 불리는 단계에 이르기 이전의 상태에 있으므로 '지전(地前)'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식수행 5위에서 앞의 두 단계 이후의 세 단계는 당연히 지상(地上)이라고 한다.
①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는 범부로 있으면서도 범부로서의 깨달음이 정점에 달해 이제 곧 번뇌를 낳지 않을 무루(無漏) 종자가 싹을 틔우려 하기까지 성숙해 온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자량위에는 보살수행 52위(位) 중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이라는 진전 단계가 있는데, 이것을 자량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수행과정이 부처가 되기 위한 양식을 비축하는 것과 같은 단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10신(信)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10신은 예비수행으로서 본격적인 수행은 10주(住)부터이고, 10신은 10주의 첫 계위에 오르기 위해 닦아야 하는 예비수행이기 때문이다.
② 가행위(加行位)는 자량위의 최후로부터 시작해 4선근(善根)을 닦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량위의 최후란 만심(滿心)을 가리키며, 이 만심은 10주, 10행, 10회향이라는 세 단계 중 셋째인 10회향 중에서 맨 끝에 있는 단계이다. 가행위는 넓은 의미로는 수행 일반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한층 더 노력해 수행에 경주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량위에서 기초적으로 형성된 수행력을 한층 더 강화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과정이 가행위이다.
※4선근이란---유식수행 5위(修行五位)라는 보살 수행과정 다섯 단계의 제2위인 가행위(加行位) 내에 다시 범부중생이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네 단계가 있어 이를 사선근(四善根) 또는 사가행(四加行)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가 일반 범부중생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라서 사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라고도 한다. 이에는 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의 네 단계가 있다.
③ 통달위(通達位)는 보살 10지의 첫 단계, 즉 초지(初地)에 입문한 상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입심(入心)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데, 입심(入心)과 주심(住心), 출심(出心)이라는 3심이 10지 중 초지의 세 단계를 형성하고, 이 3심 중 첫 단계가 입심이다.
※ 3심---• 입심(入心). 처음 그 지위에 들어갈 때를 말한다.
• 주심(住心). 그 지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을 말한다.
• 출심(出心). 장차 그 지위에서 나와 다음 지위로 가려는 때임.
불교 일반에서 수행의 단계를 크게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라는 3도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앞서 말한 자량위와 가행위에 통달위를 더해 견도(見道)로 간주한다. 수행자는 이 세 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분별지에서 벗어나 망상으로 물들지 않은 세계인 진여(眞如)의 이치를 보고서 거기에 도달한다.
④ 수습위(修習位)는 보살 10지 중 첫 단계인 초지의 둘째 단계, 즉 주심(住心)으로부터 제10지까지의 과정을 가리키며, 3도로 말하면 수도(修道)라고 불린다. 이는 점차 부처의 경지에 가까워져 가는 본격적인 수행과정이다.
⑤ 마지막 단계인 구경위(究竟位)는 부처가 되는 경지이며, 3도로 말하면 무학도(無學道)라고도 한다. 무학도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단계라는 뜻이므로, 여기서 수행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는 부처라는 수행의 결실, 즉 불과(佛果)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10지(地) 수도(修道)까지 마치면 등각(等覺)에 오르는데, 등각이란 부처님의 깨달음과 똑같이 되는 지위를 말한다. 이어서 묘용을 갖춘 깨달음(妙覺)을 증득하게 되는데, 무명(無明)을 완전히 단진(斷盡)한 부처님 경지로, 부처님 깨달음의 경지가 참으로 묘하게 중중무진(重重無盡)하기 때문에 묘각(妙覺)이라고 한다. 이처럼 초발심(初發心)에서부터 묘각(妙覺)의 불신(佛身)을 성취할 때까지의 계위를 구분한 것이 52위이다. 그런데 자연인으로 52위에 오른 사람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시설해 놓은 단계일 뿐 수행승들에겐 있으나마나 한 수행계위이다.
화엄보살도(華嚴菩薩道)는 42위이다. 즉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을 42단계로 설하고 있는데,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단계를 차례로 설하고 있다.
[출처]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14>|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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