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6.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일컬음이었고, 그 안에는 중도사상의 진수가 들어있었다.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것은, 깨끗한 거울 가운데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이 그대로 비치고 푸른 것이 있으면 푸른 것이 그대로 비치고, 산을 비추면 산이 그대로 비치고 물을 비추면 물이 그대로 비치어서 조금도 착오 없이 바로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
성철의 글이 생애 처음으로 신문(‘불교신문’ 12월 21일자 창간호, 12월 28일자 제2호)에 실렸다. ‘한국불교의 전통과 전망’이란 제목의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이었다.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고 조계종 기획위원들이 백련암을 찾아가 면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위기의 한국 불교가 다시 살아날 길을 물었고, 이에 성철이 답한 것이었다. 10·27법난이 있은 지 거의 두 달 만이었다. 아마 종정이란 고깔을 쓰기로 하고 종단의 기획위원들과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철은 종단 혁신의 요체는 승려자질 향상을 위한 교육이라고 역설했다. ‘절집 지붕 기왓장을 팔아서라도 공부시켜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다시 피력했다. 승려가 중생을 교화하는 민중의 지도자가 되려면 전문적인 불교지식과 수행력을 겸비해야 했다. 이에 승려가 되는 문턱을 높여 교육과 수도를 엄격히 시키자고 제안했다. 성철은 종단의 안이 허약하니 밖에서 불교를 하찮게 본다며 중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산중에서 또는 포교당에서 목탁이나 치고 앉아 잿밥 싸움이나 하는 식의 불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승가대학의 교육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철저한 신행 교육이 되도록 해야 한다. 철저한 신행교육이 없으면 속인이 되고 만다. 예를 들자면 일제강점기에 각 사찰에서 일본 유학을 200명 가량 시켰는데 졸업 후에는 모두 대처를 하고 말았다. 노스님들께서는 대학이 내 상좌 다 잡아먹었다고 대학이 원수다 하고 한탄하셨다 한다. 또 동국대 종비생교육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지식만 가르치고 중노릇(신행교육)을 철저히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승풍을 바로잡기 위해 성철은 지식보다 수행을 더 강조하고 있다. 또 승가대학 및 총림의 설립과 운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이와 별도로 한국불교의 은사제도를 개선하라는 항목이 눈에 띈다. 글의 흐름에는 다소 동떨어졌음에도 이를 중간에 삽입하여 강조한 것은 파벌싸움으로 척박해진 종단의 현실을 직시했다고 보여진다.
“은사제도- 문중 파벌 등 폐습과 세속적인 정(情)에 매달리는 등 병폐가 많기 때문에 은사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좋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울 경우에는 상좌는 승가대학 졸업당시 전국적으로 은사될만한 스님의 명단을 작성하여 배정하는 식으로 한다.”
사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병폐는 승려들이 같은 문(門) 아래 똘똘 뭉쳐 세력화함이었다. 스승은 법 위에 있었다. 자신들의 스승은 높임을 받아야 하고, 그래야 자신들도 높아진다고 여겼다. 결국 다툼의 뿌리에 문중이 있었다. 성철은 그런 폐단을 고쳐보려 했다. 성철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큰절의 요직을 맡지 말라 이른 것도 이런 세력화를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철은 또 투명하고도 공정한 ‘중앙 통제’의 재정 집행을 주장했다. 국가의 수입을 국고로 관리하듯, 또 가톨릭의 경우 성당의 전 수입을 중앙에서 관리하듯 불교도 모든 수입을 중앙에서 투명하게 거두어 나누자고 촉구했다. 도대체 중이 왜 돈을 관리해서 자신의 사찰에 근심덩어리를 쌓아놓느냐는 일갈이었다.
“돈 많은 절 주지 등 몇몇이 나누어 먹는 식으로 하면 불평불만이 생기고 서로 좋은 절의 주지를 하려는 암투가 없어지지 않는다. 공부하고 포교할 생각은 없고 주지 될 생각만 하게 된다. 결국 사찰재산과 수입의 개인적 분산 관리의 현 체제가 승려들의 비행, 부정, 암투의 원흉이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승려의 비행을 근본적으로 막고 사찰수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불교중흥을 이루도록 제도적 개혁을 해야 한다.”
성철은 그러면서 먼 앞날을 내다보고 사심 없이 일대혁신을 하자고 촉구했다. 적당히 현상유지나 한다면 결국 종단은 망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글을 맺었다. 그렇다면 그 후 문중 파벌싸움은 줄었는가? 재정의 중앙 통제는 투명하게 이뤄지고 있는가? 조계종단은 흥했는가, 망했는가? 10·27 법난을 지켜본 부처님들이, 산천초목들이 묻고 있다.
조계종 종정 성철은 백련암에서 취임 법어만을 내려 보냈다. 그 법어는 단번에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구절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알 듯 하면서도 모르겠고, 쉬운 듯 어려웠다. ‘산은 산 물은 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어찌 보면 쿠데타와 하극상으로 정권을 찬탈한 무리를 향해 던진 돌팔매처럼 보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말함과 동시에 당시 전두환 정권을 향해 ‘진실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니 참회하고 반성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경준 동국대 교수)
또 시대정신을 잃어버린 세태를 꼬집는 은유이고, 근본을 잃어버린 사회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상식이 승리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필귀정의 희망이기도 했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일컬음이었고, 그 안에는 중도사상의 진수가 들어있었다.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것은, 깨끗한 거울 가운데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이 그대로 비치고 푸른 것이 있으면 푸른 것이 그대로 비치고, 산을 비추면 산이 그대로 비치고 물을 비추면 물이 그대로 비치어서 조금도 착오 없이 바로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철은 ‘백일법문’에서 “체(體)에서 볼 때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용(用)에서 볼 때는 ‘분명하고 밝게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니, 전자는 정(定)을 말하며 쌍차(雙遮)를 가리킨 것이고 후자는 혜(慧)를 말하며 쌍조(雙照)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니 곧 한번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大死却活] 바로 비치는 것을 분명하고 밝게 보자는 말이었다. 눈을 뜨고 보면 자기가 천지개벽 전부터 이미 성불했으니 결국 자신의 본성을 보라는 것이었다.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진리의 혜안을 지닌 자만이 사물의 핵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마음을 깨쳐 세상을 바로 보면 만물이 관음이었다. 우리의 실상을 바로 보면 우리 사는 지상이 곧 극락이니 행복을 다른 데서 구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한국 불교계에는 경종이었고, 사바대중에게는 희망이었다.
세간의 이목이 백련암에 집중됐다. 장좌불와와 10년 동구불출 이야기가 퍼지고 성철의 행적이 신비롭게 포장되어 더러는 부풀려진 채 유통되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런 취재요청에 응할 성철이 아니었다. 그러자 성철을 만나지도 않은 채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언론사 사이에 일대 취재경쟁이 벌어졌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온갖 연을 동원했다. 성철을 친견한 인터뷰는 어느 특종 못지않게 시선을 끌었다.
기자들의 성화에 제자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저마다 말씀 한 마디만 듣겠다고 지극정성이었다. 무작정 기자들을 따돌리기도 미안했다. 원택과 원영은 한 가지 꾀를 냈다. 묘책은 아니지만 궁여지책으로는 그럴듯했다.
“법문집을 만들기 위해 정리해둔 원고 중에서 일부를 발췌해 주자.”
한 시간 분량의 법문 원고를 기자에게 내줬다. 그리고 그 원고는 주간지에 ‘성철 종정 최초 법문 공개’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됐다. 그러자 절집에 일대 회오리가 일었다. 전국 사찰에서 주지들의 항의 전화가 해인사로, 백련암으로 빗발쳤다. 요지는 성철의 법문이 승려들의 밥통을 깨버렸고 나아가 승려들의 위상을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종정이면 종정답게 승려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지 당신만 잘났다고 하면 어찌 되냐고 대들었다. 성철의 제자들도 욕을 먹어야 했다. 법문은 이렇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어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여러 가지 죄만 짓는가? 누구든지 머리 깎고 가사와 장삼을 빌어 입고 승려의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와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쳐서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다 도적놈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부처님 가까이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못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逢]’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까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 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 해야겠습니까. 그것은 절이 아니라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겠지요.”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1호 / 2016년 4월 27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7. “옳은 편도 들지 말라”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분리해야 될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이념의 산실이라고 봅니다. 정치이념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종교는 정치의 정신적인 근본 공급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어, 모든 정치 이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중의 ‘살아있는 전설’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정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지만 가야산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일체의 현실을 살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아픔이었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보듬는 시국발언을 고대했지만 성철은 이를 외면했다. 그러자 현실은 각박하고 시국은 수상하여 내일을 알 수 없는데 뜬구름만 잡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고, 불교를 탄압했던 극악무도한 세력에게 죽비를 내려칠 것이라는 기대는 번번이 허물어졌다. 부처님오신날에도, 새해에도 말씀을 받으러 간 사람들은 실망했다. 때가 되면 성철의 입만 쳐다봤지만 시국 발언은 없었다. 당시 시의적절하게 권력을 꾸짖던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비교하며 성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성철은 이에 일체의 반응을 하지 않았다. 종정 신년법어나 초파일법어에도 사회적 메시지는 없었다.
“눈앞에는 평화와 자유, 환희와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들판에 가득 찬 황금물결은 우리 생활의 곳집이요, 공장을 뒤흔드는 기계 소리는 우리 앞날의 희망입니다.” (1982년 신년법어)
“모순과 갈등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평화와 자유로 수놓은 행복의 물결이 항상 넘쳐흐르는 탕탕무애한 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 (1983년 신년법어)
어느 법어에도 현실의 아픔은 들어있지 않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독재정권을 미화한다는 오해를 살만도 했다. 물론 성철의 법어가 진리를 향해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살기가 스며들고, 젊은이들의 절규가 거리에 넘쳐나는데 종정 성철의 법어는 한없이 한가했다. 종단 내부에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성철에게는 역대 최고 지도자들과는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권력과 거리 두기’였다. 불의한 정권을 향해 호통을 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싸지도 않았다. 성철의 행적을 추적해 보건데 그것은 신념이었다. 시국과 관련한 말씀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체면치레로라도 한마디 할 수 있으련만 성철은 일체 말이 없었다.
종교가 정치에 예속되는 순간 종교는 ‘으뜸 가르침’이 아니었다. 권력과 타협하는 순간 권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권력의 눈치를 봐야하고 종내는 권력에 엎드릴 수밖에 없으니 종교의 타락이었다. 선승 성철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정치’를 멀리했다.
1977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했던 대통령이 귀경길에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도 성철은 대통령 박정희를 만나지 않았다. 관리들과 정보부 요원들, 그리고 나중에는 큰절 해인사 스님들까지 백련암에 올라와 방장인 성철의 영접을 간청했다.
“대통령이 오신다니 큰스님이 큰절까지 내려오셔서 맞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할 뿐이었다.
“산에 사는 중일 뿐, 일부러 대통령 만날 일은 없을 듯하네.”
성철은 끝내 큰절로 내려가지 않았다.
또 세력이 집권한 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하려 했을 때도 이를 거절했다.
“그런 재주도 없고 생각 또한 없어서 할 수 없다.”
성철은 종교가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정 스님과의 대화에서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1982년 새해 법정이 종정인 성철에게 물었다.
“한국불교 교단은 정치권력 앞에 너무 나약하게 처신해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종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정치권력과 종교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분리해야 될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이념의 산실이라고 봅니다. 정치이념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종교는 정치의 정신적인 근본 공급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어, 모든 정치 이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가 정치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서로 전도된 것이어서 국가적으로 큰 위험이 오게 되며 결국에는 파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법정은 현실을 꾸짖어달라고 우회적으로 촉구했고, 그걸 모를 성철도 아니었다. 이를 완곡히 거부한 셈이었다. 성철은 법정을 아꼈다. ‘펜대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원론적인 얘기를 꺼내 ‘시국에 침묵하는 의미를 당신만은 알아주시오’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옳은 편도 들지 말라.”
그러면서도 덧붙였다.
“나는 아무 편도 들지 않겠다. 아무편도 안 드는 게 한쪽을 편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들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성철은 종단과 승려들에게는 엄했다. 성철은 알고 있었다. 모든 문제는 불교 안에 있다는 것을. 불교는 그동안 권력과 야합했고, 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무 곳에서나 목탁을 두드렸다. 실로 그 처지가 비루했다. 조선시대는 도성 안 출입도 하지 못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왜색 옷을 걸치고 난장판을 기웃거렸으며, 해방 후에도 권력에 ‘존재’를 구걸해야 했다. 성철 스님은 불교가 홀로 서지 않고서는 권력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깨어있으라고 죽비를 밖이 아닌 안으로 내리친 것이다.
어쩌면 산중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세상에 가장 깊숙이 나아가고 있었다. 불교의 진면목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러서는 것이었으니 제자리를 지켜 현실과 불교계를 깨웠던 것이다.
“근현대 스님들 가운데, 성철 스님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몸은 철저히 은둔한 듯 보였어도, 그의 삶과 가르침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역설적 삶이다. 성철 스님은 철저하게 은둔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설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김성철, ‘간디와 성철을 읽고’)
성철은 또한 종단의 세속적 인기몰이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1984년 4월 총무원 간부들이 성철의 서울행을 간절히 요청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장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개신교계는 부활절을 맞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고, 언론은 참석인원을 헤아려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00만 인파가 모이는 집회를 보며 불교계도 뭔가 하자는 분위기였다.
“우리도 부처님오신날에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갖자.”
대규모 집회 구상은 조계종 총무원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졌다. 그렇게 하려면 성철이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들이 보기에 성철은 흥행에 꼭 필요한 ‘은둔의 대스타’였다. 그러나 종정 성철은 이를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산승이 산에 있어야지. 내가 서울 가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산을 지키고 여기 그냥 앉아 있는 게 교단에 보탬이 되는 줄은 왜 모르는가.”
결국 불교의 여의도 집회는 열리지 못했다. 설사 수백만 불도들이 모였다고 해도 무엇을 할 것인가. 떡 벌어진 법회를 해서 타 종교와 세(勢)대결을 하자는 것이니 참으로 좁은 소견이며 결코 부처님께 아뢸 일이 아니었다. 그런 행위 자체가 ‘정치적’이었다. 이런 일련의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 원택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종정 취임 초기에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대중 앞에 언제쯤 서시겠냐는 뜻을 묻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정휴 스님이 그렇게 여쭈었더니 큰스님은 ‘금강경에서 여래를 형상이나 소리로써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록 육신은 이 가야산에 있으나 내 원력은 중생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시국 발언, 여의도 초파일 집회 권유 등을 한사코 내치시면서 산중 수행승으로 머무르셨던 건 결국 한국불교의 질곡을 타개하기 위한 성철 스님 특유의 돌파구였던 셈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았으면 불교를 감히 누가 침탈하겠는가. 법난보다 법난을 불러온 실체를 살펴봐야 했다. 모든 것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음이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했다.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염원이 뜨거울 때 성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간악한 무리들에게 간담이 서늘해질 추상같은 호통을 내릴 만도 했지만 침묵했다. 10.27 법난에 대해서도 밖으로는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신군부의 행태에 주장자를 들지 않았다. 다만 안으로 죽비를 들었다. 승려의 본래 모습이 무엇이냐고 무섭게 다그쳤다.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이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백련암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속지 마시오. 나는 그저 종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썼을 뿐이오. 나를 보지 말고 당신의 본래면목을 보시오.”
‘내 말도 믿지 말라’는 선지식에게 민주화 투쟁에 말을 보태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또 다른 욕심이었다. 당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어를 내렸다면 대중은 더 자극성이 강한 또 다른 법어를 원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선승 성철은 어찌됐을까. 한번쯤 ‘우리는 인기인을 얻는 대신 큰 어른을 잃었을 것’이란 작가 박완서의 말도 음미해봄직하다. 성철은 순수한 불교정신을 이렇게 설했다.
“세속을 불교화해야지, 불교가 세속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승려는 세상이 아무리 서(西)로 가더라도 바른 길이 동(東)이라면 동으로 가도록 계속 빛을 발해야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세속화되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 같이 익사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자신을 물에 빠뜨리지 않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불교계가 많이 변했다. 시위대가 피난처로 곧잘 사찰을 찾는다. 혹자는 10·27 법난으로 정권과 날을 세운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당당해졌다는 말이다. 안으로 내공이 쌓여 마음이 가난해지고, 결국 그래서 남을 위해 살려는 작은 서원들이 뭉쳐있음이다. 일반 국민들이 불교를 떠올릴 때 그래도 산속에서 기도하는 선승을 연상하는 것은 누구의 공덕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성철의 원력을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8. 한글법어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나다
『“‘큰스님, 스님께서는 산중의 스님이 아니십니다. 이제 공인이십니다. 해인사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 모든 국민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한문투의 법어는 세상사람 누가 알겠습니까.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원택은 이렇듯 ‘감히’ 고하고 불호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성철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제자의 의견을 선뜻 들어줬다. ‘그래? 그럼 내가 다시 써보지.’”』
1981년 조계종 종정이 되고 나서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법어를 내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제자들은 이것마저 뿌리칠까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성철은 선선히 이를 받아들였다. 제자들은 어떤 법어를 내릴지 궁금했다. 이윽고 성철이 법어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것이 초파일 법어다.”
온통 한문 투성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제자 원택은 뭔가 아쉬웠다. 처음으로 내리는 초파일 법어였기에 불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관심을 가질만했다. 하지만 한문법어는 국민들이 쉽게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특별한 날에 발표되는 종정 법어는 스님과 신도를 상대로 하는 산중 법어와는 달라야 했다. 원택은 평소 종정의 한문법어에 대해서 아쉬움을 지니고 있던 참이었다.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스승에게 건의했다.
“큰스님, 스님께서는 산중의 스님이 아니십니다. 이제 공인이십니다. 해인사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 모든 국민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한문투의 법어는 세상사람 누가 알겠습니까.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원택은 이렇듯 ‘감히’ 고하고 불호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성철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제자의 의견을 선뜻 들어줬다.
“그래? 그럼 내가 다시 써보지.”
성철은 다시 염화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두 시간이 지난 후 원택을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은 한글, 반은 한문이었다. 내친김에 제자는 다시 간청을 드렸다.
“처음보다 이해가 쉽지만, 말 자체를 완전히 한글체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성철은 이번에도 야단을 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혼잣말에도 전혀 짜증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놈 참, 사람 힘들게 하네. 다시 생각해보지.”
다음날 아침 마침내 종정의 첫 한글 법어가 탄생했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일 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의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
초파일에 탄생한, 종정이 내린 최초의 한글 법어였다. 이듬해 부처님오신날에도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한글 법어를 발표했다. 이 법어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빛나고, 또 앞으로도 빛날 진리의 펼침이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일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한다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끝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끝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을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 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보고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성철의 법어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한글의 힘이기도 했다. 작가 최인호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마음 상한 일이 있어 남도여행길에 나선 최인호는 가판대에서 무심코 신문을 집어 들었다. 마침 그 신문에 종정 성철의 법어가 실려 있었다. 그는 ‘부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러 오셨다’는 대목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는 성철의 사진을 구해 책상 옆에 붙여놓고 ‘성철 스님이 누구인지’ 들여다보고 다시 들여다봤다고 한다.
한국불교는 사실 한문이란 틀에 갇혀있었다. 한자를 모르면 누구도 심오한 세계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경은 몇 사람의 머릿속에서 맴돌 뿐 대중 속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선(禪)을 논할 때도 일반인들은 명상 수준으로 막연히 이해할 뿐이었다.
말로는 불교 대중화를 외쳤지만 불교는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제대로 된 한글경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경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어느 산사나 박물관에 처박혀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알아야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불교는 ‘알 수 없는 종교’였다. 승려들의 기행이나 이적 등만 전해졌다. 자연 불교는 아낙들이 산속에서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쯤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무속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일찍이 용성 스님은 3·1운동을 주도하고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깨달은 바가 많았다. 기독교의 성경은 한글로 번역이 되어 감옥에서도 누구나 쉽게 읽었다. 하지만 불경은 한자로 되어있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용성은 경전이 한문이란 감옥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갇혀있는 자신보다 누구도 보지 않는 경전이, 이를 방치하는 불교 현실이 더 서글펐다. 용성은 출소하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겠다는 원을 세웠다. 실제로 그 후 용성은 불교포교의 현대화를 주창하며 역경사업에 앞장섰다. 1921년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조선의 글과 조선의 말이 있을 뿐이다.”
스님은 수십 권의 경전을 번역해서 수십만 권의 한글경전을 보급했다. 이렇게 보면 용성-동산-성철로 이어지는 범어문중은 경전 및 법문의 한글화에 각별히 노력한 셈이었다.
이 땅의 승려들은 한문경전을 한글로 바꾸는 것에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찌 보면 어려운 한문에 자신들의 얕은 실력을 은폐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파하는 것이었다. 경전이 한글이건 한문이건, 또 외래어이건 중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한글을 쓰면 경전도 한글로 쓰여져야 한다.
물론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한문에 정통하면서도 우리글을 깊고 바르게 아는 인재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또한 막대한 자금이 뒤를 받쳐줘야 한다. 따라서 역경사업은 개인이나 어느 사찰에서 감당하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다. 종단 또는 국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일들이다.
성철이 제자들에게 일본 불서를 읽게 한 것도 일본 불교계가 일찍이 경전을 알기 쉽게 일본어로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한글법어를 선뜻 수락한 것도 ‘진리의 한글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땅에서 한글법어의 탄생은 한편의 드라마 같은 것이었다. 한문투의 법어가 당연시됐던 오랜 관행을 깨뜨리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성철이 한글법어를 내리자 혹시 대필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교계의 다른 문중에서도 의심의 눈초리로 흘끔거렸다. 그러나 성철은 직접 한글법어를 작성했다. 다만 맞춤법이 다소 틀렸고 그걸 제자들이 고쳤을 뿐이었다.
사실 성철은 우리말과 글을 구사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그것은 폭넓은 독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백일법문이나 다른 저서들을 보면 한글로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쉽고도 깊이 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런 대필 논란은 성철의 한글법어 육필이 공개됨으로써 일거에 해소되었다. 성철은 한글로 계속 법어를 내렸고, 쉽게 풀어쓴 불교의 진수는 그때마다 빛이 났다. 성철의 한글법어는 누리를 밝히는 또 다른 등이었다.
“난타가 피운 한 잔의 기름 등은 오늘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피운 과거의 등불도 오늘 밝게 빛나고 미래에도 빛날 것입니다. 허공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으며 청정무구한 우리들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등불은 삼라만상을 밝게 비추니 칠흑 같은 어둠은 사라지고 환희의 세계가 열리고 있습니다. (……) 생일을 맞은 부처님보다 뭇 중생이 더욱 즐겁습니다. 본래 부처님이 중생 위해 사바에 오셨으니 중생이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부처님도 중생으로 와서 부처 되었으니 오늘은 중생들의 생일입니다. 이는 곧 중생이 부처라는 말이요, 천지일근(天地一根) 만물일체(萬物一體)로서 일체중생은 평등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1992년 초파일법어)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3호 / 2016년 5월 11일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9. 밥값을 하다
『“책 두 권 냈으니 이제 부처님께 밥값을 했다. 이 책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면 바로 나를 아는 사람이지.”』
원택이 상기병에 걸렸다. 참선에 들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상기병은 갈 길 먼 수좌들의 정신을 쪼아댔다. 선승에게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덩어리였다. 원택은 할 수 없이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공부해보기로 했다. 백일법문 테이프를 얻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을 땐 뭔가 알겠는데 듣고 나면 그만이었다. 원택은 아예 법문을 노트에 받아쓰고 그걸 보면서 들었다. 그랬더니 이해가 빠르고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였다. 그렇게 백일법문을 옮겨 적었다.
원택은 스승 성철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뒷방에서 홀로 듣고 옮기며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철이 원택을 찾았다. 성철 주변을 맴돌던 제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행자가 뒷방에 있다고 하자 성철이 쫓아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원택은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적다가 화들짝 놀랐다. 결국 원택은 참선이 아닌 ‘테이프 법문 공부’를 하게 된 연유를 털어놓았다.
“네깐 놈이 뭘 알겠다고….”
크게 꾸짖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관대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표정은 싫지 않은듯했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 성철이 원택을 찾았다. “어디까지 받아 적었나?”
원택은 백일법문이 다 끝났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성철은 개당설법(開堂說法, 방장취임법문)을 정리해 오라고 일렀다. 원택은 쾌재를 부르며 그대로 옮겨서 가져갔다. 내심 칭찬을 기대했다. 하지만 원고를 보던 성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느 놈이 이 글을 옮겨 적었나.”
호통 소리가 커서 원택은 백련암 지붕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꼴도 보기 싫다, 어서 나가.”
원택은 다시 녹음기를 틀어 대조해봤다. 원고는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나서 성철이 다시 원고를 보자고 했다. 아무리 봐도 고칠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가져갔다. 성철은 이번에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또 이틀이 지나자 다시 원고를 가져와 보라고 했다. 원택은 또 한 자도 고치지 못했다. 똑같은 원고를 받아든 성철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너라는 놈은 참으로 실력이 없는가 보다. 그만큼 일렀으면 어딘가 좀 고쳐 와야 할 것 아닌가. 문장은 간결하게 정리해야지, 이리 늘어지면 누가 읽겠나. 안되겠다, 내일 새벽예불 마치고 내 방으로 와. 내가 직접 말해 줄 테니 너는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해라.”
그때서야 제자는 깨달았다. 성철은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 즉 직역이 아닌 의역을 원하고 있었다.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니 문장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무랐지만 말 속에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때 원택에게는 한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스님이 법문을 정리하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런데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구나.’
스승에게 죄송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스승의 뜻을 헤아리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상기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이 일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 어쩌면 부처님의 뜻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날부터 원택은 하루 한 시간씩 받아쓰기를 했다. 원택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스승의 선지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선 출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철은 새벽 구술을 빠뜨리지 않았다. 내심 그 시간을 기다리는 듯했다. 간혹 구술 중에 원택이 졸고 있으면 등짝을 두들겼다. 손길이 따뜻했다.
이렇게 법문을 옮긴 ‘본지풍광(本地風光)’과 성철이 직접 논술한 ‘선문정로(禪門正路)’ 원고가 완성되었다. ‘선문정로’는 돈오돈수를 불교의 핵심개념으로 설명했고, ‘본지풍광’에는 간화선 수행을 위한 100여 칙의 공안을 모아놓았다. 초고가 만들어지자 성철은 원택에게 법정을 찾아가보라 했다. 윤문(潤文)을 부탁한 것이다. 법정은 성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책이 나왔다. 원택은 스승보다 더 설다. 성철은 책을 받아들면서 한 마디 했다.
“오자는 없겠지?”
“법정 스님이 활자(活字)는 살아있는 거라서 오자 없는 책 만들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오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원택은 장담하고 물러나왔다. 서너 시간이 지났을 때 성철이 원택을 찾았다. 연화실 방문을 열자마자 성철이 책을 팽개쳤다. 원택이 펼쳐드니 스승이 잡아낸 오자가 쪽마다 수두룩했다.
“다음 판부터 모두 고치겠습니다.”
원택은 식은땀을 흘렸다. 책을 들고 출판사로 달려갔다. 그렇게 세상에 빛을 본 ‘선문정로’(1981년 출간) ‘본지풍광’(1982년 출간)을 성철은 어여삐 여겼다. 특히 ‘선문정로’는 후학들에게 책 제목대로 ‘선에 바르게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법정이 찾아와 ‘선문정로’를 펴낸 동기를 묻자 성철은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것은 불교 집안에 대한 경책이기도 했다.
“요즘에 와서 견성해 버리고 성불해 버린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견성성불에 그만 표준이 없어져 불교계에 큰 혼란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능력은 없지만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 표준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철은 고불고조들은 어떻게 공부해서 어떻게 성불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모아서 정리했다. 그것은 또 다른 돈오돈수의 설파였다. 성철이 원택에게 말했다.
“책 두 권 냈으니 이제 부처님께 밥값을 했다. 이 책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면 바로 나를 아는 사람이지.”
그 후에도 ‘돈오입도요문론 강설’(1986), ‘신심명 증도가 강설’(1986), ‘자기를 바로 봅시다’(1987), ‘돈황본 육조단경’(1988), ‘백일법문 상·하’(1992) 등을 펴냈다. 성철은 평소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써 선과 교를 하나로 꿰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철은 문자를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없애는 법을 문자를 통해 가르쳐주려 노력했다.
성철의 저서는 비매품이 아니었다. 스님의 저작물은 으레 공짜로 나눠주었고 이를 당연한 법보시로 여겼던 당시의 절집 관행을 깬 파격이었다. 성철의 책은 엄연히 정가가 붙어 유통되었다. 그것은 법정의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법정은 원택에게 ‘불서 비매품’ 관행에 대한 부작용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불교출판이 활성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절집 안에 유행인 법보시에 있다네. 신심 있는 사람이 책을 내어 공짜로 나누어주니 받는 사람도 귀한 줄 모르고 그저 그런 책이려니 하고 읽지 않게 된다네. 그러면 책을 낸 출판사도 손해고 결국은 불서 출판을 기피하게 되지. 또 그렇게 해서 책이 절판되면 그 다음엔 정작 책을 보려 해도 볼 수가 없다네. 그러니 성철 스님 책은 정가를 붙여 서점에 내놓도록 하게. 그러면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 손쉽게 서점에서 구해 읽을 수 있고, 또 정가를 붙여 내놓으니 그 책이 사라지지 않고 늘 독자 가까이에 있게 될 거야. 이런 장점이 있으니 큰스님께 잘 말씀드려서 정가를 붙여 서점에 내놓도록 하게.”
원택은 머리를 끄덕였다. 제자는 법정의 충언임을 내세워 성철에게 조심스레 책을 ‘팔자’는 의견을 드렸다. 그러자 성철은 의외로 선선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법정 스님과 좋게 의논해보지.”
이렇게 해서 성철의 책은 서점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거의 모든 책이 수십 쇄가 넘게 팔렸다. 자연 절판된 책은 없다. 지금도 선방 수좌에서부터 일반 신도, 또 불교를 알고 싶은 직장인과 학생들이 서점에서 끊임없이 집어 들고 있다.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이다.
성철이 직접 가려 뽑은 ‘선림고경총서’ 37권 간행은 그 산고가 무척 컸다. 이 또한 제자 원택의 역할이 컸다.
‘선문정로’가 출간되자 좀 어렵다는 반응이 있었지만 그 반향이 만만치 않았다. 마침 ‘선문정로’에 대해 발표해보겠다는 교수가 나타났다. 그 교수는 한국불교학회가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선문정로’에 나타난 성철 사상의 핵심을 설명하고 깨침의 바른 길을 나름대로 제시했다. 하지만 보조의 돈오점수 사상으로 무장한 학자들의 반격은 매서웠다.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세미나장에서 스승의 돈오돈수론이 깨지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한 원택은 마음이 무거웠다.
‘큰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은 해인사 일주문 밖을 한 발짝도 나서지 못했구나.’
학자들은 돈오돈수론에 일대 함포사격을 했던 것이다. 아무도 돈오돈수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백련암에 돌아온 원택은 성철에게 그 실상을 알려야 했다. 안마를 해 드리며 성철이 가장 기분 좋은 시간에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을 고했다.
“학회에 가보니 모두 보조사상을 연구한 박사들입니다. 해인사 골짜기에서 선종 전통사상이 돈오돈수라고 외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 사상을 뒷받침할 인재를 양성해야지 이러다간 나중에 큰일 나겠습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성철이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제자의 뺨을 때렸다.
“너 지금 인재양성이라고 했나. 이놈아, 내가 평생 인재양성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지 아나. 이놈아, 키울 인재가 없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너희들이라도 내 뜻을 알아 똑바로 살아줘야지, 다 머저리 곰 새끼들만 우글거리니 나도 별 수 없지.”
성철은 다시 제자의 뺨을 후려쳤다. 그날 원택은 인재양성이란 말로 스승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제자로서 스승의 사상을 제대로 전파하지 못하고 밥만 축내고 있으니 스승이 시퍼렇게 꾸짖은 ‘밥도둑’이 자신처럼 느껴졌다. 그때 원택은 어떻게든 스승의 사상을 세상에 전파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평생 이를 실천했다.
원택은 며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스승의 사상을 알아보는 인재는 없지만 돈오돈수론의 원천인 고불고조의 선어록은 있었다. 그것들을 모아서 불을 밝히면 될 듯싶었다. 원택이 조심스레 염화실 방문을 열었다.
“스님, 사람을 키우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신 역대 조사들의 어록 중에서 돈오돈수 사상을 주장한 것들을 모아서 널리 알리면 큰스님 사상의 울타리가 될 것 같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겠군.”
원택은 서둘러 30권 가량의 선종 서책을 정리해 목록을 가져갔다. 성철은 여기에 대여섯 권을 보탰다. 그렇게 목록을 확정했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발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제자들은 사람을 찾고 비용을 마련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마침내 선어록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성철 스님 법어집’ 11권과 함께 빛을 봤다. ‘임제록’ ‘운문록’ ‘위앙록’ ‘법안록’ ‘조동록’ ‘임간록’ ‘나호야록’ ‘총림선사’ ‘인천보감’ ‘운와기담’ ‘고애만록’ ‘산암잡록’ ‘벽암록’ ‘종용록’ 등의 선어록을 번역했다.
1993년 10월 완간 기념회를 가졌다. 준비에서 출간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원택은 출간기념회를 마치고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철이 말했다.
“수고했다.”
스승에게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원택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성철이 열반에 들기 한 달 전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4호 / 2016년 5월 18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0. 가야산의 퇴옹, 눈 푸른 납자를 기다리다
『“공부하다가 지견이 좀 생기면 고불고조를 뒷간 휴지쯤으로 취급하며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허나 말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출중한 변재와 지혜를 갖췄던 원오나 대혜도 오매일여에 미치지 못함이 병이라 했는데 네가 안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일러주지만 대부분 내 말을 긍정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중엔 돌아서며 욕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
성철은 환갑을 맞은 해부터 자신을 퇴옹(退翁)이라고 했다. 스스로 물러난 늙은이라 칭했지만 성철은 여전히 강건했다. 그런데 왜 퇴옹이라며 물러나 있었을까. 그것은 물러서서 제자리를 지키자는 자신과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성철은 백련암에만 머물렀다. 가야산이 그 옛날 성전암 동구불출의 철조망이었다. 거대한 바위를 두르고 꼼짝하지 않았다. 시인 고은의 말대로 ‘산을 나가는 길을 없애 버렸’으며 그런 성철을 사람들은 ‘멀리는 원효의 길이 있고 가까이는 경허와 만해의 길이 있건만 그런 선사들도 한 방망이로 타파한 납자 그 자체’로 받들었다.
사람들 발길이 큰절 해인사를 지나 백련암으로 향했다. 성철을 친견하려면 삼천배를 해야 했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성철은 백련암에서 언제나 진리의 횃불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밝혀놓고 있었다. 그 불빛을 찾아 세상이 백련암으로 들어왔다.
“가야산 높은 곳에서 은둔했던 성철 스님의 수행생활은 그분을 특별한 인물, 즉 중생이 자신의 희망과 기대를 한껏 투사하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성철 스님은 언론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그분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높기만 했다. (…) 가야산 호랑이는, 6·25전쟁부터 한반도에서 사라진 호랑이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존재가 되기에 이르렀다.” (서명원SJ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
선승들이 성철을 찾아왔다. 거의가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 받아 법맥을 잇겠다고 했다. 성철이 이를 마다할 리 없었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면 독대를 허락했다. 덕과 지혜가 스승을 능가해야 비로소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임제도 오도한 후에는 감히 스승 황벽의 뺨을 때리며 어린 아이 다루듯 하지 않았는가. 뛰어난 법기(法器)가 나타나 뺨을 때리면 그로써 한 세상이 열림 아니겠는가.
그러나 백련암에서의 법거량은 늘 싱겁게 끝이 났다. 성철은 가야산을 허물 듯한, 번개와 회오리 같은 임기응변의 기봉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대장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러는 성철의 무릎 아래서 병든 양처럼 굴었다. 또 더러는 엉뚱하게 대들었다. 동정일여의 경계에도 이르지 못했으면서 큰 소리 쳤다. 그럴 때면 성철은 무섭게 다그쳤다.
“너 지금 나하고 이야기하면서 화두는 잘되나?”
“스님, 화두가 문젭니까? 저는요, 좌복에 앉아있으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 청천하늘처럼 맑아서 마음이 편하기 이를 데 없는데 제가 왜 화두를 듭니까? 화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기에 빠진 것이지 진짜 참선이 아니다. 다 내버리고 그 자리에 화두가 들어서도록 다시 공부해라.”
“아닙니다. 스님이 틀렸습니다. 내 마음이 맑은데 무슨 공부를 다시 하라하십니까.”
이쯤 되면 성철의 노기가 폭발했다. 임제 ‘할’과 덕산 ‘방’으로 쫓아내 버렸다.
성철이 김룡사에 있을 때 처사 하나가 찾아왔다. 처사는 자리에 떡 앉으면 정에 들어서 일고여덟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린다고 했다. 자신의 경계를 스님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하니 답답하여 이렇게 찾아왔다고 했다.
“신선이 이렇게 좋을 수 있으며 대통령이 이렇게 좋을 수 있겠습니까?”
처사의 아만(我慢)이 가관이었다. 성철이 물었다.
“그래! 공부 많이 했구만. 하지만 그건 정에 든 병이지 깨친 게 아닌 것 같네. 꿈에도 그 경계가 있는가 없는가?”
처사는 순간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꿈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철은 몽둥이를 치켜들어 사정없이 내리쳤다.
“에이 도둑놈의 자식아. 공부라면 일여해야 하거늘, 꿈에도 없는 것을 공부했다고 하느냐.”
처사는 이내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었다. 이렇듯 성철은 마음과 몸의 변화를 견성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꾸짖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성철 자신도 수없이 헛것에 속았다. ‘깨쳤다!’ 하는 환희심도 며칠이 지나면 ‘깨쳤나?’ 하는 의심으로 바뀌었다. 그때의 열패감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깨쳤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그때마다 먼저 깨친 이의 몽둥이가 그리웠다. 그러나 성철에게 매를 때린 선지식은 없었다. 의심으로 의심을 지우며 홀로 경계를 무너뜨렸다.
“공부하다가 지견이 좀 생기면 고불고조를 뒷간 휴지쯤으로 취급하며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허나 말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출중한 변재와 지혜를 갖췄던 원오나 대혜도 오매일여에 미치지 못함이 병이라 했는데 네가 안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일러주지만 대부분 내 말을 긍정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중엔 돌아서며 욕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날 아무리 욕하고 부정하더라도 심하게 아파보면 그땐 내 생각이 나리라. 설령 지견이 하늘을 가리고 대지를 덮을 만큼 대단하고, 그 말솜씨가 천하 선지식을 꼼짝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원오나 대혜 스님 같은 이들의 예를 거울삼아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한다. 만일 몽중일여에 이르지 못했다면 깊이 참회하고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옛 스님들도 늘 하신 말씀이다. ‘죄 중에 사람을 죽이는 죄가 가장 크지만 공부니 수도니 한답시고 허송세월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하루에 만 명을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 (성철 ‘선문정로’)
어느 가을날이었다. 노승이 성철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인상이 온화했고, 태도는 단정했다. 잘게 퍼져있는 주름살이 속기(俗氣)를 지워버린 듯했다. 절 식구들이 열린 문으로 이를 지켜봤다. 이내 제자들이 염화실 방문을 닫았다. 노승이 입을 열었다.
“제가 깨달은 바 있어 찾아왔습니다. 다들 스님을 찾아가 보라 해서, 이렇게 세상의 끝에서 스님을 뵙습니다.”
노승은 성철에게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자 했다. 나이는 성철보다 많았다. 하지만 불가에서 젊고 늙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곧바로 성철이 주장자를 치켜들었다.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해야 한다.”
“예, 스님. 거짓은 없을 것입니다.”
“동정일여한가?”
“예. 화두를 한결같이 붙잡습니다.”
“그렇다면 꿈속에서도 일여한가?”
그러자 노승은 말이 없었다. 성철은 무섭게 쏘아보았다. 노승은 성철의 눈길을 피해 천장을 바라보았다.
“네 이놈, 무엇이 깨침이란 말이냐!”
성철이 주장자를 들어 노승을 내리쳤다. 노승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매를 맞았다. 평생 마음을 닦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참이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매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부처님을 섬기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서럽고 아픈 것이었다. 이를 듣고 있는 절 식구들도 함께 아팠다.
성철의 매질이 멈추고 노승은 성철 앞에 엎드렸다. 마른 어깨가 들썩였다. 그 울음이 처연했다. 성철은 다시 화두를 주었다.
“이 늙은 놈아, 다시 공부하겠는가?”
“예 스님.”
노승은 화두를 받았다. 다시 선방에서 목숨을 내놓고 정진해야 했다. 하지만 노루꼬리만큼 남은 생에서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저 생에서 다행히 사람 몸을 받는다면 다시 선방에 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또 불법을 만나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웠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가사를 입고 사람 몸을 잃음이 제일 원통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가사 속에 무간지옥이 있음이었다.
곱게 늙음은 그냥 상(相)이었다. 속인들은 풍파 없는 고요한 삶을 동경하며 구족색신(具足色身)을 좇지만 ‘금강경’은 상에 집착 말라고 일렀다. 득도한 사람에게는 육신에 반드시 변화가 생기지만 그것이 부처처럼 32상이 모두 뛰어남은 아니었다.
마음에 자신의 참모습이 나타나기까지는 자신의 내부에서는 얼마나 큰일들이 벌어지는가. 벼락이 내리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하가 울부짖는 거대한 혼돈이 지난 뒤에야 절대의 고요가 찾아왔다. 작디작은, 여리디여린 꽃도 그냥 피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꽃 한 송이가 아픔 없이 피겠는가. 꽃이 열리는 순간은 개벽이 아니겠는가. 그런 순간들이 모여 있어서 세상은 지속되는 것 아닌가.
노승은 바랑을 걸머지고 떠났다. 백련암 아래 가파른 길을 가만가만 밟았다. 가을 오후는 더없이 쓸쓸했다. 백련암 입구의 늙은 나무들도 조용히 굽어봤다. 절 식구 모두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철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는가. 일하지 않고.”
그렇다면 누가 성철로부터 인가를 받아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하는 사법전등(嗣法傳燈)의 제자가 되었는가. 성철에게서 인가를 받았다는 사람은 여럿 있다. 하지만 정작 성철은 자신이 누구에게 인가를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깨달음을 얻기란 지극히 어렵다. 마조 스님은 선종사에 선지식을 가장 많이 배출한 인물이다. 하지만 백장 스님의 법을 이은 황벽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마조대사 문하의 88명이 도량에 앉아 스승 노릇을 했지만 마조 스님의 바른 안목을 증득한 사람은 두세 사람뿐이다.”
대혜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문하에서 종사를 자처하고 법석을 연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대혜는 그들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불교는 지금 어떠한가. 성철은 생전에 이렇게 개탄했다.
“출가한 몸으로 부지런히 공부해 대각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스스로들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뼈를 깎는 노력과 수행으로 도를 성취한 도인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스님들 아니면 지옥 채울 사람이 없다고들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성철 ‘선문정로’)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5호 / 2016년 6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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