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26>

수선님 2023. 8. 6. 12:40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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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중심부 이동 - 대승불교 본거지의 이동---어떤 학문이나 종교의 전통은 반드시 그 발상지에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의 발상지가 중국이지만 청나라시대인 조선 중기 이후엔 유학의 전통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자부하기도 한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교 발상지가 인도이지만 오늘날 불교전통은 스리랑카에서 지켜지고 있다. 기독교도 예루살렘에서 생겨났지만 오늘날 로마를 비롯한 서양에서 그 전통을 더 잘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적절한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가다국에 12년째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던 가운데 자이나교단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뭄을 피해 교단을 잠시 옮길 것인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에 남을 것인지…. 상당수 원로와 수행자들이 끝까지 남자고 했지만, 교단의 수장은 그보다 많은 대중들의 뜻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은 사람들은 어렵더라도 그곳을 지키며 살기로 했다. 그렇게 12년이 흘러 남쪽으로 갔던 교도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교조 마하비라 때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을 깨고 수행자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에게 옷을 입는다는 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는 수행자의 다짐을 깬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자이나교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空衣派)와 흰 옷을 입는 백의파(白衣派)로 나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이와 같이 때때로 전통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곳은 그 전통의 발상지가 아닐 수 있다. 자이나교처럼 전통 문화권에서 벗어난 이들이 오히려 전통의 계승에 더 적극적임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발달한 것도 인도에서 더 이상 불교(대승불교)가 발 불일 수 없게 되자, 그 중심부가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으로 옮아온 것이다.

 

 

*불교의 창조론---‘불교에서 창조론참조.

 

 

*불교의 특징---모든 종교에는 표층적인 부분과 심층적인 면이 공존해 있기 마련이다. 일상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교의 기복적인 부분을 살짝 벗겨내면 무한하고 절대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인류의 고민이 담겨있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믿음(信心)과 행원(行願), 자비(慈悲)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는 불자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와서 보라는 종교이지 와서 믿어라는 종교가 아니다. 붓다 가르침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넘기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涅槃)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진리이다. 불교는 붓다나 경전 자체에 대해 올바른 믿음을 강조하지 맹신(盲信)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 맹신적인 자세를 벗어나 스스로의 지혜[반야(般若)]를 닦으라고 가르친다.

① 불교의 목적은 열반(涅槃), 행복의 실현이다.

―불교는 인간고(人間苦)를 해결하려는 종교이다―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하는 종교다. 중생들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누렸으면 하는 게 부처님이 중생에게 품는 연민이며 자비심의 발로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涅槃, nirvna)을 성취함을 이상으로 하지만, 불교의 목표는 발고여락(拔苦與樂)에 있다. 발고여락은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고 낙을 주는 자비(慈悲)을 말한다. 발고는 비()의 덕, 여락은 자()의 덕이다. 중생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시는 부처님의 작용,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실천을 말한다. 따라서 발고여락은 불교의 목표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행복 추구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는 복을 받기 위해 복 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강조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불자다. 그렇다면 불자로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보시와 지계를 실천해야 한다. 행복 추구의 방법은 보시와 지계이며, 보시와 지계가 작복 또는 수복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작복=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웃과 나누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은 세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불가결의 조건이다. 이를 교리적으로는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고 한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루복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유루복은 어디까지나 윤회의 고리가 되는 것이므로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무루복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 권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불자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불자 개개인의 실행목표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그리고 불교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解脫)이 달성됨을 지향한다. 불교에서의 종교적 구원은 다만 생천(生天), 즉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탈(解脫) 내지 열반(涅槃)이며, 이는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 즉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생천 역시 오로지 선업(善業)에 의해 가능하다고 본다.

②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교는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새로 말들어낸다는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온 진리에 대한 발견이다. 붓다는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었다.

불교는 인간 지성을 믿는다. 때문에 불교는 불자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불교는 믿음이 아니라, 앎의 종교이다. 직접 자신이 수행해가면서 깨달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앎, 즉 깨달음이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룬 것으로 불교역사가 시작됐다. 따라서 붓다도 깨달음과 구제의 도사(導師)이지 신격(神格)이 아니다. , 불교는 각자(覺者),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의 전환을 뜻한다. , 깨달음이란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해탈은 온갖 번뇌와 고()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진,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이는 마음 상태가 바뀐, 자기초월을 의미하며, 불교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은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특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스승의 깨달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불교입문의 첫 번째 조건은 불 · · 승 삼보에 대한 귀의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혹은 설하신 말씀)이며, (승가)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공동체이다. 절대자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려 은총을 구하고 처분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실상(實相)을 깨달아 자유인이 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불교는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종교이다.

―불교에는 성직자가 없다―

부처님은 사제의 매개나 신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로 종교를 선포했다. 불교는 이러한 메시지로 세상에 나온 종교다.

대개의 종교는 신을 통해 구원을 찾는다. 따라서 신 중심적이다. 그러나 불교는 원칙적으로 타력구원이 아니라 자력구원으로서 스스로 수행을 통해 해탈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는 성직자가 없는 종교이다. 불교에는 오직 구도자만 있을 뿐이다. 불교는 결코 자기를 대신해서 빌어주거나 구원을 매개해주는 성직자가 없다. 스님도 다만 수행자, 구도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서민들은 좀체 구원을 얻기 힘들다. 먹고 살기에 바쁜데 언제 수행을 하며, 정진을 하겠는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대승불교, 그 중에서도 정토신앙이다. 정토신앙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만 해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 직설에 의한 근본불교와 소승불교에서는 자력구원을 원칙으로 하나 대승불교, 특히 정토신앙에서는 타력구원에 의지한다.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 제불 제보살은 바로 타력구원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에서 창작된 불ㆍ보살이다.

④ 불교는 와서 보라는 종교이지, ‘와서 믿어라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지혜[반야(般若)]의 종교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얻은 부처님의 첫 말씀이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귀 있는 자 와서 들으라, 감로의 문 여기 여나니…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와서 보라라는 말은 맹목적인 믿음을 내라는 말이 아니다. 명백하게 객관적인 것으로서 숨길만한, 어떤 신비로운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엔 비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결코 주먹을 펴지 않는 스승의 주먹[사권(師拳, ācariya-muṭṭhi)]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와서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하거나 누구라도 와서 이 법을 보라고 하셨다.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것을 와서 보라고 하셨다.

불교는 불자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함으로 붓다(佛陀, Buddha)의 가르침인 경전에서도 맹신적인 자세를 벗어나 스스로의 지혜[반야(般若)]를 닦으라고 가르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도 나를 믿어라가 아니고, 부처인 자신조차도 완전히 비어 있음을 알라, 이런 가르침이다. 불교에는 덮어놓고 믿는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철저하게 분석해서 맞는지 안 맞는지 따져보라고 하셨다.

반야란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智慧), 통찰(洞察), ‘수승한 지혜라는 뜻인데, 이때의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이다. 그 지혜란 집착 혹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읜 지혜이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혜이다. , 모든 분별지(分別智)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를 반야라 한다. 보통 말하는 판단능력인 분별지(分別智, vijnana)와 구별하기 위해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한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리고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또한 해탈(解脫)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반야는 초월적 지혜, 즉 인간생명의 근원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예지(叡智)이므로 달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하며, 근본지(根本智)를 말한다.

“‘깨달음을 불교 수행의 목적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불교의 근본 성격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혜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곧 불교의 근본성격은 깨달음을 통한 지혜의 증득이며, 또한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종교체험을 통해 심신의 인격이 변화되어, 몸과 말과 정신적인 행위의 일체가 더 이상 번뇌에 사로잡힘이 없는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 이것이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의 근본목적이다.” - 이태승

⑤ 불교는 합리성을 존중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철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다―

붓다는 신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존재이다. 그 진리를 찾는 불교는 진리의 학문, 즉 철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다. 불교가 비록 종교이기는 하나 허황된 신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과 과학성에 근거해 있다. 불교는 목표가 과학적이고, 수행방법이 합리적이다. 불교는 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해서 스스로 깨달으라고 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밝은 지혜를 얻음이 목표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 그리고 그 결과를 얻는 것을 가르친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교뿐 아니라 종교 자체가 살아남지 못한다. 과학에 의해 종교적 영역이 좁아지고는 있지만,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존엄성이 버려지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적 진화의 끝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한, 붓다의 가르침은 더욱 간절해 질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붓다의 법을 능가하는 가르침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법(緣起法)은 현재의 현상()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와 같다. 사실과 현상을 망상과 집착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보자는, 불교 수행의 과정도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을 연구하는 마음자세와 유사하다. 그래서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교육을 통해 지적 능력이 진화해나갈수록, 불교는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과학적이라서 위대한 것만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이지 단순히 과학적이라서 위대한 것만은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 일개 과학의 검증 대상이 된다는 것도 가당찮은 일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위대하고 증명되지 못하면 저열하다는 논리여서는 곤란하다. 과학이 부처님 가르침보다 우위에 있고 생각한마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불교가 과학이라는 말에 제약을 받든가, 불교가 철학이라는 말에 제약을 받는다면 단순한 학문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불교는 종교이지 학문이 아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원인의 하나가 종교성이 상실되고 학문성만 남았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다. 종교는 과학성을 띠되 과학성을 넘어서는, 종교가 철학적인 측면이 있되 철학을 넘어서는, 종교적 특성이 유지돼야 한다. 불교처럼 마음에 관해, 바른 삶에 관해, 바른 지혜에 관해, 바른 깨달음을 추구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⑥ 불교는 무아(無我)의 종교이다.

―불교는 아트만(atman)을 부정한다―

무아,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록 가아(假我)지만 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아상(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브라만교에서 아트만은 윤회의 주체였다.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아트만을 설정하고 윤회설을 전파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권력자의 사기극을 부정하기 위해 윤회와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를 주장하셨다.

불교는 시간적으로 절단한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연기(緣起) 등이 축이 돼, 무아(無我)설과 함께 공()사상을 강조한다. 특히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은 무아(無我)에 있다. 모든 종교는 유아(有我)의 입장이다. 내가 있다, 이것이 전제돼 있다. 하지만, 불교는 그 반대이다. 무아라는 것은 그 어떤 종교ㆍ사상에도 없는 불교만의 특색이다.

⑦ 불교에는 신()이 없다.

―붓다는 진리로서의 존재이다―

불교는 신()을 내세우지 않고, 신에 의지하지 않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는다.

불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무신론이며, 붓다는 신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존재이다. 신이 없고 진리만 있는 종교이므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 기독교식으로 생각하는 신앙(신을 중심으로 된 종교)과는 구분돼 불교를 종교라기보다 철학으로 보는 이도 있게 된다.

대개의 종교가 바깥에 어떤 대상[()]을 정해놓고 숭배하고 기댄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이 범주에 속한다. 우상이란 것은 사람들이 기대려고 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그 무엇이 신이라 하더라고 그것은 우상에 속한다. 불교는 신(God)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정불변하는 존재, 즉 영원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이다. 붓다 가르침의 핵심도 붓다께서 나를 믿어라가 아니고, 붓다 자신조차도 완전히 비어 있음을 알라, 이런 가르침이다.

그러니 바깥에 영원불멸하는 신이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는 어떤 신을 의지하거나, 기대거나, 그 존재를 믿지 않는다. 붓다는 깨달음과 구제(救濟)의 도사(導師)이지 천지창조를 한 분이 아니다. 불교는 믿음이 아니라, 앎의 종교이다. 직접 자신이 수행해가면서 깨달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앎, 즉 깨달음이다.

⑧ 불교는 평등을 지향하는 종교이다.

―붓다는 불평등 계급주의를 거부했다―

고대인도 브라만교에서는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윤회사상을 전파했다. 따라서 윤회는 당시 인도에 보편화된 상식이었다. 천민인 경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이 생에 천민으로 태어났으나 이 생에서 불행을 참고 열심히 살면 내생에 귀하게 태어난다는 식으로 억눌렀다.

그러나 붓다는 브라만교식 타생으로 태어나는 윤회전생사상을 거부했다. 붓다는 고정된 틀과 운명론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전생의 바라문이 현생의 바라문이라는 정형화된 윤회론을 부정하셨다. 그것은 불평등 계급주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계급타파와 남녀평등을 주장한 선동적인 혁명가이거나 사회질서를 흔들어 새롭게 판을 짜자는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교를 전파하고 승가(출가자)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오직 승가안에서는 계급이 없이 모두 다 평등했다. 그래서 사회신분에 관계없이 출가를 허용했다. 단 그것도 부모님의 허락 하에 가능했다.- 실론섬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출가의 조건이나 출가 후 생활에 있어서 계급과 재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비구는 같은 복장에 같은 규율을 지키며 생활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승가 안에서 위계와 질서의 기준, 즉 좌석의 차례를 정하는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구족계를 받은 순서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나의 법은 바다와 같다. 바다는 수많은 강물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며, 바다의 물맛은 언제나 하나이다. 우리 승가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며, 평등한 그들에게는 올바른 법과 율이라는 한맛이 있을 뿐이다. 명심하라. 계를 받은 순서에 따라 예를 다할 뿐, 신분과 귀천의 차별은 여기에 없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타고난 종족이나 신분, 가진 재산이나 지식과 능력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부당한 세상의 잣대로 무시당하고 소외받던 사람들에게 더욱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셨다.

막스 뮐러(Friedrich Max Muler, 1823~1900)는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 귀화해 1850년부터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돼 인도-유럽어족을 중심으로 한 언어학과 비교신화학을 통해 종교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다수의 불교경전을 번역 출판해 불교를 서구사회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에 산스크리트 문헌학을 보급했다.

뮐러는 이른바 사제적 종교를 비종교적이라고 비판한다. 사제(司祭)의 권력으로 발전한 종교는 종교의 제도화와 함께 자연종교에서 멀어지게 된다. 참된 종교는 유한한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무한을 인식하는 것이며, 무한에의 인식이 인간의 도덕적 특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양상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뮐러는 여러 종교의 신()들은 주인 없는 가면이며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지, 신이 인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당시 인도인을 억누르고 있던 윤리적 정신적 삶의 올가미를 풀어준 성인으로 평가했다. 붓다의 위대한 성취는 계급제도와 특권층에 억눌려 있던 인도인에게 참된 평등과 자유의 길을 가르친 데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뮐러는 붓다가 가르친 자비의 윤리가 내포한 사회복지적 의미를 주목하고, 평등과 무아의 윤리적 탁월성을 찬양했다.

불교의 평등사상은 직업에도 귀천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뒷받침했다. 다만 붓다는 올바른 직업과 그릇된 직업을 엄격히 구분했다. 올바른 직업의 판단기준은 종교적 목표와 사회적 도덕성, 이것이야말로 경제윤리와 종교윤리의 만남이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본 노동의 의미는 선농일치(禪農一致)였다. 노동은 종교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다. 노동 그 자체는 수행의 과정이다. 노동의 결과는 고통 받는 중생에게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노동관이었다.

⑨ 불교는 마음에 관한 종교이다.

―불교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 테크놀로지이다―

다음은 세계적인 명상지도자 아잔 브람 스님의 법문 내용이다. “제가 태국 북부 정글에서 제 스승님이신 아잔 차 스님을 만났는데, 이 분이 제가 캠브리지에서 만난 노벨상 수상자보다도 훨씬 더 현명한 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학교라고는 4년밖에 다니지 않은 아잔 차 스님 같은 분이 어떻게 캠브리지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저 같은 사람보다 더 똑똑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이 우리 바깥세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간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명저를 쓴 현각 스님의 법문이다. “불교는 마음을 찾기 위한 테크놀로지이다. 그리고 불교는 과학이다. 불교에서 과학성을 잃을 때 늘 문제가 생겼다. 과학은 없고 신앙만 남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옛날엔 평범한 사람은 글을 배우기가 어려웠다. 한자로 된 경전을 소화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기복적 성격이 강했다. 이제는 다르다. 세대가 바뀌고 더구나 정보화시대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맹목적인 접근을 하면 코웃음을 친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테크놀로지를 요구한다. 불교는 마음 인문학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화두가 돼 참 나를 찾아가는 엔진이 불교이다.“

⑩불교는 맹목적인 믿음은 지양한다.

―불교는 신해(信解) 신행(信行)의 종교이다―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표층종교와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심층종교로 구별한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믿음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불교에서의 믿음은 다른 유신교적인 종교의 믿음과는 다르다. ‘믿어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믿음으로써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맹신이다. 맹신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이의 믿음이다. 그것은 예컨대 산하대지나 운명과 같은 초월적인 힘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과 같은 것으로, 불교의 믿음은 기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작복을 위한 것이다. 불교는 앎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믿음이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고 깨우침의 길로 나아가서 스스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진리.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귀결된다. 이를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 법등명 법귀의(法燈明 法歸依)이라 말한다. 이러한 믿음은 긍정적인 삶, 행복한 삶의 토대가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와서 보라는 것이지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초기경전 도처에 깨달음을 일컬어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지혜인 냐나(ñāṇa)와 봄(dassana)의 합성명사인 냐나-닷싸나(智見, ñ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信行)의 출발로 삼고 있다.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고 매달리는 신앙(信仰)의 종교가 아니라, 납득됐기에 믿는 신해(信解, ākāravati-saddhā)의 종교이며, 확신하기 때문에 행동에 옮기는 신행(信行, saddhā-ānusārin)의 종교이다.

⑪불교는 신의 천지창조를 부인한다.

―불교는 진화론을 지지한다―

오늘날엔 신의 천지창조를 믿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제 창조적 능력을 가진 신이 있을 곳은 없어졌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체는 세포단위로 한걸음씩 고등생명체로 발전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다윈(Charles R. Darwin)의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떤 과학 혹은 어떤 사상, 어떤 종교가 됐던 간에 설 땅이 없어질 것이고, 앞으로도 진화론이 뒤집어질 이론이 아니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은 진화론과 같다. 불교는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다.

그리고 붓다께서 깨달으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법(緣起法) 역시 부정될 수 없는 진리로 남을 것이다. 붓다께서 이 연기법을 여래가 있기 전이나, 여래가 멸한 후 라도 존재하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다윈의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확신과 다를 바가 없는 말이다. , 다윈의 진화론은 붓다의 연기법과 같이 존재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밝힐 수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말이다.

진화론은 생명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느 방향으로 흐를 것인가에 대한 인간 지성의 최고의 개가였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자기 위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해준다는 점에서 종교에 버금가는 신뢰성을 갖고 있다. 불교 역시 중생들(모든 생명체)의 자기 위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진화론에서 인간이 가장 발전된 생물이라고 결론짓듯, 불교 역시 인간만이 성불할 수 있는 존재로 가장 귀한 생명체라 선언하고 있다.

⑫불교는 인식론(認識論)에 기초한다.

―불교는 고정 불변하는 존재를 부정한다―

인간이 이 우주와 세상을 생각하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다. , 인식론적인 사고와 존재론적인 사고이다. 인식론적 사고란 우리가 보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의 의식이 기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이라는 존재가 있어도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이 인식을 할 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고 없애고 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대표적인 인식론적 사고의 예가 대원경지(大圓鏡智)이다. 불교는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고 드러내주는 크고 둥근, 맑고 깨끗한 거울처럼 인식하는 게 인식론적 사고이다.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주류요, 서양 기독교철학의 주류이며, 현재 우리들도 이러한 사고에 이미 많이 길들어져 있다. 그래서 불교적인 인식론을 받아들이는데 힘들어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무아론(無我論)와 공사상(空思想)을 기반으로 존재론을 부정하고 인식론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인식론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모든 현상이 상호의존하고 조건 발생함을 말한다. 그래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했을 때 지혜가 생겨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불교는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불교는 현실적 삶에 관한 종교이다―

불교는 과거의 일이나 닥쳐올 미래보다 지금 여기’, 현재를 강조한다. 현금(現今, 빠알리어 diṭṭha-dhamma)지금 여기란 말이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중국에서는 이현법중(以現法中), 또는 현금(現今), 즉시현금(卽時現今)으로 옮겼고, 직역하면 보여진 현상()’인데, ‘지금 여기'로 의역했다.

우리는 매순간 지금 여기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과거로 미래로 관심을 가져가고 있다. 그러나 불교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은 바로 지금 여기라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어법 속에는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이 다 포함돼 있다.

지나간 것에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얻은 것으로만 삶을 영위하나니 그들의 안색은 그래서 맑도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는 자,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슬퍼하는 자, 어리석은 그들은 푸른 갈대 잘려서 시들어가듯 한다.” - <상윳따 니까야>

이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매순간 지금 여기를 관찰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현상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다음은 부처님 제자 마하가전연(迦旃延, 산스크리트어 깟짜나, kātyāyana) 존자가 읊은 게송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버린 것은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것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라, 흔들림 없이, 동요하는 일 없이, 잘 살펴서 실천하라.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라.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실로 죽음의 대군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와 같이 잘 알아서 마음을 다해 밤낮으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실천하는 자 이를 일야현자(一夜賢者)라고 한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131<일야현선경(一夜賢善經, Bhaddekaratta-sutta)>

⑭ 불교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의 문제엔 무기(無記)한다.

―불교는 삶의 실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교는 실제적인 삶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이다. 초기경전에서의 부처님 가르침은 초월적인 신격화를 거부하는 현실적인 것이었다. 현실적인 고()의 해결을 추구했다. , 눈앞에 있는 것,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경험에 의해 확보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믿고 그 힘을 숭배하거나 복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간적 삶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돼 있다.

붓다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세계의 공간이 유한한 것인지, 아니면 무한한 것인지, 성인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지 않는지, 또는 여래는 사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이와 같은 외도(外道)들 질문에 대해, 그런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희론(戱論),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해서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이를 무기(無記)라고 했다.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의 불확적성원리(不確定性原理)에 의하면, 미세한 부분은 측정을 못한다. 전자나 양성자나 이러한 것은 측정을 못한다.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정확한 운동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붓다 당시엔 이런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불확실한 것이 이른바 우주의 일체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있다.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두고 시비를 따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고, 이해를 돕는 좋은 가교(架橋)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해를 낳는 나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까다로운 진리를 온전히 언설로써 전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해의 근원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주제 및 상황에 임해서는 거룩한 침묵[無記]을 보이셨다.

다만 부처님은 덮어놓고 무기를 하신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이 세상이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붓다는 5온과 12처를 설하셨다. 5온은 불교의 인간관이며, 12처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12연기는 고통[]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이며, 사성제(四聖諦)는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불교는 수신(修身)을 강조한다―

불교에서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된다. 수행의 목적은 현상과 본질을 알아내기 위함이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라가는 길은 피동적인 삶으로 이어지고, 마음을 수행하는 자의 길은 삶을 향상시켜준다.

수행에서 행()이란 자아의식을 중심으로 한 사유의 흐름을 주도하는 의지작용이고, 행을 닦는다는 것은 의지작용에 따라 번뇌의 상속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모든 종교에 있어서 수행의 공통점은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는[방하착(放下着)]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적 신념에 따른 일상적 수련을 수행이라 한다. , 자신의 마음작용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해탈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 인격을 이루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그런 수행을 열심히 할 경우, 우리나라 선방에서는 치열하게 수행한다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 한다.

불교엔 마음을 비우는 수행이 있고, 마음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수행 이 두 가지로 나뉜다. 마음을 비우는 수행을 사마타(śamatha, )라고 하고, 관찰하고 분석하는 수행을 위빠사나(vipassana, )라고 한다. 이것을 합해 지관(止觀) 수행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의 윤리사상은 업설(業說), 계율(戒律)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업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불교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세속을 떠난 종교이므로 인간윤리에 대한 가르침이 적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펴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 업사상(業思想)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서 업은 인간의 의지작용과 행위를 말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과보(果報)가 따른다고 설하고 있다. 정확하게 선업(善業)에는 선과(善果)가 따르고, 악업(惡業)에는 반드시 악과(惡果)가 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의 판단기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시되지만, 그 판단에는 사회 윤리적 책임이 함께 따른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불교는 수신의 중요한 방법이다. 동양의 종교는 수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왔지만, 마음수양을 통한 개인적 완성을 우선적 가치로 둔다는 점에서 불교 수양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성에 수양의 지표를 두는 유학(儒學)과 목적이 다르다.

⑯ 불교는 숙명론을 부정한다.

―불교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불교는 수행과 염불, 독경, 기도 등의 정진, 보시 등을 통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숙명론이 아니다. 업은 매우 미묘하게 작용한다. 이런 업을 지으면 이런 과보를 받는다고 수학공식처럼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동일한 업을 지었더라도 보시도 많이 하고 계도 잘 지키고 수행도 열심히 했다면 악처에는 가지 않는다. 업은 고정불변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현생에 내가 어떻게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업의 결과가 변할 수 있으니 업을 숙명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견해이다.- 농향

()은 지난 삶의 발자취이며 떨칠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선업(善業)은 해탈지혜의 밑거름이지만 악업(惡業)은 생각과 행동을 그르치고 반연(攀緣)을 양산해 일상을 부자유스럽게 한다. 부처님은 이 같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 모든 세간에 충만한 괴로움의 원인은 업()일 뿐이라고 단정 지으셨다. 그리하여 <수타니파타(Suttanipata, 경집/經集)>에서는 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들은 업에 의해 존재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업에 매여져 있다. 마치 수레가 밧줄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생의 고락(苦樂)을 가름하는 근본요인은 자신의 업력에서 비롯된 것이듯, 모든 인간은 전생의 업장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한 과보로 생로병사를 겪어야하는 이 몸을 받게 된 것이다.

불교수행은 괴로운 생사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법을 터득하는 공부이지만 깊이 헤아려보면 전생의 업장(業障) 성질을 바꾸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불교는 숙명론이 아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해탈지혜로써만이 내적 평정과 운명의 개척,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억겁을 윤회하며 생사고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숙업(宿業)이지만 우리는 다행히 불연(佛緣)을 만나 숙업을 정화해 운명을 바꾸고 팔자를 고칠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숙명론(宿命論)을 믿는 사람들을 외도(外道)라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운명은 딱히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⑰불교는 이분법적 사고를 멀리한다.

―불교는 중도(中道)의 종교이다―

어리석은 중생은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사물을 변별(辨別)한다. 이것을 분별지(分別智)라 한다. , ‘있다가 아니면 없다이며, ‘옳다가 아니면 그르다가 존재할 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변견(邊見)이라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논리이다. 예를 들면, 공간은 무한하다 또는 유한하다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보통 한쪽에 치우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 결과 연기적 지혜나 자비행이 아니라 비연기적 무지와 남을 해치는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비불교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中道)사상이다. 중도란 양끝의 중간이거나 어중간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란 어떤 원인을 제공했을 때, 여러 조건들에 의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연기적 행위가 이루어져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상생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될 때 이를 중도행(中道行)이라고 한다. , 쌍차쌍조(雙遮雙照)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는 존재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 매달려 판단ㆍ사유ㆍ추론하는 의식작용을 하는 분별을 멀리한다. 중생은 생멸심(生滅心)과 분별심(分別心)에 비추어 모든 사안을 생각하고 판단한다. 분별은 항상 집착을 낳는다. 분별심이 강하면 중생의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분별심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대개의 지식이나 경험 따위는 분별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버리라고 한다.

좋다 나쁘다 분별하는 순간, 마음이 대상에 딱 머물러버린다. 그러면 대상을 붙잡고 ’, ‘나의 것’, 이렇게 집착을 한다. ‘이것을 분별하면 동시에 저것이 분별되고, ‘저것을 분별하면 동시에 이것이 분별된다. 그래서 분별심(分別心, 산스크리트어 vikalpa)이란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한 분별(즉 구분)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흑과 백 등 동질감이 있는 것끼리 서로 구분하는 사고법이다. 불교에서 이 분별심이 갈등의 원인이요, 번뇌의 원인이라 가르친다. 분별심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긴다. 인간의 불행은 이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실체가 없는 허상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마음의 분별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심을 경계하는 말이 곳곳에 나온다. <금강경(金剛經)>의 변견(邊見),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의 쌍차쌍조(雙遮雙照), <유마경(維摩經)>의 불이법문(不二法門), <중론(中論)>의 중도(中道)가 모두 분별심을 경계하는 말이다.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부처님 근본가르침인 무아(無我)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⑱ 불교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포용(包容)적인 관용(寬容)의 종교이다.

―불교는 교조적인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광신적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경전도 교조적이지 않다. 다양한 교의가 널리 포섭된다. 그래서 더러 상충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도 불교는 관대하게 포용한다. 그리고 불교는 교의의 확장을 널리 이해한다. 때문에 근본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밀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소위 부파불교라 해서 다양한 교의를 중심으로 한 부파활동이 활발했던 시기가 있어 불교교의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명(五明)이라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모두 수용해서 불교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또한 붓다도 교조적 위치에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의 세계관은 붓다의 피조물이 아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은 여호와나 알라의 말씀(성경, 코란)과는 유()가 다르고, 그 내용은 절대적 믿음에 근거해 이해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불경은 이해에 기초해 성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믿음도 맹신이 아니라 이해에 기초한 확신(勝解, adhimokṣa)이다.

그래서 불교는 다양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다. 불교에는 화엄(華嚴)과 같은 고도한 관념철학을 전개하는 사상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적인 구원을 설명하는 정토교(淨土敎)도 있다.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중관학(中觀學), 현대심리학의 정교한 이론을 방불케 하는 유식학(唯識學), 고도의 수양과 정신적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선()과 같은 수행체계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교리와 사상이 너무나 복잡하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불(여래)과 보살(菩薩) 등이 많이 등장해 다신교적(多神敎的), 범신론적(汎神論的)인 경향을 지닌다. 불교 특징의 하나는 다양성이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법계(法界), <반야경>은 공(), <열반경>은 불성(佛性), <승만경>은 유식(唯識), <유마경>은 불이법(不二法)을 말해 불교 교리의 다양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원효는 일심(一心), 보조는 진심(眞心), 서산은 일물(一物). 만해는 유심(唯心)을 강조했다. 이러한 다양성은 상대방의 정서나 인격 내지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의미가 내재 돼 있다. 불교의 원리는 그 절대의 하나로 귀결하려는 것을 강력히 거부한다. 불교는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모색하고 공존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최초로 선교일치를 주장한 규봉 종밀(圭峰宗密)<도서(都序)> 서문에서 배휴(裴休)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한 분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불교의 종의를 용수(龍樹)는 공으로, 마명(馬鳴)은 진여일심으로 이해했으며, 용수의 공관을 어떠한 까닭에서 천태 지의(天台智顗)는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법융(法融)은 일체의 공적(空寂)으로 이해했는가? 또한 보리달마(菩提達摩)로부터 비롯된 선법을 어떠한 근거에서 혜능(慧能)은 돈오로, 신수(神秀)는 점수로 받아들였는가?“라고 했을 만큼 불교에는 다양한 교리와 해석이 가능하다.

불법(불교사상)의 다양성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있으며 진실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다.… 불설의 기준을 법성에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다양성은 처음부터 용인됐다는 말이다. 「불법(불교사상)=불설=친설」이라는 도식은 우리의 강고한 선입견 중의 하나로,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라는 불교학자는 이는 기독교의 연구양상과 깊게 관련돼 있는 근대불교학의 태생적 한계라고 말한다.” ― 권오민

⑲ 불교는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갈등 해소에 대한 가르침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정치사회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불교:조화와 평화를 찾아서(BuddhismA Quest for Unity and Peace)>를 비롯한 여러 저서와 논문에서 무아ㆍ비폭력ㆍ자비ㆍ공생ㆍ다양성ㆍ중도사상 등 20가지를 불교의 장점으로 들면서 불교를 평화의 적극적 창조에 가장 적합한 신앙체계로 평가했다. 그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불교의 일원적인 방법을 옹호했다.

역사는 인류에게 묻는다. 평화를 지향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종교로 인한 갈등과 종교전쟁이라는 악순환을 왜 불러일으키느냐고, 그것은 종교가 단순한 이념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갈퉁은 간디에 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만나게 됐고, 마침내 불교사상에 심취하게 됐다. 그는 불교사상에서 생명의 일체감과 같은 고상한 이념뿐만 아니라 비폭력이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평화를 위한 선택(1995)>에서 석존의 위업을 전하는 아주 작은 불교서적이라도 사회과학 잡지의 온갖 논문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영감을 얻게 된다.”고 밝혔다.

특히 요한 갈퉁의 불교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는 국제평화주의에 관한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서양의 지적 풍토 속에서 자라왔음에도 불교사상의 정수를 파악해 평화연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또한 세계불교도우의회(世界佛敎徒友誼會-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에서 세계를 향해서 내는 목소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으로부터의 열반이다. 말하자면 사바세계의 고통에서 해탈해 자유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 내적으로는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지만, 불교외적으로는 중생을 향해,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은 평화이다. WFB 창설이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계평화구현이다. 불교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국제적인 불교연합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부처님 정신에 입각해서 세계평화를 조직적으로 실천하자는 것이 바로 WFB운동이다.

⑳ 불교는 시대 흐름의 산물이다.

-불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따라서 불교사상도 시대적 흐름에 따른 조율과 이해에 따른 것이며, 그 결과 부처님의 말씀을 재해석함으로써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로 변천해왔다. 이후에도 시대와 지역에 따른 이론적 반()ㆍ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밀교로까지, 혹은 천태, 화엄, 내지 선종(禪宗)으로까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이러한 불교 변천의 배경이 된 시대사상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이 입멸 이후 부처님 가르침의 말씀은 항상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이야기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 생동할 수 없으며, 다만 옛 사람이 남긴 말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논사인 중현(衆賢, Samghabhadra)의 말처럼 항상 새롭게 해석 간택(簡擇)돼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지 않는 한 그것은 진정한 불교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대승비불설과 같은 흑백논리에 빠지게 된다.

어떤 종교에 맹목ㆍ맹신적으로 함몰되면 앞뒤 구분이 안 된다. 대승경전을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불교의 변천사, 사상의 발달, 그리고 당시 인도 대륙의 여러 사회상과 불교 내부의 모습들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대승경전이 왜 편찬됐으며, 그 사상과 주장들이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기경전을 보려면 불교의 탄생 전의 인도사회와 전통적인 사상 당시의 사회상 등을 알아야 한다. 불교가 하늘에서 또는 땅에서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불교는 인도대륙에서 발생한 종교이고 전통적인 인도 사상과 풍습, 및 수행법이 많이 담겨 있다.

경전에 들어있는 거의 모든 천신(天神)들은 인도 전통의 민간신앙이나 풍습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오계(五戒)의 덕목들도 모두다 당시 인도의 전통적인 도덕관이었다. 당시 브라만들도 불살생을 부르짖고, 특히 자이나교도들은 불교도들보다 더 불살생에 철저했다. 해탈(解脫)도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이미 알려졌던 내용을 불교가 차용한 것이다. 사선정(四禪定) 사무색정(四無色定) 등도 모두 요가수행법에서 체계화 됐던 것을 불교가 차용한 것이다. 윤회(輪迴)사상도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많은 인도의 사상들을 불교가 차용하고 도입해서 붓다는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불교적으로 재정립했다. 그리고 연기ㆍ무상ㆍ무아ㆍ고 등의 불교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했기에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불교고 소승이고 대승이고 결국 이천오백년 동안 그 속에 내재된 사회역사적 현실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경전에 대한 붓다의 궁극적 진리를 생각지 않고 단지 경전의 단어 속에 파묻혀서 갑론을박 헤매서는 오답만 찾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ㆍ한국불교에서는 원융(圓融)’이라는 불교의 이해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