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3>

수선님 2023. 8. 13. 12:57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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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사상(般若思想)---반야 공(般若空)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을 말한다. ‘반야(般若)’란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것으로 '지혜'를 뜻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반야라고 할 때는 <반야경(般若經)>에서 강조하고 있는 공의 사상을 말한다.

대승불교 초기 경전인 <반야경>에서는 모든 존재의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하는 공사상이 반복돼 나타나며, 이러한 공사상은 용수(龍樹, 150~250)에 의해 철학적으로 체계화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가 됐다.

용수는 <중론송(中論頌)>에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를 공하다고 한다. 그것은 또한 가명이니, 이것이 중도의 의미이다(衆因綠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라고 해서 공이 유(有)와 무(無)의 중도(中道)임을 밝혔다. 즉, 모든 존재는 자성 없이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가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공으로써 유가 아님을 밝히고, 가명으로써 무가 아님을 밝힌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의미이다. 따라서 반야 공의 사상이란 모든 존재가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도 없고, 자기동일성도 없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가 도입되는 초기에는 반야 공의 사상을 둘러싸고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독창적인 해석을 했었는데, 이것은 유와 무의 중도로서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공을 무와 동일시한 것이다. 그러나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중론(中論)>이 한역된 이후 승조(僧肇)에 의해 공사상이 올바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승조는 격의불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비로소 공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펼쳐보였으며, 그의 사상은 삼론종(三論宗)의 전통으로 이어지게 됐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승려 승랑(僧朗)이 중국에 들어가 삼론종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의 삼론종은 승조가 밝힌 공사상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채 소승계통인 <성실론(成實論)>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승랑은 이러한 삼론종을 비판해 새로운 삼론종의 전통을 세웠기 때문에 그 이전을 고삼론(古三論), 그 이후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됐다. 이후 그의 삼론학은 승전(僧詮), 법랑(法朗)을 거쳐 수 ․ 당대에 길장(吉藏)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됐다.

단순히 ‘반야경’이라는 세 자로 된 이름의 경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며, 최초로 대승(大乘)을 선언한 경전으로서 대승불교의 선구이기는 하나, 이 명칭을 넣은 반야경 계동으로 한역(漢譯)된 경전만 해도 42종에 이르며, 다양한 산스크리트 원전과 티베트 번역본이 있다.

보살의 실천인 6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즉 완전한 지혜를 기본으로 한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보살의 수행은 특히 삼매(三昧) 상태를 목표로 삼으며, 혹은 그 상태에 들어가 일체(一切)의 것은 공(空)이라고 직관해야 한다는 것, 또는 삼매의 상태에서 완전한 지혜가 획득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아울러 경전 자체의 독송에 중점을 두는 동시에 경전 숭배를 권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반야바라밀’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지혜의 완성이며, 그 실제 내용은 공사상(空思想)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것은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구축한 실체적 사고를 강하게 비판하고 부정하는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의 실천을 떠맡는 주체는 대승의 보살이다. <반야경>들에 의하면, 반야바라밀은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중생의 구제를 서원(誓願)하는 보살의 수행덕목인 6바라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 진실한 지혜인 반야의 획득은 중생에 대한 무한하고 사심이 없는 자비심(慈悲心)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그뿐만 아니라 보살이 부처의 지고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결국 구제능력의 완성을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도 한다.

<반야경>들에 전개된 반야바라밀의 특징은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초기불교 이래의 공사상, 나아가서는 실천방법으로서 공관(空觀)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반야바라밀 사상은 여러 형태로 다른 대승경전에 계승돼, 직ㆍ간접적으로 반야바라밀에 관한 교의를 전개하고 있다.

반야경 계통에는 10종 이상의 경전군(群)으로 형성돼 있는데, 이러한 경전들은 적어도 600여년에 걸쳐 증광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8천송반야경 (八千頌般若經)>, <2만5천송반야경(二萬五千頌般若經)>, <10만송반야경(十萬頌般若經)>이 있고, 짧은 것으로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반야심경(般若心經)> 등이 있다. 중국의 현장(玄奘)이 이런 여러 계통의 반야경전들을 번역해 모아놓은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은 600권에 이르는 거대한 경전군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반야경전의 계통을 분류하는 데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보통 다음과 같은 12종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소품(小品) 계통에는 <8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 등 15종이 포함되며, 이중 유명한 2종은 현장 역(譯) <600권 대반야경>의 제4와 제5에 상당한다.

② 대품(大品) 계통에는 <2만5천송반야경>이나 현장 역 600권의 제2와 제3 등을 포함한 9종이 해당된다.

③ 산스크리트 본의 <10만송반야경>에는 약 4종이 있으며, 현장 역 600권의 제1에 상당한다.

④ <금강경>의 원래 명칭은 <금강반야경>으로 특히 선(禪)과 관계가 깊으며, 이에 상당하는 것으로 10종이 있고 현장 역 600권에서는 제9가 이에 포함된다.

⑤ <문수반야경>에는 7종이 있고, 현장 역 600권에서 제7에 해당한다.

⑥ <유수(濡首)반야경>에는 2종이 있고, 현장 역 600권에서 제8에 해당한다.

※유수(濡首)---문수사리는 'Manjusri'의 음역으로, 문수(文殊)란 묘(妙)의 뜻이고 사리란 머리(首), 덕(德), 길상(吉祥)의 뜻이므로 문수보살은 지혜가 뛰어난 공덕보살이다. 문수사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묘덕(妙德), 묘수(妙首), 보수(普首), 유수(濡首), 경수(卿首), 묘길상(妙吉祥)으로 불린다. 사람으로 말하면 머리에 해당되는데 부처님으로 말하면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대지(大智)문수사리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일시적인 권현(權現)으로 보살의 자리에 있으며, 그 이름을 들으면 사중죄(四重罪)가 없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유수는 문수의 다른 이름이다.

⑦ <승천왕(勝天王)반야경>에는 2종이 있고 현장 역 600권에서는 제6에 해당한다.

※승천왕(勝天王)---승천왕은 "발파라(鉢婆羅)"라는 천왕을 말한다. 그 '발파라'라고 하는 천왕이 부처님께 질문을 했는데, 부처님께서 '발파라' 천왕과 대화 중 그를 승천왕이라 칭하신 것이다. 발파라의 별칭이 됐다.

⑧ <이취경(理趣經)반야경>에는 9종이 있는데 밀교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반야경의 최후기 단계에 속하는 듯하며, 현장 역 600권에서는 제10에 해당한다.

※이취(理趣)---이취(理趣)는 반야 곧 진실지의 극치를 나타낸 말인데, 진실된 지혜는 욕, 촉, 애, 만 등과 같은 번뇌 속에도 예외 없이 잠재해 있어 번뇌 곧 보리의 이상을 나타낸 말이다. 즉 번뇌가 바로 보리라는 범성불이(凡聖不二)의 신념체계를 분명히 표현한 말이다.

⑨ 현장 역 <600권 대반야바라말다경>의 나머지 부분인 제11~16은 한 무리를 형성하지 않으나 3종이 있다.

⑩ <반야심경>의 원래 명칭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이며, 14종을 헤아리나 원전은 소본(小本)과 대본(大本)의 2종이 있다. 300자가 채 못 되는 현장 역으로 가장 널리 유포돼 있는 것은 소본에 속한다.

⑪ <인왕(仁王)반야경>에는 중국에서 작성된 2종이 속한다.

⑫ 기타 2종이 있다.

위의 분류에서 소품에 속하는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의 최초 부분이 반야경전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반야경전 대부분은 스스로 그것이 남방(南方)에서 기원한 것임을 천명하며, 또 그 대부분은 한결같이 상당히 유사한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대승불교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야경>은 부처 중심의 대승불교를 법(法) 중심의 종교로 되돌리는 역할을 했다. 즉,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도(道)를 고양하고 재가(在家)로부터 출가(出家)로 전환시켜 대승불교의 전문화를 초래했다.

*반야삼매(般若三昧)---반야삼매는 반야의 올바른 지혜에 머무르는 것으로 일체의 집착을 벗어나 올바르게 사물을 관찰하는 경지이다. 삼매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는 것이다.

<육조단경>에 “선지식이여 지혜로 관조하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서 자기 본심(本心)을 알게 되고, 본심을 알면 본래 해탈(解脫)됨을 알게 되나니 바로 반야삼매(般若三昧)요 곧 무념(無念)이니라. 무엇을 무념(無念)이라 하는가? 일체법(一切法)에 염착(染着)하지 않음이 바로 무념이니라.”라고 해서, 반야삼매가 곧 무녑(無念)이라고 했다.

또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法界]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경에서 분명히 찬탄했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라고 했다.

*반야 삼장(般若三藏, 748~810)---인도출신 승려로 당나라에 와서 <40화엄>을 번역했다. 795년 남인도 오다국(烏茶國) 사자왕이 친히 사경(寫經)해 보낸 범본을 그 이듬해부터 3년에 걸쳐(795년부터 798년) 장안(長安)의 승복사(勝福寺)에서 번역했다. 헌데 반야 삼장이 번역한 <40화엄>은 <화엄경> 완본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인 입법계풍(入法界品)만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이다. <반야심경>은 진정 오묘한 가르침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원명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고, ‘마하’는 크다는 뜻이며, 반야는 지혜, 바라밀다(波羅密多)는 완성, 도피안(到彼岸)이다.

여기서 심(心)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중심을 심장이라고 봤다. 그래서 ‘심’은 심장 또는 정수, 중심, 핵심을 뜻하는 말이므로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해석하면, “지혜로 저 언덕을 건너가는 부처님의 핵심적인 말씀”이다. 즉,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통상 ‘관세음보살’로 일컫는 경우가 많은데,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로 시작하고 있다. 그 숨은 의도는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여기서는 엄격한 ‘관자재보살’이 설하는 수행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경의 첫머리에 밝혀두려는 것이다. 즉, <반야심경>은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것이란 말이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은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대반야경> 6백 권의 중심사상을 한자 260자 16행으로 가장 짧게 함축시켜 서술한 것으로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며, 한국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하는 소중한 경전이다. <반야심경>의 주제는 5온, 12처, 18계, 4성제, 12연기이다. 5온, 12처, 18계(온.처.계)로 귀결되는 법문을 삼과법문(三科法門)이라고 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공(空)에 입각해서 불(不)과 무(無) 자(字)를 반복 사용해, 분별이 끊어지고 집착이 없는 지혜의 완성을 설한 경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중심 중심사상은 공(空)과 바라밀(波羅密)이다. 이 두개의 개념이 <반야심경>의 양대 축을 이룬다. 공은 비워라 하는 말이다. 왜 비워야 하느냐 오온개공(五蘊皆空)이기에, 모든 존재는 비어 있음으로 환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어 있는 가운데 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 바라밀은 육바라밀이다.

그리고 공(空)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해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나 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역본으로는 현장(玄奘) 번역의 것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현장 법사의 <반야심경>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현장 법사는 629년 천축국(天竺國-인도)을 향해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익주(益州) 공혜사(空惠寺)에 이르렀을 때, 한 병든 노스님을 만났는데, 그는 험난한 천축 길에 만나게 될 어려움을 일려주면서 “삼세제불의 심요법문(心要法門)이 여기 있으니 이것을 늘 기억해 외면 온갖 악귀를 물리치고 안전히 다녀올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 노스님이 가르쳐준 법문이 바로 범어로 된 <반야심경>이었다.

천축으로 가는 길은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으나 그때마다 이 <반야심경>을 독송함으로써 저절로 길이 열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리하여 현장이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천축국의 나란타사(Nālandā, 那爛陀寺)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그는 거기에서 자신에게 <반야심경>을 가르쳐준 그 병든 노스님을 만났다. 현장을 본 그 노스님은 흔연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삼세제불의 심요법문을 수지 독송한 덕이니라. 내가 바로 관음보살이다.” 그러고는 표연히 떠올라 하늘 높이 사라져버렸다.

그 뒤 현장 법사는 귀국하자마자 관음보살이 친히 교수한 <반야심경>을 번역해 유포했다. 600권 <대반야경>을 짧게 압축시킨 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심(心)’자는 핵심이라는 뜻이다.

<반야경>이란 해탈의 핵심인 멸성제(滅聖諦)를 보다 더 깊고 상세하게 설하신 것이다. 멸성제를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공(空)이다. 고집멸도 사성제(四聖諦)도 역시 인과(因果)를 말한다. 결국 <반야심경>은 본래 갖추고 있는 위대한 지혜에 이르는 열쇠[心: 핵심]를 설하고 있는 경전을 뜻한다. 반야심경에는 생략의 두 가지 표현이 있다.

첫째. 내지 (乃至), 안계 내지 의식계(무안계~무의식계)

둘째. 역부여시 (亦復如是), 또한 이와 같이.

그런데 <반야심경>에 대해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초기경전의 내용을 무력화시킨 경전이라는 혹평도 있다.

「“<반야심경>에 무(無)자와 불(不)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언표보다 부정적인 언표를 하는 것이 더 잘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 중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한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S56:11).”라는 문구를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법의 공상이라는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다는 것이다. 생멸은 오로지 현상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고, 공의 세계 진여의 세계에서는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대한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는 말을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역시 법의 공상이라는 것이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며, 더럽다든가 깨끗하다는 것은 오로지 현상계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법계(理法界)에서는 더럽지도 깨끗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을 공의 논리로 간단하게 부정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으로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부정했고, 이후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모두 공의 입장에서는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러다 보니 정견이 달라졌다. 정견이 달라지다 보니 목적지 또한 달라졌다. 서로 다른 길로 간 것이다.」 - 진흙속의연꽃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취지는 세속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열반적정)를 얻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수단’에 불과하다. 부처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뗏목을 타고서 강을 건너 저편 언덕에 도달했으면 뗏목에서 내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말씀’을 통해 세속에 대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궁극적으로는 ‘언어화된 가르침’에 대한 고착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해서 부처님 근본 가르침인 열반적정을 지향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요체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뗏목을 타고서 강의 저 언덕에 도달한 후에도 뗏목에 집착해 내리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부처님의 언어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 설명하고 체계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 대승불교 공사상이 등장해 아비달마불교를 부정한 것이다.

즉, 대승 반야계(般若系) 경전들이 출현해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아비달마불교를 질타했다. <반야심경>에서는 말한다. 오온, 육입(六入),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과 같은 ‘가르침의 뗏목’을 타고 피안의 세계, 공의 세계에 도달했으며, 빨리 뗏목에서 내리라는 재촉인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 경지인 피안의 세계, 즉 열반의 언덕에는 ‘언어화 된 가르침’조차 없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비롯한 반야계 경전에서는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法)조차 공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삼과, 삼과법문(三科, 三科法門) 참조.

*반야용선(般若龍船)---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망자는 아미타불이 기다리는 피안의 극락정토로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망자가 극락정토로 갈 때 타고 가는 배가 반야용선이다. 이때에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반야용선을 인도한다. 즉,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반야유지(般若流支, 가우타마 프라갸루치, 6세기)---중인도 바라나국 사람으로 바라문 종족이며 성은 구담(瞿曇)이다. 어려서 불법을 배워 경에 통달했다. 6세기 북위(北魏)에서 활약하면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유식론(唯識論)>,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 등 경ㆍ논 14부 85권을 번역했다.

*반야(般若)의 종류---'반야(般若)‘라고 하는 말은 빠알리어로는 판야(panna)라 하고, 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즈나(prajna)라고 하는데, 빠알리어 panna를 소리번역한 말이 반야이다. 뜻으로 번역하면 지혜(智慧)이고, 그 외에 명(明)ㆍ혜(慧)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야를 다만 지혜라고 하면 반야가 가진 바 의미를 제대로 다 나타내지 못하므로 원음 그대로 반야(般若)라고 한다.

그런데 한 마디로 지혜라고 해도 지혜에는 여러 가지 지혜가 있다. 원래 불교에서 우리들 범부의 지혜를 부처님 지혜와 구별해서, 다만 '식(識)'이라고 한다. 그 식이라는 것은 미혹된 지혜를 말함이다. 그것이 참다운 지혜는 아니다. 중생은 모든 도리를 참되게 분간하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망상에서 생겨나는 미혹, 괴로움, 번뇌가 생기는 법인데,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는 지혜이므로 식(識)이라 한다. 중생이 성불한다는 것은 미혹의 식(識)으로부터 참다운 지혜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즉, 미혹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중생이 안다고 하는 정도의 ‘식’, 얕은 지혜가 아니다. 미혹된 중생의 지혜가 아니라 깨달은 이의 지혜이다. 우주의 진리를 체득한 분의 지혜를 말한다. 반야의 지혜는 우리의 참 모습에 대한 눈뜸이다. 그리고 반야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기본적으로 2종 반야, 3종 반야, 5종 반야로 구분한다.

• 2종 반야 ― 반야에는 깊고 얕은 차별이 있어서 공반야(共般若)와 불공반야(不共般若)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공반야(共般若)는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의 삼승(三乘)을 위해 설한 반야의 법문으로, <반야경> 등의 여러 대승경전이 이에 속한다.

불공반야(不共般若)는 오직 일승(一乘)의 보살만을 위해 깊은 뜻의 반야를 설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말하는 최상승의 대승보살을 위한 반야가 그것이다. 따라서 <법화경>ㆍ<화엄경>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경전은 부처님의 지혜를 모두 표출한 경전이기 때문에 성문이나 연각은 완전하게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경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에서 함께 할 수 없는 불공(不共)이다.

• 이 외에 다섯 가지 반야(5종 반야)는 아래와 같다.

① 관조반야(觀照般若) ― 사물에는 고정된 모습이나 모양은 없고 공적(空寂)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관조(觀照)라는 것은 ‘비추어 본다’는 말인데, 수행을 하면서 조금씩 터득하는 반야이다.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있음을 법문이나 교학, 실제수행을 통해 조금씩 터득해 나가는 반야로서 부처와 보살과 중생이 각각 제 수준만큼의 지혜가 있다. 중생의 지혜는 탐ㆍ진ㆍ치 삼독에 묶여있는 지혜이고, 부처님 지혜는 ‘나다 너다’ 하는 일체분별을 여읜 자리, 허공과 같은 자리가 부처님 지혜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의 진실하고 절대적인 모습(實相) - 우주의 실상을 관조해 알아내는 지혜가 관조반야(觀照般若)이다.

즉, 관조반야는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청년이 오랜 수행 끝에 성취한 깨달음의 지혜가 바로 관조반야이다. 싯다르타는 어떤 신(神)과 같은 절대적 존재에게서 깨달음을 받은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다. 오직 현실(現實)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아 현실 세계의 모습을 여실히 깨달은 것이니 이 지혜를 관조반야라 한다. 따라서 관조반야의 진실한 지혜는 무념ㆍ무분별(無念無分別)이다. 그리고 관조반야란 언어문자로 분석해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경계이다.

② 실상반야(實相般若) ― 일체존재가 모두 공(空)임을 알고 모든 미망으로 부터 떠나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실상반야란 진리의 당체 - 공(空)을 이야기하는 건데,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고 스스로 취득해야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것은 모든 것의 본체(本體)이고 마음의 이체(理體)인데, 중생은 모든 것을 이 본체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자기생각, 망상, 아집에 덥혀서 이 실상반야가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이 세계는 나와 너, 혹은 ‘그’라는 사실들 - 즉, 색(色)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 연기(緣起)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세계에 대한 똑바른 깨달음이 실상반야이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이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세계, 우주와 하나가 돼버릴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이다. 이러한 실상반야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아 바르게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이다. 우리가 흔히 일체의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고, 법신(法身) 부처님이 두루 편만(遍滿)해 계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은 실상반야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반야는 일체 허망한 상을 여읜 우주의 본상(本相)이고, 실성(實性)이고, 우리가 증득해야 할 이체(理體)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우주 삼라만상의 참모습도 이 실상이었다. 그 참모습에 대한 깨달음이 실상반야이다. 사람들이 실상반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미 여러 가지 사고의 틀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얽매이고, 관습에 얽매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고, 언어문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관조반야는 정밀한 관찰을 통해 얻는 지혜라면, 실상반야는 직관에 해당한다.

③ 문자반야(文字般若) ― 문자는 반야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 본성은 공적임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문자나 말로 만들어낸 경ㆍ율ㆍ논 모든 내용들이 문자반야에 해당한다. 법문CD, 팔만대장경 같은 것들도 이에 포함된다.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經典)을 의미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한다.

문자로 말미암아 반야의 뜻을 전할 수 있으므로 문자반야라고 한다. 이러한 문자반야 즉, 경전이 없다면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많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불법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나침반과 같고, 뗏목과 같은 수단이다. 즉, 문자반야는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이다. 세계에 대한 지도와 같은 것이 문자반야이다. 우리는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가듯이 문자라는 지도를 통해 세계의 실상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위해 문자반야가 있다. 즉 반야에 이르는 중요한 방편이 되므로 문자반야를 방편반야(方便般若)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생각하셔서 열반에 드는 일은 뒤로 미루시고 깨달은 바를 전해주고자 하심에서 문자반야가 성립된 것이다. 중생을 위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유효한 수단이 언어문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문자는 반야를 나타내는 방편이 될지언정 결코 깨달음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한다. 문자는 반야 자체는 될 수는 없고, 단지 달 즉 실상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글을 읽고 책을 읽지만 문인이 되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문자반야가 없어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만하면 문장이 되고, 구절마다 아름답다. 이는 그가 문자반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이 사랑을 받는 것은 구마라습의 문자반야 때문이다. 그가 번역한 <금강경>과 <법화경>이 동양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그가 구사한 언어의 격조는 중국 문학사에서 독특한 장르, 즉 아름답고 감동적인 불교문학을 정초시켰다.

위의 세 가지 반야를 삼반야(三般若)라 한다. 이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 실상반야를 체득하기 위해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 무조건 수행만 한다고 해서 반야를 체득(體得)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부처님 경전을 읽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팔만대장경을 줄줄이 꿰어도 헛고생에 불과하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이다. 젊은 싯다르타가 깨달아 부처님이 되신 것도 바로 관조반야에 의해서이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이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 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해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야의 지혜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선입견, 편견, 고정된 관념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안목을 가져다준다.

※ 방편반야(方便般若) ― 도(道)를 가르치는 사람이 중생을 제도할 때 쓰는 방법이 방편이다. 즉, 각각의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가르쳐야 최단기간에 반야를 성취할 수 있는가 하고 그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방편반야이다. 수행승이 방편반야를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공부를 쉽고 올바르게 할 수 있지만, 공부를 안 하고 방편만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지 죽고 남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다른 사람이 금방 알아듣게 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혜가 돼야 방편반야라 할 수 있다. 우주의 본상(本相)을 체달한 실다운 지혜를 체(體)라 한다면 방편반야는 현상세계의 모든 차별법을 요달한 - 용적(用的)인 지혜라 할 수 있다.

④ 경계반야(境界般若) - 반야의 소연(所緣)이 되는 일체제법이 해당되는데, 대상 자체는 어떠한 특질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주관의 작용에 따라 그 대상의 의의가 나타날 뿐임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경계는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밖에 수도ㆍ수행을 하거나 독서를 할 때에도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다른 경계가 나타난다. 조금씩 문리가 터진다는 말이다. 예술가라면 그럴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도 조금씩 진전이 있을 때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것이 곧 경계이다. 마찬가지로 수도하는 사람에게도 수행이 어떤 경계에 이르면 인생의 경계도 그만큼 트이고 밝아진다.

보통사람의 경계는 번뇌 아니면 질병이다. 나이 들면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희어지는데, 이것이 살면서 겪는 고뇌의 경계이다. 옛 사람들이 “불법 공부는 대장부가 할 일로서 관료나 군인, 장사꾼이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왜? 대장부의 기백, 경계, 흉금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다른 경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실상반야로부터 온 것이다. 도체(道體)에서 나온 것으로 자연스럽게 온다. 따라서 진정으로 도를 깨달은 사람은 지혜가 무궁무진하게 개발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사지(無師智 - 스승의 가르침으로 얻는 지혜가 아님. 스스로 깨달은 지혜) 또는 자연지(自然智 - 본래부터 갖추어 있는 지혜)라고 한다. 자기 본래지혜 창고가 열려 다른 사람에게 배운 적이 없는 자기 고유의 지혜가 폭발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경계반야이다. 경계반야의 지혜를 가지게 되면 삼천대천세계 안의 일어나고 소멸하는 모든 사체(事體)들을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육조 혜능(慧能) 선사는 경계반야가 뛰어났던 것 같다.

⑤ 권속반야(眷屬般若) ― 권속반야란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 등의 모든 지혜나,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 등을 말하는데, 이들은 일체존재들을 관조하는 관조반야(觀照般若)의 지혜인 동시에 혜성(慧性)의 권속이므로 권속반야라 한다. 그리고 반야지혜는 이러한 모든 것이 종합된 지혜이다. 반야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여러 조건들이 있는데, 중생들의 반야는 탐욕에 묶여있어 참된 반야가 아니다. 그래서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행하는 수행이 권속반야이다.

그리고 계율을 잘 지켜 올바르게 사물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인욕, 정진, 선정 등 6바라밀행, 8정도 수행, 염불, 참선 등이 권속반야에 해당한다. 보살이 수행을 함에 있어서 권속반야가 매우 중요하다. 근본지를 드러내는 데는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사람마다 근기에 따라 수행방법을 선택할 일이다. 권속반야는 깨달음의 지혜에 수반되는 반야지혜로서 다른 말로 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수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도덕심으로 인해 모든 언행이 모두 선하고, 도덕적인 언행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야이취경(般若理趣經)--- 7~8세기에 성립한 밀교계통의 반야경이다. 특히 밀교의 진언종(眞言宗)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이다. 경전의 내용은 탐심도 본래 청정하다고 했으며, 욕망조차 그대로 절대적 세계(진여)에 뒷받침된 진실이라고 말해, 불교에서 금기시하는 욕망이라든가 탐욕심에 대해 긍정적인 특이한 해석을 내리는 등 적극적인 현실긍정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일체 욕망까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성욕(性慾)조차도 청정한 보살위(菩薩位)라고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적 존재인 우리들과 최고 진실로서의 부처님과 일치융합을 양성(兩性)의 교섭에서 생겨나는 열락(悅樂)에다 비유하고, 불범일체(佛凡一體)의 불이(不二) 경지라 해서 대락(大樂) 또는 적열(適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경에는 ‘백자게(百字偈)’가 나오는데 글자 그대로 백 개의 글자로 경전 전체내용을 담고 있는 게송이다. 이 백자게는 법요식 등에서 시간을 줄이기 위해 독송한다. 여러 이역본이 있으나 당나라시대 인도출신 불공삼장(不空三藏, 704∼774)의 번역본을 주로 독송한다.

경전의 대의는 <이취경(理趣經)>이라는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일여래가 금강살타(金剛薩陀)를 위해 반야이취(般若理趣-반야의 도리)의 입장에서 일체제법은 본래부터 자성청정(自性淸淨)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불국토(佛國土)를 세울 것과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취(理趣, 산스크리트어 나야/naya)---이 경의 핵심 단어이다. 이취는 산스크리트어 나야(娜耶; naya)를 의역한 것으로, 도(道) 혹은 승(乘)의 의미로서 선근(善根)으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수행단계에서 수행자의 타는(乘) 바 법(法)과 행하는 바 도(道)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결국 진의(眞義), 정확한 의미, 진리, 도리(道理)란 말이다.

*반야지(般若智, 산스크리트어 Prajna)---반야지는 일명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하는데, 반야지(般若智)사상은 공(空)사상, 중도(中道)사상과 더불어 중관(中觀)사상을 구성하는 3대 사변(思辨)이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지혜, 곧 ‘공(空)’임을 보는 지혜이다. 계율로 닦아 깨끗해진 사람이 선정에 의해 최고경지에 이른 지혜가 반야지로서, 다른 지혜와 구별된다. 이 반야지는 곧 해탈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반야지를 ‘각(覺)’이나 ‘오(悟)’라고도 한다. 그래서 반야지는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고, “깨달음” 그 자체를 말한다.

반야지는 예술을 느끼는 감성이나 자비심과 같은 감성작용에 가까운데, 마음이 순수할 때 자비심이 발현될 수 있듯이, 순수한 마음상태에서 반야지 발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와 같이 반야지는 만들어지는 인간지혜가 아니고, 인간마음 내면에 존재하는 본유(本有)의 순수감성에 가깝다.

반야지는 초분별지(超分別智)와 같은 탁월한 이성(理性) 지(智)의 성격이 아니고, 감성이라고 봐야 하는 까닭은, 인간감성이 분별력보다는 마음의 근원에 더 가깝기 때문이고, 자비심과 같은 것도 분별력이 아닌 인간의 감성작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비교, 분석, 추리, 판단과 같은 분별작용에 의한 사물의 존재양태에 대한 이해라고 한다면, 감성은 분별에 존재하지 않은 사물에 대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불쌍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줬다고 할 경우에, 그 주는 것은 감성작용이지만 그것이 착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별력(分別力)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어떤 선율이 흐르고 있을 때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분별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감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이 그 선율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변별력에 의존함이 없이 직관(直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물의 진정한 존재양태는 인간의 분별력이 배제된 감성력에 의존해 직관되는 것이고, 반야지는 대상을 이해하는 일종의 심적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야지는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고, “깨달음” 그 자체이며, 어떤 지혜를 갖춘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반야지는 곧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야행(般若行)---지혜의 실천. “어느 때나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반야행이다.” 그리고 “내적으로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라는 오둔사(五鈍使) ― 다섯 가지 장애에 의한 혼란을 없애고, 밖으로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여실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육조 혜능(慧能) 선사의 가르침이다.

*반얀(banyan)나무(榕樹)---상록교목으로 인도가 원산지이며 녹음수로 주로 심는데, 높이가 30m까지 자라고, 둘레가 16m에 달해 큰 나무는 가지와 잎이 퍼진 부분의 둘레가 400m나 되는 것도 있다. 나무껍질은 잿빛을 띤 흰색이고 어린 가지에 털이 있다. 해를 상당히 좋아하는 식물로 인도에서는 지혜와 장수, 고요를 의미하는 성스런 나무라고 믿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다.

불교 경전 속에서는 반얀나무가 엄청난 크기에 비해 아주 작은 씨를 맺는다는 점을 들어 아주 작은 보시라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큰 과보를 받는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과거칠불 가운데 여섯 번째 부처인 가섭불의 보리수가 반얀나무 즉 니구율수인 점을 봐도 이 나무가 매우 신령스러운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이 나무 아래로 옮겨 앉아 칠일동안 명상을 하셨다고 한다.

일명 니그로다(Nigrodha), 니구다나무(尼拘陀樹), 니구율(尼拘律)나무, 니구율타(尼拘律陀)나무 라고도 한다.

*반연(攀緣, 산스크리트어 alambana)---반연이란 말은 일반사회에선 잘 쓰지 않으나 불경엔 자주 나오는 말이다.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란 의미이니, 마음이 대상에 의지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인데, 번뇌 망상의 시초이며 근본이란 말이다. 따라서 번뇌란 의미로도 쓰이고, 인식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아래와 같이 쓰임에 따른 여러 뜻이 있다.

• 얽힌 인연. 인연에 얽매임.

※“아난다여, 괴로움은 연기된 것[연이생(緣而生)]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무엇을 반연하여 [괴로움이] 있는가? 감각접촉을 반연한다.”

※“비 구들이여,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만남이 감각접촉이다.”

• 휘어잡고 의지해서 기어 올라감 → 마음이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칡넝쿨이 다른 나무줄기가 없으면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칡, 호박, 나팔꽃, 수세미, 오이, 등나무와 같이 다른 나무줄기를 휘감고 올라가는 식물을 반연식물(攀緣植物)이라 한다. 이런 경우에 반연이란 대경(對境)에 의지해야 일어난다는 말이다. 원인을 도와서 결과를 맺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 정상적인 인연이 아니라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인연. 흔히 “발목 잡히다”라는 말에 해당한다.

•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경계를 대했을 때 작용하고 그 모습을 취하는 것.

• 도 닦는 것을 방해하는 얽히고설킨 복잡하고 쓸데없는 인연들.

• 집착의 대상이 되는 인연경계. 그래서 반연은 일체 번뇌 망상의 시초이며 근본이다. 그래서 번뇌란 뜻으로 쓰인다.

• 불교에서는 사물을 아는 것, 즉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반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반연된 인식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하며, 반연하는 인식작용을 능연(能緣)이라 한다. 그래서 근본지(根本智)를 진리에 계합해 능연과 소연의 차별이 없는 절대의 참 지혜라고 한다.

※달마(達摩) 스님이 2조(二祖) 혜가(慧可)에게 처음으로 가르치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다.---여기서는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옛 성인도 명명백백히 말씀하시길, “비유하자면 파리가 어느 곳이나 다 앉을 수는 있지만 불꽃 위에는 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마찬가지이니 온갖 곳에 반연(攀緣)할 수 있지만 오직 반야 위에서만 반연할 수 없다.”고 하셨다.

*반열반(槃涅槃, 산스크리트어 parinirvana)---열반은 니르바나(nirvaana)의 음역이다. 그런데 반열반은 파리니르바나(parinirvaana)라 한다. ‘파리(pari, 般)’는 완전이란 뜻이다. 따라서 반열반은 완전한 열반이란 뜻이 되며, 오직 부처님의 열반(죽음)만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원적(圓寂)이라 번역하며, 구경열반(究竟涅槃) 혹은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쓸 경우, 보살 이하의 죽음은 그냥 ‘열반’이라고만 한다.

따라서 반열반은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완전히 없애버려 깨달음인 지혜, 즉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생사(迷의 世界)를 넘어선 각(覺)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열반에 대한 대승과 소승의 해석 차이가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번뇌를 다 없이 한 상태'라하고, 이것을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나누는데, 유여열반(有餘涅槃)은 번뇌는 다 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있는 경우이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은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한편 대승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상(常) · 낙(樂) · 아(我) · 정(淨)'의 사덕(四德)을 갖추지 못한 소승의 열반을 유위열반(有爲涅槃)이라 하고, 사덕(四德)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칭하며, 이것을 최상이라 하고 있다. 또한 지혜에 의해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의었으므로(離), 생사(迷의 世界)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대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며 열반의 경지에도 또한 체(滯)하지 않는 것을,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하며, 이는 대승불교의 열반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반자밀제(般刺密帝)---중인도 출신 승려. 반랄밀제(般剌蜜帝)라고도 한다. <수능엄경(首楞嚴經)>이 인도의 나란타사에 숨겨져 있어서 당(唐) 이전까지는 중국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당나라 4대 중종 때인 705년경 반자밀제(般刺密帝)에 의해 중국에 전래돼 반자밀체가 방융(房融)과 함께 한역했다고 한다.---→능엄경(楞嚴經) 참조.

*반조(返照)의 지혜(빠알리어 paccavekkhanā ñāṇa)---밖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키는 것을 ‘반조(返照)’라고 한다. 자기의 본원(本源)을 비추어 생각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경계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정신을 되돌려 자성본원 곧 자기의 본래면목을 되찾는 것을 비유함에 쓰이는 말이다. 밖으로 향한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내 마음을 내가 바로 잡는 것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반조(返照)의 지혜’라고 하고, 그래서 인간은 위대한 것이다.

부질없는 재산과 명예와 권세, 이를 실현하려고 밖으로 달려가는 마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바로 잡는다. 이를 위해서는 반조(返照)가 답이다. 반조를 통해야 자기를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경에 말하기를, “말 장수는 말을 다루고, 활 장수는 화살을 잘 다루고, 목수는 나무를 다루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다룬다. 애욕의 물결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욕정의 덩굴은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그것을 알았으면 지혜의 칼로 그 뿌리를 도려내라!” 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반조(返照)의 노력도 없이 ‘내가 곧 부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반조란 외적인 상(相)과 색(色)에 휘둘리지 않고 빛을 돌이켜 비추어[회광(廻光)] 자기 자신의 본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며 자신의 본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닫는 일이라고[廻光返照] 하셨다.

*반주삼매(般舟三昧, 산스크리트어 pratyutpanna)---반주(般舟)는 산스크리트어 pratyutpanna의 음사로서, "대하여 가까이 서다"라는 뜻이니, 부처를 세운다는 뜻인데[불립(佛立)], 관불삼매(觀佛三昧)의 하나로서 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도 한다. 삼매를 통해 내 마음 속에 부처님을 세움으로써 부처님이 앞에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즉, 부처님을 마음에 떠올리고 삼매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수행자 앞에 현전(現前)하는 것이다.

당시에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법이 불탑 앞에서 행해진 것이다. 불탑예배와 관련해 개발된 삼매로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설해져 있다. 7일 또는 90일을 기한으로 해서, 계율을 지키고 도량이나 불상의 주위를 돌면서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부처님을 마음에 떠올리고 삼매에 들어가면, 불타가 수행자 앞에 현전(現前)한다.

일종의 염불삼매로서 염불을 통해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부처님을 보게 된다. 반주삼매란 현재의 붓다가 눈앞에 현전하는 삼매를 말한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붓다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관상(觀想)한다는 점에서, 불수념(佛隨念)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명상 방법은 광범위한 불교 문헌들에서 확인된다. <숫따니빠따>의 <빠라야나왁가(Pārāyaṇavagga)>에서는 불수념의 초기 형태가 발견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만 바와리(Bāvarī)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구하기 위해 그의 제자 16명을 붓다에게 보낸다. 그들은 붓다를 만나 16가지 질문을 하고, 붓다에게서 만족스러운 답을 듣는다. 이에 바와리의 제자들은 아라한이 돼 붓다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이 때, 삥기야(Piṇgiya)라는 나이든 제자 한 명만이 아라한이 되지 못한 채 바와리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러 돌아오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들은 바와리는 삥기야에게 왜 그토록 훌륭한 스승인 붓다의 곁에 머물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에 대해 삥기야는 다음과 같은 답을 한다.

브라만이여, 저는 한 순간도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고타마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낮과 밤 동안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분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으로 봅니다. 밤에도 마음으로 그를 숭배하기 때문에, 나는 그분과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삥기야의 대답에서, 명상에 대한 구체적인 용어나 방법이 언급되진 않는다. 하지만,

① 밤과 낮 동안의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② 마음속에서 붓다를 친견하고,

③ 그것을 실제 붓다라고 인식해 숭배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후 반주삼매와 같이 정형화 된 불수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붓다를 친견할 수 없는 삥기야가 처한 상황은, 역사상의 붓다가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스승을 친견할 수 없게 된 후대 불교도들의 상황과 유사하다. 반주삼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불수념 수행이 초기경전에서부터 확인된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러 방법론적으로 보다 구체화됐으며, 사상적으로도 공사상과 관련해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 실론섬 ---→불수념(佛隨念),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참조.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반주삼매경>은 기원 전후로 한 AD 1세기 무렵에 조성된 초기 대승경전으로서 후한(後漢) 시대인 AD 197년에 대월지국(大月支國-쿠샨왕조) 출신의 학승 지루가참(支婁迦讖)이 한역했다. 반주(般舟)는 "대하여 가까이 서다"라는 뜻이니, 반주삼매는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는[현전(現前)] 모습을 볼 수 있는 삼매이다. 전체 내용은 16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토사상의 선구적 불경으로서, 반주삼매로써 부처를 보는 법을 설한 경으로, 이 경의 번역으로 중국에 처음으로 아미타불이 알려지게 됐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 수행자는 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을 하루 종일 나아가 일주일 내내 관하는 관법을 상세히 배우게 된다. 그 이후 수행자는 삼매 속에서 아미타불의 영상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해 아직 듣지 못했던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지혜와 실천을 강조한 초기 대승경전이다.---→반주삼매(般舟三昧) 참조.

*반타카(槃陀迦)---→주리반타카(周梨槃陀迦, 주다판타카/Cudapanthaka) 참조.

*발가바(Bhargava)---부처님은 출가한 후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ājagṛha) 근교로 가서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최초로 만난 사람들이 요가 수행자들인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였다.

먼저 알라라 칼라마라 선인을 만났는데, 그에게 명상(선정) 지도를 받아 얼마 가지 않아서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해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경지를 배웠으나, 부처님은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가르침을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고행주의자를 찾아갔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해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의 고행림(苦行林)에 들어가 고행외도(苦行外道) 스승인 발가바(Bhargava)에게 지도를 받으며 가지가지 심각한 고행을 했다. 부처님은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 호흡을 중지하는 고행, 단식에 의한 고행 등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뼈와 가죽만 남았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피부는 검게 말라버려 마치 해골처럼 됐다. 간다라미술 조각품에 있는 유명한 ‘붓다 고행상’은 그 당시 부처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고행을 다했지만 이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란자라 강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우루벨라 촌장의 딸 수자타(Sujata)가 바친 유미죽을 먹고 몸과 마음을 회복한 후, 이윽고 보리수 밑에서 스스로 선정에 들어 정각을 얻어 불타가 됐다. 따라서 선정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선정이 지혜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임은 분명하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은 것 역시 선정의 상태에서였다.

*발고여락(拔苦與樂)---이고득락(離苦得樂)이란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발고여락은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고 낙을 주는 자비(慈悲)을 말한다. 발고는 비(悲)의 덕, 여락은 자(慈)의 덕이다. 괴로움을 완전히 뽑아버려 중생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시는 부처님의 작용,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구체적 실천을 말하며, 중생 개개인에게는 열반이 실현됨을 말한다.

다음은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런 수레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자식들이 앞 다투어 서로 밀고 뛰쳐나오니, 곧 불타는 집을 빠져나와 넓은 빈터에 이르니, 그 무서운 큰 화재를 무사하게 면하게 됐다. 그리하여 장자는 자식들이 불타는 집 빠져나와 네거리에 앉은 것을 사자좌서 굽어보고 흐뭇해서 하는 말이,

“나는 이제 즐겁도다. 나의 여러 자식들은 기르기도 어려우니, 어린 것들이 소견이 없어 위험한 집 들었구나, 독한 벌레 득실거려 도깨비도 무서운데 맹렬하게 타는 불길 사방에서 일건마는 철모르는 자식들이 놀기에만 빠진 것을 내가 이제 구해서 재난에서 벗어나니, 그러므로 사람들아 내 마음이 즐겁도다.”

그때 여러 자식들은 편안하게 앉아있는 아버지께 나아가서 바라보고 하는 말이,

“세 가지의 보배수레 우리에게 주옵소서. 조금 전에 하신 말씀 저희들이 나오면 세 가지의 좋은 수레 주신다고 하셨으니 지금 바로 그때이니 나누어 주옵소서.”한다.」

이 일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괴로움을 없이 하는 발고(拔苦)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까지 주는 여락(與樂)에 미치고 있음을 설하는 것이다. 우리의 괴로움을 없이 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근본인 미혹을 제거하는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현세안은(現世安隱)의 즐거움, 곧 현법열반(現法涅槃)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고여락은 불교의 목적이자 목표이며, 열반의 실현을 말하고 있다.

*발기중(發起衆)---<법화경>에서 교(敎)를 듣는 사람의 근기나 수준에 따라 넷으로 나누어서 사중(四衆)이라고 하는데, 즉 ①발기중(發起衆), ②영향중(影響衆), ③당기중(當機衆), ④결연중(結緣衆)이다.

이 중 발기중은 부처님께서 교(敎)를 설하실 기회를 만드는 무리이다. 부처님이라도 설하실 기회가 없으면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사중(四衆) 참조.

*발길제(鉢吉帝, 산스크리트어 Prakrti)---<능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인도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백정(白丁)의 남자를 마등가(摩登伽 Matanga)라 하고, 여자는 마등기(麻登祇)라 했다. 그들 가운데서 ‘발길제’라는 여인이 있어, 아난 존자를 보고 부정한 마음을 일으켜 요사스러운 주술로서 아난을 유인해 자기 방에 붙잡아 두었다. 그때 문수보살이 신주(神呪 - 진언)로써 아난을 구해냈다고 한다. 그 여인은 마침내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머리를 깎고 출가한 후 곧 깨쳐 아라한이 됐다고 한다.---→마등가(魔登迦, 산스크리트어 mātanga) 참조.

*발난타(跋難陀, Upananda)---8대 용왕(八代龍王)의 하나. 난타(難陀, Nanda)와 발난타는 형제간으로 다 용왕이다. 함께 마가다국을 지키며, 적당한 시기에 비를 내려 백성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발로참회(發露懺悔)---숨김없이 낱낱이 모두 드러내 참회하는 것. 여러 가지 행법

중에 관세음보살을 본존(本尊)으로 삼아 과거의 죄장을 발로참회(發露懺悔)하는 것

이 관음참회이다.

*발보리심(發菩提心)---줄여서 발심(發心)이라 한다.---→발심(發心) 참조.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밀교 제6대조로서 혜초(慧超)의 스승이기도 한 불공삼장(不空三藏, 705~774)이 번역했다.

*발심(發心)---일반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음을 말한다. 요즘 말로는 동기부여와 비슷하고, 유학에서 입지(立志)와 비슷한 뜻이다. 불교에서는 발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발심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약칭으로서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즉, 불도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등의 뜻이다. 원효(元曉) 대사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지어 특별히 수행에 있어서 발심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발보리심이란 곧 부처님의 삶을 살겠다는 말이다. 부처님 사는 곳에서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말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3가지 발심을 설했으니, 곧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이다. 신성취발심이란 처음으로 확고하게 믿음을 일으키고 보리심을 내는 것이며, 이렇게 발심한 사람은 부정취(不定聚)에서 반드시 성불이 결정된 정정취(正定聚)로 바뀌고 진정한 불자(佛子)가 되는 것이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믿음을 확고하게 성취한 불자가 육바라밀을 닦아 용맹 정진하는 것이다. 증발심(證發心)이란 진여법(眞如法)과 유심(唯心)을 깨닫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발보리심이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각 단계마다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불교에서 발심(發心)이 유학에서 입지(立志)와 비슷한 말이다.

*발심공덕(發心功德)---"발심공덕은 설하기 어렵고[難說], 알기 어렵고[難知], 분별하기 어렵고 [難分別],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難信解], 증득하기 어렵고[難證], 행하기 어렵고[難行], 통달하기 어렵고[難通達], 생각하기 어렵고[難思惟], 헤아리기 어렵고[難度量], 들어가기 어렵다.[難趣入]."

모든 불보살의 열 가지 큰 은혜 중 첫째는 발심보피은(發心普被恩)이다. 위와 같이 <화엄경>에 등장하는 ‘법혜’보살은 발심공덕의 수승함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그 공덕이 무량해서 그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한다. 바른 깨달음은 바로 발심하는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발심보피은(發心普被恩)---깨달으려는 마음을 크게(널리)일으키게 해주는(입히는) 은혜를 말한다. 발심(發心)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로서 보리(菩提)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지극한 구도심을 말하는데, 보피(普被)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쓸모 있고 값있는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발심(發心)이 어떤 개인이나 종족 또는 국가에 한하지 않고 남녀노소 국가나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원효(元曉) 대사가 출가 수행자를 위해 지은 발심(發心)에 관한 글. 불교 전문 강원의 사미과(沙彌科) 교과목 중 하나이며, 처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한 자들은 반드시 읽고 닦아야 할 입문서이기도 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부제불제불 장엄적멸궁 어다겁해 사욕고행)

무릇 모든 부처님들께서 적멸궁(寂滅宮)을 장엄하신 것은 많은 겁해(劫海) 동안 탐욕을 버리고 고행을 하신 까닭이며,

※적멸궁(寂滅宮)은 열반의 궁전이라는 말이다. 적멸(寂滅, nirvāna)은 불이 꺼지듯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해 평온하게 된 상태이다. 궁(宮)은 법왕인 부처님이 거주하는 궁전이라는 의미이다.

※겁(劫, kalpa)은 일반적인 시간의 단위로 잴 수 없을 만큼 매우 길고 긴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겁해(劫海)라고 해(海)를 붙인 것은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欲不捨. (중생중생 윤회화댁문 어무량세 탐욕불사)

일체의 모든 중생들이 불타는 집 속을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월 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택문(火宅門)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이다. 중생이 삼계(三界) 가운데 거주하면서 미혹의 괴로움을 받고 있으나 몸이 괴로움 가운데에 있는 줄 알지 못하는 것을 집이 불타는 것에 비유했다.

無防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무방천당소왕지자 삼독번뇌 위자가재) 천당(天堂)에 이르는 길을 막아 놓음이 없는데도 이곳에 이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탐ㆍ진ㆍ치) 번뇌로써 자신의 집에 재물(재화)로 삼았기 때문이다.

無誘惡道 多往入者 四蛇五欲 爲妄心寶

(무유악도 다왕입자 사사오욕 위망심보)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악도(惡道)에 드는 자가 많은 것은 네 가지 뱀과 오욕(五欲)으로 망녕되이 마음에 보배를 삼기 때문이다.

※사사(四蛇)는 네 마리의 뱀인데, 여기에서는 사대(四大)를 의미한다. 즉 물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를 네 마리의 뱀에 비유한 것이다.

※오욕(五欲, pañca-kāmāh)은 중생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허망한 다섯 가지 욕심(財·色·食·名·睡)을 말한다. 또 오근(五根)의 대상이 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오경(五境)을 의미한다. 이 오경은 욕구의 대상이고 욕구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이 다섯 가지가 모든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이므로 오욕이라 한다.

人誰不欲 歸山修道 而爲不進 愛欲所纏

(인수불욕 귀산수도 이위불진 애욕소전)

[어느] 사람이 누가 산에 돌아가 도(道)12)를 닦고자 하지 않으랴마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然而不歸 山藪修心 隨自身力 不捨善行

(연이불귀 산수수심 수자신력 불사선행)

그러나 산 수풀에 돌아가 마음을 닦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힘을 따라서 선행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참조.

*발우(鉢盂, 산스크리트어 pātra)---산스크리트어 ‘파트라(pātra)’의 음사인 발다라(鉢多羅)의 준말로서 승려들이 공양(식사)할 때 사용하는 식기를 이르는 말인데, 바리때라고도 한다. 보통 네 가지로 이루어지며 발우는 보통 나무를 깎아 만든다.

공양을 할 때, 가장 큰 어시발우에는 밥을 담고, 그 다음 국 발우에는 국을, 청수 발우에는 청수라고 불리는 물을 담으며, 찬 발우에는 반찬 류를 담는다. 네 그릇의 크기가 일정하게 줄어들어서 가장 큰 어시발우 안에 국 발우, 청수 발우, 찬 발우 순으로 넣은 것을 보자기에 싸서 보관한다. 그런데 어시발우를 불발우, 국 발우를 보살발우, 청수 발우를 보시발우, 찬발우를 연각발우라고도 한다.

육조 혜능(慧能) 선사 이전에는 조사(祖師)가 자기가 쓰던 발우와 가사(袈裟)를 물려주는 것으로 법통의 전승(傳承)을 암시했다고 한다.

고대 인도에서 출가자는 어떤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먹거리를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가호호 방문해, 전적으로 걸식에 의지하게 했다. 이는 무소유를 생활원칙으로 가장 단순한 생활태도로 아집과 아만을 버리게 하는 수행법 중 하나였다. 이러한 정신을 계승해 불교교단은 현재까지도 출가자의 필수품인 발우의 사용을 허락하고 있다.

현재 남방불교에서는 한 개의 발우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네 개가 한 벌인 사합(四合)발우를 사용한다. 발우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더러운 손으로 잡아서는 안 되고, 남의 발우를 빌려 쓰면 안 되며, 주머니 속에 발우를 넣고 지팡이 끝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다니면 안 되며, 씻어낸 물을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되는 등 소소한 계율들까지 율장에 정해놓고 있다. 오늘날 위와 같은 걸식행위는 없어졌지만 발우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발우는 수행에 필요한 적당량의 음식을 담는 그릇이며, 세속생활과 같은 번잡함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爲令修行者降低物質欲望, 竝避免世俗生活之紛華騷動). 때론 그 이외 애전엔 전승법맥(傳承法脈)과 같은 의미도 있었지만 공양(식사)에 있어서 응당한 양이라는 점(應腹分量而食之食器)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수행에 진전이 있으려면 혹시 세속처럼 좋은 것만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두루두루 자주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발우의 본래 의미를 잊어버리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집착이 될 것이다.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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