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ㄴ - 1>
<ㄴ>------------------------------------------------------------
*나가(산스크리트어 Naga)---나가(Naga)란 산스크리트어로 뱀(특히 코브라)이라는 의미인데,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이다. ‘나가’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범한 뱀이 아니라 정령의 하나인 ‘뱀 신’을 일컫는다. 지금도 네팔에는 곳곳에 ‘나가 신’이 장식돼 있다. 이것이 불경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갈 때 '용(龍)'이라는 한자로 번역됐다.
나가의 모습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변형된 것으로는 많은 목(대개는 일곱 개나 아홉 개)을 가진 큰 뱀으로 표현되는 일도 있고, 사람 모습을 취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 ‘나가’는 불교신도를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경전을 지키는 물의 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나가는 용수(나가르주나)를 자기네 왕국에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반야바라밀다경>이 재발견됐다는 신화가 전하기도 한다.
*나가대정(那伽大定)---불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고요, 대적광(大寂光)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나가는 큰 뱀, 용을 가리키는 말로 용수(龍樹)의 이름이 나가르주나(Nagarjuna)이다.
그리고 대정(大定)은 큰 삼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가와 대정을 합쳐 용정(龍定)이라고도 한다. 즉, 나가대정(那伽大定)은 대용왕의 대정(大定)이라는 뜻으로 대용왕이 깊은 못에서 미륵불이 출세함을 만날 원력으로 정(定)에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대적(大寂)이나 대정(大定)이 없으면 큰 지혜가 나오지 않으므로 나가대정은 큰 지혜가 나오는 원천을 뜻한다. 또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관계없이 깊은 정에 들어있는 것을 나가대정이라 한다. 그래서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을 보면 고승들 삼매의 극치를 나가대정(那伽大定)에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부처님과 아라한을 나가(那伽)라 한다. 그래서 무궁무진한 조화력을 가진 부처님의 큰 정력(定力)을 뜻하기도 한다. 용은 항상 고요한 가운데에서 사심 잡념 없애기를 계속해 능히 큰 신통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부처님의 큰 정력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큰 정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가대정이라 한다.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 150?-250?)---<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저자로 알려진 마명(馬鳴, 아슈바고샤, Asvaghosa, 100~160?)의 제자 가비마라(迦毘摩羅)의 제가라고 한다. 그러니 마명의 손제자인 셈이다.
나가르주나는 석가모니 입멸 후 600여년이 흐른 뒤 나타나서 불교사상을 재조립해 대승불교를 확립시킴으로써 ‘제2의 붓다’ 혹은 ‘팔종(8宗)의 조사’로 숭앙 받아, 용수보살로 칭송되고 있다. 실존인물로 보살 칭호로 불리는 사람은 용수를 비롯해 마명(馬鳴), 세친(世親) 정도이다. 그리하여 선종에서는 그를 서천 28조 가운데 한 분으로 모신다.
나가르주나는 남인도 바라문계급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해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으며, 천문, 지리, 예언 등 여러 가지 비술을 체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 귀의해 <반야경> 계통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중관(中觀, Madhyamaka)사상을 정립해,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즉, 마명(馬鳴, AD80?~150?)보살의 뒤를 이어 대승법문을 선양하니,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했다. 그리하여 <화엄경>을 그가 집성했다는 설이 전한다.
그리고 중관사상을 논술한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비롯해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지었다. 이 세 문헌을 함께 불러 “삼론(三論)”이라 부르고, 중국에서 4~5세기경에 유행했던 삼론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이 여기에 기인하며,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관학파라 했다.
그는 부파불교 대중부의 이론을 종합해 초기 상좌부의 실상법(實相法)과 인과법(因果法)이 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고 하는 부처님 기본가르침에 어긋나며 연기(緣起)하는 것은 서로 의지해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모든 일체 법(현상)은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모든 대승경전이 공(空)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는 <중론(中論)>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空)을 연기설로 해명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이론을 확립했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불교를 사실에 관한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진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상대적이고 방편적인 진리와 절대적 진리. 상대적이고 방편적인 진리에서 보면, 현상세계는 존재론적으로 비실재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는 완전한 설득력을 가지고 실재한다. 반면 절대적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체의 것들이 실은 비실재라는 것을 정신이 깨닫게 되지만 그러나 이런 진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중관사상(中觀思想) 참조.
*나가르주나콘다(Nagarjunakonda)---이는 나가르주나 언덕(Nagarjuna Hill)을 뜻하는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불교 도시이다. 지금은 인도 남부의 안드라프라데시 주 군투르(Guntur) 지역의 나가르주나 사가르(Nagarjuna Sagar) 근처에 있는 섬이다.
나가르주나콘다는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주도인 하이데라바드에서 남동쪽으로 150 km 남쪽에 위치한다. 나가르주나콘다는 1960년대에 나가르주나사가르 댐이 건설되면서 주변 지역이 물에 잠기면서 형성된 섬이다. 나가르주나콘다는 현재 인도에서 가장 풍부한 불교 유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 중 하나로, 고대에는 스리파르바타(Sri Parvata)라고 불리었다. 지금은 거의 전체가 나가르주나사가르 댐 아래에 잠겨 있다.
나가르주나콘다는 2세기의 남인도 출신의 주요한 대승불교 승려였던 용수(나가르주나)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도시 이름이다. 용수는 이 지역의 불교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한때 수많은 불교 대학과 사원이 있었던 곳으로 중국ㆍ간다라ㆍ벵골ㆍ스리랑카 등지에서 불교도들이 유학을 왔던 곳이다. 이 지역의 불교 유적지들은 물에 잠겼는데, 후에 발굴되어 높은 곳(지금의 나가르주나콘다 섬)으로 옮겨졌다.
*나가세나(Nāgasena, 那先)---→메난드로스(Menandros)왕, 밀린다왕문경 참조.
*나계(螺髻)---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소라 같이 되었으므로 나계(螺髻)라 한다. 불상의 곱슬머리모양(실은 소라모양)을 나발(螺髮) 또는 나계(螺髻)라고 한다. 소라고둥 모양의 상투로 우뚝한 산을 형용하는 말로 쓰인다. 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如來像)의 머리카락이 나계이다. 소라 껍데기 혹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빙빙 틀어서 돌아간 형상을 한 부처의 머리털을 가리킨다.
*나냐(빠알리어 nana)---지혜, 혹은 통찰지혜라는 뜻이다. 이에 관한 글을 보자.
수행자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괴로움을 아는 지혜(dukkhanupassana-nana)이다. 이와 함께 수행자는 피로함, 뜨거움, 고통, 아픔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육체에 깃든 고통스러운 감각을 경험하게 되고, 육체는 고통의 덩어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도 또한 괴로움을 통찰해 아는 것이다.
그 뒤에는, 모든 물질과 마음은 스스로의 속성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며, 수행자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행자는 사물은 요소일 뿐이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살아있는 실체이거나 생물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아는 지혜(anattanupassana-nana)이다.
이와 같이 무상(anicca), 고통(dukkha), 무아(anatta)를 알게 되면, 도의 지혜(막가-나냐, magga-nana)와 과의 지혜(팔라-나냐, phala nana)가 성숙해서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열반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하면 불행하고 저급한 존재로 윤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는 이 첫 번째 단계에라도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라연(那羅延)---천상계에 거주하는 역사(力士)로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금강역사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 권속으로, 집금강(執金剛)의 하나이며,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 백만 배나 된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위대한 신(神)인 비시누를 가리키는 말이다.---→집금강신중신(執金剛身衆神) 참조.
*나락(奈落, 산스크리트어 naraka)---지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란타(Nālandā, 那爛陀)대학---나란타(Nālandā)는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나란타사)가 있던 지명이다.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에 위치한 바르가온 지역이다. 거기에 큰 절이란 의미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 내에 부설돼 있던 대학이 나란타대학이다. 즉, 인도 고대 마가다국(Magadha國) 수도 왕사성(王舍城-라자그리하)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란타사원 부설대학이었다. 날란다대학이라 음역하기도 한다. 아소카왕이 건립한 나란타사원에 굽타왕조 때 나란타대학이 부설돼, 대승불교 학습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으며, 역사상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다.
사원교육기관인 나란타대학의 전성기는 5세기부터 12세기까지로서, 굽타왕조에 이어 하르샤 왕조(Harsa Empire, 590~647)와 팔라 왕조(Pala Empire, 8~12세기)시대이다. 기원전부터 사원학교로 존재해 왔었지만, 종합대학 성격의 대규모 사원대학이 된 것은 굽타왕조시대부터이다. 이후 팔라 왕조시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티베트, 중국, 한국,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유학승이 와서 공부했었다. 631년에 현장(玄奘)이 이곳에 왔을 때, 학생이 1만 명, 교수가 2천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전, 4세기 말 5세기 초, 중국 동진(東晉)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왔을 때에도 사원대학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강의는 주로 대승불교가 중심이었지만 소승불교에 대한 강의도 있었고, 불교뿐만 아니라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와 같은 힌두 바라문의 학문은 물론, 논리학(因明), 의학, 음악과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양수업도 실시했다고 한다. 대학 안에서는 매일 백여 곳에서 강의가 열렸고, 뛰어난 학승들을 많이 배출했다.
대승불교 중관파(中觀派)의 창시자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150~250)가 학장을 지냈고, 그의 제자 제바(提婆, 아리야데바/Āryadeva, 170~270)가 나가르주나의 학통을 이어서 발전시켰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AD. 5세기 인물인 무착(無着, Asanga, 아상가)과 세친(世親, Vasubandhu, 바수반두) 형제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하며, 세친의 제자인 호법(護法)과 덕혜(德慧)를 비롯해, 중국의 의정(義淨)과 현장(玄奘)은 물론 신라의 혜초(慧超)를 비롯한 많은 구법승들도 주로 이 나란타대학에서 공부했다. 신라에서는 혜초 외에 현태(玄泰), 혜륜(慧輪, 반야발마), 혜업(慧業) 스님 등이 날란다사원대학에서 공부했다. 현태는 티베트를 경유해 인도에 들어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왔고, 혜륜은 제자 현유와 함께 사자국(스리랑카)에 가서 종신(終身)했다. 의정(義淨) 법사에 의하면 혜업의 산스크리트어(梵本) 저서를 직접 봤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했는데, 그는 나란타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현장이 다녀간 7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승불교 교학의 중심이었던 나란타 사원은 8세기 초 불교를 보호하던 굽타 왕조가 몰락하고 바라문의 힌두교가 번창하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결정적으로 13세기 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왕조가 북인도를 침공하면서 나란타사원과 함께 나란타대학도 완전히 파괴됐다. 이슬람의 침략자들은 많은 스님들을 죽이고, 사원과 대학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될 정도로 많은 장서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란타사(Nālandā, 那爛陀寺-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나란타(Nālandā’는 지명이다. 고대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王舍城-라자그리하) 북쪽,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의 바르가온 지역(나란타)으로, 그곳에 위치했었던 사찰이어서 나란타사라 한다. 원래 명칭은 큰 절이란 의미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이다. 그 나란타사에 불교사원대학(나란타대학)이 부속돼 있어 유명했다.
나란타사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은 암몰라(菴沒羅)라고 하는 망고 숲이었는데, 오백 명의 상인들이 거금을 주고 그 숲을 매입해 부처님께 봉헌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상인들에게 3개월 동안 법을 설하셨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상인들은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부처님께서는 이곳 망고 숲에서 가끔 유숙한 바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나란타 마하비하라(大寺)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사리불 존자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사원인데, 큰 규모로 확장해서 발전시킨 것은 굽타왕조 쿠마라굽타(kumāragupta) 1세(414~455) 때이다. 이후 역대 왕들이 증축해 명실공히 인도 불교 중심지가 됐다.
나란타사에 부속된 나란타 사원대학은 티베트ㆍ중국ㆍ한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유학승이 올 정도로 유명했으며, 현장(玄奘)이 다녀간 7세기 초까지만 해도 학생이 1만 명, 교수가 2천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란타 사원은 7세기 중엽 벵갈 지방의 팔라(Pala) 왕조의 비호를 받으면서 밀교 4대 사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8세기 초 불교를 보호하던 굽타 왕조가 몰락하고 바라문의 힌두교가 번창하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결정적으로 13세기 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왕조가 북인도를 침공하면서 나란타 사원은 완전히 파괴됐다. 이슬람의 침략자들은 많은 스님들을 죽이고, 사원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 1953년~)---인도에서 심각한 하층계급인 불가촉천민(dalit) 출신 지도자. 인도 푸네대학교 총장, 국제통화기금 자문관, 인도 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을 역임했다. 인도의 절대적 신분제도를 극복해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도의 살아 있는 영웅’이다. 인도 불가촉천민(달리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명성을 지닌 경제학자로 자리 잡은 그는 현재 세계가 주목하는 인물이다. 외국 언론들은 그를 향후 인도중앙은행 총재, 재무장관, 나아가서는 인도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기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저서 <신도 버린 사람들(Untouchables)>은 1993년에 출간돼 12년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달리트(dalit) 참조.
*나로파(Naropa, 1016~1100)---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인도 벵갈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당시 불교학의 중심지인 카슈미르에 유학했다. 그는 귀향해 3년을 보낸 뒤 1032년 결혼했다가 결혼생활 8년 후 이혼하고 다시 카슈미르로 가 3년 동안 머물렀고, 1049년 나란타사(Nalanda寺)로 가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대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나란타대학에서 철학 종교 논쟁에서 탁월한 학식을 인정받아 학장으로 추대됐으며, 8년간 학장으로 가르침을 펴는 동안 많은 학자가 배출됐는데, 티베트에서 온 마르파(Marpa, 1012∼1109)에게 요가를 포함한 여러 심오한 교리를 전수했다. 그 마르파가 훗날 티베트에 돌아가서 티베트불교의 유력 종파인 카규파(Kyagupa, 喝擧派)를 일으켰다.
나로파는 나란타대학에서 가르침을 펴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중 어느 날 금강승(金剛乘)의 가르침을 탐구하는데, 책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다. 놀라서 위를 쳐다보니 추악한 악마의 얼굴을 한 천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천녀는 그가 그 경전의 뜻을 알고 읽는가를 묻고 그에게 틸로파를 소개했다.
이에 그는 학장 직위를 사임하고 이름을 숨긴 채 유랑하다가 틸로파(Tilopa, 988∼106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됐다. 그로부터 법을 전수받기 위해 사원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끓는 물속에 들어가는 등 열두 가지 혹독한 시련을 견디면서 틸로파가 입적할 때까지 12년 동안 그에게 헌신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극한의 시련을 통해 틸로파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최상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 마르파에 의해 틸로파가 카규파의 창시자로 추대되고, 나로파가 2대조로 추대됐으며, 마르파 자신은 3대조, 그의 제자 밀라레빠(Milarepa)가 4대조가 되는 것이다.---→마르파(Marpa), 밀라레빠(Milarepa) 참조.
*나마(빠알리어 nāma)---빠알리어 나마(nāma)는 정신, 마음, 비물질을 말한다. 그리고 물질, 몸을 루빠(rupa)라 한다. 그래서 12연기에서 명색(名色)을 빠알리어로 나마 루빠(nāmarūpa)라고 한다. 나마(nāma)는 정신이고 루빠(rūpa)는 물질이다. 이때 정신은 오온 중에서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그리고 식온(識薀)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질은 몸(身)을 뜻하는 색온(色蘊)이다.
미얀마의 장로 마하시 사야도는 “나마는 문자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온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표상(想), 행(行), 식(識)의 4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을 지칭한다. 한역은 명(名)이라 하고, 영역은 mind, mentality라고 한다.”라고 했다. 그 외에 명(이름, nāma)에 관해서 아래와 같은 해설이 있다.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그러나 관악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산일뿐이다. 사람들이 관악산이라고 이름 붙여서 관악산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멀리 있는 관악산은 결코 관악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기 때문에 관악산이 된 것이다.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과 이름을 가져야만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과 단절돼 산다면 이름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이름이나 명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름이나 명칭이 필요하다. 무언가 구분하고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나 명칭은 한두 개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이름 외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가면 아버지나 어머니로 불리고, 회사에 가면 과장이나 사장 등으로 불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접속을 하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아이디가 있고 필명이 있기 때문이다.
명칭과 관련된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모든 것을 이기고 무엇이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가? 어떠한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했다.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명칭이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 - 명칭경(Namasutta-, 상윳따니까야 S1.61, 전재성 역)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르고 무엇보다 더 나은 것이 없노라. 명칭이라는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 하노라 - 각묵 스님 역
경의 제목이 Namasutta이다. 이에 대해 번역자들은 ‘명칭 또는 이름“ 등으로 번역했다.
나마경(S1.61)은 ‘명칭’이 키워드이다. ‘이름 지어짐’으로 인해 그 이름에 지배당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재성 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긴다”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각묵 스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른다”고 번역했다.
필명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는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S1.61)”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은 “명칭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S1.61)”라 하신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나무(南無, 산스크리트어 Namo)---산스크리트어 Namo(Namas)를 번역한 말이 ‘귀의(歸依)’이다. ‘귀의’란 믿음을 받들고 몸을 바쳐서 구원을 청하는 생각이며, 마음의 깨달음에 의지해 일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해 마음속에 무한한 안위(安慰)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머무를 섬으로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준다. 염불(念佛) 가운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나무(南無)’를 말하며, 이에는 일곱 가지 뜻으로 한역된다.
① 귀의(歸依) ―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만법의 근원이고, 상주불변하는 영원한 실상(實相)이며,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원인이신 법신불(法身佛)에게 돌아가 의지함이란 뜻이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말은 품에 안긴다는 말과 같다.
② 귀명(歸命) ― 목숨을 들어(擧命)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영원한 실상이신 법신불께 목숨 바쳐 돌아간다, 의지한다는 말이다.
③ 귀경(歸敬) ― 돌아가 공경하고 경배한다는 뜻으로 만법의 근원이신 법신불에 돌아가 공경하고 경배한다는 뜻이다.
④ 경례(敬禮) ― 공경하고 예배한다는 뜻으로 인연소기의 원인이시며 공(空)이시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이신 분을 공경하고 예배한다는 말이다.
⑤ 구아(救我) ― 나를 구원해 준다는 뜻으로 상주불변하는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다.
⑥ 도아(度我) ― 나를 제도(濟渡)해 준다는 뜻으로 상주불변하는 법신불께서 나를 열반의 진리 세계로 인도해 건네주신다는 뜻이다.
※도(度)는 도(渡)와 통용어(通用語)
⑦ 신종(信從) ― 믿고 좇는다는 뜻으로 인연소기의 허상(虛像), 생멸(生滅)의 세계에서 영원한 실상이신 존재를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이상의 말을 종합해볼 때, ‘나무(南無)’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불(神佛)께 자신의 명(命)을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이다.
헌데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초기불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신 합리성과 신비를 배제한 정신에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창조주 따위는 시설하신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창조주를 들먹인다는 것은 불경하기 짝이 없다. 이는 다분히 힌두교화한 밀교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산스크리트어 Namo-Amitabha)---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한다는 불교용어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여섯 글자로 돼 있기 때문에 육자명호(六字名號)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의 이름이자 일종의 진언(眞言)으로서, 절이나 불자들에게서 흔히 듣는 기도문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Namo-Amitabha인데, Namo는 예배한다, 귀의한다는 말이며, mita는 헤아린다는 말이고, abha는 광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는 뜻인데, 결국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無量壽佛) 혹은 무량광불(無量光佛)로서 서방정토에 살며 인간구제에 진력하는 부처로 묘사된다. 그래서 정토종(淨土宗)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정성으로 염(念)하면 극락왕생한다고 가르친다.
헌데 나무아미타불을 찾으면 반드시 관세음보살이 뒤 따른다. 그 이유는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같이 끝없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고자 하며,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 그 모습을 자신이 쓰고 있는 관(이마)에 모시고 있다. 그래서 대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읊는다.
*나반존자(那畔尊者)---오직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대상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선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보통 사찰의 독성각에 모셔지고 있다. 독성(獨聖)이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침을 열어 성자가 된 자를 말하며, 독수성(獨修聖), 독각(獨覺), 연각(緣覺), 벽지불(壁支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만 숭상하는 신앙대상이라서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나반존자의 명칭이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없다. 사찰에서 산신, 칠성, 용왕들과 나란히 신봉되는 것으로 봐서 우리 토속신앙이 불교적인 색깔을 띤 불 ‧ 보살로 변형돼 절에서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원래 불교의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 신앙의 것이었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됐다고도 하고 신선이 됐다고도 해서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찰 뒤 언덕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해서 나반존자상을 단군의 상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불교계 일부에서는 독성각 건립이 조선후기에 나타는 것으로 미루어 봐서, 나반존자를 단군으로 보지 않고, 나반존자를 말세의 복밭으로 보고, 복을 줄 수 있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하며,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를 이름만 바꾸어 신앙대상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반존자의 형상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돼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중국에서 신앙대상이 된 ‘빈두로존자’ 모습을 차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독성(獨聖) 참조.
*나발(螺髮)---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如來像)의 머리카락. 나계(螺髻)라고도 한다.---→나계(螺髻) 참조.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Edward N. Lorenz, 1917~2008)가 처음으로 발표한 이론이지만 나중에 카오스(chaos) 이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일반적으로는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지고 온다는 의미로 쓰인다. 로렌츠는 컴퓨터를 사용해 기상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초기 조건(초기값)의 미세한 차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커져서 결국 그 결과에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또는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다음날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초기 값의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나비효과’는 이렇듯 처음에는 과학이론에서 발전했으나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게 됐다. 가령 1930년대의 대공황이 미국의 어느 시골 은행의 부도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면, 이것은 ‘나비효과’의 한 예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작게는 이웃이나, 크게는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데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일파만파(一波萬波)라고 했다. 강물이나 연못에 돌을 던지면, 수면의 물결이 둥그렇게 일면서 끝없이 퍼져나간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이미 삼천여년 전에 한 사람의 불행이 전 인류의 불행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한 사람의 구제가 전 인류의 구제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인류 구제를 전제한 동업중생(同業衆生)의 개념이다. 우리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호흡을 같이 하는 공업소감(共業所感-공동책임)이다. 곧 동업중생이다.---→‘카오스(chaos)의 이론과 불교’, ‘가이아(Gaia)의 이론’ 참조.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밀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참조.
*나습(羅什)---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을 줄여서 나습(羅什)이라고도 한다.---→구마라습(鳩摩羅什) 참조.
*나옹(懶翁, 1320∼1376)---고려 말 고승. 법명은 혜근(彗勤), 호가 나옹(懶翁)이다. 경상도 영덕 출신이고, 21세 때 친구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문경 공덕산(孔德山) 대승사(大勝寺) 묘적암(妙寂庵) 요연(了然)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그 뒤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했다.
1347년(충목왕 3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을 거쳐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여러 사찰에 주석한 후 귀국해 회암사 주지로서 절을 중수했다.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 입장을 취했고, 임제(臨濟) 선사 선풍을 도입해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나옹화상은 임제종을 도입하면서도 임제의 방편만을 통해 이룩하는 선은 우리가 바라는 정종(正宗)이 아니고 방편을 넘어선 본지의 계합만이 정종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부도는 양주 회암사 터와 여주 신륵사(神勒寺), 그리고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남아 있다.
나옹 화상을 보제존자(普濟尊者)라고도 하는데, 여주 신륵사에는 나옹 화상의 부도인 보제존자 석종(石鐘, 보물 제228호)과 석종비(石鐘碑, 보물제 229호), 그리고 그 앞의 석등(石燈, 보물 제231호) 등이 남아있다.
아래는 나옹 선사의 시이다. ---→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 참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如水如風而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如水如風而終我)」
*나옹화상(懶翁和尙) 발원문(發願文)---나옹화상(懶翁和尙)은 고려 말의 변혁기를 살다간 선승이다. 공민왕의 왕사로도 활약하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셨다. 그는 수행방법에 있어서는 염불은 매우 중요시했다. 염불을 청정한 마음으로 계속해나간다면 모든 중생들은 삼악도를 벗어나 정각의 지름길로 갈 수 있다고 보셨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나옹화상께서 쓰신 발원문은 우리나라 불교의례에서 자주 염송되는 서원문 중 하나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아세세생생처(願我世世生生處) - 원하옵건대 세세생생 나는 곳 어디에서나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 - 언제든지 불법에서 퇴전치 아니하고
여피본사용맹지(如彼本師勇猛智) - 부처님의 복과 지혜 두루 함께 갖추옵고
여피사나대각과(如彼舍那大覺果) - 보신이신 노사나불 대각의 울안에서
여피문수대지혜(如彼文殊大智慧) - 칠불님의 스승이신 문수보살 큰 지혜와
여피보현광대행(如彼普賢廣大行) - 보현보살 육도만행 모두 함께 실천하며
여피지장무변신(如彼地藏無邊身) - 지장보살 서원행을 남김없이 본을 받고
여피관음삼이응(如彼觀音三二應) - 관음보살 분신으로 무량중생 제도코자
시방세계무불현(十方世界無不現) - 시방세계 곳곳마다 남김없이 몸을 나퉈
보령중생입무위(普令衆生入無爲) - 모든 중생 교화하여 열반경지 얻게 하며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 나의 이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 나의 모양 보는 이는 해탈도를 얻어지이다.
여시교화항사겁(如是敎化恒沙劫) - 이와 같이 교화하기를 영원토록 계속하여
필경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 - 부처니 중생이니 이름조차 없사이다.
원제천용팔부중(願諸天龍八部衆) - 바라옵건데 천용팔부 금강신장이시여
위아옹호불리신(爲我擁護不離身) - 도량을 수호하고 나의 몸을 보호하여
어제난처무제난(於諸難處無諸難) - 모든 재난 소멸하고 하는 일에 장애 없길
여시대원능성취(如是大願能成就) - 지심으로 합장하고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나유타(那由陀, 산스크리트어 nayuta)---아승기(阿僧祇)와 더불어 인도에서 아주 많은 수를 표시하는 수량의 단위임. 아유타(阿由陀;많은 수라는 뜻)의 백배라고 한다. 수천만ㆍ수천억ㆍ수만억이라고 하나 일정하지 않다. <법화경>에 대통지승불(大通知勝佛)의 수명이 오백사십만억(五百四十萬億) 나유타 겁(那由他劫)이라 했다. 천태 대사께서는 한량없고 가이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라는 수치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표현했다.
*나일할(那一喝)---나일((那一)은 저것, 혹은 ‘그 하나’란 의미이다. 따라서 ‘나일할’은 그 하나의 할, 즉 ‘오직 그 하나의 할’, 그런 말이다.
*나찰(羅刹)---나찰은 악한 귀신이다. 원래 고대 인도의 신으로, 불교에서 악귀(惡鬼)의 총칭이다. 사람을 먹는 두려운 귀신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해 불교 수호신이 됐다.
*나투시다---우리말 ‘나타나다’의 고어. 굳이 ‘부처님께서 나투시다’로 번역한 까닭은 단순히 중생의 오관에 비치어 인식되어진 대상이 아니고, 부처님 스스로의 의지로써 나타나셨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른바 화신불(化身佛)로서 진여(眞如) 그 자체인 법신불(法身佛)이 아니고, 인간의 몸을 빌려 오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한(羅漢)---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이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위치로 바뀌었다. 부처님 생존 시의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수행자들 가운데 수행의 최고 단계에 이른 이상상(理想像)을 말했다. 수행 결과에 따라서 범부(凡夫) · 현인(賢人) · 성인(聖人)의 순서로 구별이 있고, 성인 중의 최고를 아라한이라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성립되면서 ‘보살’이 생겨 아라한을 나한(羅漢)이라 고쳐 부르고, 그 격이 보살 아래로 떨어졌다. 세상의 존경을 받아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자(尊者)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번뇌를 끊고 생사윤회를 거듭하지 않는 성자로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므로, 진리에 상응한다는 의미의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6가지 신통력과 8가지 해탈 법을 모두 갖추어 번뇌에서 벗어난 부처에 버금가는 성자로서 신앙의 대상이 됐다. 나한들은 석가 열반 후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열반에 들지 않고 수명을 연장해 계속 속세에 머물러 장차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8세기 후반에 말세신앙과 함께 16나한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16나한과 오백나한이 신앙됐는데,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영산전(靈山殿)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16대 제자 또는 16나한, 혹은 18나한, 오백나한을 봉안했다. 나한전이나 응진전을 따로 건립한 사찰도 있다.
나한을 살적(殺賊)이라고도 하는데, 살적이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았다는 말이다.---→아라한(阿羅漢, Arhan) 참조.
*나한전(羅漢殿)---나한을 모신 전각(16, 18 혹은 500나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16, 18나한은 석존께서 열반하신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 받은 분들이라고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이고, 대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고 있다.
*낙덕(樂德)---‘낙(樂)’은 안락이란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난 적정무위(寂靜無爲) 안락한 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즉 무위안락 한 것이다. 안락이란 보통 그냥 재미있고 어떠한 유한적인 안락이 아니라, 조금도 변치 않는 영생의 안락을 말한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 ․ 락 ․ 아 ․ 정(常樂我淨)에서 ‘낙’이 이에 해당한다.
*낙처(落處)---공안의 요긴한 도리인 핵심이 되는 구경(究竟)을 이르는 말이다. 시쳇말로서 초점, 포인트 등으로 불린다. 참학인(參學人)에게는 핵심이 되는 자성을 여의지 않는 가운데 깨달아 알아야 할 요긴한 법리(法理)가 되는 의심처를 이르는 용어이다.
경전을 보더라도 그 경전의 이치만 알면 알음알이 수준에 그치고 만다. 경전을 보되, 그 경전이 마음의 이치를 깨우치는 곳(낙처)을 파악해야 한다. 부처님에게 법인(法印)이 있으나 부처님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바로 심인(心印)의 낙처를 꿰뚫어야 할 것이다.
선어(禪語)들은 때로는 펑범하게, 때로는 이상하게 들려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선사(禪師)들이 제시하는 말의 요체,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 핵심의 말(낙처)이 무엇인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채야지 분별 사량으로 꿰맞춰서는 비록 그것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알음알이일 뿐이다.
그래서 선사들이 학인을 제접할 때 이것저것 공안을 던져 물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공안의 낙처를 제대로 파악하는지 살핀다. 그런데 여기서 선어가 가리키는 뜻이나 ‘함축된 의미’란 말을 쓰지 않고 ‘낙처’라고 한 그 뜻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낙처란 공간의 의미, 즉 장소(곳)를 함축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자기 성품이다. 낙처는 그만큼 깊은 곳에 있다.
*난승(難勝, 7세기)---신라의 선인(仙人)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에는 신라 진평왕 치세 시대인 611년 당시 17세의 김유신이 삼국 통일 대업의 큰 뜻을 품고 중악(팔공산) 석굴에 들어가 목욕 재계하고 하늘에 빌며 4일간의 맹세를 하니, 어느 한 늙은 선인이 나타나서 이야기하기를 “내 이름은 난승(難勝)인데, 그대가 아직 어린 나이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니 참으로 장한 일일지어다.”고 하고, 자신의 비법을 김유신에게 전하며 “이를 삼가 망녕되이 전하지 말라. 만약에 이 비법을 부당하게 사용한다면 도리어 재앙이 도래할 것이니라.”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난승지(難勝地)---보살 10지 가운데 제5지를 난승지라 한다..
*난식(亂識)---망식(妄識), 염식(染識)과 비슷한 말로서, 어지러운 생각, 온갖 망상을 일컫는 말이다.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망식이고, 오염된 의식이 염식이다. 그리고 난식의 반대말은 정식(淨識)이다. 정식이란 더러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의식이다.
*난타(難陀, Nanda,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 ?~?)①---석가모니 이복동생. 정반왕(淨飯王) 아들이며, 모친은 석가모니 어머니 마야 부인의 동생이기도 하고, 부처님 계모이기도 한 마하파사파제(摩訶波娑波提)이다. 난타는 부처님의 32상(相) 중에서 2종을 제외하고 모두 갖추었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지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 손타리(孫陀利) 역시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는 그 아내를 못 잊어 출가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부처님이 방편으로 천상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운 모양을 보여, 그를 불도에 귀의케 해 마침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아내 이름을 따 손타리난타(孫陀羅難陀)라고 하는데, 이는 목우난타(牧牛難陀)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목우난타(牧牛難陀)---본래 소를 먹이던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그는 일찍이 소를 먹이는 목동이면서 출가해 아라한의 과위를 이루었다.
*난타(難陀, Nanda, 빈녀/貧女)②---붓다 당시, 고대인도 코살라(Kosala)국 수도 사위성(舍衛城)에 살던 가난한 여인[빈녀(貧女)]의 이름. 그녀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자였고, 언제나 착한 누나처럼 우아한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우경(賢愚經)>이라는 불경은 그녀의 아름다운 행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난타는 어느 날 길거리에 나갔다가 부자들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모습을 봤다. 그녀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난타는 궁리 끝에 구걸해서 은전 한 닢을 얻어 그것으로 기름을 샀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등불을 만들어서 기원정사로 찾아갔다. 먼발치에서 부처님을 뵌 그녀는 구석진 곳에 초라한 등불을 밝히고 설법을 들었다. 밤이 깊어 사람들이 흩어지자 등불도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이 돼도 꺼지지 않고 점점 더 밝은 빛을 내는 등불 하나가 있었다. 난타가 깨끗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밝힌 그 등불이었다. 당번을 맡은 목련 존자는 날이 밝아오자 기름을 아끼려고 등불을 끄려 했으나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은 꺼지지 않는 난타의 등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난타가 밝힌 등불이 어떤 큰 등불보다 더 오래 어둠을 밝히는구나. 이 등불은 태풍으로도 끌 수 없고, 바닷물을 다 부어도 끌 수 없다. 누구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등불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공덕으로 ‘등광불(燈光佛)’이라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셨다. 이러한 수기를 받은 난타는 기뻐하며 출가를 발원하니 부처님이 허락을 해 비구니가 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여인의 깨끗한 정성을 뜻하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고사성어는 이 설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난타(難陀, Nanda, 5세기경)③---유식(唯識) 10대 논사(論師)의 한 사람. 마음작용에 대해 견분(見分)ㆍ상분(相分) 2분설(分說)을 제창했다.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의 주석에 참여했다.
*난타(難陀, Nanda)와 발난타(跋難陀, Upananda)④---8대 용왕 중에서 난타와 발난타 두 형제용왕을 말한다. 두 용왕은 불법의 수호자로서 난타를 환희(歡喜)라 번역하고, 발난타를 선환희(善歡喜)라 번역한다.
*난행도(難行道)---용수(龍樹)와 세친(世親) 등이 불법(佛法)을 일반 세상의 도(道)에 준해 난(難) ․ 이(易) 둘로 나눈 바 있어, 이에 힌트를 얻어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담란(曇鸞, 476~542)은 세친의 <정토론(淨土論)>에 주석을 달아 <정토론주(淨土論注)>를 써서, 수행을 난행도와 이행도(易行道) 2도설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범부가 외부 힘에 의해 왕생할 수 있는 이행도를 역설함으로써 타력본원(他力本願)의 정토교 교의를 처음으로 천명했다.
수행을 함에 있어서 자력에 의해 성불을 추구하는 것을 난행도, 불ㆍ보살의 원력에 의지해 수행해가는 것을 이행도라 하는데, 난행도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고, 이행도는 근기가 약간 미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자력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난행도의 종교로 알려져 있으나, 불ㆍ보살의 원력에 의한 이행도가 시설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세속 중생은 근기가 다양하고 저열해서 누구나 높고 수승한 난행도를 성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이행도(易行道),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타력본원설(他力本願說) 참조.
*날마다 좋은 날---→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참조.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증도가(證道歌) 참조.
*남무(南無)---→나무(南無) 참조.
*남방불교(南方佛敎, 테라와다불교, 상좌부불교)---남방불교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불교를 지칭한다. 인도에서 서역지방(중앙아시아)을 거쳐서 중국, 몽고, 우리나라, 티베트, 일본 등 동아시아에 전해진 불교를 북방불교 또는 북전불교(北傳佛敎)라고 하는데 대응해 남방불교 혹은 남전불교(南傳佛敎)라 한다.
남방불교권을 흔히들 테라와다불교(상좌부)라고 한다. 따라서 좁고 엄격하게 말하자면 상좌부불교는 20여개 부파불교 중의 일개 종파에 불과하다. 즉,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계율과 교리 해석문제로 불교계에 분열이 일어났다. 최초의 분열[근본분열]은 당시 계율과 교리의 해석에서 시대 흐름에 맞춰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던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와 전통을 고수하려던 장로들 모임인 테라와다[상좌부(上座部)]로 갈라졌다. 이 두 계열이 소승불교의 2대 부문이 됐는데, 대중부는 시대적 변화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테라와다(상좌부)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유지ㆍ보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대중부와 상좌부는 지속적인 지말분열의 과정을 걸치면서 소위 부파불교라는 독특한 시대상을 연출하게 된다. 이것을 아비달마(abhidharma)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때 갈라져 나간 부파의 숫자는 도합 20여개 부파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최초의 두 부파 가운데 대중부는 결국 와해돼 사라졌고, 다른 대부분의 지말 부파들 또한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스리랑카라는 고립된 지역에 정착한 상좌부 불교는 여러 차례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흩뜨리지 않고 오늘에까지 계속된다. 바로 이 부파를 테라와다 불교로 일컫는 것이다. 현재에도 테라와다 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테라와다 불교 종단는 23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권위와 전통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붓다의 육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빠알리어 경전을 전승하고 보유하고 있는 2500년 불교의 종갓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경전결집의 역사와 경전의 전승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붓다의 육성이 담겨 있는 경전이라고 소중하게 소지하고 공부하는 팔리어 경전내용은 아소카왕 시절에 있었던 제3차 경전결집의 산물이다. 인도 대륙에서 있었던 제3차 경전결집은 당시 20여개 부파 중에서 그나마 붓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공인된 상좌부가 전승 및 보유하고 있던 경전(율장 및 경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집의 내용이 고스란히 당시 실론(스리랑카)이라는 남쪽 섬나라로 전승됐던 것이다.
이렇게 남방에 부파불교시대 근본불교를 계승한 상좌부(上座部)의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adin)의 불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테라와다(Theravāda) 또는 남방 상좌부불교라고도 하는 남방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남방 일대에 전파됐다(이때도 아직 경전의 문자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암송으로 전해졌다).
스리랑카에 처음으로 전래된 시기는 BC 3세기 아소카왕(Ashok, B.C. 273~232년경) 때이다. BC 3세기 제3차 불전결집을 끝낸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은 그의 아들 마힌다(Mahinda:摩呬陀) 장로와 딸 상가밋따(Sanghamitta) 비구니 등 일행을 스리랑카에 파견했다.
이에 스리랑카 국왕 데바낭삐아-티사(Devanampiya-Tissa, 재위 BC 250~207)는 이들을 맞이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마하 위하라(大寺, Mahavihara) 사원을 세워 그들에게 기증함으로써 남방불교 거점이 되게 했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불교의 기원이다.
그런데 AD 1세기경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haya)왕이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 Vihara, 무외산사/無畏山寺)를 건립해 마하팃사(Mahatissa) 장로에게 헌납함으로써 스리랑카불교는 대사파와 무외산사파 둘로 나뉘어 서로 경쟁을 하게 됐다.
그 후 대사파는 상좌부계통 불교를 고수했는데 비해, 무외산파는 AD 1세기에 대중부, 그리고 AD 3세기에는 대승불교를 각각 받아들여 대사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AD 4세기경 마하세나(Mahasena, 334-362년 재위)왕 집권 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파의 대승불교 황금시대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분별설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고, 결국은 상좌부불교를 고수한 대사파(大寺派)가 압도하게 됨으로써 대승불교는 사라지고 스리랑카엔 초기 근본불교(상좌부불교)가 고스란히 살아서 전승하게 됐다.
그리고 대사파에서는 BC 1세기 중반에 제4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 즉, 알루위하라(Alu Vihara) 석굴사원에서 경전 편찬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편찬회의는 마하테라 라키타가 주재 하고, 상좌부계통 분별설부교의를 고수하는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은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그때까지 스리랑카에 전해오던 상좌부계통 불교의 모든 교의를 총망라한 경(經) ‧ 율(律) ‧ 론(論) <빠알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팔리어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 잎을 말려 거기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로써 불교사상 처음으로 완성된 <빠알리어 대장경>이 조성된 것이다. 종려나무 잎에 적은 대장경이어서 패엽경(貝葉經)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인 <경ㆍ율ㆍ론 빠알리어 삼장=니까야(Nikaya)>이 훼손됨이 없이 패엽경(貝葉經)이라는 형식으로 고스란히 스리랑카에 전승되게 됐다.
그리고 스리랑카로 전래된 경전(빠알리어 삼장)은 AD 5세기에 미얀마로 전래 됐고, 미얀마의 통일왕조인 페간(Pagan)왕조에 의해 13세기에 태국으로, 14세기에는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로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남방 상좌부불교가 오늘날까지 번성하게 됐다.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붓다 당시의 초기교단적 전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것이 남방불교이다. 그러므로 북방불교가 초기불교 교의를 확대해석한 대승불교 중심인데 비해 남방불교에서는 초기 근본불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엄격한 계율과 수행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권에서 남방불교를 폄하해서 소승불교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방불교는 소승불교가 아니라 남방 상좌부불교이다. 소승불교란 부파불교시대 근본상좌부와 대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불교를 총칭하는 말이다. 현재의 남방불교에는 부파불교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근본상좌부 계통의 분별설부불교가 전해졌으므로 소승불교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최근 남방불교(상좌부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짐으로 인해, 마치 막혔던 미지의 세계가 갑자기 열린 듯한, 그래서 호기심, 신비로움, 새로운 발견과 같은 심리상태가 팽배해져서, 무비판적으로 남방의 여러 불교이론들이 도입되고 있다. 그리고 남방불교이론을 소개하는 일부 인사의 경우, 마치 개선장군 모양으로 설치면서 대승불교를 깔아뭉개듯이 하는데, 그것도 꼴불견이다.
적어도 북전불교(대승불교)의 이론들은 수세기에 걸친 검토와 검증을 거쳐서 정착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오늘날 마구잡이로 도입되는 남방불교(상좌부불교) 이론의 경우는 아직 북방 불교권에서 검증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생소한 이론들이 나타나서, 이에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일이 진정되고 차분한 검증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구나 남방불교이론의 용어의 경우, 거의 일본에서 번역된 것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어서, 이점도 검토돼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빠알리어 니까야>와 <청정도론>은 근본불교가 아닌 아비달마 불교이며, 아비달마 불교이면서도 부처님의 정수를 놓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아비달마 불교는 크게 20여개의 부파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나뉘는 가운데 어느 부파는 교학의 정수를, 어느 부파는 수행의 정수를, 어느 부파는 불제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우선하는 부파 등으로 나뉘었다면, 남방 상좌부는 이해하기 쉬운 불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대승불자들이 당시 상좌부불교에 대해 법실유(法實有)라 해서 비판했을 때, 그것에서 상좌부불교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해서 인도 문화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던 상좌부는 반성과 변화가 나타나는데, 스리랑카라는 변방에 있던 남방 상좌부는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비판을 벗어난 채 ‘법실유’ 전통을 이어오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지금 초기불교 운운하면서 한국에 남방불교를 전하는 이들은 ‘실유법’을 주장하는 상좌부 불교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유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남방 상좌부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불교는 ‘실유법’을 주장하는 불교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쌍윳다니까야>에는 실유법에 거슬리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hyojin ---→불전 결집(佛典結集) 참조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불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 이미 여러 부파의 발생과 성쇠를 거쳤고, 인도반도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처음부터 불교는 중도임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늘 중심을 곧게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긴 불교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의 핵으로 기억하는 용수, 무착, 세친, 보리달마, 혜능 등 옛 스승들의 업적은 다름 아닌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의 정신, 현실 세계로의 복귀였다.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쳤을 때, 대사회적 유연성을 잃고 굳어 갈 때, 혹은 전통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흐르지 못하고 정체돼 있을 때, 둑을 뚫고 새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분들이 끌어들인 새물은 이미 거기 있었던 우물,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에서 퍼 올린 것이다. 가장 오래된 샘에서 새물을 길어 냈다는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파야 할 우물도 바로 그 자리다.
그러나 특정 전적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폄하하는 흐름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 편 가르기로 보이기도 한다. 한역경전과 빠알리어, 범어(梵語, Sanskrit) 경전을 비교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역과 인도 원전의 상호 보완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역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인도어 원전을 통해 쉽게 풀리기도 하고, 역으로 인도 원전의 모호한 부분이 한역을 통해서 분명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역 전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와 인도 전적 중심의 연구 성과 역시 배척과 질시가 아닌 상호 존중과 보완의 자세가 필요하다.
한 예로 초기경전의 눈으로 후기 경전을 점검하고,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초기경전을 재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각 개인, 지역사회, 한 나라, 나아가 전 세계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연기의 세계관이다. 몸소 앞서서 그것을 보이고 퍼뜨려야 할 사회적 의무를 자진해서 짊어진 승가는 연기의 바른 이해와 실천, 곧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날아가는 나비다. 그것이 바로 승가의 굳건한 뼈대요 따뜻한 피인 것이다. - 재연 스님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논서(論書)---북방불교에는 부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로 7론이 있는데, 남방 상좌부에도 7론이 조성돼 전하고 있다. 즉, ①법집론(法集論), ②분별론(分別論), ③논사(論事), ④인시설론(人施設論), ⑤계론(界論), ⑥쌍론(雙論), ⑦발취론(發趣論)이다.
이들 7론은 BC 250년 무렵부터 BC 50년 사이 200여년에 걸쳐 성립됐는데, 북방과 달리 남방 상좌부에서는 7론을 단순한 논서가 아니라 성전으로 꼽는다. 그리고 7론을 거쳐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실현했다. 이 이후 나타난 논서는 대개 난해하고 복잡한 <청정도론>에 대한 해석서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빠알리어 칠론(七論)의 성립연대가 확실치 않으며, 그 성립순서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칠론 외에 <지도론(指道論)>, <장석론(藏釋論)>, <밀린다팡하(Milindapanha)> 등 세 가지 논서가 더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서 특히 중요시 되고 있다.
①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ni)---초기 팔리어 논서이고, 내용은 불교의 여러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므로 초기불교의 복잡한 사상을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설계도 역할을 제공해준다.
제1장에서는 마음과 마음작용(心. 心所)을 다양하게 분석적으로 고찰했다. 이른바 89심(八十九心)이 여기서 설명되며, 마음작용으로서 40가지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물질적 존재(色)를 한 가지 종류에서 11가지 종류로 분류해, 그것 역시 각각 다양하게 분석했다.
제3장에서는 일체존재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22가지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100가지, 나아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 42가지, 도합 164문(門)으로 나누어 설했다.
제4장에서는 앞장의 그것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아비달마 논모 122문(門)으로 나누기를 시도하고 있다. 경의 논모(論母)라고 하는 이유는 <니까야>인 <장부경전>의 <상기티숫탄타, Sangitisuttanta>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 가운데 일부분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볼 때 북전 논서의 <족이문족론(集異門足論)>과 비슷한 관계이다.
※논모(論母, 마띠까/mātṛkā)---불타법문의 취지나 요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경설을 널리 분별 해석(廣釋)하기도 하고 종합 정리하기도 했는데, 이를 논모(論母, mātṛka) 혹은 논의(論議, upadeśa)라고 한다. 또한 논점이나 주제를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해 둔 목록과 열거되는 연구제목을 논모라 하기도 하며, 더러 논장(論藏)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② 분별론(分別論, 비방가/Vibhanga)---<법집론>을 보충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논서이다. 북전 <법온족론(法蘊足論)>과 비슷한데, 아함 가운데 주요한 교설을 뽑아 그것을 종횡으로 분석 고찰했다.
③ 논사(論事, Kathavatthu)---아소카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차 불전결집에서 장로 목라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가 논사를 설했다고 한다. 전체는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이설(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독특한 내용을 갖고 있다.
④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 pannatti)---이 논서는 불교경전 가운데 '사람'에 관해 언급된 부분을 추리고 정리해서 열 개 항목으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인시설(人施設)'이라는 뜻은 편의상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불교교리는 무아설(無我說)을 표방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무아이고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이지만 우선 사람이라고 명칭하고 편의상 독립자존의 존재로 가정한다는 뜻에서 '시설(施設)'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 언급되는 인(人)에 관한 용례의 집성을 '인시설(人施設)이라고 부르고 있다.
⑤ 계론(界論, 界說論, 다뚜까타/Dhatukatha)---‘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으로 번역되는 <계론>은 <법집론>을 보충한 논서이다. 여러 가지 법들이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 되는가 되지 않는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를 교리문답 형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⑥ 쌍론(雙論, 야마까/Yamaka)---논장의 모호한 심리현상에 관한 전문술어 중에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쌍론이라 했다. 즉, 전물술어나 문제, 개념들을 상반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비해 논의함으로써 주요한 교설 가운데 나타난 용어의 의미.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대비하고 검토했다.
⑦ 발취론(發趣論, Patthana)---칠론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논서이다. 그 내용은 연기법의 가르침을 자세히 치밀하게 정리해 놓았다. 즉, 24연(二十四緣)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다. 여러 가지 연(緣)은 아함경전 이래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그것을 24연으로 정리해 설한 것은 이 논서가 처음이다. 현재 미얀마에선 가장 중요한 논서로 취급되고 있다.
이 외에 특수한 세 가지 논전(論典)이 있다. 연대적으로는 대개 칠론 다음의 것(혹은 칠론 중 그 성립 연대가 늦은 것보다는 조금 앞선 것인지도 모른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지도론(指導論, 넷티파카라나/Nettippakarana)---AD 1세기 전후 인물이라고 하는 캇차야나(Kaccayana)의 저서로, 경전 이해에 대한 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 장석론(藏釋論, 페타코파데사/Petakopadesa)---이것은 지도론의 보유(補遺)라고 볼 수 있다.
•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밀린다팡하/Milindapanha)---BC 150년경 서인도를 지배하던 그리이스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 이름은 밀린다/Milinda)와 불교의 나가세나(Nagasena) 장로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교의에 관한 대론(對論) 기록으로, 다른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도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 팔리어 논전보다 오히려 더 오래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은 기원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경(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일종의 교의학습서이지만 칠론처럼 번쇄하거나 형식적인 논의가 많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에 따른 풍부한 문답으로 매우 흥미 있는 문헌이다.
위의 세 가지 논서는 경장이나 논장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소부(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맛가/Visuddhimagga)---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가 AD 440년 경 저술한 <청정도론>은 칠론 이래 전개돼 온 남방 상좌부의 모든 교리를 하나로 정리해 조직적으로 설한, 바로 이 부파를 대표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서이다. 붓다고사보다 200~300년 앞선 인물인 우파팃사(Upatissa)는 <해탈도론(解脫道論, Vimuttimagga)>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붓다고사는 그것을 기초로 증보해 이 논을 지었다. <해탈도론>의 원문은 알려지지 않지만, 다만 다소 변화를 받은 텍스트의 역본이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모두 2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의 순서에 따라 붓다 교법을 실천의 도(道)로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해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戒의 淸淨), 나아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 수련을 거듭함(定의 淸淨)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깨끗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한다(慧의 淸淨)고 하는 도(道)를 설하는 것이 이 논서의 요강이다. 그러면서 남방 상좌부 특유의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을 내포해 다채로운 아비달마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경 ‧ 율 ‧ 논 삼장에서 많이 인용한 것도 이 논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이 대저이기도 하거니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 남방 상좌부에서는 이를 간명하게 정리한 강요서(綱要書)들이 나타났다.
•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이는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물질적 존재 4대종(四大種) 및 24소조색(二十四所造色)에 대해 운문으로 해설한 것이다.
• 색비색별론(色非色別論)---이는 초보적인 입문서로서 산문으로 써진 소론이고, 이의 작자는 붓다닷타(Buddhadatta)라고 한다.
• 체요략론(諦要略論)---이는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입아비달마론>과 마찬가지로 색(色), 심(心), 심소(心所), 열반(涅槃)에 대해 개설했고, 담마팔라(Dhammapala)의 저작이다. 이 작자는 주석가로서 초기경전에 대한 주석서 등을 지은 유명한 담마팔라와는 동명이인으로 그보다는 후대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 섭아비달마의론(攝阿毘達磨義論)---이의 저자 아누룻다(Anuruddha)는 9세기 이후 인물로 추측된다. 이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 부파의 아비달마 학습 교과서가 됐던 것으로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산문으로 서술하고 운문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따라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마음이 작용하는 14과정, 28색(二十八色), 여러 가지 실천항목, 12연기(十二緣起), 24연(二十四緣) 등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의 주요학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고도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출처]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ㄴ - 1>|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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