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1. 한국불교를 깨운 맑은 바람 ‘돈점논쟁’
『“성철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이론은 외적인 모순과 억압 속에 와해되어가는 승단의 재건을 위한 이념적 토대의 필요성이라는 한국불교의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현재·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人天小乘敎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緣覺中乘敎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大乘圓頓敎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레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바로 조사문중의 교외별전의 기틀임), 이는 선이 교와 다른 점이다.’ (서산대사 ‘선교결(禪敎訣)’)
서산대사가 제자인 유정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선과 교가 이렇듯 큰 차이가 있음을 설파하는 비유가 장쾌하다. 성철은 ‘선교결’을 서산 만년의 명저로 평가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선종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이란 교외(敎外)라 하여 불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은 이론이 아닌 실천에 있음을 이름이었고, 이는 교가 아닌 선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가섭이 미소로 화답한 것이 바로 교외별전의 시작이었다.
서산은 조사들의 교외별전 사례를 열거했다.
달마의 ‘툭 트이어 성(聖)이랄 것도 없다’,
육조의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
회양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질한다’,
행사의 ‘여능의 쌀값’,
마조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
석두의 ‘불법을 모른다’,
운문의 ‘호떡’,
조주의 ‘차 마심’,
현사의 ‘흰 종이’,
설봉의 ‘공 굴림’,
화산의 ‘북 두드림’,
도오의 ‘춤을 춤’ 등이다.
서산은 이를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교외별전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라 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1912.10.10 ~ 2003.12.13)도 한국 승려들은 서산 스님의 문손(聞孫-세대가 먼 후손)이며 서산은 태고 스님의 법을 이었다고 단언했다. 조사선 5조 가풍 어디를 뒤져봐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서옹은 돈오돈수라야 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돈오돈수의 돈오는 ‘진여자성을 아는 것’이고
돈오점수의 돈오는 ‘진여자성을 지해(知解)로서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사선은 본래면목 그 자리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인데, 지해(知解) 차원에서 그 자리를 향해서 수행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경’ 1997년 가을호)
이렇듯 한국에서 임제정맥은 면면히 흘러내려왔다. 그러다 이미 살펴본 대로 비구와 대처승간에 종조 선점 다툼에서 보조가 솟아오르고 이로 인해 종조와 더불어 종지(宗旨)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의 연장선상에 돈점논쟁이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성철은 돈오돈수론을 펼쳐 승려들의 삿됨과 나태함을 꾸짖었다. ‘한 소식’을 내세워 성불했다고 주장자를 휘두르는 무리에게 깨달음의 경계를 정확히 알리려 했다.
“대승경전들이 승단불교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대중을 위한 불교의 실현이라는 불교의 시대사적 과제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사회현실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성철의 돈오돈수 이론은 외적인 모순과 억압 속에 와해되어가는 승단의 재건을 위한 이념적 토대의 필요성이라는 한국불교의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김종인 ‘한국불교 현실에 대한 성철의 대응과 돈오돈수’)
성철은 깨달았지만 완전하지 못하여 점차 닦고 있다는, 결국 아만에 빠져있는 선승들의 빠져나갈 구멍을 틀어막았다. ‘견성 아닌 견성’을 내리친 것이다. 성철은 깨달은 후 다시 망상을 끊고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지눌의 ‘목우행(牧牛行)’도 이렇게 비판했다.
“거울의 본성인 밝음은 먼지가 있고 없음과 상관없듯 중생의 본성인 진여자성은 번뇌가 있고 없음과 상관없다. 보조 스님은 이를 돈오견성이라 하였고, 먼지를 제거하듯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일러 오후목우행(悟後牧牛行)이라 했다. 그러나 종문의 목우행은 그렇지 않다. 보임무심(保任無心), 먼지를 완전히 닦아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비추는 맑은 거울을 잘 보전하는 것을 일러 보임과 목우행이라 했다. 결코 망상을 끊고 습기를 제거하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다. 그러니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문의 정안종사들과 보조 스님의 견해는 분명 다르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할 일도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깨친 다음에 보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성철은 단호하게 밝혔다.
“종문에서의 보임이란 자유자재한 대무심삼매(大無心三昧)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이는 일체의 번뇌망상이 끊어져 어떤 가르침도 방편도 필요치 않다. 따라서 ‘깨달은 뒤에 망상을 하나하나 끊는 것이 보임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병이 여전한 자를 온존한 이로 여기는 과오이다. 또한 종문에서의 견성이란 구경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견성한 후에도 다시 닦음이 필요하다’ 한다면 이는 병 없는 이를 병자라 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선문정로’)
불교학자 도대현도 성철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돈오돈수에서 ‘돈수’의 의미는 ‘깨치기 위한 수행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깨침 이전에는 목숨 바칠 각오로 수행해야 하지만, 돈오 후에는 부처 경지로 되므로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으로 돈수인 것이다. 또한 돈오 이전의 수행 때문에 돈수라고 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으나, 이는 오전수행(悟前修行)이고 돈오와 짝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돈수 뿐이며, 견성하는 순간에 ‘불각(不覺)의 수행도 마쳐진다’는 뜻이다.” (도대현 ‘성철 선사상’)
성철이 돈오돈수론을 주창하자 성철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조계종 중흥교조로 떠받든 지눌선사의 돈오점수론을 손바닥 뒤집듯 했다며 불쾌해했다.
“어떻게든 조상의 훌륭한 점을 부각시켜야지 왜 자꾸 잘못을 캐내려고 야단인가.”
“성철의 논리는 종파주의이며 돈오돈수는 특수한 수도이론에 불과하다.”
“돈오돈수론은 수행론이 아닌 견성의 정의에 불과하다.”
“오로지 화두 근본주의에 기대고 있다.”
“성철이 인용한 문헌과 문구들은 극히 편파적으로 가려 뽑은 것들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지눌을 따르며 수행한 한국불교는 무엇이냐며 대들었다. “그럼 성철은 돈오돈수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성철은 물러서지 않았다. 깨달은 만큼 전해야 했다. 바르게 깨달았으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 했지 않은가.
“보조 이후로 대선지식이 출현하지 못한 것은 보조 스님의 ‘수심결’ 때문이다. ‘수심결’의 돈오점수 사상 때문에 지해의 병이 들어 선을 닦는다는 이들이 참공부를 못한 까닭이다. 지해의 병이 걸리면 바로 들어가려해도 갈 수가 없다. 지해의 병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사법(邪法)을 깨뜨려 정법을 지키는 것, 사법을 깨뜨려 정법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 그것이 자비이자 불제자의 사명이다.”
참선 중에 떠오른 기특한 생각 하나로 깨달았다며 스스로 제 이름을 높이는 선승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견성에 이르지 못하고 성불한 것으로 착각하여 지옥으로 떨어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에 삿된 가르침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만인을 망치게 하니 그 죄업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것이 바로 성철이 돈오돈수를 주장하며 깨달음의 경계를 분명히 밝히는 이유였다. 성철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이 답답했다. 이런저런 말씨름을 하지 말고 직접 자신이 이른 대로 수행해보라 일갈했다.
“자기 경험과 소견에 맞지 않는다고 이런저런 의심으로 믿질 않는데,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하면 된다. 단박에 여래의 땅을 밟는 이런 묘방이 있음을 알고 속는 셈 치고라도 한번 해보라. 해보면 부처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역대 조사님들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해인사 노장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돈점 논쟁은 1600년 불교사에 그 자체로 청량한 바람이었다. 아무도 감히 선통을 두고 사상적 제동을 건 사람이 없었다. 성철의 선사상은 종조와 선맥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들었다. 대중은 돈점 논쟁을 숨죽이며 들었다. 더러는 경전을 다시 들추거나 옛 거울을 찾았으니, 이는 잠자는 한국불교를 깨우는 죽비였다. 보조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성철과 돈오돈수에 대한 검증은 필수적인 작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검증작업을 통해 돈오돈수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불도와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성철이 우리 곁에 있음이다.
“성철 스님은 1981년 출판한 『선문정로』에서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이것이 인구에 회자되다가 10년 후인 1990년에 비로소 학술적으로 논의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논쟁은 선종 법맥관계의 사자상승(師資相承)과 사상적인 충실도에 있어서, 보우와 그의 돈오돈수가 옳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지눌을 지지하는 송광사 측과 성철 스님을 따르는 해인사라는 양강(兩强)간의 대립구도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 속에서 우리나라의 선사상은 중국 선사상을 능가하는 정치(精緻)함을 구현하게 되어 사상적인 큰 발전을 이룩한다.” (자현 스님)
성철은 깨친 후 최고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았다. 존경과 경배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몸은 산 속에 있었지만, 선사상은 속세의 광장으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숱한 학자와 승려들로부터 화살을 맞았다. 하지만 성철 선사상은 무수한 화살자국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자 일획 달라진 게 없다. 화살자국은 상처가 아니라 성철사상을 확인해보려는 두드림의 징표였다. 자신의 깨침을 인가해 줄 종장(宗匠)을 찾을 수 없었기에 성철은 선맥과 깨달음의 실체를 더 세심하게 더듬었다. 그리고 고불고조의 옛길을 찾아냈다. 그것은 결국 새 길이었다. 후학에게 길을 펼쳐 보인 성철은 선가의 귀감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2. 지눌과 성철
『“지눌의 시대나 성철이 살았던 시대는 똑같이 민족의 암흑기였다. 나라는 외세에 휘둘리고, 백성은 고통 받고, 승단은 부패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백성을 보듬지 않았다. 권력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이에 지눌은 정혜결사를, 성철은 봉암사결사를 주도했다. 정혜결사나 봉암사결사나 내용은 똑 같다.”』
성철은 보조의 점수사상을 공격했다. 돈오점수설로 선불교 전통이 정법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보조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보조 지눌이 고려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지눌을 대신해서 반박을 해야 옳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승려들이 지눌 입장에서 성철을 공격했다. 하지만 지눌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눌과 성철이 동시대에 있었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두 사람은 어떤 논쟁을 벌였을까. 불교학자 도대현은 지눌과 성철의 돈점사상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두 선사가 육조 혜능을 스승으로 삼은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육조단경’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르다. 육조 혜능이 주장한 ‘돈오돈수 역무점차(頓悟頓修 亦無漸次)’의 입장에서 볼 때, 성철은 이를 점수가 필요 없는 돈오돈수로 파악하였으나, 보조는 혜능의 남종선을 규봉 종밀의 돈오점수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여 돈오점수를 유일한 수증론으로 보았다.
둘째, 두 선사 모두 간화선을 주장한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성철은 간화선을 통해 화두를 타파하여 돈오하게 되면 바로 돈수가 되어 수행이 끝나는 것으로 보았으나, 보조는 돈오를 해오로 이해하고 점수 수행의 시작으로 보았다.
셋째, 두 선사가 처한 시대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사상을 주장한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성철은 깨침이 확실한 기준으로 구경각과 견성성불, 즉 돈오돈수를 주장한 데 비해, 보조는 망념이 있는 해오를 돈오라 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도대현 ‘성철 선사상’)
두 사람의 돈점사상이 ‘시대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사상을 주장한 것’임은 여러 정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눌이 고려 말 선(禪)과 교(敎)의 다툼에서 이를 통섭하려 돈오점수설을 주장했다는 설은 나름 설득력이 있고, 성철 또한 함부로 견성했다며 종지를 어지럽힌 무리를 향해 돈오돈수설을 내세우고 죽비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눌과 성철은 비록 750년이 넘게 차이나는 시공간에 존재했지만 닮은 점이 많았다. 우선 두 사람은 고려 무신시대와 현대사의 무인시대 한 복판에 있었다.
9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은 고려 왕 의종 때 시작되었다. 왕은 절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문신의 권세는 왕권이 주눅들 정도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연회장에 들이닥쳐 문신과 환관들을 차례로 척살했다. 문관(文冠)을 쓴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칼을 든 자들은 부패한 왕실의 배후로 사찰을 지목했다. 승려들은 반발했고, 그때마다 시체가 산을 이뤘다. 남은 승려들은 새 권력에 엎드렸다. 사찰들은 새로운 왕실과 귀족들의 의례를 치르며 부를 축적했다.
칼을 지닌 자들은 서로를 벴다.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시체가 널브러진 곳에 까마귀떼가 하늘을 덮었다. 사찰에서는 음식이 넘쳐났다. 몸과 마음에 살이 오른 승려들은 뒤뚱거렸다. 사찰에 술 냄새가 진동했고 시정보다 시끄러웠다. 권력은 승려를, 승려는 백성을 부렸다.
어느 날 승려 하나가 사찰을 향해 일갈했다. 지눌이었다. 왕실과 귀족들이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승려들이었다. 지눌은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 명리에서 정혜로, 기복에서 수행으로 옮겨가자고 외쳤다. 지눌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만들어 동지를 구했다.
“남은 세월이 한줌 햇살인데 탐욕, 분노, 질투, 교만, 방일로 세월을 허비하고 부질없는 말로 세상을 흔들 셈인가. 덕도 없으면서 신도들 보시를 받고, 공양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허물을 두고 어찌 슬퍼만 할 것인가. 선(禪)과 교(敎), 유가와 도가를 막론하고 뜻이 높은 사람은 일어나라.”
지눌의 결사문은 거대한 죽비였다. 세상과 타협한 승려들은 질린 얼굴로 모여서 수군거렸다.
“지눌이 불법으로 우리를 찌르는구나.”
지눌은 개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도 권력을 무수히 찔렀다. 고려불교는 그렇게 변방에서 일어섰다.
성철이 살았던 근·현대사 또한 척박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해방 공간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끝내 국토가 동강났다. 6·25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군인들이 권력을 찬탈했다. 육군소장 박정희 쿠데타 이후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까지 31년(1961~1992) 동안을 무인정권이라 칭할만하다.
이러한 격동의 역사에 불교계도 숱한 곡절이 있었다. 사찰에서 술 냄새와 비린내가 진동했다. 항일 승려와 친일 승려가 있었고, 정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비구승과 대처승이 싸웠다. 그리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전국의 사찰에 난입하는 법난이 발생했다.
지눌의 시대나 성철이 살았던 시대는 똑같이 민족의 암흑기였다. 나라는 외세에 휘둘리고, 백성은 고통 받고, 승단은 부패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백성을 보듬지 않았다. 권력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이에 지눌은 정혜결사를, 성철은 봉암사결사를 주도했다. 정혜결사나 봉암사결사나 내용은 똑 같다.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
“부처님 법대로 살자.”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보조와 성철은 근본에 충실했다. 똑같이 변방에 머물며 서울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철 또한 불법으로 나태한 한국불교를 찔렀다. 그것은 처절한 자기 혁신이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호소이기도 했다. 성철은 지눌처럼 결사문을 내걸지 않았지만 평소 외침으로 미뤄 보면 성철의 봉암사 결사문은 이랬을 것이다.
“한국불교는 간판만 불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목탁장사만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어찌할 것인가. 먹고 살 길이 없으면 강도짓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가짜 선지식들은 간판을 내려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장 잘사는 것이 승려여야 한다. 이에 부처님법대로 잘 살아보려 한다. 뜻있는 자들은 희양산 봉암사로 오라.”
성철은 직설적이고 지눌은 자못 은근하다. 그것은 지눌의 ‘수심결’과 성철의 ‘선문정로’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삼계(三界)의 열뇌(熱惱)여 화택(火宅)과 같도다. 어찌 여기에 머물러 있어 가없는 괴로움을 달게 받을 것이랴. 윤회를 벗고자 하면 부처를 찾음보다 나음은 없나니 부처를 찾고자 하면 이 마음이 곧 부처라,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리요, 나의 몸을 떠나지 않음이요, 색신(色身)은 다 거짓이라 남이 있고 멸(滅)함이 있으나 진심은 공함과 같아 끊어짐과 변함이 다 없나니 이런 전차로 이르사대 백해(百骸)는 흩어져서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나 일물(一物)은 길이 영(靈)하여 하늘과 땅을 덮는다 하시니라. 슬프다, 이젯사람의 길을 잃고 헤맴이여. 저의 마음이 참으로 부처인 줄 모르며 저의 성(性)이 참 법인 줄 몰라 법을 구하되 멀리 여러 성인(聖人)을 찾고 부처를 구하되 저의 마음은 보지 않는도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性) 밖에 법이 있다 하여 여기에 굳이 집착하여 부첫길을 찾고자 하면 비록 진겁(塵劫)을 지나도록 몸을 태우며 팔을 그을리고 뼈를 두드리며 살을 깎고 피를 뽑아 경(經)을 베끼며 길이 앉아 눕지 아니하고 하루 한 끼를 묘시(卯時)에 먹으며 크나큰 대장교(大藏敎)을 다 읽으며 이렇듯 가지가지의 고행을 닦은들 어찌 얻음이 있으리요. 마침내 모래로써 밥을 지음과 같이 다만 수고로움만 더하리로다. 오로지 저의 마음을 알며 항사(恒沙)의 법문과 한없이 묘한 뜻을 찾지 않아도 얻으리라.’ (지눌 ‘수심결’ 첫머리: 조지훈 역)
‘영취산정에서 세존이 염화((拈花)함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이요, 소림암굴(小林岩窟)에서 이조(二祖)가 삼배(三拜)함은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음이니, 고금 선지식들의 현언묘구(玄言妙句)는 모두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다.
열갈(熱喝)과 통방(痛棒)도 납승의 본분이 아니거늘 어찌 다시 눈뜨고 꿈꾸는 객담(客談)이 있으리오마는, 진흙과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성명(性命)을 불고(不顧)함은 고인의 낙초자비(落草慈悲)이다.
정법상전(正法相傳)이 세구연심(歲久年深)하여 종종(種種) 이설(異說)이 횡행하여 조정(祖庭)을 황폐케 함으로 노졸(老拙)이 감히 낙초자비를 운위(云謂)할 수는 없으나, 만세정법(萬歲正法)을 위하여 미모(眉毛)를 아끼지 않고 정안조사들의 수시법문(垂示法門)을 채집하여 선문(禪門)의 정로(正路)를 지시(指示)코자 한다.’ (성철 ‘선문정로’ 서언)
‘수심결’은 섬세하지만 ‘선문정로’는 담백하다. 지눌의 글에는 감성이 진하게 묻어있지만 성철의 글에는 살점이 별로 없다. 지눌이나 성철은 이렇듯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또한 닮았다. 불교학자 박성배는 닮은 점 세 가지를 이렇게 꼽았다.
“첫째 우리는 두 분이 모두 다 주장자 법문만을 장기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두 분은 모두 시대와 사회를 그 나름대로 걱정하신 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두 분이 다 당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문제를 밝혀보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보조 스님도 성철 스님도 모두 붓을 들었다 하면 항상 말이 되게끔 말씀하셨다. 모두 학문적인 감각이 있으셨던 것이다. 말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학문의 보편적인 원칙을 지킬 줄 알았다. 모두 학문적인 자질이 탁월하신 분들이었다.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지금 두 분의 사상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학자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경’ 2013년 7월호)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3. “사람이 음식에 먹히면 안됩니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놀러와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을 피울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아이들은 내 친구요, 꾸밈없는 천진함은 진불(眞佛)의 소식과 같다.”』
성철은 가야산 백련암에만 머물렀다. 명성이 가야산만큼 우뚝해서 이름이 세간으로 흘러내렸다. 성철을 친견하려 사람들은 백련암으로 올라왔다. 그중에는 인생의 답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성철의 제자들은 성철의 법문을 듣고 감화를 받아 삭발한 경우가 많았다. 또 삼천 배를 하고 친견 했을 때의 ‘특별한 느낌’ 때문에 다시 찾아온 이들도 있다. 성철은 그들에게 무심히 물었다.
“왜 왔나?”
집 떠나온 젊은이들의 말대답이 다소 다르긴 했지만 그 뜻은 하나였다.
“깨달음에 이르고 싶습니다.”
“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철은 한동안 젊은이를 응시했다. 그 눈길 속에는 기대와 우려가 섞여 있었다. 아마도 근기와 결기까지를 헤아려보았을 것이다. 처음 성철을 본 사람은 모두 안광에 압도당했다.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속으로 되뇌었다.
‘과연 도인이구나.’
그러나 도인의 길은 멀고 험했다. 고달픈 행자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문을 빠져나간 이들이 많았다. 성철은 배운 사람을 선호하여 ‘대학생 제자’가 많다는 얘기가 떠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위 ‘대학 물’을 먹은 제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성철은 학벌이나 과거나 출신 등을 묻지 않았다. 영민하고 부처님 말씀을 잘 새기는 젊은이를 좋아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삼천 배, 일만 배를 시키며 하심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행자가 되면 우선 능엄주를 외우게 했다. 부처님이 직접 설했다는 주문이다. 보통 3주일에서 한 달이 지나면 외울 수 있었지만 불과 2주 만에 외워버리는 행자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걸려도 외우지 못하면 스스로 산을 내려가야 했다. 또 한문 경전을 읽으려면 문리(文理)를 터득해야 한다며 유교 경전인 사서(四書)도 외우게 했다. 행자들은 대학-중용-논어-맹자 순으로 사서를 읽었다.
또 일본어를 익히도록 했다. 당시는 한글 경전이 드물어 일본 경전으로 공부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행자들은 자습서로 문법을 익히고, 일본소설을 본 후 불교성전을 읽었다. 책은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성철이 주는 책만을 읽어야 했다. 보통 출가한 지 반년이 지나면 첫 책을 주는데 부처님 일대기를 비롯하여 ‘법구경’ ‘아함경’ ‘열반경’ ‘법화경’ 등 40여권의 경전과 해설서를 읽게 했다. 책들은 거의 일어판이었고, 이들 불서를 읽는 데는 2~3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화두를 받았다. 그런 후에야 제자들은 선방에 들 수 있었다.
백련암의 하루는 성철의 염불소리로 열렸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성철이 백팔 배를 드릴 때쯤에서야 새벽 목탁(도량석)이 울렸다. 새벽 3시 무명을 쫓아내고 여명을 부르는 목탁소리가 경내 모든 것들을 깨웠다. 큰절 해인사에서부터 작은 암자에 이르기까지 가야산 속의 승려들은 모두 일어났다. 경내에 들어와 부처님 품안에 잠들어 있던 생명붙이가 다시 산 속 제자리로 돌아갔다.
촛불과 향을 피우며 새벽 예불이 시작됐다. 예불은 오분향례, 능엄주 독송, 발원문 낭독의 순으로 진행했다. 오분향례는 새벽 산사를 향기로 장엄했다.
“계율의 향기, 삼매의 향기, 지혜의 향기, 해탈의 향기, 해탈 지견의 향기 광명의 구름 되어 법계에 두루두루 모든 곳 한량없이 계시는 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 거룩한 스님들께 공양하옵니다.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예불은 새벽 4시쯤 끝났다. 예불 후에는 각자가 흩어져 정진을 했다. 행자들은 삼백 배나 오백 배를 하고 스님들은 경을 읽거나 참선에 들었다.
5시가 되면 누구는 공양간으로, 누구는 채공간으로 갔다.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하루를 열었다.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마련했다. 대중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은 참으로 성스러운 일이었다. 음식은 정성이었고 하나하나가 수행이요 정진이었다. 나물을 무칠 때는 나물만을, 국을 끓일 때는 국만을 생각해야 했다. 나물 맛이, 국 맛이 곧 공부의 깊이였다.
성철의 공양은 별도의 장소에서 따로 만들었다. 성철의 공양상이 들어간 후에 큰방에서 대중들이 공양을 했다. 성철의 밥상은 늘 단순 초라했다. 무염식에 쑥갓 대여섯 줄기, 가늘게 썬 당근 몇 조각, 검은 콩 자반 한 숟가락이 전부였다. 밥그릇은 어린아이 것처럼 작았다. 아침에는 밥 대신 흰죽 반 그릇을 들었다. 성철은 소금기 없는 음식을 오래오래 씹어 맛있게 삼켰다. 제자들이 보기에 100번도 더 씹는 듯했다. 평생 간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성철을 보고 건강을 걱정했다.
“그렇게 드시고도 괜찮습니까?”
“음식에 먹히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적게 먹고, 세상에서 맛있다는 것은 안 먹습니다.”
공양을 마치면 일제히 청소를 했다. 성철이 머무는 염화실 청소는 휴지 한 장을 뽑아서 반으로 갈라 휴지통 위에 놓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성철은 언제나 휴지를 반장씩만 쓰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었다. 어떤 때는 반쪽짜리 화장지도 네 조각, 여섯 조각으로 나눠썼다. 이쑤시개도 버리지 않고 놔뒀다가 깎고 또 깎아서 다시 썼다. 새벽에 향불을 지필 때는 사각 성냥 통을 사용했다. 성냥 알이 떨어지면 알만 다시 사오라고 했다. 성냥 통도 반질반질하게 닳아서 불이 붙지 않을 때까지 썼다. 양말이 떨어지면 손수 꿰매 신었다. 바느질 솜씨가 누구보다 좋았다. 고희를 넘기고도 옷가지나 내복을 기워 입었다.
신도들은 대개 오후에 찾아왔다. 성철을 친견하려면 삼천 배를 해야 했다. 어른들은 삼천 배를 하고 아이들은 성철과 함께 놀았다. 성철은 아이들만 보면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삼천 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예외였다. 껴안아주고 볼을 꼬집으며 함께 놀았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그런데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놀러와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을 피울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아이들은 내 친구요, 꾸밈없는 천진함은 진불(眞佛)의 소식과 같다. 사람이 깨달아 아이처럼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마음이 되면, 산이 물 위로 간다는 소식이 환하게 드러나니 그것이 바로 깨침의 경지이다.”
섬돌 끝 등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이들이 밀어버려 오른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성철은 웃었다.
오후 5시에 저녁공양을, 7시에는 저녁 예불을 드렸다. 예불이 끝나면 각자 책을 읽거나 참선을 했다. 그리고 몇이서는 염화실에 들러 성철의 어깨를 주물렀다. 백련암의 밤은 평화 그 자체였다. 시간이 느슨하게 어둠 속으로 풀어졌다.
밤 9시 삼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절 식구들이 잠이 들면 비로소 가야산 봉우리들이 백련암 작은 뜰로 내려와 앉았다.
성철은 천제굴, 성전암의 ‘10년 상좌’들에게는 천제, 만수, 성일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 제자들에게 법명으로 원(圓)자를 주었다. 성철이 삼천 배를 한 사람들에게 원상(圓相)을 그려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원상(동그라미)은 깨달음을 상징했다. 처음도 끝도 없음이니,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나타낸 것이었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선방을 지키며 다른 데 눈을 돌리지 말라 일렀다. 말사 주지는 물론이요 큰절(해인사)의 삼직도 맡지 말고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제자들은 거의가 스승의 뜻을 따라 문중에서 세운 절 외에는 어떤 소임도 맡지 않았다.
천제, 만수, 성열, 원기, 원명, 원정, 원융, 원택, 원타, 원해, 원행, 원안, 원천, 원담, 원영, 원소, 원여, 원규, 원당, 원일, 원암, 원서, 원인, 원유, 원종, 원명, 원순….
제자들이 본 성철의 면모는 어땠을까.
“한국불교의 기준을 세우셨다.” (천제)
“생이지지(生而知之)하신 분이다. 귀에서 나는 소리[耳鳴]는 자신밖에 듣지 못하듯 공부도 그러하니, 양심에 따라 공부하라 이르셨다.” (만수)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철저한 수행자였다. 자신과 남에게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키고 실천하셨다.” (원규)
“출가한 후로 성철 큰스님 같이 선교율(禪敎律)에 대해서 이론과 실천과 수행력을 완벽하게 겸비한 스님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원소)
“해인사 퇴설당에 계시다가도 갑자기 백련암 장경각에 있는 경전이나 어록을 가져오라 했다.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찾나 난감해 하고 있으면 ‘그 책은 몇 번째 책장, 몇 번째 칸, 몇 번째 줄에 있다’고 일러주셨다. 장경각에 들어가 찾아보면 정말 말씀하신 자리에 어김없이 꽂혀있었다.” (원당)
“스님은 양심을 가르치셨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가르침이 녹아 있다.” (원순)
“스님이란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들은 후 다른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다.” (원영)
“천둥번개와 같은 선의 가르침을 주셨다.” (원유)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출가해 스님이 된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심어주셨다.” (원타)
“스님께서는 우리더러 꿈에서 깨라 하셨다. 이왕 사람 모습 받았으니 죽기 살기로 공부해 본래면목을 찾으라 당부하셨다.” (원해)
“평생 돈오돈수를 설파했는데도 이를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원택)
“선의 대중화를 간절히 원하셨다. 불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견성즉불은 ‘자기를 바로봅시다’로, 보현행원은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 산다’로 말씀하셨다.” (원여)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았던 어른이시다. 새벽 예불부터 취침까지 하루 일과를 절대 어기지 않았다.” (원행)
“중은 계(戒)가 생명이라 하셨다. 그런데 요새 계는 바다로 갔는지 똑바로 행하라는 계가 옆으로만 가는 게가 되어버렸다고 일갈하셨다.” (원암)
“후학들에게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려 무던히 힘쓰셨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은 큰스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원담)
“말로서가 아니라 수행정진이라는 행으로 후학들을 가르쳐야 함을 깨우쳐 주셨다.” (인홍)
“스님의 법문은 차원이 달랐다. 우리는 3차원에 살고 큰스님께서는 4차원에 사시는 것 같았다.” (혜춘)
“중노릇이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주고 심어주신 분이다.” (묘엄)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8호 / 2016년 4월 6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4. 진정한 불공 참다운 가난
『“돈은 너희 돈으로 샀지만 먹기는 농부들 정성을 생각하고 먹어야지. 반도 안 먹고 버렸으니 기도하지 말고 싹 다 가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아놓은 수박을 다시 꺼내 먹든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 신도들은 너나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수박을 다시 집어 들고 먹어야 했다. 평생 소식을 했던 성철은 밥을 많이 먹는 행자들을 보면 혀를 찼다. “그렇게 먹고 배 안 터지나?”』
깨친 사람은 세속을 벗어나 홀로 고고한 은사(隱士)도 아니요, 신통력을 지닌 도사도 아니었다. 도를 얻었으면 하화중생(下化衆生)해야 했으니 결국 사람들 속에서 중생을 사랑하고 제도해야 했다. 백련암의 성철은 말씀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남을 위해 살라고 일렀다.
“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를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승려들에게도 목탁 장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이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법을 전하여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목탁을 두드려 부처님 앞에서 명 빌고 복 비는 도구로 활용하면 바로 목탁 장사가 되는 것이었다. 성철은 이를 꾸짖었다.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명복을 빌어주는 불공에서 벗어나 남을 도와주는 참 불공을 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 불교의 새싹이 트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철은 불공은 남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성철은 제자와 신도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마산에 사는 한 신도가 추석을 맞아 가난한 사람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쌀을 트럭에 가득 싣고 가난한 집을 찾아가 나눠주고 숨어버렸다. 그러자 기자들이 ‘얼굴 없는 선행’이라며 추적에 나섰고, 결국 그 신도를 찾아내 대서특필했다. 성철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신도가 성철을 찾아오자 대뜸 쏘아붙였다.
“신문에 낼 자료를 장만했지?”
“아무리 숨어도 결국 들켜버렸습니다.”
“아무리 캐물어도 발목을 잡히지 말아야 불공이지, 남이 알면 불공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성철은 진정한 불공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행하는 노인 이야기도 해줬다.
어느 마을에 부자 노인이 불공을 많이 했다. 그러자 이웃 청년이 와서 인사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그토록 남을 도와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발끈해서 꾸짖었다.
“이런 고얀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단 말인가. 남을 돕는 것은 귀 울림과 같은 것이야. 자기 귀 우는 소리를 어찌 남이 듣게 한다는 말인가. 그런 소릴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게.”
실상 남 몰래 남을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남을 도와도 도왔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아야 진정한 불공이었다.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숭고함 같은 것이 마음속에 남아있다면 진정한 보살도를 행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철은 곧잘 ‘자신을 속이지 말라[不欺自心]’고 일렀다.
성철은 또 가난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도를 배우려면 마땅히 가난함부터 먼저 배우라[學道先須學貧]’라는 조사들의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중생이란 그 살림이 부자입니다. 8만 4천석이나 되는 온갖 번뇌가 창고마다 가득가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고마다 가득 찬 번뇌를 다 쓰지 못하고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하며 해탈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답게 도를 배우려면 8만 4천석이나 되는 번뇌의 곳집을 다 비워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할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만 4천석이나 되는 번뇌를 다 내버리고 나면 참으로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텅텅 빈 창고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실제로 진공(眞空)을 먼저 깨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가난한 진공, 이것은 가난한 것도 없는 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도를 닦음에 있어서는 가난한 것부터 먼저 배우라는 것인데 그것은 번뇌망상을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철 ‘증도가 강설’)
재물에 대한 욕심 또한 번뇌망상에서 비롯되었다. 성철은 예전 스님들이 진정한 가난을 가르칠 때 인용했던 경구를 자주 얘기했다.
‘지난해에는 송곳 세울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도 없다(去年無錐地 今年錐也無).’
지난해에는 번뇌망상을 모두 버려서 송곳마저 들어설 수 없게 되었지만 가난을 의식하는 송곳이라는 물건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송곳마저 버려 ‘완전한 가난’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비우고 또 비워서 가난의 경계까지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밖으로는 모든 물질을, 안으로는 번뇌망상을 다 버려서 안팎이 함께 가난해질 때 비로소 성불을 이룰 수 있다고 일렀다.
“금은보화라는 패물을 지니고 있으면 재물에 대한 욕심이 늘 붙어 있어서 마음속의 탐심을 버릴 수 없게 됩니다. 내 마음 속의 탐심을 버리려면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금은보화 같은 물건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방거사(龐居士)는 자기의 그 많은 모든 재산을 배에 싣고 가서 동정호(洞庭湖)에 버리고는 대조리를 만들어서 장에 갖다 팔아다가 나날의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밖으로는 모든 물질까지도 다 버리는 동시에 안으로는 번뇌망상을 다 버리게 되면 안팎이 함께 가난하게 됩니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가난뱅이가 된다면 모든 것이 공해서 거기에는 항사묘용(恒沙妙用)이 현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견성이며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안팎으로 가난한 것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증도가 강설’)
성철은 ‘증도가’ 구절을 인용하여 진정한 가난에 대해 설했다.
‘가난한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은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藏無價珍).’
안팎이 가난하니 몸에 누더기를 걸쳐도 마음속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를 지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부터 배워야한다는 고불고조의 말씀을 철칙으로 삼아 공부하라고 일렀다.
성철은 일찍이 만공 스님에게서 들은 ‘가난’ 얘기도 자주 입에 올렸다. 만공이 처음 정혜사에 살 때는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다. 모두 탁발로 연명했는데, 그래도 한 철 지나면 ‘한 소식’ 했다는 수좌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신도가 생기고 좋은 절 짓고, 양식도 꽁보리밥 대신 쌀밥을 먹으니 공부 제대로 했다는 사람이 안 나오더라는 것이다. 물질이 풍요로우면 참수행 풍조가 사라져 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시주물 받기를 독화살인 듯 피하고, 부귀와 영화는 원수 보듯 경계하라고 일렀다.
“땀 흘리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만사불성(萬事不成)이다. 예로부터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감을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의복을 받지 말며,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인의 음식을 얻어먹지 말라고 경계했다. 이러한 결심 없이는 대도는 성취 못하니, 그러므로 잊지 말고 잊지 말자.”
출가자에게는 철저한 걸사(乞士)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걸사정신이란 무소유를 근본으로 일의일발(一衣一鉢), 즉 옷 한 벌에 밥그릇 하나에 의지하여 살라고 일렀다.
지금도 백련암 식구들이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해 하안거 백중을 맞아 장에서 수박을 50덩이 넘게 사왔다. 신도들과 일꾼들이 백련암까지 수박을 져 올렸다. 골짜기 시원한 물에 수박을 담가 두었다가 다음날 대중공양을 했다.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아비라기도를 올렸던 대중들이 시원한 수박을 먹는 것은 비길 데 없는 즐거움이었다. 수박을 먹고 모두 기도에 들어간 지 30분이 되었을까. 성철의 불벼락이 떨어졌다.
“기도하는 사람 전부 마당에 모이라케라!”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사람들이 마당에 모였다. 노한 성철의 얼굴은 실로 무서웠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수박 껍질에서 사단이 났다. 끝까지 먹지 않고 버려서 붉은 속살이 남아 있었다.
“돈은 너희 돈으로 샀지만 먹기는 농부들 정성을 생각하고 먹어야지. 반도 안 먹고 버렸으니 기도하지 말고 싹 다 가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아놓은 수박을 다시 꺼내 먹든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
신도들은 너나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수박을 다시 집어 들고 먹어야 했다.
평생 소식을 했던 성철은 밥을 많이 먹는 행자들을 보면 혀를 찼다.
“그렇게 먹고 배 안 터지나?”
한창 먹을 나이, 먹는 걸로 꾸중을 들으니 참으로 서운했다. 그러나 그러면서 제자들은 또 다른 의미의 가난을 배워갔다. 백련암에는 소화제가 없었다. 많이 먹고 배탈이 나면 불벼락이 떨어졌다.
“산에서 뭘 처먹었으면 배탈이 나는가.”
성철은 깁고 또 기운 누더기를 입고 지냈다. 출가해서 옷 두벌로 육신을 감쌌을 뿐이었다.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야반삼경에 다 떨어진 걸망 하나 지고, 달빛 수북한 논두렁길을 걷다가, 차가운 논두렁을 베개 삼아 베고 푸른 별빛을 바라다보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조금이라도 수행자의 모습에 가깝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5. 종정이란 고깔모자를 쓰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려 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외치며 나름 사회적 지탄을 받는 무리를 골라 정조준했다. 이때 ‘만만한’ 과녁이 불교였다.”』
1980년 10월27일 새벽,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사찰에 난입했다.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을 연행했다. ‘10·27법난’의 시작이었다. 명분은 불교계 정화였다. 10월 마지막 날에는 군인 3만 2000여명을 풀어 전국 사찰과 암자 5731곳을 뒤졌다. 군홧발로 법당을 짓밟았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까지 수색을 당했다. 조계종의 상징이며 불교계 성지인 봉암사에도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전두환 대통령을 지지하라는 신군부의 강요를 거절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서빙고 지하실에 끌려가 27일간 감금당했고 결국 총무원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신군부 군인들은 빨갱이와 깡패, 그리고 불순분자를 가려내겠다며 승려 1776명을 붙잡아 갔다. 승복을 벗기고 죄수복으로 갈아입혔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몽둥이로 내리쳤다. 누구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고, 누구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또 누구는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내보여야 했고, 또 누구는 감금당한 채 강제로 참선 교육을 받아야 했다.
공포심에,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지만 부처님은 멀리 계셨다. 부처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어찌 가피를 바라겠는가. 석불도 목불도 철불도 인간이 그 앞에서 절을 올릴 때만 부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려 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외치며 나름 사회적 지탄을 받는 무리를 골라 정조준했다. 이때 ‘만만한’ 과녁이 불교였다. ‘정화’라는 깃발을 내걸고 비구와 대처승이 그토록 치열하게, 또 지루하게 싸웠건만 다시 정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부정한 자들이 총칼을 들고.
신군부 정권이 불교계를 만만하게 여긴 것은 이 땅에 불교가 제대로 서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화운동은 1970년 1월 대처승들의 태고종 창종으로 일단락 됐지만 이후 조계종단은 밖이 아닌 안에서 서로 싸웠다. 끊임없이 패를 나눠 종권다툼을 벌였다. 또 승려들이 잇단 비리에 연루되어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중앙종회에서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김대심 등 20여명의 승려들이 총무원을 점거하고 종권을 탈취하려는 해괴한 일도 발생했다. 욕심이 다른 욕심을 나무랐다. 신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종단의 앞날을 걱정했다.
종정, 총무원장, 종회 구성원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 싸웠다. 또 문중 간에 감투를 놓고 으르렁거렸다. ‘절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 했지만 말뿐이었다. 그렇다보니 다시 외부세력을 끌어들여야 했다. 당연히 권력의 손을 탔다. 불교계 내부의 인적 손실도 컸다. 명망이 높은 큰스님들까지 분규에 휘말려 이름에 오물이 묻었다. 총무원장이 구속되고, 종정 추대를 취소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찰을 강제로 점거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그 와중에 폭력이 난무했다. 자비를 앞세운 종교가 실제로는 힘을 규합해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불교를 바로세우겠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끌어들였고, 결국 그 폭력이 종단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었다. 인과응보였다. 일찍이 성철이 예견했던 대로였다.
“묵은 도둑 몰아내고 새도둑을 들였다.”
“똥덩어리를 놓고 똥개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구심점을 잃은 종단은 표류했고, 현안을 자율적으로 해결할 능력도 상실해버렸다. 너도나도 억울하다며 법에 호소했고, 줄지어 법원에 나가 재판을 받았다. 종단은 끝내 개운사파와 조계사파로 나뉘었다. 법원이 손을 들어주면 그것이 곧 종권이었다. 종권을 손에 쥐려 세속법에 의지해야 했으니 이 어찌 비루하지 않은가.
두 개로 쪼개진 조계종단은 급기야 1979년 부처님오신날 법회를 별도로 가졌다. 1980년 3월 겨우 종회의원 선출에 합의하고, 4월17일 전국 24개 교구에서 제6대 중앙종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여 69명의 종회의원을 선출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종회는 종정 선출을 둘러싸고 다시 내홍에 휩싸였다. 그리고 5월에는 개운사 측이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꼴을 지켜봐야하는 신도와 국민들은 참담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읽고 신군부가 거침없이 절로 들어간 것이다. 불교가 이처럼 철저하게 유린당했던 것은 불교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불교는 권력의 눈치를 보고 나아가 권력에 기대었다. 권력이 던져주는 당근에 길들여져 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민주화를 외치며 민중의 고통에 동참할 때 상대적으로 불교의 움직임은 매우 미약했다. 스님들의 추문만 들려왔다. 불교계 분열은 정권이 부추긴 탓도 있었다. 그래야 권력이 제 맘대로 끌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일반인들에게 관제종교로 치부되었다. 내부다툼으로 기력이 쇠진한 불교는 전혀 응집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불교의 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승단이 여법하게 운용될 때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났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내분으로 지쳐갔고, 결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아마 신군부 정권이 천주교와 개신교는 건드리기에 겁이 났을 것이다. 독재에 저항하며 키워온 내공이 만만찮았고, 투사들이 즐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체제순응적인 불교만 저들의 과녁이 되었다.
법난의 후유증은 더 무서웠다. 신군부 세력은 승려들의 비리를 조작하거나 부풀려서 세상에 내놓았다. 언론은 이를 여과 없이 받아 퍼뜨렸다. ‘낮엔 주지, 밤엔 요정’ ‘목탁 재벌’ 같은 제목이 등장했다. 갑자기 사찰은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사찰마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승복을 입고 거리를 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불자들이 떠나가고, 사찰은 점점 섬이 되어갔다. 가야산에도 군인들이 올라왔다. 소총 끝에 칼이 꽂혀 있었다. 청정도량 해인사는 그야말로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주지스님은 영문도 모른 채 산을 넘어 피해야 했다. 법당을 군인들이 에워쌌다. 군인들은 백련암까지 올라왔다. 권총을 찬 군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성철이가 누구야! 같이 가야겠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
참으로 무례했다. 성철은 산책을 나가고 없었다. 제자 원택이 둘러댔다.
“성철 스님은 아침산책을 나가시는데 산에 오르면 보통 한 두 시간은 걸립니다. 근데 뭔가 잘못 알고 온 것 같소. 이런 산속 암자에 사는 스님이 무슨 죄를 짓겠소?”
“상부 명령이요. 연행해가면 되는 거지 다른 것은 모릅니다.”
원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군인을 구슬렸다.
“그러면 그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쪽 상황을 큰절에 있는 상관에게 알리면 어떻겠소. 다시 명령을 받아보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러자 군인들도 지루하고 피곤했던지 어딘가로 전화를 한 후 이내 내려갔다. 원택이 서둘러 큰절로 내려가 보니 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도망치고 숨고 또 잡혀가고 해서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조계종단 구성원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봤다. 그 시선들은 간절하고도 절박했다. 가야산 해인총림, 그 속의 방장인 성철을 쳐다봤다. 백련암에는 가야산 호랑이 성철이 있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그 앞에서는 누구나 작아졌다. 법난을 당한 한국불교는 성철이 필요했다. 그러나 산문을 나서지 않는 성철을 누가 설득할 것인가. 도반 자운이 나섰다.
“제발 종정 안 한다는 말만 말아주시오.”
도반은 간청했다. 성철은 자운의 인자함에는 늘 약했다. 끝내 자운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내 이름을 가져다 써서 불교가 나아진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1981년 1월10일 정화중흥회의 체제의 원로회의는 성철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종정이 되었다. 세수 70세였다. 열흘 후인 1월20일 제6대 종정 취임식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종정이 없는 종정 취임식이 열리고, 취임 법어만 원로원장 영암 스님이 대신 읽었다. 종정을 상징하는 주장자와 불자(拂子)는 총무원장 성수 스님이 백련암으로 가져가 봉정했다. 그러자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
“성철 스님이 종정직을 거부했다.”
“취임 법어도 가짜라더라.”
결국 종단은 성철이 종정의 불자를 받는 사진을 공개해야 했다. 성철의 종정 취임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인연의 파장을 불러왔다. 성철은 은둔의 고승에서 일약 국민의 선승으로 솟아올랐다. 배우가 하루아침에 국민스타로 떠오른 것과 비견할 수 있었다. 일대 사건이었다.
백련암을 찾은 종단 간부들에게 종정 성철이 일렀다.
“출가자에게는 출가의 본분이 있습니다. 자기 내부에 있는 진실한 자기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부터 제발 싸우지 마시오. 싸움하다가 타율적 정화를 당한 것 아니오. 제발 온갖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시오.”
산 속의 종정 성철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썼지만, 내 사는 것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
그 후 가야산 호랑이는 산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산속 호령은 멀리 뻗어나가 비가 되고 바람이 되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0호 / 2016년 4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